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감각을 느꼈던 기억들이 있다. 대학에서 영화 동아리가 비포선셋을 틀어주는 것을 혼자 보러 갔을 때 극장 안 공기는 선선했고 영화가 시작하기 전 영화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나서 "행복한 시간 되세요" 라는 음성이 극장 안에 울려 퍼질 때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어주 전쯤 주말에 일찍 일어나 산책길 걷다가 옆단지 휴게 공간에 앉아서 경치 보면서 아이스 커피 한잔을 마실 때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초대 가수가 행복의 주문 노래를 부르며 호응해 달라고 해서 함께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노래를 부를 때 행복한 것 까지는 아니었지만 행복의 감각이 살살 자극받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말처럼 행복하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종류의 감각이 있는 것 같다.
행복의 본질에 대한 정의처럼 포괄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행복하다는 느낌에 대한 기억이다. 크게 강렬한 기쁨도 아닌 '아.. 좋다' 정도의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감각이라면 강렬한 쾌락 후 익숙해짐에 무뎌지거나 불행에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하는 느낌으로서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고요하게 행복하다는 감각, 좋다는 감각을 유지하도록 지향해봐야겠다. 몸이 스트레스를 받는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다 병키우거나 안좋은 여파 불러들일 수 있으니 그러지 말고 행복감을 느끼고 불러들여야겠다. 삶이 행복을 위한 것은 아니나 고요한 행복감은 삶에 적어도 건강에 좋을 것이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의 임대료 연 5% 상승 상한은 빨리 없애야 한다. 건물값은 임대료의 수익률 역산으로 결정되므로 월세 조금 깎아주면 건물값이 크게 깎이는데, 월세를 한번 내리면 올리지 못하게 하니까 내리는 손해가 너무 커서 내리질 않는다. 정상적으로는 코로나, 물가, 금리 등 상황 안좋을 때 공실 나느니 좀 깎아주는게 이익인 선에서 임대료가 유연하게 움직여서 상생하다가 상황 좋아지면 쭉 올라서 회복하는 식이어야 하는데 건물 가격이 유연하게 휘지를 못하게 하니까 버티다가 부러지기만 한다. 언제 부러지는가 하면 그 지역 자영업자가 다 망해 나간 후에 부러진다. 중심가일수록 자영업 시도해 보려는 대기자들이 있으므로 외곽지부터 자영업자 대기자까지 전멸 후에 건물 가격 부러지는, 즉 매매가 이루어지면서 가격이 내려가는 게 아니라 매매가 없는 상태에서 호가가 의미를 상실해서 폭락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게 지금이다. 그래서 예전에 조물주 위에 건물주 칭송 나오던 상가 건물이 이제는 조용해진거다. 대신 한강 아파트로 돈이 옮겨가서 중심가 한강뷰 아파트가 주변지역과 키맞춤 없이 기형적으로 폭등하는 거고. 상가 가격이 부러지건 한강뷰에 거품이 끼건 말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 문제는 차라리 공실로 둘지언정 임대료를 내릴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서 자영업을 다 죽이는 내수 경제 광역 데미지를 주고 있다는 거다. 임대업은 예전에 손빼서 나랑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지만 자영업자 멸망 기사 볼때마다 생각한다. 상가 임대차 보호법은 즉시 없애야 한다. 자영업이 어려우니 보호법을 없애라는 게 말이 되느냐는 식으로 호도하기 딱 좋은 정치적 소재지만 다 죽어가는 지금 임대료 올릴 걱정 따위 할 때도 아닐 뿐더러 그 부작용으로 내리질 못한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저 악법은 제목이 보호지 효과가 보호가 아니다.
갓 잉태된 시점에서는 다른 사람 눈에는 안될 생각으로 보이는 허황된 것을, 내 활동으로 현실로 끌어와서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 때에 타인의 가슴도 뛰게 만드는 상품이 된다. 그 안될 법한 허황됨이 나에 의해 현실로 끌려오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살아갈 동기를 만들어 준다. 어느 정도는 허황된 그래서 내 가슴을 뛰게 만들면서도 내 인력으로 현실로 끌어올 수 있는 무언가를 꿈으로 삼는 것이 유리하다.
자본이 없는 청년층이 자산을 모아서 어려운 상황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빌라전세가 필수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먼저 전세와 월세를 비교해보자. 월세는 전세보다 얼마나 비쌀까? 전세와 월세는 둘 다 집값의 미래 상승익 및 하락 위험을 버리고 실사용 가치만을 반영하는 가격으로 시장에서 결정되고 그 후엔 전월세 전환율을 거쳐 가격이 조정된다.
전월세 전환율 추이를 검색해보면 첨부한 표와 같다.
이 두 값의 합이 전환율이다. 2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가 세입자가 전세로 지출하는 금액인데 이건 기준금리랑 크게 차이 안나므로 2020년 9월엔 전세 지출 0.5일때 월세 지출은 2.5가 되어서 월세가 전세보다 5배 비싼돈을 지불하는 셈이 된다. 23년 1월 기준으로는 전세 지출이 3.5일때 월세 지출은 5.5로 1.57배 정도 월세가 비싼 상태가 되었다. 향후 기준금리가 중금리 수준으로 낮아진다면 한 2배 정도 차이가 되지 않을까.
어쨌거나 전세가 더 유리하다. 이유는 시장에서 자본에 의한 진입 장벽 때문일 것이다. 전세는 전세보증금이 크므로 진입장벽이 되어서 세입자 시장 경쟁의 풀이 제한되므로 전세가 유리하게 결정된다. 월세는 집주인이 전세금 만큼을 자기 돈으로 더 채워서 공급해야 하므로 공급자 입장에서의 진입 장벽이 되어 집주인에게 유리하게 결정된다. 그 결과가 전세보다 5배까지도 비싼 월세가 된다. 따라서 재산 모으려면 전세가 훨씬 유리하다.
나랑 연애하던 학생시절 학비와 생활비를 자기가 마련해야 했던 아내는 형제들끼리 알바 열심히 해서 돈모아서 월세 탈출하고 빌라 지하방 반지하방 거쳐서 지상에서 전세 살다가 결혼했다. 학벌 덕으로 고액 알바 여러개 하고 장학금 받는 등의 유리한 조건이 있었으니까 가능했기도 하지만 어릴 때 돈 모아서 전세로 전환하는 것이 주효한 전략이었던 건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전세사기 위험을 겪기도 했다. 전세금보다 선순위 대출을 집주인이 안 갚고 경매 넘기는 게 이익이어서 전세금 떼일 위기였다가 경매가 반복 유찰되면서 선순위 대출금보다 가격이 낮아지니까 차라리 갚는 게 낫겠다고 갚아서 전세금이 보존되는 고생을 했었다. 가난한 청년층이 살 길 찾아 노력하는 과정에 전세사기 만나면 일생의 노력이 좌절된다. 전세 사기의 위험 때문에 두어배 비싼 월세를 살아야 한다는 것도 과중하다. 성실하고 똑똑한 사람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는 노력이 좌절되는 세상에서는 노력할 동기가 없어진다. 빌라 전세 사기는 제거되어야 한다.
내 입장으로 돌아와서 봐도 부동산 계약은 너무 후진적이다. 주식처럼 위탁 결제 제도 도입해서 전산화 해야 한다. 이 시대에 전산화가 안돼서 등기소에서 종이장 들고 돌아다닌다는 게 말이 안된다. 빌라건 뭐건 전세건 매매건 부동산 거래 하려면 사기가 아닌지 신경써야 할게 너무 많다. 전산화 된다면 빌라 전세 사기뿐 아니라 부동산 거래의 문제점들 다 소거될 것이다. 사기가 두려워서 거래가 위축될 때 해결책은 시스템이지 않겠는가.
아이가 영어 공부하고 엔트리코드 가지고 놀 때, 내가 새로 자바스크립트 공부할 때, 인공지능이 더 잘하는 걸 보면 학습 의욕이 저하되면서 '이걸 공부해서 장차 쓸모가 있나' 생각이 든다.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라고 답을 정해놓고 이유를 꿰어 맞추는 노력중이다.
잡스의 이 말에 믿음을 얻는다.
이것 저것 학습하다 보면 emergent ability가 발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AI를 쓰다가도 일단 똑똑하게 만들어 놓으면 다른 걸로 전환해 쓰기 편해지는 걸 많이 느꼈다. '이런 건 인공지능이 더 잘한다'며 안해놓은 사람이 아무것도 제대로 못할 때 뭐가 됐든 공부해 놓은 사람은 인공지능까지 이용해서 생산성 격차를 낼 것이다.
행불행 시스템의 목적은 생명의 활동시 필요한 것에 이끌림이 발생하는 것을 잘 감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발화가능한 신경의 개수는 유한하므로 측정 눈금은 유한한데, 영점고정상태에서 배율조정으로는 둔감해지거나 측정한도를 벗어나 버리므로 환경에 적응하여 측정 윈도우를 영점 조절하는 방식이 되었다.
'나'를 구성하는 소자아들은 학습이 완료되어 자동화된 신경계인 무의식과 입력에 대한 출력을 가변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의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의식의 가변적 조정은 쾌락으로의 이끌림으로 유도되는 상태에서 의지력으로 변동을 준다. 의식하는 신경계건 자동으로 구동되는 신경계건 내 자아이긴 마찬가지여서 무의식이 입력 받건 의식이 입력 받건 행불행 측정 윈도우는 환경을 인지하여 영점 조절된다. 습관으로 입력된 운동과 공부의 고통은 의식되지 않으나 어려운 훈련이 필요한 어려운 환경임을 몸에 새겨서 측정 윈도우는 그 부근에 머무른다.
나의 소자아 중 의식 영역 -의식이라고 하면 자유의지 등 복합 개념과 혼동을 일으키므로 더 자세히는 '기학습되어 자동화된대로 반응하는 영역(습관)이 아닌 영역'인데, 아직 반응이 결정되지 않고 출력이 가변적인 이 영역은 쾌감의 이끌림에 따라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이 구분되고 이에 판단(이때 나의 다른 신경계가 하는 행동을 합리화하는 과정이 기본적으로 수행되는 것을 포함한 판단) 후 이끌림에 순행하거나 의지력(소모성이 강하다)을 동원해서 이끌림에 역행하여 행동한다. 이 알고리즘에 따라 의식이 판단 내린 후 행동하면 입력되어 쾌감시 측정 윈도우 상향적응압, 고통시 하향적응압으로 작용한다. 쾌락에 적응하여 측정 윈도우 상향 적응되고 나면 이전엔 보통 상태이던 것들이 측정 윈도우 하단에 측정되어 고통이 된다. 쾌락은 고통을 부른다. 불교적이다. 불교적이란 사성제 고집멸도다. 고. 괴로움의 진리. 앞서의 원리에 따라 쾌락에 적응한 후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집.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원인이 업보처럼 쌓은 쾌락의 쌓임(집)에 있음을 알고 끊는 것. '무상한 세계에서 영원한 것을 찾고, 자기 것이 본래 없는데도 헛되이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기는 것'이란 쾌감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유지 가능한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쾌감에 머물러 쾌감을 쌓으면 그에 적응해 측정 윈도우가 끌어올려지는 것이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뜻. 쾌락을 제공하는 장난감, 재화를 얻었을 때 그 장난감을 소유하면 그것이 제공하는 쾌락이 유지될 것이라 생각하고 장난감에 집착하지만 실제론 그 장난감을 소유하더라도 쾌락은 손에 쥔 물처럼 사라진다. 멸.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쾌락이 왔다가도 단발적으로 그냥 지나가게 둬서 환경 평균값에의 영향을 작게 하여 측정윈도우가 쾌락에 적응하지 않고 현재 내가 필요한 행동에 이끌리는 수준에 머무르도록 하면 지속적으로 의욕 충만하면서 생활의 행동에 성취가 따르는 상태가 된다. 도.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에 대한 진리. 팔정도. 바르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현재 내가 할 일에 이끌리도록 측정윈도우를 환경에 맞추는 것. 생활할 때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바람직한 상태로 지향한다.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외재적 재화인 돈과 인기로 무리에서의 생존을 사고 그 이상의 쾌락 입력은 사지 않는 것을 지향한다. 행복은 내재적 조정으로 얻는데 내재적 조정은 대표적으로 다음의 것들이 생각난다. 1.절제. 즉 쾌감이 입력되더라도 왔다가 스쳐 지나가게 두고 쾌감을 계속 입력하려고하는 행동을 끊는 제어를 하기 갑갑한 훈련소 한달쯤 있다가 나오면 뭐든 호강처럼 느껴지는 드라마틱한 효과가 실제로 있듯이, 절제를 하면 실제로 생활이 즐거워지는 드라마틱한 효과가 인간 생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체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2.습관. 자동화를 통해 어려움을 입력하여 이에 의한 적응으로 측정 윈도우 하향 조정하기. 습관 자동화를 통해 쾌락을 입력하면 그게 바로 중독. 3.몰입하기. 몰입시의 쾌감은 자가수용체가 없어서 마이너스피드백이 되지 않는 a10 신경에 의한 것이어서 측정윈도우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없다. 다음엔 더 몰입해야 즐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정도로 몰입할때마다 행복감 발생한다. 쾌감 적응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고 몰입은 내적인 활동이니까 그럴 것이다. 만약 다음엔 더 몰입해야 즐겁다는 마이너스 피드백이 되는 몰입 신경회로를 가진 종이 있다면 집중력 장애로 멸종했을 것이다. 4.명상. 행불행 측정 윈도우가 쾌감에 적응하여 상향 조정되는 것을 되돌려 끌어 내리는 것이 내재적 조정이라 할 때 명상은 내재적 조정의 중요한 기술이다. 그런데 왜 명상이 행복에 도움이 되는가? 명상이란 사마타와 위파사나로 구분된다. 4.1.사마타 사마타 명상은 몰입을 일으키는 훈련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로써 도달하는 것이 사마디(삼매). 측정 윈도우가 감지하는 외부 환경 인식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역치를 올리지 않는 쾌감 생성이니 지속적 행복감이 된다. 4.2.위파사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활성시, 즉 자동화 시작시에 감지하여 되돌아오는 훈련을 하여 의식이 습관을 조정할 여지를 넓히는 것인데 직전 글로 적은 하기 방침이 위파사나와 긴밀하게 이어진다. '*즐거움은 알아차림으로 의식으로 불러온다. 숨쉬는 것에 조차 즐거움이 있으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의식으로 흘려보내던 삶의 기쁨을 감지하여 알아차린다. **괴로움은 습관적인 자아에게 맡긴다. 동기부여니 열정이니 이런 빡신 한방의 의식적 불태움이 아니라 점증적으로 '매일 조금 더', 반복 강화된 습관으로 아무 생각 없이 운동하고 공부하도록 한다. 이 반대가 쾌락 회로를 망쳐 놓는 중독이다.' 결국 상기 1,2,3번이 4번 명상이랑 중첩된다.
정혜쌍수가 이게 다 인가는 모르겠다. "사마타로 얻은 몰입의 능력으로 위파사나를 통해 나의 존재를 바르게 봄으로써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된다." 일단 여기까지 해보면서 관찰해봐야겠다.
아내랑 이 얘기를 했다. 세대를 남인양 분리해서 요즘 20대니 요즘 세대니 하지만 결국 인간종이고 인류다. 요즘 세대가 별로라는 건 다시 말하면 남이 아니라 내가 속한 인류가 쇠하고 있다는 뜻이다. 왜 쇠퇴하는가? 문명과 산업은 더 자극적이고 더 쾌락을 주는 것이 이전 것을 밀어내며 발전하고 있다. 예전엔 TV가 자극적인 첨단 기술이어서 애기들 TV 안보여준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 TV가 구닥다리여서 안본다. 책을 밀어내고 티비가, 티비를 밀어내고 스마트 기기가 쓰인다. 스마트 기기의 컨텐츠 중에서도 게임, 동영상, 그보다 더 자극적인 쇼츠와 온 인생을 과시를 위해 소모하는 sns로 더 자극적인 쾌락을 제공하는 것으로 교체되며 발달해왔다. 그 결과 쾌락 중독이 온다. 소비를 이끌어 내는 쾌락 공급제품과 마케팅 쪽으로 성공하면 어마어마한 부귀영화가 주어지고 그렇게 되기 위해 발전이 가속되는데 그 반대편에서 소비를 절제하는 소비자학은 성공해봐야 이름도 안 알려지는 변방의 교수 정도가 될 뿐이라 발전이 훨씬 더디다. 소비자학의 구루도 잡스가 천재 부자 위인으로 평가받는 데에 비하면 듣보잡이다. 현대 소비자학은 고작 밥상머리 교육으로나 남아 있고 그조차 밥상머리 교육이 잘 없는 시대라 실질적으로는 멸종했다. 불과 한세대 전 과거랑 비교해봐도 치약 쥐어짜는 생활 같은 검약을 좋은 걸로 얘기하던 태도가 사회적으로 멸종했다. 결국 잘사는 나라, 즉 산업이 발전한 나라들이 소비에 쥐어짜이고 쾌락 회로가 망가지는 결과가 온다. 쥐에게 쾌락중추 자극 전극을 꽂고 먹이 버튼과 쾌락 버튼을 원하는 대로 누르게 하면 쾌락 버튼만 누르다가 굶어죽는다. 생물에게 쾌락은 행동을 이끄는 가이드라인인데 이 보상 회로가 망가지면 필요한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결국 생존도 번식도 불가능해진다. 쾌락 중독 사회의 자멸이 지금 오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상 회로를 복구하는 법을 생각해보자. 인간관부터 설명해보자. 사람이 의식으로 판단하고 지시하는 대로 스스로를 움직여서 사는 것 같지만 의식보다 큰 부분에서 대부분의 활동은 무의식이 한다. 무의식이란게 파보면 학습된 관성에 의한 습관이다. 팔다리에 이어진 온몸의 신경계가 학습한 관성에 따라, 발을 옮긴다는 생각없이 걷고 생각없이 숟가락으로 떠먹고 생각없이 하던 행동을 한다. 사람을 이렇게 의식과 습관이라고 놓고 본다면 바람직한 삶은 이렇게 된다. *즐거움은 알아차림으로 의식으로 불러온다. 숨쉬는 것에 조차 즐거움이 있으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의식으로 흘려보내던 삶의 기쁨을 감지하여 알아차린다. **괴로움은 습관적인 자아에게 맡긴다. 동기부여니 열정이니 이런 빡신 한방의 의식적 불태움이 아니라 점증적으로 '매일 조금 더', 반복 강화된 습관으로 아무 생각 없이 운동하고 공부하도록 한다. 이 반대가 쾌락 회로를 망쳐 놓는 중독이다. 중독자는 쾌락의 입력을 습관의 영역으로 보내서 아무 생각없이 쇼츠 넘기며 쾌락을 입력한다. 모든 중독이 그렇다. 그렇게 습관을 통해 쾌락을 입력하면 높아진 쾌감의 역치로 무감각해진 보상회로를 가지고 그 사람의 의식은 아무런 가치있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첨언1)(첨언2)
인류라는 이 거대한 집단이 순순히 멸망할리는 없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디레버리징이 올 것이다. 자본주의도 경제규모가 점점 커져야 돌아가는 속성상 빚과 소비가 계속 늘어나는데 그러다가 한차례씩 이대로는 지속안된다며 디레버리징을 한다. 그러면 버텨내지 못하게 빚을 낸 사업체들부터 망해서 쓸려나간다. 쾌락의 레버리징도 마찬가지다. 지속이 위협받을 다음 세대 어느 땐가에선 버림 받는 무리가 생겨날 것이다. 사회 성장을 위해 너희의 소비와 헌신이 필요해서 이용은 했으면서 더이상은 너희가 필요 없다는 태도로, 버려지는 세대나 무리가 특정되어 사회에서 쓸려나갈 것이다. 그 고통스런 디레버리징을 피하려면 주위 추세에 휩쓸리지 않고 인격상에 쾌락 보상회로를 제대로 만드는 데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습관 만들기 책들에 나온 기술들을 참조해서 운동과 공부를 하는 습관을 점증적으로 만드는 환경을 조성하고 현재 쾌감 제공자 중 최첨단인 쇼츠와 sns 피하도록 유도하고 낮춰 놓은 역치와 함께 명상에서 말하는 알아차림까지 할 수 있게 되면 더욱 좋고.
쉽진 않다. 특히나 딸 주위의 세상이 모두가 인스타 DM으로 연락하고 모두가 과시를 주고 받으면 그 사이에서 친구에 끌려다니는 우리 딸이 중심을 잡기는 참 어렵다. 이 소비 사회에선 온 세상 사치가 다 여자를 타게팅한다. 마케팅에선 여심을 잡는 게 관건이라는 게 정론이라 한다. 예쁜 카페건 레스토랑이건 명품이건 다 제 1고객은 오빠 카드라고 한다. 어쩌면 수컷 공작새의 깃털처럼 동물의 섭리다. 남자가 슈퍼카를 사도 머신 덕후처럼 그걸로 가속도 즐기며 좋아하는게 남자의 꿈이 아니라 비싼 차키 들고 바에 가서 미녀 앞에서 키 꺼내 놓는 장면이 꿈꾸는 장면으로 그려지는 걸 보면 애초에 동물이 그렇게 만들어 진 것 같다. (첨언3) 그 구조의 약점을 공략해서 사치재가 여심을 타게팅 하고 있는데 완전 회피는 안될 것 같다. 그래도 나중에 쓸려나가지 않게 하려면, 우리 딸에게 해줘야 하는 건 꿀리지 않기가 아니라 올바른 보상회로 만들기이다. 당장 중학생되면 친구들 다 하는 아이폰과 인스타의 협공이 예상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견뎌보자.
(첨언1. 무의식으로 흘려 넘기던 일상적 감각에서 삶을 알아차리는 훈련은 습관화된 쾌락 입력에의 절제와 함께 역치를 낮추고 수용체를 늘리는 훈련이 된다.) (첨언2. 제대로 된 보상회로를 만드는 행동방침은 '외재적 재화로는 생존을 사고 행복은 내재적 훈련으로 얻는다'는 방침과 상통한다. 외재적 재화인 돈과 인기는 본질이 약과 같아서 아플때 불행을 낫게 하려면 꼭 필요하나 기쁨을 사는 용도로 쓰면 마약의 부작용이 온다. 심히 돈돈 거리는 요즘 아이들이라 이 점 알려둬야 한다.) (첨언3. '남자의 뇌는 머리가 아니라 다리 사이에 있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그렇다. 남자가 차를 수단으로 여자랑 놀기보다 차 자체를 더 즐기면 geek한 괴짜가 된다. geek가 일반이 아니라 괴짜라는 건, 인간은 일반적으로 수컷이 암컷 유혹하려고 사치재를 개발해 공작새 깃털처럼 쓰는 습성의 동물이란 뜻이다.)
모든 산업은 더 강한 쾌락 더 강한 흡입력으로 시간과 돈을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발달하고 이 미션을 더 잘 하는 쪽으로 교체되며 진화한다. 마케팅 기법은 소비자의 돈과 체류시간을 이끌어내기 위해 엄청난 연구자금과 적자생존 압력을 받아서 발전한다. 한편 소비를 증폭하는 마케팅의 반대편에서 절제하고 합리적인 소비자가 되기 위한 소비자학과는 돈이 안되는 학문이라 발전이 훨씬 더디다. 소비자학, 불교적 금욕주의, 청교도 금욕주의 등. 학문으로서건 금욕적인 사상이나 종교로서건, 절제 기법은 과거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주목받지 못하고 가풍 같은 가내수공업 수준으로나 전수되는 상태다. 돈이 안되기 때문이다.
자정은 없다. 자본주의는 경제가 지속적 성장을 해야만 돌아간다. 성장이 있어야 돈이 자본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순환이 이루어지면서 사회가 돌아가기 때문에 경제 성장이 사회를 살게 하는 심장 박동과도 같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경제성장은 이념이나 종교를 뛰어넘는 최고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성장을 돕기 위해 빚과 소비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구조다. 이 구조하에서 경제성장의 동력은 그 부작용 쯤은 쉽게 무시하게 되어 있다.
그 결과는 인류 전체의 쾌락 중독으로 나타난다. 책보다 TV, TV보다 스마트기기의 보편화를 거쳐 이제는 sns, 유투브 쇼츠, 게임, 원나잇을 위한 플랫폼 어플 등 더 자극적이 되기에 성공한 혁신들이 쉬운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빈곤층 조차도 24시간 쉼없이 쾌락을 쫓을 수 있는 환경으로의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체제의 방향성이 이러면 환경을 거부하는 개인은 소수이고 전반적으로는 쾌락 중독으로 끌려 간다. 결국 외부에서 요구하는 대로 시간과 돈을 있는대로 쥐어짜서 쓰면서 '엄청나게 썼지만 더 쓸 수 없어서 빈곤하다'라는 상태에 빠진다. 전 인류가.
그리고 이 효과는 쾌락을 위한 혁신에 어려서부터 더 많이 노출되는 세대일수록 강하게 나타난다. 가령 sns 부작용은 sns에 어려서부터 노출된 디지털 세대 일수록 강하게 겪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세대가 갈수록 쾌락 중독에 더 노출되고 절제력은 약해질수 밖에 없는 구조다. 그 결과 난 인간의 세대는 실제로 퇴행하고 있는 것 같다. 젊은 세대가 살기 힘들어 하며 번식 중단으로 멸절되어 가는 것의 근본에 이 인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쾌락을 동기로 생물의 행동을 이끈다고 할 때 더 큰 쾌락을 제공하는 제품간의 경쟁이 누적되면 결국 생명활동의 쾌락보다 제품이 제공하는 쾌락이 더 높아져서 자멸하는 결과가 온다. 삶의 객관적인 난이도(가령 집값이니 돈이니 이런 요소들)는 부차적이다. 아무리 게임이 쉬워도 능력치가 감퇴하는 플레이어는 결국 죽기 마련이므로 근본 원인은 난이도가 아니라 능력치 감퇴를 유도하는 인과에 있다. 세대는 연속성을 가지고 적응하고 진화한다. 쾌락 중독의 환경을 만들어 놓고 어떤 경우에도 미래세대가 망가질리 없다고 하는 건 억지다.
개인으로서의 생존 전략은 자녀가 쾌락 중독에 빠지지 않게 절제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sns에 에너지를 쓰고 쇼츠에 주의집중력과 시간을 쓰는 것이 최악인 것 같다. 나도 게임에 인생을 많이 팔아먹었고 그만큼 밑진 결과를 살고 있는 셈이지만 지금으로선 sns와 쇼츠가 게임보다도 더 최신 혁신, 최대 독성으로 보인다. sns랑 게임을 비교하면 매체를 보는 시간을 넘어 sns에 보여지는 인생에 에너지를 쓰는 양이 크니까.
자본주의 체제가 쾌락 중독으로 인한 인구 문제로 대위기를 맞게 되면 그때쯤 고통스런 디레버리징과 함께 금욕적으로 성공한 누군가가 성공 모델로 쓰이면서 전환점이 오겠지. 그때까지 쾌락중독에 휩쓸리지 않고 살길을 찾아나가는 것이 개인으로서는 최선이 될 것이다.
청교도 금욕주의는 자산을 사치로 탕진하지 않고 모으는 것이 선이라는 관념으로 초기 자본주의 발전에 큰 축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소비적 낭만주의에 가려 잘 기능하지 않고 있는데 쾌락중독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도록 하는 해법의 단서가 될 것이다. 다음에 더 생각해보자.
내가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행불행이란 개략 이런 형태다. 사람은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간다. 어느 환경이든 거기 적응하면서도 무엇에 이끌릴지 민감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에 대응해서 외부 상황은 +10000~-10000 큰 값의 변화가 가능하나 그걸 측정하는 측정기는 눈금이 20개 밖에 없는 측정기를 생각해보자. 측정 배율을 조정해서 눈금 20에 20000 만큼의 변화를 다 담으려 하면 너무 둔감해진다. 이러면 0과 990을 구분을 못해서 아무것도 안한다. 그래서 변화 측정을 민감하게 하면 이번엔 조금 큰 양수값이 입력되면 금새 측정 상한에 걸리고 음수값이 입력되면 금새 측정 하한에 걸린다. 이러면 환경에 따라서는 항상 상한에 걸려 있거나 항상 하한에 걸려 있어서 구분이 안된다. 그래서 이 측정 가능한 윈도우는 측정 환경이 바뀌면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할 목적으로 바이어스가 조정된다. 주로 입력되는 값이 5000 근방에서 변화하면 5000을 중앙값으로, -5000 근방에서 변화하면 그 값을 중앙값으로 영점이 변경된다. 사람이 다양한 환경에서 적응해 살아가면서도 민감도를 잃지 않고 필요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측정할 수 있는 범위로 측정 윈도우를 영점 조정 하는 것이다. 발화 가능한 감각 신경 세포수가 유한하므로 측정 가능한 눈금수는 한정적인 계측기를 가지고 넓은 범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강한 자극을 받으면 각 신경이 발화되는 수용체 수가 줄어들고 둔감해진다. 자극이 너무 약하면 수용체 수가 늘어나고 민감해진다. 그래서 행복감은 불행의 민감도를 높이고 불행감은 행복의 민감도를 높인다. 행복도 불행도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을 수용체가 받아들여서 느끼는데 그 받아들이는 정도가 금방 영점 조정되어 버린다. 그러면 행복도 불행도 금새 익숙해져버린다.
하한선은 감각 외적으로도 절대적인 의미가 있다. 외부 상황이 너무 안좋으면 생존이 깨져서 죽어버리니까. 그런데 상한은 제아무리 대단한 걸 입력해도 끝없이 올라가며 익숙해져 버려서 절대적이지 않은 감각으로서의 의미만 있다.
외부에서 행불행의 자극을 입력하는 것을 외재적, 내부에서 수용하는 정도를 의도한 방향으로 조정하는 것을 내재적이라고 하자. 측정기의 비유에서는 영점보다 높은 양수값을 입력함으로써 눈금을 끌어올리는 것이 외재적이고 측정윈도우를 낮추어서 눈금을 올리는 것이 내재적이다. 즐거운 것을 취하는 것은 외재적이고 습관적으로 무심코 놓치고 있던 좋은 것에 집중하거나 마음 고쳐 먹고 좋게 생각하거나 절제하는 것은 내재적이다. 높은 양수값 입력에 즉시 영점 조절되는 것처럼 외재적 재화에 의한 기쁨은 즉각적으로 흐려진다. 모든 기쁨은 마약 주입과 본질적으로 똑같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행동 방침은 이렇다. 돈으로 생존을 사고 행복은 스스로 찾는다. 돈은 외재적 재화의 상징이다. 돈과 인기는 대표적인 2차적 보상으로서 외재적인 기쁜 자극을 입력할 수 있다. 그러나 외재적 재화를 통한 입력이 얼마나 높든 익숙해지는 반응은 즉각적으로 시작된다. 행복은 스스로 찾는다는 것은 내재적인 조정을 통해 현재 주어진 일상적 감각을 기쁨이 되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내재적 조정을 통해서 집 현관 복도의 서늘한 공기나 가로수 늘어선 소공원 길가에 파란 하늘이 관광지 대자연 풍광보다 근사해 보이는 것도 가능하다. 받아들이는 나의 기분이 안좋으면 어떤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기 마련인 것처럼. 고통은 외재적 재화로 줄일 수 있다. 생존 확보를 위해선 외재적 재화가 필수적이고, 고통이 생존에 문제가 될 것들에 대한 경보 신호라고 볼 때 외재적 재화로 고통을 소거하는 것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조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때 소요되는 외재적 재화의 양은 흔히 행복을 사기 위해 필요로 하는 외재적 재화의 양에 비해 상당히 작다. 돈만이 아니라 또다른 외재적 재화인 인기도, 인간관계로는 고독감의 고통을 줄일만큼만 의존하고 행복은 내재적인 조정을 통해 찾는다. 현재 생각하는 행동지침, 말하자면 황금률이다. 이렇게 살면 결국 겉보기엔 꽤 금욕적인 것처럼 보이는 삶이 될 것이다. 실제론 딱히 참는 것 아니지만.
전화영어 프리토크는 일상적으로 안하는 대화를 하게 해주는 게 좋다. 오늘은 이런 얘기 했다.
나는 즐겁기 위해 재밌는 무언가를 투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즐거움이란 결국 호르몬인데 뇌는 도파민 세로토닌 분비량에 따라 민감성이 바뀐다. 많이 분비되면 민감도가 떨어진다. 이게 결국 모든 종류의 쾌감에 대해 함께 반응하는 것 같다. 즉 뭐가 됐든 즐거움을 주입하면 역치는 올라간다.
별거 안하는데 재밌는 날이 있다. 출퇴근길 걷고 바람쐬고 밥먹고 하늘보고 엘리베이터로 오는 복도 서늘한 공기 느끼고 애랑 놀아주고 애랑 공부하고 그런데 재밌다. 뭔가 특별히 재밌고 즐거운 걸 해서 재밌는게 아니다. 별거 아닌데 가슴이 뛰고 설레인다. '재밌어야 할 상황이 아닌데 재밌다. 비정상적이군'하는 느낌이다. 추리해봤다. 몇주간 어디 놀러 안가고 유투브 숏폼 기피했고 일상의 범주를 넘는 쾌감 주입 목적 활동을 안했던 때문이 아닐까. 실험적으로 강한 쾌감을 폭발적으로 투입해봤다. 바뀌더라. 똑같은 상황에서 색조가 바뀌는 류의 느낌이었다. 출근길 걷는 거리가 과장된 색조의 총 천연색을 보듯, 휘황찬란한 인테리어된 카페 구경하듯 한 느낌 같았던 것이 잿빛 따분한 색조의 풍경 보는 느낌으로 바뀌고 아이와 놀아주거나 뻔한 집안 활동들이 **귀찮아지더라**. 드러누워서 쇼츠나 휭휭 넘기고 있게 되더라. 뭔가 재밌는 것을 찾아서.
즐겁기 위해선 재미있기 위한 활동을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페인 알콜 니코틴 슈가 등 쾌감 목적 물질 안 즐기고 어릴땐 죽어라 하던 게임도 안하고 사치나 어떤 물건을 통해 보급하지도 않는다. 유투브 숏폼에 취약한 편인데 이것도 가급적 긴 영상과 윌라 오디오북으로 전환한다. 받아들이는 내 상태가 즐거울 때엔 물만 마셔도 맛있다. 내 상태가 그렇지 않을 때엔 맛있는 차를 마셔야 겨우 맛있다. 다음잔도 즐겁기 위해선 점점 더 매니악한 차를 마셔서 자극을 늘려나가야 한다. 난 그 대신 물만 마시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이에 선생이 우리는 일하는 사람들이고 스트레스를 푸는 활동은 있어야 하지 않냐? 넌(나) 뭘하니? 라고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가령 명상은 무언가를 하기 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뇌를 씻는다. 무엇이 일상의 범주로 삼을 만한 활동인가는 결과론에 가깝다. 내가 일상적으로 반복했을 때 실리적으로 유리한 활동이 즐거워질 때까지 뇌를 씻는다. 아들과 놀아주기, 산책하기, 물마시기, 운동하기, 책읽기.
이렇게 생각하는 삶에서 뭔가 즐거운 것들은 일종의 마약 내지는 독이 된다. 미래의 즐거움을 미리 빌려와서 이자를 내는 가불활동이 된다. 또한 지루하다면 뭔가 재밌는 것을 찾는 게 아니라 더욱 재미로부터 멀어져 뇌를 씻어야 한다는 방침이 나오게 된다. 교육에 있어서도 아이에게 즐거움을 넣어주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