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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노트/불교 해석'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3.02.09 간략하게 쓴 mindfulness 의의
  2. 2023.02.07 명상 2. mindfulness의 의의
  3. 2014.03.03 위빠사나 명상 : 재정리
  4. 2012.05.01 초월적 가치 : 불교의 경우 2
  5. 2012.03.23 불교 해석 노트 전체

나이들면
재미있는 것이 없어진다.
새로운 학습능력이 떨어지며
옹고집이 생긴다.
세월이 빠르게 흐르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이럴 때 명상이 필요하다.

나이 들면 그간의 경험으로 신경망의 학습이 완료된다.
학습이란 함께 발화하는 뉴런의 연결이 강화되는 것이다.
마치 썰매가 눈에 길을 내 놓으면 점점 더 그 길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듯이 습관은 습관이라서 행하고 -> 행해서 다시 습관이 강화된다. 학습된 신경망은 썰매가 눈길에 난 썰매길을 따라 흘러가듯이 강화된 경로로 진행되며 이는 다시 가중치를 강화한다.
뇌가 무의식의 썰매길을 습관 우울 강박 중독 불안 분노 등으로 한번 잘못 내놓으면 나도 모르게 휩쓸려가서 벗어나질 못하게 된다.
뇌는 학습을 위해 도파민을 분비하는데 새로운 게 없고 늘 같은 패턴으로 신경망 학습이 완료되면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아서 만사가 재미가 없다.
학습이 고정되어 새로운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고집이 세지며
의식적인 영역보다 무의식적으로 자동으로 처리되는 영역이 늘어남에 따라 세월이 빠르게 흐르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즉 늙은 뇌가 된다.

마약 LSD는 신경망의 학습을 초기화 시킴으로써 모든 것이 새롭고 도파민이 폭발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마약으로 인한 도파민 과분비는 수용체 수를 줄이고 마약 없을 때 무기력하게 만들어서 폐인으로 직행 시키지만, 적정량을 사용하면 잘못 난 썰매길 대신 다른 곳으로 길을 낼 수 있는 효과가 있어서 정신과 치료에 유용한 가능성이 연구중이라고 한다.
마약이란 인체 내부에서 사용하는 신호를 모방하여 섬세하게 조절 못하고 과하게 때려 넣어서 효과를 내다 보니 부작용을 낸다. 명상은 LSD의 효과를 내재적으로 정상 운용하는 효과를 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바디빌딩과 스테로이드의 관계 같은 것이겠지.

명상은 이렇게 한다.
호흡처럼 태어난 후 익혀서 무의식적으로 자동으로 할 수 있게된 행위를 하나 고른다. 호흡, 걸음마, 말, 씹어먹기등.
제일 먼저 배운 호흡부터 해보자.
판자를 톱질할 때 톱날과 판자가 만나는 지점에 주의를 집중하듯이 호흡이 지나는 한 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가 집중력이 다해서 잡념이 일어나 마음이 다른 생각으로 빠져나가면 이를 알아차리고 다시 주의를 호흡으로 되돌리는 훈련이다. 즉 뇌가 자동 모드로 진입하여 이미 난 썰매길을 따라 미끄러져 갈 때 브레이크를 잡는 훈련이다. 브레이크를 잡고 나면 길을 다른 곳으로 바꿔 학습할 수 있게 된다.
화 날때나 충동이 들 때 30초간 심호흡하고 다시 생각하여 행동을 바꾸는 것과 원리는 같다.

호흡(, 걸음, 단어, 먹기) = 배워 익혀서 자동화도 가능한 활동
잡념 = DMN 활성화와 함께 자동화 모드
알아차림 = 자동화 진입의 순간을 포착. 처음엔 멀리간 다음에나 포착하지만 점점 빨리 진입 순간을 포착가능.
호흡으로 되돌아옴 = 자동화 진입의 순간을 포착하여 브레이크 걸어서 자동으로 진행되는 경로를 수정 가능하게 하는 것

젊은 사람의 뇌와 나이든 사람의 뇌, 명상을 오래 한 스님들의 뇌를 촬영한 결과 회백질의 양은 나이들수록 감소하는데 명상을 하면 젊은 뇌를 유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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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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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fulness의 방법을 정리하고 의의에 대해 생각한 바를 적어봤다.

mindfulness 명상은 자애(감사)명상 집중명상 통찰명상 순으로 진행한다.
자애 명상은 앞서 적은 명상 1로 정리하고
중심 줄기가 되는 집중 명상부터 설명하면
판자를 톱질할 때 톱날과 판자가 만나는 지점에 주의를 집중하듯이 호흡이 지나는 한 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가
(집중 대상은 '지금, 여기'처럼 언어일수도 있고 행보처럼 걸음이 될 수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의 행위를 하며 주의를 기울이다가)
잡념이 일어나 마음이 다른 생각으로 빠져나가면
이를 알아차리고 다시 주의를 호흡으로 되돌리는 훈련이다.
이 훈련이 갖는 의미와 효과는 다음과 같다.

뇌는 두가지 시스템으로 구동된다. 수동모드와 자동모드다. 뇌는 익숙해진 일은 자동화하여 무의식적으로 처리하도록 한다. 특정 task를 수행하지 않을 때 뇌는 자동모드로 들어간다. 이때 뇌를 촬영해보면 default mode network, DMN 영역이 활성화된다. (DMN 영상 : https://m.blog.naver.com/msnayana/220106094612)
잡념이 일어난다는 것은 자동모드로 들어가 DMN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mindfulness의 집중 명상은 자기도 모르게 자동모드로 전환되는 순간을 포착하여 자동으로 흘러가는 것에 제동을 거는 훈련이다.

학습이란 함께 발화하는 뉴런의 연결이 강화되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행하고 행해서 다시 습관이 강화되는데, 이는 마치 눈 쌓인 언덕에 썰매가 한번 지나가면 썰매길 자국이 남아서 다음에 썰매를 탈 때 그 길을 따라 미끄러지기 쉽고 또 타면 탈수록 길이 더 강하게 형성되어 썰매가 다른 길로 가기 어려워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학습된 신경망은 자동 모드에서 썰매가 눈길에 난 썰매길을 따라 흘러가듯이 강화된 경로로 진행되며 이는 다시 가중치를 강화한다. 뇌가 무의식의 썰매길을 습관 우울 강박 중독 불안 분노 등으로 한번 잘못 내놓으면 나도 모르게 휩쓸려가서 벗어나질 못하게 된다.
또한 나이들면 새로운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재미있는 것이 없어지고
세월이 빠르게 흐르는 것으로 느끼게 되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 증상들도 학습이 완료되어 자동모드에서 수행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의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가중치가 높아진 고정된 패턴대로만 자동으로 처리되니 신규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도파민은 뇌가 학습을 유도하며 분비되는데 학습이 일어나지 않으니 다 익숙해져서 세상에 재미 있는 일이 없어지며
자동모드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니 의식적으로 느끼는 시간 감각이 빠르게 흐른다. 즉 늙은 뇌가 된다.

mindfulness는 이 자동화된 눈썰매길을 미끄러져 갈 때 브레이크를 잡고 다른 길로 돌려서 새로운 연결을 학습하여 길을 새로 낼 수 있도록 하는 법을 익히는 훈련이다. 신경망이 새로운 경로로 발화됨에 따라 새 경로의 가중치가 올라가고 기존의 습관으로 학습된 가중치는 내려간다. 집중명상으로 Default Mode로 진입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원치 않는 습관이나 감정으로 흘러가기 전에 제동을 걸고 다른 방향으로 길을 낼 수 있다. 이에 따라 뇌 가소성이 회복되어 어린아이가 그렇듯 학습능력이 올라가고 세상에 재미를 느끼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젊은 뇌로 되돌리는 운동이 된다.
그 효과로 명상을 하면 뇌의 회백질 양이 젊었을 때처럼 늘어나는 것이 영상에 관찰된다.
*정리하면
호흡(, 걸음, 단어, 먹기) = 의식적으로도 자동화도 가능한 활동
잡념 = DMN 활성화와 함께 자동화 모드
알아차림 = 자동화 진입의 순간을 포착. 처음엔 멀리간 다음에나 포착하지만 점점 빨리 진입 순간을 포착가능.
호흡으로 되돌아옴 = 자동화 진입의 순간을 포착하여 제동을 걸어서 자동으로 진행되는 경로를 수정 가능하게 하는 것

화 날때나 충동이 들 때 30초간 심호흡하고 다시 생각하여 행동을 바꾸는 것과 원리는 같다.
호흡은 가장 근본적인 자동모드의 행위이나 다른 방안도 사용된다. 걸음마도 말하기도 처음에는 애써서 공들여 훈련한 것이 자동화 되어 나중에는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행위가 된 것이다. 행선은 걷기를 이용하는 것이고, 만트라 명상은 단어 말하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 젊은 뇌로 되돌리는 운동법으로 효과 있다는 실험 증거 열거하기. (회백질 영상)


집중명상은 의식을 끄고 Default Mode에 진입하는 경계를 알아차리기 위한 명상인데 이에 숙련되면 자동으로 흘러가는 마음을 관찰하는 통찰명상을 할 수 있게 된다.
집중명상에서는 잡념이 드는 것을 감지하면 제동 걸고 호흡으로 돌아오는데 통찰명상에서는 생각 감정 감각이 드는 것을 억지로 되돌리지 말고 그냥 두고선 '오면 다시 가는' 것을 관찰만 한다. 생각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생각의 밖에서 생각을 관찰한다.
먼저 호흡에 집중하여 생각을 줄이고
생각이 없는 빈 공간에 주의를 두다가
생각이 나타나고 흘러가고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을 관찰한다.
그러다가 생각과 느낌이 번잡해서 관찰이 불분명해지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온다.
자동으로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을 관찰하다 보면 '관념화 이전의 알아차림'의 순간인 사티를 관찰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 통찰명상에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인지는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 인공 신경망 계층 구조를 놓고 보면
인공 신경망에서 표상(concept)은 관념화(conceptualization)된다.
입력 계층에서는 입력 데이터를 받아들여 입력 데이터를 인식하는 기본적인 특징(feature)들을 추출한다.
추출된 특징들은 은닉 계층에서 조합되어 더 복잡한 표상(concept)을 생성한다.
출력 계층에서는 은닉 계층에서 생성된 표상들을 사용하여 최종 출력을 생성한다.
신경망에서 특징을 담당하는 뉴런들이 발화하여 역치를 넘으면 다음 레이어의 뉴런이 발화되는데 이 구조로 인해 특징을 모아 관념화 하는 효과를 낸다. 즉 특정 패턴을 모아 눈을, 다시 눈과 입의 개념을 모아서 얼굴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판단하는 신경을 발화한다.
'관념화 이전의 알아차림'의 순간인 사티는 이 패턴 인식의 중간인 은닉 계층에서 '아직 관념이 되기 전의 패턴 인식 뉴런이 활성화되는 단계'이다. 사티를 관측하여 알 수 있게 되는 통찰은 관념화 이전에 알아차림을 수행하는 각 부분의 작은 마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마도 사티 관측의 과정에서 그 동안 무의식적으로만 동작하느라 약해져 있던 연결을 보강하는 신경망적인 변화가 발생할 것이다. 수의근이기는 하나 의식적으로 제어하지 않던 근육을 의식적으로 활용할수록 더 잘 제어하게 될 때처럼. 그 결과는 아마도 그간 전적으로 자동 수행되어서 은닉 계층에서 의식으로는 연결이 약해서 아무 신호도 주지 않던 신경회로가 훈련 후엔 은닉 계층에서도 의식할 수 있는 신호를 전달하는 경로가 생겨나는 것이 될 것 같다.) 내 안에 내 의식의 지시와 별개로 자동으로 돌아가는 각 부분의 나들이 존재하고 나는 이 마음들이 군집체라는 구조를 보게 된다.
마음이 관념화 이전의 알아차림을 거쳐서 관념화가 되는 레이어 구조의 신경망으로 되어 있다는 것과
무심코 걷는 행위처럼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면 이런 레이어 구조 여러 개(균형, 여러개의 근육, 시각, 촉각...)가 협응 해야 하는 작은 마음들이 모인 사회 라는 것,
그리고 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생각의 밖에서 생각을 관찰한다는 것 = 자동화가 활성화 되더라도 관찰하는 나를 끄지 않으므로 복수의 마음이 구동되는 것을 관측할 수 있게 된다.
즉 마음의 구조를 통찰 할 수 있게 된다.
AI를 고안한 민스키의 책 마음의 사회는 제목에서 보듯 마음이 여러 작은 마음들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자아가 여러개의 마음의 군집체라는 것은 실험적 증거들과도 부합한다.
** 나는 단수가 아니다의 실험적 증거들은 뇌량절제 등의 예시들 열거하기.
또한 사람이 외로움에 생리적 거부작용 일으키는 것으로 사람 개체는 그 자체로 완성된 마음이 아니라 군체의 일부로 기능하는 존재.
혼자 있을 때 개체의 마음이 정상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쉽게 미쳐 버리는지도 증거 열거하기.

mindfulness 명상은 본질적으로 자동모드의 진입을 알아차리고 제동 걸 수 있도록 하며 (집중명상)
자동모드로 일어나는 생각 감정 감각을 관찰하는 (통찰명상) 훈련이다.
이 명상법은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젊은 뇌로 되돌리는 운동법이자
자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때 얻게되는 통찰은 자아는 의식의 군체라는 것이다.

신경망 학습을 초기화 한다는 LSD는 이 효과를 모방하는 마약인 모양이다.
LSD의 효과
https://youtu.be/qrPfIoXL9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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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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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본질은 뭘까?

불교는 등산 권장을 위한 산행기 같은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내가 이 위에 올라서 이것을 봤다. 올라오는 산길은 이렇고, 올라오는 요령은 이렇다. 네가 직접 와서 봐라.'

(소승불교=상좌불교, 대승불교 공통의) 무상 무아 만족불가능의 삼법인과 (대승불교의) 법신불등의 불교적 세계관은 '이 위에서 본 것들'이다. 

산행기에서 산위의 풍경 묘사는 산을 올라갈 동기부여, 곧 발심 촉진의 의미를 갖는다.

4성제, 12연기, 6바라밀은 올라오며 보게 될 길목에 대한 묘사다.

참선법은 등산기술이다.

그리고 '네가 와서 보라'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를 아우르는 불교의 본질이 있다.

산위에서 본 풍경이나 길목의 이정표들을 공부했으니 등산을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산행기를 읽고 등산할 마음이 생겼으면 이제부터 필요한 건 오르는 방법이다.

 

위빠사나 명상(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지음. 아름드리미디어 출판)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참선법에 대한 책을 찾다가 읽고 있는데 참선의 방법에 대해 대단히 잘 설명되어 있다.

이하는 그 내용을 담았다.

불교에서 언급하는 명상기법에는 크게 두가지 유형이 있다. 위빠사나와 사마타가 그것이다.

통찰이라 번역할 수 있는 위빠사나는 일어나는 일을 명료하게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집중 혹은 삼매라고 번역될 수 있는 사마타는 마음을 집중하여 여타 생각과 인식을 마음에서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종교나 문화권에는 명상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방법론들이 있다. 그 기법들은 대단히 다양하다.

유대 기독교식 전통에는 기도와 묵상이라는 두가지 수행법이 중첩되어 있다. 기도는 신에 대한 직접 청원이고 묵상은 종교적 특정 주제에 대한 숙고이다. 두 행위 모두 정신 집중 즉 사마타 기법이다.

힌두교에는 요가가 있다. 돌, 불꽃, 혹은 옴 이라는 음절이나 몸의 특정 지점(차크라)등에 촛점을 맞추어 집중하는 기법이다. 이 역시 사마타 기법이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명상법은 사마타 기법에 해당한다. 이는 기도나 찬송이나 종교적 상징물에 마음을 집중하여 명상이 지속되는 동안의 황홀경이나 신비체험을 하는 것을 요체로 한다.


불교명상법에서도 정신집중, 즉 삼매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불교명상법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는 요소가 있다. 불교명상법에서는 정신집중을 수단으로 하여 이루고자 하는 지점으로 자각을 제시한다. 일어나는 일에 대한 자각을 통해,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세가지 진리인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를 명상자 스스로가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며 수행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이 자각에 이르기 위한 수행법으로 제시되는 불교 전통도 대단히 광범위하다.

임제종, 탄트라불교 등 서로 다른 특징적인 수행법을 제시하는 다양한 전통이 존재한다.

그중 위빠사나는 자각을 연마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수행법이자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그 기원은 석가모니의 강설인 염처경(중아함경60권중 26권에 나와있는 경전. 사념처경 혹은 대념처경이라고도 한다.)에서 유래한다.

 

사마타가 집중으로 감각을 정지시키는 지감 수행법인 것과 비교하면 위빠사나는 집중을 도구로 하여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생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고, 감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감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운다. 이는 자아를 객관화시켜 관찰하는 것이므로, 나는 위빠사나에 대해 '상위자아의 관점을 익히는 것' 이라고 이해한다. 자아를 객관화시켜서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하고 느끼고 있는지 관찰하는 위빠사나의 기법은 상위자아의 관점에서 관찰하는 것과 동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의는 다 배운 사람이 이제까지 지나온 길의 가치를 평가할 때에 나오는 것이다. 배우는 입장에서 의의를 논한다는 건 말이 안되고, 전혀 중요하지도 않으므로 접어두자.

중요한 건 명상을 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정보 과잉 속에서 대부분의 사건을 알아채지 못하고 흘려버리고 있다.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상태다. 위빠사나는 알아채는 훈련이며, 그 훈련의 시작은 단순화한 사건을 주시하여 알아챔을 유지하는 것이다. 호흡을 세는 것은 위빠사나의 초심자를 위한 매우 좋은 시작이다.

호흡을 크게 하여 호흡이 잘 느껴지는 코끝의 한 지점을 정한다.

톱질을 할 때 오르내리는 톱날을 주시하지 않고 톱이 지나가는 나무의 한 점을 주시하듯, 숨이 지나가는 코의 한 점을 주시한다.

관찰의 시작으로 먼저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는 지점을 알아챈다. 호흡이 교차하는 멈추는 지점을 관찰하기 위해 숨을 끊지 말고 들숨과 날숨이 부드럽게 이어지게 한다. 관찰은 항상 현재 순간을 관찰한다. '곧 멈출 것이다'가 아니라 '내쉬고 있다, 멈춘다, 들이쉬고 있다, 느려진다, 멈춘다.' 단, 속으로 중얼거리지 말고 단지 알아채도록 한다.

호흡을 세는 것은 이 알아챔을 시작하기 위함이다. 들숨과 날숨을 한 호흡으로 해서 호흡을 열까지 세고 호흡에 주시하게 되었으면 세는 행위는 그만둔다. 단지 감지한다. 이제 호흡을 조정하지 않고 알아서 숨쉬어지도록 하며 관찰만 한다. 초심자가 하기 쉬운 실수 중 하나가 관찰을 정교하게 하려고 하는 것인데, 처음엔 단지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교차하는 것을 놓치지 말고 알아채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호흡을 주시하는 것이 위빠사나 명상의 시작이다.


위빠사나를 꼭 호흡에 주시하는 것으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호흡을 대신하여 다른 대상을 관찰하는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가능하며 흔하게 사용하는 것으로만 40여개 정도의 관찰 주제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다양한 배리에이션들은 일일이 검증 및 심화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고, 검증되지 않은 잡다한 방법들은 없으니만 못하다. 참선 자체가 수없이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가능하며 실재로도 다양한 참선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가능하다고만 하면 초심자로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호흡 주시를 따르는 것은 유일한 방법은 아니나 효율면에서 큰 도움이 된다.

사견을 보태자면, 명상을 배울 생각이라면 여타의 개량형 명상기법을 찾아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이해에 기반한 독자적인 참선방법을 정리해 볼 요량을 가지고 개량형 명상기법들을 살펴본 소감은, 어째 고전 기법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신뢰할 수 없는 신비주의적 망상이 더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들 모두 더 높은 효율성을 위해 열의있는 사람들이 개량한 결과일 것임을 생각하면 독자적인 체계를 잡아보겠다는 의지가 대폭 흐려질 정도였다.

다양한 방법이 가능하다는게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나 초심자에게는 그렇다.


다시 위빠사나의 방법으로 돌아가서 명상에 임하는 태도에 대한 주의사항이다.

수행자는 호흡을 주시하면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다루는 훈련을 한다. 주시란 '운전중 전방주시'에서 말하는 주시처럼 대상을 관찰하고 피드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갖추어야 할 태도는 다음과 같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마라. 단지 어떤 결과가 관찰되는지 지켜보는 실험으로 여겨라. 내가 원하는 실험 결과를 내놓으라고 닥달하지 말라. 이는 긴장하거나, 서두르거나, 관찰되는 현상을 거부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내놓지 않는 자신을 자책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을 의문시하라. 당연하게 여기지 마라. 그럴듯하게 들린다거나 성인이 말했다는 이유로 믿지 말고 이 실험을 통해 직접 확인하라. 불신하고 냉소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관찰 경험에 근거하라는 얘기다.


호흡에 주시하노라면 다양한 현상들을 만나게 된다. 이하는 그에 대한 대응책이다.

집중이 잘 되지 않을 때엔 숫자세기가 도움이 된다.

호흡을 세는 것은 호흡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가령 날숨이 들숨과 교차하는 때에 하나씩 열까지 센다. 마음이 숨이 지나는 코의 한 지점에 집중되면 숫자세기를 그만둔다.

공기가 지나가는 게 가장 뚜렷하게 느껴지는 코의 한 지점에 집중하는 것은 호흡을 감지하는 지점을 명료하게 하여 집중을 돕기 위함이다.

들숨 날숨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호흡을 멈춰서지 말고 부드럽게 연결시킨다. 그리고 교차하는 순간을 감지하라. 이는 호흡을 감지하는 순간을 명료하게 하여 집중을 돕는다.

체험의 세부사항까지 일일이 고려하기 보다는 숨이 들어오고 있다, 나가고 있다는 현상만을 관찰한다. 관찰 지점,순간,현상에 대한 이런 단순화는 집중을 돕는 구실을 한다. 


'왜 꼭 어딘가에 집중해야 하는가? 그냥 마음속의 일들을 자각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사실 그런 명상법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어렵다. 생각을 객관화하여 생각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과 생각을 하는 것은 다르다. 집중을 하면, 호흡에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늦추어주는 반면에 호흡에 집중하느라 '호흡이 아닌 생각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자각'은 키워주는 효과를 갖는다. 집중은 현미경처럼 혹은 물결에 떠밀려가지 않는 고정점처럼 관찰의 도구가 되며 호흡은 그 집중의 촛점으로 삼은 대상이다. 앞서도 얘기했듯 꼭 호흡을 촛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나, 호흡은 가장 유용한 촛점자리 중의 하나이다.

이 명상기법의 의의를 코끼리 길들이기에 비유할 수 있다. 코끼리를 말뚝에 밧줄로 매어 놓으면 코끼리는 요동을 친다. 밧줄을 꼭 붙들어 매고 있으면 코끼리는 길들여지고, 길들여진 다음에는 밧줄을 풀어내고 말뚝에서 멀리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명상에서 말뚝은 호흡이고 밧줄은 집중이다. 말뚝이 꼭 호흡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나 호흡은 말뚝으로서 기능하기에 충분할만큼 지속적이고 확고한 대상이다. 길들인 다음에도 말뚝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나 길들일때까지는 고정점이 필요하다.

매어놨다면 다음은 코끼리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 남았을 뿐이다. 길들지 않았다면 얌전히 있지는 않을 것이고 수시로 밧줄을 당겨 끊어버릴 것이다. 그때마다 다시 당겨 놓는 것이 수행자가 할 일이다. 단지 호흡을 주시하라는 게 너무 온건한 기법이라서 할 일이 없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집중에 도움이 되는 것에 이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공기가 지나는 감각을 강하게 해서 집중을 돕겠다고 숨을 강하게 쉬지 말라. 위빠사나는 요가에서 하는 호흡수련과는 다르다. 숨을 조절하지말고 자연스럽게 쉬면서 관찰하라.

자연스럽게 하라는 데에서 오히려 어려움을 느낄수도 있는데, 숨을 조절하려는 충동과 조절하지 않으려는 충동등을 관찰하라.


관찰할때 피해야할 두가지 상태는 생각하는 것과 멍해지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잡념에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멍해지는 것은 숨을 관찰하지도 않으면서 의식이 가라앉은 상태를 의미한다. 시간낭비다. 생각에 빠진걸 자각하면 다시 관찰로 돌아오듯이 의식이 가라앉은 걸 자각하면 다시 관찰로 돌아오라.


꾸준히 쉬지 않고 호흡을 자각하는 것은 일견 만만해 보인다. 그래서 초심자들은 꼼꼼하고 철저해지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다. 무리한 욕심이다. 그보단 끊이지 않는 지속적 자각이 중요하다. 지속적 자각을 얻기 위한 훈련으로 숨을 들이쉬기 시작할때 그 한번의 들숨만이라도 주의집중을 유지하여 따라가보기로 결심하라. 다음으로 날숨을 시작할때 다시 그 한번의 날숨동안만이라도 정신을 놓치지 않고 그 숨에 주시를 유지하겠다고 결심하라. 실패할때마다 한번에 한 호흡씩만 잡아서 반복하라. 한 호흡마다 결심을 새로 하라. 이렇게 해서 끊이지 않는 지속적 자각을 얻도록 한다.


더 빠른 효과를 원할 때엔 온건한 방법은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혼탁한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데에 좋은 방법은 흔들리지 않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명상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흙을 분리하려 애쓰는 건 역효과다. 흔들리지 않게 유지하면, 시간과 함께 가라앉는다.


상좌불교 국가들에서는 명상 수행을 시작할 때 특정 구절을 음송하며 시작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이는 그 구절의 발음 소리가 마법의 주술적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아가 그 구절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 참선 목적에 효과적인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명상을 시작하기 전 '나에게 축복을, 나의 가족에게 축복을, 나의 친구에게 축복을, 세상 보편의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의 원수에게 축복을 기원'하는 구절을 진심을 다해 암송하는 것이다.

참선 명상의 의의를 어떤 식으로 설명하건 간에, 가령 상위자아의 관점을 익히는 것이라고 해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참선은 자아의 관점 초월하는 관점에 이르기 위한 수행이다. 그런데 자아의 족쇄가 너무 강하면 그걸 풀어내기가 너무 어렵다. 비록 당장 풀어내지는 못하더라도 헐겁게라도 해두면 풀기 위해 몸을 뒤척이기가 수월해진다.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 대자대비심의 관념으로 표층의식을 덮어두는 것은 이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다. 즉 대자대비심의 암송으로 자아의 가장 이기적인 측면을 약화시키고 시작하는 것이다. 의식의 표층을 이러한 관념으로 감싸는 것은 표면적인 덮음에 불과하여 스트레스를 받으면 쉽게 깨져버리지만, 자아의 족쇄를 느슨하게 하여 풀기까지의 수행을 수월하게 해준다는 의의가 있다. 

한편 '내 목적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이 설명은 나의 적의 행복을 기원하기는 차마 하지 못하는 자아를, 적의 행복이지만 단순히 기원하는 정도 만큼은 할 수 있을만큼 느슨하게 하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진심을 다해 기원할수록 효과가 높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명상 실습 중에 마주하게 될 각종 문제의 대응법이다. 

어떤 단일 서적도 명상중 만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대응법을 다 담지는 못할 것이기에 

불편함, 이상한 감각들, 졸음, 지루함, 두려움, 집중력부족, 불안 동요 초조, 지나친 열혈, 반대로 낙심, 혼침 둔감 등의

가장 흔하고 기본적인 대응법에 대한 설명들이다.


지금까지의 방법을 적용하면 명상의 진행은 이렇게 된다.

호흡관찰 - 잡념 - 잡념 자각 - (자책) - 호흡으로 돌아옴.

자책은 필요 없는 감정이지만, 일어난다면 단지 관찰하고 흘려보내도록 한다.

현재로선 호흡에 주시하는 이외의 모든 생각과 느낌과 감정이 잡념이다.

잡념이 들면 그 잡념을 관찰한다.


잡념 해결의 기본 전략은 다음과 같다.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고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본다. 거기에 말려들지 마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살펴라. 나의 마음에 어떤 느낌을 주는지,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라.

기억이나 느낌이나 상상을 억누르려고 싸우지 마라. 길을 막아서지 말고 길에서 비켜서서 끓어올랐다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도록 한다. 

마음을 비우는 건 마음이 하고 있는 일을 깨닫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마음의 쉼없는 재잘거림을 멈출 수 없다면, 좌절하지 말고 그 재잘거림도 알아차림으로 볼 또 하나의 대상으로 여겨라.

숨이 뭔지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숨을 개념화하지 말라.

항상 처음처럼, 세상 처음 보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듯이, 기대되는 결과를 정해놓지 말고 관찰하라.


졸음, 혼침, 둔감 : 위빠사나의 관찰에 몰두하면 잠은 사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잠이 오면 일어나서 아예 깨거나 그냥 꿈나라로 간다. 그렇지 않으면 깜빡깜빡 졸기만 하다가 시간만 엄청 낭비하기 일쑤다. 명상하다 졸때 잠 깨워주는 물건인 죽비가 따로 만들어질 정도로 명상 중 졸음은 흔한 문제고, 혼자서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졸음에 알아차림을 적용해 보라고 하는데, 잠이 들면서도 자각을 유지하는 것은 깨어있던 상태에서 자각몽으로 진입하는 것과 동치가 되는 훈련인 동시에 소수의 사람만이 성공하는 난이도 높은 훈련이다. 그냥 잠시 조용히 일어서 있다가 다시 앉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졸음에 이어 부연하자면, 명상을 하면서 심신이 이완되면 다양한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가려움, 따끔거림에서부터 이완이 깊어지는 느낌, 몸이 떠오르는 느낌, 몸이 자라거나 오그라드는 느낌, 때론 어떤 감정이나 이명을 넘어서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 초심자들은 종종 흥분하곤 한다. 흥분할 필요는 없다. 그건 잠들어가는 신경의 반향일 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대응도 평소의 기법과 같다.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고, 그것이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며, 거기에 말려들지 말라.

통증, 몸이 붕 뜨는 이상한 감각, 뚜렷한 이유 없는 공포감 등 매우 다양한 감각이 느껴질 수 있다. (자각몽 진입 훈련에 있어 이완기 후에 이어지는 과도기에 겪는 현상과 일치한다.) 특별한 신비 체험 같은 것은 아니니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단지 지켜볼 것.


동요가 느껴지면 : 동요하는 마음을 직시 관찰한다.

열혈 : 자기가 원하는 실험 결과를 독촉하는 마음이다. 열혈로 실험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낙심 : 열혈로 독촉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때의 마음이다.

명상에 대한 거부감 : 명상은 일이 아니라 휴식이고 놀이라고 느끼도록 한다. 

집중력부족, 지루함 : 기대하는 결과를 정해놓지 않은 관찰은 지루하지 않다. 참된 알아차림을 회복하고, 지루해하는 심리를 관찰한다. 


개념화를 멈추고 개념화 이전의 대상을 관찰한다.

2학년때 선생님을 떠올리고 있다면 그것은 기억이다.

자신이 2학년때 선생님을 회상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이건 알아차림이다.

이 과정을 개념화하고 '내가 옛날 생각을 하고 있군'이라고 중얼거린다면 그건 생각이다.

 

산만함과 잡념을 다루는 요령 : 집중이 되지 않고 산만할 때엔 다음 방법들이 유용하다.

몇 번 심호흡하여 세게 호흡하면서 코끝의 호흡을 관찰할 지점을 찾아 집중을 시작한다.

호흡을 세는 것, 혹은 세는 것과 유사하게 '들이쉰다... 내쉰다'를 속으로 되뇌이는 것은 집중을 위한 좋은 방법이다. 

의식이 관찰지점에 모이면 세거나 중얼거리는 것을 그만둔다.


상념을 깨끗히 치우는 법 : 명상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문득 자신이 호흡 관찰에서 떠나 상념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때 아래와 같이 상념의 움직임을 점검하는 것으로 상념을 깨끗이 없애고 호흡 관찰로 돌아갈 수 있다.

어림잡아 어느 정도 동안 상념에 빠져있었는지 자신에게 말한다.

'대충 2분 정도 잡념에 빠져있었어' (정확한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다) 혹은 '개가 짖는 소리를 들으면서부터 였어', '돈 생각을 하면서부터였어' 라는 식으로.

처음엔 언어로 생각하게 되지만, 오래지 않아 습관이 들고 나면 중얼거림은 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잡념을 점검할 수 있다.

그 잡념이 어떤 것이고, 얼마나 강력하며,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무언으로 알아차리도록 한다. 

이는 그 생각에서 한발 물러서 그 잡념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객관적 관점에서 보게 한다. 즉 관점을 자각의 관점으로 돌려 놓는다.

잡념을 몰아내려고 다투지 마라. 그냥 말없이 검토하다보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잡념은 머무르도록 조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 뿐이지 나타날때마다 몰아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것은 와서 있을만큼 있다가 간다. 그 오고 가는 것을 관찰한다. 잡념이 가고 나면 호흡으로 돌아온다.


어떤 생각들이 정말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 때엔 일단 그 생각의 반대되는 생각을 해본다.

즉 앞서 대자대비심을 표층의식에 둘렀던 것과 마찬가지인데, 욕심의 생각이 잡념이 될 땐 관용을 생각하여 탐욕을 상쇄시키고

증오가 잡념이 될 땐 인자와 자비를 생각하여 증오를 상쇄시킨다. 탐,진,치를 완화시키는 것이다.

이건 비록 표면 덮기에 불과하나 굴레를 벗기 위해 몸을 뒤척이는 틈은 마련해준다. 

나는 이것을 관용과 자비등의 미덕을 관념적으로 생각해서 그 관념에 대한 호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에 반대되는 개인 감정을 누그러트리는 임시방편이라고 이해한다.

또한, 증오나 탐욕이 너무 강한 경우에는 먼저 그 미움과 탐욕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 그 기세를 약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그 감정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내 삶과 행복과 건강과 내가 하고자 하는 진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것을 품은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를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큰 감정을 줄여놓고 나면 앞서 얘기한 표면 덮기로 남은 감정을 상쇄한다. 그런 후엔 호흡관찰로 돌아간다. 이건 앞서와 반대로 증오나 탐욕의 감정 그 자체를 대상화하여 생각함으로써 추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을 이용해 그 악한 감정을 멀리하고 싶게 만드는 방법으로 이해한다. 


다섯가지 덮개 : 다섯가지 덮개는 불경에 명시된 다섯가지 전형적인 장애다. 감각적 욕망,악의,혼침과 졸음,들뜸,회의적인 의심을 뜻한다.

욕망 : 명상중 일어나는 어떤 경험때문에 산만해졌다고 치자. 소유욕이나, 혹은 마음에 드는 경험을 연장시키려는 욕망은 다음 방식으로 처리한다. 욕망의 대상이 어떤 선한 것이든 간에 대상과 별개로 '욕망'을 알아챈다. 이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어느 정도 범위까지 인지, 욕망이 얼마나 센지, 얼마나 지속되는지, 언제 사라지는지 알아챈다.

악의 : 악의의 범위, 세기, 지속, 소멸을 관찰한다.

심리적 무기력 : 혼침, 졸음과 몸의 피로와는 다르다. 몸의 피로는 신체 느낌으로서 관찰한다. 심리적 무기력은 감각과 인지가 무디어지는 것으로서 마음이라는 장치가 꺼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는 대상을 멀리하려고 하는 거부의 일종으로 수면 상태를 가장하며 억지로 멍청해지는 형태다. 

나른한 상태가 되면 그것을 알아채고 범위와 정도와 언제 생기고 얼마나 지속되고 언제 사라지는지 알아챈다. 이 무기력은 알아차림의 정반대 상태이므로, 형성 초기에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오는 것은 멍한 마음, 내지는 잠들기다.

들뜸, 동요 : 마음이 어느 하나에 정착하기를 거부하고 계속 주변을 맴도는 것이다. 불안과 걱정은 동요의 표시다. 불안정은 특정한 '느낌', 내지는 '맛'을 갖는 어떤 것을 의식에 부여한다. 그것을 찾아보라. 찾아내면 그것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고 언제 생기며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언제 사라지는지 알아채라.

의심 : 의심도 의식속에 존재할 때 갖는 분명한 감각이 있다. 명상에서 의심이 취하는 흔한 모습중 하나가 '이렇게 죽치고 앉아서 내가 뭘하고 있는거지? 여기서 뭔가를 얻기는 하는건가?'이다. 근거없는 맹신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지만 끊임없는 회의로 인해 진척을 못하게 되는 것은 명상뿐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해서든 나타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애다. 가령 시험공부를 하다 지치면 회의가 든다. 회의감을 처리하지 못하면 어떤 공부나 훈련도 성과를 낼 수 없다.

기본적으로는 회의감을 처리하는 방법도 같다. 어떤 강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것들에 마음이 이리저리 휩쓸려서 집중이 안될 때가 있다. 그럴때엔 목표를 상기한다. '망상은 나를 구제해주지 않는다. 나는 이런 망상이나 하려고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명상의 목표를 위해 여기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 성과가 겉보기로 드러나지 않는 명상에 있어서는 이런 목표구체화가 중요한 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하건데 잡념이란 명상을 방해하는 모든 심리상태를 총칭한다.

부정적인 상태들은 눈치채기가 쉬우나, 갈망이나 욕망은 때론 숭고한 미덕에의 갈망이나 자기 발전에의 욕망, 심지어 명상체험의 희열 자체에 대한 집착으로도 나타난다. 이타적 느낌에서 초연하기란 그리 쉽지 않으나, 결국 이것도 현재 시점의 현실을 무시하고 만족을 얻으려는 욕망일 뿐이다.

명상중에 매우 긍정적인 정신상태가 찾아오기도 한다. 행복과 평화와 내면의 만족, 만물에 대한 자비심. 이런 마음상태를 거부하라거나 무정한 로봇이 되라는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그냥 지켜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심리 상태이며 왔다가 가고 생겼다가 사라진다. 명상을 계속함에 따라 이런 상태들은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요는 그것들에 집착하여 붙들고 있지 말고 그냥 그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지속되는지 그리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의식 못한 상태에서 끓어올라 의식으로 떠오른 후 얼마간 머물고 난 다음이곤 한다. 사실 우리는 잡념에 빠져 있을 때에는 그것을 모르다가 잡념이 지배를 풀고 쇠퇴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알아차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상이나 망상에 빠져있었음을 별안간 깨닫는 시점이 여기다. 자각하기를 반복함에 따라 그런 심리상태들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의식영역의 깊이가 점점 더 깊어지게 된다. 즉 실제로는 더 빠르게 알아차리게 된다.


관찰의 규칙들은 모든 심리상태에 적용된다. 두려움이나 우울이 자각아래 증발하는 것을 보고 나면 이 과정을 되풀이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와 똑같은 과정이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애국심이나 모성애 부성애 영원의 사랑등의 심리상태에도 적용되는 것을 보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그것도 똑같이 필요하다. 나는 이를 긍정적인 애착도 부정적인 집착과 똑같이 하위자아의 감각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명상에는 집중과 자각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집중은 렌즈처럼 마음 깊은 곳을 보는데 필요한 불타는 강렬함을 낳는다. 그리고 렌즈를 통해 거기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자각이다.

명상 초기 날뛰는 마음을 상좌불교에서는 원숭이 마음이라고 한다. 초기에 자각에 역점을 두면 자각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집중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처음에는 집중에 노력한다. 

대략 두어달쯤 수행하고 나면 집중이 향상되면서 알아차림에 역점을 두기 시작할 수 있다. 알아차림은 뒤에 이어 얻을 더 깊은 집중의 기반을 제공한다. 

집중과 알아차림 간의 불균형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바로잡히므로 우려할 필요는 없다.

알아차림 발달 -> 이탈의 빠른 자각 -> 집중 대상으로 회귀 = 집중력 강화로 이어진다.

따라서 초기에는 집중에 역점을 두도록 한다.

팁을 하나 더하자면, 명상시 드는 느낌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말고 호흡에 집중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흡에서 주의가 저절로 돌려질 때에 잡념에 주의를 기울여 관찰한 후, 잡념이 사라지면 호흡으로 돌아오도록 한다. 

들떠있는 상태라면 집중에 역점을 두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해진 상태에 빠진다면 알아차림에 역점을 두되 전반적으로는 알아차림에 역점을 두라. 알아차림은 치우침을 스스로 바로잡을 시야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은 생활 속에서 명상하기이다.

모든 분야에는 기초가 있다.

음악가는 음계연주가 기초다. 시작부터 배우는 것이고,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어도 계속한다.

야구선수는 타격연습을 한다. 어린이 야구단의 기본기이자 월드시리즈의 기본기이다.

명상가에게는 좌선이 기본기다. 하지만 타격연습이 시합 그 자체는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좌선은 기본기 연습이다. 그 기본기를 사용하는 시합은 전반적인 일상이다.

완벽하게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에서 명상하고 있는 자신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순간은 수행자들에게 명상체험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사건들 중 하나가 되곤 한다고 한다. 이러한 의식 전환을 실제로 영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조용한 곳에서 좌선을 하는 이유는 이것이 가장 쉬운 조건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며 하는 명상은 좀 더 어렵다. 시끄러운 곳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중에 하는 명상은 더욱 더 어렵다. 가장 어려운 것은 연애나 논쟁등 고도로 자기 중심적인 활동 중에 하는 명상이다. 명상을 일상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결코 간단치 않으나 불교에는 순탄한 전환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훈련법들이 있다. 다음의 것들이 그것이다.


-걷기 명상 (행선)

불안할 때에 좌선의 대안으로 활용해도 좋다. 한시간쯤 행선후엔 불안감이 다소 해소된다. 그 다음에 좌선을 하면 크게 도움이 된다.

행선을 위해서는 최소 5보에서 10보를 일직선으로 걸을 수 있는 방해받지 않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아주 천천히 걷는 것이므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 쉽다. 남의 눈이 없는 장소를 택하라.

숨을 들이쉬며 한쪽 발꿈치만 든다. 내쉬며 그 발의 발가락 끝만 바닥을 딛고 있게 한다. 다시 들이쉬며 그 발을 들어 앞으로 보내고 내쉬며 그 발을 내려 바닥에 댄다. 다른 발도 똑같이 한다. 5보나 10보를 가서 1분쯤 서 있는다. 아주 천천히 돌아서서 잠시 그 자리에 서있는다. 다시 걷는다.

고개는 꼿꼿이 세우고 목에 힘을 뺀다. 눈은 뜨되 특별히 뭘 보고 있지는 말라. 템포는 위와 같되 걸음은 자연스럽게 한다. 최대한 느림을 유지하며 주위 광경에 주목하지 말라. 몸에 긴장이 생기는지 유의하고 긴장을 알아채면 곧 풀어주라. 우아하게 걸으려고 시도하지 마라. 이건 자각수행이지 육상이나 무용이 아니다. 행선의 목표는 '걷기 동작'에 대한 절대적 깨침이다. 

발과 다리에 느껴지는 감각에 온 주의를 집중하라. 움직이는 쪽 발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새겨두어라. 움직이는 근육 하나하나, 발이 디디는/드는 때의 촉각의 변화. 이는 자잘한 반사동작들의 복합적 연속임을 알아차리게 한다.

들고, 내밀고, 내디고, 바닥에 대고, 누르고, 라는 식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은 일련의 동작을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더 많이 자각할수록 이런 중얼거림은 필요도 없을 뿐더러 중얼거릴 틈도 없어질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걷기 시작하는 처음에는 균형잡기가 좀 어려울 것이다. 이 행선법은 다른 모든 것을 밀어내고 의식이 철저히 감각들로만 가득하도록 고안된 기법이다. 촉각과 근운동감각의 홍수같은 흐름만이 있다. 이를 통해 실재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실재속으로의 도피를 경험하게 된다.


-자세 자각

우리 자세는 모르는 새 거북이 목을 하고 있는다든지 하고 뒤틀려 버리곤 한다. 그 모르는 새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루를 보내면서 몇분에 한번씩 자기 자세를 검사하는데 몇초를 쓰도록 한다. 교정을 위한 훈련이 아니라 감지를 위한 훈련이다. '걷고' '앉고' '눕고' '서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역시 처음엔 집중을 위해 마음속으로 주석을 달고, 익숙해지면 '감지'만을 한다. 어처구니없이 쉬워보이지만 강력하다.


-단순한 동작을 느리게 하기

구두끈을 매는 것은 단순작업이지만 일련의 미세한 동작들이 복합되어 일어난다. 이 세부동작이 대부분은 관찰되지 않는다.

이를 관찰하기 위해 단순한 동작을 느리게 하는 것이다. 

로봇을 제어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명령과 제어가 필요할 것인가. 자아를 객관화하여 그것들을 모두 알아채서 로봇마저 훌륭하게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관찰하는 것이다.

숨과의 협응을 해서 움직이는 와중에도 호흡과 협응시킨다. 이는 동작에 리듬을 부여한다. 촛점맞추기가 쉬워지고 알아차림이 강화된다.


-모든 자투리 순간

불안한때엔 자기의 불안감에 대해

지루할때엔 자기의 지루함에 대해 관찰한다.

주로 단순반복활동을 활용하라. 모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다.


-모든 활동을 자각

이것은 굉장히 높은 목표다.

일상 수행은 수행자의 수행에서 기만과 오류를 제거하여 내가 언제 성공하고 언제 자신을 속이는지를 보여준다.


- 명상전의 대자대비심 기원.

적들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것은 그들의 비도덕적 행위의 성공을 기원하는게 아니다. 그건 오히려 실패이니까. 

그가 탐욕 분노 혐오 증오 질투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다.

이를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하면,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행복과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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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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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가치추구란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다. 
더 지혜로워지기 위해 연구 공부하거나 도덕적 무지나 나약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거나 예술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추구하거나 참선등을 통해 성스러운 초월지를 추구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인생에 무엇이 진정 가치있는가를 찾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가 제시하는 초월적 가치는 무엇인가?

4성제 12연기 6바라밀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사성제 - 생은 본래 고통이라 그 내부적인 가치만으로는 해법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이므로 이는 초월적 가치 추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십이연기 - 십이연기는 결국 무명을 타파하는 것, 즉 무언가 모르고 있는데 이를 알게 되는게 해법이라는 문제의식에 이른다. 앎을 얻는 것이 해법이라는 인식이다.
육바라밀 - 앞부분 다섯 바라밀들은 마지막의 반야바라밀을 위한 과정이고 반야바라밀은 나의 인식을 상위자아로 확장하는 것이다. 이는 만유재신론적 상위자아의 관점에서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을 간략화하면 불교가 가르치는 초월적 가치는 제한된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상위자아로의 인식 확장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삼법인 -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에 기초해 파악해보면
제행무상 : 세상만물이 영속적이지 않다.
제법무아 : 당장 체감하여 가지고 있는 '나'라는 감각에 집착치 말라.
일체개고 열반적정 : 생은 근본적으로 고통이며 그 안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은 허무할 뿐이니 수행을 통해 발전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이 해법이라는 인식을 갖을 것. 이는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라는 의미가 됨.
불교가 가르치는 초월적 가치를 제한된 나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의미로 파악할 경우 삼법인의 가르침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라는 관념자체가 착각에 불과하다는 해석등도 가능한데, 어느 쪽이 옳건간에 현재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아인식을 극복하는 것을 불교의 문제의식으로 봄에는 다르지 않다.)
'최종적으로는 우주전체도 나와 다르지 않음으로 포괄하게 될 상위자아로의 인식확장'이 불교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게 내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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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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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내용은 화엄계 해석이 아니다.

한국 불교의 주류는 화엄계다.

역사상 덕망 높은 스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원효와 의상이 화엄종을 한국에 가르치신 선구자이고, 한국 불교중에 조계종이 가장 큰데 조계종이 화엄계열이다.

화엄사상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대략 이런 내용으로 이해한다.

원효대사는 화엄경의 가르침인 '유심연기,일체유심조 : 만물이 마음의 드러남이라는게 무슨 의미인가'를 이해 못하다가 의상대사와 중국 유학가는 길에 동굴에 들어가서 잠든다.

밤중에 목말라서 더듬더듬 어둠 속의 물을 찾아 감로수처럼 마시는데 날밝고 보니 그게 동굴인줄 알았던 무덤속의 해골 썩은 물이었다.

죽을 듯이 토하다가 간밤에는 그렇게 감로수처럼 마셨던 물이었다는 걸 상기하고 만물이 마음의 드러남이라는 의미를 자기의 방식으로 깨달아서 대오각성하고 그 길로 신라로 돌아온다.

이에 의상대사는 혼자 중국가서 화엄종을 배워온다.

내가 느끼기로는 원효대사의 이해가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이해다.

마음의 문제에 집중하고, 모순된 답을 내놓으나, 인간 자체가 모순된 존재이기 때문에 해골썩은 물에 대해 모순되게 반응하는 것과 같이

결국 모순된 답이 오히려 진실한 답에 근접한다는 형태로. 인식론적이다.

원효대사가 대오각성 했듯이, 화엄사상은 '초발심시변정각'('처음 발심하는 때에 곧 부처의 깨달음을 얻는다.')라고 해서 '수행을 하다보면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는 돈교로 분류된다.

나는 법화경의 만유재신론 세계관을 기본으로 하는 점에서 이해의 차이가 난다.

법화경은 점교라서 차근차근 긴 시간에 걸쳐 공부를 쌓아가며 깨우친다는 방식을 가르치는데 이 점도 차이가 있다.

불교는 워낙 스펙트럼이 넓어서 내가 이해하는 방식도 불교로 분류되기에 무리는 없으나,

혼자 경전 읽고 해석한 거라 족보 없는 게 사실이니 내가 쓰는 건 비주류 내용이라는 걸 참고하자.


1 들어가며

과학이 신이 된 시대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 - 재정리

불교라는 수레에 정신을 싣기에 앞서 이 글을 서론으로 삼는다.

종교가 됐든 과학이 됐든 관념 체계에 가치관을 의탁 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에 유념해야 한다.

종교가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한 판타지나 맹신, 즉 사이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조로부터 하달된 진리인 종교적 가르침을 인문학의 관점에서 근거 위에 쌓아올려서 서로 합치될 수 있는 지를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2. 3승에 대하여


반야심경과 법화경을 기반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인 3승(탈'승'자를 쓰며 세가지 탈 것이라는 의미다.)과 3승의 가르침을 모두 익혔을 때에 그것들을 모두 아우르면서 더 높은 목적지를 제시하는 1승에 대한 가르침이다.

3승의 명칭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며 그 간략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성문승 :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서 배우는 방법이며 이때 가르치는 내용이 고집멸도의 4성제이다.

연각승 :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관찰하여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되는 것으로서 이때 보게 될 세상의 모습이 12연기이다.

보살승 : 6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바라밀은 '넘어간다'는 뜻으로서 차안(이 세계)에서 피안(깨달음의 세계)으로 의식을 확장하는 수행법이라는 뜻이다. 반야심경은 이에 대한 내용이다.

3승을 아우르며 그 이상의 목적지로 가기 위한 1승 : 법화경이 이에 대한 가르침이다.

법화경에서 가르치는 1승이 3승을 모두 포함함에도 불구하고 3승으로 나누어 가르치는 것은 단계별 학습이 성과가 높기 때문이다.

이제 각각의 내용을 살펴보자.

첫수레는 성문승이며 고집멸도라는 4제법을 배우는 단계이다. 차안(이승)에서의 욕망 충족은 근본적으로 불만족일 수 밖에 없고(고), 때문에 쾌락에 집착하여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만족에 이르지 못하므로(집) 이 밑빠진 독을 치워버리고(멸)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도)는 것이다.

법화경의 비유를 인용하면 '불이 난 집에서 오물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로 하여금 밖으로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는 가르침'이다.

두번째 수레는  독각=연각=벽지불승이다. 배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세상의 이치를 들여다보아 깨우치는 것이며 그때 들여다보게 될 세상의 이치가 12연기이다.

12연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무명(無明). 무지(無知).

(2) 행(行).

(3) 식(識). 인식.

(4) 명색(名色).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것과 형체가 있는 물질. 색수상행식 5온과 같은 의미이며 존재를 뜻한다.

(5) 육처(六處).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과 의근(意根). 관찰자.

(6) 촉(觸). 사물에 접촉함. 상호작용.

(7) 수(受). 외계로부터 받아들이는 감각.

(8) 애(愛).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구함.

(9) 취(取). 자기가 욕구하는 것을 취함.

(10) 유(有). 가진 것. 업으로 해석한다. 업보라고 하면 흔히 나쁜 행동의 대가 같은 어감을 가지나, 원인이 되는 행동을 통해 갖게 된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든 내가 가진 것은 다 업이다. 부처가 아닌 중생의 지위는 나의 업이지만 동시에 축생이 아닌 인간의 지위도 나의 업이다.

(11) 생(生).

(12) 노사(老死).

이것을 독각으로 깨우치는 사고의 전개는 위의 역순으로 진행된다.

"만물에 쇠하고 죽음이 있다. (노사)

왜인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생)

왜 생겨나는가? 가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유)

왜 가진것이 있는가? 취하였기 때문이다. (취)

왜 취하는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애)

좋아하는 원인은? 현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

현상을 받는 원인은? 상호작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촉)

촉이 일어나는 이유는? 관찰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육근)

관찰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관찰의 주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명색) [a]

'어떻게 하여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의식하기 때문이다'가 주어진다. (식)

인식의 존재 원인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나를 인식하는 것'에서 인식의 원인은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다. 행은 나를 주체로 하는 생각과 행동을 의미한다. (행)

행의 원인은 무엇인가? 세상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명)

이제 세상의 본질이 무엇이길래 그것을 알면 나를 주체로 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없어진다는 것인지가 화두가 된다. 무명, 곧 현상을 알도록 매개하는 밝음이 없기 때문에 전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주체를 자아에 한정하여 의식 작용을 하는 것이 문제라는 연각승의 구조만으로도 불교적 세계관에 대한 짐작은 가능하다. 그러나 반야심경과 법화경에서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할 것이므로 일단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마음'이라는 문제의식을 갖는 것 까지를 연각승의 목표 지점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세번째 수레로 환승할 차례이다.


[a]연각승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독각으로라도 세상을 관찰하다 보면 깨우치게 되는 내용이다. 때문에 그 내용을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물의 존재를 규정할 때에 '객체,상호작용,관찰자'의 세가지 요소에 기반하여 파악하는 관점은 현대물리의 존재론과 같다. 존재는 현상이 상호작용을 통해 관찰자에게 관측될 때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양자론에 대한 아래의 내 이해와 비교해볼 수 있다.

- 아직 양자역학 파동식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추정일 뿐이지만,

파동식으로서 존재하는 물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니 내겐 이런 형태로 보인다.

이해를 위해 나란히 늘어선 두개의 면의 형태로 평행차원을 가정하자.

윗장에 해당하는 면 A는 우리가 존재하는 차원이고, 아랫장에 해당하는 면 B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차원이다.

이건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간 교환처럼 에너지와 질량간의 교환에 대한 비유가 될 수도 있는데,

여하간 A면에 있는 두 입자간에 위치가 곂치면 충돌이 일어나고 양 입자가 모두 영향을 받는다.

B면에 있을때에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파동으로 존재하는 물질인 피관측체는 A면과 B면 사이를 오가며 진동하고 있다.

A 차원면 위로 한 점(관측점)을 움직인다.

회전하는 선풍기 날개 사이로 물체가 지나갈 수도 있고 충돌할 수도 있듯이,

또는 상하로 빠르게 흔드는 손 사이로 공이 지나갈수도 있고 충돌할 수도 있듯이

A차원에서 관측점은 피관측체와 충돌할 수도 있고, 그냥 지나갈수도 있다.

관측점이 A차원면에서 피관측체와 만나게 되면, 즉 관측점과 피관측체가 충돌하면, 그게 그 지점에 피관측체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때의 충돌확률이 '존재확률'이다.

따라서 관측점과 피관측체간의 충돌이 없이는 피관측체는 A면상의 어디에 있다고 특정할 수 없다.

그리고 관측은 관측점과 피관측체간의 충돌이므로, 피관측체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은 채로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측되기 전에는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라는 양자역학의 관점은 직관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우나,

이상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피관측체는 A차원과 B차원을 오가는 진동의 형태로 객관적으로 존재하기는 한다.

다만 A차원에서 특정되어야 만이 A차원 즉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뿐이다. -

이러한 관찰 이전에 존재가 규정되는 방법이 하나 있다.

데카르트의 존재론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곧 '생각하는 나를 인식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떻게 하여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의식하기 때문이다'가 주어진다. (식)



세번째 수레는 보살승이며 그 내용은 6바라밀에 대한 수행이다.

바라밀이란 para-mita 의 음사이며 para 는 '피안', mita 는 '건너가기'를 뜻한다.

따라서 여섯 바라밀이란 피안으로 건너가는 여섯 수행법이라는 의미이며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보시 : 배풀기

지계 : 계율을 지킴

인욕 : 인내

정진

선정 : 참선

반야

앞의 다섯 바라밀들을 통해 반야 바라밀에 이를 수 있다. 즉 선정을 통해 반야에 이른다.

Prajna paramita 는 반야 바라밀다 라고 음사 하며 지혜 바라밀 이라고 번역한다.

반야 즉 Prajna는 ‘최고의 인식’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Pra는 ‘최고의 우수한’이란 뜻을 가지며, jna는 ‘알다 인식하다’는 뜻을 가지는 바, 흔히 지혜라고 지칭되는 의미와는 다르다. 존재의 실상을 아는 지혜이다.

반야 바라밀이 무언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제 반야심경을 살펴보자.

불교 경전중에 가장 널리 읽히는 것 중 하나인 반야심경은 서유기에서 당나라 삼장법사가 손오공 데리고 천축국 가서 받아온 법문 중 반야바라밀에 대한 부분을 요약하고 한역한 것이다. 그 내용은 불교의 세계관을 담고 있는데, 이를 쉽게 풀어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손오공 시절에는 없었으나 우리는 좋은 비유가 있다. 가상 현실에서 아바타를 조종하는 온라인 RPG 게임이나 영화 매트릭스나 일본 만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생각해보자. 특히 매트릭스가 설명하기에 좋다.

매트릭스의 가상현실과 비슷하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살아가는 우주는 '공' 위에 법칙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세계관이다.

나무에서 갈래갈래 뻗어 나온 가지를 생각해보자.

가지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나'이다.

나는 '나'를 좀 더 굵은 줄기인 상위자아로 이어지고 그 뿌리는 법 그 자체인 법신불이다.

(하위자아는 아바타와 동의어이며 상위자아는 그 대응이 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RPG 게임 캐릭터는 나 라는 가지 끝에서 하나 더 뻗어 나온 나의 아바타이고 나는 RPG 캐릭터의 상위자아이다.)

뿌리에서 직접 뻗어 나온 가지, 그 인식이 법신불에 직접 이어진 가지를 화신불, 세상에 나타난 부처라고 한다. 석가모니불은 그 한 예이다.

피안은 매트릭스의 네오가 깨우친 후 코드가 흐르는 걸 보는 것과 같은 본질의 세계이고, 이러한 본질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 바로 ‘최고의 인식’이라 하는 반야 바라밀이다.

그럼 어떻게 반야에 이르는가? 6바라밀에서는 그 방법으로 참선을 제시한다. 참선이 무엇이며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짐작을 보태고자 한다.

잠을 안자면 죽는다. 상위자아가 나와 일종의 '탯줄'로 이어져있다고 치고 '나'는 잠든 사이에 의식이 저쪽으로 넘어가 호흡을 하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선의 목적은 그 의식의 탯줄을 열어서 상위자아의 의식에 이르는 것이 된다.

영화에서 불가에서 좌선할 때 보면 한 명이 소리 크게 나는 대나무 통을 들고 다니면서 잠들면 딱 쳐서 깨우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통로를 넓혀서 여는 게 목적이라면 의식이 완전히 넘어가서 잠들면 효과가 없다.

선정 바라밀을 통해 반야를 얻는다는 것은 선을 통해 의식의 통로를 여는 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넘겨 짚는 것은 좋지 않으니 개략적인 비유에서 그치도록 하자.

피안은 현실의 배경이고 본질이다. 한의 정서를 담은 영화들에서 갖다 쓴 탓인지 피안이라는 단어에 현실 도피처 같은 이미지가 들어갔으나, 여기서 피안은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세계'의 본질인 '코드로 이루어진 세계'와 같은 종류의 의미다.

반야 바라밀은 불모(佛母) 즉 ’부처님의 어머니’라 표현하며 이를 얻지 않고서는 부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라고 불리운다. 반야 바라밀은 상위자아의 인식으로 넘어가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는 법신불에 이르는 것이므로 반야 바라밀이 부처님의 지혜를 이루는 시작이 되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12연기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존재의 실상을 알게 되면, 곧 반야 바라밀을 얻게 될 때에 주체를 '나'로 한정짓지 않게 된다. 피안에 이르러 완전한 인식인 반야를 얻으면 세상의 모든 '나' 들이 하나의 법신불의 하위자아들이기에 피아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이 해석을 통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외계와 차별되는 내가 없다'의 의미를 짐작 할 수 있다.

이제 반야심경 전문과 해석을 읽어보자.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마하 = 큰, 위대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닦으실 때 오온(색수상행식 = 물질,느낌,생각,행동,인식. 인간 및 존재를 이루는 다섯가지 요소. 같은 의미로 명색 이라고도 한다.)이 모두 공임을 보고 온갖 괴로움을 벗어났다.  

=> 불교에서 '공'은 모든 물질과 에너지를 비롯한 존재가 그려지는 배경의 개념이다. 빌 '공'자를 써서 표현하나 그 없음의 개념은 '아무 것도 상영되지 않은 상태의 스크린'과 비슷하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불(부처님의 제자 이름)아, 물질은 공과 다르지 않고 물질이 곧 공이며 공은 즉 물질이며 느낌과 생각 행동 인식도 이와 같다.

=> 색수상행식은 5온이라 하여 물질과 이성을 포함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게임의 아바타가 그래픽 카드가 그려내는 프로그램의 모습이듯, 모든 존재는 공의 모습이라는 의미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불아, 모든 법은 공의 모습이니 생기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웁거나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듬도 없다.

=> 존재의 배경이 되는 '공'의 속성에 대한 묘사이다. 제법諸法은 일체의 법이라는 뜻이며 온 우주 삼라만상의 물질과 에너지와 힘등의 자연 법칙을 의미한다. 앞의 줄에서 말했듯 모든 것은 공의 모습이기에 공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고 죽거나 늘어나고 감해지는 것이 아니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그러므로 공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5온, 존재)도 없고 눈,귀,코,혀,몸,의지(감각 수용체. 관찰자)도 없으며

따라서 색,소리,향기,맛,촉감,법칙(상호작용)도 없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이며 무의식의 세계이다. (6계중 처음과 끝 두 개만 들어 말한 것)

=> 역시 '공'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속성을 묘사하고 있다.

공에는 존재, 관찰자, 상호작용이 없고 따라서 시스템(계)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컴퓨터 게임이나 매트릭스를 생각해보라. 매트릭스가 구현한 세계에서 중력의 법칙은 매트릭스가 만들어낸 것이다. 컴퓨터 게임의 배경이 되는 맵의 구현 이전의 상태에서는 물리법칙도 없다. 물질과 에너지와 역학적 힘이 공을 배경으로하여 존재하는 것이기에 공에는 자연 법칙이 없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공에는 어리석음도 없고 어리석음이 다하는 일도 없으며 늙어죽음도 없고

늙어죽음이 다하는 일도 없으며(12연기가 없고) 고집멸도의 사성제도 없다.

=> 물질, 역학, 자연법칙과 자아 및 모든 존재의 배경이 되는 공은 연각승과 성문승의 너머에 있다.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타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공에는 앎도 없고 얻음도 없다. 아무런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나니 줄처럼 엮인 속세의 걸림(줄 괘罫를 '가'발음한다)이 마음에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 본말전도된 꿈같은 생각을 멀리하고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 존재의 배경이 되는 공은 앞서까지 묘사한 것과 같은 것인데, 시스템 안의 앎과 얻음으로 시스템을 넘어갈 수 없으니 (가상현실 시스템 안에서 이 현실이 허상임을 증명할 방법은 이론상 없다.) 보살 곧 수행자는 상위자아로 넘어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수행하여 차안이 몽상임을 파악 할 수 있고 열반에 이른다.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먁三菩提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더 이상 위가 없는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진언이고 가장 밝은 진언이며 위 없는 진언임을 알라.

=> 이미 적었듯이 반야 바라밀은 상위자아의 인식으로 넘어가는 것이며 이것이 부처님이 법신불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무엇과도 비길 데 없는 진언이니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고 참으로 진실하여 허망함이 없다.

이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노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스바하 (한역음사) (세번반복)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범어로는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테 카테 파라카테 파라삼가테 보디 스바하

이고, 의미는

gate = 가자

para = 피안

sam = 우리말로 승. 소승 대승 이승 저승. parasam = 피안승.

Bodhi = 깨달음. 보리.(위 없는 깨달음 =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붓다 = 깨달은 자 라는 의미가 된다.)

스바하 = 이루어져라. '아브라카타브라' 처럼, '이렇게 되어라' 라는 말이다.

가자 가자 피안 가자 피안승가자 보리 스바하

이 말은 '피안승 가는 보리가 이루어져라' 라는 말이다.

이런 진언의 용도는 이렇다. 참선을 할 때 마음이 가라앉으면 의식이 가라앉으면서 자기 의지가 옆길로 샌다. 꿈에서 생시 같은 판단력을 유지 못하고 좀 다르게 행동하듯이. 이런 효과를 없애고 마음을 본래 의지에 집중시키기 위한 구절이다.

반야심경은 워낙 유명한 덕에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영화제목으로도 사용되었고 (이 영화도 피안을 현실 도피의 의미로 썼다.) 왕조현 나오는 영화 천녀유혼에서도 도사가 '반야바라밀!'을 외친다. 거기 나오는 귀신 쫓을 때 쓴 불경도 반야심경이다.

이제 법화경의 내용을 살펴볼 차례이다. 그 전에 3승의 구조를 정리하도록 하자.

성문승에서 길을 찾는 마음을 내고 -> 연각승에서 '존재관 및 존재의 제1원리'를 깨우치는 것을 거쳐 '존재의 본질을 모르고 있음이 문제'임을 이해한 후 -> 보살승으로 이어져 존재의 배경인 '공'을 이해하고 상위자아로의 반야를 수행하여 존재의 본질을 인식한 후 -> 법화경에서 가르치는 '완전히 상위자아 법신불에 이르러 부처가 되며 단지 이를 뿐만이 아니라 법화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상위자아로의 회귀 그 이상의 것'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3승과 그것을 포괄한 1승이 이루어지는 순서다.



3 무량의경 해주



법화삼부경은 천태종의 중심 경전이다.

이는 무량의경, 묘법연화경, 관보살행법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개경, 본경, 결경이라고 한다. 무량의경은 법화삼부경중 첫번째 경이며 짤막한 개괄에 해당한다.

제1품 덕행품

이 가르침을 받을만한 대중이 어떤 행을 닦아왔는가를 설명한다.

이를테면 '이 가르침은 몇 학년 용인가'를 얘기하는 셈이다. 우리가 교육 진도의 난이도를 '몇 학년용'처럼 일차원상의 한 점으로 특정할 수 있는 것은 교육과정이 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의 가르침이 대상으로 하는 중생들의 위치는 끝없이 다양하여 '학년'처럼 고정된 교육과정위에 일렬로 나열하여 위치를 지정할 수가 없다. 때문에 경은 이 가르침을 습득할만한 경지에 이르려면 어떤 수행을 해온 상태여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무량의경은 이 정도 경지일때 딱 알맞은 가르침이라는 내용이다.

이 경의 대상은 (보살52계위중 아래에서 11번째~20번째인) 십지 이상의 경지에 이른 법신대사로서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지혜를 닦고 번뇌를 벗어나 그 경지에 이름을 자각하는 오분법신을 성취한 이들이며 선정 삼매 무위 무욕도 갖춘 상태인 이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고집멸도의 사제, 12연기, 6바라밀을 이미 익힌 상태이며 이로서 다른 중생들을 가르쳐 도와온 수준의 대중이라는 것이다.

무량의경은 4제-12연기-6바라밀의 다음 단계라는 의미다.

제2품 설법품

본론이다.

위와 같은 보살이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려면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부처께서 가르치시길

한가지 가르침이 있으니 이름이 <무량의>다.

4제-12연기-6바라밀의 다음단계로서 보살이 무량의를 수양하고자 한다면

일체법을 관찰하여 법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법은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 법의 성질을 형용하고 있다.

어떤 개념, 가령 사랑이 뭔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면 그 성질을 형용하는 게 좋다. 본질을 말로 설명하기 위해선 대응하는 개념이 있어야 하는데, 대응하는 개념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겐 말로 본질을 설명하는 것보다도 그 드러나는 성질을 형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따라서 법을 모르는 자들에게 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법의 성질을 형용하고 있다.

법은 공하고 고요하다. 법은 크거나 작은 것이 아니고(=배경에 항상 존재하여 크기가 있는 존재가 아님)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배경에 항상 존재함) 머무르지도 움직이지도 않고(=배경에 항상 존재하여 위치가 없음)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으며(=발전하고 퇴보하지 않음) 마치 허공처럼 두가지가 없다.

이러한 성질이 형용하는 대상을 개념에 담아 설명하면 만유재신의 법신이다.

우주의 배경에 항상 존재하는 만유재신의 법신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의미다.

본래 법신이 이러하거늘 법신의 하위자아로서 본래 이런 고통에 빠져 있지 않아도 될 중생이 무명에 빠진 탓에 육도윤회를 하며 고난을 받는 현실임을 관찰하고 자비심을 내어 고통에서 중생을 건져내고자 할 것,

또한 제법(모든 존재와 모든 생각. 색, 심)에 생-주-이-멸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여 제법의 모든 움직임이 생주이멸에 의하는 것이며, 다시 그 생주이멸이 생각 찰나마다 일어나고 있음을 이해할 것, 즉 제법이 모두 매 찰나의 생주이멸의 연속체임을 이해할 것을 가르친다.

(생주이멸은 시간에 기반해 일어나므로, 제법이 찰나의 생주이멸의 연속체라는 건 TV화면처럼 찰나들의 연속체라는 뜻이 되는데 이것이 내겐 '불연속적인 양자화된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읽힌다. 시간이 연속적인 흐름인지 양자화 된 흐름인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시간 양자 관련 다음 링크를 참조할 수 있다. http://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cfm?id=is-time-quantized-in-othe

링크 내용 요약하면 '아직 아무도 모른다.'

경전의 설명으로부터 시간이 양자화 되어 있을 것 이라는 영감을 얻을 수는 있으나, 그 이상의 넘겨 짚기는 그만두자. 증명할 수 없으면 어차피 알아도 아는 효과가 나지 않는다.

마음이 생주이멸의 연속체인지 여부를 관념적으로 그러려니 하는 것이 아닌 참선으로 직접 확인 하도록 해야 한다.)

중생의 근기와 성품과 욕망은 한없이 다양하여 그들이 각자 갖는 위치는 한없이 다양하다. 도달할 목적지는 하나이나 현위치가 다양하므로 가야할 방향(=가르침)도 한없이 다양하며, 가야 할 방향이 한없이 다양하므로 실제로 갖는 의도(의)도 한없이 다양하다.

'의'는 벡터다.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져서 한량 없는 시간이 흐르면 결국엔 부처가 되는데 그것이 누가 시켜주는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의지로 되는 것이므로 자유의지자의 의는 크게 보면 결국 자기의 현위치에서 궁극의 법에 이르는 벡터를 의미한다.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가운데에서도 크게 보면 나타나는 이러한 경향성이 불성이다.

도착지인 법은 하나이나, 현위치가 무량해서 무량의다. 도착지인 하나의 가르침이란 모양없음의 '무상'이다. 법신은 모습도 없으며 모습도 아니라서 참된 실상이라 한다. (=모습이라는 관념이 스크린에 비춰진 상이라할때 스크린은 모습 이전 단계의 것이라서 모습이 없다.) 이상의 가르침에서 '만유재신'과 '모든 자유의지는 성불에 이른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이에 대장엄보살이 이제까지 가르친 내용과 지금 무량의경이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무엇이 달라서 이를 익히면 무상등정각에 빨리 이른다 하는지 묻는다. 부처께서 가로되 "중생의 위치들이 다 달라서 그에 맞추어 말하느라 지금까지 가르친 것은 방편이었으니 미처 실상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지 못한 것이다."

학생의 단계에 맞추어 가르치노라면 이전의 가르침과 중간의 가르침과 나중의 가르침은 다 학생에게 알맞은 가르침이면서도 내용이 서로 완전히 같지는 않기 마련이다.

"사제 십이인연 육바라밀은 서로 같지 않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4과는 서로 같지 않으며 방편과 실상은 서로 같지 않다. 그래서 표현한 말이 같을지라도 내재한 뜻(이해하여 얻어가길 바라는 의도)이 다르고 뜻이 다르므로 중생의 이해가 다르고 이해가 다르므로 얻는 결과도 다르다.

사제에서 가르친 '고'와 '공'과 '무상'과 '무아'와

십이연기 육바라밀에서 가르친 '고' '공' '무상' '무아'의 뜻은 각각 서로 다르다.

부처는 하나의 법신으로 수없이 많은 몸을 나타내며(만물의 상이 스크린에 비치듯이) 이는 2승이나 십주보살로도 이해 못하고 오로지 부처만이 이해하는 경계이다.(2승과 십주보살은 피안승으로 넘어가는 반야바라밀보다 이전 단계이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보살이 무상등정각에 이르려면 이러한 궁극적 가르침의 입장에서 설하는 무량의경을 닦아야 한다."

제3품 십공덕품

도를 설명함에 있어 불경은 그 도의 공덕이 이러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는 대상을 직접 설명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경우 그 대상이 일으키는 효과로서 표현하는 것이다. 무량의경이 설법하는 도는 무엇인가. 그 효과로부터 미루어 알 수 있다.

무량의경의 도는 만유재신론의 도이다.

그 열가지 공덕은 다음과 같음을 밝혀서 설법품에서 이해한 도를 세부까지 이해하도록 돕는다.

첫째는 나도 남도 법신에 근원을 두므로 나와 남의 경계를 지어 생기는 나쁜 것들을 없애준다. 내가 본래 법신의 하위자아임을 이해하여 보리심을 내게 하며, 타인에게 자비하는 마음이 없는 자에게 타인이 나와 하나임을 알아 자비하는 마음을 내게 하며, 살생하는 자에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타인을 질투하는 자에게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애착있는 자에게는 버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버릴수 있게하는 마음을 내게 한다. 내것의 경계를 지어 아끼고 탐내는 자에게는 배푸는 마음을, 남과 비교하여 교만한 자에게는 남이라는 비교 경계가 없어지메 겸허하게 계율(내가 나아갈 길을 가기 위해서 따라야 할 도리)을 지키는 마음을, 남에게 성내는 버릇이 많은 자에게는 참고 견디는 마음을 내게 한다. 하략. (모두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고 법신의 관점에서 보게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번째는 무량의경은 만유재신 법신불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이므로 만유재신론이라는 한구절의 핵심만으로도 그로부터 능히 나머지 의미를 얻을 수 있고 무량한 의에 맞추어 무량한 이해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무량의경의 핵심 아이디어는 만유재신의 법신이라는 것이며 그것을 근본으로 해서 파생되는 의미들이 무량하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무량의경의 만유재신 법신에 대한 가르침을 (머리로)이해하면 비록 아직 번뇌가 있고 제도(구제)되지 못했더라도 이해한 바에 힘입어 생사에 두려움이 없어지며 스스로 아직 제도 되지 못한 채로도 다른 이들을 가르쳐 이끌 수 있다. 이는 무량의경이 튼튼한 배처럼 잘 갖추어진 도구라서 중생들이 스스로 타고 피안으로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네번째는 무량의경의 만유재신 법신의 가르침을 알면 비록 스스로가 아직 미숙하더라도 근본을 알고 있기에 연설하는 내용이 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다섯번째는 이 가르침을 익힌다면 아직 미숙하고 범부의 행실을 다 버리지 못했을지라도 근본 가르침이기에 능히 대보리도를 나타낼 수 있다.

여섯번째는 무량의경을 익히는 자가 아직 미숙할지라도 근본 가르침이기에 그가 가르치는 내용이 부처가 없는 시기에 중생을 올바르게 이끄는 가르침이 된다.

일곱번째는 이 근본 가르침에 의지해 수행하다보면 육바라밀을 아직 수행하지 못했어도 내 앞에 절로 나타나게 된다. 육바라밀은 상위자아로 올라가는 수행이므로 법신을 이해하면 자연히 할 바가 나타난다. (육바라밀은 상위자아로 올라가는 수행이다. 최상위 자아로서의 법신을 이해하면 자연히 상위자아로 올라가는 육바라밀의 수행을 해야 함을 알 수 있는 탓이다.) 그러면 무생법인을 얻어 생사번뇌가 끊어지고 원행지에 이르러 대보살이 된다.

여덟번째는 지계 인욕 보시 자비를 가지고 무량의경을 남에게 설해주면 믿지 않던 사람이 홀연히 이해하고 믿어 익히게 된다. 무량의경에 근거한 만유재신론의 가르침이 앞뒤가 맞고 설득력이 강하단 얘기다.

아홉째는 무량의경으로 만유재신 법신을 알고 수행하면 전세의 자아의 업이 일시에 사라진다. 반야바라밀을 얻어 상위자아에 이르기 때문인데 이때 하위자아의 업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열번째는 무량의경을 익히는 자가 자기가 익히고 해설하며 다른 사람에게 수행하게 한다면 다른 사람을 이끈 공덕만으로도 계위를 얻으리라. 가르치고 해설하려면 스스로 이해할 수 밖에 없으며 범부의 경지인 초발심때부터 일체 중생 구원의 대비심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이해'와 '마음'이면 도를 얻어 나가기에 충분하다. 남을 가르치는 행위가 자기 공부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의미다.  


무량의경의 가르침은 법화경에서 더 본격적으로 상세하게 다뤄진다.

'모든 자유의지는 성불에 이른다'라는 부분에 대한 인문학적인 접근은 하기 링크 참조.

가치관 카테고리 요약



4 법화경 해주



개괄해서,

묘법연화경의 제목은 '연꽃 같은 묘한 법에 대한 경'이라는 의미다.

법화경의 내용은 '깨달음에 이르는 세가지 탈 것인 성문 연각 보살의 3승을 아우르며 넘어서는 1승'에 대한 것인데, 그 1승이 연꽃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꽃의 특징은 이러하다.

- 연근 줄기가 길게 이어지다가 한송이씩 여러 연화를 피운다.

- 연근은 진흙을 기어야 연화를 피운다.

첫째 특징은 연근 줄기가 길게 이어지다가 한송이씩 여러 연화를 피움이 법신과 부처의 관계와 유사함을 의미한다. (여래수량품)

둘째 특징은 혼탁함을 누빔으로써 꽃을 피우는 것이 법신불이 혼탁한 사바세상을 지은 후 부처를 낳는 것과 유사함을 의미한다. (제 6권, 7권)



묘법연화경 제 1권


제 1품   서품


제 1 장 이 경을 설하신 때와 장소와 법문을 들은 대중


제 2 장 부처님이 여섯 가지 상서를 나타내심


제 3 장 부처님이 왜 이런 상서를 나타내시는지 미륵보살이 문수사리 보살에게 물어보다


제 4 장 문수사리가 답하길 부처님이 이제 곧 큰 법을 설하실 것이다. 이전에 이와 같은 상서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부처님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하셨으니 이번에도 그러할 것이다.


제 2 품   방 편 품


제 1 장 부처님께서 삼매에서 일어나 사리불에게 설하셨다.


1. 부처님의 설법 하시는 방편과 진실 두가지 지혜는 수양이 깊은 사람으로서도 참뜻을 알기 어렵다.

2. 이러한 설법이 가능하려면 진실을 대상에 맞추어 알려줄 수 있는 방편바라밀과 진실을 아는 지견바라밀을 다 갖추어야 한다.

3. 부처님의 마음과 상태는 이와 같다 : 자비희사 사무량심으로서 사랑하고, 가르침이 전해지는데 장애물이 되는 네가지 거리낌이 없는 사무애, 가르치는 대상인 업과 사람을 아는 지혜의 힘인 십력과, 모든 것을 완벽히 알고 있으므로 가르치고 인도함에 두려움이 없는 사무소외, 그리고 선정해탈삼매이다.

4. 부처님은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진리에 도달하였다.

5. 부처님이 성취한 궁극의 진리는 이미 깨우친 자만이 모든 법의 참모습을 알뿐 말과 뜻으로 전할 수 없다.

6. 이 지혜는 이른바 이와 같은 모양[相], 이와 같은 성품[性], 이와 같은 체(體), 이와 같은 힘[力], 이와 같은 작용[作], 이와 같은 원인[因], 이와 같은 인연[緣], 이와 같은 결과[果], 이와 같은 갚음[報], 이와 같은 근본과 끝과 구경[本末究意]의 만물의 십여시를 깨우친 것이다.


제 2 장 대중이 부처님이 왜 진짜 깨달음은 알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는지 의심하여 사리불이 물어본다.

부처님은 이를 가르치면 의심만 깊어질만한 내용이라며 만류하나 사리불이 거듭 물어 요청한다.


제 3 장 부처님이 묘법을 설하시다.

아직 들을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증상만은 이 법을 듣지 않는 것이 낫다.

부처님은 오직 중생에게 부처의 지혜를 가르치는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한다.

삼승은 없고 오직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 일승만이 있다.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혜를 보이고,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들어가게 하여 보살에 이르면 부처님은 그러한 보살을 교화한다.

삼승은 중생의 수준에 맞추어 방편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곧 중생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며 이것이 일승임을 알아라.



묘법연화경 제 2권


제 3 품   비 유 품


제 1 장 부처님이 하신 오직 일승뿐이며 부처에 이르리라는 말씀을 사리불이 이해하고 기뻐한다.


제 2 장 사리불에게 수기주다.

이 묘법연화경은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다. 사리불에게 이제 법화경을 설하노니 사리불은 장차 부처가 되리라.


제 3 장 천인들이 이 말씀을 들으며 기뻐하였다.


제 4 장 사리불이 물어본다. 생로병사를 넘어 열반에 이른다고 가르치신 이전의 가르침에 따라 '나' 와 '있고 없음'에의 집착을 넘어 이제 열반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더니 지금 그게 다가 아니라고 하시니 전에 하신 말씀과 왜 다른지. 부처님이 답하길 방편으로 설한 것이다.

제 5 장 불타는 집의 비유. 불타는 집에 아이들이 있는데 불이 난줄도 모르고 나오라고 불러도 장난치기에 바쁘다. 이에 아버지는 장난감을 보여주며 선물을 줄테니 나오라고 한다. 아이들은 장난감에 혹해서 밖으로 나온다. 그러자 아버지는 본래 보여준 장난감 뿐만이 아닌 하염없는 재산을 나눠 주었다. 장난감은 나오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제 6 장 이와 같이 부처가 중생에게 성문 벽지불 불승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삼승을 설한 것은 방편이다. 가르침을 들어 배우기를 잘하는 이가 성문, 홀로 조용히 수행하길 즐기면 벽지불, 배워 가르치고 중생 제도에 나서면 불승. 그러나 이는 다 일승의 방편으로 설한 것이다. 사실은 일승만이 존재한다.


제 7 장 게송

불타는 집의 비유처럼 부처가 설하는 것은 방편이며 부처가 되는 일불승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제 8 장 게송

가령 고 집 멸 도 사성제는 각각의 상황에 맞는 방편이니, 애욕에 집착하는 자에게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다 라고 고성제를 설하여 깨우침을 얻어내니 이는 진실과 다름이 없다. 고통의 원인이 탐욕임을 몰라서 집착하면 이를 끊어내는 가르침으로서 집성제를 설한것이다. 멸성제를 통하여 멸도를 얻는다고 하나 이는 모든 것을 깨우치는 참멸도에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이다.


제 9 장 게송

이 법문은 어려우니 사리불 조차도 오히려 믿는 마음을 가지고서야 들을 수 있는데 다른 성문 벽지불은 어떠하겠는가. 부처의 말씀이니 믿어서 따르기는 하겠지만 그들 자신의 지혜는 아니다.


제 10 장 게송

교만하고 게을러 스스로 자만하는 자나 식견이 낮은 범부, 곧 지혜가 되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 경전을 설하지 말라. 그가 이해치 못하여 이 경전을 비방하면 그에게 죄의 과보를 뒤집어 씌우는 격이니.

오직 지혜가 되고 부처님의 법을 구하는 근기가 높은 이에게만 이 경을 설하여주라.





제 4 품   신해품


제 1 장 나이가 많이 든 몇몇 제자들이 너희가 부처와 같아질 것이라는 처음 듣는 설법을 듣고 또 사리불이 수기 받음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제 2 장 그들이 말하기를, 저희는 스스로 이미 깨달음을 얻었고 노쇠하니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생각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오로지 공에 의해 생긴 것으로 원래부터 형상이 없으며 그 실상의 세계는 인연의 조작을 넘어서 상주불변의 존재이다.' 라는 생각 정도에만 머물러서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이미 깨우칠만큼 깨우쳤다고 생각하여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으나, 지금 너희가 부처가 되리라는 말씀과 수기주심을 보니 마치 구하지 않았던 보배를 갑자기 얻은 양 기쁘다.


제 3 장 돌아온 아들의 비유. 부자의 아들이 가출하였다가 긴 세월을 지나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아들임을 알아보고 불러 재산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아들은 지레 겁을 먹어 두려워 기절하였다. 이에 아버지는 종을 시켜 아들에게 거름치우는 비루한 일을 품삯만 배로 준다는 하찮은 이득을 더하여 시켜주고, 차츰 보배 창고를 지키는 것과 같은 큰 일을 시켜 아들의 마음이 커지도록 한 후 마침내 온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아들은 크게 기뻐하며 바라지도 않았던 보배가 절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제 4 장 제자들이 앞서의 비유를 풀건데, 소승법에 매달려 하루 품삯을 얻고서는 얻은 것이 많다고 좋아하였으나, 이는 자기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제 대승법을 가르치시니 마땅히 물려받을 것이긴 하나 구하지 않던 보배가 생긴듯 기쁘다고 한다.


제 5 장 게송. 3장과 4 장 내용.


제 6 장 게송. 부처님은 최고 진리를 중생에게 맞게 방편으로 낮은 법으로서 설하신다. 모든 욕락을 아시고 중생이 감당할 정도를 아시는지라 중생의 수준에 따라 분별하여 다양한 비유를 쓰시고 일불승을 설하시려 삼승을 설하신다.





묘법연화경 제 3권


제 5 품   약초유품


제 1 장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너희 말이 맞다. 여래는 모든 법이며 방편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알며, 또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안다.

제 2 장 약초숲의 큰 비의 비유. 약초 숲에 비가 내리면, 비는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 이지만 받는 자의 종류와 성질에 따라 비를 받아 각각 다르게 자라고 꽃과 열매를 맺는다.


제 3 장 여래께서 설하시는 법 또한 숲에 내리는 비 처럼 한 모양 한 맛이니 해탈하는 모습, 여의는 모습, 멸하는 모습이며 필경에는 일체지혜에 이르며 일체가 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중생들이 여래의 법을 따름으로써 얻는 공덕은 스스로는 알지 못하니 숲의 약초들이 스스로는 자기 성품을 알지 못함과 같다. 중생의 근기와 성품등은 오직 여래만이 아신다. 여래께서는 중생의 마음과 욕망을 아셔서 일체지혜의 씨앗, 일체가 공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으나, 너희 제자들은 드문 이들이라 근기에 따라 설하니 능히 믿는 것이다.


제 4 장 게송

비가 내려 온 숲을 적시면 비는 한가지 비이나 초목은 제각각 무성하듯

여래께서 설하심은 한가지 맛이나 중생은 이 법을 받아 제각각의 공덕을 얻는다.

그 내용은 해탈이자 열반에 이르는 길이니 대승법을 위해 설하며

비가 평등하게 내리듯이 여래의 가르침도 평등하게 내린다.

신분 상하 귀천, 계행을 바르게 하는이나 그렇지 않은이나 총명하나 둔하나 상관없이 평등하게 내리나,

받아들이는 것이 제각각 다르고 제각각 다르게 무성한 것이다.

사람이나 하늘이나 왕 등은 작은 약초,

번뇌를 초월하고 도의 기쁨을 얻어 홀로 연각을 키우면 중품 약초,

부처의 성품을 찾아 부처를 이루려 하면 이는 상품약초.

진심으로 불도를 닦아 자비를 늘 행하며 스스로 성불을 이룰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는 작은 나무

중생 제도에 힘쓰는 보살은 큰 나무라.

부처님의 평등한 법은 한 맛인 비와 같고 중생들의 성품따라 받는 것이 다름이다.

여러가지 인연들과 비유로써 가르치는 모든 것은 일승을 위한 방편이며 여러 부처 또한 항상 이와 같다. (세상의 모든 인연과 가르침이 이러하다.)

멸도가 다가 아니요 오직 보살도를 닦아 다 배우면 부처를 이루는 것이 참다운 법이다.

(생이 가르치는 바가 부처의 설법과 효율은 다를지언정 추구하는 바는 같다고 할때에

약초유품이 가르치는 바는 이와 같다.

생은 자연법칙과 같이 평등하여 선인이든 악인이든 현명하든 무지하든

인과와 법칙을 벗어나지 않게 늘 같이 주어지나

각자가 배워 받아들이는 바가 다를 뿐이다.

가지가지 인연이며 현상으로 배울바가 여러하나 결국 궁극적으로 배울 바는 오직 부처가 되는 것 뿐이다.

생은 평등하며 그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 뿐이다.)




제 6 품   수기품


제 1 장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장차 먼훗날에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셨다. 이에 다른 세 제자가 저희도 부처가 될 수 있는지 수기를 여쭙는다.


제 2 장 다른 세 제자에게 수기를 주셨다. (부처님의 세상을 묘사하는 비슷한 말이 각각 반복된다. 좋은 이미지의 반복을 통한 명상에로의 인도이다.)




제 7 품   화성유품


제 1 장 부처님이 아주 먼 옛날(아마도 이 세계 이전의 세계를 지칭하는 시간)의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 2 장 그 옛날의 부처님이 출가하기 이전의 아버지와, 열여섯 아들과, 각 세상의 범천왕들이 각각 찾아와 찬탄하고 제도를 청한다. (역시 묘사 반복)

이에 부처님이 가르침을 펼치셨다.

'이것이 괴로움이며, 이것이 괴로움의 모임이며, 이것이 괴로움이 없어짐이며, 이것이 괴로움을 없애는 길이라' 하시고 또한 널리 십이인연의 법을 말씀하셨다.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생기고, 행을 인연하여 식이 생기고, 식을 인연하여 명색이 생기고,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이 생기고, 육입을 인연하여 촉이 생기고, 촉을 인연하여 수가 생기고, 수를 인연하여 애가 생기고, 애를 인연하여 취가 생기고, 취를 인연하여 유가 생기고, 유가 인연하여 생이 생기고, 생을 인연하여 늙고 죽음과 근심· 슬픔· 고통· 번뇌가 없어지느니라' (?)

이를 가르치신 후에 부처님의 열 여섯 아들들이 더 높은 가르침을 청하자 부처님은 오랜 세월을 지난 후에 묘법 연화경을 설하여 주셨다.


제 3 장 그 열여섯 아들들이 각각 해탈하여 부처가 되었으니 석가모니불이 그 하나이다.

'내가 멸도한 뒤에 어떤 제자가 있어 이 경을 듣지도 못하고 보살의 행할 바를 알지도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얻은 공덕으로 멸도하였다는 생각을 내어 열반에 든다고 하면'

'대중들이 또한 청정하고 믿고 이해하는 것이 견고하여 법의 빈 속성을 깨달아서 깊은 선정에 든 것을 알면'

법화경을 설하리라 하시니, 먼저 이러한 수준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그 사람이 법화경을 배우기에 합당하다.


제 4 장 너무 먼 길 앞에 좌절하지 않도록 신기루를 보여 기운을 북돋는 것처럼 여래는 중생의 마음을 살피어 중간 목표를 보여주기 위해 방편과 비유로서 설하는 것이다.


제 5 장 이에 부처님은 방편으로 성문과 연각의 두 길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제 6 장 게송, 과거의 인연 (2장)


제 7 장 게송, 현재의 인연 (3장)


제 8 장 게송, 방편의 의미 (4장)


제 9 장 게송, 방편의 실상 (5장)



묘법연화경 제 4 권


제 8 품   오백제자수기품


제 1 장  뛰어난 성문 부루나를 수기 주시다.


제 2 장  게송 (1장). 오백 아라한들에게도 수기를 주시다. 다시 게송. 이 자리에 없는 다른 성문 여러 대중들도 이와 같다.


제 3 장  제자 기뻐 가로되 이미 갖고 있었으나 알지 못했던 보배를 발견한 듯 하다 한다.



제 9 품   수학무학인기품


제 1 장  아라한이 되지 못한 이들, 배우는 이들과 다 배운 이들이 수기를 청하다.


제 2 장  배우는 이와 다 배운 이 이천인이 훗날 한꺼번에 성불하리니 같은 이름의 보상여래 부처님이 되리라.



제 10 품   법사품


제 1 장  법화경은 위없는 깨달음을 설하는 경이니 이를 수양하는 이는 수기를 받을 것이며 그는 부처님의 일을 하는 이이니 마땅히 공경하라. 법화경은 부처님이 설한 모든 경중에 제일의 경이다.


제 2 장  많은 경 중에서도 법화경은 가장 믿고 이해하기 어려우니 부질없이 함부로 사람들에게 전해주지 말라. 모든 보살의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은 모두 법화경에 속하니 땅을 파서 우물을 낼때 물이 가까워지면 젖은 흙이 나타나듯 법화경을 아직 모른다면 깨달음에 아직 거리가 먼 것이요 법화경을 수양할 인연에 이르렀다면 깨달음에 가까워 지고 있는 것임을 알고 힘을 내라.

대중을 위해 법화경을 설할때에는 여래의 방과 여래의 옷과 여래의 자리에서 설할지니, 여래의 방이란 중생에게 대자대비한 마음이요 여래의 옷이란 부드럽고 온화하고 인욕하는 마음이요 여래의 자리란 모든 법이 차별없이 평등한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설하면 법화경 설법에 어려움이 덜어질 것이다.


제 3 장  게송



제 11 품   견보탑품


제 1 장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심에 다보탑이 나타나 찬탄하기를

묘법연화경은 평등한 큰 지혜로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라고 하였다.

'평등한 큰 지혜'에서 불경에서 말하는 평등함을 자연법칙이 평등하듯 하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법화경이 가르치는 지혜는 자연법칙과도 같은 것이며 이를 수준이 되는 보살에게 가르칠 때 그로부터 얻음이 있는 것이다.


제 2 장  다보여래의 서원대로 분신불이 모인다. 그런데 그 분신불은 석가모니 자신의 분신불이다. 곧 모든 부처님은 서로의 분신이다. 부처님은 법신불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미간 백호에서 광명을 놓으시니 세상에 이변이 일어나 온 세상이 바뀐다.


제 3 장  다보탑이 열리고 과거세상에 열반하신 다보부처님이 나타난다. 석가모니불이 법화경을 설하신다.


제 4 장  게송


제 5 장  게송. 법화경은 세상의 근본 배경원리에 대한 내용이기에 물리법칙에 선행한다. 법화경을 이해하고 설하기는 대단히 어려우니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것 보다도 어렵다. 이는 법화경을 이해하면 물리법칙을 능가하는 이적이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제 12 품   제바달다품


제 1 장  불경에서 묘사하는 최악의 악인 제바달다 조차도 한량없이 오랜 미래에는 성불하리라.


제 2 장  여성이 성불 함이 결코 남자보다 늦지 않다.




제 13 품   권지품


제 1 장  보살들이 법화경을 널리 설할 것임을 소원한다.

제 2 장  수기를 받은 이들이 법화경을 널리 설할 것임을 소원한다. 부처님의 어머니와 이모 또한 수기를 받고 마찬가지로 소원한다.

제 3 장  하지만 부처님이 침묵하시고 가만히 보기만 하실뿐 분부를 내리지 않는다. 이에 보살들이 저희가 법화경을 설함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나 지켜주시옵소서 하고 고쳐 말한다. 법을 설하고 포교함은 의무로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포교는 의무로 퍼트릴 것이 아니나 중생 자비심으로서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미묘한 것이다.





제 5 권


제 14 품   안락행품

(해설 미완함)

보살이 이 경을 설법할때에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가에 대해 가르친다.

인욕하여 부드럽고 순하며 마음이 놀라지 말고 ...

권력자와 친하지 말고 유물론자(로가야타)와 역유물론자와 친하지 말고

여인 앞에서 잘난척 하는 마음으로 법을 설하지 말고 ...

다른 구도자들을 업신여기는 말을 하지 말고 비꼬지 말고 남의 허물이나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설법을 믿지 않아도 원망말고 반드시 내가 성불하면 이들을 위해주리라 생각하라

행이 바르면 올바른 해설이 절로 떠오를 것이다.


제 15 품   종지용출품


다른 세계에서 온 보살들이 이 세계에 머물면서 법화경을 설하겠다 하자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미 이 사바세계에는 많은 보살들이 있어 법화경을 배우고 익히고 가르칠 것이니 너희는 그럴 것 없다고 한다.

이때 무수히 많은 보살들이 나타나 부처님께 인사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여래는 작은 병도 작은 괴로움도 없고 모든 중생을 교화함에 피로함도 없나니

이 모든 보살들은 내가 교화한 이들이라 하신다. (어떤 병도 괴로움도 없고 피로함도 없다 하심은 법신불을 의미한다.)

다음 세상에 부처를 이룰 미륵보살과 다른 대중들이 의심하기를 이 보살들은 어디서 왔는가 하여 부처님께 여쭙는다. 부처님은 이들 모두가 내가 부처를 이룬 후에 교화한 보살들이라고 하신다. 이에 대중이 다시 의심하기를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지 이제 고작 40여년인데 어찌 이 많은 보살을 교화하셨는가 하여 여쭙는다.


제 16 품 여래수량품


부처님이 세번을 반복하여 지금부터 하는 얘기가 진실임을 믿고 이해하라고 하신다.

(이전까지의 내용은 그간의 가르침이 전부가 아니라 너희가 모두 부처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고, 이제 그 부처가 무엇인지 법신불로서의 이야기를 지금 처음 꺼내신다.)

부처님이 성불하신게 석씨 왕궁을 나와 40여년전에 이룬 것이라고들 알지만, 그게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이전에 이루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고 또한 다른 세계들에 있으면서 중생을 교화하였다.

여래는 과거부터 한량없는 미래에 이르기까지 살아있으나 방편으로 설하기 위하여 중간에 여러 다른 이름들의 부처님으로 출현한 것이다. (모든 부처는 하나요 법신불이다.) 어느때에는 부처님의 본체를, 어느때에는 특정한 모습을 가지고 화신한 부처님을 설하기도 하며 어느때에는 부처님의 몸으로 이세상에 출현하며 또 어떤 때에는 부처가 아닌 다른 성인이나 훌륭한 사람의 모습으로 출현하기도 한다. 어느때에는 부처님의 직접 구제를, 어느때에는 간접적인 구제를 보이기도 한다.

중생이 삼계를 보는 것과 여래가 삼계를 보는 것이 다르니, 여래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데 그 본질은 이러하다. 모든 것이 나고 죽고 변화하는 모습은 현상에 불과하며 실상은 사라지지도 나타나지도 않는다. 모든 생명은 그대로 살아있을 뿐 이 세상에 있다거나 세상을 떠난다거나 하는 일은 본래 없다.

(온 세상의 본질은 법신불 이라는 관점을 설명하는 중)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멸도하신다 하는 것은 중생들이 부처님을 만나뵙기 어려운 줄을 모르고 항상 함께 있으면 선근을 심고 노력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하여 방편으로 여래가 참으로 죽거나 사라지거나 떠나는것이 아니면서도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제 17 품 분별공덕품


여래수량품의 내용을 이해하면 그 공덕과 깨달음이 매우 큼을 부처님이 미륵보살에게 얘기한다. (여래수량품의 내용은 세상의 본질과 법신불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보살들이 어떤 다라니를 얻었고,

어느 보살들이 몇번 다시 태어나는 동안에 위없는깨달음을 얻을 정도가 되었으며

어느 보살들은 지금 나도 부처의 경지에 이르리라는 위없는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켰다.

또한 반야바라밀을 제외한 다섯 바라밀로 얻는 공덕을 모두 합쳐도 여래수량품을 이해하면 얻을 수 있는 공덕에 백천만억분의 일도 되지 않을만큼 여래수량품의 내용은 중요하다. (반야바라밀은 법신불 쪽으로 건너가는 바라밀이라서 이렇게 비교될 수 없다.)

여래의 '나의 수명이 무한하다'는 말을 듣고 깊이 이해하면 그 사람은 부처님께서 지금 기사굴산에서 여러 대중들에게 설법하시듯이 이 세상에 항상 계시면서 설법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 (법신불이 이 세상에 항상 중생을 교화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계심을 이해하였으니 부처님이 교화하고 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거친 말법 세상에 이 법화경의 가르침을 듣고 단 한사람이라도 이 가르침을 알도록 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이 참다운 신앙의 경지이다. (내실없는 무분별한 증식은 종양과 같으니 그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다.) 하물며 이 법화경을 읽고 익히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사람은 머리위에 부처님을 항상 모시는 격이다.

이런 사람은 탑이나 절을 세우거나 공양을 하지 않아도 되나니 법화경을 익히고 세상에 펼치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탑을 일으키고 공양함이 되기 때문이다. (돈을 내고 피트니스클럽을 등록하면 돈이 아까워서 운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알아서 운동을 꾸준히 잘 하고 있다면 굳이 피트니스를 등록하지 않아도 건강해지는 목적에 충분하다.)

그러하니 법화경을 받아 익히고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을 일심으로 행하면 그 공덕이 동서남북에 끝이 없듯 한이 없어 부처님의 지혜인 일체종지에 빨리 이르게 되리라. (공덕을 쌓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여러가지가 아니다. 이것이면 된다. 특히나 법화경과 반야바라밀.)

특히 법화경을 받아 가지고 읽고 익히면 그 공덕이 4장 5,6절의 수많은 좋은 행동을 하는 것과 같다.





5 법화경 해주 2





법화경 6~7권을 읽다 보면 내용이 판타지처럼 읽히게 된다.

법화경의 존재 의의나 문맥상으로는 그러는 게 타당하다.

간단히 얘기해서 '법신불이 세상을 꿈꾼다'는 <만유재신론>세계관과 <사람이 (긴 시간 동안 점진적인 깨달음을 얻어서) 곧 부처가 된다>는 것을 조합하면 언젠가는 당연히 '사람보다는 신에 가까운' 영혼을 위한 가르침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법화경은 '여래의 일체 중요한 가르침을 핵심 정리' 했다는 경전이다. 그럼 그 말미에는 그에 걸맞는 가르침이 나와야 하기 마련이다.

그럼 그에 걸맞는 가르침이 무엇인가.

최후이자 전체인 1승을 '묘법연화경'이라 이름하여 '진흙탕을 누비어 꽃을 피우는 연꽃'에 비유한 것을 보아 탁한 세상을 짓거나 누빔으로써 값진 것을 피우는 것이 법화경이 담은 핵심적 가르침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사람이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만유재신론적인 신에 이른다'는 관점을 생각해보면 도착지점이 만유재신이고 그 과정이 점진적이라면 점진적으로 만유재신에 가까워져야 타당하다. 즉 그 수행 과정에 법신불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빚어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 들어갈 것임도 추측할 수 있다.


법화경에는 범천(브라흐만. 힌두교의 창조신이자 빛의 신. 빛으로 사바세상을 짓고 사바세상의 주민들을 자기가 지은 세상에 살게 한다. 그러나 아직 부처는 되지 못했다.)조차 더 배워야 하는 가르침이 나온다. 그래서 경전 내용상 범천은 부처님이 출현하시면 그 가르침을 더 들어 이해하기 위해 자꾸만 설법을 청한다. 즉 '더 높이 발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써 세상을 짓고 다른 욕계 주민들을 살게 하는' 것과 '그런 세상을 짓고 유지한 그 이후에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길을 담은 것이 바로 법화경이 담고 있을 핵심이 된다.


하지만 범천이 듣고 싶어할 가르침이라는 건 말을 바꾸면 범천에 까마득히 먼 욕계의 주민에겐 무용한 가르침이라는 뜻도 된다. 학교 진도 3년만 일찍 앞당겨 가르쳐도 들으나 마나 한게 사람이니까. 덕분에 이때부터 다분히 판타지가 되어서 이해하기가 난해하다는 게 문제다.

가령 법화경 말미 6~7권 동안에 가장 강조되어 설명되는 것이 현일체색신삼매다. 모든 색계의 물질을  현실에 나타나게 하는 삼매. 설명상 이걸 얻으면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현실에 빚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약왕보살 본사품에서 일체중생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신통력(현일체색신삼매)이 언급 된 후(이것이면 세상을 짓는 능력이 된다) 이를 얻은 보살이 자기를 바쳐 빛을 내는데 모든 부처님들이 이를 법으로 공양하는 것이라며 크게 찬탄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문맥상 중요하다고 강조되는데 반해 해석하기는 난해하다.

너무 멀어서 큰 의미는 없는 추정이지만 이와 같은 추정은 가능하다.

현일체색신삼매를 얻은 보살이 신통력으로 공양하다가/스스로를 바쳐 분신하는 것은 세상을 빚는 것과 관련이 있는 비유일 것이다. 자신의 전체 혹은 일부를 탁한 세상에 들이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단지 분신하는게 왜 '법으로서 공양하는 최고의 보시'라는 극찬의 대상이 되는지가 설명될 수 없으니까.

天을 짓는 것도, 자신의 일부를 탁한 불꽃같은 세상에 밀어 넣는 것도, 만유재신론적인 법신불이 항시 행하고 있는 바로 그 행위의 축소판이 된다. 법신에 이르는 최후의 1승에 그 축소판적인 행위가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6~7권의 해석이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것은 반야심경의 한역판은 딱 와닿으나 한글판으로 번역한 것은 그렇지 않음을 느끼듯이 번역의 한계일 수 있긴 한데 그보단 애초에 이해하기엔 너무 나중의 가르침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네가 충분히 깨우치지 못했으면 설파하는 것에 신중하라 하신 권지품의 어조가 6~7권 이후의 촉루품에서는 널리 설하라 하는 것으로 태도가 바뀌는데, 이도 능력이 되면 세상을 지으라는 당부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렇다면 천을 짓는 것은 희생과 봉사에 가깝다는 의미도 된다.

6권부터 읽어보자.


묘법연화경 제 6 권


제 18 품 수희공덕품


미륵보살이 묻는다. 법화경을 받아가지고 이 가르침을 듣고 감격하고 기뻐하면 받는 복은 어떠합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법화경을 오십번을 건너 전하고 또 전해 듣고 기뻐한 이의 공덕이, 무수한 중생을 가르쳐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에 들게하며 팔해탈을 갖추게 하는 공덕보다도 한없이 크다.

기뻐하려면 내용을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즉 이는 두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법화경에서 얘기하는 내용이 아라한의 과를 얻고 팔해탈을 갖추는 것보다도 더 높은 경지의 일임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법화경에서 가르치는 우주의 본질이 이해하고나면 기뻐할 수밖에 없는 내용임을 의미한다.

먼저 아라한과 팔해탈의 경지가 무엇인지 보면

수다원 : 깨달음에 처음 들어감.

사다함 : 죽어서 한번만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경지.

아나함 : 욕계를 넘어서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 다시 욕계로 돌아오지 않는 경지.

아라한 : 모든 악의 여의고 생사를 초월하여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경지.

팔해탈 : 만물의 실상인 공으로서 세상을 인지하는 경지.

현실계를 초월한 것이 팔해탈과 아라한의 경지인데, 이제부터 법화경은 이보다 더 높은 경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하위자아(아바타)와 상위자아의 관계로서 보면 아라한에서 이미 이승을 초월하여 법신불에 상당히 다가간 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높은 경지라 하면 무엇인가?

법신불의 입장에서 보자. 아라한과 팔해탈의 경지는 법신불의 하위자아가 아바타 상태를 넘어 다시 상위자아의 경지로 돌아온 것이다. 즉, 제로섬이다. 6권이 법신불 자체의 진화의 경지를 설하는 내용이라면 그 공덕이 비할수없이 크다는 의미가 들어맞는다. 일보전진도 제로에 비하면 한량없이 크므로.

법화경엔 허언이 없다. 번역과 해석의 실수는 있을지언정 이렇게 내용에서 강조하는 것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앞장에서 강조한 여래수량품을 이해하는 것이 큰 가치를 갖는 이유는 그 내용이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기뻐하는' 것이 이렇게 큰 가치를 갖는다고 강조되는 것은 우주를 제대로 이해하면 반드시 기뻐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제 19 품 법사공덕품


이 가르침을 이해하여 타인에게 가르치기에 두려움이 없을 정도에 이른 법사(곧 올바른 지식을 습득한 이)의 공덕은 이와 같다.

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이 청정해져 미혹되지 않는다.

육근은 수용체이고 관찰자이다.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면 관찰자가 현상을 통해 대상을 파악함에 있어 미혹되어 오판하지 않고 세상의 실체인 공으로서 파악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앎이 부족하면 현상을 분석함에 미혹되어 오판하기 마련이다.

법화경의 지식을 이해하면 '위로는 유정천(색계의 끝)에 이르기 까지를 본다'는 말처럼 색계 이내의 인식을 바르게 한다는 얘기이다.

물리적 현상을 초월하여 보고 듣는 천안, 천이 등에 이른 것은 아니나 본 현상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무지로 인해 미혹되지 않는 경지이다. 현상의 본질을 알게 된다.

세상은 부처님의 뜻에 따라 진화가 이루어지는 현장이기에 세상을 가르치는 부처님의 소리로 가득하다. 신음하는 지옥의 소리나 교화하는 부처님의 소리가 함께 들려오는 곳이다. 법화경의 내용을 이해함으로써 그 모든 소리의 의미를 분별하여 이해할 수 있게된다.

또한 몸의 공덕은 '그 몸에 세상이 비쳐 나타나나 홀로 스스로 밝게 알 뿐 다른 사람은 못 본다' 곧 세상의 현상들을 스스로에 비추어 미루어 생각하여 파악함이 옳게되는 것을 의미한다.

의근의 공덕도 같은 맥락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제 20 품 상불경보살품


법화경을 받아 익히는 이를 욕하는 이의 과보를 설명한다. (맨 처음에, 이 경을 가진이를 해하는 자의 과보가 이전에 얘기한 것과 같다고 했는데 이보다 앞부분에 언제 얘기한 바가 있는지 체크할 것.)

그러나 그 내용은 법신불 자체의 진화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만억 위음왕 여래, 그 다음 이천억 일월등명여래, 그 다음 이천억 운자재등왕 여래가 이름이 같았다 함은 이가 화신불 하나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그보다 단위가 높은 시대 구분의 법신 부처님의 이름인 탓이다. 세계의 구성이 이러하여 우주 자체가 생멸을 반복한다. 매 우주에서 법신불은 하위자아인 영혼들의 나고 자라고 진화하여 상위자아에 이르도록 가르치며 또한 단지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상위자아 자체가 자라고 진화하도록 한다.

법신불의 이름이 바뀌고 우주가 새롭게 시작되도록 상불경 보살의 자아는 유지되다가 마침내 석가여래가 된다.

그리고 이 경전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타인을 위해 설하였기 때문에 깨달음을 빠르게 이룰수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중생을 가르치며 법신불 자체의 진화가 있듯이.

타인을 위해 설하는 것이 어떻게 하여 깨달음을 빠르게 이루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인지와

이 내용이 왜 법화경을 익히는 이를 욕하는 이의 과보라는 내용안에 담겨 나오는 지는 좀 더 생각해야 한다.


(더하여 성문-벽지불-보살의 삼승을 가르치는 방편으로 각각 4제법(諦法)을 설하여 생·노·병·사를 극복하고 열반에 이르게 함/ 12인연법/6바라밀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것이 수행의 기본이다.)


제 21 품 여래신력품


여래가 세계의 경계와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대이적을 보인다.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은 이와 같이 한량없고 가없으며 또한 불가사의하다"고 밝히시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통력으로도 이 경의 공덕을 다 설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여래의 신통력으로 한량없고 가없는 백천만억 아승기겁 동안 부촉하기 위하여 이 경의 공덕을 설할지라도 오히려 그를 다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중요한 것만을 말하면, 여래의 일체법과 여래의 일체 자재한 신통력과 여래의 일체 비밀한 법장과 여래의 일체 깊은 일을 이 경에서는 선설하여 펴 보였느니라." 곧 법화경의 법은 법신불의 신통력으로 응당 커버하는 범위 안쪽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신불에 의해 규정되는 자연 물리 법칙은 여래의 신통력으로 초월 가능한 범주 안쪽의 것이다.)

단지 상위자아에 이르고 법신불에 이른다는 것만으로는 법신불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법화경에는 그 이상의 내용이 담겨 있음이 분명하다. 중생 해탈뿐 아니라 법신불 자체의 발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법화경은 여래가 생각하는 바이다. 20품에 이르길 보살은 이를 중생에게 가르치며 더욱 빨리 성불하고, 또한 법신불은 이를 행하며 법신불 자신이 발전한다. 이는 마치 법신불과 별개의 객관적 법칙과 같지 않은가. 법신불이 정한 법칙의 틀 안에서 행하는 것은 법신불 자신을 발전시키지 못하나 법화경의 법은 함께 행함으로써 함께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법신불에 의해 규정된 법칙이 아닌 것인 듯 하다.  


제 22 품 촉루품


앞서 권지품에서는 이 경의 가르침을 널리 포교하겠다는 다짐에 동의치 않으셨던 내용과 달리 이제 이 경의 가르침을 널리 설하라 하신다. 권지품까지의 내용으로는 포교보다 자기 자신의 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나, 촉루품까지의 내용과 그 의의를 미루살폈을때 중생에게 가르치며 함께 수행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설법 자리에 모였던 여러 다른 세계의 부처님들께 이만 돌아가시라고 하며 자리를 접는다. 화제 전환.


제 23 품 약왕보살본사품


해석 제대로 안됨.

모였던 다른 세계의 부처님들이 다 돌아간 후에도 약왕보살은 자리에 남아있는다. 이에 수왕화보살이 연유를 묻는다.

그는 과거에 일체중생희견보살이었으며 법화경을 수행하여 모든 중생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현일체색신삼매를 얻었다. 만물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이 신통력의 힘으로 부처님이 우주를 진화시키는 데에 보탬이 되려고 한다. 그에 그치지 않고 몸으로 보시한다며 신통력의 발원으로 몸을 태운다. 문자 그대로 분신이라고 읽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신자살이 어찌 '법으로 공양하는 제 1보시'라고 불리울 일이겠는가.

일체의 중생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른 보살이 그 신통력의 힘으로 자아를 태워 여러 세계에까지 이르는 빛을 밝히며 여러 부처님들이 이를 법으로 하는 제 1보시라고 한후 모두 잠자코 계시더라는 부분을 다르게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자아를 태워 하위자아를 형성하여 진화를 재구성한다. (이후 자기를 태운다는 의미는 다 이것을 의미한다고 해석)

약왕보살본사품에선 이 내용이 '부처님도 다 설하지 못할 공덕'임을 얘기한다. 곧 법신불 자체의 진화에 대한 이야기 일 것이다.




묘법연화경 제 7 권



제 24 품 묘음보살품


부처님이 외계에 빛을 비추어 그 세계의 묘음보살을 부르신다. 묘음보살이 부처님의 신통력에 힘입어 8만4처보살과 함께 허공을 나는 7보의 좌대를 타고 온다. 이 세계의 보살이 묘음보살은 어떻게 저런 능력이 있는지 여쭙자 지금 그가 그 국토에 태어난 것이 이유라고 한다. (외계인이 우주선을 타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가 그 세계에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앞서 얘기한 현일체색신삼매의 힘으로 묘음보살의 몸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곳에서 여러가지 모양으로(때로는 왕으로 때로는 후궁으로 때로는 이런 저런 모습으로..) 나타내 보인다. 현일체색신삼매란 아바타를 만들어 내는 삼매이다. 그 삼매의 내용이 무엇인지 설하였기 때문에 이 설법을 들은 보살들이 현일체색신삼매를 얻는다. (경의 끝에 이 설법을 듣고 이러한 삼매를 얻었다 라고 할때엔 그 설법의 내용이 그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원 학습의 목표치와 마찬가지.)

이 묘음보살이 오는 품을 설할때에는 '4만 2천 천자들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고, 화덕보살은 법화삼매를 얻었다.'

만물이 생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 무생법인이다.

스크린에 비쳐지는 그림처럼 세상이 공위에 나타난 법신불의 하위자아이므로. 이를 하위자아를 설하는 묘음보살품을 들으며 알아차렸다는 의미다. 법화삼매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알아차렸다는 의미.



제 25 품 관세음보살보문품


믿고 의지할 인격신 관세음보살을 소개한다. 묘음보살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역량을 발휘함에 있어 구속됨이 없이 이적을 발휘하여 자유로이 중생을 돌보는 관세음보살의 이야기는 중생들이 듣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도록 하였다.

(불완전 해석)




제 26 품 다라니품


주문의 원래 뜻을 알지 못하여 해석 불가.



제 27 품 묘장엄왕본사품


이 경을 설하실 때에 8만 4천인이 청정한 법의 눈을 얻었다. 청정한 법의 눈은 번뇌를 벗어나 법의 실상을 보는 눈이다.

이 장의 내용은 두 보살이 선지식이 되어 이적을 행하고 묘장엄왕을 부처님께 이끌어 배우게 하는 내용이다.

해석 미완.



제 28 품 보현보살권발품


부처님 멸도후에 중생이 법화경의 길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설한다. 다시 말하면 아래의 경지를 익혔을 때가 법화경의 길을 익힐 단계이다.

"다음의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여래 멸도하신 뒤에도 마땅히 법화경을 얻으리라.

그 첫째는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생각하시는 바가 있어야 하며,

둘째는 여러 가지 덕의 근본을 심어야 하고,

셋째는 정정취(반드시 성불할 것이 결정된 경지. 부정정취, 사정취에 대비됨.)에 들어야 하며,

넷째는 일체 중생을 구원하려는 마음을 내야 하느니라."

보현이 법화경을 받아 수행하는 이를 보살필 것임을 서원하고 다라니를 설한다.

다라니 주문 원래 뜻 알지 못하여 해석 불가.

부처님이 수행자를 축복하며 마친다.


6 참선


위빠사나 명상 : 재정리

이 글로 참선법을 정리한다.


참선이란 무엇인가.

만유재신론상의 아바타인 자아를 인식 확장을 통해 상위자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의식이 가라앉되 잠이 들어 완전히 넘어가지는 않는 상태에서 통로를 여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다른 참선법으로 불경을 정독하는 것도 좋다.

책상 앞에 편안히 앉아서 법화경을 펼쳐놓고 차분히 정독한다.

불경은 참선으로 이끄는 책이다. 무의식을 이끄는 것은 반복과 이미지의 제시가 방법이 되는데

운율을 갖는 유사한 내용의 반복(타국의 언어로 번역될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음운의 반복보다는 내용의 반복이 주효할 것이기 때문이리라.)과 불경의 평안한 이미지는 참선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

참선 익힐 마음을 갖은 사람이라면 불경 정독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참선으로서 효과적이면서도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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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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