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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humanities)은 '신학이 아닌 학문'으로서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때 학문 그 자체였던 인문학의 정체성은 자연과학의 융성과 더불어 '자연과학이 아닌 학문'의 의미를 갖으며 분명해지다가, 근래에는 사회과학과도 구분되어 가는 중이다.
인문학의 범위에 대한 정의는 이견이 있으나 크게 문사철(문학 역사학 철학)을 주로 인문학으로 분류한다.
이상을 바탕으로 한 내 견해는 이렇다.
- 신학과 구분되는 인문학 : 신학, 즉 종교와 인문학은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접근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치관의 문제에 대해 신학은 하달된 진리를 이해하려 하는 형식을 취하고 인문학은 쌓아 올라가 도달하려는 형식을 취한다.
-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구분되는 인문학 : 인문학은 자연과학/사회과학이 분화되어 나간 후 '남은 학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인문학에 대한 비하가 아니다. 인문학의 가치는 그 분화되지 않았음에 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분화될때 '지식 탐구에 대한 질문'만을 테마로 분화되었기 때문에, '가치 탐구에 대한 질문'은 아직 인문학으로부터 분화되지 않은 인문학의 과목들 속에 섞여 남아있게 되었다. 인문학의 가치는 인문학이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 '생은 어떤 의미를 갖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즉 물리학부터 사회과학까지를 지식에 대한 질문만을 판단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인문학은 가치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 내 견해다.
가치는 사실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도출된다. 지식의 총체로부터 올바른 가치 판단이 가능하며, 일부분만 알면 가치 판단이 틀려진다. 즉 가치판단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면 사실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끌어모아야 한다. 인문학이 가치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 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인문학을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과거엔 신에 대응하는 개념이었지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올바른 가치 판단을 위해선 인간 외적인 사실에 대한 지식만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가치 판단의 주체인 인간에 대해서 또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타 학문들은 왜 지식 추구의 주제만을 가지고 분화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선 학문의 분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러 방면에서 지식을 끌어 모으다 보면 통찰에 의해 '이건 이런 것일 거다'라는 감이 온다. 이 '감'은 인생이든 뭐든 '하다보면 감이 오는' 그 감과 완벽하게 똑같은 구조다. 그게 패러다임이다. (세상은 쪼개지지 않는 작은 요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다. 빛은 물질이 날라가는 것 같다. 전기는 유체같다.)
그 감이 제법 들어맞는 것 같다는 설득력을 얻게 되면, 패러다임이 한 분야를 장악하게 된다.
그때부터 학자들은 패러다임에 기반해서
1. 패러다임을 낳게 한 배경이 된 사실을 확인하고 (빛이 횡파라는 주장을 한 사람의 실험을 재연해보고)
2. 패러다임이 현실에 예측해주는 추정들을 확인하고 (빛이 물질이 날아가는 거라면 빛을 가했을 때 압력이 있겠지?)
3. 대략적인 감인 패러다임을 정밀화한다. (물질간 인력이 있는 듯하다. 그럼 인력의 비례상수는 얼마?)
이는 답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문제들, 즉 퍼즐이다.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나면 그 분야는 이 퍼즐 풀이에 전력하게 되는데, 이를 normal science 라고 하며, 정상과학이라고 번역한다.
퍼즐 풀이의 단계가 노말 사이언스 라고 불리는 이유는 과학 탐구의 본질이 퍼즐 풀이이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시간적으로 대부분의 학자는 퍼즐 풀이 단계에 일생을 바치며, 패러다임 변경의 단계, 즉 '새로운 감'을 내놓는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단계를 과학 혁명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성이 논리적 필연 보다는 지식 경험을 종합하는 통찰에 의한다는 것을 주의하라. 통찰에 의한 지식은 틀릴 수 있고, 그래서 매 패러다임은 완벽하게 옳지 못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될 여지를 남긴다.)
학문 분야는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날 때 범주가 확정된다.
별의 움직임이 수학 법칙을 따른다는 패러다임이 장악하자 천문학과 점성학은 별개의 분야가 되었다. 금이 합성 불가능한 원소라는 패러다임이 장악할 때 화학과 연금술은 별개의 분야가 되었다. 생명활동이 화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패러다임이 장악할 때 생물학과 화학은 생화학이라는 독립 분야를 낳았다.
즉 지식을 쌓는 활동을 하다가 '이거는 이런거 같다'라는 감이 올 때 그 감을 확인하고 심화하는 퍼즐 풀이 활동이 학문의 분화를 이뤘다.

가치 판단의 측면에서 볼 때 의미가 있는 것은 '이것은 이런거다' 라는 통찰, 즉 패러다임이다.
과학활동, 즉 퍼즐풀이과정에서 얻어지는 지식은 패러다임을 확인하고 정밀하게 할 뿐이지 그 패러다임을 기초로 하는 가치판단을 뒤집지는 못한다.
학문 분화를 이끌어 낸 패러다임들은 대상에 대한 통찰의 산물이다. 가치판단에는 대상에 대한 통찰과, 동시에 가치판단 주체에 대한 통찰이 모두 필요하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통찰인 패러다임을 주제로 하여 분화된 학문들은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은 인문학에서 분화되지 않고 남아있는 학문들 속에 뒤엉켜 남아 있다.

연역만으로 이루어진 수학, 연역과 현실확인으로 이루어지는 물리학, 연역되지 못하나 실험적으로 항상 재연되는 사실에 대한 화학, 가정 위에 출발하여 통계적으로 탐구하는 사회과학, 가정 위에 출발하여 사유만으로 탐구하는 인문학, 하달 진리인 종교.
향후 학문이 발전하면 학문 분야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인문학에 속해 있던 학문이 사회과학으로, 혹은 사회과학에 있던 학문이 자연과학으로 위치를 변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후까지 인문학이라 불릴 영역에는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은 '가치관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추구'가 될 것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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