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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할수록 설령 더 나은 것을 보더라도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다.
못생긴 강아지처럼 생긴 자기 세살 아이를 유투브의 인형같은 아이랑 바꾸고 싶은가 생각해보라.
자식만 그런게 아니다.
연인을 다른 잘난 여자와 바꾸고 싶은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다.
당신 인생을 다른 인생과 바꾸고 싶은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다.
사랑하면 고유해지고 고유한 것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잘난 자신(사춘기에 발동), 더 잘난 연인(오춘기에 발동), 더 잘난 가족(애 낳고 발동)을 탐내는 것을 상쇄하는 것은 사랑의 문제다.
내가 애를 사랑하면 남의 집 천재소년으로 바꾸고 싶지 않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면 남의 잘난 여자가 탐나는 마음이 가라앉는다.
내가 내 삶을 사랑하면 타인의 삶이 탐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의 부족은 인생의 존재 의의를 흔든다.
무엇이 행복한가?
나는 가족이 웃는 모습이 행복하다.
내 행복의 정체가 타인의 행복이라는 건 순환 논리처럼 이상하지만 실제로 이게 삶의 이유 대부분이라 빼놓고 행복을 논하기 어렵다.
이건 특별히 가족적이어서가 아니다.
수리남 사이비 교주 겸 살인마 겸 마약왕인 대악당이 돈으로 유혹하는 대사가 "그 돈이면 와이프가 어떤 차를 타고 아이들이 어떤 학교를 다닐지"다.
악마 같이 벌어도 쓰고 싶은 곳은 가족의 행복이란 거다.
극한 예시로 설령 섹스에 미친 남자라도 삽입감 좋은 목석보단 리액션을 즐길 것이다.
이건 선함이나 이타성 때문이 아니라 유전자에 새겨진 마약 버튼 같다.
사랑이 부족해지면 이 마약버튼이 잘 동작하지 않게 된다.
고독에 취약한 사회적 동물로 진화한 인간의 두뇌는 결코 단독으로 고통의 총량을 능가하는 기쁨을 생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각종 자극에 익숙해지고 학습이 끝난 두뇌는 즐거운 일이 줄어든다. 어릴때 재밌던 것들이 어지간히 익숙해진 나이에 이르러 이 성향이 더 강해지고 있다.
이젠 게임도 안한다. 여행, 미식, 수집, 내 즐거움을 직접 타게팅하는 종류의 재화는 거의 흥미를 잃었다.
'어디가서 뭘 먹이면 좋아할까?' 어떻게 하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볼까 라는 간접 타게팅이 더 잘 동작하고 있다.
퇴근 길에 딸기 케이크를 사왔던 날 난 케이크 같은 건 전혀 좋아하지 않는데 공부하는 아이들과 아내 옆에서 기웃거리며 '언제 먹지? 좋아하면 좋겠다'하고 있었다.
딸기 케이크 맛 따위는 아무리 훌륭한 맛이어도 허무한 감각일 수 있으나 그것이 타인의 기쁨을 거쳐 오면 맛 이상의 의미가 된다.

사랑의 부족은 비교로 느끼는 상대적인 고통으로도
스스로 느끼는 절대적인 즐거움으로도 나타나는 바,
사랑함으로써 군집생물인 인간의 비교에 의한 고통을 가라앉히고 역시 군집생물이기에 느끼는 즐거움이 잘 동작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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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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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은 계획가는 난관을 만났을 때 많은 생각으로 치밀한 계획을 만든다. 그런데 현실의 복잡도는 한 사람의 뇌가 시뮬할 수 있는 용량을 넘어가서 현실은 계획과 달라진다. 이에 계획가는 계획이 틀어질 경우까지 대비하는 plan a b c d를 만든다. plan z까지 모든 계획을 다 쓰고도 넘지 못하는 난관 앞에서 계획가는 현실의 벽의 두터움을 느낀다.

그런데 현실의 벽은 일반적인 능력치를 바탕으로 설정된 것이다. '통상 범주인 1의 능력치를 상정했을 때 이 벽은 절대 넘지 못한다'처럼. 계획은 이 현실적인 통상범주의 능력치를 기준으로 시뮬하는 것이라서 넘을 수 없는 벽을 절대 넘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숙련으로 통상을 벗어나는 능력치를 갖곤 한다. 반복된 숙련으로 능력치가 통상의 범위를 넘어가면 현실의 벽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투명해진다.
그래서 생각과 계획을 아무리 반복해도 견고하기만 하던 현실의 벽은 행동하고 숙련함에 따라 마법처럼 증발한다.

생각의 한계와 행동의 힘은 계획의 한계와 숙련의 힘으로 이어진다. 난관을 넘는 길은 신중한 생각과 계획이 아니라 반복된 행동과 숙련에 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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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을 때 감사 대신에 소중함이라는 표현으로 바꿔서 이해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쉬웠다.
감사라고 표현하면 감사할 대상이 존재해야 성립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종교인은 모든 것을 신께 감사하겠지만 나는 시간처럼 주어진 것이나 내가 이룬 것일 경우에 이걸 누구에게 감사하나 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소중함이라고 하면 내가 이룬 것이라 해도 소중함이 약해지지 않는다.
감사하며 살기란 소중함을 알아채는 것이다. 책에서 말하는 지금 내가 감사할 일을 찾는 것은, 상실감 즉 없을 때의 감각을 기준으로 지금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아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아무리 높은 산도 고원지대에 사는 사람 눈에는 낮아 보일 수 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금새 익숙해지고 당연해져서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코로나 없는 건강, 전쟁 없는 평화,
삶의 터전인 가정과 일터,
물과 공기나 삶 그 자체인 시간까지도
무엇이든 당연시 될 수 있다.
없음을 기준점으로 잡지 않고 있음을 당연시 하면 아무리 소중한 것도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낭비하게 된다.

사고로 전신마비에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 기적과 재활훈련 끝에 어느날 모든 건강을 회복하고 지금 나와 같은 상황이 되었다고 치자. 그는 햇살과 바람을 누리고 뛰어다니며 엄청나게 행복해 할 것이다.
내가 누리고 있는 삶의 해발고도는 그렇게 높다. 행복감으로 전력을 다해 누려야 마땅하다. 내 현재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 내 가치를 알아보는 눈에 뭔가 문제가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 책을 빌렸던 2020년의 일이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둥글고 큰 기둥이 있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그 기둥을 봤는데,
걸음마를 시작한 딸과 도서관 기둥 주위로 술래잡기를 하던 기억이 가슴 시리게 그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 날 내가 그 기둥을 고른 이유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딸과 놀아주기 위해서 였다는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기둥을 이용하면 조금만 움직여도 보이지 않게 되니까 귀찮은 마음으로 기둥을 돌았고 그조차 그리 길게 놀아주지 못한 채 지루해 했었다.
왜 이제와서 그리운 느낌이 드나 생각했는데,
2020년에 장인 어른이 사고로 생사를 오가다 돌아가시고 코로나도 확산되고 어려운 시간이던 중에 그간의 평화로운 삶이 계속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아이의 어린 날이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이 되었다는 상실감으로 인해서 소중하게 느껴질 기준점을 가진 상태로 회상했기 때문이었다.
상실감과 불안감은 불행감의 근본이지만
그런 상실감각이 소중함을 알게 하는 기준점이 되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아이의 어린 시절과 유투브 예능 보기 중에 무엇이 더 가치있을까. 다들 많은 경우에 판단을 잘못한다. 판단이 흐려지면 세월 지난 후에 후회해도 늦다.

소중한 것의 가치를 바로 알기 위해선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감사 일기를 쓰는 대신에 매일 가만히 이런 생각을 한다.
먼저 '당연히 있는' 것을 생각하고
상실했을 때와 비교하여 소중함을 알아차리고
안도와 행복감을 느낀다.
이 정도는 내게는 당연하다 여기는 자존심의 느낌을 지운다.
다행이다 라고 느낀다.
가족이 있어줘서 다행이다.
여기 우리의 공통점인 일터가,
건강이,
평화가.

이적의 노래중에 다행이다 라는 곡이 있다.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다 라는 것은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내게 있는 모든 것에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당연시 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에 다행이다 라고 느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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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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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물 혹은 멋진신세계 같은 쾌락충족형 디스토피아물이 그리는 세상은 서로 유사하다. 이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유토피아가 실제로는 이상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존이 공짜이던 시절 뭘하면 '재미'있을까를 답없이 고민했었다. 답은 없었다. 생존이 공짜가 되면 생존의 노력이 의미를 잃어 가치와 감각이 뒤틀린다.
간절한 꿈도 희망도 성공도 행복도 생존을 위한 노력에서 온다. 살아남기 위해서 기존에 안하던 짓까지 해가며 움직이는 것이 성취를 만들고 이는 곧 단순 생존 이상의 큰 성공으로 직결되기에 이른다.

매슬로우 욕구론을 생각하면서 아이에게 생존의 공포를 배제해 주고 풍요롭게 하면 고차원적인 열정을 갖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실상은 아니다.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 것은 결핍이다.

생존 공포의 완전한 배제는 생존을 위한 노력의 의미를 거세하는 것과 같다. 유토피아라고 그린 사회가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행복감은 효율을 높이고 마인드 셋을 바로잡아 행운을 부른다. 그러나 생존을 공짜로 만드는 풍족이 행복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치트키를 켜서 난이도를 0으로 만들어 버린 게임은 지루한 노가다에 불과해지는 것처럼.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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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만나서 나이 드니까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얘기를 했다.
수용체가 말라붙은 것처럼 뭘해도 그다지 재밌지 않다.
재밌는 것은 단지 아이나 아내가 재밌어하면 그걸 보는 게 재밌다.
유전자에 새겨진 특성 같다.
나이들어서도 홀로 재밌을 수 있는 현자는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어서 대가 끊겨 멸종했고 나이들면 아이 키우기에 홀려있는 바보들의 유전자만 살아남아 우리 조상이 된게다.
그러고 나니 이젠 애키울 때라서 맛있는 걸 내가 먹는 것보다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게 더 맛있다. 여행을 가도 혼자서 구경하는 건 재미없고 가족들 데리고 힘만 들게 다니면서 가족들이 좋아하는 걸 보는 게 좋다.
즐거움을 느끼는 수용체가 아이들에게 이동해 버린 듯한 이 상황에서 두가지 해법을 생각하고 있다.

아이에게 좋은 것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내 눈앞에서 멀어지는 것은 지양한다. 나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멀리 어딘가로 떨어지게 되면 즐거움 느낄 수용체 없이 남은 내 삶은 인고의 시간이 될테니까.
기러기건 기숙사건 유학이건 혹은 아이가 친구들과 놀게 아빠는 돈만 내주길 원하는 류의 소원이건 이런 판단을 할 상황은 많이 발생한다.
나이들면 홀로 재미를 느끼기 어려워진다는 건 중요한데 꽤 무시된다.
미혼의 돈 잘버는 후배와 얘기할 땐 결혼을 고려할 이유가 된다.
아이 교육을 위해 장거리 주말부부 하는 고위 공무원인 친구는 객관적으로 그만둘 이유가 없는 직장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낙이 없었다. 주말에만 몇시간씩 운전해가서 힘들게 아이를 만나는 건 즐거울 구석 없는 인고의 삶이 될 것이다. 아이가 아빠에게 알아서 기쁜 모습 보이며 낙을 주면 괜찮겠지만 그럴리가 없으니 지친 아빠가 아이에게 인풋을 넣어야 하는데 주중 근로와 주말 운전으로 지친 상태로는 그것도 잘 안될테니까.

수용체가 나이의 영향으로 무뎌지는 것은 내 내적인 변화이므로 더 즐거운 새 취미를 찾아내기 보다는 운동과 집중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단련하면 왠만큼 효과 있을 것이다. 어릴때도 못하던 턱걸이를 나이든 후 운동하면서 할 수 있게 된 경험에서 내가 살아온 과거가 내 최대치가 아니었음을 안다. 과거에 특별히 훈련해서 최대치로 발휘했던 분야가 아닌 이상 지금이라도 단련하면 꽤 큰 효과가 나고 과거를 능가할 수도 있다. 한동안 안듣던 음악 등 문화 컨텐츠에 좀 더 집중해서 감정을 움직여보고 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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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게임 제작자가 쓴 '라프 코스터의 재미이론'이라는 책이 있다. 그가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재미가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경험으로부터 특정한 패턴을 파악하고 그것을 학습한다. 물로 만들어진 파도무늬와 모래로 만들어진 사구의 파도무늬는 소재가 달라도 파도무늬라는 패턴을 공통적으로 추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험한 현상으로부터 패턴을 추출할 수 있는데, 사랑이니 정의니 자연법칙이니 하는 모든 관념은 이런 추출된 패턴에 해당한다.
사람은 경험으로부터 패턴을 해독해내서 발견하고 습득한다. 현상으로부터 패턴을 파악하는 것을 연구라고 한다. 전체 패턴을 해독하기에 유리하도록 사건의 일부를 관념화하는 것은 분석이고, 그 개별 관념들이 만드는 흐름에서 법칙을 찾는 것은 통찰이다. 분석에 사용하는 관념은 새로 만들거나 기존의 것을 배워서 사용한다. 관념을 새로 만들어서 이용하는 경우는 아무래도 드물고, 많은 경우에 기존의 관념들(언어로 이름 붙여져서 어휘가 된다)을 배워서 이용한다.
관념들이 엮여서 만드는 흐름중에서 법칙을 찾아낼 때에도 이 법칙은 논리와 인과 같은 기존에 알고 있던 법칙과 유사하기 일쑤다. 그래서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해 본 경험이 많을수록 흐름으로부터 법칙을 파악하는 능력인 통찰력을 갖기에 유리해진다.

라프 코스터는 패턴 학습의 과정이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숨겨진 패턴이 너무 어려워서 해독이 안되면 무의미한 노이즈와 마찬가지가 되고 패턴 습득이 일어나지 않아 재미가 없다. 패턴이 너무 쉬워서 이미 학습이 완료된 것이면 패턴 습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재미는 적당한 난이도에서 패턴을 파악하고 습득하는 과정이 일어날 때에 느낄 수 있다. 이는 게임의 재미 뿐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을 '읽는' 재미에도 적용된다.
자기가 신봉하는 신념(권선징악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이 스토리에서 재확인될때의 쾌감, 이미 깔려있던 복선으로부터 개연성있는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는 쾌감... 이런 것들로는 스토리의 재미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움이 없으면 재미가 없는 것도 재미가 패턴학습의 과정에서 생겨난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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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onglive.tistory.com/m/post/600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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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과 자유의지가 이루는 인격

사람은 생물적 본능과 자유의지로 인격을 형성한다.


예술이란

사람은 생물적 본능과 자유의지 어느 한쪽에 완전히 치우칠 수 없다. 누구나 비효율적인 취향을 갖고 예술가조차 팔릴 예술을 추구한다.


자유의지와 초월적 가치

생물적 욕구와 자유의지 욕구가 만날 때, 미지를 향하되 생존은 충족되어야 하기에 불안을 거쳐 초월적 가치 추구에 이른다. 자유의지욕구는 충족하면 할수록 점점 더 초월적가치 추구를 향하게 되며 이것이 그 어떤 악한이라 해도 가지고 있는 불성이다. 모든 자유의지는 성불에 이른다. 여기서 초월적가치추구란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다. 더 지혜로워지기 위해 연구 공부하거나 도덕적 무지나 나약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거나 예술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추구하거나 참선등을 통해 성스러운 초월지를 추구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인생에 무엇이 진정 가치있는가를 찾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뇌과학 서적 읽는 중에.

순간의 선택의 결과들은 신경망 구조위에 집적된다. 즉 자유의지는 집적된다.

자아, 자유의지 그리고 패러다임.

자유의지의 존재여부는 현재 패러다임 하에서 알 수 없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자유를 박탈당한채 쾌락에 취한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행복의 본질은 자유의지를 통해 가치를 추구 하는 데에 있다. 곧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가치 추구는 하면 할수록 종국에는 초월적 가치추구에 이르게 된다. 이를 위해선 자유의지 개발이 필요하다.

행복론 요약

행복론, 피로사회와의 비교 : 피로사회의 해석을 떠나서 내 식으로 같은 문제를 해석함.

행복론, 자유의지욕구 발달과정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1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2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3 : 24덕목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4 : 실생활 적용 예시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5 : 삶의 의미

긍정심리학의 방법은 가치를 찾는 데에 도움이 된다.


결혼, 육아, 인생의 의미.

리스크 프리

인생관 :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숙달하여 항상 구현가능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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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맞이 인생관 점검 시간.

내가 인생관으로 삼고 있는 것은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이다.
이때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내가 추구하기를 선호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긍정심리학의 방법을 참조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으면서 가치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뜻은 비교적 명확하다.
그런데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문제다.

흔한 말로 1등을 하기 보다 1등을 유지하는 게 어렵다.
요동치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 운을 타고 반짝하는 퍼포먼스를 내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한번씩은 찾아올 정도로 쉽기에
한번 1등을 하는 것은 운이 좋으면 얻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그 퍼포먼스를 운이야 어찌되든 내 의지대로 언제라도 발휘할 수 있는 진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여태 이룬 적이 없는 더 높은 퍼포먼스를 내도록 하는 것 보다도 중요한 건
내가 과거에 이룬 적이 있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지구력이다.
기본 옾셋을 높이면 최고치도 올라가기 마련이라서 전자는 후자를 연마하다 보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기도 하다.
(발동 확률 값을 높이는 이러한 지구력을 기르려 하기 보다
여러 번의 시도로 낮은 발동 확률을 극복하려고 함으로써 최고의 퍼포먼스 즉 대박이 얻어 걸리길 바라는 것을 두고
요행수를 추구한다고 한다.)

가치가 현실에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지구력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기대되는 가치, 즉 기대 수익이며 기대 수익은 안정성과 성과의 곱이기 때문이다.
항상 안정적인 성과를 내는 지구력은 단발성 성과에 비해 기대 수익을 엄청나게 높여주기 때문에 현실에 발휘하는 영향력도 굉장히 커진다.
해리포터를 쓴 조앤롤링은 어떻게 큰 돈을 벌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녀의 엄청난 원고료는 시리즈물에서 안정적인 수익성이 반복 예상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령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 처럼 인생 단 한번의 걸작을 쓴 사람은 설령 그 한권의 작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조앤롤링처럼 높은 고료를 받을 수는 없다.
과학이 왜 그토록 높은 대우를 받는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예다. 과학은 현재 다른 어떤 학문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공헌한 정도의 총합을 두고 따진다면 짧은 과학의 역사보다 종교나 인문학이 훨씬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과거에 이룬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래에 기대되는 가치 수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 번 해낸 것이 한 번에 그칠 때와 그것을 숙달하여 언제라도 내 뜻대로 해낼 수 있을 때의 효과 차이는 상상 이상이다.
한번도 해낸 적이 없는 것을 한번 해내면 뭔가 엄청난게 바뀔 줄 알았는데 막상 이루고 보니 별거 없더라며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겨우 한번 이뤘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번 이룬 성과에 매달리거나 실망하지 말고 그것이 어쩌다 얻어 걸린 것이 아닌 내가 내 뜻대로 언제라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되도록 숙달하고, 또한 망각과 노화 요인조차 극복하도록 시스템을 구성하여 성과를 유지한다면 그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된다.
지금까지 내가 해낸 적이 있는 것 중에 최선의 성과를 목표로 잡고,
그것을 운에 좌우되지 않고 언제라도 해낼 수 있도록 허술한 지점을 보완하고 반복하여 숙달하고 시스템화 할 때 그것이 가치를 만들고 성공을 만든다.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내가 추구하기로 선택한 가치를 생산하기를 반복 지속하여 숙달 및 시스템 구축함으로써 미래에 언제라도 내 의지대로 이 가치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환경적 우연에 휘둘리지 않고 내 자유의지를 확장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내는 성과는 외부 환경적 우연 요소의 영향과 내 자유의지의 영향이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과 환경 요소에 휘둘리는 것을 줄이고 내 의지로 언제라도 성과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내 자유의지의 효과를 확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숙달은 가치의 미래 기대 수익을 안정적으로 높여주며 그로써 현실에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흔히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 '성과를 추구한다,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에 대비되어 쓰이는 뉘앙스를 갖곤 하는 이유도 이러한 이해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나는 내 아이가 자기가 추구하기를 선호하는 가치를 파악하도록 할 것이며, 그러한 가치를 운이 아닌 자기 의지대로 항상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지구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고자 하는 방식이며 물려주고자 하는 방식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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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해 논한 2010년 캐시모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현실은, 우리가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이 우리가 파리나 박테리아 수준으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설탕 한 줌이 자유 의지가 없는 수준으로 우리도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고 그 법칙은 자유 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말은 넌센스다.
자연의 법직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가 관찰 할 수 있는 현상을 관찰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학도 그의 관찰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찰하고 그의 역학을 완벽하게 설명하여서 대표적인 예시로 사용했던 역학현상에서 조차도
'항상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들이 있었다.
이는 후에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위기로 내몰고, 뉴튼 역학에 의해 해석되며,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뉴튼역학도 뉴튼이 관찰한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광속도에 근접한 계에서 자연의 법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설명한 자연의 법칙은 전 우주에서 동일하게 동작하지만
뉴튼이 관찰했던 조건과 환경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뉴튼 역학을 완벽하게 보여줘서 뉴튼이 대표적인 예시로서 사용한 계에서 조차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이 있었다.
이는 역학뿐 아니라 과학의 모든 패러다임이 마찬가지다.

패러다임은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형상을 만든다.
('세계는 신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뱀과 코끼리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는 섬이다.')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의 탐구활동은 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어서 전체 구조물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활동이다.
('세계를 떠받치는 코끼리는 몇마리인가?')
과학의 발전은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 이미 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전체 구조 자체를 합당한 구조로 파악하는 것이 발전이다.)
현재 따르고 있는 패러다임이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캐시모어 논문의 저 마지막 말은 설탕 한줌에 대한 자연의 법칙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상정한다.
이는 과학은 완성되었으며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고 자신하는 것과 같다.
오산이다.
진짜 현실은, 자유의지를 논하기엔 설탕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과학이 '인간은 오토마타이며 의식은 그 로그파일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놓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항상 관찰하는 자의식과 자유의지는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명백히 관찰되는 현상은 그 자체로 패러다임보다도 한 단계 위의 확실성을 갖는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장차 무엇이 현재의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몰고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이끌어 낼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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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육아(+딸린 작업)의 인생 프로젝트는 되는대로 대충하고선 리턴되는 쾌감을 수동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즐거운 작업이 아니다.
잘 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하는 최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수행함에 있어서 즐거운 작업이 된다.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최선을 찾고 그것에 이르기까지 노력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대충 아무랑 결혼하여 겉보기에 흠 없는 표지를 만들 수 있는가' 여부가 아니라
내 인생을 걸 최선의 상대방이 누군지 알 수 있는 안목을 만드는 작업도 하고
고른 상대방과 조율 맞추는 법을 익히는 작업도 하며
최선을 지향하는 생각과 결정과 노력의 과정을 수행함에 있다.
과정 다 건너뛰고 결과물로 '대충 흔한 결혼의 리턴되는 쾌감의 양'을 보는 식으로는 결혼의/육아의/인생의 진가를 평가할 수 없다.

결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서
종교에 귀의하거나 예술이나 정의구현에 투신하거나 학문에 몸바치거나
자기가 추구하는 최선을 위해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같은 이유로 이미 있는 가정을 버리고 출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버림에도 그들이 폄하받지 않는 이유, 혹은 추앙되기까지 하는 이유는 단지 이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선의 인생을 추구하였으므로.'
부연컨데 이때 말하는 최선의 인생은 최선을 만드는 작업에서 진가를 볼 수 있지, 리턴되는 쾌락의 양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는게 심심했었다.
뭐가 재미있을까 찾으며 이것 저것 해봤더니 결국 공부가 남더라.
왜 학문이 역사적으로 귀족의 여흥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키는 공부를 찾아서 하는 건 다른 모든 활동에 비해 인생의 의미를 주는 행위 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생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려는 작업에 비하면 단순한 것이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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