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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노트/인간관과 가치관'에 해당되는 글 34건

  1. 2013.04.10 행복이란 무엇인가? 3
  2. 2013.03.31 자유의지와 초월적 가치
  3. 2012.02.28 예술이란 1
  4. 2011.02.02 본능과 자유의지가 이루는 인격 1
행복이란 무엇인가?


1.
"사람의 행동의 목적은 크게 두가지로 귀결된다.
생존과 번식."

쉘든이나 할 것 같은 말이지만 꼭 쉘든만 하는 말은 아니고 이 주제로 소설도 나와서 뜨고 그랬다.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이란 책. (내가 알기론 오리지널은 만화의 미래라는 책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면서 나온 말이다. 1990년대작.)

사람의 행동이 생물로서의 필요성으로 귀결된다면 이건 일렬종대 개미행렬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가끔 생물로서 아무 쓸데없는 짓을 하는 생물학적 광인들이 출현한다.
이들은 일렬종대에서 빠져나와 쓸데없는 걸음을 하고 행렬 안에서 보이지 않는 바깥 세상을 보며 행렬안의 개미들을 관찰하고 때론 답답하게 여긴다.
우리는 이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들의 행위가 예술이며
그 걸음의 궤적이 예술작품이다.
예술은 그 쓸모없음으로 인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증거한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무엇인가?
구분 짓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어떤 개미는 먹이를 향한 일렬종대에서 빠져나와 제자리에서 두바퀴 돌고 가던 길을 갔다. 알고보면 대부분의 인간 개미들이 완벽하게 목적지로 향하지만은 않는다. 생물의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조금씩 쓸데없이 취향을 반영하고, 쓸데없음의 예술을 하면서도 조금씩' 팔릴 예술'을 추구한다. 생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순수예술가란 몇몇 특별히 미친 자들을 제외하고는 없다. 비예술속에 예술이 있고 예술속에 비예술이 섞인다. 그 경계는 개미의 걸음이 옆걸음 몇발짝부터 예술이냐고 하는 것만큼이나 흐리다.

2.
굶고 싶지 않다면 밥을 향한 일렬종대에 끼어 걸어야 한다.
밥에는 낚시바늘이 들어있다는 말처럼,
생물이기에 갖는 생존과 권력과 쾌락에의 욕망은 사람의 자유의지를 제약한다.
그런데 사람의 자유의지를 제약하는 것은 내적 제약만이 아니다.

사람은 환경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변수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관점에 서 있다.
성공으로 가는 직통 코스를 밟고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당장 내일 덜컥 병에 걸려 쓰러질 수 있다.
소상히 알고보면 병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니 우연히 걸리는 것이 아니지만 모르는 관점에선 우연한 사건일 뿐이다.
아무리 성공할 수 밖에 없는 행동을 하며 살아도 우연히 실패할 수 있고
아무리 성공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행동을 하며 살아도 우연히 성공할 수도 있다.
사람은 인과의 모든 변수를 알 수 없고, 그렇기에 환경은 우연처럼 예측불가하게 몰아친다.
환경에 떠밀려 살인자가 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자유의지가 있다 한들 예상할 수 없는 환경의 흐름 앞에서 사람은 그저 떠밀려 가기 일쑤다.
내적으로 생존과 권력과 쾌락에의 욕망, 외적으로는 우연한 사건의 압박은 환경의 격류가 되어 사람을 몰아간다.
환경의 격류속에서 사람은 한줌밖에 되지 않는 자유의지로 버둥거리지만
대부분 환경을 거스르지 못하고 격류속의 나무가지처럼 흘러가곤 한다.

인간의 부조리는
그 한줌짜리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고 완전한 유물론자로서 살아가려 하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공허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환경의 압박에 떠밀려만 가는 한,
사람은
생존을 쫓지만 생존해도 공허하고
권력을 쫓지만 권력위에서도 공허하고
쾌락을 쫓지만 쾌락에도 불구하고 공허하다.

3.
자유의지는 외부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자유의지를 갖는 단독자는 매뉴얼화된 인생에 복종하지 않으며 미지의 길을 찾아 스스로의 인생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남들이 다 이 길이 좋다고 하는데 나는 내 머리로 생각하며 다른 길을 가겠다는 태도를 갖는 사람은
자기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항상 불안감을 갖을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남들이 정해놓은대로 살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잘 할 수 있어`라고 하더라도,
자신은 신이 아니라서 모르는 것 투성이요 미래는 예측불허이며 항상 잘할 수는 없다.
결국 자유의지를 발휘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이 되지 못한채 자기의 행동에 불안해하는 자아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자유의지를 발휘하고자 하는 한 그는 아무리 잘하고자 해도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한계를 만나고
나약함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죄악을 만난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이다.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발휘하면 자아의 한계를 느낀다.
이 진퇴양난이 부조리한 인간의 절망이다.
이 절망 앞에 굴복하여 환경의 격류에 몸을 맡겨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헤엄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음을 포기하게 되면
그것이 자유의지를 가진 자아의 죽음이고,
그때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1]

무지할수록 환경은 예상할 수 없는 우연 투성이가 되어 자유의지를 제약한다.
또한 욕망과 고난 앞에 나약할수록 환경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되어 자유의지를 제약한다.
자유의지를 제약하는 벽 앞에서 절망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이런 무지와 나약함의 제약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확장하기 위한' 이것은 당장 생존에 직결되지 않는 노력이기에 생존과 번식을 추구하는 생물의 관점에선 쓸데없다.
나는 이것을 초월적 가치추구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자유의지의 발휘는 불안을 거쳐 완전한 존재를 지향하는 초월적 가치추구에 이른다.

4. 초월적 가치란.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발휘하면 자아의 한계를 느끼는
부조리한 인간으로서 갖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은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이른다.

증명할 수 없는 문제인 `진정한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를 일단 접어두어도 이 과정은 성립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단지 주어진 입력의 당위적인 결과를 일부 부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시도하지 않으면 공허감에 빠져 견디지 못하는 속성, 즉 일종의 랜덤함수가 포함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바는 그 여파다. 과거에 배운 것에 완전히 순응하는 것을 못견디는 속성(자아가 죽어버리는 공허한 느낌)으로 인해 사람은 미지의 행보를 가고, 미지의 행보를 가기에 내가 맞게 가고 있는지 불안에 빠진다. 이 불안은 완전한 존재가 되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으며,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신에 다가서고자 초월적 가치를 추구한다.
하여 모든 자유의지는 성불에 이른다.

자유의지를 성불로 이끄는 초월적가치의 방향성은
생존이나 쾌락이나 권력등의 세속적 가치로 인해 발생한다.
완전한 자유를 갖는 의지란 방향성을 갖지 않을 것이나
생존과 쾌락과 권력등의 세속적 가치로 인해 잘못된 선택에 대한 불안이 생기기 때문이다.
영혼의 자유의지는 육신의 본능과 합쳐져 비로소 인격이 되고 성불을 향하는 방향성, 즉 불성이 생긴다.

5.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캉의 말이다.
엄마가 칭찬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아이가 그렇듯 사람은 타인의 욕망을 배우면서 사회를 배운다.
아이가 말소리를 흉내냈더니 엄마가 좋아하면
아이는 엄마가 좋아하는게 좋아서 열심히 연습한다.
성장발달기간 동안 아이는 엄마 나 잘했지? 하고 싶은 마음을 동력으로 해서 세상을 열심히 배운다.
또한 여기서 좀 더 자라면 남들이 부러워하고 좋은 것으로 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애쓴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보편적인 시작이고
그렇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이 행동방침이 갖는 한계에 노출된다.
뭔가를 하고 싶고 갖고 싶은데 이게 내가 원하는 건지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느라 원하는 건지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거나,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사실은 내가 원한 게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느낀다거나.

내가 이해하는 욕구의 체계는 두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생존과 번식을 목표로 하는 생물로서의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에서 발생한 욕구로서
생물로서의 욕구 기준으로는 쓸모없는 행동을 하게 하고, 불안감을 거쳐 초월적 가치추구에 이르게 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생존의 안위를 추구하는 생물로서의 욕구에 기원한다.
무력한 갓난아이는 외부 환경이 자기를 해치지 않도록 외부의 눈치를 살필 필요를 갖는다.
보호자가 칭찬하는 행동을 하는 한 자기는 보호받을 것이고 이는 위협으로부터 생존을 지키는 안위가 충족되는 안도감을 갖게 한다.[2]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생물로서의 욕구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는 그 카테고리의 욕구가 갖는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것이 충족되어도 가슴에 남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그것이다.

6.
행복이란 무엇인가?
신경계에 입력되는 쾌감 신호가 행복인가?
인간이 어떤 때 쾌감을 느끼는가는 잘 알려져 있다.
욕망을 극대화시켜 충족시키는 방법은 돈이 되기에 많은 연구가 행해져 있고,
이젠 쾌감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화학적 주사제로 직접적 쾌락 입력이 가능하다.
중요한 건 쾌락이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경계를 통해 주어지는 쾌락의 감각은 행복이 아니다.

또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취하여 비교우위를 얻은 사람은 행복한가?
비교우위감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일뿐 행복이 아니다.
외부로부터 입력되는 감각적 쾌락도,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비교우위감도 자유의지의 장애 앞에 절망한 사람들의 연명수단일뿐 행복은 아니다.

돈, 비교우위감, 쾌감입력은 (두가지 욕구중 하나인) 생물로서의 욕구를 충족하여 안위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즉 부정적 요소의 완화제 역할이다.
긍정적 요소를 창출하는 것은 자유의지적 욕구이다.
자유의지적 욕구는 불가항력과 불안에 의해 제약받지만 사람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 가치 추구를 한다.
그래서 초월적 가치 추구는 자유의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위가 되며,
이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가치관-곧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고,
스스로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쾌감 자극을 입력받아서 좋구나 반응한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남보다는 낫구나 하고 비교우위를 확인하는 것도 행복이 아니라고 할 때
이상의 것을 빼고 나서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자유의지에 따르는 초월적 가치추구가 행복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의지로 선택 혹은 검증한 가치를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한 느낌이 행복이다.
이 말을 좀 더 일반적으로 만들면
무엇이 가치있는지를 찾고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행복이다.

7.
내가 설명한 가치관을 발휘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는
`가치를 쌓는다`라는 관점을 견지하면서
할일&하고싶은일,인생계획(만들고 싶은 인생)의 목록을 만들고 그것을 실천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거나 유일무이한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본래부터 내가 해온 방식인데 도움이 되더라는 의미다.
내가 아는 구체적인 한가지 방법이다.

또한 돌아보건데 이루어질만한 계획이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이루어진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나는 이 `할일/하고싶은일/살고자하는 삶을 목록으로 만들어 업데이트하면서 지워나가는` 방법에 소망하는 바를 이루게 하는 어떤 힘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방법은 `지금의 행복은 돌아오지 않는다`며 욕망을 참지 않는 방법에 비해 계획적인 절제를 도우면서도 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지 않도록 해준다. 가령 `담에 어디에 가보고 싶다`라는 충동을 즉시 이행하는 것과 미루다가 잊어버리는 것의 사이쯤에서 실행하게 되며, 하고 싶은 일을 적어놨다가 실행한다고 해서 그 감흥이 시시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3]

8.
행복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을 긍정심리학이라고 한다.
내가 파악한 행복의 본질이 긍정심리학에서 조사한 역학관계에 부합하는지 검증해본다는 관점에서 공부해보려고 책을 세권 골라뒀는데 아직 읽지는 못한 상태다.
어떤 책이 좋은지 모르겠어서 대학 교과서 같이 생긴 것으로 골랐는데 좋은 책이었으면 좋겠다.
틈 나는대로 읽어봐야겠다.


[1] 키에르케고르는 이 절망을 좀 더 자세히 세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헤엄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생물적 욕망/ 쾌락/ 타인의 욕망을 차지하는 비교우위/등을 추구하는 데에 자아를 내맡기는 것.
두번째는 어차피 내가 너무 못나서 물살을 거슬러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없다는 도피적 자기 혐오.
세번째는 나는 헤엄칠 수 있지만 세상이 너무 악랄하게 거세서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없다는 피해의식적이고 공격적인 분노.

[2] 이런 가정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어려서 세상에 공포감을 갖게 되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고
자유의지자로서 갖는 자기의 욕구를 깨닳는데 어려움을 갖는 경향을 갖으리라는 예상.
갓난 아이에게 세상은 두렵고도 신기한 대상이지만 특히나 두려움의 측면이 강조되는 환경에서 살아 왔을수록 아이는 자유의지를 제약받을 것이다.
이를 내가 당면한 육아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중요한 건 아기가 잘못된 행동을 해도 `무조건 지지`하는게 아니라,
생존의 안위감을 깨는 공포를 막아주는 것이다.
우리아기는 좀 겁쟁이인데... 겁먹지 않게 신경써줘야겠다.

[3] 아이 기르기는 내가 할 일중에 큰 부분을 갖는다.
하늘이 중생을 키우메 자기보다 현명한 부처조차 키워낼 수 있는 세상을 꾸려나가듯이
사람이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나 자신보다 현명하고 나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나가는 것이다.
흔히 자식의 행복을 위한다고들 말하나, 무엇이 행복인가를 생각하면
행복이란 자유의지로 무엇이 가치있는지를 찾아내고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자식의 행복을 위한다는 것은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지혜를 주고
자유의지로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나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내가 미처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는 모습을 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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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
예술을 포함하는 초월적 가치를 규정함에 있어 결국 키워드는 자유의지다.

사람은 환경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변수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관점에 서 있다. (당장 떠오른 예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이상적 군주로 설명한 체자레는 그 숱한 `성공할 수 밖에 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우연한 질병으로 몰락한다.) 철저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당장 내일 덜컥 병에 걸려 쓰러질 수 있다. 소상히 알고보면 병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라 우연히 걸리는 것이 아니지만 사람의 관점에선 우연한 사건일 뿐이다.
이렇듯 권선징악이니 인과응보니 하는 가치의 인과는 우연 앞에 끊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일쑤고 생존과 권력과 쾌락의 압박은 환경의 격류가 되어 사람을 몰아친다.
환경의 격류하에서 사람은 한줌밖에 되지 않는 자유의지로 버둥거리지만 대부분 환경을 거스르지 못하고 떠밀려 가기 일쑤다.
인간의 부조리는 그 한줌의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고 완전한 유물론자로서 살아가려 하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공허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환경의 압박에 떠밀려만 가는 한 사람은
생존을 쫓지만 생존해도 공허하고
권력을 쫓지만 권력위에서도 공허하고
쾌락을 쫓지만 쾌락에도 불구하고 공허하다.
자유의지는 외부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자유의지를 갖는 단독자는 매뉴얼화된 인생에 복종하지 않으며 미지의 길을 찾아 스스로의 인생을 살기에 자기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항상 불안감을 갖을 수 밖에 없다.
자유의지를 발휘하고자 하는 한 그는 아무리 잘하고자 해도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한계를 만나고 나약함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죄악을 만난다.. 여기까지는 키에르케고르.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발휘하면 자아의 한계를 느끼는
부조리한 인간으로서 갖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은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이른다.

자유의지가 완전한 자유로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주어진 입력의 당위적인 결과를 일부 부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시도하지 않으면 공허감에 빠져 견디지 못하는 속성, 즉 일종의 랜덤함수가 포함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바는 그 여파다. 과거에 배운 것에 완전히 순응하는 것을 못견디는 속성(자아가 죽어버리는 느낌)으로 인해 사람은 미지의 행보를 가고, 미지의 행보를 가기에 내가 맞게 가고 있는지 불안에 빠진다. 이 불안은 신이 되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으며,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신에 다가서고자 초월적 가치를 추구한다. 하여 모든 자유의지는 성불에 이른다.

자유의지를 성불로 이끄는 초월적가치의 방향성은
생존이나 쾌락이나 권력등의 세속적 가치로 인해 발생한다.
완전한 자유를 갖는 의지는 방향성을 갖지 않을 것이나
생존과 쾌락과 권력등의 세속적 가치로 인해 잘못된 선택에 대한 불안이 생기기 때문이다.
영혼의 자유의지는 육신의 본능과 합쳐져 비로소 인격이 되고 성불을 향하는 방향성, 즉 불성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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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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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행동의 목적은 크게 두가지로 귀결된다. 
생존과 번식."

쉘든이나 할 것 같은 말이지만 꼭 쉘든만 하는 말은 아니고 이 주제로 소설도 나와서 뜨고 그랬다.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이란 책. (내가 알기론 오리지널은 만화의 미래라는 책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면서 나온 말이다. 1990년대작.)

사람의 행동이 생물로서의 필요성으로 귀결된다면 이건 일렬종대 개미행렬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가끔 생물로서 아무 쓸데없는 짓을 하는 생물학적 광인들이 출현한다.
이들은 일렬종대에서 빠져나와 쓸데없는 걸음을 하고 행렬 안에서 보이지 않는 바깥 세상을 보며 행렬안의 개미들을 관찰하고 때론 답답하게 여긴다.
우리는 이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들의 행위가 예술이며
그 걸음의 궤적이 예술작품이다.
예술은 그 쓸모없음으로 인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증거한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무엇인가?
구분 짓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어떤 개미는 먹이를 향한 일렬종대에서 빠져나와 제자리에서 두바퀴 돌고 가던 길을 갔다. 알고보면 대부분의 인간 개미들이 완벽하게 목적지로 향하지만은 않는다. 생물의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조금씩 쓸데없이 취향을 반영하고, 쓸데없음의 예술을 하면서도 조금씩' 팔릴 예술'을 추구한다. 생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순수예술가란 몇몇 특별히 미친 자들을 제외하고는 없다. 비예술속에 예술이 있고 예술속에 비예술이 섞인다. 그 경계는 개미의 걸음이 옆걸음 몇발짝부터 예술이냐고 하는 것만큼이나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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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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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의 법칙은 지상위의 만물을 뛰어봤자 벼룩으로 강하게 구속하지만 그게 자유 행동을 불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주에서 거시적으로 보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지구라는 좌표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게 지구의 지체 부자유자와 우싸인 볼트가 같은 정도의 자유 행동 밖에는 갖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 하지는 않지요. 중력에 예속된 팔다리의 아주 작은 자유도들이 성과를 내고 그게 쌓이면 아예 중력에 역행하는 로켓탈출속도의 자유도를 갖기도 하니 아무리 거시적 관점으로 본다고해도 그 뛰어봤자 벼룩들의 작은 자유도들은 유의미 합니다. 

마찬가지로 유전적인 행동 팩터가 존재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생물로서의 본능에 강하게 지배되는 것과 한편으로 그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는 것은 양립가능합니다. 

나아가 생물로서의 본능이 자유의지를 구속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중력이 인간을 지상에 구속한다고 하지만 무중력상태에 (죽지 않게 우주복 입혀서) 내놓으면 훨훨 잘 움직일까요? 오히려 이동을 잘 못할겁니다. 지상에서 100미터 뛰는 속도로 이동하려다간 엉뚱한 방향으로 붕붕 뜨다가 목적지 도착 못할거에요.
생물로서의 본능이 없는 인격도 그럴겁니다. 아무 동기도 없이 멍하니 있다가 잠만 잘걸요. 생물로서의 본능과 자유의지는 둘이 합쳐야 인격을 이루는 거지요. 

온 인류의 역사를 100% 유전자적 본능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옳을 수 없습니다.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으로 본 인류 역사라는게 '중력의 관점에서 본 지구 생물체의 좌표' 같은 거라서 대충 보면 '다들 지구에 구속되어 있기를 멈출 수 없다' 라고 해석되고 끝나지만 그게 과연 진짜 옳은가 하면 아니거든요. 지구에 달라붙어 있으면서도 다들 <자유롭게!> 걷고 뛰고 그러다 나중엔 아예 중력을 역행(중력의 관점을 정면 부정하는 존재)해서 우주로 날아오릅니다. 마찬가지로 너무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 얽매여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관찰하면 전반적으로 설명이 되는 듯 하지만 틀린 해석을 하게 됩니다. 생물적 본능에 지배되어 식욕을 부리는 와중에서도 사유하고 사랑하고 자유의지적 행동을 하다가 어느날 이타적 인간이 나타나고 어느날 아예 성자(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을 정면 부정하는 존재)가 나타납니다. 

본능과 자제력 사이에서 갈등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겁니다. 인격은 하나의 팩터에 지배되지 않는다는걸요. 
본능과 자유의지가 있으며, 이 둘중 어느 것이 없어도 인격은 제대로 동작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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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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