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1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학문은 탐구의 협업과정이다.
따라서 학문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탐구방식과 동일한 구조를 갖을 것이다.
개인이 갖는 인간 지성의 한계는 개인의 집합인 학계에게도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탐구는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 보면, 일반적인 학문의 이미지와는 다른 형태다.
학문-특히 과학-은 '가치중립적으로 검증된 지식을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쌓아 올리는 것'이라는 게 일반적 이미지인 반면 개인이 뭔가를 탐구할 때엔(그게 학문이든, 업무든, 인생이든간에) 그와 다른 형태를 취한다.
개인이 뭘 배울 때엔 처음에는 단편적 정보를 모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처음에는 이 다음에 뭐가 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단편들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이 일은 이런 건가?' 하는 감이 온다.
'감 잡았다'고 한 다음부턴 그 감에 맞추어 현상을 확인하고 나서 '이제야 뭘 좀 알겠다' 라고 한다.

여기서 '감을 잡는 작업'이란 '경험을 바탕으로 통찰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잡아내는 작업'이며 이때 경험은 불완전한 지식이고 통찰은 논리적으로 허술한 결론 도출 방식이다.


이런 개인의 방식이 학문의 방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건
학문 탐구의 과정이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개인이 감을 잡는 형태를 보면 감이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형성 되는 게 아니다.
일단 논리적 치밀함은 등안시하고 통찰에 의지하여 개인적이고 귀납적인 접근으로 '이것은 이런 거다'라는 관점을 잡은 후,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감 잡은 내용이 옳은지 확인하기 위해 표적수사를 한다.
개인의 경우에 '감 잡는 것'으로 불리는 것이 과학에서는 '패러다임'으로 불리는 것 일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었다. (책 요약은 별도 글 참조.)

쿤이 말하는 학문에 있어서의 '패러다임'이 개인이 탐구하다가 '감을 잡는' 것과 똑같을 것이라는 처음 생각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학문 탐구의 구조도 개인의 탐구 작업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먼저 전체 골격을 세우는 감을 잡은 후 그 내부를 밝혀 나가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쿤이 미결 과제로 남겨놓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과정'은 개인의 탐구 작업에서의 '감 잡는 과정'(통찰의 과정)과 동일하다.
개인이 낱낱의 경험을 통찰, 즉 전체로써 다루어 감 잡는 과정을 살펴 보면, 사람들은 세상이 유사성의 반복일 거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자의 학문을 보면 무관한 사물 간의 유사성을 찾아서 그 발견한 유사성을 기준으로 탐구하려는 대상의 원리를 찾는 작업이 두드러진다. 이때 서로 무관한 대상들 간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증명은 없다. 가령 식물인 나무랑 인간의 집합인 사회 간에 유사 관계가 있다는 근거는 없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하여 논리적으로 치밀하지 않은 통찰로 먼저 대상의 본질에 대한 감을 잡고 그에 맞추어 다른 대상을 탐구하는 작업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이미지와 멀다. 그러나 학문은 개인의 탐구 과정을 나눠하는 협업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므로 개인이 갖는 인간 지성의 한계는 개인의 집합인 학계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탐구자가 감을 잡는 작업을 대체할 수 있는 논리적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결국 패러다임이란 통찰을 통해 파악한 대상의 본질에 대한 관점이다.
그게 일부 대상, 가령 빛에 적용되는 거면 빛은 물질이다/빛은 횡파다 라는 빛에 대한 패러다임이 되고 세계 전체에 적용되는 거면 세계관이 된다.

이렇게 파악한 학문 탐구 과정을 학문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난다. 일반적 이미지에서 학문은  '학문은 지식의 점증적 축적과정이며 가치중립적으로 검증된 지식을 축적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대상의 본질을 도출한다.'
그러나 실제 학문은 그렇지 않다. 통찰에 의해 파악한 대상의 본질, 즉 패러다임을 먼저 형성한 후, 그 통찰에 끼워 맞추는 표적 수사의 방식으로 탐구한다.

'학문'과 '개인의 일반적인 탐구'(=일상 생활 속에서 수행하게 되는 탐구를 의미한다)와의 공통점이 이렇다면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개인 탐구/비과학학문/과학학문으로 구분하여 서로간의 차이를 분석해보면
개인의 탐구 : 불완전 경험과 통찰에 의존하여 본질을 도출한다.
비과학 학문 : 개인 탐구의 직렬 병렬적 산술합이다. 과학과의 경계는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났는가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통찰들 중 서로 간의 우열을 가릴 분명한 기준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패러다임 장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학 학문 : 과학의 방법론이 갖는 경험 명제에 대한 엄밀함은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패러다임 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 결과로서 패러다임 장악이 이루어진다. 그 분야의 사람들 절대 다수를 동의시키는 패러다임 장악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이유는 경험 명제 검증의 엄밀함 때문이다. 이는 통찰이 내포할 수 밖에 없는 오류를 경험 명제에 대한 엄밀함으로 보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과학 경험 명제의 엄밀함은 올바른 통찰 결론을 도출하게 만들지는 못하나, 두 개의 통찰 결과가 병존할 때에 우열을 가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과학의 방법론으로도 새로운 통찰을 완전히 올바르게 도출해내지는 못한다. 패러다임 전환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두 개의 패러다임이 경쟁할 시에 어느 쪽이 우월한 지를 가리는 것 뿐이다. 이 우열 가름이 패러다임 장악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장악 이후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과학 학문이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개 이상의 통찰 결과가 병존 할 경우에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에 핵심이 있다는 게 내가 한 파악이다.
이는 쿤의 마지막 질문인
'과학의 방법론은 어떻게 지속적 발전으로 이끄는가?'에 대한 내 대답이 된다.
'진화가 목적한 생물체를 향해 변해가는 발전이 아니라
살아 남았기 때문에 발전으로 인식되는 것이듯
과학 발전은 목적한 절대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쿤의 해석은 옳지 않다.
여타 학문과 달리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과학의 특징은 '연역된 것 중에 현실 확인 되거나 독립적 실험으로 재연되는 것 까지를 참으로 인정'하는 참 명제 검정 과정에 핵심이 있는 게 분명하며 패러다임 장악이 가능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패러다임이 장악되면서 정상 과학이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나, 패러다임 장악은 과학 특유의 참 명제 검정 방식의 결과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시기나 성리학적 이기론의 시대에 패러다임들이 끝나지 않는 쟁론을 계속했던 이유는 어느 것이 더 옳은지 우열을 가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경우에는 종교 전쟁등 상대파의 말살을 통해서 우열을 가리려 들곤 했는데 이는 그 이외의 방법으로 도저히 우열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얼마 씩은 옳은 면이 있는 두 개 이상의 통찰이 맞부딪칠 때 어느 쪽이 옳은지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가 과학이 보여주는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남은 것은 패러다임 론의 기본적인 질문이다.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인데 패러다임 이론의 시초인 과학혁명의 구조 책에서는 아직 확실한 답을 보지 못했다.
- 우열을 가려내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는 최초로 우열이 가려지는 패러다임 통합의 시기에 열쇠가 있을 것이다.
운동연구는 아르키메데스에서 패러다임 통합. 광학은 뉴턴, 전기는 프랭클린, 열은 블랙, 화학은 보일과 부르하베에서 패러다임 통합.
아르키메데스는 지레와 물에 뜨는 물건의 실험으로써 역학 패러다임 통합을,
프랭클린은 전기에 대한 실험을 통해서 전기가 유체라는 패러다임 통합을 이룬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기 패러다임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실험의 존재다.
통찰을 현실에 응용하는 실험은 비록 그 실험이 해당 이론에 대한 완전한 검증은 되지 못하더라도 경쟁 이론과의 우열을 가리는 잣대가 되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꿔 말하면 근거를 실험으로써 댈 수 없는 통찰들끼리 논쟁을 하는 것은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 어렵다는 뜻이 된다.
- 장기간에 걸쳐 발견되는 이상 현상은 언제 패러다임을 위기 상황으로 내모는 현상으로 기능하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쿤은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이는 이상현상이 위기상황을 만드는 것은 기존 패러다임 내부만을 관찰해선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렇다면 경쟁 패러다임과의 설득력 문제로 연계해서 봐야 할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기의 특징은 모순에 빠지는 기존 패러다임이다. 즉 구 패러다임의 설득력 약화다. 이 상황에서 신 패러다임을 들고 나오는 것은 언제나 그 분야의 신참이다.
아직 구 패러다임을 습득하지 못한 '감 못잡은' 신참들에 의해 잠재적 경쟁 패러다임은 산발적으로 생성될 것이다. 패러다임의 안정기에는 이 신참들의 통찰을 잘못된 이해라고 하여 무마하고 올바른 이해로의 흡입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위기 현상들이 누적되는 가운데에서는 신참이 들고 나온 새로운 이해를 잘못된 이해로 치부하는 것이 점점 흡입력을 잃어가므로, 산발되는 신참의 '잘못된 이해'들을 동력으로 위기 상황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노크 노트 > 세계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양 교육  (0) 2013.07.03
우연에 작용하는 의지  (0) 2012.09.03
과학 혁명의 구조 - 책 요약  (2) 2012.06.01
인문학은 무엇인가?  (1) 2012.05.22
종교와 효율성  (0) 2012.05.05
Posted by 노크노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