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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낳고나면 아이들 사고에 유난히 이입이 된다.
내가 진정 자신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자식이 잘못되는 본능적 공포가 내가 잘못되는 공포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아이가 사고를 당하는 순간에 대한 아찔함과 그 후를 살아야 하는 공포, 세상 사람의 태반이 부모로서 경험이 있고 이 감정을 공유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참사중에서도 아이들의 사고에 더 쉽게 감정을 이입한다.
아이들의 사고에 무덤덤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 뿐이다.

전원 구조했다는 학교측의 발표를 듣고 아이들 데리러 갔다가 생존자명단 앞에서 무너진 부모들의 이야기가 뉴스에서 나오던 때
그 마음에 이입하기가 괴로워 다른 생각을 했다.
어쩌면 아이들이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구조가 늦어지는 현장의 뉴스가 나올때 그 좌절감을 내게까지 끌고 오기가 싫어 TV를 껐다.
불운한 사고는 어디서나 날 수 있고, 간절한 입장에서 볼땐 구조는 언제나 미흡해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불행한 사고에 나라탓을 하는게 과연 옳은가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근래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수련회, 신환회, 수학여행, 수백의 아이들이 연거퍼 안전사고속에 사망했다.
이를 바라보는 양쪽의 시각은 주간지 제목을 보면 드러난다.
한쪽 끝에는 주간조선이 있다. 제목은 '수학여행 꼭 보내야 하는가.'
다른 한쪽 끝에는 한겨레가 있다. 침몰하는 배를 배경으로 제목은 '이것이 국가인가'
그 사이에 경향같은 곳은 '도탄에 빠진 대한민국' 정도로 사실만으로 절충한다.

혹자는 조선과 한겨레를 비웃고 무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시각차가 문제의 핵심을 관통한다. 문제의 본질이 '이윤에 밀린 안전'에 있기 때문이다.
20년 연한이던 배의 수명을 30년으로 늘린 것도, 선장이하 승무원들을 책임감없는 1년 계약직으로 채운것도, 그들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물탱크를 가볍게 하고 짐을 더 실은 것도 모두 이윤 추구에 안전이 밀린 결과다. 등안시된 안전은 가장 값싼 곳에서부터 이용자를 위협해온다. 이윤 그릇의 밑바닥을 긁어 모으면 피가 묻어난다.
왜 하필 아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는가. 학생 단체손님은 가장 싼 시설을 이용하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어른은 몸이 뻐근해서라도 이용하지 못할 건물과 배를 아이들은 이용한다.

조선이든 한겨레든 여기까지는 같은 것을 보고있다. 그러나 해법이 다르다. 수학여행이 아니었다면 죽은 학생들의 대부분은 서울에서 제주도를 갈때 허름한 배가 아니라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또 학생단체로 움직인 게 아니었다면 눈에 깔려 무너질 창고같은 건물에 머무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새끼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문장을 읽어보자. '왜 그렇게 못살지 않는 우리 아이가 위험한 수학여행을 따라가지 않으면 결석처리를 당해야 하는가.' 수학여행 과연 꼭 가야 하나.
주간조선이 수학여행을 지목하는 건 이런 맥락이다. 심지어 부모들 중엔 이에 동의하는 사람도 제법 있을 것이다. 이 관점하에선 하층민은 위험에 노출되겠지만, 그들은 내 자식이 아니다. 학생단체, 이른바 공공의 이름으로 한데 묶이는 것이 내 아이를 위협한다면 한데 묶이길 강요 받도록 내버려 두면 안되는 거 아니겠는가.

반대편 끝의 '이것이 국가인가'를 보자.
사업자 개인은 이윤 경쟁속에서 생존해야 하고 이들에게 이윤보다 안전을 강요할 주체는 오로지 국가 뿐이다. 국가가 이윤친화적이 될 때 안전이 이윤에 밀리는 것은 개인의 양심으로 커버할 수 있는 레벨의 현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누구의 책임인가?
안전 대신 이윤을 택한 과실은 모두가 함께 누리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으리라. 하지만 이것도 생각해보자.
한국은 21세기에만 두배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삼성은 휴대폰시장에서 무려 애플을 재꼈고 현대차의 도약도 엄청나다. 21세기 한국 기업의 위상은 20세기 한국 기업의 위상에 겨우 두배 정도가 아니다.
이 배경엔 국가의 역량을 대표기업 몇개에 몰아준 시스템이 있다. 그리고 혜택이 공유되었다고 하기엔 '낙수효과란 없었고', '가계부채는 크게 증가'하기만 했다.
국가는 무엇인가.
나라를 대표할 기업 몇몇이 승승장구 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시스템으로서는 기능하면서
안전을 감독하고 사고에서 구조할 책임마저 이토록 소홀히 한다면
도대체 이것이 국가인가.
그게 또 하나의 관점이다.

공공으로 묶인채 당하는 사고를 피하기 위해
공공을 더 낫게 만들것인가
공공을 탈출할것인가.
이 두 시각차는 이 시대의 뜨거운 쟁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차이의 틈새에서
난 아이들의 연이은 안전사고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고교단체수학여행 못가게하고 나면
대학 신입생 오티도 못가게 해야 하고
그지같이 싼곳들로 다니는 대학생 엠티도 못가게 해야한다.
그러다보면 이 방향의 끝에선 결국 자기 계층에 맞는 그룹과 다니는 게 정답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아까 뉴스엔 '값싼 단체 수학여행 위험하니 소수 조별 수학여행을 가라는 지침서가 나왔는데 학교측에서 비용이 너무 들어서 불가하다고 하자 감독기관이 방치했다. 그게 사고 원인이다.' 라는 보도가 나오더라.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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