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이 되어라.
아니면 초인의 전조가 되어라.
초인은 벼락같은 것이다. 벼락이 치기 전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바람은 벼락의 전조다. 초인을 부르는 비바람이 되어라.
초월적 가치를 잃은 인간은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의 여신을 세운다. 삶과 건강을 통해 이룰 초월적인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건강을 목적으로서 추앙한다.
그리고 건강을 위한 건강에 매달려 먹고 싸는 인생을 살며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일어났다.
난 모태무교다. 종교는 없지만 천주교랑 불교는 뭔가 경건해보이고 개신교 신도가 세뇌스러울 경우에 한해서는 맞장구쳐주기 짜증나고 누가(주로 개신교) 종교 얘기 꺼내면 왠만함 그런 얘긴 하지 말지 싶은, 딱 그 정도의 배경에서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아직도 그러고 산다.
그래도 난 스스로 종교적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초월적인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면 그 사람은 종교적인 인간이 될 소질이 있다.
그것은 예술과도 맞닿아 있고 도덕과도, 혹은 학문적 진리추구와도 맞닿아 있다. 초월적가치는 진선미성중에 성스러움에만 국한되는게 아니며 그중 성스러움 조차도 꼭 인격신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종교적 가치의 긍정적인 면에 있어 중요한 건 어떤 신을 섬기느냐가 아니다.
종교의 '어떤 신을 섬기느냐'로 구분되는 측면은 긍정적인 영향을 낳은 적이 거의 없다.
종교의 긍정적인 면모를 낳는 것은 초월적 가치를 긍정하느냐 여부다.
종교는 가르침을 이야기에 담아 내놓는다.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의 이야기를 내면화 하면 가상의 기록이 독자의 인지 내적으로는 살아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종교의 이야기는 신자에게 살아있는 이야기가 됨으로써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살아있는 상태로 전달한다. 종교의 이야기는 가르침을 소화흡수 가능한 형태로 조리해 놓은 포장이다.
어떤 신을 믿느냐는 것은 종교의 '이야기'이다.
초월적인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는 방향성은 종교의 '가르침'이다.
종교의 본질이 가르침에 있기에, 가르침을 습득했다면 이야기는 중요한게 아니다.
(이 주장은 기독교도는 동의 안할듯하고 불교도는 동의할 듯 하다. 교리상 기독교는 '이야기'도 믿음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고 불교는 이야기는 다 가르치려고 사용한 방편이라고 하므로.)
과학이 신이 된 시대다.
사람들에겐 이기는 편에 붙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 이기는 편 우리편, 지지정당은 집권여당.
근래 영역을 확장해온 과학은 분명 이기는 편 이었다.
그런데 이기는 편에 붙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과학이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과학은 대중에게 새로운 신앙이 되었다.
이 과학숭배신앙은 묘한 병폐를 낳고 있다.
과학을 신으로 숭배하면 그 신이 사실이라고 알려주는 이야기는 신화에 해당하는데
종교였다면 그 이야기 안에 가르침이 담겨져 있을 것이나
과학은 종교가 아닌지라 이야기를 까보면 안에 가르침이 담겨있지 않다.
그래서 과학을 숭배한 사람들은 '없다'를 가르침으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즉 삶에 있어 초월적 가치의 상실이다.
그들은 그렇게 니체가 얘기했던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을 여신으로 세우고 행복을 발명했다 주장하는 경멸적 인간들'이 되어간다.
이런 징후는 지식의 끝자락에서 더 높이 올라가려고 애쓰는 과학자들에게서 발견되진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데 정신이 팔려있다는 면에서 초월적 가치를 추구한다.
혼란은 단편적 지식으로 세계관의 전체를 조망하려 하는 추종자들에게 일어난다.
건강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더 나은 가치를 갖는 삶이 되는가?
그들에겐 이에 대한 답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월적 가치란 없는 것이 답'이라는 가르침을 과학 신화가 담고 있다는 믿음이 그 신앙의 교리다. 그들의 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걸 추종자들은 믿지 않는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문제일 수가 없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는 이과의 교과목중 하나인 학문이지만, 사실은 과학은 '어떻게 하면 틀리지 않은 지식을 효율적으로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의 이름이다. 지식을 축적함에 있어 틀린 지식이 섞여들 가능성을 너무 배척하면 탄탄하되 쌓아 올라가는 효율성에 한계가 오고, 쌓는 속도에 집착하면 잘못된 지식이 섞여든다. 그 정확성과 효율성 사이에서 합당한 지점을 합의한 방법론의 이름이 과학이다.
연역된 지식은 논리적으로 참이다. 귀납적 지식은 언제라도 반례가 등장해 뒤집힐 수 있기 때문에 연역된 지식만이 참이라는 합리주의자의 주장에 대응하여 '인간의 논리 이성 체계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미친자는 자기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모른다) 경험된 것이 참이다'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가 등장했다.
(합리주의자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선 경험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사상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말로 문맥에 맞춰 번역하면 사변지상주의자라고 하는게 더 맞지 않나 싶다.
경험주의에서 '경험도 귀납적이므로 뒤집힐 수 있다' 쪽으로 가면 회의주의 불가지론자가 된다.)
경험된 모든 것이 참은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참인 명제를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합의점을 찾은 '경험주의의 일부'가 우리가 아는 과학이다. 이 방법론은 성공적으로 모태인 철학의 위상을 넘어섰다.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검증된 명제에 대해 참이라고 하는 것이 물리학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지식을 쌓는 속도 효율성의 한계에 마주친다.
화학원소 주기율표는 원자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하는지 해명되기 전부터 관측되었다.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연역되지 않았으므로 화학은 과학으로 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과학은 비록 연역적으로 도출되지는 않았더라도 독립적인 실험으로 재연이 가능한 명제까지는 참으로 치기로 한다. 이제까지 재연되던 경험이 갑자기 다음 실험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틀어지면서 틀린 지식을 쌓게 될 위험은 무시할만큼 작은 것이라는 까닭이다.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확인되거나, 실험으로 재연가능한 지식을 참으로 여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과학의 방법론이다.
사회과학은 독립적인 실험이 어렵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 방법론을 따르기는 어렵다. 지식 축적의 효율성을 위해 다소 널럴하게나마 가능한 한계내에서 과학 방법론을 참조하여 쌓아올라가겠다는 것이 사회과학의 방법이다.
지식축적을 탑에 비유하면 물리학은 지상에서 시작한 1층, 화학이나 생물학등은 허공중에서 시작한 2층, 가정위에 통계적 방법을 이용하는 사회과학 역시 허공중에서 시작한 3층, 가정위에 사변적으로 탐구하는 인문학은 더 널럴한 4층, 종교는 5층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 화학의 주춧돌은 물리학으로부터 연역증명되었고 서로 미시-거시의 관계로 합치되었다. 이제 화학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온 셈이다.
다른 학문간의 합치는 아직이다.
다른 모든 지식이 종국에는 1층에서 시작한 과학으로 환원될 것이라는 주장이 통일과학운동이며 환원주의라고도 한다. 과학의 방법론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이었는지(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론이었다)가 검증된 지금, 모든 앎을 과학 방법론에 의지하여 풀어나가자는 주장은 지지를 받을만 하다. 3층의 사회과학까지는 제한적이나마 과학 방법론에 의존코자 하고 있으므로, 4~5층의 종교나 철학이 과학 방법론을 이용하지 않고자 한다면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그것이다.
세계관의 세부를 사변적으로 밝혀내고자 접근한 시도는 고대부터 여럿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실패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세상이 원소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원소가 공기라는 둥 땅물불바람이라는둥 하고 있을때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뭘 모르는 지를 알라.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며 그러한 사변적 시도가 성공할 수 없는 것임을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는 저녁 노을은 왜 붉고 저녁해는 왜 크게 보이는데도 추운지 하는 질문에 '네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여라. 그것이 아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석가모니는 다른 종교가가 세계관의 지식에 대해 불교는 어떻게 가르치냐는 열가지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는 (십무기) 대답을 했다.
이 대답들의 맥락은 모두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관의 지식에 대해 사변적으로 접근하지 말라.'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그것은 과학의 할 일이다.'
석가모니/공자/소크라테스등 종교/철학가들이 객관적 지식 축적은 과학의 할일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은 그 외적인 일을 한다는 말인 셈이다. 객관적 지식 축적 이외의 일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가치관 이라고 생각한다. 가치관은 삶의 방향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가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 앞서 종교가 '이야기' 속에 담아 내놓은 '가르침'이란 이것이라는 게 내 해석이다.
가치관은 전체적으로 조망된 세계관으로부터 도출된다. 과학은 세계관의 세부지식을 오류 없이 쌓아나가지만 그 지식이 편중되거나 미완성일 경우 가치판단에는 오류가 생긴다.
(어느 음식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대요! 라는 지식은 그 음식을 멀리 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그런데 다음날 같은 음식에서 항암물질이 발견된다면? 앞의 지식은 틀리지 않으나 판단은 틀리게 된다. 전체적인 이해를 하지 못한 지식은 틀린 가치판단을 유도한다.)[a]
그럼 과학의 지식은 편중되거나 미완성이어서 세계관을 조망하기에 합당하지 않을까? 합당치 않다는 증명이 되거나, 아니면 심증 삼을 징조라도 있는가?
나는 다음의 것들을 그러한 징조로 여긴다.
기존의 가치관은 연역된 게 아니며 논리적으로 허공중에 떠있는 것이다. 이에 만약 기존 가치관념들을 모두 부정하고 과학지식에 근거한 가치관념만으로 가치체계를 정립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캐릭터가 있다. 빅뱅이론의 쉘든이다. 과학방법론으로 검증된 지식만으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나면 그로부터 도출된 가치관은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많은 형태가 되는데 쉘든은 그 치밀함과 허술함이 병존하는 철골구조 건물같은 모습으로 웃음을 준다. 쉘든을 보며 웃음이 나는 만큼이 과학 지식으로 정립된 세계관의 빈틈이다.
또한 과학에는 가치중립성이라는 말이 따라붙곤 한다. 지식을 근거로 가치판단이 바꾸는데 가치중립적인 지식이란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굳이 가치중립성이라는 주장을 해야 했다면, 그 배경에는 과학지식을 가치 판단의 총체적 구조물인 현실 생활에 적용했을 때 뭔가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 것(적용한 주체가 과학자든 정치가든 일반 대중이든간에)을 누차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가치중립성이라는 주장 자체가 과학으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조망하기엔 이르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사회 현상이다. 앞서의 두가지 징조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신앙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그게 문제가 있다면 틀린 가치관이 야기하는 부작용도 관찰될 것이다.
난 '피로사회'가 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생의 서사적 의미를 잃어버리고 지켜야 할 것은 오로지 몸뚱이 만이 남아 건강을 여신에 자리에 올리고 그 건강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는' 피로사회의 구성원들, 그들은 항상 지쳐있다. 무의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빨리 지치기 때문이다.
생에 초월적 가치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때 지쳐버리는 현상을 상시 체험하게 된다. 피로사회가 지적하는 우울증 등의 현대의 질병. 이것이 세번째 징조다.
세계관의 세부지식을 사변적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그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와 동시에 세계관을 정립하기에 부족한 지식 체계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조망하면 틀린 가치관에 이른다.
잘못된 가치관이 개인에게 미치는 타격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잘못된 지식보다도 직접적이다.
여기까지는 과학으로 가치관을 정립하면 틀린 결과를 얻는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올바른 가치관을 얻을 수 있을까?
무엇이 올바른 가치관인가를 탐구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록 증명되지 않은 허공중에 토대를 두고 시작하지만 위로 쌓아 올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달진리다.[b]
쌓아 올라가는 방법이란 '4층의 인문학'이고 하달되는 진리를 이해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5층의 종교'이다. 여기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서두에서 얘기한 초월적 가치 무엇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한다면 그게 곧 인문학이고 종교적 고민이 되기 때문이다.
먼저 종교부터 얘기하겠다.
만약, 하층의 지식이 5층의 종교에 이르러 저층 고층간 합치를 완전히 이룬다면 그때 증명해야 할 것은 종교의 '이야기'(신화)가 아니라 가르침, 가치관일 것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방향성과 생의 초월적 가치가 그 하층의 지식과 일치해야 종교는 사기가 아닐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종교적 진리에 대해 최소한의 검증방안으로 다음을 모색할 수 있다.
1. 종교 내적 모순 없을 것.
2. 현실에 대한 설명이 검증된 지식과 모순 없을 것. 또한 '4층의 인문학'과 모순 없을 것. (저층 고층 합치)
1번. 내적 모순 없음.
이것은 판타지 문학에 조차도 요구되는 사항이다.
앞서 종교가 '가르침을 이야기에 싸서 내놓은 것'이라고 해석한 것은 종교에게 '현실에서 지속 가능한 판타지'라는 지위를 준다. 의외로 이것은 종교의 위상에 대한 비하가 아니다. 문학은 그 작품내에 현실에서 지속 가능한 삶의 진리(가치관)를 담을 때 명작으로 추앙받는다. 판타지/SF 소설은 '마법이 없는 세상에서는 지속하기 어려운 진리(가치관)'를 담아내곤 하기 때문에 하위문학으로 치부되곤 하는데, 그 와중에서도 현실 지속 가능한 가치관을 담아내는 판타지소설은 다시 걸작 대우를 받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는 현실에 지속 가능한 판타지이며, 이는 '종교가 단순히 판타지 서술이라면 굳이 여타 판타지물과 구별되어 특별한 위상을 가질 이유가 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된다.
2번. 검증된 지식과의 모순없음.
저층지식과의 합치. 즉 종교는 그 가치관의 올바름을 인문학 앞에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말을 현재 맥락에서 (초월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을 향해) 다시 말하면 이렇게 된다.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방향성이 합당한지 증명해야 하는 대상은 일차적으론 바로 아래에 있는 인문학이 먼저다.
과학이 3층의 통계적 사회과학과도 합치(혹은 반증)하지 못한 채로 5층의 종교 가치관이 옳은지 틀린지 환원 증명하는 시도는 세계관 조망이 불가하여 반드시 틀린 결론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 남는 것은 인문학이다. 인문학적 가정위에 출발하여 실험없이 사유로 진척시켜온 인문학은 어떻게 그 참됨을 증명하느냐가 남는다. 그리고 그 대답도 앞과 유사하다. '인문학이 스스로 조직적인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대상은 일단 통계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는 사회과학 지식과 합치이지 그보다 아래에 있는 생물학으로 환원하는 시도는 이르다.'
이상의 배경에서 내가 결국 도달한 곳은 불교가 제시하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 종교인이 따르는 총체적 가치관이 인문학적 잣대 앞에 제단되기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리학이라는 저층 지식과 합치된 화학(물리학보다 더 널럴한 기준으로 토대를 쌓은 지식체계)이 물리학과 거시-미시적 관계를 이루며 저층 지식에 합류하듯, 종교가 저층지식과 합치되는 그 날에는 종교의 가르침도 과학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과학'은 지금의 '이과 교과목의 한가지'가 아닐 것이다.
[a] '세계관의 조망'이란 이런 의미를 갖는다. 지식을 더 알면 더 알수록 더 정확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게 되고, 지식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더 부정확한 가치 판단을 하게 된다. 환원주의적으로 과학이 종국에는 모든 학문을 합치or반증할 것이라는 주장은, 역설적으로 과학은 아직 그 학문의 지식들을 내포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가치관을 도출하기에 부족한 상태라는 의미가 된다. 현재 과학 지식에서 도출된 가치관 체계를 적용한 개인은 허술하고 우스꽝스런 캐릭터가 되며, 적용한 사례들은 엉뚱한 결과가 나와서 '가치중립성'이란 개념을 고안해야 했고, 적용한 사회는 '피로사회'의 부작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론적이로도 사례적으로도 같은 의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b]지식의 상향 추구에서는 세계관에서 가치관이 도출되나, 하달 진리인 종교의 경우에는 이 순서가 역전된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종교적 가치관은 하달된 진리이고, 종교적 세계관은 그 가치관을 담아서 설명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가령 불교는 '종교는 세계관 지식에 대해 함구하는 편이 옳다.(십무기) 가르침은 비유와 방편을 통해 설명하고 있으나 이 비유와 방편은 단지 가르치기 위한 것이니 있는 그대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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