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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금새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는 어려움이 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되는 대로 서술해보고자 한다.

...

부조리는 어떻게 고쳐지는가.
이에 대한 헤겔의 대답이 변증법이다.
(달리 해석할 여지를 아무리 많이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변증법은 대립과 투쟁이 발전의 동력이라는 생각으로 유통되고 있고
그렇기에 변증법에서 유래한 맑시즘과 페미니즘은
투쟁을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으며,
실패했다.
맑시즘과 페미니즘의 실패는 투쟁론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하기에
내 생각은 변증법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다.

투쟁은 발전을 왜곡 및 저해한다.
발전은 이원적인 정과 반의 투쟁을 동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투쟁은 다원적인 가능성들을 검토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발전을 왜곡한다.
투쟁의 당사자들은 이겨야만 하고, 승리를 위해서는 다양한 가능성보다 집중된 큰 힘이 유리하여 다양성은 축소되며, 또한 승패는 반드시 정의롭게 이루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투쟁상황이 발전을 만드는게 아니라 투쟁상황은 발전을 왜곡한다.
단지 기존 체제 위기의 시기에 투쟁의 함정에 빠지기 쉬울 뿐이다.

투쟁은 부조리를 해소 하는 게 아니라, 부조리 돌려막기로 다른 부조리를 양산하여 결국 전체적으로 부조리 해소에 실패한다.
이게 추구하는 가치 자체는 실현하는데 다른 데에서 부조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와 비교해보면
사회주의가 분배정의를 실현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불러왔다는 것,
페미니즘이 여성혐오의 시대를 불러오고 있다는 것 등에서
추구하는 가치 그 자체도 성공시키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변증법과 달리 실제 부조리 해소는
위기 상황 인지, 기존 틀 변화의 필요 인지
=> 다양한 가능성들의 열거
=> 투쟁 당사자인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닌 제3자들의 검토
=> 하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사춘기를 변증법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착실하게 살아온 청소년 A는 사춘기를 맞아 반항을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 합에 이르러 어른이 된다.
그럴듯하다. 하지만 진짜로 그런가?
사춘기를 다음처럼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발전은 기존 행동 체계에 변화를 요구하는 '기존 체계의 위기' 상황에서 시작한다.
대안이 될 체계를 찾아 다양한 가능성을 병렬로 열거하고 이렇게 열거된 다양한 가능성들을 맞이하여 '기존 체계의 위기 상황을 초래한 요소들'을 포함한 검토를 걸쳐
대안 체계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즉 사춘기의 A는 반항이라는 한가지 가능성으로서의 '반'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변화를 위해 다양한 행동의 가능성을 흩뿌리고 미숙한 상태의 다양한 시도를 해본 후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변화에 대처하는 이러한 방법론은 학문에 있어 패러다임 전환에서도 나타나고 진화론이 설명하는 생명의 진화에서도 나타난다.
가령 패러다임은 이런 형태로 전환된다. (부조리 개선이란 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참을 쌓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학문의 올바른 방법론과도 이어진다.)
기존의 체계가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들이 대두되어 기존 체계가 위기를 인식하면
대안이 될 수 있는 가능한 청사진들을 주욱 늘어놓고 새로운 현상을 포함한 이전의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지 검토하여 하나를 선택하는 식이다.
또 이는 진화론의 방법론과도 부합한다. (그나마 학문을 예로 들땐 내재된 모순이 드러난다는 표현으로 설명이 되는데
진화를 예로 들땐 환경이 변하는 거지 내재된 모순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즉 굳이 내재된 모순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은 변화도 있다.)
환경에 변화가 생겨서 생물군의 생존곡선에 변화를 주는 환경의 압력이 걸리면, 다양한 가능성들 중에서 그 환경 압력을 수용할 수 있는 형태가 남는다.
정과 반의 투쟁 후 화해가 아닌, 위기상황에서 다수의 가능성에 대한 검토 후 부정되지 않은 안에 대한 선택이 세상이 발전하는 프로세스다.
그래서 나는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헤겔의 통찰인 변증법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변증법 대신 뭔가 다른 이름을 필요로 하는 대안 선택의 방법론을
자본주의에 적용하면 맑시즘의 대안이 되고
가부장주의에 적용하면 페미니즘의 대안이 된다.
이때 자본주의나 가부장주의는 타파 대상이 아니라 변화를 요구받은 기존 체계이며
부조리의 피해자들은 기존 틀에 허점이 있다는 증거로서 어필해야 하고
가해자를 공격하는 것은 투쟁이 되어 왜곡할 뿐 무의미하다.
다양한 가능성들이 제시되어, 입증된 허점 및 기존에 밝혀진 사실들을 포용하는지를
투쟁에 참여하는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아닌 제3자들에 의해 검토후 선택 받아야 한다.

부조리는 누구의 손으로 고쳐지는가.
부조리의 음지에 빠진 자,
부조리의 음지를 피해간 자,
부조리의 덕을 보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때 부조리를 피해간 자가 꼭 부조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운이 좋아서 피해간 것일 수도 있고
위험을 내다 봐서 피해간 것일 수도 있으나
부조리를 피해갔다고 덕보는 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미래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한번 피해갔다고 부조리를 남겨두고 싶어하지만도 않는다.
또한 부조리를 피해간 자는 무력한 사회적 약자로 남지도 않는다.
한데 그렇다고 이들이 체제를 부정하는 투쟁에 호응하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체제를 긍정하지만 부조리를 고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체제를 부정하는 피해자의 투쟁은 체제를 긍정하는 제3자들의 조력을 받지 못하여
결국 부조리를 제거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시스템 부조리는 그 시스템에 수렁이 존재하면 미래에 자기가 거기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수렁으로 인해 시스템 자체가 전복되는 것을 불안해하는
제3자의 손으로 고쳐진다.
그 제3자들의 개선의지를 이끌어 내는 것은 투쟁이 아니라 입증이다.
그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제3자들의 폭을 넓힐수록 부조리는 해소된다.
반대로 전쟁처럼 투쟁에 참여하는 자의 존재가 클수록 부조리는 커진다.

여전히 투쟁 대립 구조가 발전의 동력이 된다는 생각이 정치, 법률, 사회 도처에 깔려있다.
틀린 생각이다.
투쟁을 전략으로 삼으면 추구하는 가치를 발전시키는데 실패한다.
부조리 입증,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변화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환기, 대안의 수집 및 검토.
이것이 성공을 만든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조리를 수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 아직 미흡하다.
부조리 입증 후 대안 가능성 검토의 과정에 투쟁이 발생하지 않으면 가장 좋을 것이나,
투쟁이 발생했다면 부조리를 돌려막기 하던 투쟁이 와해되는 시기에 발전의 동력이 재확보된다.
투쟁상황을 어떻게 비투쟁상황으로 바꿀수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정과 반의 투쟁이 합으로 넘어가는 화해의 순간이 어떻게 오는지 변증법에선 생략되어 있다.
변화를 시작시키는 것이 위기상황이라고 했다. 그럼 위기상황은 어떻게 오는가.
위기, 즉 수렁의 존재에 대한 입증. 이건 패러다임론에서도 아직 분명하게 찾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실질적인 과제다.

부조리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하는 것은 옛날에 생각했던 '시스템버그' 글과 같은 문제의식이다.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하지만 어차피 관심없을 것이라고 제3자의 도움받기를 포기하면
부조리를 타인에게 입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입증은 경시되고
피해자가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투쟁의 당위가 생긴다.
그리고 시스템 전체의 발전을 투쟁론에 의존하면 그 시스템은 실패한다.
제3자에게 부조리를 입증하는 것이 무시되어선 안된다는 건 분명하다.

투쟁은 부조리를 개선하는 동력이 아니라
빠지기 쉬운 함정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투쟁 상황이라는 함정에서 빠져나오는가?
어떻게 하면 부조리를 개선하는 동력인 제 3자들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부조리, 곧 시스템 버그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아직은 질문으로 끝난다.

...

부조리를 어떻게 고치는가에 대한 생각은 이념의 종점이 될 수 있다.
이념이 유토피아를 대하는 태도를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현실의 현재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목적지로서의 유토피아만을 그리는 것이다.
두번째는 유토피아를 상정해 놓고 현실로부터 목적지까지 '끌고 가기 위한' 길을 그어놓는 것이다.
세번째는 먼 목적지에 대해서는 여백을 남겨두고 현재 상태로부터 디버깅을 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이상에 대한 여백 때문에 세번째안은 이념이라기 보다는 방법론의 모습을 띌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어떤 유토피아도 기존시스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으므로 기존 시스템의 부조리를 고치는 건 결국 유일한 길이 된다.
결국 이 방법론은 이념의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을 것이고 그때 이념은 종점에 이를 것이다.

.....

- 투쟁상황을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 변화를 시작시키는 기존 체계의 위기상황은 어떻게 불러올 수 있는지
- 관심없는 제3자들의 동력은 어떻게 끌어 올 수 있는지
내가 현실에서 응용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해져야 확인도 할 수 있고
그래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대충 갖다 붙이기 나름인 뜬구름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
한데 싸움난거 해소시키고 사람들 설득해서 부조리 해결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하지...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도 성공하겠다.
일단은 투쟁이 해결에 나쁜 전략이라는 사실부터 인지하는 중이다.
난 호전적인데다가 그게 나쁜 전략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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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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