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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네이버 웹툰 송곳을 봤다.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02922&no=14&weekday=tue

"어차피 몇년 지나면 입장 바뀔 거 지금은 그냥 져줘요. 가드 꽉 잠그고 대가리 팍 숙이고."
웹툰 송곳 1-13화에서 부장과 갈등을 빚는 주인공 이수인에게 조언자 김과장은 권투에 비유해서 '기다려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주인공 이수인은 그런 김과장의 조언에 대해
'지겹다. 강제된 선택지에 시시한 통찰을 덧칠해서 마치 새로운 답인양 떠들어대는 어른인 척 하는 어른들의 하나 마나한 조언들'이라고 평한다.
이 다음화인 1-14화에서 이수인은 자기 직계 보스인 점장에게 철저하게 당하고, 잘난척 조언하던 김과장을 향해 '이제 어떡할까요? 이제 뭘하면 됩니까?'라는 시선을 날린다.
김과장은 말 못하고 외면한다.

내가 웹툰 송곳을 본 것은 아래 글을 쓴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 글의 댓글로 달음] http://longlive.tistory.com/599#comment13308977
만화속 김과장이 해준 권투 얘기는 그 전날 내가 했던 조언과 완전히 같은 말이었다.
'괜히 빤한 밑천 내밀어봤자 소용없으면 그런게 쌓여서 점점 더 똥이 되고 점점 더 차별의 피해자가 됩니다. 모르겠으면 기다려요. 항상 쎈 사람 없습니다.'
'일단 내 직속 보스는 무조건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해요. 가령 대학원생이 교수님이 싫은데 까는 법 같은 건 전 모릅니다.'

나는 '조언자 김과장'의 눈을 통해 주인공 이수인을 봤다.
김과장은 부조리의 음지를 피해가는 법을 말하고 있었고
이수인은 부조리의 한복판에 스스로 들어가서 부조리를 없애는 법을 찾고 있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른 김과장의 조언은 이수인에겐 '지겹다. 하나마나한 조언들'이 되었다.
하지만 의문이다.
이수인이 옳을까?

부조리에 빠지나 물에 빠지나 위험에 빠진 사람의 행동은 유사하다.
부조리를 물웅덩이에 비유해보자.
물에 빠져 죽는 일을 피하기 위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웅덩이를 피해가는 방법
-물에 빠졌을 때 거기서 빠져죽지 않고 헤엄쳐 나오는 방법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방법
-웅덩이를 매꾸거나 주위에 철책을 쳐서 위험을 예방하는 방법
이 방법들은 각각 서로 다르다.
발밑에 웅덩이를 살피며 걷는 방법을 빠진 다음에 헤엄쳐 나올 때 쓸 수 없고,
철책을 쳐 위험을 예방하는 방법으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이수인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가 물에 뛰어든 후 그 안에서 사람도 구하고 물웅덩이도 없애버리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래서 그에겐 웅덩이를 피해가는 방법이 지겹고, 시시하다.
하지만 과연 그게 맞는 노력인가.
회의적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엔 '섣불리 들어가지 말고 줄을 던지거나, 뒤로 돌아가서 때려서 기절시키고 뒷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오라'는 규범이 있다.
구조자의 안전과 빠진 사람의 생명을 위해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안타깝다고 적절한 방법을 따르지 않고 뛰어들기만 하면 같이 빠져 죽는다.
규범은 '수영을 잘하는 사람 조차도 물에 빠진 사람이 본능적으로 휘두르는 손에 맞거나 혹은 붙잡고 놓지 않아서 구하려다 빠져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 "네 혈육이 빠졌다면 침착하게 밧줄이나 찾고 있겠느냐"고 지적한다면, 그 말이 사실일 것이다.
남이니까 침착하지 혈육이 빠지면 이성을 잃고 뛰어드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서 규범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냥 뛰어들면 둘 다 죽는다. 규범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더 나은 기술의 문제다.

물웅덩이 대신 부조리를 대입해도 같다.
당장 물에 빠진 사람 구하는 것과 위험한 웅덩이를 예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처럼
부조리를 없애는 방법으로 당장 부조리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없고
부조리에 빠져있는 사람을 구하는 방법으로 부조리 자체를 없앨 수도 없다.
이수인은 저 두가지중 무엇을 더 하고 싶었던 걸까?

이수인 같은 사람들이 있다.
평소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잘 친해지지도 못하면서 올바르지 않다는 것 앞에서 묻혀지내지 못하는 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작중 이수인은 '친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게 아니라, 반대로 '부조리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그들과 친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작중 이수인의 스승격인 노무사는 '당신이 구한 사람은 이상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냄새나는 그저 사람'이라는 것을 알라고 가르친다.
난 그런 이수인에게 '당신은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묻고 싶다.
"당신은 잘 친해지지도 못하는 눈 앞의 남을 불행으로부터 구하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 세상에 이런 부당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겁니까?"

이수인이 원한 것이 사람을 구하는 것인지 부조리를 없애는 것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만약 그가 원한 것이 부조리를 없애는 것이라면 그는 자기 의도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위험 예방을 위해 웅덩이를 없애거나 철책을 치거나 구명조끼를 비치하는 건 웅덩이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 빠져있는 피해자가 할 일이 아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할 일은 살아서 나가는 거고, 물에 빠졌는데 나오지 않으면 빠져 죽기나 할 뿐이다.
부조리에 빠진 채로 부조리를 예방한다는 건 무모한 생각이다.

웹툰 송곳은 이렇게 말한다.
'분명 하나쯤 뚫고 나온다.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롭다가
가장 먼저 부숴져 버리고 마는
그런 송곳같은 인간이.'
송곳의 세계에서 이것은 슬픔인 동시에 희망의 메세지다.
'참지 못한 의인이 일어설 것이다. 분노한 의인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그 의인들은 죽을테지만...'이므로. 그래서 그것은 희망인 동시에 비애의 메세지가 된다.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들어간 의인들의 시체로 강이 매꿔질지도 모른다는 꿈은 희망을 가장한 절망에 불과하다.
이렇게 송곳을 하나씩 부숴먹으면 희망은 없다.

송곳 1-7화에서 이수인은 자기를 다독여준 훈육관을 두고 '그는 어쩌면 가장 교활한 형태의 체제 수호자 였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한다.
폭발해야 할 압력을 살살 달래서 조금씩 빼줌으로써 체제가 유지되도록 해주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악을 계속되게 해주는 존재가 아니냐는 의미에서 '교활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주인공이 투사가 되기 위해 피해자가 되기를 자청하는 웹툰 송곳에서 체제란 부조리를 비호하는 원흉처럼 그려진다.
이 관점에선 투쟁으로 체제를 깨면 부조리가 없어지기라도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사람이 체제와 조직없이 살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조직 없는 개인은 다른 조직에 더 힘든 조건으로 흡수될 뿐 결코 '조직없는 개인'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조직이 깨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문제는 어지간한 부조리보다도 중요한 생존의 문제가 된다.
부조리한 체제를 비호하는 기득권이란 말은 잘못된 구도를 만들었다. 조직에서 생존을 조달하는 모든 개인은 자기 조직이 깨지면 잃을 게 많다.
부조리를 고치겠다며 체제를 위협하면 처음엔 잃을 게 없을 줄 알고 우호적이던 개인들이 투쟁이 구체적이 될수록 점점 더 잃을 게 있는 기득권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한다.
적의 적을 늘리고 내 편을 늘려야 할 싸움에서 그런 모든 개인을 적으로 돌린 채로는 그 어떤 좋은 의도라도 성공할 수 없다.

그래서 기다려야 한다.
약할때 앞에서 싸우다 지지 마라.
지금 뛰어들면 운이 좋아서 특별한 한 사람을 구할 수는 있어도
그걸로 불특정한 사람을 위해 부조리를 고치는 것을 기대하진 마라.
당장은 부조리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발밑을 조심하고
운이 나빠 한발 빠졌다면 더 빠지지 말고 헤어나올 길을 찾아라.
기다리면서 내 편을 늘리고 기다리면서 내 적의 적을 늘려라.
내가 상대하는 적은 이상적으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가 아니다. 성급히 자포자기해서 몸을 던지지 마라.
기다리면 힘이 길러지고 힘이 길러지면 내 힘과의 균형이동으로 인해 없던 기회조차도 만들어진다.

약하면 기다려라. 가드 꽉 잠그고. 되도 않는 잽 날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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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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