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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간사회는 자본주의라는 공법위에 지어져서 인류 공조가 동작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성장율 위에 존재한다. 성장율이 없으면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신용이 축소되어 자본주의는 붕괴한다.
그런데 성장율은 지수 상승이다. 지수상승을 감당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계속해서 성장 속도가 가속되는 지수 상승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인구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거나 노예해방 여성해방 등 숨어 있던 경제 인구를 끌어내서 지수적으로 늘리거나 하지 아니면 노동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경제의 지수적 상승을 감당하는 주축은 지속적으로 발전 속도가 빨라지는 과학 기술이다. 자본주의의 생존은 기술 발전에 달렸다.
지수 상승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 기술은 결국 특이점을 만나게 된다. SF에나 나오던 키워드들이 최근 수시로 뉴스에 거론되고 있다. 이는 지수 증가 속도로 가속된 기술의 발전이 그간 내가 살아온 속도 감각을 추월하는 속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초전도체
핵융합
양자컴퓨터
인공자아
노화역전
이모탈이 머지 않았다.
지수 속도로 가속되는 성장과 빈부격차가 지금 이대로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레이트 리셋'을 말한다. 지속 불가능하니 기존의 질서가 무너졌다가 새로 시작해서 지금 같은 과정을 다시 밟지 않겠느냐는 거다. 난 그 반대쪽에서 기술에 의한 생산성의 가속 끝에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는 특이점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특이점을 통과하면 관찰 대기하던 외계인이 나타날 것이다.
지구에 지성체 등장후 10만년 이내,
문명의 시작 후 만년 이내,
우주 탐사 시작 후 백년 이내인 우주 역사상 찰나의 시간 만에 인공지능 혹은 노화역전으로 지성체가 더 이상 그냥 인간이 아니게 되는 특이점의 징조가 조금씩 보인다. 천년쯤 더 걸린다 해도 대세엔 차이가 없으므로 138억년 우주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만날 수 있는 지성체는 확률상 반드시 특이점 이후의 존재다.
또한 지성체 특이점 vs 유인 성간 여행의 난이도를 비교해 보면 백년쯤 사는 생물이 수십~수만 광년 거리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웜홀이나 아광속 이동이 필요한데 이게 인공지능이나 노화역전 보다도 멀다. 항성/은하간 여행은 지성체가 이모탈이 되는 것보다 테크 레벨이 높은 것 같다.
따라서 만날 수 있는 외계인은 이모탈이라고 볼 때 그들 기준 더 큰 규모의 협력 확장을 위해선 지구 문명이 특이점을 통과할 때까지 대기하며 관찰하는 것이 개연성 있다. 여전히 '생존과 번식'을 최대동기로 하는 특이점 이전의 인간은 '인간은 고래보다 가볍다'만큼이나 명확하게 종의 한계를 넘지 못하기에 특이점 너머 지성체의 협력 대상으로는 부족하다.
지구 식물의 역사는 30억년은 되므로 지성체가 생명탐사를 했다면 이미 옛날에 와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기네 기준으로 판단하여 특이점에 도달할 가망이 없는 2억년 묵은 공룡을 멸종시켰다는 SF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특이점을 지났을 때에 외계인이 등장할 것이다.
세포에서 우주사회까지 통합의 연쇄가 이어질 것이다.

어쩌면 허황된 이 이야기는 세상을 더 재밌는 곳으로 만든다. 살아봤자 그저 그뿐인 곳일수도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꿈꾸고 싶은 것도 별로 없는 곳이 될 수도 있는 이 세상이 한없이 꿈꾸기에 충분할 만큼 넓은 곳이 된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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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의 힘은 지능과 도구보다도 협력하는 머리 수에 달려 있다. 일당백의 개체에게 이백명이 붙어서 이기는 다구리 전략이 인간의 방식이다. 다른 동물 대비 초월적 숫자의 협업이 가능해지는 포인트는 패러다임의 공유에 있다.
지성체의 시작은 상상력이다.
상상으로 실제에서 속성을 분리 변화시킬 수 있게 되면서
추상화가 가능해지고
추상화를 통해 개념을 만들고
개념들로 기술공법을 만들고
거대 협력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기술공법을 발전시켜 더 크게 협력하는 것이 사피엔스 종의 힘이 폭발한 기점이었다.
개념들이 연결된 설계를 통해서 인간 군체는 기능들이 협력하는 구조가 되었고 그 결과 다수 협력이 가능해졌다. 사실 협력보단 부속물로 기능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어떤 부속물들은 착취를 당하는데 그들에게 협력이란 표현은 맞지 않을 테니까.
이는 인간성이 좋고 인맥이 좋다는 수준에서 개인들이 저 사람 마음에 드니 돕고 싶다는 친분과 개인적 신뢰로 이루어지는 협력이 아니라, 개념들로 만들어진 아키텍처 상에서 각 사람들이 배분 받은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협력이다.
(크리스탈 진동 시에 1씩 올라가는 카운터 숫자를 시간 개념으로 약속하고 그에 맞춰 각자 맡은 동작을 해서 인터페이스에 약속된 값을 주고 받는 프로그램들을 생각해보자. 역할을 기반으로 한 이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카운터의 값을 시간으로 다루기로 약속하는 개념으로 이루어진 아키텍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고나 가치 생성시에 카운터가 올라가는 돈이라는 개념도 클럭과 마찬가지로 약속에 의해서 사회 아키텍처 상의 개념으로서 협력에 사용된다.)

사피엔스가 픽션을 신봉할 수 있게 되어서 문명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상상력이 실제들의 위에 abstraction layer를 까는 효과를 내서 추상화된 개념을 다룰수 있게 된 것이 인지혁명이고
개념들을 가지고 현실에서 동작하는 구조를 만드는 기술공법을 만들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기술공법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강력해졌다는 뜻이다. 개미나 벌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구조의 사회를 따르는 대신 추상적 개념으로 이루어진 공법을 따르며 그 공법을 발달시켜 갔다는 점이 차이의 핵심이다.
사회 구성의 패러다임에 대해 기술공법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기술공법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체계를 세우는 방법인 건축 공법, 논리적 체계를 만드는 SW 공학의 공법, 반도체를 만드는 공법. 기능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공학기술적 방법처럼 인간 무리를 기능들이 협력하는 사회로 만드는 방법도 공법이다. '공법'은 '현재의 결과물을 만드는 가장 발전한 기술이나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며 기술은 계속 변화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하라리가 말하는 '픽션'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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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세포군은 작은 자아를 형성하고
그 소자아들이 통합되어 한명의 인격을 형성한다.
의식에 특화된 뇌세포와 시각에 특화된 뇌세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균질한 일반 뇌세포가 위치에 따라 분업한 업무를 처리하면서 그들이 모여 인격으로 통합된다.
통합된 표층 의식에 대비하여 각 기능을 하는 세포군의 작은 의식들은 무의식이지만, 무의식이 의식으로 통합되는 과정은 이분법적이지 않고 점층적이다. 반구 정도의 규모가 되면 그것만으로도 (반구가 소실된 사람이 정상인 생활가능할 정도로) 거의 한사람분의 의식을 갖으며 이를 두개 통합해서 한명의 의식이 완성된다. 뇌량이 끊어진 사람이 왼손이 집는 물건을 오른손이 쳐내는 행동을 하는 것을 바탕으로 볼 때 반구 규모에서의 의식 통합은 좌반구와 우반구 각각의 의식중 서로 동의되는 일부는 표층 의식으로, 동의되지 못하는 일부는 억제되어 무의식으로 남는 형태다. 더 작은 기능군 단위에서의 통합도 이와 같을 것이다.
(사회의 표면적 지향점과 내부 구성원 개개인이 얼마나 진심인가는 다를 수 있듯이 의식이 지향하는 바와 그 구성원인 자아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설득되어 집중하는가는 다르다. 구성원인 소자아들이 진심으로 설득되지 않으면 소위 억압된 무의식이 되어 스스로를 방해한다. 소자아들의 의식인 무의식은 의식 없이 자동화된 행동인 습관으로 표출된다. 무의식적 습관을 진압하여 통합된 의식을 따르게 하려면 의지가 쓰이는데 의지는 빠르게 소모된다. 의지 소모 없이 소자아를 전부 통합시키기 위해선 습관을 들여야 한다. 습관이 들어서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무의식의 소자아들에게 뿌리내릴때 집중된 역량이 나온다. https://longlive.tistory.com/m/858
분석심리의 무의식과 페르소나가 설명하는 현상들을 이 관점에서 재해석할시 어지간히 들어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간은 한명의 인격으로 통합이 완성되는 생명체가 아니다. 시선, 눈빛, 표정, 태도와 해석기관등 인간은 속내를 겉으로 까발리는 데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했고, 고독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문명 이후 부터는 뇌용량 축소를 일으키며 인간의 지능은 사회의 일부로서 진화했다. 뇌세포가 인격으로 통합되는 것처럼 개인도 기능을 수행하면서 무리의 인격을 이룬다. 나는 나의 군체고 나는 군체의 일부다. https://longlive.tistory.com/m/859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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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대학생때 선배형이 커피 사주고 자기는 오렌지주스 마시길래 물어봤다. "형은 왜 커피 안마셔요?"
"내 나이가 수명이랑 만나면 늙어 죽는건데
수명이 계속 늘어나니까 수명 곡선이 1년에 1보다 빠르게 올라가면 내 나이랑 수명 곡선이 만나지 않지. 그럼 안죽겠지?
평균 수명 곡선을 두번 미분해서 그런 날이 언제쯤 올까 예측해 봤더니 내가 죽기 전에 올 가능성이 간당간당해. 버텨볼라구."

이 책의 주제가 이거다. 버텨볼라구.
책의 초반 20%정도는 노화의 근본 원인 및 해법을 설명한다.

몸의 어느 세포나 DNA는 동일하다.
동일한 DNA를 가지고도 어떤 세포는 피부세포로 분화하고 어떤 세포는 신장세포로 분화한다.
이를 컨트롤하는 후성유전체의 단백질이 있는데 해당 단백질이 염색체를 코팅해서 이 세포에서 염색체의 어떤 부분이 on되고 어떤 부분이 off될지를 calibration한다.
그런데 이 단백질은 다른 기능도 한다. 염색체가 끊어졌을 때 손상된 염색체 사슬을 복구하는 기능을 한다.
마치 민방위 재난복구군 처럼 평소엔 생업에 종사하다가 재난이 나면 생업을 두고 이동하여 재난을 복구하고 돌아온다.
이 이동 - 복구 - 원래 자리로 재이동하는 과정이 많이 반복되다 보면 실수가 발생한다. on 시켜야 할 곳이 off 되고 반대도 발생해서 세포가 기능 이상을 일으킨다. 모근 세포가 생성하는 털에 색소가 안 생성되어 흰색이 된다든지.
염색체 발현 및 염색체 복구를 하는 그 단백질이 염색체 손상을 복구하고 돌아올 때에 다른데 떨어져 있던 염색체의 끊어진 자투리 성분들에 착각해서 들러 붙는 바람에 원래 자리로 돌아오기에 실패하는 일이 있다. 세포가 자주 손상되고 오래될수록 자투리 염색체 성분이 세포에 쌓이고 이로 인해 제자리로 돌아오기가 혼란을 일으키기 쉬워져서 세포가 늙는다.
이 현상은 쥐에게 자투리 염색체 성분을 주입하면 늙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고 반대로 쥐에게 해당 후성유전체 단백질을 주입하면 젊어지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민방위가 길을 잃어서 복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면 민방위를 넉넉하게 주입해 놓으면 본업 자리를 뜨지 않고 재해복구를 할 수 있는 셈이다.
이게 노화와 노화 역전의 기본 원리다.
쥐에서는 성공했다는데, 후생 유전체 단백질을 생성하는 유전자를 특정 먹이에 대해 더 많이 생산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유전자 조작해서 실험한 것 같다.
사람에게 적용하려면 유전병 치료하듯 바이러스에 유전자 조작을 심어서 주입하는 형태가 될 수도 있고 기존 유전자에서 생성을 활발하게 하도록 하는 알약이 될 수도 있다는 정도로 예상한다고 한다.

나머지 80%는 이미 잘 알려진 장수 비법들을 자잘하게 설명한다. 운동하면 좋다. 야채가 몸에 좋다. 소식하면 좋다.
즉 '그 날이 올 때까지 이걸로 버텨라.'

2018년 중국에서 에이즈 안 걸리는 유전자 편집 아이를 만들었다. 저자는 자기도 인간 유전자 편집 너무 하고 싶은데 못하는 터라 2천년대 감성으로 절대 금기를 범했으니 이제 매드사이언티스트로 몰리고 큰일이 나겠군 했는데 2018년에는 사람들이 많이 무뎌져서 한 3일 지나니까 인터넷 기사에서 밀려서 사라지더랜다.
그래서 요는 '거의 다 왔다'.
바이러스에 영생 공장 실어서 감염시켜서 유전자 편집해도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는 시대가 올테니 그때까지 운동하고 야채먹고 영양제 챙겨먹으며 버텨보라.

책 종반에는 '사회보장제도가 무너지겠지. 빈부 양극화가 심해지겠지. 많은 문제가 일어나겠지. 어떻게 되겠지. 옛날엔 뭐 문제 없었냐.'가 담겨있다.

1위 부자 제프 베이조스가 노화 역전 연구소를 만들었다. 순서가 나까지 오는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조만간 특이점이 오긴 올 것 같다.
애완동물의 수명을 늘려주는 사업으로 부작용 확인하는 동물 실험을 겸해 사업이 가능할 것이고 그를 통해 자금과 안정성을 수급하면서 사람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을테지.
나도 버텨볼란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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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명상에서 알게 될 것을 바탕으로 생각을 확대해보자.

마빈 민스키 책 the society of mind (1986년 책)
AI의 창시자가 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마음의 구성자들이 사회를 이루어 인격을 만든다는 관점에서 마음을 분석하는 책이다.
계산되는대로, 말하자면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신경세포 한개에 의식이나 의지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면 그 세포가 군집을 이룬다고 자아가 되는지는 '0+0+...=1이 되는 것이 가능한가'처럼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민스키는 조합에 의해서 부분에 없던 특징이 전체에 나타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물질의 조합으로부터 특별한 '생기'의 존재 없이 생명도 나타나는데 신경 세포의 조합에서 사유가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마치 평면인 판자들의 특징으로는 나올 수 없는 '가두는' 특성이 평면의 조합인 상자에는 나타나듯이.
그런데 의식의 최소단위는 뇌 1개보다 작을 수 있다. 책의 제목이 마음의 사회인 이유다.

저 책외에 여기 저기서 본 것을 모아보자.
https://youtu.be/wfYbgdo8e-8

https://youtu.be/JQVmkDUkZT4

뇌량 절제로 보듯 뇌가 꼭 한덩이로 전체가 있어야 의식과 의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의식의 최소 단위는 더 작아진다. 뇌세포들은 서로 질적인 차이가 없는 신경 세포들이 연결되어 뇌를 이룬다. 0.5(뇌반구)에 의식이 있다면 그보다 작은 것은 왜 안되겠는가 생각한다면, 하나의 신경세포나 뇌의 한 부위가 의식을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세포 하나~소규모 뇌세포군이 초보적인 의식을 갖는다고 가설할 수 있다.
즉 인간의 뇌에 수많은 의식이 존재하고 이것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힘(아마도 집중력이라 해야될 것 같다)으로 하나의 의식이 되는 것일 수 있다.
뇌량 절개같은 물리적인 이유로 혹은 조커 메소드 연기를 반복하다 분리된 인격을 만든 히스레저 같은 이유로 정신병적 이유로 그 의식이 분리되면 자기 안에 다른 자아가 생기는 경우도 가능하다. 통합이 흩어지면 일부 뇌세포군만으로도 독립된 인격을 형성할 역량이 된다는 의미다.
자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서 다이어트는 실패하기 일쑤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나에 대한 지시가 잘 되지 않아서 공부중 졸릴 때 경쟁자를 생각하며 잠깨는 식의 우회적 지시를 해야 통하기도 한다.
즉 의식은 최하 둘(좌우반구)에서, 좀 더 초보적인 수준의 의식으로 환원한다면 수많은 초보적 의식들이 통합된 군체이다.
하기 실험을 보자.
benjamin libet 실험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9E%90%EC%9C%A0%EC%9D%98%EC%A7%80-%EB%B6%80%EC%A0%95%ED%95%98%EB%8A%94-%EB%87%8C%EA%B3%BC%ED%95%99-%EC%8B%A4%ED%97%98/

fried, mukamel, kreiman 실험.
뇌세포 상호간에 질적인 차이가 없는 동일한 뇌세포들이 연결되어 뇌가 되므로 의식면에서도 기초적인 의식들이 군집하여 집중력으로 의식으로 통합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음대로 판단해서 누르고 언제 눌렀는지 기록하라는 실험에서 보듯 마음대로 판단하라고 하면 의식하는 내가 판단하여 지령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쪽의 신경이 판단하여 움직이고 보고 받는 형태로 된다. 자아는 외부에 대표성을 갖는 일부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자동으로' 움직이는 영역이 크게 차지한다. (통찰명상을 통해 보게 될 것이 이것이다.)
DMN에서 자동으로 동작하는 것이 내 의지를 벗어나 있다고 하지만 실상 몸에 익은 것이야 말로 진짜 나라고 할 수도 있다. 습관의 중요함은 널리 강조되어 왔으며 모든 종류의 기술 훈련은 몸에 익혀서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행해질 단계가 되어야 완성된다.
다이어트나 습관 교정이 내 의지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은 내 안의 다른 나를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단수가 아니다.

여기서 끝이 아닐 수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햄스터는 옆에 다른 햄스터가 있으면 스트레스 받아서 그게 제 새끼더라도 죽이는데 사람은 옆에 누가 없으면 외로움이라는 거부반응이 격렬하게 일어난다. 사람에게 있어 동료의 존재는 단지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 두려움을 진정 시켜준다. 사람이 한명의 인격으로 통합이 완성되는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신경세포들의 개별 의식이 통합되어 1인격으로 표현되는 것과 유사한 일이 1인격 윗단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마음들의 사회로 구성되고 다시 인간 사회 속에서 마음들의 사회를 구성하는 일부가 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더 생존력이 강한 조직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도 생각할 수 있다.
개별인격이 사회 조직으로 통합되어 조직의 인격과 의식으로 표현된다. 조직의 인격이 갖는 경쟁력은 개인의 인격간의 경쟁력 차이가 갖는 특징을 마찬가지로 가질 것이다. 사람 하나의 내면 구성을 참고하여 조직의 경쟁력 강화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경쟁력 강한 인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좋은 습관을 무의식적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필요하고 집중력도 필요하다. 굳은 다이어트 결심 보다 거부감 없이 티비 앞에서 걷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변화 방침이 유리하다는 것도 개인이나 조직에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통치자의 인격이 혹은 그가 꾸린 수뇌부의 인격이 국가의 인격으로 표현되는 사회도 있고 너무 민주적이어서 개개의 인격이 통합되지 않는 사회도 있다. 의식적인 통제를 최우위에 놓은 수직구조가 지나치면 역량이 제한되어 바보가 된 뇌도 있을 것이고 수평화가 지나쳐서 자아가 집중되지 못하고 인격이 분열된 뇌도 있을 것이다. 생존에 성공한 뇌구조로부터 최적의 사회조직구조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는 신경망 구조에서 보듯 완전히 수직적이지도 수평적이지도 않다.
군체의 일부로서 생각하기. 영감을 얻을 때엔 발상은 빈공간에서 떠오르기 보다는 많은 생각들을 입력 받은 후 이해할 때에 떠오른다. 타인의 생각들을 많이 듣고 영감이 생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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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서부터 세상을 배운다.
세상은 어떤 모습이며 무엇이 가치 있는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
혼자만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기대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엔 갈 길이 너무 멀어서
이미 주행중인 다른 누군가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빌려타고 다시 갈아타기를 반복하는
우리는 히치하이커들이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갖는다고들 말한다.
자유의지는 외부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정말 자유의지를 갖는 지는 일단 미뤄두고,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할 때 사람은 과거에 배운 것에 완전히 순응하는 것을 못견뎌하는 속성을 보인다.
정해진 매뉴얼만을 따르며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자아가 죽어버리는 느낌을 받으며
생존을 쫓지만 생존해도 공허하고
권력을 쫓지만 권력 위에서도 공허하고
쾌락을 쫓지만 쾌락에도 불구하고 공허하다.

자유의지를 갖는 사람은 매뉴얼화된 인생에 복종하지 않기에 미지의 행보를 가고
미지의 행보를 가기에 자기가 맞게 가고 있는지 불안에 빠진다.
이 불안은 신이 아닌 한 가질 수 밖에 없는 인간적 한계다.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발휘하면 자아의 한계를 느끼는
부조리한 인간으로서 갖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은 생존과 권력과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초월적 가치추구를 하기에 이른다.
인간적 한계를 넘어선 존재를 열망하는 그것은 예술과도 맞닿아 있고 도덕과도, 혹은 학문적 진리추구와도 맞닿아 있다.

과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수레는 종교였다.  
종교는 세가지 구성 요소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신의 이름, 그 신이 대변하는 초월적 가치, 그 가치의 예제가 되는 이야기.
사람은 예시를 통해서만 관념을 배울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관념, 혹은  '정의'라는 관념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개념을 설명하는 것 만으로는 사랑과 정의가 뭔지 배울 수 없었고 가치를 실현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종교는 초월적 가치를 긍정하는 가치관의 가르침을 이야기에 담아 내놓았다.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의 이야기를 내면화 하면 가상의 기록이 독자의 인지 내적으로는 살아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종교의 이야기는 신자에게 살아있는 이야기가 됨으로써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살아있는 상태로 전달한다. 종교의 이야기는 가르침을 소화흡수 가능한 형태로 조리해 놓은 포장인 셈이다.
불교는 이야기들은 비유요 방편일 뿐이라고 누차 강조하고 있고,
기독교 조차도 성경의 이야기 자체보다 그 안에 담아 내고자 하는 가치에 대한 가르침이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과거 종교가 제공하는 가치관은 신의 이름으로 삶의 가치를 초월적인 어떤 것에 둘 수 있도록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종교가 신의 권위를 빌려서 제공하던 가치관은 신의 이름이 부정되는 현대에 이르러 위기를 맞는다.

"초인이 되어라.
아니면 초인의 전조가 되어라.
초인은 벼락 같은 것이다. 벼락이 치기 전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바람은 벼락의 전조다. 초인을 부르는 비바람이 되어라.
초월적 가치를 잃은 인간은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의 여신을 세운다. 삶과 건강을 통해 이룰 초월적인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건강을 목적으로서 추앙한다.
그리고 건강을 위한 건강에 매달려 먹고 싸는 인생을 살며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일어났다.
인격신의 권위 아래 가치관을 제공받는 데에 익숙해져 온 사람들은
인격신의 이름이 힘을 잃은 세상에서 초월적 가치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과학이 신이 된 시대다.
사람들에겐 이기는 편에 붙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 이기는 편 우리편, 지지정당은 집권여당.
근래 영역을 확장해온 과학은 분명 이기는 편 이었다.
그런데 이기는 편에 붙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과학이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과학은 대중에게 새로운 신앙이 되었다.
이 과학숭배신앙은 묘한 병폐를 낳고 있다.
과학을 신으로 숭배하면 그 신이 알려주는 사실들은 신화에 해당하는데
종교였다면 그 안에 가르침으로서 초월적 가치를 긍정하는 가치관이 담겨져 있을 것이나
과학은 종교가 아닌지라 이야기를 까보면 안에 가르침이 담겨있지 않다.
그래서 과학을 숭배한 사람들은 '없다'를 가르침으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즉 삶에 있어 초월적 가치의 상실이다.
그들은 그렇게 니체가 얘기했던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을 여신으로 세우고 행복을 발명했다 주장하는 경멸적 인간들'이 되어간다.
건강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더 나은 가치를 갖는 삶이 되는가?
그들에겐 이에 대한 답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월적 가치란 없는 것이 답'이라는 가르침을 과학 신화가 담고 있다는 믿음이 그 신앙의 교리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문제다. 과학은 '어떻게 하면 틀리지 않은 지식을 효율적으로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의 이름일 뿐이다.
지식을 축적함에 있어 틀린 지식이 섞여드는 것을 너무 배척하면
탄탄하되 쌓아 올라가는 효율성에 한계가 오고,
쌓는 속도에만 집착하면 잘못된 지식이 섞여든다.
과학은 그 정확성과 효율성 사이에서 합당한 지점을 합의한 방법론의 이름이다.

연역된 지식은 논리적으로 참이다. 그러나 '귀납적 지식은 언제라도 반례가 등장해 뒤집힐 수 있기 때문에 연역된 지식만이 참'이라는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미친 사람은 자기가 미쳤다는 걸 모르듯, 인간의 논리 이성 체계가 옳다는 것을 인간은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경험없이 생각하기에 참이라는 것은 신뢰할 수 없으며 실제로 경험된 것만이 참이다'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가 등장했다.
(합리주의자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선 경험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사상을 의미한다. 사실 문맥에 맞춰 번역하면 사변지상주의자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경험주의에 더해서 '경험도 귀납적이므로 뒤집힐 수 있다' 쪽으로 가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 불가지론자가 된다.)
경험된 모든 것이 참은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참인 명제를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합의점을 찾은 '경험주의의 일부'가 우리가 아는 과학이다. 이 방법론은 성공적으로 모태인 철학의 위상을 넘어섰다.

연역적으로 도출된 것들 중에 경험적으로 검증된 명제에 대해 참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 물리학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지식을 쌓는 속도 효율성의 한계에 마주친다.
화학원소 주기율표는 원자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하는지 해명되기 전부터 관측되었다.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연역되지 않았으므로 화학은 과학으로 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화학은 비록 연역적으로 도출되지는 않았더라도 독립적인 실험으로 재연이 가능한 명제까지는 참으로 치기로 한다. 통제된 환경 하에서 이제까지 재연되던 경험이 갑자기 다음 실험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틀어질 위험은 무시할만큼 작은 것이라는 까닭이다.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확인되거나, 실험으로 재연가능한 지식을 참으로 여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과학의 방법론이다.
사회과학은 독립적인 실험이 어렵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 방법론을 따르기는 어렵다. 지식 축적의 효율성을 위해 다소 널럴하게나마 가능한 한계내에서 과학 방법론을 참조하여 쌓아 올라가겠다는 것이 사회과학의 방법이다.

지식축적을 탑에 비유하면 물리학은 지상에서 시작한 1층, 화학이나 생물학등은 허공중에서 시작한 2층, 가정위에 통계적 방법을 이용하는 사회과학 역시 허공중에서 시작한 3층, 가정위에 사변적으로 탐구하는 인문학은 더 널럴한 4층, 종교는 5층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 화학의 주춧돌은 물리학으로부터 연역증명되었고 서로 미시-거시의 관계로 합치되었다. 이제 화학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온 셈이다.
다른 학문간의 합치는 아직이다.
다른 모든 지식이 종국에는 1층에서 시작한 과학으로 환원될 것이라는 주장이 통일과학운동이며 환원주의라고도 한다. 과학의 방법론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이었는지가 검증된 지금, 모든 앎을 과학 방법론에 의지하여 풀어나가자는 주장은 큰 지지를 받고 있다.

얻어 탈 때 중요한 것은 잘 타고 제 때 내리는 것이다.
내려야 할 지점을 놓치고 엉뚱한 곳으로 가 버리는 일은 히치하이커의 세계에선 흔한 실수다.
그래서 얻어탈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팁은 이거다.
이렇게 말하자. "어디까지 가세요?"
빌려타는 것이 차가 아니라 세계관이나 가치관인 경우라면 이것은 이런 질문이 된다.
'이 관념은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까, 그리고 어디까지만 데려다 줄 수 있을까?
이 관념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며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구분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며 어려운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그리스에서는 수 많은 철학자들이 세상을 설명했다.
재미로 살펴보면, 우수한 통찰의 결과로 다들 일견 맞는 구석들을 가지고 있긴 했다.
- 아낙시메네스 : 질적 차이는 결국 양적 차이로 환원된다. 세상은 공기다.
   => 원자론, '질량은 에너지로 환원된다'.
- 피타고라스 : 참된 존재는 결국 수학적으로만 정확하게 표현가능한 어떤 것이다.          
   => 모든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 가능하다는 생각은 동종의 매질이 법칙에 의해 세상을 이룬다는 의미가 되고 온 세상의 매질이 동종이라면 세상안에서 분별을 가능하게 하는 참된 존재의 특성은 법칙에 좌우된다. 수학은 그러한 법칙에 가장 근접한 분야다.
- 헤라클레이토스 : 참된 존재는 없고 오직 변화만 있다. 만물은 유전한다.  
   => 화학 원소는 유전한다.
- 엠페도클레스 : 참된 존재는 결국 불, 공기, 흙 물,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 존재를 물질과 에너지와 생명이라는 속성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 데모크리토스 : 참된 존재는 원소로 되어있다. 다양한 원소들은 진공 속에서 무한히 운동하는데, 이때 무거운 원소는 둥근 운동의 안쪽으로 모여들어 대지가 되었고 가벼운 원소는 바깥으로 밀집하여 대기와 불이 되었다. 정신은 정신의 원소로 이루어졌으며 유물론은 여기서 시작한다.
   => 역시나 상당히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뭘 모르는 지를 알라. 너 자신을 알라."
같은 맥락에서 공자는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자로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네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여라. 그것이 아는 것이다."

과학의 경우를 살펴보자.
앞서 설명한 과학의 방법론은 사실은 과학이 희망하는 이상향의 구상이다.
과학을 하는 것이 사람이다 보니 과학이 추구되는 현실은 이와 다른 방식을 취한다. [*]
중요한 이슈중 하나인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뉴튼이 초속30만Km로 달리는 열차위에서 초속30만Km로 공을 던졌다. 공의 속도는 얼마일까?
고전역학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 문제의 답을 계산하는 데에 망설일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답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짧은 혁명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과학활동은 하나의 지배 패러다임 하에서 이루어진다.
지배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탐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답이 정해진 퀴즈'를 푸는 것이 된다.
지배 패러다임은 예상하는 결과를 이미 가지고 있다. 그게 정상과학 활동이다.
실제로는 아직 답을 모르는 부분임에도 넘겨짚는 게 가능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현재 지배 패러다임에 따라 자유의지의 문제를 풀면 어떻게 될까?
비록 의지가 어떻게 입출력 동작을 하는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음에도
지배 패러다임에 의해 '확률식으로 정의될 수 밖에 없을 신경계의 입출력에 자유의지란 존재할 틈이 없다'라는 정해진 예상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탐구가 더욱 정교해질수록 기존 패러다임의 오류도 발견하기 쉬워진다.
뉴턴이 던진 공의 예시처럼 개략적으로 볼때엔 뻔한 답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던 문제 조차도
이론이 정교해지고 구체적이 될수록 점점 실제와 거리가 나타나는 일이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쪽에 수정을 가하면, 또 다른 쪽에서 구멍이 나타난다.
이러길 반복하다보면 마침내 총체적인 난국에 도달한다.
그리고 총체적 난국을 몰고온 문제를 해소시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고안될 때, 패러다임은 전환된다.

'과학'으로 분류되는 예외없는 전 영역에 걸쳐서 이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일어나 왔다.
모든 과학 영역은 아직 답을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 답을 '넘겨짚어'왔다.
그리고 지배 패러다임의 허점은 항상 거기서 시작된다.

뉴튼역학 패러다임하에서 예시된 문제의 답이 60만km/s가 아닐 가능성은 없다.
뉴튼 패러다임의 허점은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데에서 발견된다.
'의지'가 어떤 입출력 동작을 하는지, 의지의 동작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음에도 '자유의지란 없다'라는 답을 넘겨짚을 수 있는 것도 이와 동일하게 기존 패러다임이 예상하는 바를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는 그와 다른 가능성을 갖는다. 의지가 어떤 입출력 동작을 하는지를 연산할 수 있게 될수록 그 이론치가 실제와 멀어지고, 도저히 땜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 가령 "특정 조건에서는 의지가 물질에 영향을 미쳐서 소위 영혼의 선택이 물질계에 동작할 틈새가 존재한다"라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를 수도 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영역에 대한 넘겨짚음은 지배 패러다임 하의 정상과학 활동에 훈련된 사람일수록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초속 30만km로 달리는 열차에서 초속 30만km로 던진 공의 속도는?
당시 제대로 된 그 답은 '모른다'였다.
그러나 실재로 해볼 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자유의지란 존재하는가? 영혼은 어떨까?
넘겨 짚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항상 있었지만  
아직 모르는 것은 단지 모르는 것이다.

얻어타는 것이 차건 우주선이건 관념적인 것이건 합승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언제 내려야 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과학에 합승할 수 밖에 없는 이 시대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라면
과학에서 내려야 하는 시점이 언제인지도 알아야 한다.
깜빡 졸다 놓치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먼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야 하는 자신의 피로감으로 돌아온다.
과학이 신이 된 시대엔 이런 피로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수 없이 많다.

가치관은 조망된 세계관으로부터 도출된다.
세부 지식을 아는 것과 세계관을 조망하는 것은 얘기가 달라서 세부 지식을 오류 없이 쌓더라도 그 지식이 편중되거나 미완성일 경우 가치 판단에는 오류가 나는 게 가능하다. 어느 음식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면 그 음식을 멀리 해야 한다는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지만, 다음 날 같은 음식에서 항암물질이 발견된다면 앞의 지식은 틀리지 않는데도 판단은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어차피 완전히 알 수도 없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는 불가지론자가 아닌 담에야 한정적으로 아는 것이라도 이미 아는 것에 기초해 행동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결과 너무 피로하거나 공허하다면, 혹시 내가 환승할 때를 놓치고 안드로메다에서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종교를 타고 환승할 때를 놓치나 과학을 타고 환승할 때를 놓치나 안드로메다로 가긴 마찬가지. 깜빡하면 전염병을 이겨내려고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다 몽땅 옮는 사태와 비슷한 일이 생긴다.

그럼 과학의 지식은 편중되거나 미완성이어서 세계관을 조망하기에 충분치 못할까?
과학이 확인한 사실을 섵불리 가치판단에 응용하면 엄한 결과가 나온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을 근거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가치관을 아예 철저하게 과학에 근거해서 짜려고 하면 치밀함과 허술함이 병존하는 개그캐릭터가 된다는 예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빅뱅이론의 쉘든)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현상은 무의미 앞에 지쳐버린 사람들이다.
쉘든 자신은 지식 추구라는 초월적 가치 추구를 하면서 생의 의미를 유지하지만, 모든 사람이 학자인 게 아니라서 쉘든의 눈으로 본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은 의미가 없다.
피로사회라는 책은 현대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생의 서사적 의미를 잃어버리고 지켜야 할 것은 오로지 몸뚱이 만이 남아 건강을 여신에 자리에 올리고 그 건강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른다.'
무의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빨리 지친다.
생에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때 지쳐버리는 현상을 상시 체험하게 되고
이는 우울증을 현대의 질병 자리에 올려놓았다.
과학을 신으로 모시는 신도들은 환승시점을 놓치고 무의미 앞에 피로해한다.
하지만 항상 지시받던 감독관이 없어지자 할 일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인격신을 잃었다고 초월적 가치를 잃어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과 달리 과학은 초월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릴 때를 놓친 히치하이커들이 넘겨짚고 우울해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제 갈아탈 때다.

화학, 즉 물리학보다 더 널럴한 기준으로 토대를 쌓은 지식체계가 물리학과 거시 미시 관계를 이루며 저층 지식에 합류하는 것처럼
5층의 종교가 4층의 인문학에, 4층의 인문학이 3층의 사회학에,
3층의 사회학이 저층의 과학 앞에 자기의 체계를 증명하고 합치되는 날이 오리라.
그리고 그 날에 종교의 가르침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증명될 것이며 한번 탑승한 과학에서 깜빡 졸더라도 내릴 곳을 놓쳐서 헤맬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내려서 환승할 지점을 기억하자.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 설명하기 편하게 증명이라는 말을 썼지만
귀납적 경험으로 증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증명의 대신 '반증을 견딘다'를 대안으로 삼은 반증주의가 가장 인기있다. 반증주의는 결국 가설연역주의의 증보판이라서 연역된 이론을 경험으로 확인한다는 전개 면에서는 가설연역주의와 같으며 그로 인해 가설연역주의의 일부로 다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은 반증주의를 따르지만도 않는다.
반증되는 결과 앞에 서는 것은 이론의 집합체이고 그래서 한 이론을 반증하는 결정적 반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증된 이론 조차도 때로는 긴 시간이 지난 후 더 나은 환경에서 재확인 했을 때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달의 공전 주기나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다른 것은 이론이 틀려서인가? 아니면 계산에 모든 요소가 포함되지 않아서인가? 보이지 않는 행성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때문에 반증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뉴턴이 계산한 달의 공전주기가 실제 달의 주기와 달랐을 때에도,
또 이론적으로 계산된 공기 중 음파의 속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론적으로 계산된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이유로 뉴턴 역학을 부정한 사람은 없었다.
현상과 다른 결과를 말하는 이론을 지지하며 무려 한 세기를 보낸 후에야
달의 공전 주기 계산에 어떤 실수가 있었는 지가 밝혀졌고,
라플라스에 의해 음파의 속도가 어떤 이유로 틀려지는 지가 밝혀졌으며,
천왕성의 궤도는 관측되지 않은 자리에 해왕성이 있어서 틀어졌던 것임도 밝혀졌다.
그러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이론은 반증을 무시한채 버려지지 않았다.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반증되었다고 내버리기엔 너무 중요한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엄밀히 반증주의의 말을 따라 현실 반증된 이론을 항상 즉시 버리지는 않는다. 버려지는 이론은 버려도 타격이 없는 덜 중요한 이론들과 이미 다른 대안이 등장한 이론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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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의 가장 어려운 점은 직관적이지 않다는 거다.

아인슈타인은 슈레딩거의 고양이를 이해할때 "무수히 많은 상자가 있다면 그중 반은 고양이가 죽었고 반은 살아있다"라는 걸로 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파동식으로 정의되는 전자의 위치는 전자가 양자 주변을 광속으로 움직여서 어느 순간에 그 지점에 있을 확률이 얼마로 정의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양자 주위에 전하구름상에 삼각형의 세 꼭지점을 찍는다. 전자는 점 A,B,C 각각의 지점에 순차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꼭지점 A,B,C를 어떤 순서로 지나든 전자가 그곳들을 모두 지나려면 운동 방향을 바꿔야 하므로 가속도가 필요하고 

양자 주위의 전기장에서 가속도를 가지면 전자는 전자기파를 발산하며 에너지를 잃는다. 따라서 결국 전자는 에너지를 잃고 양자에 추락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건 전자 자체가 입자로서 한 시점에 한 지점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파동으로서 넓게 퍼져서 존재한다는 의미여야 한다. 


파동식은 그저 수식으로 존재 확률을 기술할 뿐이지, 그게 뭐냐, 왜 어떻게 그렇게 된다는 거냐가 없다. 

게다가 양자물리학자가 수식으로 작업을 하는 이상은 식의 창안자도 그 뜻을 알기는 어렵겠는 걸로 보인다.

파인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더라.

"상대성 이론을 이해한 사람은 이 세상에 12명 정도 있지만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젠 상대성 이론은 어지간하면 이해하니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아서 그런지 상대성 이론처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경우가 없다.

그나마 직관적으로 설명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위치를 정확히 관측하려면 주파수가 짧은 빛으로 관측해야 하고, 주파수가 짧은 빛일수록 높은 에너지를 갖기 때문에 그 빛이 입자의 속도를 바꾸므로 위치를 정확히 관측할수록 속도는 부정확해진다"라고 설명하는데 이것도 결국 고전적인 존재론과 토대가 다른 양자역학을 고전적인 입자간 충돌 모델로서 설명하기 위한 썰에 불과해 보인다. 


파동의 에너지는 진폭의 제곱에 비례한다. 

(에너지=일=힘*거리=(질량*가속도)*거리=질량*(거리/시간^2)*거리=질량*거리^2*시간^2)

그리고 파동으로 표현된 물질의 존재확률도 진폭의 제곱에 비례한다. 

파동식으로서 존재하는 물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니 이런 형태로 보인다.

이해를 위해 평행차원을 가정하자.

나란히 늘어선 두개의 면의 형태다. 

윗장에 해당하는 면 A는 우리가 존재하는 차원이고, 아랫장에 해당하는 면 B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차원이다.

이건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간 교환처럼 에너지와 질량간의 교환에 대한 비유가 될 수도 있는데,

여하간 A면에 있는 두 입자간에 위치가 곂치면 충돌이 일어나고 양 입자가 모두 영향을 받는다.

B면에 있을때에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파동으로 존재하는 물질인 피관측체는 A면과 B면 사이를 오가며 진동하고 있다. 

A 차원면 위로 한 점(관측점)을 움직인다.

회전하는 선풍기 날개 사이로 물체가 지나갈 수도 있고 충돌할 수도 있듯이,

또는 상하로 빠르게 흔드는 손 사이로 공이 지나갈수도 있고 충돌할 수도 있듯이

A차원에서 관측점은 피관측체와 충돌할 수도 있고, 그냥 지나갈수도 있다. 

관측점이 A차원면에서 피관측체와 만나게 되면, 즉 관측점과 피관측체가 충돌하면, 그게 그 지점에 피관측체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때의 충돌확률이 '존재확률'이다.

따라서 관측점과 피관측체간의 충돌이 없이는 피관측체는 A면상의 어디에 있다고 특정할 수 없다. 

그리고 관측은 관측점과 피관측체간의 충돌이므로, 피관측체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은 채로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측되기 전에는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라는 양자역학의 관점은 직관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우나,

이상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피관측체는 A차원과 B차원을 오가는 진동의 형태로 객관적으로 존재하기는 한다.

다만 A차원에서 특정되어야 만이 A차원 즉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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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이 발표되고 온 세계가 과학의 발전에 흥분하던 20세기 초,
과학의 성과에 매료되어 '과학의 방법론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특별한지'를 연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식은 경험적으로 증명되어야 의미있는 것'이라고 주장한 논리실증주의자(=논리경험주의자)들이 그 시작이다.
이들은 현실에서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지식이라 할 수 있지 뜬구름 잡는 말장난이나 그럴듯한 이야기는 의미있는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신은 사랑이다'라는 명제는 확인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이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재료로 쌓아 올려서 더 높은 지식을 얻는 용도로 사용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과학처럼 성공적으로 앎을 확장하기 위해선 애초에 증명이 될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모호한 말을 해오던 과거 철학에 대한 강한 공격이 되었다.)

하지만 경험으로 확인하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앎을 얻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앎을 경험으로 올바르게 확인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했고 그 결과 귀납주의, 가설 연역주의, 반증주의를 제안했다.

- 귀납주의는 '많은 동일 현상을 경험하다보면 가설을 만들게 되고 그 가설을 확인해서 참에 도달하면 된다'는 모델이다.
스완은 하얗다는 것을 계속 경험하다보니 모든 스완은 하얗다는 지식을 얻었으며 이를 현실에서 재차 확인하여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모델이다. 이는 경험으로부터 앎을 얻는 일반적인 방법론이긴 하다. 그러나 아무리 반복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게 미래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블랙 스완의 역설이다.
과거에 항상 그래왔던 것이 새삼 달라질리가 있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란 법도 없다. 태어나서부터 매일 병아리에게 밥을 주던 주인은 어느 날 치킨으로 쓰겠다고 밥 대신 칼을 들이밀 수도 있다.
그래서 귀납주의는 '과학처럼 올바른 앎을 쌓는 방법'에서 부정되었다.

- 가설 연역주의는 '과학자는 가설을 만들고 가설이 연역적으로 예상하는 바를 실험으로 확인하여 앎을 증명한다'라는 모델이다.
하지만 내 말이 맞는 이유 백개를 모아도 그게 내 말이 맞다는 증명은 되지 않는다. 이론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오는 경험을 반복 수집한다고 해서 그게 이론의 증명이 되는 게 아니라서 가설의 증명은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다.

- 때론 가설연역주의의 일부로 쳐주기도 하는 반증주의는 '반증가능해야 과학이다'라는 (아주 유명한) 말로 요약된다.
귀납적인 경험을 통해서 증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설이 예상하는 바가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여 반증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때 과학지식은 '수많은 검증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반증되지 않은 지식'이라는 지위를 얻는다.
이 주장으로 카를 포퍼는 과학을 연구하는 철학자들 중에 토마스 쿤과 더불어 양대 산맥이 되었다.

하지만 논리 실증주의의 시작은 '말이 논리적으로 그럴 듯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가 어떤 지가 중요하다'는 것임에 주목하자.
반증주의는 과학자들을 아주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람들로 표현하기 때문에 과학자들 자신은 반증주의를 좋아한다.
문제는, 실제로는 과학자는 반증주의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증주의와는 다른 과학의 실제를 지적한 게 쿤의 패러다임 론이다.
실제 과학자들은 현실 반증된 이론을 즉시 버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때론 그게 옳기까지도 한다.
가령 뉴턴이 계산한 달의 공전주기가 실제 달의 주기와 달랐을 때에도,
또 이론적으로 계산된 공기 중 음파의 속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론적으로 계산된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이유로 뉴턴 역학을 부정한 사람은 없었다.
현상과 다른 결과를 말하는 이론을 지지하며 무려 한 세기를 보낸 후에야
달의 공전 주기 계산에 어떤 실수가 있었는 지가 밝혀졌고,
라플라스에 의해 음파의 속도가 어떤 이유로 틀려지는 지가 밝혀졌으며,
천왕성의 궤도는 관측되지 않은 자리에 해왕성이 있어서 틀어졌던 것임도 밝혀졌다.
그러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이론은 버려지지 않았다.
이론과 다른 현상은 아예 안보이는 것처럼 무시되거나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 정도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이런 경향은 심지어 반증된 이론이 끝내 틀린 것으로 밝혀지고 새 이론으로 교체되는 때에 조차도 나타난다. 직감은 공정한 기준이 아니라서 기존 과학자들이 자기가 기반을 두어 왔던 이론 앞에서 '직감적으로 옳다'고 느끼는 것은 그 이론이 옳건 틀리건 다를 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틀린 이론이 전환되는 시기에도 기존 과학자들이 구 이론의 지지를 철회하기 보다는 그들이 늙어 죽은 자리가 새 이론의 지지자들로 교체되어서 이론 교체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과학자들이 (고집스럽게) 반증된 이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이유는, 앞서 뉴턴의 경우에 그랬 듯 그게 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던 숙제가 한 세기 이상 지난 후에 풀려서 이론이 옳은 것으로 밝혀지는 일도 실제로 꽤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반증이 갖는 한계 때문이다.
달의 공전 주기나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다른 것은 이론이 틀려서인가? 아니면 계산에 모든 요소가 포함되지 않아서인가? 보이지 않는 행성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보고 있는가? 반증되는 결과 앞에 서는 것은 이론의 집합체이고 그래서 한 이론을 반증하는 결정적 반증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반증된 이론 조차도 때로는 긴 시간이 지난 후 더 나은 환경에서 재확인 했을 때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는 것이고, 반증된 이론이라고 해서 바로 버리는 것이 합리적인 과학자의 태도가 되지도 않는 것이다.
반증주의의 기준에 따르면 뉴턴을 포함한 유명 과학자들 대부분이 사이비로 내몰리는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과학의 이상론 같은 주장이며, 과학이 굴러가는 방식의 실상은 그와 달랐다.

패러다임론은 과학의 방법론을 근본에서부터 파악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외면으로부터 관찰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파악한다.
즉 '과학의 방법론은 어떠해야 올바른가'라는 측면에서 이상적인 방법론을 찾아 나가는 게 아니라,
현재 굴러가고 있는 과학의 방법론은 어떤 특징을 갖는지 관찰한 후 그 특징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분석하는 방식이다.
먼저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젠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너무 범용적으로 쓰이는 감이 있으나 본래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진 용어였다.
하나는 전체를 통찰하여 얻은 이론의 '감'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감이 전형적으로 적용된 예제를 뜻한다.
왜 예제와 이론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우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은 복잡한 개념을 예제를 통해서 학습한다'는 인지론적 발견이 훗날 뒷받침된다.
패러다임론이 과학의 방법론을 외부 형태로부터 관찰하다보니 '이론을 공유하기 위해 담아놓은 그릇인 예제나, 그 예제 안에 담긴 이론이나' 한데 묶여있는 것으로 파악했던 셈이다.

이것이 어떻게 돌아가는구나 하는 감은 어떤 전형적인 예제(범례)를 통해 공유된다.
f=ma 가 뉴턴역학을 잘 표현해주고 감을 공유 시켜주는 범례라면
그것이 아인슈타인 역학에서는 e=mc^2인 셈이다.
혹은 모든 운동은 입자간 충돌에 의해 전달된다는 패러다임의 범례는 당구공 충돌 모형이 될 것이다.
즉 패러다임이란 전형적인 예제와 그 예제를 통해 파악하는 전체 형상이라는 두가지를 의미한다.
(내 경우엔 예제는 그냥 예제라는 말을 쓰고 이론을 지칭할 때에만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쓴다.)

'반증 가능해야 과학이다'라는 반증주의의 과학/비과학의 구분 기준은 유명하고, 인기 있다.
그러나 실제의 측면에선 반증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해결되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일이 빈번하기에
'반증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과학이다'가 되어서 저 구분이 유명 무실해진다.
패러다임 론에서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반증주의에서 구분하는 기준과는 다르다.
쿤이 제시한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 기준은 패러다임의 통일이다.
역사적으로 한 분야를 명백히 과학이라고 선언할 만한 기준은 패러다임의 통일이었다.

단, 이는 결과적인 이야기이다.
원인의 측면에서는 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어떻게 압도하고 통일할 수 있었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학파간 전쟁이 나서 한 패러다임의 지지자들이 다른 패러다임 지지자들을 모두 살해했다고 치자. 이후 승리한 학파가 학계를 장악한다고 해서 그 학문이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론이 결과를 관찰하는 방식이다 보니 나온 결론인 셈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학적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패러다임 통일이 일어나는 원인은, 특정 패러다임이 여타 패러다임에 비해 퀴즈 재생산을 통한 가치 추구의 미래 수익을 명확히 보여줄 수 있을때 일어난다. 사실상 이는 그 패러다임이 진실에 부합하는 면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는 과학 활동 자체와 직결된다.
패러다임 전환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기, 곧 지배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의 과학활동을 정상과학(normal science) 이라고 한다.
정상과학시기의 과학 활동은 '정답이 반드시 존재하는 퍼즐 풀이'에 국한된다.
즉 이 시기의 활동은, 전제가 되는 이론인 지배 패러다임을 관찰한 현상에 부합하는 옳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소가설들을 찾아 부가하는 과정이다.
지배 패러다임은 연쇄적으로 '이 패러다임이 맞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다'라는 정답이 정해진 문제(=퍼즐)를 내놓는다. 퍼즐 풀이를 통해 지배 패러다임의 세부가 규정될수록 제시되는 문제도 더욱 정교해지고, 이는 연쇄적인 퀴즈의 재생산이 된다.
정상과학 하에서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지배 패러다임이 부정되는 게 아니라 그 문제를 풀지 못한 개인의 역량이 부정된다. 이론이 틀려서 막히는 게 아니라, 연구자가 충분히 똑똑하지 못해서 막히는 것이라는 식이다. 즉 이 퍼즐 재생산의 흐름이 유지되는 한 지배 이론에 대한 반증은 구조적으로 생뚱맞은 것이 된다. (그래서 실제 과학에서 반증주의가 잘 먹히지 않는다.)

따라서 '정상과학 활동이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정답이 있는 퍼즐을 생산해 낼 수 있어야 과학'이라는 기준이 나온다.
이 기준하에선 점성술, 맑시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과학이 아닌 이유는 정답이 정해진 퍼즐을 계속적으로 재생산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근래들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 진화심리학이 과학일까? 초기에 진화심리학이 과학으로 인식되었던 이유는 정답이 있는 문제풀이를 대거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정교한 답이 있는 후속 퀴즈를 내놓는 일에 실패한다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문제풀이 밖에는 내놓지 못하게 되고, 이 때엔 정신분석학과 마찬가지로 더이상 과학이 아니게 된다. 지금에 이르러선 그저 대안 패러다임이 없어서 유지되고 있을 뿐 과학이라고는 할 수 없다.)

퍼즐 풀이가 막히는 시점에 이르러 패러다임은 위기를 맞이하고 혁명기를 거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된다.
패러다임 전환은 언제 일어나는가? (http://longlive.tistory.com/468)
쿤은 구 패러다임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 언제 패러다임을 위협하는 것이 되어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모는지에 대해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 생각에 이는 경제학적인 문제가 아닌가 한다.

normal science의 구간에서 패러다임이 하는 일은 퀴즈 재생산이며, 과학 활동은 그 퀴즈를 기존 패러다임에 부합하게 풀어서 답을 내는 것이고, 퀴즈를 해결했다는 것이 연구자의 가치 추구의 성과가 된다.
현 지배 패러다임이 퀴즈 재생산을 제공하는 능력이 약해지면
연구자의 가치 추구의 수익성이 나빠지고
이에 연구자들이 새로운 수익원에 눈을 돌리게 될 때 구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이 도래한다.
미래에 새로운 수익원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신규 패러다임을 발견하면
설령 그것이 현재의 모든 문제를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단지 구 패러다임 대비 더 나은 지속적 미래 수익이 기대되기만 하면 흡인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거 사례와 비교해보면,
뉴턴의 역학은 (달의 공전주기 계산, 공기 중 음파의 속도 계산, 천왕성의 궤도 계산등에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한세기 동안 끌고 갔지만
이때에도 패러다임은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
이유는 그 기간에도 뉴턴 패러다임은 퀴즈 재생산을 할 수 있었고
학자들은 성과를 발표할 수 있었으며 학계는 정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존재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이상 현상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실처럼 무시되거나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취급받는지,
아니면 패러다임을 위기에 빠트리는 반증 사례가 되는지는
그 이상 현상이 퀴즈 재생산을 막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퀴즈 재생산을 할 수 없고 연구자들이 성과를 낼 수 없을 때에 패러다임은 위기에 빠진다.
지배 패러다임이 안정기일때엔 옳은 이론이라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경제학적 선택이 될 것이다.
(현실 모델로는 현직장이 안정적이면 굳이 이직을 고려하지 않는 직장인들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의 세부 심리도 이들의 심리와 동일 선상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에서만 일어나며 위기 이전에 구상되는 이론은 설령 옳다고 해도 무시된다.
그리고 후에 대안이 되는 패러다임들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이론들의 수정 증보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예시는 지동성-천동설, 플로지스톤이론-산소흡수설, 라이프니쯔의 상대론을 통한 뉴턴비판 등의 전환 사례에서 나타난다.
-상대성이론의 공간과 운동의 상대성은 라이프니츠등의 자연과학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알려져 있는 개념이었고 그들은 뉴턴주의를 상대론적으로 비판했었다.
-지동설은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타코스에 의해서 이미 제안 되었었다. 그러나 학설 중의 하나였을 뿐 천동설이 틀리고 지동설이 옳다는 실험적 근거를 마련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리스타코스의 이론은 훗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밀려야 했다.
-17세기 레,훅,메이오에 의해 진전된 '대기로부터의 흡수를 통한 연소 이론'도 당시 관심을 끌지 못했다. 훗날 플로지스톤 이론에 위기 상황이 오고 라부아지에에 의한 산소 흡수 설이 나온 후에야 과거에 저런 이론이 있었다는 걸 상기하게 된다.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에서만 일어난다는 얘기다. 위기 이전에 구상되는 이론은 설령 옳다고 해도 무시된다.)
가치는 과거 성과가 아니라 미래 수익에 의해 영향력을 발휘한다.
패러다임 전환에 있어서도 구 패러다임이 퀴즈 재생산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서
연구자들이 가치 추구의 미래 수익성이 나빠지는 것 느낄 때 위기에 빠지고,
신 패러다임의 미래 수익성이 흡인력이 되어 연구자들의 선택을 유도한다.

정상과학 활동이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정답이 있는 퍼즐을 생산해 낼 수 있어야 과학이라는 기준은
언제 왜 기존 패러다임이 과학이 아닌 것으로 무너지고 전환되는지도 설명한다.
연구에는 학계가 공동으로 관심을 갖는 흐름이 있다.
여기서 동떨어진 데에 관심을 갖는 연구생은 엉뚱한 짓 한다고 교수에게 혼이 날 것이고,
설령 교수조차도 학계의 이 흐름은 거스르지 못한다.
만약 거스른다면 주류에서 벗어난 기인이 될 뿐이다.
학계의 관심이란 패러다임이 재생산해내는 퀴즈의 흐름을 의미한다.
이 흐름이 이상현상으로 가로막혀서 퀴즈 재생산이 위축될때 이상현상은 못본척 무시할 수 없는 패러다임의 반증이 되며 과학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반대로 성과를 계속해서 낼 수 있다면, 설령 오류가 눈앞에 뻔히 보인다고 해도 그 패러다임은 여전히 과학으로 기능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합치되지 않았고 모순된 면이 있으나 퀴즈 재생산을 계속 낼 수 있는 한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패러다임은 '이것은 전체적으로 이런 원리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통찰의 결과다.
그리고 그 통찰의 결과물이 옳다는 직감을 주는 것은, 그 이론으로부터 파생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맞아들어가는 동안이다.
이때의 직감이란, 가치의 미래수익이 기대된다는 판단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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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전환은 언제 일어나는가?

쿤은 구 패러다임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 언제 패러다임을 위협하는 것이 되어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모는지에 대해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 생각에 이는 경제학적인 문제가 아닌가 한다.

normal science의 구간에서 패러다임이 하는 일은 퀴즈 재생산이며, 과학 활동은 그 퀴즈를 기존 패러다임에 부합하게 풀어서 답을 내는 것이고, 퀴즈를 해결했다는 것이 연구자의 가치 추구의 성과가 된다.
현 지배 패러다임이 퀴즈 재생산을 제공하는 능력이 약해지면
연구자의 가치 추구의 수익성이 나빠지고
이에 연구자들이 새로운 수익원에 눈을 돌리게 될 때 구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이 도래한다.
미래에 새로운 수익원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신규 패러다임을 발견하면
설령 그것이 현재의 모든 문제를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단지 구 패러다임 대비 더 나은 지속적 미래 수익이 기대되기만 하면 흡인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거 사례와 비교해보면,
뉴턴의 역학은 (달의 공전주기 계산, 공기 중 음파의 속도 계산, 천왕성의 궤도 계산등에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한세기 동안 끌고 갔지만
이때에도 패러다임은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
이유는 그 기간에도 뉴턴 패러다임은 퀴즈 재생산을 할 수 있었고
학자들은 성과를 발표할 수 있었으며 학계는 정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존재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이상 현상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실처럼 무시되거나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취급받는지,
아니면 패러다임을 위기에 빠트리는 반증 사례가 되는지는
그 이상 현상이 퀴즈 재생산을 막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퀴즈 재생산을 할 수 없고 연구자들이 성과를 낼 수 없을 때에 패러다임은 위기에 빠진다.
지배 패러다임이 안정기일때엔 옳은 이론이라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경제학적 선택이 될 것이다.
(현실 모델로는 현직장이 안정적이면 굳이 이직을 고려하지 않는 직장인들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의 세부 심리도 이들의 심리와 동일 선상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는 과거 성과가 아니라 미래 수익에 의해 영향력을 발휘한다.
패러다임 전환에 있어서도 구 패러다임이 퀴즈 재생산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서
연구자들이 가치 추구의 미래 수익성이 나빠지는 것 느낄 때 위기에 빠지고,
신 패러다임의 미래 수익성이 흡인력이 되어 연구자들의 선택을 유도한다.



* 가치 추구의 미래 수익성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이러한 관점은,
사춘기 방황끝에 선택하게 되는 인생관의 경우나
부조리는 어떻게 고쳐지는가에 대한 고찰에도 응용할 수 있다.

학문 패러다임에 있어서는 연구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진리 탐구이고 이 가치 추구의 성과는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퀴즈 해결을 통해 얻어진다.
그리고 이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 더 나은 미래 수익성이 기대되는 패러다임이 선택의 흡입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방황기의 인생관 선택은 추구하는 가치가 단일하지 않다.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까지도 방황의 요소가 된다.
그리고 자기가 추구할 가치를 정하고 나면 그것을 기준으로하여 그 가치를 추구하는데에 더 나은 미래 수익이 기대되는 인생관이 흡입력을 발휘하게 된다.

부조리는 어떻게 고쳐지는가? 어떻게 부조리는 개선된 방법론으로 전환되는가? 이 또한 구성원들이 지향하는 추구 가치의 미래 수익성이 새로운 방법론을 선택하게 하는 흡입력이 된다.
현재의 역학관계가 자연히 부조리함을 개선하고 방향을 전환시킬 상태라면 문제는 없다.
문제는 현재의 역학관계가 부조리함에 머무르게 만드는 경우다.
이 경우란 도덕적으로는 옳고, 더 효율적이기는 한데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다른 가치의 측면에서 흡입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될 것이다.
구성원들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이는 이전 세대가 늙어죽어야 교체되는 정도로 잘 바뀌지 않는다.
부조리한 방법론을 위기 상황으로 내몰기 위해선 무엇이 '옳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역학관계를 바꿀 수 없다.
옳음을 강조하는 것으로써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바꾸게 만들 수 없으므로 이 경우엔 구성원들간의 투쟁이 필요해진다.
투쟁으로 부조리를 해결하는 시도는 실패하기 마련이라고 할 때,
해당 부조리로 인해 구성원들이 원하는 가치추구를 수행하는 것이 가로막히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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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교양 필수로 삼을만큼 중요하네 안하네, 영어로 교육해야 하네 안하네...
교양 교육에 대한 논란이 많다.
교양 교육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바람직한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모든 교육에는 가르치고자 목표하는 패러다임이 있다.
'이것이 어떤 형태를 갖는지'에 대해 교육자가 가지고 있는 전체 형상이 패러다임이다.
그 전체 형상을 가르치기 위해 교육자는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중요한 사실들을 가르치고,
학습자는 배운 사실들로부터 패러다임을 도출해낸다.
모든 학문 과목들은 저절로 이런 관점에서 교과서가 쓰여진다.
교과서는 그 학문이 현재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중요시 하는 것,
즉 현재의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핵심 사실을 기재하기 때문이다.
그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핵심 사실을 선별하여 교육받은 학습자는 점차 '이것이 어떤 형태를 갖는지' 감을 잡게 된다.
모든 학문이 교과서에 담아 교육하는 것은 패러다임 그 자체이다.
(*학문이 미처 성숙하지 못한 시점에서는 아직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등장하지 않아서 무엇이 중요한 사실인지 평가가 엇갈리게 되고
그로인해 체계없는 단편 지식들이 병렬로 존재하게 된다.)

이는 개별 학문의 교육뿐 아니라 전체 교양 교육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교양 교육이 전수하고자 하는 패러다임은 무엇일까?
교양 교육은 사람이 여태 쌓아온 지식의 체계를 이해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세상이란 어떤 것인지 전체의 형상을 개괄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한 교육이다.
이를 임의적으로 구분하건데 광의와 협의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광의의 교양 교육은 인간 세상 전체에 대한 개괄을 가르치려고 한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가? 세상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광의의 교양교육이 가르치고자 하는 패러다임이다.
협의의 교양 교육은 여태 쌓아온 지식의 체계, 즉 전반적인 지성을 가르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학문의 전반은 어떤 형상을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협의의 교양교육이 가르치고자 하는 패러다임이다.
교육자가 학습자에게 개괄적인 교양을 가르칠 때, 교육자는 학습자가 '세상이 어떤 형상을 가지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기를 원한다.
즉 광의의 교양 교육을 원한다.
그런데 실제로 가르치는 것은 협의의 교양 교육이다.
사람 세상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이 함께 어울려 돌아가지만 학교에서는 여전히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들'을 가르친다.
그래서 정규 교육과정이 가르치는 교양 교육은 협의의 교양 교육으로 기능한다.
광의의 교양 교육을 원하면서 협의의 교양 교육을 하는 것, 다시 말해 사실은 '세상이 어떤지'를 가르치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만 가르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본래 학문은 세상이 어떤 지를 담아내고 싶어한다. 단지 학문 전반이 아직 세상 전반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 교양으로 중요한 지식인가 하는 것은 교육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결정된다.
교양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우왕좌왕하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즉 패러다임이 서로 갈리기 때문이다.
학문으로서 성숙한 개별 학문에 비해 교양 과목에 있어서는 전체를 포괄조망하는 학문이 덜 발달했기 때문에, 학문 미성숙 단계에서 패러다임이 통합되지 않아서, 무엇을 중요하게 가르쳐야 하는지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이 미쳐 담아내지 못한 것을 학교 안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일단 논외로 하고
'교양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영역'을 인간이 여태 쌓아온 지식인 '학문의 영역'으로 제한해보자.
나는 학문의 전 영역을 5단계로 나누어 생각한다.
(http://longlive.tistory.com/41 참조)
1층 :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확인한 지식. 물리학.
2층 : 연역할 수는 없었으나 실험으로 재연가능한 지식. 화학이나 생물학.
3층 : 가정위에 통계적 방법을 이용하여 확인한 지식. 사회과학.
4층 : 가정위에 사변적으로 탐구한 지식. 인문학.
5층 : 선지자가 하달하는 가르침. 종교.
저층지식이 발전함에 따라 고층지식을 따라잡으면 저층-고층간의 합치가 일어난다.
화학의 주춧돌은 물리학이 연역증명했다.
행복의 본질을 찾는 사회과학인 긍정 심리학은 인문학에 합치되는 것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뇌과학은 심리학과의 접점을 찾아 가고 있다.
저층쪽이 소위 이과이고 고층쪽이 소위 말하는 문과에 해당한다. 3층에서 경계는 모호해진다.

교양 교육 과목이란 이 탑의 전체 구조를 개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결과다.
(사실 학문 전반을 5층 탑에 비유한 것 자체가 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은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구축되고 변경된다.
교육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패러다임을 형성시킨 근거와 뼈대가 되는 사실들이며 이렇게 배운 사실로부터 교육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패러다임을 학습자가 도출해 낼때 그것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이 이해시키는 것이 교육의 목표다.
교육에 중요한 사실인지 여부는 그 교육이 패러다임 구축에 얼마나 중요한가 여부에 달렸다.
바람직한 교양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선
먼저 현재 가르치고자 하는 패러다임은 어떤 것이며,
그 패러다임을 구축하는데에 어떤 학문/어떤 사실들이 중요하게 기여했으므로
이 지식들을 가르치면 학습자가 그 사실들을 바탕으로 이해하여 현재의 패러다임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라는 관점에서 기획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그 학문이 교양 교육으로 가르쳐져야 할 중요성을 갖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다.
가령 역사는 왜 교양으로 중요한가?
역사 교육은 세상사가 인과와 우연에 의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기록이므로 세상사의 동작 구조를 파악하는 자료로서 가르칠 때에 교양으로 중요하다.
이 기준이 없이 어느 과목이 중요하냐 아니냐를 따지려고 하면
몇가지 극단적 사례를 들며 '따라서 어느 학문은 중요하다/안하다'를 단편적으로 따지는 결과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세상은 어떤 것이라는 패러다임은 변화하고 있다.
새로 확인된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세상의 모습은 재구축되고 있는 중이다.
이 변화에 따라 교양 교육도 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중요한 교양이던 학문들이 그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여한 학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살펴보면
먼저 종교에서 가르친대로 그려진 신화적 세계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때에는 교리해석이 가장 중요한 교양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철학에서 연역과 상상으로 그려낸 세계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이해하던 시대를 거쳐
점점 더 저층에서 확인된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의 모습을 그려나가고 있고,
학문이 패러다임 형성에 기여한 기여도에 따라 교양의 범위도 변하고 있다.
진화론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의 모습을 현재의 패러다임대로 그려내는 데에 기여도가 크기 때문이다.
상대론도 그 등장으로 인해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패러다임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설령 상세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론적 관점은 교양으로서 중요해졌다.
전자기학은 그 응용도는 상대론보다 높으나 세상의 구조에 대한 패러다임 재구축에 기여한 정도에 있어서는 상대론 만큼의 임펙트는 없었기에 교양으로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늘상 전자기학적 제품과 현상을 접하며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패러다임이 변함에 따라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도 변한다.
변화에는 판단이 필요하다.
그 판단은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교육자가 학습자에게 가르치고 싶어하는 세상의 구조는 무엇인가?
이것이 교양 교육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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