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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 만화에 패러디 된걸 보고 `중2병이지만 사랑이 하고 싶어` 봤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찾아봤더니 같은 회사에서 만든 거였다.
하루히 시리즈가 현실을 거부하는 여자아이에게 온 세상이 휘둘리는 설정이라면 중2사랑은 불면 날아갈까 여리여리하게 약화된 버전의 하루히 이야기다.
화자격인 남자 주인공은 여기나 저기나 느낌이 비슷하다. 양쪽을 다 이해하며 괴짜 여자아이와 현실 사이의 통역이 되어준다. 괴짜 주인공을 이해하기에 너무 나갈때 커트를 해줄 수도 있고, 그러면서도 괴짜스러운 행동을 이해하여 받아줄 수도 있다. 외부세계와 소통단절을 겪기 마련인 괴짜의 입장에서 이상화된 백마탄 왕자님인 셈이다.

`닝겐주제에.`(`인간주제에.`) 인간보다 높은 체하는 중2병스러움을 대표하는 대사다. 동시에 이는 인간 이해의 열쇠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도 외부 환경의 흐름에 떠밀려 수동적으로 살아가곤한다. 인간의 부조리는, 그 와중에서도 완벽하게 유물적이 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인간은 완벽한 속물이 되면 자아가 죽는 것을 느낀다. 외부 입력에 대한 당연한 출력으로 반응하기를 완벽하게 한다면 그 사이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 주어지는 감각적 쾌락을 쫓고 타인의 가치관(`수입이 좋은 직업`처럼 좋다고 하니까 좋은거겠지 하는 것)에 몸을 맡겨 자아에 대해 생각하기를 아무리 멈추고자 해도 공허감은 남는다.
거부하기 힘든 외부 환경의 격류속에서 자기는 떠밀려가는 나무조각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으나 어찌 해야할지 방법을 모를때, 그것이 어설픈 중2병이 된다. 미약한 닝겐주제에 자유의지를 증명하고자 하는 첫 시도다.

마지막화에서 `남들은 할 수 없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자!`라는 열정적인 연극부 부장을 보며 서브-히로인은 `우에에- 중이병`을 느낀다. 외부 현실 환경의 격류속을 단지 떠내려 가지만은 않겠다는 태도에서 중이병과 공통점을 느끼는 거다.
히어로는 히로인에게 `시시한 현실에 매몰될 것인가? 나와 함께 현실을 바꿔보지 않겠는가!`라고 외친다. 환경의 거센 흐름 속이지만 떠내려가지만 말고 자유의지로 헤엄쳐나가 보고 싶다는 것이 중이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성장중의 첫 시도라서 헤엄치는 바른 방법을 모른다는게 중이병을 그렇게나 꼴사납게 만드는 문제지만 말이다.

중이병이 `닝겐 주제에` 환경의 격류에 저항하려한 서툰 연습이라면
종교의 발생 역시 이와 원인을 함께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세계관은 가치관을 만든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가치관에는 뒷받침할 근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왜 옳은지. 그것이 왜 이익인지. 그것이 왜 가치있는지. 뒷받침할 세계관이 없는 가치관은 허무하게 침식되고, 그 뒤에 남는 것은 세속의 속물적 자아와 자기의 속물성조차 감당못해 느끼는 공허감, 곧 자유의지의 절망과 자아의 죽음뿐이다.
종교는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는 현실과의 접점에서 가치관을 낳는다.
사왕진안과 관리국과 불가시경계선의 설정도 고유한 가치관을 내포한다. 교리학자들에 의해 다듬어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종교도 본질은 같다. 중이병 설정에 비견한다고 해도 종교의 존재를 모독하는 발언인건 아니다. 박태환이 하는 것도 맥주병 몸부림도 현실의 흐름에 익사하지 않기 위한 헤엄이긴 헤엄이라는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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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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