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역사가 교양 필수로 삼을만큼 중요하네 안하네, 영어로 교육해야 하네 안하네...
교양 교육에 대한 논란이 많다.
교양 교육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바람직한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모든 교육에는 가르치고자 목표하는 패러다임이 있다.
'이것이 어떤 형태를 갖는지'에 대해 교육자가 가지고 있는 전체 형상이 패러다임이다.
그 전체 형상을 가르치기 위해 교육자는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중요한 사실들을 가르치고,
학습자는 배운 사실들로부터 패러다임을 도출해낸다.
모든 학문 과목들은 저절로 이런 관점에서 교과서가 쓰여진다.
교과서는 그 학문이 현재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중요시 하는 것,
즉 현재의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핵심 사실을 기재하기 때문이다.
그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핵심 사실을 선별하여 교육받은 학습자는 점차 '이것이 어떤 형태를 갖는지' 감을 잡게 된다.
모든 학문이 교과서에 담아 교육하는 것은 패러다임 그 자체이다.
(*학문이 미처 성숙하지 못한 시점에서는 아직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등장하지 않아서 무엇이 중요한 사실인지 평가가 엇갈리게 되고
그로인해 체계없는 단편 지식들이 병렬로 존재하게 된다.)

이는 개별 학문의 교육뿐 아니라 전체 교양 교육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교양 교육이 전수하고자 하는 패러다임은 무엇일까?
교양 교육은 사람이 여태 쌓아온 지식의 체계를 이해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세상이란 어떤 것인지 전체의 형상을 개괄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한 교육이다.
이를 임의적으로 구분하건데 광의와 협의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광의의 교양 교육은 인간 세상 전체에 대한 개괄을 가르치려고 한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가? 세상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광의의 교양교육이 가르치고자 하는 패러다임이다.
협의의 교양 교육은 여태 쌓아온 지식의 체계, 즉 전반적인 지성을 가르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학문의 전반은 어떤 형상을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협의의 교양교육이 가르치고자 하는 패러다임이다.
교육자가 학습자에게 개괄적인 교양을 가르칠 때, 교육자는 학습자가 '세상이 어떤 형상을 가지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기를 원한다.
즉 광의의 교양 교육을 원한다.
그런데 실제로 가르치는 것은 협의의 교양 교육이다.
사람 세상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이 함께 어울려 돌아가지만 학교에서는 여전히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들'을 가르친다.
그래서 정규 교육과정이 가르치는 교양 교육은 협의의 교양 교육으로 기능한다.
광의의 교양 교육을 원하면서 협의의 교양 교육을 하는 것, 다시 말해 사실은 '세상이 어떤지'를 가르치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만 가르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본래 학문은 세상이 어떤 지를 담아내고 싶어한다. 단지 학문 전반이 아직 세상 전반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 교양으로 중요한 지식인가 하는 것은 교육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결정된다.
교양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우왕좌왕하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즉 패러다임이 서로 갈리기 때문이다.
학문으로서 성숙한 개별 학문에 비해 교양 과목에 있어서는 전체를 포괄조망하는 학문이 덜 발달했기 때문에, 학문 미성숙 단계에서 패러다임이 통합되지 않아서, 무엇을 중요하게 가르쳐야 하는지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이 미쳐 담아내지 못한 것을 학교 안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일단 논외로 하고
'교양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영역'을 인간이 여태 쌓아온 지식인 '학문의 영역'으로 제한해보자.
나는 학문의 전 영역을 5단계로 나누어 생각한다.
(http://longlive.tistory.com/41 참조)
1층 :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확인한 지식. 물리학.
2층 : 연역할 수는 없었으나 실험으로 재연가능한 지식. 화학이나 생물학.
3층 : 가정위에 통계적 방법을 이용하여 확인한 지식. 사회과학.
4층 : 가정위에 사변적으로 탐구한 지식. 인문학.
5층 : 선지자가 하달하는 가르침. 종교.
저층지식이 발전함에 따라 고층지식을 따라잡으면 저층-고층간의 합치가 일어난다.
화학의 주춧돌은 물리학이 연역증명했다.
행복의 본질을 찾는 사회과학인 긍정 심리학은 인문학에 합치되는 것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뇌과학은 심리학과의 접점을 찾아 가고 있다.
저층쪽이 소위 이과이고 고층쪽이 소위 말하는 문과에 해당한다. 3층에서 경계는 모호해진다.

교양 교육 과목이란 이 탑의 전체 구조를 개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결과다.
(사실 학문 전반을 5층 탑에 비유한 것 자체가 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은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구축되고 변경된다.
교육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패러다임을 형성시킨 근거와 뼈대가 되는 사실들이며 이렇게 배운 사실로부터 교육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패러다임을 학습자가 도출해 낼때 그것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이 이해시키는 것이 교육의 목표다.
교육에 중요한 사실인지 여부는 그 교육이 패러다임 구축에 얼마나 중요한가 여부에 달렸다.
바람직한 교양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선
먼저 현재 가르치고자 하는 패러다임은 어떤 것이며,
그 패러다임을 구축하는데에 어떤 학문/어떤 사실들이 중요하게 기여했으므로
이 지식들을 가르치면 학습자가 그 사실들을 바탕으로 이해하여 현재의 패러다임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라는 관점에서 기획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그 학문이 교양 교육으로 가르쳐져야 할 중요성을 갖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다.
가령 역사는 왜 교양으로 중요한가?
역사 교육은 세상사가 인과와 우연에 의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기록이므로 세상사의 동작 구조를 파악하는 자료로서 가르칠 때에 교양으로 중요하다.
이 기준이 없이 어느 과목이 중요하냐 아니냐를 따지려고 하면
몇가지 극단적 사례를 들며 '따라서 어느 학문은 중요하다/안하다'를 단편적으로 따지는 결과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세상은 어떤 것이라는 패러다임은 변화하고 있다.
새로 확인된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세상의 모습은 재구축되고 있는 중이다.
이 변화에 따라 교양 교육도 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중요한 교양이던 학문들이 그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여한 학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살펴보면
먼저 종교에서 가르친대로 그려진 신화적 세계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때에는 교리해석이 가장 중요한 교양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철학에서 연역과 상상으로 그려낸 세계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이해하던 시대를 거쳐
점점 더 저층에서 확인된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의 모습을 그려나가고 있고,
학문이 패러다임 형성에 기여한 기여도에 따라 교양의 범위도 변하고 있다.
진화론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의 모습을 현재의 패러다임대로 그려내는 데에 기여도가 크기 때문이다.
상대론도 그 등장으로 인해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패러다임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설령 상세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론적 관점은 교양으로서 중요해졌다.
전자기학은 그 응용도는 상대론보다 높으나 세상의 구조에 대한 패러다임 재구축에 기여한 정도에 있어서는 상대론 만큼의 임펙트는 없었기에 교양으로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늘상 전자기학적 제품과 현상을 접하며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패러다임이 변함에 따라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도 변한다.
변화에는 판단이 필요하다.
그 판단은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교육자가 학습자에게 가르치고 싶어하는 세상의 구조는 무엇인가?
이것이 교양 교육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