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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성향은 있기 마련일 것이다.
가령 북한에서 뭔가 하면 외국에서 비상 경보가 울리는데 정작 한국에선 무심하다. 항상 보아온 풍경이라서 한국인은 북한불감증에 걸리게 된다.

또 굉장히 효율지향적이다. 다른 나라에서 게임을 개개인이 모래알처럼 하면서 놀 때 한국에서는 집단지성으로 최고 효율에 대해 토론해서 공략집을 만든다. 이 가성비 효율병자적인 집착은 환경에서 온 민족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디에서 왔을까? 어떤 책에서는 한국의 기후가 극한 극서 홍수 가뭄등 지진만 빼고 극단적인 환경이 매해 반복되다보니 농사 지어서 풍년이 들어도 몇개월 뒤 보리고개를 넘기지 못할 수 있는 환경에서 최대 효율로 공략한 자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시 위기인 환경에서 최대효율에 집착하는 성향이 나왔다는 거다.

그리고 북한의 예시처럼 이 상시 위기는 안전불감증도 만든다. 항상 위기라서 진짜 대위기가 왔을 때 위기의식을 갖기 어렵게 만든다.
'풍신수길이가 칼을 갈고 있다. 우리도 십만양병해서 방비해야 한다'라고 했을 때 '그 놈들 평소에 보면 별 거 없더만 호들갑은...' 하고 반응하게 만든다.
이 성향이 중일러 세 침략제국들과 맞물리면 방심하다 당하는 역사의 반복을 만든 것 같다.

지금 다시 제국주의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책을 일본인이 썼다. 미중러가 침략전쟁이든 투자전쟁이든 이미 제국주의 활동을 벌이고 있는 시점에 일본제국 침략전쟁 경험이 있는 일본에선 그걸 감지하고 '다시 제국주의 시대'라는 시류의 변화를 경고하고 있다.
현재 재한 외국인 대상으로 부동산 일가구 다주택 제한 없으며 취득세, 양도세, 등록세 감면에 저금리 대출되어서 결과적으로 서울에 차이나타운 확장되고 있다. 상속세도 면세, 외국인 전형 대입 특혜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직업과 서울 부동산이면 민간 핵심 이권엔 이미 빨대 꽂힌 셈이다. 기업의 기술 유출은 이미 산업 역전 당하는 것으로 돌아오고 있다.
시진핑은 중국몽을 선전하며 자기 독재의 성과로서 제국주의적인 '위대한 중화민족'을 말하고 있다.
저들이 칼을 갈고 있으며 이미 물밑으로 작업 많이 쳐진 상태인데 상시위기 환경에서 형성된 불감증으로 태평한 상태인 것 같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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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돈이 수익을 내는 자본으로서 기능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로 성립한다. 이는 자본이 꾸준히 수익률을 가져서 계속 지수성장을 해야만 사회가 기능한다는 것이다. 유한한 세상에서 지수성장은 대단한 부담이라서 자본 성장은 반드시 수익률 악화를 만난다. 수익률이 악화되어 자본이 가치를 잃으면 공황이 일어난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기술혁신이나 기술혁신으로 생산성 개선되기까지 사이에 체제 개편이 발생한다. 또한 수익률 경쟁에서 밀리게 되면 자본이 더 좋은 수익처로 유출되어서 사회가 붕괴한다.
괄호친 부분은 내가 파악하는 자본주의의 본질. 이 책에서 파악하는 본질과 차이가 있는데 내 이해를 전개하느라 따로 씀.)

기술혁신은 수익률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다.
중세시대 절대왕정은 중상주의을 했다. 각 국가 권력이 자국의 경제를 강하게 보호해서 부를 축적하고자 했다.
그런데 1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폭발한 영국의 자본은 다른 중상주의 국가들을 경쟁에서 이겨서 몰락시키고 유일패권국이 된다. 그리고 자유주의를 추진한다. 패권국가인 영국의 힘으로 각국 권력의 규제를 상호간 모두 없애면 수익률이 높은 영국의 자본이 통합체급 경쟁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경공업 중심 우위를 갖던 영국 자본의 생산성은
2차 산업혁명으로 중공업이 발달하면서 압도적이던 지위를 잃는다. 독일 미국 등과 경쟁 구도가 되고 그러면서 자유주의가 약화되고 제국주의가 강해진다.
1강이 약화되니 다자간 경쟁 심화로 동원할 수 있는 건 다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 사업이 주식 회사가 되어 큰 자본 집적하고, 독점 기업이 되고, 금산융합으로 과잉투자 하고, 국가의 권력과 군사력까지 거들어서, 외국 사업에 돈을 빌려주거나 사업을 매입하는 투자 진출하여 수익을 내는 다국적 기업이 된다. 유한한 지구에서 이 지수 성장 경쟁은 결국 상호 충돌에 이른다. 양차 세계대전이다.
(1차대전 이후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재분할. 미국이 부상하면서 자기가 먹을 땅이 부족하자 민족자결주의 주장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시장 나눠먹자는 뜻이었다. 일본과 이탈리아는 새로 제국화, 독일은 패전으로 입지 추락한 것을 다시 제국화 욕망하며 2차 전쟁. 2차 세계대전까지도 제국주의로 군사력까지 동원하여 수익률 무한경쟁 하던 건 마찬가지인듯하여 1차 대전 전후를 경계로 제국주의를 구분하는 건 실익이 없는 것 같다.)

1차대전중 전쟁의 부담을 감당못한 러시아는 종전 직전 살기 힘든 사람들에 의해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철수하여 승전국에서 배제된다.
이후 공산주의와의 냉전 구도가 되자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게 잠식되지 않기 위해 수익률 무한 경쟁에 제동을 걸 필요가 생긴다. 공산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자본주의 각국이 수익률을 손해보더라도 수익률 무한 경쟁을 절제하고 복지를 하는 복지국가 시대다.

자본주의가 경쟁에서 이겨서 소련 붕괴하고 냉전 끝나자 미국이 유일패권국이 된다. 영국 패권시대와 마찬가지 이유로 신자유주의가 강해진다. 세계화가 강화된다. 자유무역 강화된다. 복지는 축소된다.

신자유주의는 경쟁과열의 부작용을 낳는다.
내적으로는 고수익을 위한 무리한 투자로 2008 금융위기를 맞아 자멸 위기를 겪는다. 또한 지수상승하는 자본과 그 밖의 사람들간의 양극화는 고질적인 갈등을 심화한다. 환경 남용으로 기후와 팬데믹 위기를 겪으면서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에 경보가 든다. 외적으로는 중국의 공산당 주도 계획 경제가 기술 혁신을 이루면서 미국 패권이 약해지고 경쟁 구도가 되면서 신제국주의가 부상한다.
점점 경쟁 구도가 되면 패권국은 자본 수익률의 압도적인 우위로 인해 자유경쟁에서 얻던 이익이 줄고 어딘가에서 손해가 발생한다. 미국의 어느 지역은 자유 무역으로 손실을 입어 몰락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럼 그들은 자유주의를 비난한다. 그 세력이 커진 결과가 러스티벨트의 백인 노동자 세력을 업은 트럼프다. 자국 우선주의, 보호무역, 경쟁 과열로 승리하기 위해 뭐든 동원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자국 이기주의 강화는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일본인이 쓴 책이다. 한국에서 방심 분위기가 아직까지도 지배적인 사이에 일본에서는 '지금 다시 제국주의 시대다'라고 책 쓴거다.
역사가 반복된다고 볼 때 한국에게 바이어스 걸려있는 시나리오는 방심하다가 먹히는 거다. 십만양병설 시절처럼 수없이 반복되어 온 방식이다.
지금은 제국주의시대다.
중일러가 다 한 제국 하는 나라들이라 제국주의 시대에는 자유주의 세계에서 형성된 내 상상을 넘는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소련 망하고 미국 패권 잡은 후 신자유주의시대로 갔는데 자유 주어지니까 고수익 위해서 무리하게 투자했다가 금융위기 온게 2008년, 그때부터 중국이 부상하면서 패권에 흠집 시작. 그로부터 17년이니 이미 많이 작업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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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WrjYo_YnhU?feature=shared

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

1차산업혁명으로 섬유공업으로 부강해진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패권국가였다가
2차산업혁명으로 중화학공업이 발전하는데 영국은 기존의 경공업 중심이어서 변화가 느린 반면 다른 열강들은 새로운 산업을 육성해서 번영하면서 영국에 긴 경기침체가 오고 패권이 흔들렸다.

세계에 강력한 패권국가가 있을 때에는 자유 경쟁하면 패권국 산업이 이겨서 이익이므로 시장경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자유주의가 번성한다. 그러다가 패권이 약해져 열강이 군웅할거 하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제국주의가 강해진다. 경쟁 과열로 제국주의가 강해진 시대에는 이윤 추구를 위하여 거대 권력화하는 방향으로 쏠린다.
이를테면 현재에도 독점 방지 하자는 목소리도 있지만 독점 방지로 애플 구글 쪼개면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릴게 두려워서 독점 방지 주장이 위축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독과점화하고, 한 소유주가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을 다 소유해서 금산융합으로 과잉투자를 하고, 국가 권력과 국가 무력까지 한데 뭉쳐서 이익을 위한 거대화가 일어났다. 이익을 위해 거대화한 세력들의 경쟁이 심화하는 맥락에서 군국주의, 무력을 통한 국경 변화나 식민지 수탈까지 범해진다. 안하면 다른 열강에게 밀리는 경쟁 환경이다보니 반대 주장은 묵살된다. 유한한 지구에서 국가 무력까지 총동원한 경쟁의 끝은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다시 제국주의시대가 오고 있다.
소련이 망하고 미국이 패권국가가 되면서 신자유주의가 됐다. 시장과 자유 무역에 국가가 개입하지 말라는 자유주의가 지배적이 됐었다.
그런데 중국이 성장하고 미국 패권이 흔들리면서 다시 제국주의가 강해지는 추세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처럼 무력으로 국경을 변경하는 전쟁들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은 자국 이익에 집중하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불려나왔다.
기존 산업의 구도를 흔들 AI 로봇 양자컴혁명이 진행중인 시대이고 중국 정부가 막대한 국력을 자국 산업에 지원하며 세계로 영향력 확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빅테크 독과점을 깨는 주장은 힘을 잃는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극단적인 정치권력이 득세하고 있다. 제국주의가 득세하고 있다는 건 그 나라 국민들이 살기 힘드니까 미친 놈이라도 내 이익을 위해 줄 것처럼 말하면 지지하는 환경이 조성된다는 뜻이다.
내 그간의 상식은 제국주의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서의 상식이므로 제국주의의 도래는 상식의 변곡점이 현재 진행중이라는 뜻이 된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는 대량의 이민과 전쟁이 있었다. 이번 제국주의 세계는 어떻게 진행될까?
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 읽고 정리해봐야겠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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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는 두가지 용도가 있다. 하나는 쓰는 용도고 다른 하나는 불리는 용도다.
자본주의에서 경제 정책은 돈을 위로 뿌리느냐 아래로 뿌리느냐다.
부자에게 뿌리면 돈이 소비되기 보다는 투자된다. 사회의 재화가 투자쪽으로 쏠리면 사업이 쉬워지고 생산성이 개선되고 경제가 성장하며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탄탄해지나 빈부격차가 더 커진다.
빈자에게 뿌리면 돈은 투자되기 보다는 소비되고 생산성은 그대로인데 수요가 늘기 때문에 물가가 오르며 해당 통화의 가치가 하락하고 그 통화의 경제 시스템이 불안정해진다.
빈부격차가 유발하는 분노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불안정하게 하므로 경제 시스템이 안정된다고 빈부격차를 무한정 허용할 수는 없다. 사회의 주인으로서 지분율을 생각한다면 다수를 차지하는 빈자에게 돈을 분배하는 것은 경제를 약하게 만든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하기엔 더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분배는 굉장히 섬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간 경쟁에서 밀려서 잡아먹히지 않는 선에서 조심히 주위 살피며 분배해야 한다.
돈이 분배 우선으로 아래로 뿌려지는 것에 비해 위로 뿌려질 때에 기술의 발달과 생산성 혁신이 일어나서 물가를 낮추는 효과가 난다. 수요 자극은 덜 일어나서 투자재 자산의 가격은 오르지만 소비재 물가는 자극되지 않아서 돈의 가치는 덜 떨어진다. 분배 정의를 우선한다고 무턱대고 반대로 하면 혁신은 뒤쳐지고 돈 가치는 떨어져서 나라 째로 침몰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룰라와 노동자당의 브라질은 무턱대고 분배하는 중이고 그 결과가 헤알화 가치 1년새 25%하락과 국가 부도 위험 급상승 세계 1위로 나타나고 있는 걸로 읽힌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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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간사회는 자본주의라는 공법위에 지어져서 인류 공조가 동작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성장율 위에 존재한다. 성장율이 없으면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신용이 축소되어 자본주의는 붕괴한다.
그런데 성장율은 지수 상승이다. 지수상승을 감당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계속해서 성장 속도가 가속되는 지수 상승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인구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거나 노예해방 여성해방 등 숨어 있던 경제 인구를 끌어내서 지수적으로 늘리거나 하지 아니면 노동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경제의 지수적 상승을 감당하는 주축은 지속적으로 발전 속도가 빨라지는 과학 기술이다. 자본주의의 생존은 기술 발전에 달렸다.
지수 상승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 기술은 결국 특이점을 만나게 된다. SF에나 나오던 키워드들이 최근 수시로 뉴스에 거론되고 있다. 이는 지수 증가 속도로 가속된 기술의 발전이 그간 내가 살아온 속도 감각을 추월하는 속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초전도체
핵융합
양자컴퓨터
인공자아
노화역전
이모탈이 머지 않았다.
지수 속도로 가속되는 성장과 빈부격차가 지금 이대로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레이트 리셋'을 말한다. 지속 불가능하니 기존의 질서가 무너졌다가 새로 시작해서 지금 같은 과정을 다시 밟지 않겠느냐는 거다. 난 그 반대쪽에서 기술에 의한 생산성의 가속 끝에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는 특이점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특이점을 통과하면 관찰 대기하던 외계인이 나타날 것이다.
지구에 지성체 등장후 10만년 이내,
문명의 시작 후 만년 이내,
우주 탐사 시작 후 백년 이내인 우주 역사상 찰나의 시간 만에 인공지능 혹은 노화역전으로 지성체가 더 이상 그냥 인간이 아니게 되는 특이점의 징조가 조금씩 보인다. 천년쯤 더 걸린다 해도 대세엔 차이가 없으므로 138억년 우주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만날 수 있는 지성체는 확률상 반드시 특이점 이후의 존재다.
또한 지성체 특이점 vs 유인 성간 여행의 난이도를 비교해 보면 백년쯤 사는 생물이 수십~수만 광년 거리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웜홀이나 아광속 이동이 필요한데 이게 인공지능이나 노화역전 보다도 멀다. 항성/은하간 여행은 지성체가 이모탈이 되는 것보다 테크 레벨이 높은 것 같다.
따라서 만날 수 있는 외계인은 이모탈이라고 볼 때 그들 기준 더 큰 규모의 협력 확장을 위해선 지구 문명이 특이점을 통과할 때까지 대기하며 관찰하는 것이 개연성 있다. 여전히 '생존과 번식'을 최대동기로 하는 특이점 이전의 인간은 '인간은 고래보다 가볍다'만큼이나 명확하게 종의 한계를 넘지 못하기에 특이점 너머 지성체의 협력 대상으로는 부족하다.
지구 식물의 역사는 30억년은 되므로 지성체가 생명탐사를 했다면 이미 옛날에 와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기네 기준으로 판단하여 특이점에 도달할 가망이 없는 2억년 묵은 공룡을 멸종시켰다는 SF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특이점을 지났을 때에 외계인이 등장할 것이다.
세포에서 우주사회까지 통합의 연쇄가 이어질 것이다.

어쩌면 허황된 이 이야기는 세상을 더 재밌는 곳으로 만든다. 살아봤자 그저 그뿐인 곳일수도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꿈꾸고 싶은 것도 별로 없는 곳이 될 수도 있는 이 세상이 한없이 꿈꾸기에 충분할 만큼 넓은 곳이 된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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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의 힘은 지능과 도구보다도 협력하는 머리 수에 달려 있다. 일당백의 개체에게 이백명이 붙어서 이기는 다구리 전략이 인간의 방식이다. 다른 동물 대비 초월적 숫자의 협업이 가능해지는 포인트는 패러다임의 공유에 있다.
지성체의 시작은 상상력이다.
상상으로 실제에서 속성을 분리 변화시킬 수 있게 되면서
추상화가 가능해지고
추상화를 통해 개념을 만들고
개념들로 기술공법을 만들고
거대 협력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기술공법을 발전시켜 더 크게 협력하는 것이 사피엔스 종의 힘이 폭발한 기점이었다.
개념들이 연결된 설계를 통해서 인간 군체는 기능들이 협력하는 구조가 되었고 그 결과 다수 협력이 가능해졌다. 사실 협력보단 부속물로 기능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어떤 부속물들은 착취를 당하는데 그들에게 협력이란 표현은 맞지 않을 테니까.
이는 인간성이 좋고 인맥이 좋다는 수준에서 개인들이 저 사람 마음에 드니 돕고 싶다는 친분과 개인적 신뢰로 이루어지는 협력이 아니라, 개념들로 만들어진 아키텍처 상에서 각 사람들이 배분 받은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협력이다.
(크리스탈 진동 시에 1씩 올라가는 카운터 숫자를 시간 개념으로 약속하고 그에 맞춰 각자 맡은 동작을 해서 인터페이스에 약속된 값을 주고 받는 프로그램들을 생각해보자. 역할을 기반으로 한 이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카운터의 값을 시간으로 다루기로 약속하는 개념으로 이루어진 아키텍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고나 가치 생성시에 카운터가 올라가는 돈이라는 개념도 클럭과 마찬가지로 약속에 의해서 사회 아키텍처 상의 개념으로서 협력에 사용된다.)

사피엔스가 픽션을 신봉할 수 있게 되어서 문명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상상력이 실제들의 위에 abstraction layer를 까는 효과를 내서 추상화된 개념을 다룰수 있게 된 것이 인지혁명이고
개념들을 가지고 현실에서 동작하는 구조를 만드는 기술공법을 만들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기술공법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강력해졌다는 뜻이다. 개미나 벌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구조의 사회를 따르는 대신 추상적 개념으로 이루어진 공법을 따르며 그 공법을 발달시켜 갔다는 점이 차이의 핵심이다.
사회 구성의 패러다임에 대해 기술공법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기술공법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체계를 세우는 방법인 건축 공법, 논리적 체계를 만드는 SW 공학의 공법, 반도체를 만드는 공법. 기능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공학기술적 방법처럼 인간 무리를 기능들이 협력하는 사회로 만드는 방법도 공법이다. '공법'은 '현재의 결과물을 만드는 가장 발전한 기술이나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며 기술은 계속 변화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하라리가 말하는 '픽션'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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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세포군은 작은 자아를 형성하고
그 소자아들이 통합되어 한명의 인격을 형성한다.
의식에 특화된 뇌세포와 시각에 특화된 뇌세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균질한 일반 뇌세포가 위치에 따라 분업한 업무를 처리하면서 그들이 모여 인격으로 통합된다.
통합된 표층 의식에 대비하여 각 기능을 하는 세포군의 작은 의식들은 무의식이지만, 무의식이 의식으로 통합되는 과정은 이분법적이지 않고 점층적이다. 반구 정도의 규모가 되면 그것만으로도 (반구가 소실된 사람이 정상인 생활가능할 정도로) 거의 한사람분의 의식을 갖으며 이를 두개 통합해서 한명의 의식이 완성된다. 뇌량이 끊어진 사람이 왼손이 집는 물건을 오른손이 쳐내는 행동을 하는 것을 바탕으로 볼 때 반구 규모에서의 의식 통합은 좌반구와 우반구 각각의 의식중 서로 동의되는 일부는 표층 의식으로, 동의되지 못하는 일부는 억제되어 무의식으로 남는 형태다. 더 작은 기능군 단위에서의 통합도 이와 같을 것이다.
(사회의 표면적 지향점과 내부 구성원 개개인이 얼마나 진심인가는 다를 수 있듯이 의식이 지향하는 바와 그 구성원인 자아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설득되어 집중하는가는 다르다. 구성원인 소자아들이 진심으로 설득되지 않으면 소위 억압된 무의식이 되어 스스로를 방해한다. 소자아들의 의식인 무의식은 의식 없이 자동화된 행동인 습관으로 표출된다. 무의식적 습관을 진압하여 통합된 의식을 따르게 하려면 의지가 쓰이는데 의지는 빠르게 소모된다. 의지 소모 없이 소자아를 전부 통합시키기 위해선 습관을 들여야 한다. 습관이 들어서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무의식의 소자아들에게 뿌리내릴때 집중된 역량이 나온다. https://longlive.tistory.com/m/858
분석심리의 무의식과 페르소나가 설명하는 현상들을 이 관점에서 재해석할시 어지간히 들어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간은 한명의 인격으로 통합이 완성되는 생명체가 아니다. 시선, 눈빛, 표정, 태도와 해석기관등 인간은 속내를 겉으로 까발리는 데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했고, 고독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문명 이후 부터는 뇌용량 축소를 일으키며 인간의 지능은 사회의 일부로서 진화했다. 뇌세포가 인격으로 통합되는 것처럼 개인도 기능을 수행하면서 무리의 인격을 이룬다. 나는 나의 군체고 나는 군체의 일부다. https://longlive.tistory.com/m/859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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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대학생때 선배형이 커피 사주고 자기는 오렌지주스 마시길래 물어봤다. "형은 왜 커피 안마셔요?"
"내 나이가 수명이랑 만나면 늙어 죽는건데
수명이 계속 늘어나니까 수명 곡선이 1년에 1보다 빠르게 올라가면 내 나이랑 수명 곡선이 만나지 않지. 그럼 안죽겠지?
평균 수명 곡선을 두번 미분해서 그런 날이 언제쯤 올까 예측해 봤더니 내가 죽기 전에 올 가능성이 간당간당해. 버텨볼라구."

이 책의 주제가 이거다. 버텨볼라구.
책의 초반 20%정도는 노화의 근본 원인 및 해법을 설명한다.

몸의 어느 세포나 DNA는 동일하다.
동일한 DNA를 가지고도 어떤 세포는 피부세포로 분화하고 어떤 세포는 신장세포로 분화한다.
이를 컨트롤하는 후성유전체의 단백질이 있는데 해당 단백질이 염색체를 코팅해서 이 세포에서 염색체의 어떤 부분이 on되고 어떤 부분이 off될지를 calibration한다.
그런데 이 단백질은 다른 기능도 한다. 염색체가 끊어졌을 때 손상된 염색체 사슬을 복구하는 기능을 한다.
마치 민방위 재난복구군 처럼 평소엔 생업에 종사하다가 재난이 나면 생업을 두고 이동하여 재난을 복구하고 돌아온다.
이 이동 - 복구 - 원래 자리로 재이동하는 과정이 많이 반복되다 보면 실수가 발생한다. on 시켜야 할 곳이 off 되고 반대도 발생해서 세포가 기능 이상을 일으킨다. 모근 세포가 생성하는 털에 색소가 안 생성되어 흰색이 된다든지.
염색체 발현 및 염색체 복구를 하는 그 단백질이 염색체 손상을 복구하고 돌아올 때에 다른데 떨어져 있던 염색체의 끊어진 자투리 성분들에 착각해서 들러 붙는 바람에 원래 자리로 돌아오기에 실패하는 일이 있다. 세포가 자주 손상되고 오래될수록 자투리 염색체 성분이 세포에 쌓이고 이로 인해 제자리로 돌아오기가 혼란을 일으키기 쉬워져서 세포가 늙는다.
이 현상은 쥐에게 자투리 염색체 성분을 주입하면 늙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고 반대로 쥐에게 해당 후성유전체 단백질을 주입하면 젊어지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민방위가 길을 잃어서 복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면 민방위를 넉넉하게 주입해 놓으면 본업 자리를 뜨지 않고 재해복구를 할 수 있는 셈이다.
이게 노화와 노화 역전의 기본 원리다.
쥐에서는 성공했다는데, 후생 유전체 단백질을 생성하는 유전자를 특정 먹이에 대해 더 많이 생산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유전자 조작해서 실험한 것 같다.
사람에게 적용하려면 유전병 치료하듯 바이러스에 유전자 조작을 심어서 주입하는 형태가 될 수도 있고 기존 유전자에서 생성을 활발하게 하도록 하는 알약이 될 수도 있다는 정도로 예상한다고 한다.

나머지 80%는 이미 잘 알려진 장수 비법들을 자잘하게 설명한다. 운동하면 좋다. 야채가 몸에 좋다. 소식하면 좋다.
즉 '그 날이 올 때까지 이걸로 버텨라.'

2018년 중국에서 에이즈 안 걸리는 유전자 편집 아이를 만들었다. 저자는 자기도 인간 유전자 편집 너무 하고 싶은데 못하는 터라 2천년대 감성으로 절대 금기를 범했으니 이제 매드사이언티스트로 몰리고 큰일이 나겠군 했는데 2018년에는 사람들이 많이 무뎌져서 한 3일 지나니까 인터넷 기사에서 밀려서 사라지더랜다.
그래서 요는 '거의 다 왔다'.
바이러스에 영생 공장 실어서 감염시켜서 유전자 편집해도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는 시대가 올테니 그때까지 운동하고 야채먹고 영양제 챙겨먹으며 버텨보라.

책 종반에는 '사회보장제도가 무너지겠지. 빈부 양극화가 심해지겠지. 많은 문제가 일어나겠지. 어떻게 되겠지. 옛날엔 뭐 문제 없었냐.'가 담겨있다.

1위 부자 제프 베이조스가 노화 역전 연구소를 만들었다. 순서가 나까지 오는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조만간 특이점이 오긴 올 것 같다.
애완동물의 수명을 늘려주는 사업으로 부작용 확인하는 동물 실험을 겸해 사업이 가능할 것이고 그를 통해 자금과 안정성을 수급하면서 사람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을테지.
나도 버텨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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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 명상에서 알게 될 것을 바탕으로 생각을 확대해보자.

마빈 민스키 책 the society of mind (1986년 책)
AI의 창시자가 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마음의 구성자들이 사회를 이루어 인격을 만든다는 관점에서 마음을 분석하는 책이다.
계산되는대로, 말하자면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신경세포 한개에 의식이나 의지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면 그 세포가 군집을 이룬다고 자아가 되는지는 '0+0+...=1이 되는 것이 가능한가'처럼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민스키는 조합에 의해서 부분에 없던 특징이 전체에 나타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물질의 조합으로부터 특별한 '생기'의 존재 없이 생명도 나타나는데 신경 세포의 조합에서 사유가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마치 평면인 판자들의 특징으로는 나올 수 없는 '가두는' 특성이 평면의 조합인 상자에는 나타나듯이.
그런데 의식의 최소단위는 뇌 1개보다 작을 수 있다. 책의 제목이 마음의 사회인 이유다.

저 책외에 여기 저기서 본 것을 모아보자.
https://youtu.be/wfYbgdo8e-8

https://youtu.be/JQVmkDUkZT4

뇌량 절제로 보듯 뇌가 꼭 한덩이로 전체가 있어야 의식과 의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의식의 최소 단위는 더 작아진다. 뇌세포들은 서로 질적인 차이가 없는 신경 세포들이 연결되어 뇌를 이룬다. 0.5(뇌반구)에 의식이 있다면 그보다 작은 것은 왜 안되겠는가 생각한다면, 하나의 신경세포나 뇌의 한 부위가 의식을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세포 하나~소규모 뇌세포군이 초보적인 의식을 갖는다고 가설할 수 있다.
즉 인간의 뇌에 수많은 의식이 존재하고 이것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힘(아마도 집중력이라 해야될 것 같다)으로 하나의 의식이 되는 것일 수 있다.
뇌량 절개같은 물리적인 이유로 혹은 조커 메소드 연기를 반복하다 분리된 인격을 만든 히스레저 같은 이유로 정신병적 이유로 그 의식이 분리되면 자기 안에 다른 자아가 생기는 경우도 가능하다. 통합이 흩어지면 일부 뇌세포군만으로도 독립된 인격을 형성할 역량이 된다는 의미다.
자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아서 다이어트는 실패하기 일쑤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나에 대한 지시가 잘 되지 않아서 공부중 졸릴 때 경쟁자를 생각하며 잠깨는 식의 우회적 지시를 해야 통하기도 한다.
즉 의식은 최하 둘(좌우반구)에서, 좀 더 초보적인 수준의 의식으로 환원한다면 수많은 초보적 의식들이 통합된 군체이다.
하기 실험을 보자.
benjamin libet 실험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9E%90%EC%9C%A0%EC%9D%98%EC%A7%80-%EB%B6%80%EC%A0%95%ED%95%98%EB%8A%94-%EB%87%8C%EA%B3%BC%ED%95%99-%EC%8B%A4%ED%97%98/

fried, mukamel, kreiman 실험.
뇌세포 상호간에 질적인 차이가 없는 동일한 뇌세포들이 연결되어 뇌가 되므로 의식면에서도 기초적인 의식들이 군집하여 집중력으로 의식으로 통합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음대로 판단해서 누르고 언제 눌렀는지 기록하라는 실험에서 보듯 마음대로 판단하라고 하면 의식하는 내가 판단하여 지령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쪽의 신경이 판단하여 움직이고 보고 받는 형태로 된다. 자아는 외부에 대표성을 갖는 일부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자동으로' 움직이는 영역이 크게 차지한다. (통찰명상을 통해 보게 될 것이 이것이다.)
DMN에서 자동으로 동작하는 것이 내 의지를 벗어나 있다고 하지만 실상 몸에 익은 것이야 말로 진짜 나라고 할 수도 있다. 습관의 중요함은 널리 강조되어 왔으며 모든 종류의 기술 훈련은 몸에 익혀서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행해질 단계가 되어야 완성된다.
다이어트나 습관 교정이 내 의지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은 내 안의 다른 나를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단수가 아니다.

여기서 끝이 아닐 수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햄스터는 옆에 다른 햄스터가 있으면 스트레스 받아서 그게 제 새끼더라도 죽이는데 사람은 옆에 누가 없으면 외로움이라는 거부반응이 격렬하게 일어난다. 사람에게 있어 동료의 존재는 단지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 두려움을 진정 시켜준다. 사람이 한명의 인격으로 통합이 완성되는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신경세포들의 개별 의식이 통합되어 1인격으로 표현되는 것과 유사한 일이 1인격 윗단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마음들의 사회로 구성되고 다시 인간 사회 속에서 마음들의 사회를 구성하는 일부가 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더 생존력이 강한 조직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도 생각할 수 있다.
개별인격이 사회 조직으로 통합되어 조직의 인격과 의식으로 표현된다. 조직의 인격이 갖는 경쟁력은 개인의 인격간의 경쟁력 차이가 갖는 특징을 마찬가지로 가질 것이다. 사람 하나의 내면 구성을 참고하여 조직의 경쟁력 강화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경쟁력 강한 인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좋은 습관을 무의식적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필요하고 집중력도 필요하다. 굳은 다이어트 결심 보다 거부감 없이 티비 앞에서 걷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변화 방침이 유리하다는 것도 개인이나 조직에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통치자의 인격이 혹은 그가 꾸린 수뇌부의 인격이 국가의 인격으로 표현되는 사회도 있고 너무 민주적이어서 개개의 인격이 통합되지 않는 사회도 있다. 의식적인 통제를 최우위에 놓은 수직구조가 지나치면 역량이 제한되어 바보가 된 뇌도 있을 것이고 수평화가 지나쳐서 자아가 집중되지 못하고 인격이 분열된 뇌도 있을 것이다. 생존에 성공한 뇌구조로부터 최적의 사회조직구조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는 신경망 구조에서 보듯 완전히 수직적이지도 수평적이지도 않다.
군체의 일부로서 생각하기. 영감을 얻을 때엔 발상은 빈공간에서 떠오르기 보다는 많은 생각들을 입력 받은 후 이해할 때에 떠오른다. 타인의 생각들을 많이 듣고 영감이 생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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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서부터 세상을 배운다.
세상은 어떤 모습이며 무엇이 가치 있는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
혼자만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기대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엔 갈 길이 너무 멀어서
이미 주행중인 다른 누군가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빌려타고 다시 갈아타기를 반복하는
우리는 히치하이커들이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갖는다고들 말한다.
자유의지는 외부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정말 자유의지를 갖는 지는 일단 미뤄두고,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할 때 사람은 과거에 배운 것에 완전히 순응하는 것을 못견뎌하는 속성을 보인다.
정해진 매뉴얼만을 따르며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자아가 죽어버리는 느낌을 받으며
생존을 쫓지만 생존해도 공허하고
권력을 쫓지만 권력 위에서도 공허하고
쾌락을 쫓지만 쾌락에도 불구하고 공허하다.

자유의지를 갖는 사람은 매뉴얼화된 인생에 복종하지 않기에 미지의 행보를 가고
미지의 행보를 가기에 자기가 맞게 가고 있는지 불안에 빠진다.
이 불안은 신이 아닌 한 가질 수 밖에 없는 인간적 한계다.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발휘하면 자아의 한계를 느끼는
부조리한 인간으로서 갖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은 생존과 권력과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초월적 가치추구를 하기에 이른다.
인간적 한계를 넘어선 존재를 열망하는 그것은 예술과도 맞닿아 있고 도덕과도, 혹은 학문적 진리추구와도 맞닿아 있다.

과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수레는 종교였다.  
종교는 세가지 구성 요소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신의 이름, 그 신이 대변하는 초월적 가치, 그 가치의 예제가 되는 이야기.
사람은 예시를 통해서만 관념을 배울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관념, 혹은  '정의'라는 관념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개념을 설명하는 것 만으로는 사랑과 정의가 뭔지 배울 수 없었고 가치를 실현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종교는 초월적 가치를 긍정하는 가치관의 가르침을 이야기에 담아 내놓았다.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의 이야기를 내면화 하면 가상의 기록이 독자의 인지 내적으로는 살아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종교의 이야기는 신자에게 살아있는 이야기가 됨으로써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살아있는 상태로 전달한다. 종교의 이야기는 가르침을 소화흡수 가능한 형태로 조리해 놓은 포장인 셈이다.
불교는 이야기들은 비유요 방편일 뿐이라고 누차 강조하고 있고,
기독교 조차도 성경의 이야기 자체보다 그 안에 담아 내고자 하는 가치에 대한 가르침이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과거 종교가 제공하는 가치관은 신의 이름으로 삶의 가치를 초월적인 어떤 것에 둘 수 있도록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종교가 신의 권위를 빌려서 제공하던 가치관은 신의 이름이 부정되는 현대에 이르러 위기를 맞는다.

"초인이 되어라.
아니면 초인의 전조가 되어라.
초인은 벼락 같은 것이다. 벼락이 치기 전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바람은 벼락의 전조다. 초인을 부르는 비바람이 되어라.
초월적 가치를 잃은 인간은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의 여신을 세운다. 삶과 건강을 통해 이룰 초월적인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건강을 목적으로서 추앙한다.
그리고 건강을 위한 건강에 매달려 먹고 싸는 인생을 살며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일어났다.
인격신의 권위 아래 가치관을 제공받는 데에 익숙해져 온 사람들은
인격신의 이름이 힘을 잃은 세상에서 초월적 가치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과학이 신이 된 시대다.
사람들에겐 이기는 편에 붙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 이기는 편 우리편, 지지정당은 집권여당.
근래 영역을 확장해온 과학은 분명 이기는 편 이었다.
그런데 이기는 편에 붙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과학이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과학은 대중에게 새로운 신앙이 되었다.
이 과학숭배신앙은 묘한 병폐를 낳고 있다.
과학을 신으로 숭배하면 그 신이 알려주는 사실들은 신화에 해당하는데
종교였다면 그 안에 가르침으로서 초월적 가치를 긍정하는 가치관이 담겨져 있을 것이나
과학은 종교가 아닌지라 이야기를 까보면 안에 가르침이 담겨있지 않다.
그래서 과학을 숭배한 사람들은 '없다'를 가르침으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즉 삶에 있어 초월적 가치의 상실이다.
그들은 그렇게 니체가 얘기했던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을 여신으로 세우고 행복을 발명했다 주장하는 경멸적 인간들'이 되어간다.
건강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더 나은 가치를 갖는 삶이 되는가?
그들에겐 이에 대한 답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월적 가치란 없는 것이 답'이라는 가르침을 과학 신화가 담고 있다는 믿음이 그 신앙의 교리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문제다. 과학은 '어떻게 하면 틀리지 않은 지식을 효율적으로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의 이름일 뿐이다.
지식을 축적함에 있어 틀린 지식이 섞여드는 것을 너무 배척하면
탄탄하되 쌓아 올라가는 효율성에 한계가 오고,
쌓는 속도에만 집착하면 잘못된 지식이 섞여든다.
과학은 그 정확성과 효율성 사이에서 합당한 지점을 합의한 방법론의 이름이다.

연역된 지식은 논리적으로 참이다. 그러나 '귀납적 지식은 언제라도 반례가 등장해 뒤집힐 수 있기 때문에 연역된 지식만이 참'이라는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미친 사람은 자기가 미쳤다는 걸 모르듯, 인간의 논리 이성 체계가 옳다는 것을 인간은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경험없이 생각하기에 참이라는 것은 신뢰할 수 없으며 실제로 경험된 것만이 참이다'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가 등장했다.
(합리주의자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선 경험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사상을 의미한다. 사실 문맥에 맞춰 번역하면 사변지상주의자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경험주의에 더해서 '경험도 귀납적이므로 뒤집힐 수 있다' 쪽으로 가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 불가지론자가 된다.)
경험된 모든 것이 참은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참인 명제를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합의점을 찾은 '경험주의의 일부'가 우리가 아는 과학이다. 이 방법론은 성공적으로 모태인 철학의 위상을 넘어섰다.

연역적으로 도출된 것들 중에 경험적으로 검증된 명제에 대해 참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 물리학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지식을 쌓는 속도 효율성의 한계에 마주친다.
화학원소 주기율표는 원자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하는지 해명되기 전부터 관측되었다.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연역되지 않았으므로 화학은 과학으로 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화학은 비록 연역적으로 도출되지는 않았더라도 독립적인 실험으로 재연이 가능한 명제까지는 참으로 치기로 한다. 통제된 환경 하에서 이제까지 재연되던 경험이 갑자기 다음 실험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틀어질 위험은 무시할만큼 작은 것이라는 까닭이다.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확인되거나, 실험으로 재연가능한 지식을 참으로 여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과학의 방법론이다.
사회과학은 독립적인 실험이 어렵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 방법론을 따르기는 어렵다. 지식 축적의 효율성을 위해 다소 널럴하게나마 가능한 한계내에서 과학 방법론을 참조하여 쌓아 올라가겠다는 것이 사회과학의 방법이다.

지식축적을 탑에 비유하면 물리학은 지상에서 시작한 1층, 화학이나 생물학등은 허공중에서 시작한 2층, 가정위에 통계적 방법을 이용하는 사회과학 역시 허공중에서 시작한 3층, 가정위에 사변적으로 탐구하는 인문학은 더 널럴한 4층, 종교는 5층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 화학의 주춧돌은 물리학으로부터 연역증명되었고 서로 미시-거시의 관계로 합치되었다. 이제 화학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온 셈이다.
다른 학문간의 합치는 아직이다.
다른 모든 지식이 종국에는 1층에서 시작한 과학으로 환원될 것이라는 주장이 통일과학운동이며 환원주의라고도 한다. 과학의 방법론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이었는지가 검증된 지금, 모든 앎을 과학 방법론에 의지하여 풀어나가자는 주장은 큰 지지를 받고 있다.

얻어 탈 때 중요한 것은 잘 타고 제 때 내리는 것이다.
내려야 할 지점을 놓치고 엉뚱한 곳으로 가 버리는 일은 히치하이커의 세계에선 흔한 실수다.
그래서 얻어탈 때 가장 기본이 되는 팁은 이거다.
이렇게 말하자. "어디까지 가세요?"
빌려타는 것이 차가 아니라 세계관이나 가치관인 경우라면 이것은 이런 질문이 된다.
'이 관념은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까, 그리고 어디까지만 데려다 줄 수 있을까?
이 관념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며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구분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며 어려운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그리스에서는 수 많은 철학자들이 세상을 설명했다.
재미로 살펴보면, 우수한 통찰의 결과로 다들 일견 맞는 구석들을 가지고 있긴 했다.
- 아낙시메네스 : 질적 차이는 결국 양적 차이로 환원된다. 세상은 공기다.
   => 원자론, '질량은 에너지로 환원된다'.
- 피타고라스 : 참된 존재는 결국 수학적으로만 정확하게 표현가능한 어떤 것이다.          
   => 모든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 가능하다는 생각은 동종의 매질이 법칙에 의해 세상을 이룬다는 의미가 되고 온 세상의 매질이 동종이라면 세상안에서 분별을 가능하게 하는 참된 존재의 특성은 법칙에 좌우된다. 수학은 그러한 법칙에 가장 근접한 분야다.
- 헤라클레이토스 : 참된 존재는 없고 오직 변화만 있다. 만물은 유전한다.  
   => 화학 원소는 유전한다.
- 엠페도클레스 : 참된 존재는 결국 불, 공기, 흙 물,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 존재를 물질과 에너지와 생명이라는 속성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 데모크리토스 : 참된 존재는 원소로 되어있다. 다양한 원소들은 진공 속에서 무한히 운동하는데, 이때 무거운 원소는 둥근 운동의 안쪽으로 모여들어 대지가 되었고 가벼운 원소는 바깥으로 밀집하여 대기와 불이 되었다. 정신은 정신의 원소로 이루어졌으며 유물론은 여기서 시작한다.
   => 역시나 상당히 타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뭘 모르는 지를 알라. 너 자신을 알라."
같은 맥락에서 공자는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자로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네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여라. 그것이 아는 것이다."

과학의 경우를 살펴보자.
앞서 설명한 과학의 방법론은 사실은 과학이 희망하는 이상향의 구상이다.
과학을 하는 것이 사람이다 보니 과학이 추구되는 현실은 이와 다른 방식을 취한다. [*]
중요한 이슈중 하나인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뉴튼이 초속30만Km로 달리는 열차위에서 초속30만Km로 공을 던졌다. 공의 속도는 얼마일까?
고전역학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 문제의 답을 계산하는 데에 망설일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답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짧은 혁명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과학활동은 하나의 지배 패러다임 하에서 이루어진다.
지배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탐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답이 정해진 퀴즈'를 푸는 것이 된다.
지배 패러다임은 예상하는 결과를 이미 가지고 있다. 그게 정상과학 활동이다.
실제로는 아직 답을 모르는 부분임에도 넘겨짚는 게 가능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현재 지배 패러다임에 따라 자유의지의 문제를 풀면 어떻게 될까?
비록 의지가 어떻게 입출력 동작을 하는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음에도
지배 패러다임에 의해 '확률식으로 정의될 수 밖에 없을 신경계의 입출력에 자유의지란 존재할 틈이 없다'라는 정해진 예상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탐구가 더욱 정교해질수록 기존 패러다임의 오류도 발견하기 쉬워진다.
뉴턴이 던진 공의 예시처럼 개략적으로 볼때엔 뻔한 답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던 문제 조차도
이론이 정교해지고 구체적이 될수록 점점 실제와 거리가 나타나는 일이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쪽에 수정을 가하면, 또 다른 쪽에서 구멍이 나타난다.
이러길 반복하다보면 마침내 총체적인 난국에 도달한다.
그리고 총체적 난국을 몰고온 문제를 해소시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고안될 때, 패러다임은 전환된다.

'과학'으로 분류되는 예외없는 전 영역에 걸쳐서 이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일어나 왔다.
모든 과학 영역은 아직 답을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 답을 '넘겨짚어'왔다.
그리고 지배 패러다임의 허점은 항상 거기서 시작된다.

뉴튼역학 패러다임하에서 예시된 문제의 답이 60만km/s가 아닐 가능성은 없다.
뉴튼 패러다임의 허점은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데에서 발견된다.
'의지'가 어떤 입출력 동작을 하는지, 의지의 동작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음에도 '자유의지란 없다'라는 답을 넘겨짚을 수 있는 것도 이와 동일하게 기존 패러다임이 예상하는 바를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는 그와 다른 가능성을 갖는다. 의지가 어떤 입출력 동작을 하는지를 연산할 수 있게 될수록 그 이론치가 실제와 멀어지고, 도저히 땜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 가령 "특정 조건에서는 의지가 물질에 영향을 미쳐서 소위 영혼의 선택이 물질계에 동작할 틈새가 존재한다"라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를 수도 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영역에 대한 넘겨짚음은 지배 패러다임 하의 정상과학 활동에 훈련된 사람일수록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초속 30만km로 달리는 열차에서 초속 30만km로 던진 공의 속도는?
당시 제대로 된 그 답은 '모른다'였다.
그러나 실재로 해볼 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자유의지란 존재하는가? 영혼은 어떨까?
넘겨 짚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항상 있었지만  
아직 모르는 것은 단지 모르는 것이다.

얻어타는 것이 차건 우주선이건 관념적인 것이건 합승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언제 내려야 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과학에 합승할 수 밖에 없는 이 시대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라면
과학에서 내려야 하는 시점이 언제인지도 알아야 한다.
깜빡 졸다 놓치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먼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야 하는 자신의 피로감으로 돌아온다.
과학이 신이 된 시대엔 이런 피로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수 없이 많다.

가치관은 조망된 세계관으로부터 도출된다.
세부 지식을 아는 것과 세계관을 조망하는 것은 얘기가 달라서 세부 지식을 오류 없이 쌓더라도 그 지식이 편중되거나 미완성일 경우 가치 판단에는 오류가 나는 게 가능하다. 어느 음식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면 그 음식을 멀리 해야 한다는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지만, 다음 날 같은 음식에서 항암물질이 발견된다면 앞의 지식은 틀리지 않는데도 판단은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어차피 완전히 알 수도 없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는 불가지론자가 아닌 담에야 한정적으로 아는 것이라도 이미 아는 것에 기초해 행동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결과 너무 피로하거나 공허하다면, 혹시 내가 환승할 때를 놓치고 안드로메다에서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종교를 타고 환승할 때를 놓치나 과학을 타고 환승할 때를 놓치나 안드로메다로 가긴 마찬가지. 깜빡하면 전염병을 이겨내려고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다 몽땅 옮는 사태와 비슷한 일이 생긴다.

그럼 과학의 지식은 편중되거나 미완성이어서 세계관을 조망하기에 충분치 못할까?
과학이 확인한 사실을 섵불리 가치판단에 응용하면 엄한 결과가 나온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을 근거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가치관을 아예 철저하게 과학에 근거해서 짜려고 하면 치밀함과 허술함이 병존하는 개그캐릭터가 된다는 예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빅뱅이론의 쉘든)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현상은 무의미 앞에 지쳐버린 사람들이다.
쉘든 자신은 지식 추구라는 초월적 가치 추구를 하면서 생의 의미를 유지하지만, 모든 사람이 학자인 게 아니라서 쉘든의 눈으로 본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은 의미가 없다.
피로사회라는 책은 현대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생의 서사적 의미를 잃어버리고 지켜야 할 것은 오로지 몸뚱이 만이 남아 건강을 여신에 자리에 올리고 그 건강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른다.'
무의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빨리 지친다.
생에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때 지쳐버리는 현상을 상시 체험하게 되고
이는 우울증을 현대의 질병 자리에 올려놓았다.
과학을 신으로 모시는 신도들은 환승시점을 놓치고 무의미 앞에 피로해한다.
하지만 항상 지시받던 감독관이 없어지자 할 일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인격신을 잃었다고 초월적 가치를 잃어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과 달리 과학은 초월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릴 때를 놓친 히치하이커들이 넘겨짚고 우울해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제 갈아탈 때다.

화학, 즉 물리학보다 더 널럴한 기준으로 토대를 쌓은 지식체계가 물리학과 거시 미시 관계를 이루며 저층 지식에 합류하는 것처럼
5층의 종교가 4층의 인문학에, 4층의 인문학이 3층의 사회학에,
3층의 사회학이 저층의 과학 앞에 자기의 체계를 증명하고 합치되는 날이 오리라.
그리고 그 날에 종교의 가르침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증명될 것이며 한번 탑승한 과학에서 깜빡 졸더라도 내릴 곳을 놓쳐서 헤맬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내려서 환승할 지점을 기억하자.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 설명하기 편하게 증명이라는 말을 썼지만
귀납적 경험으로 증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증명의 대신 '반증을 견딘다'를 대안으로 삼은 반증주의가 가장 인기있다. 반증주의는 결국 가설연역주의의 증보판이라서 연역된 이론을 경험으로 확인한다는 전개 면에서는 가설연역주의와 같으며 그로 인해 가설연역주의의 일부로 다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은 반증주의를 따르지만도 않는다.
반증되는 결과 앞에 서는 것은 이론의 집합체이고 그래서 한 이론을 반증하는 결정적 반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증된 이론 조차도 때로는 긴 시간이 지난 후 더 나은 환경에서 재확인 했을 때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다.
달의 공전 주기나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다른 것은 이론이 틀려서인가? 아니면 계산에 모든 요소가 포함되지 않아서인가? 보이지 않는 행성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때문에 반증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뉴턴이 계산한 달의 공전주기가 실제 달의 주기와 달랐을 때에도,
또 이론적으로 계산된 공기 중 음파의 속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론적으로 계산된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이유로 뉴턴 역학을 부정한 사람은 없었다.
현상과 다른 결과를 말하는 이론을 지지하며 무려 한 세기를 보낸 후에야
달의 공전 주기 계산에 어떤 실수가 있었는 지가 밝혀졌고,
라플라스에 의해 음파의 속도가 어떤 이유로 틀려지는 지가 밝혀졌으며,
천왕성의 궤도는 관측되지 않은 자리에 해왕성이 있어서 틀어졌던 것임도 밝혀졌다.
그러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이론은 반증을 무시한채 버려지지 않았다.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반증되었다고 내버리기엔 너무 중요한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엄밀히 반증주의의 말을 따라 현실 반증된 이론을 항상 즉시 버리지는 않는다. 버려지는 이론은 버려도 타격이 없는 덜 중요한 이론들과 이미 다른 대안이 등장한 이론들 뿐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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