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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인 것을 풀고 상상을 펼쳐보자.


예전에 양자역학 확률함수를 처음 접했을 때 이런 상상을 했다.
운동의 결과가 확률로 기술된다면, 우연은 의지가 작용할 수 있는 틈새가 되지 않을까?
의지라 함은 신의 의지, 혹은 상위자아의 의지일 수도 있고 또한 그 하위자아인 개체의 자유의지 까지도 의미하기로 한다.

사실 '검출되지 않으나 확률 함수를 통해 영향을 미치는 의지'의 존재는 운동을 기술하기 위해 필요가 없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틈새가 없이는 자유의지도 존재할 틈이 없다.
인간이 '유기물로 만든 컴퓨터'가 아니라 정말로 '생각'을 하는 존재이려면 어떤 식으로 작용하든 간에 이런 틈새가 필요하다.

random event generator(REG)를 이용하여 생각이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지를 살펴본 두 가지 실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는 이 링크의 실험이다.
http://www.princeton.edu/~pear/experiments.html
실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or -1을 내놓는 일종의 동전 던지기를 구현한 후, 다수 번 반복 구동하면 결과의 총합은 0 근처에 머무른다.
이 상태에서 사람이 입회하여 '+1 나와라'고 의념하는 경우를 다수명 다수회 실험하고
반대로 '-1 나와라'고 의념하는 경우를 다수명 다수회 실험했더니
이 그래프와 같은 결과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http://www.princeton.edu/~pear/images/single-operator-graph.jpg

다른 하나는 웹에서 찾지 못했는데 다음 내용이었다.
난수발생기로 무작위 방향으로 돌아다니게 하는 로봇을 만들어서 갓 태어난 병아리들에게 엄마로 인식하게 한 후
실험군으로 병아리들을 실험장 한쪽 바깥에 위치 시키고 사각 실험장에 로봇을 돌아다니게 한다.
대조군으로는 병아리가 없는 상태에서 로봇을 돌아다니게 한다.
병아리는 엄마로 인식한 로봇이 병아리 쪽에 가깝게 있기를 원할 것이다.
의지의 차이를 비교해본 결과, 병아리가 없을 때에는 로봇이 실험장 전영역을 돌아다녔지만 병아리가 있을 때에는 병아리 쪽에 치우치는 결과를 보였다는 이야기. 이 실험의 후속으로, 병아리는 어두운 것을 극도로 싫어하므로 암실에서 로봇에만 광원을 달아서 실험해도 병아리가 로봇이 가까이 오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에 유사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실험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 더 간단하게는 그냥 농담 같은 사기일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정말 저런 결과가 나와도 그 관찰은 무시된다.
기존 패러다임이 안정적인 정상과학의 시기에 머무르는 동안에, 기존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발견되면 그 현상은 무시된다. 또한 그 현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설명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구 패러다임은 모순이 있다 해도 폐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만약 의지가 우연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발견된다 해도 그 관찰 결과는 농담 수준을 벗어나는 취급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상상을 자유롭게 해서 저 실험이 사실이라고 치고 생각해보자.
두번째 실험에서 병아리는 로봇의 구동 원리를 모른다. 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부 구조를 알 수 없다. 단지 '결과로서 로봇이 가까이 있는 상태'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앞의 실험에서도 마찬가지. 실험에 참가한 사람은 저 '동전던지기'의 원리를 알지 못한다. '+1 나와라'고 의념했다는 건 그저 그런 결과를 바랬다는 것 뿐이다.
바램이 우연에 작용하여 의지한 결과에 가까운 값이 나오도록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두번째 실험을 감안하면, 그것도 사람이 아닌 어린 병아리 정도로서도 뭔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유효하게.

우연에 의지가 작용할까?
그런 것은 없고 사람은 생각을 하는 척 하고 있을 뿐인 유기질 컴퓨터일까?



저 실험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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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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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탐구의 협업과정이다.
따라서 학문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탐구방식과 동일한 구조를 갖을 것이다.
개인이 갖는 인간 지성의 한계는 개인의 집합인 학계에게도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탐구는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 보면, 일반적인 학문의 이미지와는 다른 형태다.
학문-특히 과학-은 '가치중립적으로 검증된 지식을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쌓아 올리는 것'이라는 게 일반적 이미지인 반면 개인이 뭔가를 탐구할 때엔(그게 학문이든, 업무든, 인생이든간에) 그와 다른 형태를 취한다.
개인이 뭘 배울 때엔 처음에는 단편적 정보를 모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처음에는 이 다음에 뭐가 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단편들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이 일은 이런 건가?' 하는 감이 온다.
'감 잡았다'고 한 다음부턴 그 감에 맞추어 현상을 확인하고 나서 '이제야 뭘 좀 알겠다' 라고 한다.

여기서 '감을 잡는 작업'이란 '경험을 바탕으로 통찰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잡아내는 작업'이며 이때 경험은 불완전한 지식이고 통찰은 논리적으로 허술한 결론 도출 방식이다.


이런 개인의 방식이 학문의 방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건
학문 탐구의 과정이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개인이 감을 잡는 형태를 보면 감이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형성 되는 게 아니다.
일단 논리적 치밀함은 등안시하고 통찰에 의지하여 개인적이고 귀납적인 접근으로 '이것은 이런 거다'라는 관점을 잡은 후,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감 잡은 내용이 옳은지 확인하기 위해 표적수사를 한다.
개인의 경우에 '감 잡는 것'으로 불리는 것이 과학에서는 '패러다임'으로 불리는 것 일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었다. (책 요약은 별도 글 참조.)

쿤이 말하는 학문에 있어서의 '패러다임'이 개인이 탐구하다가 '감을 잡는' 것과 똑같을 것이라는 처음 생각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학문 탐구의 구조도 개인의 탐구 작업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먼저 전체 골격을 세우는 감을 잡은 후 그 내부를 밝혀 나가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쿤이 미결 과제로 남겨놓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과정'은 개인의 탐구 작업에서의 '감 잡는 과정'(통찰의 과정)과 동일하다.
개인이 낱낱의 경험을 통찰, 즉 전체로써 다루어 감 잡는 과정을 살펴 보면, 사람들은 세상이 유사성의 반복일 거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자의 학문을 보면 무관한 사물 간의 유사성을 찾아서 그 발견한 유사성을 기준으로 탐구하려는 대상의 원리를 찾는 작업이 두드러진다. 이때 서로 무관한 대상들 간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증명은 없다. 가령 식물인 나무랑 인간의 집합인 사회 간에 유사 관계가 있다는 근거는 없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하여 논리적으로 치밀하지 않은 통찰로 먼저 대상의 본질에 대한 감을 잡고 그에 맞추어 다른 대상을 탐구하는 작업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이미지와 멀다. 그러나 학문은 개인의 탐구 과정을 나눠하는 협업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므로 개인이 갖는 인간 지성의 한계는 개인의 집합인 학계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탐구자가 감을 잡는 작업을 대체할 수 있는 논리적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결국 패러다임이란 통찰을 통해 파악한 대상의 본질에 대한 관점이다.
그게 일부 대상, 가령 빛에 적용되는 거면 빛은 물질이다/빛은 횡파다 라는 빛에 대한 패러다임이 되고 세계 전체에 적용되는 거면 세계관이 된다.

이렇게 파악한 학문 탐구 과정을 학문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난다. 일반적 이미지에서 학문은  '학문은 지식의 점증적 축적과정이며 가치중립적으로 검증된 지식을 축적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대상의 본질을 도출한다.'
그러나 실제 학문은 그렇지 않다. 통찰에 의해 파악한 대상의 본질, 즉 패러다임을 먼저 형성한 후, 그 통찰에 끼워 맞추는 표적 수사의 방식으로 탐구한다.

'학문'과 '개인의 일반적인 탐구'(=일상 생활 속에서 수행하게 되는 탐구를 의미한다)와의 공통점이 이렇다면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개인 탐구/비과학학문/과학학문으로 구분하여 서로간의 차이를 분석해보면
개인의 탐구 : 불완전 경험과 통찰에 의존하여 본질을 도출한다.
비과학 학문 : 개인 탐구의 직렬 병렬적 산술합이다. 과학과의 경계는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났는가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통찰들 중 서로 간의 우열을 가릴 분명한 기준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패러다임 장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학 학문 : 과학의 방법론이 갖는 경험 명제에 대한 엄밀함은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패러다임 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 결과로서 패러다임 장악이 이루어진다. 그 분야의 사람들 절대 다수를 동의시키는 패러다임 장악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이유는 경험 명제 검증의 엄밀함 때문이다. 이는 통찰이 내포할 수 밖에 없는 오류를 경험 명제에 대한 엄밀함으로 보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과학 경험 명제의 엄밀함은 올바른 통찰 결론을 도출하게 만들지는 못하나, 두 개의 통찰 결과가 병존할 때에 우열을 가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과학의 방법론으로도 새로운 통찰을 완전히 올바르게 도출해내지는 못한다. 패러다임 전환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두 개의 패러다임이 경쟁할 시에 어느 쪽이 우월한 지를 가리는 것 뿐이다. 이 우열 가름이 패러다임 장악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장악 이후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과학 학문이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개 이상의 통찰 결과가 병존 할 경우에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에 핵심이 있다는 게 내가 한 파악이다.
이는 쿤의 마지막 질문인
'과학의 방법론은 어떻게 지속적 발전으로 이끄는가?'에 대한 내 대답이 된다.
'진화가 목적한 생물체를 향해 변해가는 발전이 아니라
살아 남았기 때문에 발전으로 인식되는 것이듯
과학 발전은 목적한 절대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쿤의 해석은 옳지 않다.
여타 학문과 달리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과학의 특징은 '연역된 것 중에 현실 확인 되거나 독립적 실험으로 재연되는 것 까지를 참으로 인정'하는 참 명제 검정 과정에 핵심이 있는 게 분명하며 패러다임 장악이 가능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패러다임이 장악되면서 정상 과학이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나, 패러다임 장악은 과학 특유의 참 명제 검정 방식의 결과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시기나 성리학적 이기론의 시대에 패러다임들이 끝나지 않는 쟁론을 계속했던 이유는 어느 것이 더 옳은지 우열을 가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경우에는 종교 전쟁등 상대파의 말살을 통해서 우열을 가리려 들곤 했는데 이는 그 이외의 방법으로 도저히 우열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얼마 씩은 옳은 면이 있는 두 개 이상의 통찰이 맞부딪칠 때 어느 쪽이 옳은지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가 과학이 보여주는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남은 것은 패러다임 론의 기본적인 질문이다.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인데 패러다임 이론의 시초인 과학혁명의 구조 책에서는 아직 확실한 답을 보지 못했다.
- 우열을 가려내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는 최초로 우열이 가려지는 패러다임 통합의 시기에 열쇠가 있을 것이다.
운동연구는 아르키메데스에서 패러다임 통합. 광학은 뉴턴, 전기는 프랭클린, 열은 블랙, 화학은 보일과 부르하베에서 패러다임 통합.
아르키메데스는 지레와 물에 뜨는 물건의 실험으로써 역학 패러다임 통합을,
프랭클린은 전기에 대한 실험을 통해서 전기가 유체라는 패러다임 통합을 이룬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기 패러다임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실험의 존재다.
통찰을 현실에 응용하는 실험은 비록 그 실험이 해당 이론에 대한 완전한 검증은 되지 못하더라도 경쟁 이론과의 우열을 가리는 잣대가 되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꿔 말하면 근거를 실험으로써 댈 수 없는 통찰들끼리 논쟁을 하는 것은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 어렵다는 뜻이 된다.
- 장기간에 걸쳐 발견되는 이상 현상은 언제 패러다임을 위기 상황으로 내모는 현상으로 기능하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쿤은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이는 이상현상이 위기상황을 만드는 것은 기존 패러다임 내부만을 관찰해선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렇다면 경쟁 패러다임과의 설득력 문제로 연계해서 봐야 할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기의 특징은 모순에 빠지는 기존 패러다임이다. 즉 구 패러다임의 설득력 약화다. 이 상황에서 신 패러다임을 들고 나오는 것은 언제나 그 분야의 신참이다.
아직 구 패러다임을 습득하지 못한 '감 못잡은' 신참들에 의해 잠재적 경쟁 패러다임은 산발적으로 생성될 것이다. 패러다임의 안정기에는 이 신참들의 통찰을 잘못된 이해라고 하여 무마하고 올바른 이해로의 흡입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위기 현상들이 누적되는 가운데에서는 신참이 들고 나온 새로운 이해를 잘못된 이해로 치부하는 것이 점점 흡입력을 잃어가므로, 산발되는 신참의 '잘못된 이해'들을 동력으로 위기 상황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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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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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과학혁명의 구조 요약이다. 사례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예시로 소개된 사례들을 가급적 빼놓지 않고 정리했다.

~~~~~~~~~~ 과학혁명의 구조 요약 ~~~~~~~~~~~

패러다임을 기준으로 본 학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초기 - 무작위적 사실 수집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다수의 패러다임들이 등장하여 서로 경쟁하고 수정하다가 통합 공유되는 패러다임이 출현한다.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나는 시기 까지가 학문 발생의 초기다. 이러한 학문의 발생 과정은 수학처럼 최초의 패러다임이 계속 지속되거나, 생화학처럼 이미 성숙기인 학문들끼리 결합하여 발생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전형적인 방식이라고 쿤이 수집한 사례들은 말한다.
예시 : 운동연구는 아르키메데스에서 패러다임 통합. 광학은 뉴턴, 전기는 프랭클린, 열은 블랙, 화학은 보일과 부르하베에서 패러다임 통합. 유전학은 최초의 패러다임 장악이 근래에 나타났으며 사회과학은 어느 부분이 패러다임을 얼마나 장악했는지가 아직 미결과제로 남아있다. (쿤의 시대까지는 그랬다. 사회과학이 패러다임 통합이 일어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비록 알려진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경쟁 패러다임들을 압도할 설득력을 갖추기만 하면 초기 패러다임 장악은 일어난다.

중기- 패러다임 장악이 된 상태의 학문 활동을 normal science 라고 부르며 정상과학이라고 번역한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난 후의 학문 활동이 우리가 인식하는 과학 활동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한 분야를 명백히 과학이라고 선언할 만한 기준은 패러다임의 통일이었다.'라는 게 쿤의 주장.
패러다임 장악 후의 단계인 normal science 활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공유된 패러다임에 맞춰서 사실 수집 활동이 이루어지고, 이론 명료화 작업이 방향성이 뚜렷한 형태로 진행된다.
패러다임 장악 이후 사실 수집 활동은 크게 세 가지에 국한된다.
첫째, 패러다임의 토대가 된 사례를 최대한 정밀하게 재확인하기이다. 즉 '뭐뭐는 어떤 것이다'라는 패러다임을 탄생시킨 사례를 정밀하게 재확인해서  '뭐뭐가 정말 어떤 것이 맞나?' 확인하는 것이다. 이로서 패러다임은 무엇을 의미 있는 현상으로 치고 무엇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현상으로 칠 것 인지를 결정한다.
둘째, 그때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패러다임을 통해 예측되는 사례를 찾아서 확인.
'뭐뭐가 어떤 것이라면, 저거는 이렇게 되겠네?'하는 추정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실재로는 이론이 그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의 예측 가능성을 제시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셋째, 이론의 명료화 작업이다. 패러다임을 더욱 더 명료화 하는 사례를 수집한다. 즉 중력 가속도나 줄의 계수등의 측정작업이 이에 해당한다. 이 작업은 정성적인 패러다임을 정량적인 것으로 만드는 실험의 고안등을 포함한다. '뭐뭐가 어떤 것이라는 건 분명하고 그 안의 계수 등이 정확히 어떤 값인지?'하는 작업이다.
이것들은 모두 퍼즐 풀이 작업의 형태를 갖는다. 퍼즐이란 '답이 있는 것으로 가정 되는 문제'를 뜻한다. 때문에 과학자의 학문 활동은 패러다임이 옳다는 가정 하에 답이 있을 것으로 추정 되는 문제들을 푸는 작업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normal science 단계에서는 '답은 있으나 여태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퍼즐을 풀어낸 뛰어난 퍼즐 풀이자'가 뛰어한 학자로 평가 받는다.
원래는 인간이 과학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들은 퍼즐 풀이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가령 유용성에의 욕구나/새로운 영역을 탐사하는 경이감/질서를 찾아내려는 희망/이미 정립된 지식을 시험하려는 충동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정규 연구 활동에 종사하는 과학자의 경우 거의 모든 경우에 오로지 퍼즐 풀이 만이 가치를 갖는다. 과학 활동의 가치는 얼마나 어려운 퍼즐을 풀어낸 것이냐에 따라 학계의 평가를 받지 유용성 여부에 의해 평가받지 않는다. (라고 쿤은 주장.)
퍼즐 풀이의 성격을 갖는 normal science는 과학 지식의 범위와 정확성의 '꾸준한 확장'이라는 목표에 성공적인 활동이다. '검증된 앎을 치밀하게 쌓아 올라가는 것'이라는 학문 연구의 보편적인 이미지는 정확히 normal science 활동에 맞추어져 있다. (학문의 이미지가 normal science에 맞춰져 있을 때, 과학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학문 중의 학문으로서 자리매김 된다.)
normal science 단계의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의 창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또 패러다임에 안 맞는 종류의 새로운 현상에 주의를 환기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현상은 보이지 않는 셈치고 새로운 이론도 외면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단지 패러다임의 명료화를 지향한다.
정상 과학의 정확한 측정 작업이 패러다임을 명료화하는 작업으로서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되는 패러다임의 기반 위에서 수행된 것이 아닌 측정은 수치 측정조차도 사실과 다른 값으로 기록되기 일쑤다. 이는 여러 패러다임의 경우에서 발견되는데 가령 돌턴의 배수비례법칙의 예시를 들면 이렇다.
배수비례법칙은 탄소무게1과 결합할 수 있는 산소무게는 1.3 또는 2.6 뿐이라는 것, 즉 탄소 한개와 산소 한개가 결합하거나 또는 탄소 한개와 산소 두개가 결합하는 것만이 가능하지 탄소 한개와 산소 1.5개가 결합하는 건 불가능 하다는 법칙이다.
돌턴이 처음 그의 이론을 확인할 데이터를 찾아 화학 문건들을 뒤질 때 그는 이론에 맞는 몇 가지와 이론에 맞지 않는 여러 기록들도 발견해야 했다.
심한 경우 구리의 산화물 두 가지에 대한 프루스트의 측정은 이론치인 2:1과 달리 1.47:1 이라는 값을 얻고 있었다. 프루스트는 당대의 충분히 훌륭한 실험학자 였으나, 어느 실험에나 상존하는 오차를 패러다임의 도움 없이 조절한다는 건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 돌턴의 배수비례법칙은 그 후 거의 한 세대에 걸쳐 재 실험을 통해 데이터 변경 작업을 거쳐야 했으며 이런 수치 데이터의 변화는 패러다임 전환 시에 전형적이다.

혁명기 - 패러다임에 들어맞지 않는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서 혁명기가 시작된다. 이때 발견이란 개념 자체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발견은 보는 것과 다르다. 발견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보는 것이다. 현상이 기록된다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해야 현상이 발견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때가 이상 현상이 발견되는 때이다. 이상 현상은 기존 패러다임이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한 현상이다.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현상이 확실한지는, 패러다임이 예측하는 결과를 정확히 알 때에야 비로소 확실해진다.
정상과학이 심화되고 정밀해질수록 이상 현상을 발견하는 지표도 민감해진다.
이로써, 비록 정상과학이 새로운 현상 발견을 지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패러다임 수정을 유도해낸다.
패러다임의 위기는 퍼즐 풀이 활동의 붕괴가 핵심이다. 패러다임이 옳다면 답이 있기 마련인 퍼즐들이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시작이다. 이러면 답이 안 나오는 이유를 해석하고 답을 내기 위해서 이론을 조금씩 수정하는데,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 여러가지 문제에서 나타나면 이상 현상을 여기서 막은 수정안이 저기서 막은 수정안과 상충하는 상황이 생긴다.
정상 과학의 위기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코페르니쿠스는 '각기 서로 다른 화가가 모델의 각 부위를 제각각 그려서 손 발등은 뛰어나게 잘 그렸으나 합치면 도저히 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괴물'이라고 묘사했다.
실례로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오기 전 천동설의 상황/라부아지에의 산소 발견 이전의 프로지스톤 이론/ 맥스웰 전자기 이론이 나오기까지 뉴턴의 에테르 이론 등을 들 수 있다.
이제 위기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면, 비록 구 패러다임이 반증되는 현상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구 패러다임은 폐기 되지 않는다.
(학문의 초기 패러다임 장악 시에 패러다임이 알려진 자연의 모든 문제를 설명하지 못해도 경쟁 패러다임을 압도하는 설득력만 가지면 채택된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패러다임의 선택은 패러다임 간의 싸움으로 이루어지지 자연 현상과의 싸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 패러다임이 자연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새 패러다임과의 비교를 통해 대신 선택할 이론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역사적으로 한번도 구 패러다임은 폐기된 적이 없다.
이유는 대안 없는 패러다임 포기는 과학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설령 몇몇 학자 개인이 '이 학문의 패러다임은 완전 엉망진창이다'라고 생각해서 대안 없이 패러다임을 폐기해버린다 해도, 그건 그가 그 학문에서 손을 뗀다는 의미가 되지 (포기하지 않는 학자가 남아 있는 한) 학문이 소멸한다는 의미가 되진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상 현상이 발견되어도 모든 학자가 그 학문을 다 포기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상 현상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1, 기다리면 해결되는 경우.
2, 보다 진보된 도구를 지닌 다음 세대로 미뤄지는 경우.
3, 패러다임을 위기 상황으로 내모는 이상 현상.
1번 경우에 대해 예시하면 : 오차는 항상 있기 마련이고 때로는 확연한 오차조차도 기다리면 해결되기도 한다. 뉴턴의 원래 계산 이후 60년동안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까워지는 근지점의 예측치가 관찰값의 절반뿐이었으나, 뉴턴의 역제곱 법칙의 수정에 대한 제안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실제로 기다림 끝에 1750년 클레로에 의해서 그간의 수학적 적용이 잘못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이런 상황은 '사소한 실수도 있을 법하지 않은' 경우에 조차도 나타난다. 그래서 관측이 어긋나는 것이 학계에서 심각한 반증 사례로 항상 인정되지는 않는다.
그럼 언제 이상 현상이 패러다임을 위협하는 3번의 것이 되는가?
이에 대해 쿤은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정상 과학의 이상 현상은 긴 시간에 걸쳐 관찰되고, 이상 현상은 계속 누적된다.
게다가 후에 대안이 되는 패러다임들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이론들의 수정 증보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시 : -상대성이론의 공간과 운동의 상대성은 라이프니츠등의 자연과학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알려져 있는 개념이었고 그들은 뉴턴주의를 상대론적으로 비판했었다.
-지동설은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타코스에 의해서 이미 제안 되었었다. 그러나 학설 중의 하나였을 뿐 천동설이 틀리고 지동설이 옳다는 실험적 근거를 마련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리스타코스의 이론은 훗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밀려야 했다.
-17세기 레,훅,메이오에 의해 진전된 '대기로부터의 흡수를 통한 연소 이론'도 당시 관심을 끌지 못했다. 훗날 플로지스톤 이론에 위기 상황이 오고 라부아지에에 의한 산소 흡수 설이 나온 후에야 과거에 저런 이론이 있었다는 걸 상기하게 된다.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에서만 일어난다는 얘기다. 위기 이전에 구상되는 이론은 설령 옳다고 해도 무시된다. 구 패러다임으로 모두 설명이 되는 현상들을 분석하여 만든 새 패러다임은 설령 옳은 이론이더라도 선택되지 않는다.

어느 개인이 데이터에 질서를 부여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어떻게 고안하는 가의 문제는 불가해하다고 쿤은 말한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자는 아주 젊거나 그 분야를 새롭게 접하여 기존 패러다임에 사고방식이 고정되지 않은 사람이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사고 실험이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분석적 사고 실험은 위기 시기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마침내 양립 불가능한 신 패러다임에 의해 구 패러다임은 부정된다. 이를 과학 혁명이라고 한다. 이전의 패러다임이 부정된다는 사실은 '학문은 검증된 지식을 착실히 쌓아 올라온 것'이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다르다. 왜 패러다임 혁명은 과거의 지식을 부정했다는 자취를 남기지 않을까?
뉴턴역학은 상대성이론의 특수한 경우로서 여전히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뉴턴역학이 부정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런데 만약 뉴턴 역학이 부정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때의 뉴턴역학은 강체의 속도가 빛보다 느린 경우에 대해서만 한정되어 정립된 이론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패러다임은 아직 관측되지 않은 전방위의 현상에 대해 적용된다는 전제 하에 기능한다. 뉴턴 역학이 상대성 이론에 의해 부정 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상대성 이론 이전에 모든 과학자들이 뉴턴 역학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에 대해서도 옳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종류의 구 패러다임에 적용된다. 관측되지 않은 현상은 예외라고 한다면 패러다임은 관측된 적 없는 사실에 대해 새로운 퍼즐을 제공할 수 없고 과학은 더 이상 연구를 할 수 없다.
심지어 패러다임은 전혀 다른 분야에 까지 보편 적용 되는 것으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때 패러다임의 영향성은 해당 과학 뿐 아니라 세계를 보는 관점 자체를 바꾼다.
뉴턴 역학이 상대성 이론에 의해 부정된 이후에도 마치 부정된 적 없이 처음부터 '상대성 이론의 특수한 경우'로서의 가치를 갖고 탐구된 것처럼 보이듯이, 과학 혁명은 많은 경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패러다임 전환이 한번 이루어지고 나면 모든 교과서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쓰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의 '검증된 새로운 지식의 축적적 발전'이라는 이미지는 대다수의 학자가 normal science의 퍼즐 풀이 과정에 종사하고 패러다임 전환에 참여하는 인원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과학 혁명이 지나가면 과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또다시 normal science로서 기능한다.
과학은 여타 학문에 비해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과학의 방법론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가?
'패러다임 장악으로서 normal science가 되고 나면 normal science 중에는 퍼즐 풀이를 통해 축적적인 발전을 한다. 그러다가 패러다임 전환이 오면 과거의 패러다임이 부정 되는데, 이때 패러다임 간의 경쟁을 통해 구 패러다임을 이기고 새로운 것이 오는 것이므로 평가자들에게는 '발전'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된다'고 쿤은 말한다. 그래서 '특정한 지고의 생물에 접근하는 것이 아닌 단지 환경에 더 잘 적용했을 뿐인 진화가 발전으로 보이듯, 학문도 절대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발전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발전이다>'라고 말한다.
쿤의 이 해석은 탐탁치 않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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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humanities)은 '신학이 아닌 학문'으로서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때 학문 그 자체였던 인문학의 정체성은 자연과학의 융성과 더불어 '자연과학이 아닌 학문'의 의미를 갖으며 분명해지다가, 근래에는 사회과학과도 구분되어 가는 중이다.
인문학의 범위에 대한 정의는 이견이 있으나 크게 문사철(문학 역사학 철학)을 주로 인문학으로 분류한다.
이상을 바탕으로 한 내 견해는 이렇다.
- 신학과 구분되는 인문학 : 신학, 즉 종교와 인문학은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접근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치관의 문제에 대해 신학은 하달된 진리를 이해하려 하는 형식을 취하고 인문학은 쌓아 올라가 도달하려는 형식을 취한다.
-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구분되는 인문학 : 인문학은 자연과학/사회과학이 분화되어 나간 후 '남은 학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인문학에 대한 비하가 아니다. 인문학의 가치는 그 분화되지 않았음에 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분화될때 '지식 탐구에 대한 질문'만을 테마로 분화되었기 때문에, '가치 탐구에 대한 질문'은 아직 인문학으로부터 분화되지 않은 인문학의 과목들 속에 섞여 남아있게 되었다. 인문학의 가치는 인문학이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 '생은 어떤 의미를 갖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즉 물리학부터 사회과학까지를 지식에 대한 질문만을 판단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인문학은 가치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 내 견해다.
가치는 사실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도출된다. 지식의 총체로부터 올바른 가치 판단이 가능하며, 일부분만 알면 가치 판단이 틀려진다. 즉 가치판단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면 사실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끌어모아야 한다. 인문학이 가치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 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인문학을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과거엔 신에 대응하는 개념이었지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올바른 가치 판단을 위해선 인간 외적인 사실에 대한 지식만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가치 판단의 주체인 인간에 대해서 또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타 학문들은 왜 지식 추구의 주제만을 가지고 분화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선 학문의 분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러 방면에서 지식을 끌어 모으다 보면 통찰에 의해 '이건 이런 것일 거다'라는 감이 온다. 이 '감'은 인생이든 뭐든 '하다보면 감이 오는' 그 감과 완벽하게 똑같은 구조다. 그게 패러다임이다. (세상은 쪼개지지 않는 작은 요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다. 빛은 물질이 날라가는 것 같다. 전기는 유체같다.)
그 감이 제법 들어맞는 것 같다는 설득력을 얻게 되면, 패러다임이 한 분야를 장악하게 된다.
그때부터 학자들은 패러다임에 기반해서
1. 패러다임을 낳게 한 배경이 된 사실을 확인하고 (빛이 횡파라는 주장을 한 사람의 실험을 재연해보고)
2. 패러다임이 현실에 예측해주는 추정들을 확인하고 (빛이 물질이 날아가는 거라면 빛을 가했을 때 압력이 있겠지?)
3. 대략적인 감인 패러다임을 정밀화한다. (물질간 인력이 있는 듯하다. 그럼 인력의 비례상수는 얼마?)
이는 답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문제들, 즉 퍼즐이다.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나면 그 분야는 이 퍼즐 풀이에 전력하게 되는데, 이를 normal science 라고 하며, 정상과학이라고 번역한다.
퍼즐 풀이의 단계가 노말 사이언스 라고 불리는 이유는 과학 탐구의 본질이 퍼즐 풀이이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시간적으로 대부분의 학자는 퍼즐 풀이 단계에 일생을 바치며, 패러다임 변경의 단계, 즉 '새로운 감'을 내놓는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단계를 과학 혁명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성이 논리적 필연 보다는 지식 경험을 종합하는 통찰에 의한다는 것을 주의하라. 통찰에 의한 지식은 틀릴 수 있고, 그래서 매 패러다임은 완벽하게 옳지 못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될 여지를 남긴다.)
학문 분야는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날 때 범주가 확정된다.
별의 움직임이 수학 법칙을 따른다는 패러다임이 장악하자 천문학과 점성학은 별개의 분야가 되었다. 금이 합성 불가능한 원소라는 패러다임이 장악할 때 화학과 연금술은 별개의 분야가 되었다. 생명활동이 화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패러다임이 장악할 때 생물학과 화학은 생화학이라는 독립 분야를 낳았다.
즉 지식을 쌓는 활동을 하다가 '이거는 이런거 같다'라는 감이 올 때 그 감을 확인하고 심화하는 퍼즐 풀이 활동이 학문의 분화를 이뤘다.

가치 판단의 측면에서 볼 때 의미가 있는 것은 '이것은 이런거다' 라는 통찰, 즉 패러다임이다.
과학활동, 즉 퍼즐풀이과정에서 얻어지는 지식은 패러다임을 확인하고 정밀하게 할 뿐이지 그 패러다임을 기초로 하는 가치판단을 뒤집지는 못한다.
학문 분화를 이끌어 낸 패러다임들은 대상에 대한 통찰의 산물이다. 가치판단에는 대상에 대한 통찰과, 동시에 가치판단 주체에 대한 통찰이 모두 필요하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통찰인 패러다임을 주제로 하여 분화된 학문들은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은 인문학에서 분화되지 않고 남아있는 학문들 속에 뒤엉켜 남아 있다.

연역만으로 이루어진 수학, 연역과 현실확인으로 이루어지는 물리학, 연역되지 못하나 실험적으로 항상 재연되는 사실에 대한 화학, 가정 위에 출발하여 통계적으로 탐구하는 사회과학, 가정 위에 출발하여 사유만으로 탐구하는 인문학, 하달 진리인 종교.
향후 학문이 발전하면 학문 분야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인문학에 속해 있던 학문이 사회과학으로, 혹은 사회과학에 있던 학문이 자연과학으로 위치를 변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후까지 인문학이라 불릴 영역에는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은 '가치관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추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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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존재의의는 효율성에 있다.
인문학과 종교는 같은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인데, 인문학은 아래로부터 쌓아올라가는 방식이고 종교는 위에서부터 하달되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가르침(교육)이 존재하는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다. 가르침 없이 연구해서 도달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가르침을 행한다.
종교는 가르침이고, 따라서 그 존재의의는 효율성을 위함이다.
쌓아올라온 앎은 탐구자가 이미 알려진 지식을 이해할 때 올바른 이해를 할 역량이 보장되지만, 하달되는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의 역량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올바른 가르침 조차도 하달과정에서의 오해는 발생하곤 하며 이는 정밀성을 갉아먹는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효율성을 위해 정밀성을 희생하는 구조다.

이를 배경으로 하는 가치판단은 상반될 수 있다.
효율성이 존재의의이므로 효율성을 강화해야한다는 기독교식 가치 판단도 가능할 것이며
'(어차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배우는 자들끼리) 불교의 법을 다투지 말라'는 불교식 가치판단도 가능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종교가 정밀성에 한계를 가지며 효율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내용은 전제해 둠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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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 되어라. 

아니면 초인의 전조가 되어라.

초인은 벼락같은 것이다. 벼락이 치기 전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바람은 벼락의 전조다. 초인을 부르는 비바람이 되어라. 

초월적 가치를 잃은 인간은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의 여신을 세운다. 삶과 건강을 통해 이룰 초월적인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건강을 목적으로서 추앙한다.

그리고 건강을 위한 건강에 매달려 먹고 싸는 인생을 살며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일어났다.


난 모태무교다. 종교는 없지만 천주교랑 불교는 뭔가 경건해보이고 개신교 신도가 세뇌스러울 경우에 한해서는 맞장구쳐주기 짜증나고 누가(주로 개신교) 종교 얘기 꺼내면 왠만함 그런 얘긴 하지 말지 싶은, 딱 그 정도의 배경에서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아직도 그러고 산다. 

그래도 난 스스로 종교적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초월적인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면 그 사람은 종교적인 인간이 될 소질이 있다. 

그것은 예술과도 맞닿아 있고 도덕과도, 혹은 학문적 진리추구와도 맞닿아 있다. 초월적가치는 진선미성중에 성스러움에만 국한되는게 아니며 그중 성스러움 조차도 꼭 인격신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종교적 가치의 긍정적인 면에 있어 중요한 건 어떤 신을 섬기느냐가 아니다. 

종교의 '어떤 신을 섬기느냐'로 구분되는 측면은 긍정적인 영향을 낳은 적이 거의 없다.

종교의 긍정적인 면모를 낳는 것은 초월적 가치를 긍정하느냐 여부다.

종교는 가르침을 이야기에 담아 내놓는다.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의 이야기를 내면화 하면 가상의 기록이 독자의 인지 내적으로는 살아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종교의 이야기는 신자에게 살아있는 이야기가 됨으로써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살아있는 상태로 전달한다. 종교의 이야기는 가르침을 소화흡수 가능한 형태로 조리해 놓은 포장이다.

어떤 신을 믿느냐는 것은 종교의 '이야기'이다.

초월적인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는 방향성은 종교의 '가르침'이다. 

종교의 본질이 가르침에 있기에, 가르침을 습득했다면 이야기는 중요한게 아니다.

(이 주장은 기독교도는 동의 안할듯하고 불교도는 동의할 듯 하다. 교리상 기독교는 '이야기'도 믿음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고 불교는 이야기는 다 가르치려고 사용한 방편이라고 하므로.)


과학이 신이 된 시대다. 

사람들에겐 이기는 편에 붙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 이기는 편 우리편, 지지정당은 집권여당. 

근래 영역을 확장해온 과학은 분명 이기는 편 이었다. 

그런데 이기는 편에 붙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과학이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과학은 대중에게 새로운 신앙이 되었다. 

이 과학숭배신앙은 묘한 병폐를 낳고 있다. 

과학을 신으로 숭배하면 그 신이 사실이라고 알려주는 이야기는 신화에 해당하는데

종교였다면 그 이야기 안에 가르침이 담겨져 있을 것이나 

과학은 종교가 아닌지라 이야기를 까보면 안에 가르침이 담겨있지 않다. 

그래서 과학을 숭배한 사람들은 '없다'를 가르침으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즉 삶에 있어 초월적 가치의 상실이다. 

그들은 그렇게 니체가 얘기했던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을 여신으로 세우고 행복을 발명했다 주장하는 경멸적 인간들'이 되어간다. 

이런 징후는 지식의 끝자락에서 더 높이 올라가려고 애쓰는 과학자들에게서 발견되진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데 정신이 팔려있다는 면에서 초월적 가치를 추구한다. 

혼란은 단편적 지식으로 세계관의 전체를 조망하려 하는 추종자들에게 일어난다.

건강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더 나은 가치를 갖는 삶이 되는가?

그들에겐 이에 대한 답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월적 가치란 없는 것이 답'이라는 가르침을 과학 신화가 담고 있다는 믿음이 그 신앙의 교리다. 그들의 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걸 추종자들은 믿지 않는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문제일 수가 없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는 이과의 교과목중 하나인 학문이지만, 사실은 과학은 '어떻게 하면 틀리지 않은 지식을 효율적으로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의 이름이다. 지식을 축적함에 있어 틀린 지식이 섞여들 가능성을 너무 배척하면 탄탄하되 쌓아 올라가는 효율성에 한계가 오고, 쌓는 속도에 집착하면 잘못된 지식이 섞여든다. 그 정확성과 효율성 사이에서 합당한 지점을 합의한 방법론의 이름이 과학이다. 

연역된 지식은 논리적으로 참이다. 귀납적 지식은 언제라도 반례가 등장해 뒤집힐 수 있기 때문에 연역된 지식만이 참이라는 합리주의자의 주장에 대응하여 '인간의 논리 이성 체계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미친자는 자기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모른다) 경험된 것이 참이다'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가 등장했다.

(합리주의자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선 경험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사상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말로 문맥에 맞춰 번역하면 사변지상주의자라고 하는게 더 맞지 않나 싶다.

경험주의에서 '경험도 귀납적이므로 뒤집힐 수 있다' 쪽으로 가면 회의주의 불가지론자가 된다.)

경험된 모든 것이 참은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참인 명제를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합의점을 찾은 '경험주의의 일부'가 우리가 아는 과학이다. 이 방법론은 성공적으로 모태인 철학의 위상을 넘어섰다.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검증된 명제에 대해 참이라고 하는 것이 물리학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지식을 쌓는 속도 효율성의 한계에 마주친다.

화학원소 주기율표는 원자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하는지 해명되기 전부터 관측되었다.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연역되지 않았으므로 화학은 과학으로 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과학은 비록 연역적으로 도출되지는 않았더라도 독립적인 실험으로 재연이 가능한 명제까지는 참으로 치기로 한다. 이제까지 재연되던 경험이 갑자기 다음 실험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틀어지면서 틀린 지식을 쌓게 될 위험은 무시할만큼 작은 것이라는 까닭이다.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확인되거나, 실험으로 재연가능한 지식을 참으로 여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과학의 방법론이다. 

사회과학은 독립적인 실험이 어렵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 방법론을 따르기는 어렵다. 지식 축적의 효율성을 위해 다소 널럴하게나마 가능한 한계내에서 과학 방법론을 참조하여 쌓아올라가겠다는 것이 사회과학의 방법이다.

지식축적을 탑에 비유하면 물리학은 지상에서 시작한 1층, 화학이나 생물학등은 허공중에서 시작한 2층, 가정위에 통계적 방법을 이용하는 사회과학 역시 허공중에서 시작한 3층, 가정위에 사변적으로 탐구하는 인문학은 더 널럴한 4층, 종교는 5층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 화학의 주춧돌은 물리학으로부터 연역증명되었고 서로 미시-거시의 관계로 합치되었다. 이제 화학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온 셈이다.

다른 학문간의 합치는 아직이다.


다른 모든 지식이 종국에는 1층에서 시작한 과학으로 환원될 것이라는 주장이 통일과학운동이며 환원주의라고도 한다. 과학의 방법론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이었는지(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론이었다)가 검증된 지금, 모든 앎을 과학 방법론에 의지하여 풀어나가자는 주장은 지지를 받을만 하다. 3층의 사회과학까지는 제한적이나마 과학 방법론에 의존코자 하고 있으므로, 4~5층의 종교나 철학이 과학 방법론을 이용하지 않고자 한다면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그것이다.

세계관의 세부를 사변적으로 밝혀내고자 접근한 시도는 고대부터 여럿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실패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세상이 원소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원소가 공기라는 둥 땅물불바람이라는둥 하고 있을때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뭘 모르는 지를 알라.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며 그러한 사변적 시도가 성공할 수 없는 것임을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는 저녁 노을은 왜 붉고 저녁해는 왜 크게 보이는데도 추운지 하는 질문에 '네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여라. 그것이 아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석가모니는 다른 종교가가 세계관의 지식에 대해 불교는 어떻게 가르치냐는 열가지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는 (십무기) 대답을 했다.

이 대답들의 맥락은 모두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관의 지식에 대해 사변적으로 접근하지 말라.'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그것은 과학의 할 일이다.'

석가모니/공자/소크라테스등 종교/철학가들이 객관적 지식 축적은 과학의 할일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은 그 외적인 일을 한다는 말인 셈이다. 객관적 지식 축적 이외의 일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가치관 이라고 생각한다. 가치관은 삶의 방향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가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 앞서 종교가 '이야기' 속에 담아 내놓은 '가르침'이란 이것이라는 게 내 해석이다.

가치관은 전체적으로 조망된 세계관으로부터 도출된다. 과학은 세계관의 세부지식을 오류 없이 쌓아나가지만 그 지식이 편중되거나 미완성일 경우 가치판단에는 오류가 생긴다.

(어느 음식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대요! 라는 지식은 그 음식을 멀리 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그런데 다음날 같은 음식에서 항암물질이 발견된다면? 앞의 지식은 틀리지 않으나 판단은 틀리게 된다. 전체적인 이해를 하지 못한 지식은 틀린 가치판단을 유도한다.)[a]

그럼 과학의 지식은 편중되거나 미완성이어서 세계관을 조망하기에 합당하지 않을까? 합당치 않다는 증명이 되거나, 아니면 심증 삼을 징조라도 있는가? 

나는 다음의 것들을 그러한 징조로 여긴다.

기존의 가치관은 연역된 게 아니며 논리적으로 허공중에 떠있는 것이다. 이에 만약 기존 가치관념들을 모두 부정하고 과학지식에 근거한 가치관념만으로 가치체계를 정립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캐릭터가 있다. 빅뱅이론의 쉘든이다. 과학방법론으로 검증된 지식만으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나면 그로부터 도출된 가치관은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많은 형태가 되는데 쉘든은 그 치밀함과 허술함이 병존하는 철골구조 건물같은 모습으로 웃음을 준다. 쉘든을 보며 웃음이 나는 만큼이 과학 지식으로 정립된 세계관의 빈틈이다.

또한 과학에는 가치중립성이라는 말이 따라붙곤 한다. 지식을 근거로 가치판단이 바꾸는데 가치중립적인 지식이란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굳이 가치중립성이라는 주장을 해야 했다면, 그 배경에는 과학지식을 가치 판단의 총체적 구조물인 현실 생활에 적용했을 때 뭔가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 것(적용한 주체가 과학자든 정치가든 일반 대중이든간에)을 누차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가치중립성이라는 주장 자체가 과학으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조망하기엔 이르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사회 현상이다. 앞서의 두가지 징조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신앙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그게 문제가 있다면 틀린 가치관이 야기하는 부작용도 관찰될 것이다.

난 '피로사회'가 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생의 서사적 의미를 잃어버리고 지켜야 할 것은 오로지 몸뚱이 만이 남아 건강을 여신에 자리에 올리고 그 건강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는' 피로사회의 구성원들, 그들은 항상 지쳐있다. 무의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빨리 지치기 때문이다. 

생에 초월적 가치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때 지쳐버리는 현상을 상시 체험하게 된다. 피로사회가 지적하는 우울증 등의 현대의 질병. 이것이 세번째 징조다.

세계관의 세부지식을 사변적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그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와 동시에 세계관을 정립하기에 부족한 지식 체계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조망하면 틀린 가치관에 이른다. 

잘못된 가치관이 개인에게 미치는 타격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잘못된 지식보다도 직접적이다.

여기까지는 과학으로 가치관을 정립하면 틀린 결과를 얻는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올바른 가치관을 얻을 수 있을까?


무엇이 올바른 가치관인가를 탐구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록 증명되지 않은 허공중에 토대를 두고 시작하지만 위로 쌓아 올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달진리다.[b]

쌓아 올라가는 방법이란 '4층의 인문학'이고 하달되는 진리를 이해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5층의 종교'이다. 여기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서두에서 얘기한 초월적 가치 무엇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한다면 그게 곧 인문학이고 종교적 고민이 되기 때문이다.

먼저 종교부터 얘기하겠다.

만약, 하층의 지식이 5층의 종교에 이르러 저층 고층간 합치를 완전히 이룬다면 그때 증명해야 할 것은 종교의 '이야기'(신화)가 아니라 가르침, 가치관일 것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방향성과 생의 초월적 가치가 그 하층의 지식과 일치해야 종교는 사기가 아닐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종교적 진리에 대해 최소한의 검증방안으로 다음을 모색할 수 있다.

1. 종교 내적 모순 없을 것.

2. 현실에 대한 설명이 검증된 지식과 모순 없을 것. 또한 '4층의 인문학'과 모순 없을 것. (저층 고층 합치)

1번. 내적 모순 없음. 

이것은 판타지 문학에 조차도 요구되는 사항이다. 

앞서 종교가 '가르침을 이야기에 싸서 내놓은 것'이라고 해석한 것은 종교에게 '현실에서 지속 가능한 판타지'라는 지위를 준다. 의외로 이것은 종교의 위상에 대한 비하가 아니다. 문학은 그 작품내에 현실에서 지속 가능한 삶의 진리(가치관)를 담을 때 명작으로 추앙받는다. 판타지/SF 소설은 '마법이 없는 세상에서는 지속하기 어려운 진리(가치관)'를 담아내곤 하기 때문에 하위문학으로 치부되곤 하는데, 그 와중에서도 현실 지속 가능한 가치관을 담아내는 판타지소설은 다시 걸작 대우를 받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는 현실에 지속 가능한 판타지이며, 이는 '종교가 단순히 판타지 서술이라면 굳이 여타 판타지물과 구별되어 특별한 위상을 가질 이유가 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된다.

2번. 검증된 지식과의 모순없음. 

저층지식과의 합치. 즉 종교는 그 가치관의 올바름을 인문학 앞에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말을 현재 맥락에서 (초월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을 향해) 다시 말하면 이렇게 된다.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방향성이 합당한지 증명해야 하는 대상은 일차적으론 바로 아래에 있는 인문학이 먼저다.

과학이 3층의 통계적 사회과학과도 합치(혹은 반증)하지 못한 채로 5층의 종교 가치관이 옳은지 틀린지 환원 증명하는 시도는 세계관 조망이 불가하여 반드시 틀린 결론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 남는 것은 인문학이다. 인문학적 가정위에 출발하여 실험없이 사유로 진척시켜온 인문학은 어떻게 그 참됨을 증명하느냐가 남는다. 그리고 그 대답도 앞과 유사하다. '인문학이 스스로 조직적인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대상은 일단 통계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는 사회과학 지식과 합치이지 그보다 아래에 있는 생물학으로 환원하는 시도는 이르다.'


이상의 배경에서 내가 결국 도달한 곳은 불교가 제시하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 종교인이 따르는 총체적 가치관이 인문학적 잣대 앞에 제단되기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리학이라는 저층 지식과 합치된 화학(물리학보다 더 널럴한 기준으로 토대를 쌓은 지식체계)이 물리학과 거시-미시적 관계를 이루며 저층 지식에 합류하듯, 종교가 저층지식과 합치되는 그 날에는 종교의 가르침도 과학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과학'은 지금의 '이과 교과목의 한가지'가 아닐 것이다.


[a] '세계관의 조망'이란 이런 의미를 갖는다. 지식을 더 알면 더 알수록 더 정확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게 되고, 지식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더 부정확한 가치 판단을 하게 된다. 환원주의적으로 과학이 종국에는 모든 학문을 합치or반증할 것이라는 주장은, 역설적으로 과학은 아직 그 학문의 지식들을 내포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가치관을 도출하기에 부족한 상태라는 의미가 된다. 현재 과학 지식에서 도출된 가치관 체계를 적용한 개인은 허술하고 우스꽝스런 캐릭터가 되며, 적용한 사례들은 엉뚱한 결과가 나와서 '가치중립성'이란 개념을 고안해야 했고, 적용한 사회는 '피로사회'의 부작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론적이로도 사례적으로도 같은 의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b]지식의 상향 추구에서는 세계관에서 가치관이 도출되나, 하달 진리인 종교의 경우에는 이 순서가 역전된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종교적 가치관은 하달된 진리이고, 종교적 세계관은 그 가치관을 담아서 설명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가령 불교는 '종교는 세계관 지식에 대해 함구하는 편이 옳다.(십무기) 가르침은 비유와 방편을 통해 설명하고 있으나 이 비유와 방편은 단지 가르치기 위한 것이니 있는 그대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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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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