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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해 논한 2010년 캐시모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현실은, 우리가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이 우리가 파리나 박테리아 수준으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설탕 한 줌이 자유 의지가 없는 수준으로 우리도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고 그 법칙은 자유 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말은 넌센스다.
자연의 법직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가 관찰 할 수 있는 현상을 관찰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학도 그의 관찰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찰하고 그의 역학을 완벽하게 설명하여서 대표적인 예시로 사용했던 역학현상에서 조차도
'항상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들이 있었다.
이는 후에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위기로 내몰고, 뉴튼 역학에 의해 해석되며,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뉴튼역학도 뉴튼이 관찰한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광속도에 근접한 계에서 자연의 법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설명한 자연의 법칙은 전 우주에서 동일하게 동작하지만
뉴튼이 관찰했던 조건과 환경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뉴튼 역학을 완벽하게 보여줘서 뉴튼이 대표적인 예시로서 사용한 계에서 조차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이 있었다.
이는 역학뿐 아니라 과학의 모든 패러다임이 마찬가지다.

패러다임은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형상을 만든다.
('세계는 신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뱀과 코끼리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는 섬이다.')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의 탐구활동은 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어서 전체 구조물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활동이다.
('세계를 떠받치는 코끼리는 몇마리인가?')
과학의 발전은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 이미 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전체 구조 자체를 합당한 구조로 파악하는 것이 발전이다.)
현재 따르고 있는 패러다임이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캐시모어 논문의 저 마지막 말은 설탕 한줌에 대한 자연의 법칙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상정한다.
이는 과학은 완성되었으며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고 자신하는 것과 같다.
오산이다.
진짜 현실은, 자유의지를 논하기엔 설탕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과학이 '인간은 오토마타이며 의식은 그 로그파일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놓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항상 관찰하는 자의식과 자유의지는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명백히 관찰되는 현상은 그 자체로 패러다임보다도 한 단계 위의 확실성을 갖는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장차 무엇이 현재의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몰고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이끌어 낼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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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육아(+딸린 작업)의 인생 프로젝트는 되는대로 대충하고선 리턴되는 쾌감을 수동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즐거운 작업이 아니다.
잘 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하는 최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수행함에 있어서 즐거운 작업이 된다.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최선을 찾고 그것에 이르기까지 노력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대충 아무랑 결혼하여 겉보기에 흠 없는 표지를 만들 수 있는가' 여부가 아니라
내 인생을 걸 최선의 상대방이 누군지 알 수 있는 안목을 만드는 작업도 하고
고른 상대방과 조율 맞추는 법을 익히는 작업도 하며
최선을 지향하는 생각과 결정과 노력의 과정을 수행함에 있다.
과정 다 건너뛰고 결과물로 '대충 흔한 결혼의 리턴되는 쾌감의 양'을 보는 식으로는 결혼의/육아의/인생의 진가를 평가할 수 없다.

결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서
종교에 귀의하거나 예술이나 정의구현에 투신하거나 학문에 몸바치거나
자기가 추구하는 최선을 위해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같은 이유로 이미 있는 가정을 버리고 출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버림에도 그들이 폄하받지 않는 이유, 혹은 추앙되기까지 하는 이유는 단지 이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선의 인생을 추구하였으므로.'
부연컨데 이때 말하는 최선의 인생은 최선을 만드는 작업에서 진가를 볼 수 있지, 리턴되는 쾌락의 양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는게 심심했었다.
뭐가 재미있을까 찾으며 이것 저것 해봤더니 결국 공부가 남더라.
왜 학문이 역사적으로 귀족의 여흥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키는 공부를 찾아서 하는 건 다른 모든 활동에 비해 인생의 의미를 주는 행위 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생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려는 작업에 비하면 단순한 것이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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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화학 대중서를 보는데, 가설의 연속이란 느낌이 들었다.
가설위에 가설을 쌓는 구조를 몇차례 보다보니 늘어놓은 실험결과들이 최종가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당연하게도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방식으로 실험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분히 일방적인 단편들이 기록된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신경화학이 미시적인 규모를 벗어나서 심리학 규모의 사실에 대해 결론을 내놓는 것(인간의 마음이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점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는)은 아직 성급하게 보인다. 일단 최소한 단편적으로 알려진 신경화학적 사실을 두고 대중이 결론을 추리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성급하다.

출산, 수유, 오르가즘등 강렬한 애착 감정을 느끼게 될 사건이 일어날때면 옥시토신 분비가 늘어난다. 이를 바탕으로 유명한 초원들쥐 실험이 있었다. 초원들쥐는 색정광인 다른 쥐들과 달리 일부일처제이다. 첫관계를 한 뒤 평생 정절을 지키고 자기 짝과 함께 새끼들을 양육하며 살아간다. 이 초원들쥐의 뇌에 옥시토신을 더 주사하면, 유대관계가 더욱 끈끈해졌다. 반대로 초원들쥐의 옥시토신 수용체를 무력화시키는 주사를 놓으면, 초원들쥐의 생활양식은 일대일 관계가 깨지고 다른 쥐들처럼 문란해졌다.
이 실험 결과를 두고 다양한 가설이 가능하다.
옥시토신이 상대방의 인상착의를 뇌에 기억시켜서 그 사람(그 쥐)만 사랑하게 한다는 가설도 있다. 모성은 옥시토신에 의해 발생한다는 가설도 있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2~3년(900일)이라는 말이 퍼진 것도 그 기간이 지나면 사람의 뇌에서 옥시토신을 포함한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다는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옥시토신은 사랑 호르몬이라고 소개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수십 수백번씩 기사화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진 유명한 실험 결과들이다. 그런데, 이 단편적 사실들을 두고 `길어야 3년이면 사랑은 끝이고 호르몬 분비가 끝나는 3년 후엔 옥시토신 잃은 초원들쥐처럼 바람은 숙명`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타당할까?

앞서의 실험 결과외에 다른 사실 몇개를 바탕으로 나는 이렇게도 해석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실험동물에게 아편성 물질을 주면 약물 내성이 올라가서 점점 더 많은 양의 아편성 물질을 찾는다. 그런데 실험동물에게 옥시토신을 주사하자 아편성 물질에 대한 내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옥시토신은 쾌감 내성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초원들쥐와 산악들쥐의 뇌를 비교했더니 초원들쥐는 뇌의 쾌락중추의 도파민 수용체들과 함께 옥시토신 수용체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산악들쥐의 옥시토신 수용체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는 초원숲쥐는 산악들쥐에 비해 옥시토신의 쾌감 내성을 줄이는 효과를 크게 본다는 뜻이 될 것이다. 옥시토신이 성관계시에 분비되므로 특히 오르가즘의 쾌감 내성을 낮추어 줄 것이다.
초원들쥐의 일부일처제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늘 처음같은 오르가즘`일지도 모른다. 쥐가 사람보다 본능에 더 강하게 지배받는다고 본다면 쥐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보다 오르가즘의 비중이 월등히 클 것이고, 오르가즘이 유지된다면 최초에 짝을 지은 이유, 한번 좋았던 이유가 바뀔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에 쥐의 일부일처제가 유지되는 것일 수 있다. (`~라면 ~일 경우 ~일 수 있다.` 가설위에 가설 쌓기.)
옥시토신이 무력화된 후에는 내성이 생기면서 성관계 쾌감이 약해지고, 쥐의 사랑은 오르가즘이 전부라고 할 경우 오르가즘 감퇴는 일부일처제가 해제되는 사유가 되기에 충분하여 문란한 관계로 변하는 것일 수 있다.
이 경우 옥시토신은 사랑 호르몬이 아니라 오르가즘 지속제다. 물론 오르가즘 지속제는 사랑에 큰 도움이 되지만.

모두 자작가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걸로도 가설이 된다. 게다가 이 가설에 의할 경우엔 앞서 `3년이면 사랑은 끝나고 바람은 숙명`이라는 판단은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경우 3년 후에 오르가즘은 내성이 생겨 처음같지 않은게 보통이더라도 그게 `사랑이 끝난다`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옥시토신이 아이의 인상착의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여 모성을 낳는다는 가설도 성급하게 보인다.
제왕절개후 몸상태 때문에 분유수유를 하는 산모는 모성이 생기지 않을까? 이 경우엔 출산후 모유수유를 하는 산모에 비해 옥시토신이 현저히 적어서 산후 회복은 눈에 띄게 더디게 이루어지는데, 자식에게 애착을 갖지 못하는게 눈에 띄게 드러난다거나 하는 조사결과가 있을까? (제왕절개로 출산한 산모가 아이에게 애착을 덜 갖는다는 결과는 없을껄?)

이 시대의 인간에 대한 인식을 선도하는 것은 진화심리학과 신경화학이다. 그런데 신경화학에 근거한 대중적 인식은 오히려 단편적 사실을 성급하게 해석해서 나온 잘못된 결론으로 점철되어 있다.
단편적 사실은, 여기를 보고 이런 결론을 내리면 저기를 보면 또 다른 내용이 나온다. 애초에 특정 심리상태와 옥시토신 농도는 딱 떨어지는 대응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남편과 유대가 약한 상태로 오랜 기간을 보낸 나이든 여성은 옥시토신 수치가 만성적으로 높다. 또한 스트레스가 심할때에도 옥시토신 분비는 늘어난다. 옥시토신은 분명 무의미하지 않은 의도가 숨어있는 암호문이지만 그 내용은 `문맥을 떠나서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을만큼 간단하지 않다. 만약 옥시토신이 사랑호르몬 이었다면 출산보조용 자궁수축제는 사랑의 묘약으로 팔렸을 것이다.

7년 전에 번역된 대중서를 읽고 신경화학의 현재를 논할 수는 없다.
뇌과학은 심리학보다 더 탄탄한 기초를 다지면서 심리학을 따라잡을 것이다. 하지만 두가지 의미에서 성급함이 느껴진다.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내용을 놓고 보면 앞서 말했듯 단편적 사실을 성급하게 해석한 잘못된 결론들을 던져주고 있다. 그 편이 자극적이어서 그런가?
학문 그 자체를 놓고 보면 신경화학을 포함한 뇌과학이 심리학을 추월하는 규모의 결론을 내놓으려 하는 것은 성급하게 보인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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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관념의 토대 위에서 뇌과학 서적을 읽고 있다.
사람의 의식구조에 대해서는 종교, 철학, 심리학(사회과학), 뇌과학(과학)등 학문 전반에 걸쳐서 다양한 모델이 존재한다.
내가 잡고 있는 모델은 이렇다.

동물은 태어날 때부터 뇌신경망구조에 생물로서의 본능을 갖는 의식 구조를 형성하고 태어난다.
그리고 생각은 흔적을 남긴다.
생물 본능적 의식 구조 위로 외부 환경과 자유의지의 결과가 학습된다.
학습된 패턴은 루틴화 되면서 쌓이고 기존의 구조를 변화시킨다.
( longlive.tistory.com/279 에 적은 의식3단계설 참조.
1.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단계. 언어를 이용해 생각하고, 대상의 개별 요소를 의식에서 인식한다. 매우 느리다.
2.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단계. 언어를 이용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복잡한 논리적 사고과정 없이 직관적으로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결론이 나온다. 대상은 개별요소로 인식되지 않고 그 개별요소들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집합체, 즉 관념으로 뭉뚱그려서 인식된다. 처리속도가 1단계 보다는 두배 빠르나 여전히 느리다.
3. 몸에 배는 단계. 입력에 대한 출력이 완전히 루틴화되어서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 빠르다.)
즉 자유의지는 집적된다.
자유의지는 그것이 집적된 결과물인 하위자아를 바탕으로
집적된 결과물이 선택 가능한 폭 안에서 동작한다.
크게 비유하면 테니스를 배우지 않는 것은 자유지만 안 배웠으면 테니스를 못친다.
서울에 경부선을 타는 것은 자유지만 그 결과 나는 부산에 있어서 인천에 가기가 어려워진다.
가속도는 집적되어 속도를 만든다. 순간가속도는 가속도가 집적된 현재 속도에 비해 매우 작은 크기를 갖는다.
이와 같은 일이 의지에도 일어난다. `의`는 벡터다. 이것의 존재를 확인하려면 그 전에 먼저 이것이 얼마나 작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찰나의 매순간들에 자유의지로 한 생각과 선택들은 집적되고 미래의 선택과 생각은 집적되어 도달한 그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 결과가 일상에 나타나는 수준의 (과거로부터의 관성에 비하면 별로 크지도 않은) 자유의지이므로,
찰나의 순간에 순수한 자유의지는 매우 작은 가속도 벡터이다. 그러나 없는 것과 매우 작은 것은 크게 다르다. 그 작은 순간 가속도는 집적되어 큰 현재 속도를 만든다. 그 작은 자유의지는 상위자아로부터 온다.

날때부터 가지고 있던 본능에서부터 현재의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하위자아의 신경회로에 루틴화된 것은 모두 특정 입력에 대한 특정 출력이 매칭된 것이며 조건반사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하위자아로서의 의지는 뇌의 기억, 언어, 연상작용등 모든 루틴화된 입출력 패턴들과 팔다리등 몸의 자원을 이용하여 활동한다.

하위자아의 의식은 RPG게임의 아바타(문자 그대로 하위자아)에 몰입했을 때에 느끼는 아바타로서의 자아와 마찬가지라서
하위자아가 상위자아를 각성하면 하위자아의 의식은 해체된다.
내가 게임을 할 때 게임캐릭터의 의식은 내 의식임에도 내가 게임에서 빠져나온 다음엔 캐릭터로서의 자아는 온데도 없고 간데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 관념 위에서 뇌과학을 읽다보면 현재 뇌과학이 한창 연구하고 있는 것은 '해킹기술'로 이해된다.

상위자아의 영향으로 발생한 자유의지는 전기화학신호를 전달자로 하여 두뇌 각부 및 신체 전체와 통신한다.
뇌화학은 군대 사령관이 하달시킨 '진도개 셋' 명령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연구나 마찬가지다.
명령의 암호를 해석하고 명령체계에 난입할 수 있다면 동작에 혼선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통신 난입하여 진도개 셋을 끼워 넣어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중간에서 명령체계를 해킹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고
군대를 전진시킨 것은 엄밀히 말해서 '진도개 셋'이 아니라 그 명령을 내린 수뇌의 의도이며 '진도개 셋'은 그 의도의 전달자일 뿐이다.
호르몬은 전달자다. 사람의 감정과 행동이 호르몬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은 그 의지가 시작되는 지점이 호르몬을 생성하는 지점보다 이전 단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암호화된 명령인 '진도개 셋'이 나온 지점보다 앞선 곳에서 군대를 움직인 의지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와 같다.

신경 전달 물질인 세로토닌은 위험 회피에 대한 신호를 의미한다.
내 요구가 거절되었을 때 라든지, 뭔가 위험을 감지했을 때의 신호를 전달한다.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면 위험하다는 뜻이다.
어떤 일이 걱정할만한 일인가 아닌가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와 같은 의미로,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는 이유는 이성적 판단의 차이 때문(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일수도 있고, 조심성과 걱정이 많은 성격탓(똑같이 알고 있어도 누군가는 더 걱정한다)일 수도 있고, 혹은 분비회로가 고장나서일 수도 있다.
우울증 치료제인 프로작은 세로토닌을 인위적으로 증가시킨다.
우울증 환자는 그 결과 우울증이 치료된다.
분비회로가 고장난 경우라면 증상을 없애주는 효과이고, 걱정이 많은 성격탓이라면 성격을 바꿔주는 효과이다.

이런 반응은 위험회피 성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프로작은 섭취가 간편하고 부작용이 적어서 유명해졌지만 기술이 받쳐준다면 도파민(새로움 추구)이나 노르에피네프린(쾌락 보상 추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작업이 가능하다.
프로작이 하위자아의 통신망이 '위험도가 1~10단계중 한 7단계쯤 되'라는 통신을 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위험도 값을 낮춰서 전달하는 해킹기술이었다면, 다른 물질로 다른 통신에 개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세로토닌/도파민/노르에피네프린/아드레날린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경 전달 물질의 양을 조절함으로써
위험에 민감하고 쾌락 보상에 집착하면서 잘 흥분하지 않고 수구적인 성격을
위험에 둔감하고 쾌락 보상에 둔감하며 잘 흥분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성격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전기적인 신호 해킹도 뇌에 전극을 꽂으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가령 뇌 특정 부위에 전위차를 주면 '지금 슬픈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나 '지금 우스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또한 그 감정에 연계된 기억이 더 잘 떠오르기 때문에 전위차로 유도된 감정은 스스로의 기억에 의해 증폭된다.)
즉 기술이 받쳐준다면, 유머러스한 성격(입력된 정보의 우스운 부분을 민감하게 캐치하여 잘 웃는 성격)을 만들 수도 있다.

이건 모두 통신 해킹에 대한 얘기다. 상위자아로부터 아바타를 조종하는 사이에 개입하여 해킹하는 것을 뜻한다.
미미한 자유의지의 집적으로는 수정하기 힘들었던 강한 현재속도를 약으로 후려쳐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안그래도 작은 가속도 벡터를 더 하찮게 보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강하게 후려쳐서 현재 속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가속도 벡터의 존재 여부에 아무런 근거도 되지 못한다.

학습을 통해 자유의지를 집적하여 성격을 바꿀 때엔 새로운 입출력 피드백 패턴을 내재화하여 신경 전달 물질의 분비량을 조절하거나 수용하는 민감성을 줄인다. 즉 피드백 회로를 수정한다. 이는 자유의지가 하위자아에 집적되어 하위자아를 수정하는 의미를 갖는다. 상위자아의 자유의지로 하위자아에 가치있는 인격을 구현하는 것을 하위자아의 존재의의로 삼는다고 한다면
'치료'의 폭은 '피드백 회로가 고장나서 증상을 감추어야 하는 상황'에 국한된다.
나머지는 치료라기 보다는 강제 성격 개조이다.

본인이 강제 성격 개조를 원하고 있는 경우라면 (환자를 치료하는 의미가 아니라) 부작용을 감안한 후엔 도구적 의미로 허용될 수 있다.
가령 다른 가치있는 모험을 하기 위해 위험에 민감한 성격을 잠시 접어두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니까. (또다른 예로는, 호모섹슈얼이 `이상이 있는 환자`가 아닐지언정 성향개조가 가능하다고 하면 자발적으로 헤테로섹슈얼로 자기 개조를 감행할 사람이 95%이상 될 것이다. 살기 힘들어서 자괴감 갖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강제 성격 개조는, 글쎄 적어도 치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엔 논란 거리가 많다. 정신병 치료 목적으로 뇌를 파괴했던 일에 비교될 수 있지 않을까.
얼마전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는 허구라는 ADHD 창안자 아이젠버그의 임종전 고백이 있었다.
(http://www.worldpublicunion.org/2013-03-27-NEWS-inventor-of-adhd-says-adhd-is-a-fictitious-disease.html)
피드백 회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미성년자인 아이의 성격을 타인인 부모의 의지로 강제 개조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것인가.

내 관념을 고수하면 쾌락 그 자체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이 된다.
현재 흔히 퍼져있는 착각으로 보이는 '사람은 주관적인 행복의 감각을 목적으로 하여 행동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있다.
주관적인 행복이란 엔돌핀등 체내의 마약성 물질을 의미하므로
저 말은 어떤 행동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체내 마약성 물질을 생성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된다. (* 마약성 물질은 그 물질 자체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신호를 전달하자니 뭐가 됐든 전달자가 필요해서 어떤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 것 뿐이다. 수많은 식물중 양귀비 꽃이 그 물질을 생성하는데, 만약 신경이 전달자로서 다른 물질을 체택했다면 장미꽃이 환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외부에서 향정신성약물을 주입하는 것이 나쁠 게 없다. 목적에 직접 도달하는 방법을 찾은 셈이 될 뿐이다.
금단증상이나 점점 약의 양을 늘려야 하는 약물 내성 효과등은 사소한 부작용이다. 옥시토신은 역치 증가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언젠가 기술이 받쳐준다면 늙어죽을때까지 쇼크사 하지 않는 정도의 사용양으로 쾌감을 줄 수 있는 향정신성의약품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술 담배 케익도 그 예시가 된다. 죽을때까지 향유할 수 있는 쾌락 증대 물질 말이다.
그러나 '상위자아의 자유의지를 집적하여 하위자아를 만들어가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 이익이 아니라 가치생성을 목표로 한다면)
약물의 근본적인 부작용은 피드백 구조에 혼란을 준다는 것이다.
약물에 의한 자극은 '이 행동을 통해 이러한 보상이 온다'는 피드백 구조에 개입하여 뒤헝클어 놓는다.
가령 이타성을 예로 들면, 본래는 지나친 이기성과 맹목적 이타성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적정한 내적 보상 수준이 결정되어야 하며 이는 학습 내재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본래는 행동의 결과를 뿌듯해하면서 분비되어야 할 보상이 더 편한 방법으로 주입된다면, 보상 수준 결정에 혼란이 생긴다.
그래서 이상적으로는 술이든 담배든 당분이든 카페인이든 마약이든
그 뒤헝클어 놓는 영향성의 양만큼 해롭고, 멀리하는 것이 좋다.
다만 어차피 하위자아가 학습할 때엔 자유의지의 결과가 고스란히 집적되는 게 아니라 환경의 변칙성으로 인한 노이즈가 작용하므로 일정 수준 이하의 약물에 의한 영향성은 무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약물에 의한 쾌락이 보상 구조를 손상시킨다지만 환경의 우연성에 의한 불노소득 같은 보상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어떤 작가가 자기가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의 뇌를 MRI로 촬영했다는 책을 읽었다.(서명 `굿바이 프로이트`) 그는 뇌는 모듈화된 신경 회로의 집합이며, 각각의 신경회로는 회로구조의 독특함 때문이 아니라 뇌에서의 위치에 의해 특징을 갖으므로, 따라서 모든 모듈은 각각의 자아를 가지며 통합된 단일 자아는 모듈화된 복수의 자아들 간의 역학관계 끝에 나타나는 허구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자기가 언어적 창조적 영감을 얻는 순간 뇌의 언어영역(그의 모델대로라면 `말을 하는 나`가 될 것이다)에 대단한 활성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했다. 그는 실험과정에서 영감을 얻는 순간을 찍는데에는 성공했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의 언어영역은 일반적인 책을 읽을 때보다 약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정도였다. 창조적 활동을 할때 두드러지는 변화는 안쪽이마이랑(medial frontal gyrus)의 활성화였다. 우연히도 medial frontal gyrus의 위치는 머리 밖에서 보면 상단전이다.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그 책에서 대답하기를, 뇌에는 감각기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창조적 활동을 할 경우에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가 라는 것은 MRI가 아닌 한 설령 해부를 할지라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창조적 활동을 할 때엔 상단전이 빛난다는 말은, 석가모니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인도에 전해내려온 것이다. 어떤 경로로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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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장들에 대해서는 셀리그만 책의 입장을 요약하고 내 관점과 분리하여 비교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실생활 적용에 대한 이 장에 대해서는 그냥 내 관점에 기반을 두고 적을 것이다.

- 일에 적용할 경우.

인터넷에서 일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들의 푸념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형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하는 행위 자체가 보람있지 않으므로 모든 보람을 남보다 나은 보상에서 찾을 수 밖에 없으며,
보상에서조차 보람을 찾을 수 없을 때엔 `하기도 싫고 보람도 없는 일을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지`를 회의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보람 있으므로 많은 경우 아이 낳고 나서 회의에서 벗어나게 되나
삶의 의미를 아이에게 두는 것은 자기 삶의 욕구를 아이의 삶에서 해소하려 하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에 대한 해법은 원칙적으로 자기가 어떤 가치를 만들때 기쁨을 느끼는지(=대표강점)를 파악하고
그 활동을 자기 일에 접목하여
일하는 행위 자체에 보람있는 요소를 집어 넣는 것이다.
그 예시로서 책에는
병실에 달력과 그림을 가져와 벽에 배치하면서 환자가 눈을 뜨면 보게 될 풍경을 만드는 일을 하며 보람을 찾는 병원 청소부의 얘기가 나온다. 자기의 일을 쓰레기 치우는 일에서 환자의 정서를 관리해주는 가치를 실현시키는 일로 자발적으로 재창조한 예시다.
이러한 재창조는 내 대표강점을 발휘하는 것이 스스로도 즐거운 일인 동시에 그 발휘의 결과가 직업에 더 나은 성과를 주는 윈윈시스템으로 동작하기에 가능해진다.
대표강점은 내 자유의지 욕구가 표현된 것이기에 추구할수록 더 자유로움을 느끼고 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자유와 즐거움을 누렸는데 그 결과가 일을 한, 그것도 잘한 것이 된다는 게 행복의 법칙을 적용한 결과다.

먼저 나의 대표강점을 확인하고,
직업을 선택할 때에는 대표강점을 발휘하기 수월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기 선택한 직업을 운용할 때에는 대표강점을 발휘하여 업무를 향상시키는 길을 찾아서 재교육을 받고 실천한다.
이때 자유재량권은 중요하다. 재량권이 작으면 자유의지 욕구를 발휘할 여건을 협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건강과 근무조건의 상관관계에 대한 통계에 따르면 자유재량권이 낮으면 사기가 저하되고 우울해진다.
이는 일을 시키는 관리자의 입장에서 참작해야 할 점이다.
가치를 만드는 것은 이념적으로는 이해관계자 중심주의에 이른다.


- 육아에 적용할 경우.

아래 글 참조.
자유의지 욕구 계발법
http://longlive.tistory.com/269
아빠가 놀아주는 아이가 성공하는 이유
http://longlive.tistory.com/270

생후 6년 이후부터 아이는 자기가 칭찬이나 사랑이나 관심을 받으려면 어떤 강점을 살려야 하는지 정하기 시작한댄다.
이전단계 자유의지 욕구 충족까지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일거다.
강점을 계발하려면 강점을 발휘할때마다 보상을 주어야 하므로
강점을 발휘하는 모습을 본다면 꼭 칭찬해준다.

아이용 조사 문항을 통해 5개 정도의 강점을 찾는다.
조사 문항은 저작권이 있으므로 비공개. 저자의 사이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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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삶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제로섬게임을 하는 시스템과 윈윈게임을 하는 시스템이 자연 선택과 문화적 선택을 거칠 경우 윈윈게임을 하는 시스템이 제로섬게임을 하는 시스템을 이기게 되므로 결국 윈윈 시스템이 살아남아 퍼진다. 예를 들면 이질적인 세포를 포식하는 세포와 미토콘드리아와 협력하는 세포는 후자가 윈윈 게임 시스템이며 후자가 살아남는다.
공포는 도망가야한다는 신호이고, 분노는 공격해야한다는 신호라는 식으로 부정적 정서는 제로섬게임을 하고 있다는 신호이며
긍정적 정서는 윈윈게임을 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볼 수 있는데,
이때 자연선택과 문화적선택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윈윈시스템이 승리하게 되므로 세상은 갈수록 우리가 긍정적 정서로서 인식하고 있는 `지식, 능력, 선`등의 것들이 증가하는 방향성을 갖는다.
그리고 능력이 늘고 선함이 늘어나는 방향성의 끝에 존재하는 것은 전지전능과 지고선, 곧 신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세상의 방향성이라고 할 때 삶에는 행복한 삶 이상의 목표가 생긴다. 신의 방향성을 촉진하는 존재로서 동참하는 `의미가 있는 삶`이 그것이다. 행복한 삶이 자기의 강점을 발휘하는 삶인데 비해 여기에 더하여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라는 초월적 의지에 협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의미있는 삶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자유의지는 가치추구를 거쳐 초월적가치추구에 이르고 모든 자유의지는 성불로 향한다.`
긍정심리학은 인문학과의 합치를 추구하는 첫번째 사회과학이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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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6가지 가치를 24가지 덕목으로 세분하여 테스트를 통해 측량 가능하도록 했다. 다음은 그 덕목들이다.

지혜와 지식
1. 호기심 : 싫증을 잘 내지 않고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특성이다.
2. 학구열 : 지식을 쌓는 데에 기쁨을 느끼는 특성이다.
3. 판단력 :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확실한 증거를 기준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특성이다. 자기 희망과 욕구를 사실과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 특성이기도 하다.
4. 창의성 : 상상력을 동원하여 새롭고 타당한 방법을 찾는 데에 능한 특성이다.
5. 사회적 지능+대인관계 지능 = 정서 지능 :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능력이다. 자기 감정을 다스리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며, 사회 적응력이다.
6. 통찰력 : 세상의 이치를 통찰하는 능력이다.

용기
7. 호연지기, 용감함 :  고통, 좌절, 타인의 시선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의 저항요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특성의 의미로 쓰였다.
8. 끈기 : 시작한 일을 끝까지 해내는 능력이다.
9. 지조 : 자기 내면의 의지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특성이다. 허언을 하지 않으므로 약속을 잘 지키고, 타인들도 나를 진실하게 대하게 만든다.

사랑과 인간애
10. 친절, 아량, 사랑하는 능력 : 이타성이다. 타인을 돕고, 타인의 이익을 기뻐한다.
11. 사랑 받는 능력 : 타인의 이타성을 불러일으키고 받아 들이는 능력의 의미로 쓰였다.

정의감
12. 시민 정신, 충성심 :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집단의 목표를 중요하게 여기는 특징이다.
13. 공정성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정한 기준을 적용하고자 노력하는 특성이다.
14. 지도력 : 단체 활동을 조직하는 능력이며 일일이 참견하지 않고도 사람들의 시민정신&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절제력
15. 자기통제력 : 자기 욕구나 충동을 기다리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 감정을 다스려야 할 때와 다이어트나 금연등을 수행할 때 등에 발휘된다.
16. 신중함 : 위험을 감안하여 눈앞의 충동을 참는 특성이다. 조심성이다.
17. 겸손 :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보다 역할을 완수하는 데에 힘쓰며 자기를 낮추고 자만하지 않는 특성이다. 스스로를 추켜 세우지 않는다.

영성과 초월성
18. 감상력 : 음악부터 수학에 이르기까지 미와 경의로움을 감상하고 감동할 줄 아는 능력이다.
19. 감사 :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 고마운 것인 줄을 아는 능력이다.
20. 희망, 낙관주의, 미래지향 : 미래를 긍정하고 계획하는 특성이다.
21. 영성 : 더 큰 우주의 목적 속에 자기가 속해 있다고 믿고 사명감과 삶의 의미를 느끼는 특성이다.
22. 용서 : 과거의 일을 문제 삼거나 기필코 복수하려고 하지 않는 특성이다. 소위 뒤끝이 없다.
23. 유머감각 : 일과 놀이를 배합하고 농담을 즐기는 특성이다.
24. 열정 : 자기가 하는 일에 전력투구하기를 즐기고 의기소침하지 않는 특성이다.

위에 열거된 24가지 특성 중에서 내가 가진 강점이 무엇들인지 파악하고,
그 중에서 다시 '나 다운 모습을 지켜주며 내가 발휘할 때 기쁨을 느끼는' 특성 한두가지를 파악한다. 그것이 나의 대표 강점이다.
위의 코멘트 만으로 점수화 하기가 어렵다면 저자의 사이트 http://www.authentichappiness.org 에서 설문조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파악한 나의 대표강점을 일, 사랑, 육아등의 일상에서 최대한 발휘하는 방향으로 생활 하는 것이 이 책이 말하는 행복의 방법이다.
또한 이는 내 관점에서 파악하면 '자유의지로 내가 추구하고 싶은 가치를 찾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에 부합하는 활동이 된다.
첫째로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특성이란 과거부터 현재까지 내가 추구해온 강점일 것이기 때문이며,
앞으로 추구하고 싶은 가치이기 쉽기 때문이다. [1]
이 특성들을 현실에 발휘하는 활동은 가치를 추구하여 실현시키는 활동이 된다.
앞서 나는 가치를 실행하는 생활로 유도하는 방법으로 '할일+하고 싶은 일+살고자 하는 삶을 목록으로 만들어 실행하는 것'을 이야기 했는데, 이와 합치면 행복에 이르는 방법은
`자기의 대표 강점을 일상에서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목록을 쓰고 하나씩 실행해 나가는 것`이 된다.
다음은 일, 사랑, 육아및 교육에 있어 적용하는 예시들이 나온다.

*개념에 대한 단어 번역이 다소 미흡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 경우 내가 이해하기 편한 쪽으로 변경하였다.

* 이를 바탕으로 `이상적 자아상을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져서 피로 고갈 우울에 시달린다`는 피로사회의 현대사회진단에 대한 처방도 가능하다.
이상적 자아상이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강점들로 나 자신에 의해 세워진 자아상인 경우, 그것을 따라가기 위한 노력은 즐겁고 만족스러우며 피로와 고갈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적 자아상이 타자에 의해 세워지면 그것은 내 강점이 아닌 약점들을 보강해야하는 형태가 되기 마련이며 이때 약점을 보강하기 위한 노력은 즐겁지 않아서 피로 고갈 우울을 불러 일으킨다.
자기가 원하는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하는 것이 자유의지자의 욕구의 형태가 되는데, 타인에 의해 세워진 자아상은 내가 추구하고 싶은 가치에 해당하는 나의 대표강점들을 반영하지 못하고, 따라서 타자에 의해 세워진 자아상을 따르는 것은 자유의지자의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며 단지 심신을 지치게 만든다.
이에 나의 대표강점을 추구하는 방식은 피로 고갈 우울에 대한 해결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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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에서 지적하는 또다른 현대의 질병 증상이 행동과잉이다.
행동 과잉 상태라는 게 뭐냐면 일명 바보병이다.
자기가 뭔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으면 지루해하고 못견뎌 하는 증상을 보인다. 집중력도 현저히 떨어지고, 심해지면 독서는 커녕 TV를 '그냥 보는 것' 조차도 리모컨을 이리저리 조작하지 않으면 못배긴다.
피로사회의 설명으로는 `입력을 부정하는 기능이 저하되면` 발생한다.
행동과잉을 내 관점에서 풀어보기 위해 자유의지자적 욕구의 발생부터 발달과정을 생각해보자.

행동의 시작은 배고픔 등에 대한 직접 생존 욕구 충족을 위한 행동이다.
이는 의식적인 행동이라기 보다는 조건반사에 가깝다.
다음으로 하는 행동이 타인의 욕구를 욕구하는 행동으로서 (아기가 웃었더니 엄마가 웃으니까 아기가 더 웃는 등) 이는 간접적인 생존 욕구 충족을 위한 행동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물로서의 욕구와는 좀 다른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가 나타난다.
자유가 억압되어 있던 사람이 해방되면 주머니에 손만 넣고 걸어도 기쁘다. 자유로운 세상에 나오면 심호흡만 해도 기쁘다. 즉 금지되어있던 것 내지는 명령 받지 않은 것을 주체적으로 행동 하기만 해도 즐겁다. (아이들 언어로 `놔봐 놔봐 내가 할거야`)
그러나 이 기쁨은 곧 가신다. 금새 자유에 익숙해지고 나면 주머니에 손 넣고 걷는 것은 하나도 즐겁지 않다.
하다보면 아무 행동이나 한다고 욕구가 충족되질 않는다.
그럼 더 향상된 충족이 요구된다.

아마도 판타지 소설 드래곤라자에서 나온 말 같은데 이런 분석이 있다.
아버지의 원수가 늙어죽는 걸 기다리는 걸로는 원수가 죽어도 복수가 안된다. 설령 늙어죽기 직전이라고 해도 자기 손으로 죽여야 복수가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이 영향을 미쳤느냐 아니냐이다.
즉 내 행동이 대상에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아무 행동이나 하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는 자유의지자적 욕구는 향상된 충족으로서 대상에 변화를 만들어 내야 충족이 되는 단계에 이른다.

그런데 또 이 욕구도 충족을 경험하다보면 점점 부족해진다.
아무 변화나 다 충족이 되진 않는다.
길가의 돌맹이를 슬쩍 굴리는 것도 변화를 미치는 거지만 그걸로는 충족이 안되는 것이다.
변화에도 의미가 있는 변화가 있다. 그것이 가치의 초기 형태다.
호기심을 충족하는 등으로 의미가 있는 행동들이 있다. 생물로서 생존과 번식의 이익은 없지만 충족하면 기쁜 것들이다. 긍정심리학에서 얘기한 `충족하면 기쁜 24가지 강점`이 그 예시가 되며, 그 외에 가학성 피학성등도 포함된다.
이것들을 추구하는 이익 추구(혹은 재미추구? 호칭이 애매하다.)의 단계.
그 다음이 이익중에서도 강점에 해당하는 것들을 추구하는 가치추구 단계,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강점의 상위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6가지 덕목들을 추구하는 초월적 가치추구의 단계.

가치추구에 이른 자유의지자적 욕구는 이후 내 행동이 가치를 만드는 게 맞는지 오히려 망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을 거쳐 초월적 가치추구에까지 이른다.
다른 욕구와 마찬가지로 자유의지자적 욕구도 충족될수록 점진적으로 변한다. `내가 행동하고 싶은 욕구`->`변화를 주는 행동을 하고 피드백을 받고 싶은 욕구`->`변화의 의미가 있는(이익이 있는) 변화를 주는 행동을 하고 싶음(이익추구)`->`가치추구`->`영속적,초월적 가치추구`라는 충족의 형태를 갖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무엇이 정말로 가치있는 것인지`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면 행동을 해도 가치추구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
행동을 해도 가치변화가 충족되지 않으면 숨을 쉬어도 산소가 보충되지 않을때 호흡이 가빠지듯이 행동이 과해진다. 행동과잉이 온다.
이는 의미와 가치관을 찾지 못하는 현대인이라는 원인으로부터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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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정서를 바꾸어 현재의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방법이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정서는 신념, 신뢰, 자신감, 희망, 낙관주의.
이중 낙관주의와 희망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낙관주의는 영속성과 파급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쁜 사건 때문에 느낀 무기력을 (시간적) 영속적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일시적 불행으로 여기는지. 또 절망감의 대상을 (공간적) 한정하는지, 다른 대상으로 파급하여 파악하는지.
이는 좋은 일에 대해서는 반대로 적용가능하다. 좋은 일이 영속적 특징 탓이라고 여기면 낙관주의, 일시적 요인 탓이라고 여기면 비관주의다.
사람 성격에 따라 영속성에 대한 긍정 점수가 높아도 파급성에 대해서는 낮을 수 있다.
낙관주의의 효과는 마음만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을 일으킨 경우를 국한적으로 취급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만하다고 미래를 희망적으로 인식하는 낙관주의자는 현재 맞이한 실패의 피해를 인생 전체에 확산되지 않도록 축소하여 실질적인 행복을 만들어낸다.
낙관주의를 학습하면, 미래에 대한 인식 개선 및 행동이 바뀌어 행복이 증진된다. 낙관주의 학습 방법은 다음과 같다.
ABCDE.
Adversity 역경을 맞이하면
Belief 내가 가진 실제보다 과장되고 왜곡된 믿음을 파악한다.
Consequence 내가 내린 잘못된 결론을 파악한다.
Disputation 비관하는 자아의 주장을 반박한다.
Energization 활력을 느낀다.

비관하는 자아를 반박하는 기법 네가지 :
-명백한 증거 제시 : 낙관적 생각이 명백한 증거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막연히 희망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것임에 비해, 이 반박은 실제보다 더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 만을 거두어내는 의미이다.
-다른 이유 찾기 : 현실의 많은 일들은 여러가지 원인의 가능성을 갖는다. 시험을 망친 것은 시험이 유난히 어려웠기 때문 일수도, 이번에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일수도, 교수가 평가를 공정하지 않게 했을 수도, 내 적성이 맞지 않아서 일수도 있다. 비관주의자는 그 여러가지 원인 중에서도 가장 영속적이고 파급력이 큰 최악의 원인에 매달린다. 이를 반박하려면 모든 가능성들을 샅샅이 조사하여 바꿀 수 있는 원인, 이번에 국한된 특수한 경우, 자기 외적인 원인들의 요인에 초점 맞추어 검토해야 한다.
-숨은 진실 찾기 : 설령 진실이 부정적인 원인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비관주의자의 생각속에서는 그로 인한 결과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한번의 실패가 의미하는 것은 생각처럼 치명적인 것이 아니기 쉽다.
-실질적 접근 : 현실적 삶은 본래 완전무결하지 않아서 어쨌거나 흠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은 과장된 절망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이제 현재에 대한 긍정적 정서 키우기에 대한 장이다.
현재에 대한 긍정적 정서에는 쾌감과 만족감이 있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쾌감은 지속성이 낮고 쉽게 익숙해지는 특징이 있다.
다음은 생활 중에 쾌락을 증가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이다.
-쾌감 사이의 간격을 넓히기.
쾌감은 이전의 열망을 식힘과 동시에 또다시 다음번의 열망을 자아낸다.
신경세포의 불응기(또는 뇌가 익숙한 자극을 무시하는 동안)의 동일한 쾌감 입력은 열망의 악순환을 통해 열망을 더욱 키우기만 할 뿐 쾌락을 주지는 않는다. 이른바 중독이다.
따라서 쾌감을 누리되 간격을 넓히는 방식이 유용하다.
-음미하기.
현재의 즐거움을 대충 흘려보내지 말고 최대한 만끽하는 것을 뜻한다.
음미를 돕는 다섯가지 방법을 소개하는데
타인과 공유하기,
추억만들기(사진이나 기념품),
자축하기,
다른 것을 차단하고 오로지 그 대상에만 집중하기,
생각하기를 멈추고 느끼기만 하는 심취하기 이다.
이 방법들을 이용하여 네가지 음미하기를 수행하면 쾌감이 증폭된다.
칭찬 축하 주고 받기,
감사하기,
감탄하기,
만끽하기이다.
-관심 기울이기.
불교적 가르침이라며 설명하는데, 결국 위빠사나를 뜻한다. (`위빠싸나 명상` 참조)

현재의 행복감이 쾌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쾌감과는 다른 행복감이 있다.
이를 충족감이라고 하자. (책에서는 만족감이라고 번역하는데, 내가 느끼는 어감상으로는 만족은 `욕망이 없는` 상태로 느껴진다.)
충족감과 쾌락의 차이는 행복한 삶과 쾌락적인 삶의 차이와 같은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와 같은 의미라고도 설명한다. 이 책의 원제가 Authentic Happiness 진정한 행복이며 책의 나머지 절반이 이 충족감에 대한 내용임을 감안하면 충족감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주장이다.
책은 사람이 어떤 일에 완전히 심취할 때 느끼는 것을 몰입(flow)라고 명명한다. 감각적 쾌감이 아닌 충족감의 핵심은 감정이 아니라 몰입이며, 몰입이 극에 달하면 무아도취, 정서가 없는 상태가 된다. (즉 삼매경이다.) 이는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서 오는 쾌락과는 다르다.
([*] 몰입과 삼매경을 행복의 본질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는 앞서 행복한 사람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사회성을 높인다는 분석과는 상반된다. 잠시 후 거론할 몰입도 높은 10대와 낮은 10대의 비교를 봐도 몰입도 낮은 10대가 더 높은 사회성을 보이고 있다.)
몰입도가 높은 10대와 낮은 10대의 비교.
몰입도가 낮은 10대들은 쇼핑을 주로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텔레비전을 많이 본다.
몰입도가 높은 이들은 취미활동, 스포츠, 숙제를 한다.
몰입도가 높은 이들은 몰입도가 낮은 이들을 즐겁게 생활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들처럼 해보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의 행위는 당장보다 미래에 보상받는다. 이를 심리적 자본형성이론으로 설명한다. 쾌락은 소비이며 몰입은 투자라고 말한다. 소비는 미래에 아무것도 축적하지 않으나 투자는 심리적 자산을 형성한다는 것이다...만, 현상에 대한 해석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맨 처음 행복의 특징을 조사하면서 행복도가 높은 응답을 한 22명의 현저한 특징이 사회성이 높으며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사회성이 높게 나오고, 몰입도가 높은 아이들은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즐거워보인다고 답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저 집단을 상대로 행복도를 조사하면 몰입도와 행복도의 관계가 어떻게 나올지 의문이다.
이 괴리는 행복의 본질에 대해 더 생각할 단서를 준다.

내 관점에 따라 해석하면 이 괴리는 축소된다.
이 책은 몰입의 즐거움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어조지만 그 표현에는 무리가 있다.
사람이 물을 마셔야 하는 이유는 빵이 진정한 음식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물을 안마시면 죽기 때문이다. 생물로서의 욕구만 충족해서는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는 생물적 욕구 충족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로는 몰입이 높여주는 것은 행복도의 고저 그 자체가 아니라 행복도의 항상성이다.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게 내 관점에서 보면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에서 발생한 가치 실현의 욕구)이다.
산사람을 상대로 조사하는 이상 일반적으로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도가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도보다는 높을 것이고, 그럼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에 치중하고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을 등안시 하면 결핍이 느껴지는 지점에서 행복도가 추락한다. 기분 좋은 것 같다가도 한켠의 공허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몰입도가 높아지면 이런 결핍을 채워주는 양이 늘어나서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행복도도 높아지지만 그건 결과에 불과하다. 기본적으로는 몰입은 편중된 결핍으로 인한 행복도의 추락을 매꾸어주어 항상성을 높여주는 영향을 미친다.
이런 내 관점을 바탕으로 조사된 데이터를 보면 이렇게 된다.
몰입도가 높은 아이들은 혼자서도 자기 취미활동 하며 잘 노는 반면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오히려 더 무리지어 몰려다니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혼자 두면 심심하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함께 다닐 누군가를 꼭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자기가 자유의지로 무엇을 바라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비교우위감으로 행복을 충족하려 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곧 친구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베프를 이기는 것을 삶의 행복으로 삼는 아이러니한 감정에 처하게 된다.
이 현상은 내가 관찰하기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성별에 따른 몰입도의 차이가 있는지는 책에 데이터가 없지만,
예상컨데 남성이 여성보다 몰입도와 집중력이 전반적으로 높게 나올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그 결과 남자가 여자보다 행복도의 (고저가 아닌) 항상성이 더 높을 것이다. 이는 앞서 책에 언급된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 두배에 정서 요동폭 두배'라는 조사 결과에 부합한다.
이 경향은 마누라에게도 부합하는데, 마누라는 몰입도가 상당히 높고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무리짓기를 덜 즐기는 편이며 기분의 항상성이 굉장히 높다. 이벤트를 해도 감격하는 게 아니라 그냥 평온하고, 이벤트 안 한다고 별로 뭐라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연애할 때 내가 힘들었다.

몰입의 즐거움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역시 무리가 있다.
사흘 굶은 사람이 빵 한조각을 발견하고 한입 물면 너무 행복해한다.
우리 아가가 맘마 먹으며 헤헤 웃을때도 보면 너무 행복해 한다.
몰입과 가치실현이 행복의 길이 되는 이유는 빵조각의 행복이 가짜 행복이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맛있는 요리여도 물 안마시면 목마르듯이 그 행복에도 불구하고 가치실현 활동을 하지 않으면 사람은 조만간 공허를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물로서의 욕구가 아무리 충족되어도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는 남는다. 그러나 빵만 먹었더니 목마르다고 해서 그 빵이 가짜 먹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렇게는 말이 된다.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이 완료된 상태에서 여분의 자원을 이용한 쾌감으로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면 한계 효용 체감을 거친 이 행복 추구는 효율이 매우 낮을 수 밖에 없다. 결핍되어 있던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를 충족 하는 것은 이것에 비하면 '진정한 행복'이다. 목 마르고 배부른데 과자 줏어 먹는 것보단 물 마시는 것이 진정한 행복감을 주듯이.

현실적으로 함께 몰입할 사람을 찾는 것에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몰입하는 사람이 몰입을 혼자서 해야만 하는 이유 같은 것은 없다.
몰입을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노래를 하건 그림을 그리건 함께 몰입하는 경험은 강렬한 유대를 제공한다.
이건 내가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의 기본 바탕이기도 하다. ('노래' 참조)

이 책의 주장을 공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로는 이 괴리는 오히려 지엽말단적인 것이다. 이 책의 진가는 좀 더 뒤에 나온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쾌락은 우울증을 불러온다.
60년대에 비해 미국 우울증 환자는 40년간 10배 증가했다.
원인은 쾌락에 이르는 손쉬운 방법에 의존한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적 우울에 대한 내 해석은 좀 다르다. '행복론, 피로사회와의 비교' 참조.)
우울증의 주요 증상은 자아도취이다. 자기의 느낌을 과장한다. 자기 슬픔을 곰곰히 생각하고 미래의 삶과 모든 활동에 투사하여 결국 자기 슬픔을 증폭시킨다.
무아도취하는 몰입은 감정에 충실한 자아도취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덜 우울하게 한다.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쾌락을 목적으로 하면 할수록 쾌락 이면에 우울도 함께 온다는 결과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쾌락과 우울이 함께 온다면 그만큼 행복의 항상성은 떨어진다.

여기까지 책의 절반이다.
쾌락 추구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르고 나자
행복의 길은 몰입하여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내 결론과 일치한다.
그리고 나서 책은 '그렇다면 무엇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를 찾고자 한다. 인문학과의 합치를 시도하는 셈이다.

문화 상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세계 도처에서 미덕으로 추구되는 것을 조사하여 여섯가지를 꼽았다.
지혜와 지식,
용기,
사랑과 인간애,
정의감,
절제력,
영성과 초월성.
사무라이가 추구하는 용기와 플라톤이 말한 용기는 다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인 공자의 인과 신의 사랑을 말하는 아퀴나스의 카리타스는 다르지만
상기 여섯가지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항목 임에는 틀림없다.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가치들을 추구하다보면 상기의 가치들로 수렴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무엇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가를 찾다가 초월적 가치 추구에 도달한 것이다.

다음으로 각각의 가치를 습득하고 계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저러하다고 하면, 나는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내가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 무엇을 추구하고 싶은 지를 찾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공한다.
먼저 6개의 가치를 24개의 특성으로 세분화했다. (지혜 안에 호기심, 학구열, 판단력, 사회적지능, ... 등으로)
가치는 추상적이라서 측량할 수 없지만 이를 실천하는 특성은 측량할 수 있다.
책에 제시된(저자의 웹사이트에는 더욱 자세히 나와 있다고 한다. http://www.authentichappiness.org)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대표 강점을 찾는다.
내가 잘하는 강점은 내가 그간의 삶에서 추구해 온 것이기 쉽다.
그리고 내 강점 중에도 내가 정말 내 모습으로 삼고 싶어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가령 저자의 경우 24개중 여섯 개 정도의 강점을 갖는 중에 한가지로 지도력이 높기는 하나, 이는 필요상 어쩔 수 없이 계발한 것이고 지도력을 발휘하면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진댄다.
내가 잘할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강점을 대표 강점으로 삼는다.
이것은 내가 그간 추구해 왔고 앞으로 추구할 가치를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저자는 '내가 창안한 행복한 삶의 공식은 자신의 대표 강점들을 주요 일상의 활동 속에서 날마다 발휘하여 큰 만족감과 참된 행복을 자아내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곧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유효한 답안이다.

방식과 적용에 대한 디테일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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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론 요약`에서 이어진다.

긍정심리학이란 무엇인가?
종래의 심리학은 정신적 장애를 치료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종래의 심리학은 생활이 힘든 환자의 심각한 장애를 치료하여 정상인의 범주에 돌려 놓는 것은 할 수 있었으나 정상인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사람을 덜 불행한 사람으로 돌려놓는 방법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연구가 긍정심리학이다.

내 관점에서 긍정심리학이란 통계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사회과학이 인문학과의 합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과학이 신이 된 시대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 참조)

책은 행복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행복이 보여주는 외면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정상인에게서도 찾아보면 정신병리학적인 징후를 몇가지는 찾아낼 수 있다.
한데 우울증의 9가지 증상중 5가지 이상이 해당되어야 우울증 환자로 진단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둘 정도로 (스스로 자기가 우울증환자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  어떤 사람에게서 몇몇 징후들이 옅보인다는게 별 의미를 갖지는 않았으며, 그에게서 이런 징후들을 치료한다고 그의 인생이 행복해지지도 않았다.
행복은 심리적 약점 보완이 아니라 심리적 강점의 강화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다.

행복하면 바보가 된다는 인식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부정적인 기분일때는 잘못된 것을 찾는데에 능률이 높아지고
행복할때에는 올바른 길을 발견하고 강화하는 능률이 높아진다.
부정적 감정인 공포 분노 등은 도망이나 공격등의 필요한 행동을 유발시킨다.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긍정적 정서는 사회성을 높여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222명의 대학생 중 상위 10퍼의 행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나머지 90퍼와 비교한 결과 관찰되는 현저한 특징은 폭넓은 대인관계와 보람있는 사회생활이었다.
다만 행복해서 사회성이 높은지 사회성이 높아서 행복한지 인과는 불명확하다.
다른 하나의 특징은 행복한 22명중 21명은 애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외의 요소들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 행복과 사회성의 상관관계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주장하는 바와 상충하는 면이 있다.)

부정적 감정이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제로섬 제임의 존재를 알리며 여기 적이 있다는 경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면, 긍정적 감정은 윈윈 게임이 시작된다는 신호를 보내며 여기 발전할 기회가 있다는 안내 신호를 보내는 감각계로 보인다. 긍정적 감정은 발전적이고 너그러우며 창조적인 사고작용을 활성화하고 사회성을 높여 발전을 극대화시켜준다. 한편 우울하거나 무기력증을 앓는 불행한 환자의 경우 소극적이고 학습능력이 저하되는 증상을 보인다.

현재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생각하기 위해선 먼저 행복을 영속적인 행복 수준과 순간적인 행복 수준으로 구분지어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순간적 행복수준은 단것을 먹기만 해도 순간적으로 올라가고 안좋은 일을 당하면 순간적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순간적 행복수준은 마치 사람에게 자동 행복 온도 조절기라도 달린 것처럼 빠른 시간 안에 영속적 행복수준으로 돌아가는 성질을 보였다. 우울한 사람은 복권에 맞아도 우울이 고쳐지지 않았다. 이는 고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큰 고난을 맞이한 경우에도 금새 고난과 쾌락에 대한 내성이 생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 배우자의 죽음이나 가족의 알츠하이머병 발병등의 몇몇 고난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긴 시간이 지나도 행복도가 별로 복구되지 않았다.)

개인의 행복한 정도를 표현하는 데에 다음과 같은 수식을 이용하였다.
영속적 행복수준=유전적 행복도+삶의 외부 환경 상황+개인의 자율적 내적 환경

행복과 유전의 상관관계를 조사해보면(각자 자란 쌍둥이간의 조사, 입양아의 친부모와의 비교 조사),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정도의 초기값이 유전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처럼 관찰된다.
부모의 행복을 느끼는 정도가 자식에게 유전되는 정도는 50%정도이다.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내가 느끼는 현재의 행복도를 기준으로 할 때에
행복도를 증진시키는 가능한 방법은 삶의 외부 환경을 바꾸거나 개인의 내적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외부 환경 상황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조사하면 다음과 같다.
-돈
경제적 구매력과 행복의 상관 관계는 전반적으로 비례하나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무관해진다.
행복과 돈의 상관관계는 돈 그자체보다도 돈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는 편이 옳다.
사상적인 이유로 돈의 비중이 낮아지지 않는 경우, 즉 물질만능주의자는 도리어 행복이 저해되었다.
(내 관점에서 보면 돈은 생물로서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자원을 대표한다. 돈의 최대 효과는 돈돈거리지 않게 해주는 것, 즉 돈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면에서 행복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일단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 다음에는 그 이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재화를 보유하는 것 만으로는 생물로서의 욕구를 충족할 뿐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 사회생활
원인과 결과중 어느쪽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상관관계는 높다. 그러나 불행한 사람에게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하라고 권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결혼전에 우울한 사람은 결혼후 배우자와의 충돌로 더 우울해지는 경우도 종종 발견되었다.

-부정적 감정빈도
강한 역의 상관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부정적 감정빈도와 긍정적 감정빈도는 완만한 반비례를 보인다. (즉, 절망속에서도 웃음은 난다. 사람에게 수없이 많은 약점 요소들을 일일이 보완하는 것보다 강점을 강화하는 것이 행복을 얻기에 유리한 것은 행복의 이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나이
나이가 들수록 생활 만족도는 완만 증가하는데, 유쾌감정은 감소하고, 불쾌감정은 불변한다.
상하 극단 감정은 점차 사라지며 정서의 강도는 약해지는 쪽으로 젊을때에 비해 크게 변한다.

-건강
주관적 건강은 부정적 정서를 강화하여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건강하다고 해서 행복해지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객관적 건강은 행복과 무관했으며 심지어 말기암환자의 생활만족도와 객관적 건강인의 생활만족도 간에도 큰 차이는 없었다. (스스로 건강을 비관하지 않는 한은 건강과 행복도는 별 상관 없다는 의미다.)

-학력, 지능, 사는 곳의 기후, 인종, 성별
무관하다.
단, 여성이 남성보다 기분 편차가 크다. 여자가 남자보다 우울증 경험이 두배이며 부정적 감정빈도도 두배이고 긍정적 감정빈도도 두배이다.

-종교
종교인이 더 행복하다는 연구결과는 꾸준히 나오고 있으나 근본 요인은 불명료하다.
종교의 사회 활동 때문인지, 종교가 가르치는 근면절제 생활태도 때문인지, 종교가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사는 곳의 기후나 경제력, 건강등을 포함한 외적환경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바꾼다 하더라도  행복도의 차이는 8%에서 15% 정도에 불과하다.
외적 환경은 행복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 영향도는 크지 않았다.

다음으로 내적 환경과 행복의 관계로 넘어가자.
내적 환경을 조성하는 긍정적 정서들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대한 것 : 만족, 안도, 성취감, 자부심, 평정등
미래에 대한 것 : 낙관주의, 희망, 신념, 신뢰등
현재에 대한 것 : 기쁨, 황홀경, 평온함, 열의, 정열, 즐거움, 가장 중요한 몰입.

과거에 대한 생각은 현재의 행복도에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어떤 사람이 과거에 받은 영향이 현재의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해 다음의 주장들을 살펴본다.
프로이트학파는 정서에 따라 사고가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무의식에 쌓인 감정이 사고의 과정을 유도하여 생각을 지배한다는 주의다.
반대로 인지과학은 사고에 의해 정서가 도출된다고 주장한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불안을 낳는다는 주의다.
양측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상당하다.
정서(감정)에 따라 사고가 지배되는 예시도,
생각을 바꿈으로써 정서를 지배하는 예시도 흔하다.
사고가 감정을 만드는지, 감정이 사고를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견해가 좁혀지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설명은 현대 심리학의 숙제라고 한다.
저자의 입장은 현재의 정서는 감각 입력으로부터 사고과정 없이 도출되지만
과거에 대한 모든 정서는 생각과 해석에 의해서만 도출된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대한 해석과 생각을 바꾸면 과거에 얽매이는 현재의 감정(분노, 회한등)과 현재의 만족도를 바꿀 수 있다는 예상을 내놓는 데에 의의를 둔다.

반면 이에 대한 내 입장은 `기억은 감정과 연계되어 있다`에 기술한 바를 따른다.
사고과정은 과거의 기억에 의해 영향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감정은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간의 자아동일성을 확보하여 기억을 생생하게 강화한다. 기억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과거의 감정은 사고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 대한 현재의 감정이 바뀌면, 가령 과거 미워했던 대상을 이제는 미워하지 않으면, `그것을 미워하는 과거의 나`와 `그것을 미워하지 않는 현재의 나` 사이에 자아동일성이 깨져서 생생하던 기억이 흐려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무의식에 축적된 감정이 갇힌 채로 나를 지배한다는 프로이트 이론과는 현상해석 및 예상이 다른데, 프로이트 이론에서는 현재의 감정이 바뀐다 하더라도 과거의 감정의 잔재가 무의식에 남아서 내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반면
내 이론상으로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현재의 감정이 바뀌면 자아동일성이 깨져서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적 해석에서 도출한 것이므로 현대 심리학의 숙제를 불교적 해석으로 풀이한 것이 된다.

다윈, 맑스, 프로이트는 인간을 과거에 의해 결정된 미래를 사는 존재라는 이데올로기에 가두었다.
다윈은 현재의 인간은 과거의 생존과 번식의 결과라는 사상을,
맑스는 역사적 필연론을,
프로이트는 모든 심리적 사건은 과거(유년기)에 의해 결정된 것의 반영이라는 사상을 퍼트렸다.
이 책의 입장은 저들에 대한 부정이다. 과거의 사건의 영향성은 이후의 자유의지에 의해 흐려진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헤겔의 결정론에 반발하여 자유의지를 강조한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에 대입할 수 있다.)

책은 유년기의 입력이 현재의 자아를 구속한다는 이론들에 대한 검증을 통해 허구성을 보여준다.
'내면의 아이를 달래주는' inner child 기법은 1990년대 대대적인인기를 얻은 자활치료운동의 요법이나, 어린시절의 사건들이 훗날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대한 증거는 전무하다. 50년에 걸쳐 막대한 연구비가 투자된 증거 수집 작업 -부모사망, 부모이혼, 질병, 체벌, 무시, 성적학대의 사례들- 에도 불구하고 신빙성있는 증거수집은 실패한 상태다. 또한 현재는 당시의 기간에는 감안되지 못했던 유전자적 요소 -자녀학대경향이 유전자적으로 자녀에게 유전가능하다는-를 감안한 연구가 진행중인데(각자 입양된 일란성쌍둥이의 성격비교, 입양아와 친부모간의 성격비교), 유전자의 영향성은 입증되었다.
유전자 영향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거 경험의 영향성은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사례 조사에서 이 둘이 서로 중첩된 현상으로 관찰되기 쉬움을 감안하면 내면아이 기법은 허구다.
결국 어린시절의 상처에 대한 연구는 정신분열증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화 david and lisa 참조.) 저자는 이를 '눈가리고 아웅' 이라고 평한다.

과거의 입력이 현재를 구속한다는 이론의 또다른 하나는 정서역학이다.
표출되지 못한 정서는 또다른 출구를 찾아 배출되며 이것이 심리적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정서역학(hydraulics of emotion)이라고 한다. 이는 프로이트파가 정신역학(psychodynamics)을 자기 학파의 주장을 기술하는데에 사용한 이후 아무런 학문적 검증없이 파급되었다. 그런데 정서역학에 기반한 우울증 치료중에 환자가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표출하자, 환자가 과거의 표출을 통해 정서 배출을 할 것이라는 이론과 달리 환자가 과거의 고통을 현재의 고통으로 혼란을 일으켜 자살기도하는 일이 생겼다. 이와 같은 현상을 배경으로 50년대말 아론 벡의 인지치료가 시작된다.
또한 분노의 연구에서도 이 정서역학은 허구임이 드러난다. 미국의 문화는 동양 문화와 달리 분노를 참지 않고 표출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론과 달리 통계는 노골적인 분노 표출이 더 큰 분노 및 건강에의 해악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255명의 의과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된 연구는 가장 분노를 잘 표출한 사람은 가장 적게 화를 내는 사람에 비해 25년후 심장질환 확률이 5배였다. 고함치기, 참지 않음 등의 분노 표출은 정서역학이론과 달리 더 화를 잘 내는 사람을 만들고 분노의 해악에 더 쉽게 노출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는 정서역학이 적응의 요인을 배제한 탓이라는게 저자의견이다.
억압된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억압된 정서는 적응을 거쳐 이내 내적으로 안정된다. 적응의 효과로 표출하지 않더라도 해소되며 오히려 표출시에 `길이 닦이는` 효과로 인해 자아가 그 정서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정서역학은 허구다.
(이는 극복에 대한 내 생각인 `기억은 감정과 연계되어 있다`와 비교 가능하다. 과거의 사실을 `그런일이 일어났다. 다 지나간 일이다. 그뿐이다.`라고 하고 연계된 감정을 놓아버리면 자아동일성이 깨져서 상처가 극복된다. 극복은 정서역학적으로 과거의 상처를 상기하고 현재로 끌고 와서 이기는게 아니라, 감정을 바꿔서 자아동일성을 깨고 사건의 생생하던 기억을 흐리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과거의 입력에 현재의 자아가 구속된다는 이론들을 허구라고 반박하였다.
이는 과거에 대한 정서들을 긍정적으로 만듬으로써 더 행복해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과거에 대한 정서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감사, 용서, 망각이 있다.
감사를 활용하는 법은 감사 편지를 써서 상대방에게 찾아가 읽어주거나, 감사 일기를 쓰는 것인데, 결국 감사할 일을 상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사편지는 저자의 경험담이고 감사일기의 행복 증진 효과는 실험을 통해 통계적으로 입증되었다.

감사 일기를 내 관점에서 해석하면 :
(`불편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방법` 참조)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감사의 기록은 감사의 기억을 증폭함으로써 내 주관적 역사에 감사할 일만을 골라 남긴다.
모든 것이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 와중에 기록을 통해 강조된 기억은 잊혀진 다른 사건들에 비해 현격하게 강한 힘으로 내 사고과정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인과를 지배한다.
사람이 생각을 할 때 모든 기억이 그 순간에 의상 표층에 떠올라있는 채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일어났던 일은 기억을 통해 자아에 영향을 미치며, 기억은 사고의 구조와 뇌 회로를 구성하는데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자아에 영향을 준다고 가정할 수 있다. 검증되지 않은 물질적 일원론적인 요소를 배제하더라도 경험은 기억을 통해서 자아의 사고 구조를 형성하고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 기억은 기록 및 상기에 의해 편집 가능하므로, 이는 자아의 주관적 역사를 편집하여 경험이 자아에 미치는 인과를 의도적으로 편집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부정적 기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부정적 사건들이 잊고 넘어간 후 항상성에 의해 복구되면 흔적이 남지 않을 수준이기 일쑤지만, 복수심을 되새기면 자아가 받는 영향성은 한번이 아니라 열번 백번의 부정적 경험이 된다.
경험이 기억으로 되새겨지면서 자아에 미치는 영향성이 증폭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기억으로 되새김하지 않으면 그 영향성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작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감사는 긍정적 기억을 증폭시키는 방법이다.
다른 한편으로 부정적 기억을 축소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용서와 망각이 그것이다.
책에는 용서에 이르는 길이 소개된다.
REACH
Recall 피해사건을 돌이켜 생각하기
Empathize 가해자에 감정이입
Altruistic gift 용서를 이타적 선물로 인식하기
commit 용서하기로 공개적으로 약속하기
hold 약속한 것 지키기

책에서 제시된 용서는, 그 행위자의 입장을 생각하고-과거 내가 타자들로부터 선물 받았던 용서를 생각하고-이를 타자들에게 돌려준다는 마음으로-공개적으로 용서를 발표한 후-이 마음을 지킨다는 것인데, 별로 와닿지 않는다.
이는 행위를 용서하는 것을 뜻한다.
내 식으로 해석하자면 필요한 것은 증오하는 나와의 자아동일성을 깨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증오를 되새기지 않고 흘려버리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증오하지 않기 위해서 `행위에 대한 용서`가 꼭 필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게 바람직한지도 의문이다. 용서한다고 해결되는게 아니라는 것에 대한 송혜교 주연 영화도 있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극복은 과거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안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과거를 바꾸고 싶다'라는 마음을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는 객관적 사실로서 인정하고
당시의 감정을 놓아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치유다.
감정이 바뀌면 자아동일성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런일이 일어났었다.`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안타깝다 등의 가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이나 누구 때문에 라는 책망의 감정을 이어붙이지 말고, 그저 과거에 일어났다는 객관적 사건으로 인정하는 것.
행위에 대한 용서로써 이 결과를 도출하려 하는 것은
오바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현위치는 자유 의지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인식을 개선하여 행복을 증진하는 방법이고, 여기까지 해서 과거에 대한 인식 개선편이 끝난다.
과거에 의해서 미래가 구속되어 `자유의지로 어쩔 수 없는 미래`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후
감사로 좋은 경험을 증폭하고 용서로 나쁜 경험을 축소하는 방법이었다.

일단 여기까지.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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