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노크 노트/사회관1 부조리연구'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4.08.01 웹툰 송곳 1
  2. 2014.07.11 주인의식 II
  3. 2014.07.10 주인의식
  4. 2014.06.16 노병가를 보고 4
  5. 2013.11.04 부조리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6. 2013.08.08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지는 것이 싫다. 2
  7. 2013.06.05 중용
  8. 2012.12.12 사회 진화의 동력
  9. 2011.06.10 요동치며 우상향
  10. 2011.06.07 시스템 버그 13
얼마전에 네이버 웹툰 송곳을 봤다.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02922&no=14&weekday=tue

"어차피 몇년 지나면 입장 바뀔 거 지금은 그냥 져줘요. 가드 꽉 잠그고 대가리 팍 숙이고."
웹툰 송곳 1-13화에서 부장과 갈등을 빚는 주인공 이수인에게 조언자 김과장은 권투에 비유해서 '기다려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주인공 이수인은 그런 김과장의 조언에 대해
'지겹다. 강제된 선택지에 시시한 통찰을 덧칠해서 마치 새로운 답인양 떠들어대는 어른인 척 하는 어른들의 하나 마나한 조언들'이라고 평한다.
이 다음화인 1-14화에서 이수인은 자기 직계 보스인 점장에게 철저하게 당하고, 잘난척 조언하던 김과장을 향해 '이제 어떡할까요? 이제 뭘하면 됩니까?'라는 시선을 날린다.
김과장은 말 못하고 외면한다.

내가 웹툰 송곳을 본 것은 아래 글을 쓴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 글의 댓글로 달음] http://longlive.tistory.com/599#comment13308977
만화속 김과장이 해준 권투 얘기는 그 전날 내가 했던 조언과 완전히 같은 말이었다.
'괜히 빤한 밑천 내밀어봤자 소용없으면 그런게 쌓여서 점점 더 똥이 되고 점점 더 차별의 피해자가 됩니다. 모르겠으면 기다려요. 항상 쎈 사람 없습니다.'
'일단 내 직속 보스는 무조건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해요. 가령 대학원생이 교수님이 싫은데 까는 법 같은 건 전 모릅니다.'

나는 '조언자 김과장'의 눈을 통해 주인공 이수인을 봤다.
김과장은 부조리의 음지를 피해가는 법을 말하고 있었고
이수인은 부조리의 한복판에 스스로 들어가서 부조리를 없애는 법을 찾고 있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른 김과장의 조언은 이수인에겐 '지겹다. 하나마나한 조언들'이 되었다.
하지만 의문이다.
이수인이 옳을까?

부조리에 빠지나 물에 빠지나 위험에 빠진 사람의 행동은 유사하다.
부조리를 물웅덩이에 비유해보자.
물에 빠져 죽는 일을 피하기 위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웅덩이를 피해가는 방법
-물에 빠졌을 때 거기서 빠져죽지 않고 헤엄쳐 나오는 방법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방법
-웅덩이를 매꾸거나 주위에 철책을 쳐서 위험을 예방하는 방법
이 방법들은 각각 서로 다르다.
발밑에 웅덩이를 살피며 걷는 방법을 빠진 다음에 헤엄쳐 나올 때 쓸 수 없고,
철책을 쳐 위험을 예방하는 방법으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이수인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가 물에 뛰어든 후 그 안에서 사람도 구하고 물웅덩이도 없애버리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래서 그에겐 웅덩이를 피해가는 방법이 지겹고, 시시하다.
하지만 과연 그게 맞는 노력인가.
회의적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엔 '섣불리 들어가지 말고 줄을 던지거나, 뒤로 돌아가서 때려서 기절시키고 뒷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오라'는 규범이 있다.
구조자의 안전과 빠진 사람의 생명을 위해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안타깝다고 적절한 방법을 따르지 않고 뛰어들기만 하면 같이 빠져 죽는다.
규범은 '수영을 잘하는 사람 조차도 물에 빠진 사람이 본능적으로 휘두르는 손에 맞거나 혹은 붙잡고 놓지 않아서 구하려다 빠져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 "네 혈육이 빠졌다면 침착하게 밧줄이나 찾고 있겠느냐"고 지적한다면, 그 말이 사실일 것이다.
남이니까 침착하지 혈육이 빠지면 이성을 잃고 뛰어드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서 규범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냥 뛰어들면 둘 다 죽는다. 규범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더 나은 기술의 문제다.

물웅덩이 대신 부조리를 대입해도 같다.
당장 물에 빠진 사람 구하는 것과 위험한 웅덩이를 예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처럼
부조리를 없애는 방법으로 당장 부조리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없고
부조리에 빠져있는 사람을 구하는 방법으로 부조리 자체를 없앨 수도 없다.
이수인은 저 두가지중 무엇을 더 하고 싶었던 걸까?

이수인 같은 사람들이 있다.
평소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잘 친해지지도 못하면서 올바르지 않다는 것 앞에서 묻혀지내지 못하는 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작중 이수인은 '친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게 아니라, 반대로 '부조리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그들과 친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작중 이수인의 스승격인 노무사는 '당신이 구한 사람은 이상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냄새나는 그저 사람'이라는 것을 알라고 가르친다.
난 그런 이수인에게 '당신은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묻고 싶다.
"당신은 잘 친해지지도 못하는 눈 앞의 남을 불행으로부터 구하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 세상에 이런 부당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겁니까?"

이수인이 원한 것이 사람을 구하는 것인지 부조리를 없애는 것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만약 그가 원한 것이 부조리를 없애는 것이라면 그는 자기 의도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위험 예방을 위해 웅덩이를 없애거나 철책을 치거나 구명조끼를 비치하는 건 웅덩이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 빠져있는 피해자가 할 일이 아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할 일은 살아서 나가는 거고, 물에 빠졌는데 나오지 않으면 빠져 죽기나 할 뿐이다.
부조리에 빠진 채로 부조리를 예방한다는 건 무모한 생각이다.

웹툰 송곳은 이렇게 말한다.
'분명 하나쯤 뚫고 나온다.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롭다가
가장 먼저 부숴져 버리고 마는
그런 송곳같은 인간이.'
송곳의 세계에서 이것은 슬픔인 동시에 희망의 메세지다.
'참지 못한 의인이 일어설 것이다. 분노한 의인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그 의인들은 죽을테지만...'이므로. 그래서 그것은 희망인 동시에 비애의 메세지가 된다.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들어간 의인들의 시체로 강이 매꿔질지도 모른다는 꿈은 희망을 가장한 절망에 불과하다.
이렇게 송곳을 하나씩 부숴먹으면 희망은 없다.

송곳 1-7화에서 이수인은 자기를 다독여준 훈육관을 두고 '그는 어쩌면 가장 교활한 형태의 체제 수호자 였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한다.
폭발해야 할 압력을 살살 달래서 조금씩 빼줌으로써 체제가 유지되도록 해주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악을 계속되게 해주는 존재가 아니냐는 의미에서 '교활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주인공이 투사가 되기 위해 피해자가 되기를 자청하는 웹툰 송곳에서 체제란 부조리를 비호하는 원흉처럼 그려진다.
이 관점에선 투쟁으로 체제를 깨면 부조리가 없어지기라도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사람이 체제와 조직없이 살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조직 없는 개인은 다른 조직에 더 힘든 조건으로 흡수될 뿐 결코 '조직없는 개인'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조직이 깨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문제는 어지간한 부조리보다도 중요한 생존의 문제가 된다.
부조리한 체제를 비호하는 기득권이란 말은 잘못된 구도를 만들었다. 조직에서 생존을 조달하는 모든 개인은 자기 조직이 깨지면 잃을 게 많다.
부조리를 고치겠다며 체제를 위협하면 처음엔 잃을 게 없을 줄 알고 우호적이던 개인들이 투쟁이 구체적이 될수록 점점 더 잃을 게 있는 기득권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한다.
적의 적을 늘리고 내 편을 늘려야 할 싸움에서 그런 모든 개인을 적으로 돌린 채로는 그 어떤 좋은 의도라도 성공할 수 없다.

그래서 기다려야 한다.
약할때 앞에서 싸우다 지지 마라.
지금 뛰어들면 운이 좋아서 특별한 한 사람을 구할 수는 있어도
그걸로 불특정한 사람을 위해 부조리를 고치는 것을 기대하진 마라.
당장은 부조리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발밑을 조심하고
운이 나빠 한발 빠졌다면 더 빠지지 말고 헤어나올 길을 찾아라.
기다리면서 내 편을 늘리고 기다리면서 내 적의 적을 늘려라.
내가 상대하는 적은 이상적으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가 아니다. 성급히 자포자기해서 몸을 던지지 마라.
기다리면 힘이 길러지고 힘이 길러지면 내 힘과의 균형이동으로 인해 없던 기회조차도 만들어진다.

약하면 기다려라. 가드 꽉 잠그고. 되도 않는 잽 날리지 말고.

'노크 노트 > 사회관1 부조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인의식 II  (0) 2014.07.11
주인의식  (0) 2014.07.10
노병가를 보고  (4) 2014.06.16
부조리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0) 2013.11.04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지는 것이 싫다.  (2) 2013.08.08
Posted by 노크노크
|
대학생때 높으신 분들이 와서 강연하는 강좌가 있었다.
삼성전자 사장님이셨던가... 자본주의 사회의 고랩 찍으신 분께서 오셔서 이런 얘기를 하셨다.

사원은 회사에 있을때에만 회사생각을 한다.
사장은 잠들기 직전까지 회사생각을 한다.
오너는 자는 순간에도 회사생각을 한다.

당시 강연하실때의 말씀은 '그 정도 하니까 오너 자리를 유지한다'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사실은 사실이다. 내 것이 되어 주인의식이 발휘되면 일 앞에 밤낮이 없어지고
반대로 내것이 아니면 어떻게든 농땡이 칠 궁리부터 하게 된다.

사업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제일 힘든게 사람 쓰는 거다. 비싼 인건비 주고 일 시켜 놓으면, 내가 하면 금방 해치우고 다른 것 할 것 같은 일을 가지고 부지하세월을 끈다. 단지 시간만이 아니라 일하는 태도 전반에 걸쳐 말 그대로 남의 일 하듯 일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시켜서 일하는 사람의 생산성은 시키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답답하기 그지없다.

바꿔 말하면 이게 이 체제의 현주소다.
근무지에 발목잡혀 시간 때우며 빈둥대는 거래봤자 제대로 작정하고 놀러가는 것에 비하면 논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일텐데도
이 사회의 가히 대부분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최선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은 상태로
일하면서도 일하지 않고 놀지만 놀지 못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 과거 먼나라 이웃나라에 묘사된 공산주의 사회가 오버랩된다.
모두가 공동 주인인 사회에서 누구도 주인의식을 발휘하지 않아서 다함께 태만해졌다던 만화속 서술은
소수가 주인인 사회에서 다수가 주인의식을 발휘하지 않아서 대체로 태만해졌다는 지금의 묘사와 결과적으로 비슷하다.
주인의식을 개인의 미덕으로 강요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그게 누구나 갖고 싶을 만한 것이었다면 누구나 갖기 위해 욕심을 부렸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욕심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면 그건 사회구조의 문제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기 사업을 하기가 너무 난해해서 고용된 안정성을 달콤하게 여기게 된 사회.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기 가게를 일궈놨더니 높아진 부가가치를 건물주가 지대로서 거둬가는 사회.
그래서 결국 주인의식을 탐내지 않는 편이 기대소득이 높아져버린, 모두가 낮은 생산성으로 빈둥거리는 사회.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제대로 일하지도 못하는 채 허비되는 수 많은 사람들의 낮은 생산성만큼
우리는 모두 가난할 것이고 힘겨울 것이며 또 불행할 것이다.

지나친 분배가 동기부여를 막아서 생산성을 죽였던 사회가 있었다. 지금 그 반대편 끝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분배받지 못하고 주인의식을 발휘할 동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체제의 수정이 필요하다.

'노크 노트 > 사회관1 부조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웹툰 송곳  (1) 2014.08.01
주인의식  (0) 2014.07.10
노병가를 보고  (4) 2014.06.16
부조리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0) 2013.11.04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지는 것이 싫다.  (2) 2013.08.08
Posted by 노크노크
|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 동네가 있었어요.
길은 오르막에다 험하고, 쓰레기가 굴러서 냄새나며, 밤이면 쓰레기 더미를 파먹는 동물들이 울부짖어서 잠도 잘 수 없는 곳이었어요.
여느 날처럼 집 앞에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어머니에게 아이가 말했어요.
"우리 동네는 우리가 아껴줘야 하지 않아요?"
이 생각은 아이의 부모님을 통해 온 동네 주민들에게로 퍼져나갔어요.
"우리 동네는 우리가 가꿉시다"
거리를 청소하고, 쓰레기는 치우는 날짜를 정해서 버리고, 노상 방뇨를 하지 않고, 벽에는 예쁜 벽화를 그렸어요.
그렇게 모두가 매일 매일 열심히 노력하자 동네는 점점 살기 좋은 곳이 되었어요.
아이는 자기의 우리동네가 자랑스러웠어요.
아이의 우리동네는 더 이상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 동네가 아니었어요.
그 동네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집주인도 포기했던 집들이 가격이 올라갔고 몇몇은 비싸게 팔았대요.
그 집에 살기 위한 월세가 올라갔어요.
예전 동네 주민들은 더 이상 그곳에 살 수 없었어요.
아이도 그렇게 남의 집에서 쫓겨났답니다.

회사에 들어가 시키는 일만 하던 아저씨가 있었어요.
아저씨는 '내 일'을 하고 싶었어요.
고용되어 명령받은 남의 일 해주는 게 아닌 내 일, 내 사업을 하고 싶었어요.
아저씨는 가게를 차리고 열심히 일 했어요.
아저씨는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달려 나갔어요.
밤낮없이 일했지만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 힘이 났어요.
말로 다 하기 어려운 노력을 쏟아 키운 가게를 아저씨는 내 생명과도 같다고 말하곤 했어요.
가게는 점점 번창했어요. 멀리서도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늘어났어요.
가게세 재계약을 해야하는 시점이 왔어요.
건물주가 가게세를 다섯배로 올려달라고 했어요.
옆 건물주는 여덟배도 불렀다고 해요.
아저씨는 가게를 문닫고 나가야 하게 됐어요. 그래서 당연히 빚더미에 올랐지요.
아저씨는 자기가 그때까지 열심히 했던 일이 '내 일'이 아니라 남의 것을 대신 꾸며주는 남의 일을 한 것이었단 걸 알았답니다.

그 날도 학교에선 선생님이 병아리같은 아이들을 상대로 수업을 하고 있었어요.
"공산주의가 왜 망했는지 아니?"
"저 알아요. 공산주의는 일을 열심히 해도 모두가 똑같이 나눠갖으니까 모두가 게을러져서 망한거에요"
"참 잘했어요~ 내가 한 만큼 갖을 수 있으니까 더욱 열심히 노력하는 것, 이런 걸 주인의식이라고 한단다.
주인의식이 없으면 망하게 되는 거에요. 다들 알았죠?" "네-"
그렇지만 자기 가게를 차리고 일하는 사람의 주인의식 조차도 자기 꾀에 자기가 속은 게 되는 지금
주인의식을 갖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몇명 없었어요.
사람들에게 주인의식을 갖도록 만드는 자본주의의 장점은 이젠 온데간데 없었어요.

'노크 노트 > 사회관1 부조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웹툰 송곳  (1) 2014.08.01
주인의식 II  (0) 2014.07.11
노병가를 보고  (4) 2014.06.16
부조리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0) 2013.11.04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지는 것이 싫다.  (2) 2013.08.08
Posted by 노크노크
|
기안84의 노병가를 보고 있자니 생각이 많아진다.

조직이 없는 개인은 조직에 흡수된다.
때문에 생존의 단위는 조직이다.
그러나 조직도 무소불위의 개체가 아니다.
조직도 외압에 시달리고, 개체로서 생존하기 위해선 다른 조직과의 경쟁에 도태되지 않아야 하며,
조직의 상사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조직이 생존하기 위해선 안으로는 조직이 자생할 수 있는 생활의 룰이 돌아가야 하며 밖으로는 임무 수행이 효율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조직은 깨진다. 처음엔 압박을 받는 정도이다가 그걸로 안되면 조직의 통솔자를 더 잘 닥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꿀 것이고 그래도 안되면 조직을 와해시켜서 다른 조직에 흡수시킬 것이다. 와해된 조직의 구성원들은 타 조직에서 더 작은 지분과 권리를 가지고 더욱 괴로워진다. 조직이 깨지는 건 생존의 문제다.

조직의 행동을 결정하는 판단의 과정은 민주적인 브레인 스토밍이 되는 경우도 있고 독재자의 독단이 되는 경우도 있으나
어쨌건 조직은 단일 개체로서 중구난방이 아닌 판단을 내려야 한다.
판단 내려진 명령과 지시를 팔다리는 빠릿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하며
세대교체되는 신입들을 교육해서 조직의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
노병가에서 묘사하는 의경 부대 구조는 이런 식이더라.
팔다리를 쓰는 일을 하지 않는 열외. (판단자+판단자가 일 시켜먹기 부담스러운 급들)
실무를 챙기는 책임을 지는 '챙'.
그 밑으로 팔다리가 되어 일을 하는 배식이나... 막내들.
수직 구조의 조직에서 팔다리가 "빠지지 않게" 관리하는 것은 챙의 몫이다.
그리고 그 이하의 구성원들은 각자 자기 후임들을 교육시켜서 이 구조속에 넣는다.
이 수직구조에서 하극상이 중간관리자를 깨버리면, 조직의 유지와 보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조직은 깨진다.
조직이 깨지고 나면 개인은 살아남지 못하기에 이는 생존의 문제가 된다.
생존의 문제는 종종 선악보다도 중요한 것이 된다.

작중에 김명호라는 사람이 나온다. 위로 인정받고 아래로 관대한 엘리트다.
김명호가 실세가 되었을때 그는 후임들을 힘들게 하는 온갖 악습들을 파격적으로 해체한다.
짬 안돼서 잠 못자고 고생하는 후임들 재우기, 고참이라고 막내들에게 근무 전가하지 못하게 하기, 1-2분만에 씻고 나와야 했던 후임들 여유있게 씻고 나올 시간 주기... 다른 고참들의 불만도 자기 세력으로 "닥치게 하고" 조직내 부조리를 일소한다.
그런 김명호가 두번 심하게 화낸다.
하나는 하극상이다.
권투하다 군대온 이준희는 고참의 부당한 명령에 고참 둘을 때려눕힌다.
그 때 김명호는 이준희를 집중적으로 찍어누른다.
이준희가 사과를 하건 뉘우치건 받아주지 않으며 그가 완전히 조직에 굴복할 때까지 압박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이준희가 조직의 구조에 완전히 순응했을 때,
김명호는 이준희를 하극상과 정반대의 입장인 조직의 구조를 수호하는 역할로서 힘을 쓰게 한다.
김명호는 왜 이준희를 찍어눌렀을까. 난 그 이유가 이렇게 보였다.
이준희가 가한 힘의 방향은 조직을 와해시키는 방향이다.
이준희가 자기가 때려눕힌 중간급을 대신해서 조직을 유지하는 일과 교육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준희의 힘의 방향은 힘이 충분하다고 할 경우 조직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그 조직이 경직된 수직구조인 탓이다.
이런 구조의 조직에선 아래로부터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 조차도 곧바로 조직을 깨버리는 방향의 힘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소대 외부의 구조가 여전히 군대인 이상은, 안에서 하극상을 용납하면 그 내무반이 '빠져서' '나가리되고'(수족이 판단에 따라 움직이지 않아 성과가 떨어지고 조직 윗선으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아서) 외압에 시달리다가 와해되는 결과가 된다.
때문에 이준희의 하극상이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며 옳다고 할 지라도
그 힘의 방향이 조직을 깨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한은 저지시킬 수 밖에 없다.
한편 노병가에 장기 병가자가 자기에게 인사 안하는 후임을 갈군 건에 대해서 병가자를 까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경우에는 병가자를 깨는 것이 조직 운영에 아무 지장을 주지 않는다. 힘의 방향이 조직을 깨는 방향이 아닌 경우다.

김명호가 화를 내는 다른 한 번의 사건은 타 조직과의 경쟁에서 공개적으로 낙오되었을 때다.
중대가 자기 구역에서 타 중대와의 경쟁에서 공개적으로 낙오되었을 때 김명호는 절대 터치 않던, 그래서 자기가 갈구면 "미쳤나봨ㅋㅋ"라고 답하던 자기 바로 아래 기수를 때리며 온 조직을 빡시게 굴리기 시작한다.
경쟁 조직과의 경쟁에서 밀리면 그 조직은 외압을 받게 된다. 조직이 윗선에서 가해지는 외압의 초기에 대응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면 외압은 점점 더 구체적이 되고 조직은 점점 더 각박해진다. 통솔자를 압박하고-그래도 안되면 통솔자를 더 각박하게 운영할 사람으로 바꾸고-그래도 안되면 조직을 개편하는 식으로.
결국 김명호가 화를 낸 두가지 일은
선악의 맥락에서 보자면 일관성이 없으나
조직에 위협이 되는 방향의 힘에 대하여 조직을 보호하고자 하는 생존의 맥락으로 해석할 때엔 일관성이 있다.

노병가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나는 아주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다.
지금도 아주 개인주의적인 조직에 속해있다.
나는 조직을 위해 내 영역을 헌신하는 것에 익숙치 않다.
나랑 아주 친했던 내 이전 상사는 아주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더 큰 조직이 우리 조직에 헌신을 요구할 때 아래를 쪼는 게 아니라 외압에 맞서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그는 다소 눈밖에 났고, 그는 다른 종류의 자리를 제안받아 이동하였으며, 그의 자리는 우리 조직내의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다.
새로운 내 상사가 된 사람은 이전 상사보다는 덜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다.
정확히는 그 자신도 우리 조직의 일원이었기에 개인주의적인 속내를 가지고 있으나 그러다가 눈밖에 난 선례를 염두에 둬서라도 외부를 상대로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대단히 기피하고 있다.
만약 바뀐 사람인 그가 우리 조직으로부터 만족스런 성과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그 다음엔 조직 외부에서 낙하산인사를 붙이는 방법이 있다. 그렇게해서 분위기 쇄신 하라고(쪼라고) 외부인사를 불러오면 그는 개인주의적인 조직을 갈아엎으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겠지.
내가 개인주의적으로 살기 위해선 내가 몸담고 있는 개인주의적인 조직을 보호해야 한다. 내 조직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것을 염두에 둔 헌신이 필요하다면 근시안적으로 헌신을 아끼기 보다는 수행해야 한다.

과거에 내가 상명하복을 거스르고 위를 깐 게 두세명 정도 있다.
당시엔 내 성질 못이겨 거스른 것 뿐이었다.
'이 자를 완전히 묻어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궁리했지
그 하극상 비슷한 것이 내 미래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모르는 채였고
그래서 이래도 내가 장차 괜찮을 건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지금도 과정에 불과하지만 어떻게 내가 여태 무사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를 알 것 같다.
정치적인 교섭은 물론이고 하극상조차도
그것이 성공하려면 조직의 존속을 위협하지 않는 방향으로 힘의 방향을 잡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안의 선악도 중요한 명분이지만 조직 유지는 생존이라는 중요한 명분을 기본적으로 깔고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제 중간급인 나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번에 나이차가 좀 나는 사람들을 여럿 뽑았다.
이들에게 잡다한 것들을 알려주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꼭 내가 해야 할 일도 아니지만,
친절하게 알려주려고 하다 보니 내게 물어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게 단지 귀찮은 일이 늘어나는 것 뿐인가 생각했었으나 노병가를 보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조직의 생활과 상식을 나를 통해 교육하는 것은 나에게 이롭다.
이전과 똑같이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할 지라도
중간급인 나는 '개인주의적인 조직을 보호함으로써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할 터전을 보존한다'라는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나한테 뭐라 할 사람 없는 만큼 자유롭게 행동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나 혼자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고 조직에 대한 헌신을 비웃으면 나는 후배에게 나만 '빠진' 선배가 될 뿐이며 그 결과는 나를 조직의 중심에서 밀어낼 것이다.
개인주의적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에게 너무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나 스스로도 따르는(적어도 내가 가르친 룰을 내가 무시하지 않는)
지속이 가능한 룰을 가르쳐주는 관계를 유지할 때 그 관계는 내게 수평/수직적 정치 관계에 있어 큰 힘이 될 것이다.

흔히 사회의 부조리를 밑에서 고칠 것이냐 올라가서 고칠 것이냐, 라는 말을 한다.
동시에 '올라가서 고치면 된다는 생각은 일견 쉬워보이지만 올라가는 과정에서 조직에 동화되기 때문에 올라가서는 고치지 못한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부조리를 고치고자 하는 정의감에서 비롯된 하극상이건/내 한 몸 편하겠다는 사사로운 뺑끼에서 비롯된 하극상이건,
그 힘의 방향이 조직을 깨는 방향이면 그것은 결국 생존에 대한 위협을 하는 셈이 된다.
하극상조차도 그것이 성공하려면 조직의 존속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깨기 위해선 그 깨고 난 자리를 매울 수 있어야 성공한다는 것이며
이는 내가 내 자리에 매울 수 없는 관계를 만들어 놓을수록 유리한 입지를 접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노병가를 보면서
부조리를 고치는 데에 성공하기 위해서도, 내 일신에 이익을 위해서도 조직 규모에서 판단하는 관점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조직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에 대해
생존이라는 강력한 명분을 적대시 한 방향에서
조직의 입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부조리를 개선 하려 한다면
그 개선은 성공할 수 없다.

'노크 노트 > 사회관1 부조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인의식 II  (0) 2014.07.11
주인의식  (0) 2014.07.10
부조리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0) 2013.11.04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지는 것이 싫다.  (2) 2013.08.08
중용  (0) 2013.06.05
Posted by 노크노크
|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금새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는 어려움이 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되는 대로 서술해보고자 한다.

...

부조리는 어떻게 고쳐지는가.
이에 대한 헤겔의 대답이 변증법이다.
(달리 해석할 여지를 아무리 많이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변증법은 대립과 투쟁이 발전의 동력이라는 생각으로 유통되고 있고
그렇기에 변증법에서 유래한 맑시즘과 페미니즘은
투쟁을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으며,
실패했다.
맑시즘과 페미니즘의 실패는 투쟁론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하기에
내 생각은 변증법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다.

투쟁은 발전을 왜곡 및 저해한다.
발전은 이원적인 정과 반의 투쟁을 동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투쟁은 다원적인 가능성들을 검토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발전을 왜곡한다.
투쟁의 당사자들은 이겨야만 하고, 승리를 위해서는 다양한 가능성보다 집중된 큰 힘이 유리하여 다양성은 축소되며, 또한 승패는 반드시 정의롭게 이루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투쟁상황이 발전을 만드는게 아니라 투쟁상황은 발전을 왜곡한다.
단지 기존 체제 위기의 시기에 투쟁의 함정에 빠지기 쉬울 뿐이다.

투쟁은 부조리를 해소 하는 게 아니라, 부조리 돌려막기로 다른 부조리를 양산하여 결국 전체적으로 부조리 해소에 실패한다.
이게 추구하는 가치 자체는 실현하는데 다른 데에서 부조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와 비교해보면
사회주의가 분배정의를 실현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불러왔다는 것,
페미니즘이 여성혐오의 시대를 불러오고 있다는 것 등에서
추구하는 가치 그 자체도 성공시키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변증법과 달리 실제 부조리 해소는
위기 상황 인지, 기존 틀 변화의 필요 인지
=> 다양한 가능성들의 열거
=> 투쟁 당사자인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닌 제3자들의 검토
=> 하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사춘기를 변증법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착실하게 살아온 청소년 A는 사춘기를 맞아 반항을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 합에 이르러 어른이 된다.
그럴듯하다. 하지만 진짜로 그런가?
사춘기를 다음처럼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발전은 기존 행동 체계에 변화를 요구하는 '기존 체계의 위기' 상황에서 시작한다.
대안이 될 체계를 찾아 다양한 가능성을 병렬로 열거하고 이렇게 열거된 다양한 가능성들을 맞이하여 '기존 체계의 위기 상황을 초래한 요소들'을 포함한 검토를 걸쳐
대안 체계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즉 사춘기의 A는 반항이라는 한가지 가능성으로서의 '반'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변화를 위해 다양한 행동의 가능성을 흩뿌리고 미숙한 상태의 다양한 시도를 해본 후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변화에 대처하는 이러한 방법론은 학문에 있어 패러다임 전환에서도 나타나고 진화론이 설명하는 생명의 진화에서도 나타난다.
가령 패러다임은 이런 형태로 전환된다. (부조리 개선이란 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참을 쌓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학문의 올바른 방법론과도 이어진다.)
기존의 체계가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들이 대두되어 기존 체계가 위기를 인식하면
대안이 될 수 있는 가능한 청사진들을 주욱 늘어놓고 새로운 현상을 포함한 이전의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지 검토하여 하나를 선택하는 식이다.
또 이는 진화론의 방법론과도 부합한다. (그나마 학문을 예로 들땐 내재된 모순이 드러난다는 표현으로 설명이 되는데
진화를 예로 들땐 환경이 변하는 거지 내재된 모순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즉 굳이 내재된 모순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은 변화도 있다.)
환경에 변화가 생겨서 생물군의 생존곡선에 변화를 주는 환경의 압력이 걸리면, 다양한 가능성들 중에서 그 환경 압력을 수용할 수 있는 형태가 남는다.
정과 반의 투쟁 후 화해가 아닌, 위기상황에서 다수의 가능성에 대한 검토 후 부정되지 않은 안에 대한 선택이 세상이 발전하는 프로세스다.
그래서 나는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헤겔의 통찰인 변증법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변증법 대신 뭔가 다른 이름을 필요로 하는 대안 선택의 방법론을
자본주의에 적용하면 맑시즘의 대안이 되고
가부장주의에 적용하면 페미니즘의 대안이 된다.
이때 자본주의나 가부장주의는 타파 대상이 아니라 변화를 요구받은 기존 체계이며
부조리의 피해자들은 기존 틀에 허점이 있다는 증거로서 어필해야 하고
가해자를 공격하는 것은 투쟁이 되어 왜곡할 뿐 무의미하다.
다양한 가능성들이 제시되어, 입증된 허점 및 기존에 밝혀진 사실들을 포용하는지를
투쟁에 참여하는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아닌 제3자들에 의해 검토후 선택 받아야 한다.

부조리는 누구의 손으로 고쳐지는가.
부조리의 음지에 빠진 자,
부조리의 음지를 피해간 자,
부조리의 덕을 보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때 부조리를 피해간 자가 꼭 부조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운이 좋아서 피해간 것일 수도 있고
위험을 내다 봐서 피해간 것일 수도 있으나
부조리를 피해갔다고 덕보는 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미래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한번 피해갔다고 부조리를 남겨두고 싶어하지만도 않는다.
또한 부조리를 피해간 자는 무력한 사회적 약자로 남지도 않는다.
한데 그렇다고 이들이 체제를 부정하는 투쟁에 호응하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체제를 긍정하지만 부조리를 고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체제를 부정하는 피해자의 투쟁은 체제를 긍정하는 제3자들의 조력을 받지 못하여
결국 부조리를 제거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시스템 부조리는 그 시스템에 수렁이 존재하면 미래에 자기가 거기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수렁으로 인해 시스템 자체가 전복되는 것을 불안해하는
제3자의 손으로 고쳐진다.
그 제3자들의 개선의지를 이끌어 내는 것은 투쟁이 아니라 입증이다.
그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제3자들의 폭을 넓힐수록 부조리는 해소된다.
반대로 전쟁처럼 투쟁에 참여하는 자의 존재가 클수록 부조리는 커진다.

여전히 투쟁 대립 구조가 발전의 동력이 된다는 생각이 정치, 법률, 사회 도처에 깔려있다.
틀린 생각이다.
투쟁을 전략으로 삼으면 추구하는 가치를 발전시키는데 실패한다.
부조리 입증,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변화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환기, 대안의 수집 및 검토.
이것이 성공을 만든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조리를 수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 아직 미흡하다.
부조리 입증 후 대안 가능성 검토의 과정에 투쟁이 발생하지 않으면 가장 좋을 것이나,
투쟁이 발생했다면 부조리를 돌려막기 하던 투쟁이 와해되는 시기에 발전의 동력이 재확보된다.
투쟁상황을 어떻게 비투쟁상황으로 바꿀수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정과 반의 투쟁이 합으로 넘어가는 화해의 순간이 어떻게 오는지 변증법에선 생략되어 있다.
변화를 시작시키는 것이 위기상황이라고 했다. 그럼 위기상황은 어떻게 오는가.
위기, 즉 수렁의 존재에 대한 입증. 이건 패러다임론에서도 아직 분명하게 찾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실질적인 과제다.

부조리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하는 것은 옛날에 생각했던 '시스템버그' 글과 같은 문제의식이다.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하지만 어차피 관심없을 것이라고 제3자의 도움받기를 포기하면
부조리를 타인에게 입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입증은 경시되고
피해자가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투쟁의 당위가 생긴다.
그리고 시스템 전체의 발전을 투쟁론에 의존하면 그 시스템은 실패한다.
제3자에게 부조리를 입증하는 것이 무시되어선 안된다는 건 분명하다.

투쟁은 부조리를 개선하는 동력이 아니라
빠지기 쉬운 함정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투쟁 상황이라는 함정에서 빠져나오는가?
어떻게 하면 부조리를 개선하는 동력인 제 3자들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부조리, 곧 시스템 버그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아직은 질문으로 끝난다.

...

부조리를 어떻게 고치는가에 대한 생각은 이념의 종점이 될 수 있다.
이념이 유토피아를 대하는 태도를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현실의 현재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목적지로서의 유토피아만을 그리는 것이다.
두번째는 유토피아를 상정해 놓고 현실로부터 목적지까지 '끌고 가기 위한' 길을 그어놓는 것이다.
세번째는 먼 목적지에 대해서는 여백을 남겨두고 현재 상태로부터 디버깅을 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이상에 대한 여백 때문에 세번째안은 이념이라기 보다는 방법론의 모습을 띌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어떤 유토피아도 기존시스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으므로 기존 시스템의 부조리를 고치는 건 결국 유일한 길이 된다.
결국 이 방법론은 이념의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을 것이고 그때 이념은 종점에 이를 것이다.

.....

- 투쟁상황을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 변화를 시작시키는 기존 체계의 위기상황은 어떻게 불러올 수 있는지
- 관심없는 제3자들의 동력은 어떻게 끌어 올 수 있는지
내가 현실에서 응용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해져야 확인도 할 수 있고
그래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대충 갖다 붙이기 나름인 뜬구름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
한데 싸움난거 해소시키고 사람들 설득해서 부조리 해결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하지...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도 성공하겠다.
일단은 투쟁이 해결에 나쁜 전략이라는 사실부터 인지하는 중이다.
난 호전적인데다가 그게 나쁜 전략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었으므로...

'노크 노트 > 사회관1 부조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인의식  (0) 2014.07.10
노병가를 보고  (4) 2014.06.16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지는 것이 싫다.  (2) 2013.08.08
중용  (0) 2013.06.05
사회 진화의 동력  (0) 2012.12.12
Posted by 노크노크
|
난 염치 없는 여자가 싫다.
자기의 웃음이 타인에게 기쁨을 줄 수 있으므로
자기는 웃음으로 노고를 대신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싫고,
무엇보다도 자기 유리할 때에만 아전인수하며 공정함을 모르는 여자가 싫다.
하지만 그게 내가 여성을 혐오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저 구체적으로 저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 여자가 싫을 뿐이다.

요즘 인터넷을 볼 때 가장 싫은 건 인터넷 논쟁을 보면 볼수록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프레임에서는 싫어하는 속성, 이를테면 염치없다는 속성을 여성 전체의 속성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일부 예외적인 '개념녀'라는 구멍을 만들어 둔다.
이 프레임에서 개별 여성에겐 두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개념없는 보통 여자가 되느냐, 개념있는 예외자가 되느냐.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선 여자를 강하게 공격하면 할수록 개념녀는 결벽증적인 것이 되어간다.
여자가 크게 잘못된 존재라고 공격하는 수위를 높이려면 대부분의 여자가 잘못된 존재이고 개념녀는 소수 예외가 되어야 하므로, 개념녀로 구분되는 문턱은 점점 더 높아진다.

죄를 물어 값을 치르게 하는 것의 기본은 고립시키는 것이다.
고립시키려면 가장 염치없는 태도를 갖는 사람들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해서 지정해야 한다.
대상이 두리뭉실해질수록 고립에서 멀어진다.
그런데 이 남자VS여자의 구도에선 '대부분의 여자'가 죄인이기 때문에 개념녀가 소수자로 고립된다.
혹시 누구라도 세상의 절반을 상대로 '고립시켜서 죄를 물어서 값을 치르게 하겠다'라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남자VS여자의 프레임은 염치없는 여자에게 여성의 대표자 지위를 주고, 세상의 절반을 고립시킨다는 건 불가능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 염치없는 여자에게 면죄부를 준다.

곰순이와 함께 하다보면 이런 걸 느낀다.
염치없는 사람은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그리고 보통 주위 사람중에는 이성보다 동성이 많다.
염치없는 여자는 살아오면서 기껏해야 몇명의 남자에게 피해를 주지만 그 수십배는 되는 여자들에게 피해를 준다.
염치없는 여자는 남자보다도 주로 곰순이와 여자들의 인생에 스트레스를 준다.
곰순이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안다. '저런 여우 타입은 나랑 안맞는 스타일'임을 알고, 얽히지 않도록 조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곰순이가 자기를 '예외적인 개념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엔 유난히 염치없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는 그들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가 아는 곰순이는 인터넷을 안하기 때문에 저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 프레임에 갇혀서 '여자'를 욕하는 사람을 자꾸 접한다면 기분나빠질 것이고 그 프레임 안에서 싸움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이게 아니면 스스로를 '난 여자답지 않은 여자니까 여자 공격하는 것에 기분나쁠 필요 없지'라고 소외시켜야 한다.)
그러면 염치없는 여자의 죄를 곰순이가 막아줘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난 특히 이게 싫다.
'여자들'에 대한 공격의 주장을 곰순이가 '그 주장은 틀렸다'라고 막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염치없는 여자와 싸잡아 묶인 자신을 위해서.

난 개인적으로 남자VS여자의 프레임의 기원은 페미니즘 투쟁의 프레임이었고
여기에 반발하여 그 프레임 안에서 싸움이 붙은 결과
현재 만연한 여성혐오증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여성혐오증의 선두에 소위 꼴페미로 비하되는 페미니즘이 있다는 게 그 근거다.
하지만 기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져서 여자를 공격하는 자도,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져서 여자라는 집단에 자기를 이입하여 행동하는 자도 싫다.
그들의 행동은 내가 싫어하는 염치없는 자를 보호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노크 노트 > 사회관1 부조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병가를 보고  (4) 2014.06.16
부조리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0) 2013.11.04
중용  (0) 2013.06.05
사회 진화의 동력  (0) 2012.12.12
요동치며 우상향  (0) 2011.06.10
Posted by 노크노크
|
도올의 다원주의적 중용론을 참조해서 예전에 정리했던 것.

중용은 좌우의 중간에 있는 어느 회색분자의 주장만이 옳고, 좌도 우도 그르다고 하는게 아니다.
극좌부터 극우까지의 스펙트럼을 사회안에 포괄하여 누군가는 이런 말도 하고 누군가는 저런말도 하는 가운데 종합된 의견의 무게중심이 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용은 다원주의다.

레이저는 집중된 단색광이다. 레이저는 강력한 힘을 낸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고 그래서 이 단색광의 힘에 매료된 사람들은 사회의 집중을 방해하는 잡다한 뻘소리들을 제거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틀린 의견도 죽이지 말고 내버려 둬야 하는 이유가 있다. 틀린 의견을 다 죽여버리면 내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배경이 있어야 현위치를 알 수 있다. 좌와 우가 말살되어 사회가 단색광이 되어갈수록, 비교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가 중도임을 판단할 방법은 없어진다.
다원주의적 중용의 방식에서는 틀린 의견은 틀린 의견 만큼의 설득력을 가지고 소수의 지지자를 모으고 올바른 의견은 그만큼의 설득력으로 많은 지지자를 모아서 결국 사회의 무게중심은 올바른 의견이 차지하게 된다. 반면 단원주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틀어막아버리기 때문에 비교할 배경이 없어져서 결국엔 이게 중도적 의견인지 극우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어진다. 배경에 보이는게 아무 것도 없으니 현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뻘소리를 탄압하던 단원주의는 종국엔 항상 극단적인 주장으로 치우쳤다. 나치나 소련이나 북한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레이저는 중도적 색을 갖을 수 없다. 항상 어디론가 치우쳐 버린다.

문제는 또 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총체에서 발생하는 중용은 의견의 상향전달을 의미하나 단색광에 집중된 하나의 힘은 의견의 하향전달을 의미한다.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무엇이 중도이고 올바른지에 대한 판단이 발생하는데 대중이 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잃고 나면 통치자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시야에 배경이 없어져서 여기가 어딘지를 가늠하기 어려우니 통치자 몇몇이 이 방향이 옳다고 하면 사람들은 눈 감고 따를 수 밖에 없다. 통치자의 판단에 대한 피드백이 불가능해진 시스템은 통치자가 부도덕할 때 그걸 제지할 방법이 없는 시스템이고 이는 통치자 입장에서는 타락의 유혹이 너무 큰 시스템이다.
하향전달되는 하나의 의견이란 건 단지 지배자의 군중 세뇌가 될 뿐이다.

좌와 우가 병존해야 가운데에 '중'이 있다.
왼쪽이 죽으면 오른쪽은 오른쪽이란 가치도 잃고 독선이 되며
독선은 피드백을 받지 못하기에 결국엔 악이 된다.
그렇기에 중용은 다원주의다. 대중의 시야에 배경이 살아있어야 여기가 중도인지, 통치자가 올바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의견의 상향 전달과 통치자에 대한 피통치자의 감시를 필요로 하는 민주주의가 다원주의를 유독 중요시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크 노트 > 사회관1 부조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조리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0) 2013.11.04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지는 것이 싫다.  (2) 2013.08.08
사회 진화의 동력  (0) 2012.12.12
요동치며 우상향  (0) 2011.06.10
시스템 버그  (13) 2011.06.07
Posted by 노크노크
|
대선 2차토론에서 문재인이 '시대정신이 바뀌었다'라는 말을 할 때
이정희가 '노동자들이 죽어서 바뀐 겁니다'라고 말했다.
사회주의자다운 말이다.
설령 사회주의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혹은 아예 사회주의적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중에서도,
'음지에서 고생하는 노동자들이 투쟁하다 죽어갔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어 나가는 것이다'라는 말에는 그럭저럭 동의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 관점은 이런 것이다.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총대매고 강력하게 항의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고, 앞장서서 싸우지 않고 있는 여타 노동자(월급받는 모든 근로자)들은 그 수혜를 앉아서 보고 있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내 관점은 이렇다.
경제활동은 자본과 노동이 함께 일하는 것이고,
(짧은 사이클에서) 이윤 성과도 (긴 사이클에서) 시스템적인 진화도 그 경제활동이 낳는 결과이다.
이윤 성과가 자본만의 공이 아닌 것처럼
시스템적 진화도 노동만의 공일 수 없다.
노동자건 자본가건 우리는 모두 온 세상에 뿌려진 빛 알갱이들이고
흩뿌려진 개인들이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건드리는 것으로서
어떤 이념이 적용된 실제 세상의 전체 형상이 밝혀진다.
수렁에 떨어진 빛 알갱이는 수렁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지에 떨어진 빛 알갱이는 양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체 형상이 밝혀진 세상엔 장점이 있고 트러블이 있다.
-제국주의가 적용된 세상은 그 끝에 전쟁으로 인한 파국이라는 트러블이 나면서 변경되었다.
-사회주의가 적용된 세상은 그 끝에 자본주의 대비 효율성 완패라는 트러블이 나면서 변경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적용된 세상은 그 끝에 세계 금융 위기라는 트러블이 나면서 변경되었다.
세상의 변화는 이렇게 밝혀진 전체 형상에 대한 조망으로부터 도출된다.

항의하며 죽어간 노동자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라는 관점과 다른 점은,
첫째로 '앉아서 수혜를 본 사람들'이라는 부채의식의 여부 차이이고
둘째로 해야할 과제가 투쟁이냐 입증이냐의 차이다.
그리고 사실 여부를 따져보자.
과연 신자유주의의 철회라는 시대정신의 변화는
노동자의 죽음 앞에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는 반성으로인해 야기 되었는가,
아니면 신자유주의는 투자 이익에 편중된 배분을 낳고 그로 인해 금융 가치만 고평가된 끝에 리만브라더스 파산 사태가 일어나면서 신자유주의의 전체 형상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인지로 인해 야기 되었는가.

세상은 갑을로 나뉘지만, 동시에 영원한 갑은 없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시스템 버그가 작은 더 합리적인 사회를 희망하는 이유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시스템 버그가 커질수록 전체적으로 피로해지는 사회대비 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을이 되는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 변화 의지를 갖는데
어디서 갑이던 사람이 누군가에겐 을이고 어떤 때엔 병이 된다. 언제나 갑인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갑을 관계의 유동적인 면은 시스템 버그를 개선할 의지에 동조할 사람을 늘린다.
그런데 투쟁은 갑을을 구분하여 고정한다.
투쟁으로 인해 갑을의 구분이 명료해질수록 을은 한정되고 개선의지는 동조를 잃는다. 자기 일로 인식되지 않으니까.
철탑위 칼바람을 맞으며 죽어가는 노동자의 투쟁이 얼마만큼의 사회 개선의지의 동조를 얻어냈는지
아니면 잃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 해석은 실제와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대기업 월급쟁이 노동자는 어느모로 보나 진짜 노동자지만 노동 운동을 자신을 위한 사회개선운동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사회 변화 동력은 투쟁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조망에서 나오고, 해야할 일은 투쟁이 아니라 입증이다.
이건 모든 사회 이념, 기업, 팀, 모든 시스템에 해당한다.

* 덧 > 나꼼수의 흥망도 이 관점에서 파악된다. '입증'의 스탠스를 가지고 정치력화 할 정도로 흥했다가, '투쟁'의 스탠스를 가짐과 동시에 열혈신도 모임이 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흥했던 시절의 강력한 위력은 보이지 않는다.

'노크 노트 > 사회관1 부조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지는 것이 싫다.  (2) 2013.08.08
중용  (0) 2013.06.05
요동치며 우상향  (0) 2011.06.10
시스템 버그  (13) 2011.06.07
집중된 힘에 의한 인간 착취  (0) 2011.05.16
Posted by 노크노크
|
요동치며 우상향.
단기적으로는 요동치지만 장기적으로는 상승하는 형태.
주가곡선에서 자주 보는 형태다.
세상 자체도 이런 형태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도덕성도 사회의 합리성도 단기적으로는 크게 향상되기도 하고 허무하게 하락하기도 하지만 
긴 시간을 갖고 보면 우상향을 이루는 것이라고.

이를테면 도덕성은 과거에 비해 발전했다. 살인이 별거 아니던 시대도 있었고 좀 더 후에는 살인자는 얼굴에 먹선을 문신할지언정 폭행은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던 시대도 있었다. 고대인 같으면 신경도 안쓸 정도의 불의에도 현대인은 반성하고 자제하기 일쑤다. 도덕관념이 나빠졌네 말세네 뭐네 하지만 긴 시간을 놓고 봤을때 현대인의 도덕성은 고대에 비해 괄목할 정도로 향상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불가에서조차 출가한 적극적인 수행자에게나 권장되던 채식주의의 계율까지도 일반인 대중에게 스믈스믈 퍼져나가는 게 가능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불가에서 스님들이 채식을 하는 이유와 요즘 회자되는 채식주의의 이유는 본질적으로 같다. 그런데 이 채식주의는 종교의 지침과는 무관하다. 즉 과거에는 소수의 수행자들이나 생각하던 것을 일반대중이, 그것도 종교 계율로 지시받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사회의 합리성도 고대에 비해 분명 발전해왔다. 부조리와 억울함이 지금보다 적었던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긴 시간 속에서 이루어낸 발전은 분명하다. 현시점이 과거의 어느 상종가 지점 보다는 낮지만 전반적으로는 분명히 성장했다.

지금은 하락국면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부조리와 계급 격차는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사실 역행이라는 표현은 알맞지 않을 것이다. 시대는 본래 요동 치는 가운데 발전하는 거니까.
중요한 의문은 '언제 반등할까?'이다. 언제 바닥을 칠까?



'노크 노트 > 사회관1 부조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지는 것이 싫다.  (2) 2013.08.08
중용  (0) 2013.06.05
사회 진화의 동력  (0) 2012.12.12
시스템 버그  (13) 2011.06.07
집중된 힘에 의한 인간 착취  (0) 2011.05.16
Posted by 노크노크
|
어떤 조직이 있다.
그 조직에 병렬적인 두개의 팀이 있는데
한 팀은 업무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서 다들 칼퇴근하고 업무시간내의 업무 강도도 널럴하다.
다른 한 팀은 업무의 성격상 야근이 태반이고 삽질도 많이 해야 한다.
이 경우에 각 팀의 구성원의 업무에 대한 사고방식은 달라진다.
널럴팀은 '업무 범위라는게 있는 거다. 일단 있는 규정은 지켜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빡센팀은 '기본 업무 범위가 있긴 하지만 배타적으로 일하는 것은 잘못이다. 최대한 협력하는게 당연하다.'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 옳으냐 하면 각자 할 말이 있을 만큼은 타당하다. 양쪽이 다 할 수는 있는 그레이 존의 일을, 업무범위규정상 빡센팀이 감당해야 할 일이긴 한데 바쁘므로 널럴팀에서 맡아주길 바라는 상황이면 당신은 어느 쪽의 주장이 옳다고 할 것인가?

이번엔 상하로 나누어 보면 조직의 상층에 있는 사람은 업무에 따르는 권한도/책임도 온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가 강하다. 하층에 있는 사람, 노무자는 내가 한 일의 책임이 나 혼자 질 종류의 것은 아니며 일은 돈벌자고 하는거고 퇴근하면 다 똑같은 아저씨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업무상 직급이 나를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약하다.) 역시 어느 쪽이 옳으냐 하면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현장 노동자가 일하다가 실수를 했다면 그 실수의 책임은 실수한 개인이 져야 하는가? 아니면 실수는 일하다보면 자연발생 하는 것이고 회사를 위한 일을 하다가 실수가 발생한 것이니 회사가 막아주어야 하는가?

사회 전체를 놓고 봐도 마찬가지다.
사회와 경제에 룰이 있으나 공정한 것만은 아니어서 누구는 가만 앉아서 시스템의 혜택을 보는데 누구는 시스템으로 인해 삶이 고단해진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의 법/제도/경제에 갖는 존중은 천차만별이다.
시스템에 혜택을 입고 자라온 누군가는 '그것은 불법이다' 라는 말 한마디로 선악을 자를 수 있다.
반대로 시스템에 치이며 살아온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다. 어떤 행동이 불법이기는 하나 그럴 수 밖에 없도록 암묵적 강요를 받아 온 것이라고 생각 할 여지가 있다. 마치 '빡센팀의 업무를 널럴팀에게 떠넘기는 것이 규정위반이기는 하나, <잘못된 일>이라고 잘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고 앞서의 두 예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으로 인해 피로한 사람>을 <시스템의 수혜자>가 상대할 때에 받는 일차적인 느낌은 '자격지심 있는 사람은 상대하기 피곤해'이고 '뭐야 엄연히 룰이 있는데 억지나 부리고 말이 안통하네'이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다. 그쪽의 입장이 주장하는 바는 시스템의 버그다.
시스템에는 오류가 있고, 시스템 룰을 전명 긍정함으로써 오류의 존재를 부정하면 그 오류가 결국 자기를 친다.

관계 속의 입지는 언제라도 역전될 수 있으며 같은 의미를 '영원한 갑은 없다'는 말로도 표현한다. 이건 내가 갑이 되는 상황에 빌붙어 시스템 오류의 존재를 눈감아 될 일이 아니다. 시스템의 오류는 발견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구성원들이 자기가 갑이 되는 상황에 빌붙기 시작하면, 시스템의 오류를 눈감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자정능력을 잃고 오류가 극대화되어 완전히 미칠 때까지 추락공포(을이 되는 두려움)의 지배하에 계속 굴러간다. 뭐... 한 북한쯤 되도 굴러가니까 그보다 더 미칠때까진 안 뒤집어지고 안 고쳐진다. 당신 역시 사회 속의 을이다. 시스템의 오류가 자라날수록 고단해지는 사회의 을.

시스템과 그 룰을 신성시 하지 말라. 시스템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시스템을 신성시 하여 무결점의 선으로 존중하는 것도 맹독을 품고 있다. 시스템은 항상 버그를 품고 있고 그 버그를 발견하고 수정하기는 멈춰선 안된다. 그래서 때론 불법조차 보호 받아야 한다. 시스템의 룰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완하기 위해서다.

함께 굶겨 놓고 니들끼리 시시비비를 가려봐라 하는 게 추락공포가 지배하는 사회의 전형적인 논리. 서로 그 안에서 갑을로 나누어서 눈꼽만한 '갑질'하기에 빌붙어 시스템 오류를 눈감는 입장에 서게 한다.

'노크 노트 > 사회관1 부조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지는 것이 싫다.  (2) 2013.08.08
중용  (0) 2013.06.05
사회 진화의 동력  (0) 2012.12.12
요동치며 우상향  (0) 2011.06.10
집중된 힘에 의한 인간 착취  (0) 2011.05.16
Posted by 노크노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