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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서부터 세상을 배운다.
세상은 어떤 모습이며 무엇이 가치 있는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
혼자만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기대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엔 갈 길이 너무 멀어서
이미 주행중인 다른 누군가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빌려타고 다시 갈아타기를 반복하는
우리는 히치하이커들이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갖는다고들 말한다.
자유의지는 외부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정말 자유의지를 갖는 지는 일단 미뤄두고,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할 때 사람은 과거에 배운 것에 완전히 순응하는 것을 못견뎌하는 속성을 보인다.
정해진 매뉴얼만을 따르며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자아가 죽어버리는 느낌을 받으며
생존을 쫓지만 생존해도 공허하고
권력을 쫓지만 권력 위에서도 공허하고
쾌락을 쫓지만 쾌락에도 불구하고 공허하다.

자유의지를 갖는 사람은 매뉴얼화된 인생에 복종하지 않기에 미지의 행보를 가고
미지의 행보를 가기에 자기가 맞게 가고 있는지 불안에 빠진다.
이 불안은 신이 아닌 한 가질 수 밖에 없는 인간적 한계다.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발휘하면 자아의 한계를 느끼는
부조리한 인간으로서 갖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은 생존과 권력과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초월적 가치추구를 하기에 이른다.
인간적 한계를 넘어선 존재를 열망하는 그것은 예술과도 맞닿아 있고 도덕과도, 혹은 학문적 진리추구와도 맞닿아 있다.

과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수레는 종교였다.  
종교는 세가지 구성 요소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신의 이름, 그 신이 대변하는 초월적 가치, 그 가치의 예제가 되는 이야기.
사람은 예시를 통해서만 관념을 배울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관념, 혹은  '정의'라는 관념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개념을 설명하는 것 만으로는 사랑과 정의가 뭔지 배울 수 없었고 가치를 실현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종교는 초월적 가치를 긍정하는 가치관의 가르침을 이야기에 담아 내놓았다.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의 이야기를 내면화 하면 가상의 기록이 독자의 인지 내적으로는 살아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종교의 이야기는 신자에게 살아있는 이야기가 됨으로써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살아있는 상태로 전달한다. 종교의 이야기는 가르침을 소화흡수 가능한 형태로 조리해 놓은 포장인 셈이다.
불교는 이야기들은 비유요 방편일 뿐이라고 누차 강조하고 있고,
기독교 조차도 성경의 이야기 자체보다 그 안에 담아 내고자 하는 가치에 대한 가르침이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과거 종교가 제공하는 가치관은 신의 이름으로 삶의 가치를 초월적인 어떤 것에 둘 수 있도록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종교가 신의 권위를 빌려서 제공하던 가치관은 신의 이름이 부정되는 현대에 이르러 위기를 맞는다.

"초인이 되어라.
아니면 초인의 전조가 되어라.
초인은 벼락 같은 것이다. 벼락이 치기 전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바람은 벼락의 전조다. 초인을 부르는 비바람이 되어라.
초월적 가치를 잃은 인간은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의 여신을 세운다. 삶과 건강을 통해 이룰 초월적인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건강을 목적으로서 추앙한다.
그리고 건강을 위한 건강에 매달려 먹고 싸는 인생을 살며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일어났다.
인격신의 권위 아래 가치관을 제공받는 데에 익숙해져 온 사람들은
인격신의 이름이 힘을 잃은 세상에서 초월적 가치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과학이 신이 된 시대다.
사람들에겐 이기는 편에 붙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 이기는 편 우리편, 지지정당은 집권여당.
근래 영역을 확장해온 과학은 분명 이기는 편 이었다.
그런데 이기는 편에 붙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과학이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과학은 대중에게 새로운 신앙이 되었다.
이 과학숭배신앙은 묘한 병폐를 낳고 있다.
과학을 신으로 숭배하면 그 신이 알려주는 사실들은 신화에 해당하는데
종교였다면 그 안에 가르침으로서 초월적 가치를 긍정하는 가치관이 담겨져 있을 것이나
과학은 종교가 아닌지라 이야기를 까보면 안에 가르침이 담겨있지 않다.
그래서 과학을 숭배한 사람들은 '없다'를 가르침으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즉 삶에 있어 초월적 가치의 상실이다.
그들은 그렇게 니체가 얘기했던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을 여신으로 세우고 행복을 발명했다 주장하는 경멸적 인간들'이 되어간다.
건강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더 나은 가치를 갖는 삶이 되는가?
그들에겐 이에 대한 답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월적 가치란 없는 것이 답'이라는 가르침을 과학 신화가 담고 있다는 믿음이 그 신앙의 교리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문제다. 과학은 '어떻게 하면 틀리지 않은 지식을 효율적으로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의 이름일 뿐이다.
지식을 축적함에 있어 틀린 지식이 섞여드는 것을 너무 배척하면
탄탄하되 쌓아 올라가는 효율성에 한계가 오고,
쌓는 속도에만 집착하면 잘못된 지식이 섞여든다.
과학은 그 정확성과 효율성 사이에서 합당한 지점을 합의한 방법론의 이름이다.

연역된 지식은 논리적으로 참이다. 그러나 '귀납적 지식은 언제라도 반례가 등장해 뒤집힐 수 있기 때문에 연역된 지식만이 참'이라는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미친 사람은 자기가 미쳤다는 걸 모르듯, 인간의 논리 이성 체계가 옳다는 것을 인간은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경험없이 생각하기에 참이라는 것은 신뢰할 수 없으며 실제로 경험된 것만이 참이다'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가 등장했다.
(합리주의자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선 경험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사상을 의미한다. 사실 문맥에 맞춰 번역하면 사변지상주의자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경험주의에 더해서 '경험도 귀납적이므로 뒤집힐 수 있다' 쪽으로 가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 불가지론자가 된다.)
경험된 모든 것이 참은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참인 명제를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합의점을 찾은 '경험주의의 일부'가 우리가 아는 과학이다. 이 방법론은 성공적으로 모태인 철학의 위상을 넘어섰다.

연역적으로 도출된 것들 중에 경험적으로 검증된 명제에 대해 참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 물리학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지식을 쌓는 속도 효율성의 한계에 마주친다.
화학원소 주기율표는 원자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하는지 해명되기 전부터 관측되었다.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연역되지 않았으므로 화학은 과학으로 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화학은 비록 연역적으로 도출되지는 않았더라도 독립적인 실험으로 재연이 가능한 명제까지는 참으로 치기로 한다. 통제된 환경 하에서 이제까지 재연되던 경험이 갑자기 다음 실험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틀어질 위험은 무시할만큼 작은 것이라는 까닭이다.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확인되거나, 실험으로 재연가능한 지식을 참으로 여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과학의 방법론이다.
사회과학은 독립적인 실험이 어렵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 방법론을 따르기는 어렵다. 지식 축적의 효율성을 위해 다소 널럴하게나마 가능한 한계내에서 과학 방법론을 참조하여 쌓아 올라가겠다는 것이 사회과학의 방법이다.

지식축적을 탑에 비유하면 물리학은 지상에서 시작한 1층, 화학이나 생물학등은 허공중에서 시작한 2층, 가정위에 통계적 방법을 이용하는 사회과학 역시 허공중에서 시작한 3층, 가정위에 사변적으로 탐구하는 인문학은 더 널럴한 4층, 종교는 5층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 화학의 주춧돌은 물리학으로부터 연역증명되었고 서로 미시-거시의 관계로 합치되었다. 이제 화학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온 셈이다.
다른 학문간의 합치는 아직이다.
다른 모든 지식이 종국에는 1층에서 시작한 과학으로 환원될 것이라는 주장이 통일과학운동이며 환원주의라고도 한다. 과학의 방법론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이었는지가 검증된 지금, 모든 앎을 과학 방법론에 의지하여 풀어나가자는 주장은 큰 지지를 받고 있다.

얻어 탈 때 중요한 것은 잘 타고 제 때 내리는 것이다.
내려야 할 지점을 놓치고 엉뚱한 곳으로 가 버리는 일은 히치하이커의 세계에선 흔한 실수다.
그래서 얻어탈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팁은 이거다.
이렇게 말하자. "어디까지 가세요?"
빌려타는 것이 차가 아니라 세계관이나 가치관인 경우라면 이것은 이런 질문이 된다.
'이 관념은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까, 그리고 어디까지만 데려다 줄 수 있을까?
이 관념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며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구분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며 어려운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그리스에서는 수 많은 철학자들이 세상을 설명했다.
재미로 살펴보면, 우수한 통찰의 결과로 다들 일견 맞는 구석들을 가지고 있긴 했다.
- 아낙시메네스 : 질적 차이는 결국 양적 차이로 환원된다. 세상은 공기다.
   => 원자론, '질량은 에너지로 환원된다'.
- 피타고라스 : 참된 존재는 결국 수학적으로만 정확하게 표현가능한 어떤 것이다.          
   => 모든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 가능하다는 생각은 동종의 매질이 법칙에 의해 세상을 이룬다는 의미가 되고 온 세상의 매질이 동종이라면 세상안에서 분별을 가능하게 하는 참된 존재의 특성은 법칙에 좌우된다. 수학은 그러한 법칙에 가장 근접한 분야다.
- 헤라클레이토스 : 참된 존재는 없고 오직 변화만 있다. 만물은 유전한다.  
   => 화학 원소는 유전한다.
- 엠페도클레스 : 참된 존재는 결국 불, 공기, 흙 물,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 존재를 물질과 에너지와 생명이라는 속성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 데모크리토스 : 참된 존재는 원소로 되어있다. 다양한 원소들은 진공 속에서 무한히 운동하는데, 이때 무거운 원소는 둥근 운동의 안쪽으로 모여들어 대지가 되었고 가벼운 원소는 바깥으로 밀집하여 대기와 불이 되었다. 정신은 정신의 원소로 이루어졌으며 유물론은 여기서 시작한다.
   => 역시나 상당히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뭘 모르는 지를 알라. 너 자신을 알라."
같은 맥락에서 공자는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자로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네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여라. 그것이 아는 것이다."

과학의 경우를 살펴보자.
앞서 설명한 과학의 방법론은 사실은 과학이 희망하는 이상향의 구상이다.
과학을 하는 것이 사람이다 보니 과학이 추구되는 현실은 이와 다른 방식을 취한다. [*]
중요한 이슈중 하나인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뉴튼이 초속30만Km로 달리는 열차위에서 초속30만Km로 공을 던졌다. 공의 속도는 얼마일까?
고전역학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 문제의 답을 계산하는 데에 망설일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답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짧은 혁명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과학활동은 하나의 지배 패러다임 하에서 이루어진다.
지배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탐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답이 정해진 퀴즈'를 푸는 것이 된다.
지배 패러다임은 예상하는 결과를 이미 가지고 있다. 그게 정상과학 활동이다.
실제로는 아직 답을 모르는 부분임에도 넘겨짚는 게 가능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현재 지배 패러다임에 따라 자유의지의 문제를 풀면 어떻게 될까?
비록 의지가 어떻게 입출력 동작을 하는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음에도
지배 패러다임에 의해 '확률식으로 정의될 수 밖에 없을 신경계의 입출력에 자유의지란 존재할 틈이 없다'라는 정해진 예상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탐구가 더욱 정교해질수록 기존 패러다임의 오류도 발견하기 쉬워진다.
뉴턴이 던진 공의 예시처럼 개략적으로 볼때엔 뻔한 답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던 문제 조차도
이론이 정교해지고 구체적이 될수록 점점 실제와 거리가 나타나는 일이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쪽에 수정을 가하면, 또 다른 쪽에서 구멍이 나타난다.
이러길 반복하다보면 마침내 총체적인 난국에 도달한다.
그리고 총체적 난국을 몰고온 문제를 해소시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고안될 때, 패러다임은 전환된다.

'과학'으로 분류되는 예외없는 전 영역에 걸쳐서 이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일어나 왔다.
모든 과학 영역은 아직 답을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 답을 '넘겨짚어'왔다.
그리고 지배 패러다임의 허점은 항상 거기서 시작된다.

뉴튼역학 패러다임하에서 예시된 문제의 답이 60만km/s가 아닐 가능성은 없다.
뉴튼 패러다임의 허점은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데에서 발견된다.
'의지'가 어떤 입출력 동작을 하는지, 의지의 동작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음에도 '자유의지란 없다'라는 답을 넘겨짚을 수 있는 것도 이와 동일하게 기존 패러다임이 예상하는 바를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는 그와 다른 가능성을 갖는다. 의지가 어떤 입출력 동작을 하는지를 연산할 수 있게 될수록 그 이론치가 실제와 멀어지고, 도저히 땜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 가령 "특정 조건에서는 의지가 물질에 영향을 미쳐서 소위 영혼의 선택이 물질계에 동작할 틈새가 존재한다"라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를 수도 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영역에 대한 넘겨짚음은 지배 패러다임 하의 정상과학 활동에 훈련된 사람일수록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초속 30만km로 달리는 열차에서 초속 30만km로 던진 공의 속도는?
당시 제대로 된 그 답은 '모른다'였다.
그러나 실재로 해볼 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자유의지란 존재하는가? 영혼은 어떨까?
넘겨 짚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항상 있었지만  
아직 모르는 것은 단지 모르는 것이다.

얻어타는 것이 차건 우주선이건 관념적인 것이건 합승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언제 내려야 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과학에 합승할 수 밖에 없는 이 시대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라면
과학에서 내려야 하는 시점이 언제인지도 알아야 한다.
깜빡 졸다 놓치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먼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야 하는 자신의 피로감으로 돌아온다.
과학이 신이 된 시대엔 이런 피로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수 없이 많다.

가치관은 조망된 세계관으로부터 도출된다.
세부 지식을 아는 것과 세계관을 조망하는 것은 얘기가 달라서 세부 지식을 오류 없이 쌓더라도 그 지식이 편중되거나 미완성일 경우 가치 판단에는 오류가 나는 게 가능하다. 어느 음식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면 그 음식을 멀리 해야 한다는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지만, 다음 날 같은 음식에서 항암물질이 발견된다면 앞의 지식은 틀리지 않는데도 판단은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어차피 완전히 알 수도 없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는 불가지론자가 아닌 담에야 한정적으로 아는 것이라도 이미 아는 것에 기초해 행동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결과 너무 피로하거나 공허하다면, 혹시 내가 환승할 때를 놓치고 안드로메다에서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종교를 타고 환승할 때를 놓치나 과학을 타고 환승할 때를 놓치나 안드로메다로 가긴 마찬가지. 깜빡하면 전염병을 이겨내려고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다 몽땅 옮는 사태와 비슷한 일이 생긴다.

그럼 과학의 지식은 편중되거나 미완성이어서 세계관을 조망하기에 충분치 못할까?
과학이 확인한 사실을 섵불리 가치판단에 응용하면 엄한 결과가 나온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을 근거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가치관을 아예 철저하게 과학에 근거해서 짜려고 하면 치밀함과 허술함이 병존하는 개그캐릭터가 된다는 예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빅뱅이론의 쉘든)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현상은 무의미 앞에 지쳐버린 사람들이다.
쉘든 자신은 지식 추구라는 초월적 가치 추구를 하면서 생의 의미를 유지하지만, 모든 사람이 학자인 게 아니라서 쉘든의 눈으로 본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은 의미가 없다.
피로사회라는 책은 현대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생의 서사적 의미를 잃어버리고 지켜야 할 것은 오로지 몸뚱이 만이 남아 건강을 여신에 자리에 올리고 그 건강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른다.'
무의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빨리 지친다.
생에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때 지쳐버리는 현상을 상시 체험하게 되고
이는 우울증을 현대의 질병 자리에 올려놓았다.
과학을 신으로 모시는 신도들은 환승시점을 놓치고 무의미 앞에 피로해한다.
하지만 항상 지시받던 감독관이 없어지자 할 일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인격신을 잃었다고 초월적 가치를 잃어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과 달리 과학은 초월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릴 때를 놓친 히치하이커들이 넘겨짚고 우울해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제 갈아탈 때다.

화학, 즉 물리학보다 더 널럴한 기준으로 토대를 쌓은 지식체계가 물리학과 거시 미시 관계를 이루며 저층 지식에 합류하는 것처럼
5층의 종교가 4층의 인문학에, 4층의 인문학이 3층의 사회학에,
3층의 사회학이 저층의 과학 앞에 자기의 체계를 증명하고 합치되는 날이 오리라.
그리고 그 날에 종교의 가르침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증명될 것이며 한번 탑승한 과학에서 깜빡 졸더라도 내릴 곳을 놓쳐서 헤맬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내려서 환승할 지점을 기억하자.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 설명하기 편하게 증명이라는 말을 썼지만
귀납적 경험으로 증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증명의 대신 '반증을 견딘다'를 대안으로 삼은 반증주의가 가장 인기있다. 반증주의는 결국 가설연역주의의 증보판이라서 연역된 이론을 경험으로 확인한다는 전개 면에서는 가설연역주의와 같으며 그로 인해 가설연역주의의 일부로 다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은 반증주의를 따르지만도 않는다.
반증되는 결과 앞에 서는 것은 이론의 집합체이고 그래서 한 이론을 반증하는 결정적 반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증된 이론 조차도 때로는 긴 시간이 지난 후 더 나은 환경에서 재확인 했을 때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달의 공전 주기나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다른 것은 이론이 틀려서인가? 아니면 계산에 모든 요소가 포함되지 않아서인가? 보이지 않는 행성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때문에 반증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뉴턴이 계산한 달의 공전주기가 실제 달의 주기와 달랐을 때에도,
또 이론적으로 계산된 공기 중 음파의 속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론적으로 계산된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이유로 뉴턴 역학을 부정한 사람은 없었다.
현상과 다른 결과를 말하는 이론을 지지하며 무려 한 세기를 보낸 후에야
달의 공전 주기 계산에 어떤 실수가 있었는 지가 밝혀졌고,
라플라스에 의해 음파의 속도가 어떤 이유로 틀려지는 지가 밝혀졌으며,
천왕성의 궤도는 관측되지 않은 자리에 해왕성이 있어서 틀어졌던 것임도 밝혀졌다.
그러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이론은 반증을 무시한채 버려지지 않았다.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반증되었다고 내버리기엔 너무 중요한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엄밀히 반증주의의 말을 따라 현실 반증된 이론을 항상 즉시 버리지는 않는다. 버려지는 이론은 버려도 타격이 없는 덜 중요한 이론들과 이미 다른 대안이 등장한 이론들 뿐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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