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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이 발표되고 온 세계가 과학의 발전에 흥분하던 20세기 초,
과학의 성과에 매료되어 '과학의 방법론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특별한지'를 연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식은 경험적으로 증명되어야 의미있는 것'이라고 주장한 논리실증주의자(=논리경험주의자)들이 그 시작이다.
이들은 현실에서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지식이라 할 수 있지 뜬구름 잡는 말장난이나 그럴듯한 이야기는 의미있는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신은 사랑이다'라는 명제는 확인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이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재료로 쌓아 올려서 더 높은 지식을 얻는 용도로 사용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과학처럼 성공적으로 앎을 확장하기 위해선 애초에 증명이 될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모호한 말을 해오던 과거 철학에 대한 강한 공격이 되었다.)

하지만 경험으로 확인하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앎을 얻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앎을 경험으로 올바르게 확인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했고 그 결과 귀납주의, 가설 연역주의, 반증주의를 제안했다.

- 귀납주의는 '많은 동일 현상을 경험하다보면 가설을 만들게 되고 그 가설을 확인해서 참에 도달하면 된다'는 모델이다.
스완은 하얗다는 것을 계속 경험하다보니 모든 스완은 하얗다는 지식을 얻었으며 이를 현실에서 재차 확인하여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모델이다. 이는 경험으로부터 앎을 얻는 일반적인 방법론이긴 하다. 그러나 아무리 반복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게 미래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블랙 스완의 역설이다.
과거에 항상 그래왔던 것이 새삼 달라질리가 있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란 법도 없다. 태어나서부터 매일 병아리에게 밥을 주던 주인은 어느 날 치킨으로 쓰겠다고 밥 대신 칼을 들이밀 수도 있다.
그래서 귀납주의는 '과학처럼 올바른 앎을 쌓는 방법'에서 부정되었다.

- 가설 연역주의는 '과학자는 가설을 만들고 가설이 연역적으로 예상하는 바를 실험으로 확인하여 앎을 증명한다'라는 모델이다.
하지만 내 말이 맞는 이유 백개를 모아도 그게 내 말이 맞다는 증명은 되지 않는다. 이론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오는 경험을 반복 수집한다고 해서 그게 이론의 증명이 되는 게 아니라서 가설의 증명은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다.

- 때론 가설연역주의의 일부로 쳐주기도 하는 반증주의는 '반증가능해야 과학이다'라는 (아주 유명한) 말로 요약된다.
귀납적인 경험을 통해서 증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설이 예상하는 바가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여 반증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때 과학지식은 '수많은 검증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반증되지 않은 지식'이라는 지위를 얻는다.
이 주장으로 카를 포퍼는 과학을 연구하는 철학자들 중에 토마스 쿤과 더불어 양대 산맥이 되었다.

하지만 논리 실증주의의 시작은 '말이 논리적으로 그럴 듯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가 어떤 지가 중요하다'는 것임에 주목하자.
반증주의는 과학자들을 아주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람들로 표현하기 때문에 과학자들 자신은 반증주의를 좋아한다.
문제는, 실제로는 과학자는 반증주의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증주의와는 다른 과학의 실제를 지적한 게 쿤의 패러다임 론이다.
실제 과학자들은 현실 반증된 이론을 즉시 버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때론 그게 옳기까지도 한다.
가령 뉴턴이 계산한 달의 공전주기가 실제 달의 주기와 달랐을 때에도,
또 이론적으로 계산된 공기 중 음파의 속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론적으로 계산된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이유로 뉴턴 역학을 부정한 사람은 없었다.
현상과 다른 결과를 말하는 이론을 지지하며 무려 한 세기를 보낸 후에야
달의 공전 주기 계산에 어떤 실수가 있었는 지가 밝혀졌고,
라플라스에 의해 음파의 속도가 어떤 이유로 틀려지는 지가 밝혀졌으며,
천왕성의 궤도는 관측되지 않은 자리에 해왕성이 있어서 틀어졌던 것임도 밝혀졌다.
그러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이론은 버려지지 않았다.
이론과 다른 현상은 아예 안보이는 것처럼 무시되거나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 정도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이런 경향은 심지어 반증된 이론이 끝내 틀린 것으로 밝혀지고 새 이론으로 교체되는 때에 조차도 나타난다. 직감은 공정한 기준이 아니라서 기존 과학자들이 자기가 기반을 두어 왔던 이론 앞에서 '직감적으로 옳다'고 느끼는 것은 그 이론이 옳건 틀리건 다를 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틀린 이론이 전환되는 시기에도 기존 과학자들이 구 이론의 지지를 철회하기 보다는 그들이 늙어 죽은 자리가 새 이론의 지지자들로 교체되어서 이론 교체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과학자들이 (고집스럽게) 반증된 이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이유는, 앞서 뉴턴의 경우에 그랬 듯 그게 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던 숙제가 한 세기 이상 지난 후에 풀려서 이론이 옳은 것으로 밝혀지는 일도 실제로 꽤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반증이 갖는 한계 때문이다.
달의 공전 주기나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다른 것은 이론이 틀려서인가? 아니면 계산에 모든 요소가 포함되지 않아서인가? 보이지 않는 행성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보고 있는가? 반증되는 결과 앞에 서는 것은 이론의 집합체이고 그래서 한 이론을 반증하는 결정적 반증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반증된 이론 조차도 때로는 긴 시간이 지난 후 더 나은 환경에서 재확인 했을 때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는 것이고, 반증된 이론이라고 해서 바로 버리는 것이 합리적인 과학자의 태도가 되지도 않는 것이다.
반증주의의 기준에 따르면 뉴턴을 포함한 유명 과학자들 대부분이 사이비로 내몰리는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과학의 이상론 같은 주장이며, 과학이 굴러가는 방식의 실상은 그와 달랐다.

패러다임론은 과학의 방법론을 근본에서부터 파악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외면으로부터 관찰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파악한다.
즉 '과학의 방법론은 어떠해야 올바른가'라는 측면에서 이상적인 방법론을 찾아 나가는 게 아니라,
현재 굴러가고 있는 과학의 방법론은 어떤 특징을 갖는지 관찰한 후 그 특징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분석하는 방식이다.
먼저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젠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너무 범용적으로 쓰이는 감이 있으나 본래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진 용어였다.
하나는 전체를 통찰하여 얻은 이론의 '감'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감이 전형적으로 적용된 예제를 뜻한다.
왜 예제와 이론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우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은 복잡한 개념을 예제를 통해서 학습한다'는 인지론적 발견이 훗날 뒷받침된다.
패러다임론이 과학의 방법론을 외부 형태로부터 관찰하다보니 '이론을 공유하기 위해 담아놓은 그릇인 예제나, 그 예제 안에 담긴 이론이나' 한데 묶여있는 것으로 파악했던 셈이다.

이것이 어떻게 돌아가는구나 하는 감은 어떤 전형적인 예제(범례)를 통해 공유된다.
f=ma 가 뉴턴역학을 잘 표현해주고 감을 공유 시켜주는 범례라면
그것이 아인슈타인 역학에서는 e=mc^2인 셈이다.
혹은 모든 운동은 입자간 충돌에 의해 전달된다는 패러다임의 범례는 당구공 충돌 모형이 될 것이다.
즉 패러다임이란 전형적인 예제와 그 예제를 통해 파악하는 전체 형상이라는 두가지를 의미한다.
(내 경우엔 예제는 그냥 예제라는 말을 쓰고 이론을 지칭할 때에만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쓴다.)

'반증 가능해야 과학이다'라는 반증주의의 과학/비과학의 구분 기준은 유명하고, 인기 있다.
그러나 실제의 측면에선 반증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해결되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일이 빈번하기에
'반증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과학이다'가 되어서 저 구분이 유명 무실해진다.
패러다임 론에서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반증주의에서 구분하는 기준과는 다르다.
쿤이 제시한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 기준은 패러다임의 통일이다.
역사적으로 한 분야를 명백히 과학이라고 선언할 만한 기준은 패러다임의 통일이었다.

단, 이는 결과적인 이야기이다.
원인의 측면에서는 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어떻게 압도하고 통일할 수 있었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학파간 전쟁이 나서 한 패러다임의 지지자들이 다른 패러다임 지지자들을 모두 살해했다고 치자. 이후 승리한 학파가 학계를 장악한다고 해서 그 학문이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론이 결과를 관찰하는 방식이다 보니 나온 결론인 셈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학적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패러다임 통일이 일어나는 원인은, 특정 패러다임이 여타 패러다임에 비해 퀴즈 재생산을 통한 가치 추구의 미래 수익을 명확히 보여줄 수 있을때 일어난다. 사실상 이는 그 패러다임이 진실에 부합하는 면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는 과학 활동 자체와 직결된다.
패러다임 전환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기, 곧 지배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의 과학활동을 정상과학(normal science) 이라고 한다.
정상과학시기의 과학 활동은 '정답이 반드시 존재하는 퍼즐 풀이'에 국한된다.
즉 이 시기의 활동은, 전제가 되는 이론인 지배 패러다임을 관찰한 현상에 부합하는 옳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소가설들을 찾아 부가하는 과정이다.
지배 패러다임은 연쇄적으로 '이 패러다임이 맞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다'라는 정답이 정해진 문제(=퍼즐)를 내놓는다. 퍼즐 풀이를 통해 지배 패러다임의 세부가 규정될수록 제시되는 문제도 더욱 정교해지고, 이는 연쇄적인 퀴즈의 재생산이 된다.
정상과학 하에서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지배 패러다임이 부정되는 게 아니라 그 문제를 풀지 못한 개인의 역량이 부정된다. 이론이 틀려서 막히는 게 아니라, 연구자가 충분히 똑똑하지 못해서 막히는 것이라는 식이다. 즉 이 퍼즐 재생산의 흐름이 유지되는 한 지배 이론에 대한 반증은 구조적으로 생뚱맞은 것이 된다. (그래서 실제 과학에서 반증주의가 잘 먹히지 않는다.)

따라서 '정상과학 활동이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정답이 있는 퍼즐을 생산해 낼 수 있어야 과학'이라는 기준이 나온다.
이 기준하에선 점성술, 맑시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과학이 아닌 이유는 정답이 정해진 퍼즐을 계속적으로 재생산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근래들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 진화심리학이 과학일까? 초기에 진화심리학이 과학으로 인식되었던 이유는 정답이 있는 문제풀이를 대거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정교한 답이 있는 후속 퀴즈를 내놓는 일에 실패한다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문제풀이 밖에는 내놓지 못하게 되고, 이 때엔 정신분석학과 마찬가지로 더이상 과학이 아니게 된다. 지금에 이르러선 그저 대안 패러다임이 없어서 유지되고 있을 뿐 과학이라고는 할 수 없다.)

퍼즐 풀이가 막히는 시점에 이르러 패러다임은 위기를 맞이하고 혁명기를 거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된다.
패러다임 전환은 언제 일어나는가? (http://longlive.tistory.com/468)
쿤은 구 패러다임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 언제 패러다임을 위협하는 것이 되어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모는지에 대해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 생각에 이는 경제학적인 문제가 아닌가 한다.

normal science의 구간에서 패러다임이 하는 일은 퀴즈 재생산이며, 과학 활동은 그 퀴즈를 기존 패러다임에 부합하게 풀어서 답을 내는 것이고, 퀴즈를 해결했다는 것이 연구자의 가치 추구의 성과가 된다.
현 지배 패러다임이 퀴즈 재생산을 제공하는 능력이 약해지면
연구자의 가치 추구의 수익성이 나빠지고
이에 연구자들이 새로운 수익원에 눈을 돌리게 될 때 구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이 도래한다.
미래에 새로운 수익원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신규 패러다임을 발견하면
설령 그것이 현재의 모든 문제를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단지 구 패러다임 대비 더 나은 지속적 미래 수익이 기대되기만 하면 흡인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거 사례와 비교해보면,
뉴턴의 역학은 (달의 공전주기 계산, 공기 중 음파의 속도 계산, 천왕성의 궤도 계산등에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한세기 동안 끌고 갔지만
이때에도 패러다임은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
이유는 그 기간에도 뉴턴 패러다임은 퀴즈 재생산을 할 수 있었고
학자들은 성과를 발표할 수 있었으며 학계는 정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존재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이상 현상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실처럼 무시되거나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취급받는지,
아니면 패러다임을 위기에 빠트리는 반증 사례가 되는지는
그 이상 현상이 퀴즈 재생산을 막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퀴즈 재생산을 할 수 없고 연구자들이 성과를 낼 수 없을 때에 패러다임은 위기에 빠진다.
지배 패러다임이 안정기일때엔 옳은 이론이라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경제학적 선택이 될 것이다.
(현실 모델로는 현직장이 안정적이면 굳이 이직을 고려하지 않는 직장인들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의 세부 심리도 이들의 심리와 동일 선상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에서만 일어나며 위기 이전에 구상되는 이론은 설령 옳다고 해도 무시된다.
그리고 후에 대안이 되는 패러다임들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이론들의 수정 증보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예시는 지동성-천동설, 플로지스톤이론-산소흡수설, 라이프니쯔의 상대론을 통한 뉴턴비판 등의 전환 사례에서 나타난다.
-상대성이론의 공간과 운동의 상대성은 라이프니츠등의 자연과학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알려져 있는 개념이었고 그들은 뉴턴주의를 상대론적으로 비판했었다.
-지동설은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타코스에 의해서 이미 제안 되었었다. 그러나 학설 중의 하나였을 뿐 천동설이 틀리고 지동설이 옳다는 실험적 근거를 마련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리스타코스의 이론은 훗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밀려야 했다.
-17세기 레,훅,메이오에 의해 진전된 '대기로부터의 흡수를 통한 연소 이론'도 당시 관심을 끌지 못했다. 훗날 플로지스톤 이론에 위기 상황이 오고 라부아지에에 의한 산소 흡수 설이 나온 후에야 과거에 저런 이론이 있었다는 걸 상기하게 된다.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에서만 일어난다는 얘기다. 위기 이전에 구상되는 이론은 설령 옳다고 해도 무시된다.)
가치는 과거 성과가 아니라 미래 수익에 의해 영향력을 발휘한다.
패러다임 전환에 있어서도 구 패러다임이 퀴즈 재생산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서
연구자들이 가치 추구의 미래 수익성이 나빠지는 것 느낄 때 위기에 빠지고,
신 패러다임의 미래 수익성이 흡인력이 되어 연구자들의 선택을 유도한다.

정상과학 활동이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정답이 있는 퍼즐을 생산해 낼 수 있어야 과학이라는 기준은
언제 왜 기존 패러다임이 과학이 아닌 것으로 무너지고 전환되는지도 설명한다.
연구에는 학계가 공동으로 관심을 갖는 흐름이 있다.
여기서 동떨어진 데에 관심을 갖는 연구생은 엉뚱한 짓 한다고 교수에게 혼이 날 것이고,
설령 교수조차도 학계의 이 흐름은 거스르지 못한다.
만약 거스른다면 주류에서 벗어난 기인이 될 뿐이다.
학계의 관심이란 패러다임이 재생산해내는 퀴즈의 흐름을 의미한다.
이 흐름이 이상현상으로 가로막혀서 퀴즈 재생산이 위축될때 이상현상은 못본척 무시할 수 없는 패러다임의 반증이 되며 과학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반대로 성과를 계속해서 낼 수 있다면, 설령 오류가 눈앞에 뻔히 보인다고 해도 그 패러다임은 여전히 과학으로 기능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합치되지 않았고 모순된 면이 있으나 퀴즈 재생산을 계속 낼 수 있는 한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패러다임은 '이것은 전체적으로 이런 원리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통찰의 결과다.
그리고 그 통찰의 결과물이 옳다는 직감을 주는 것은, 그 이론으로부터 파생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맞아들어가는 동안이다.
이때의 직감이란, 가치의 미래수익이 기대된다는 판단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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