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정서를 바꾸어 현재의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방법이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정서는 신념, 신뢰, 자신감, 희망, 낙관주의.
이중 낙관주의와 희망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낙관주의는 영속성과 파급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쁜 사건 때문에 느낀 무기력을 (시간적) 영속적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일시적 불행으로 여기는지. 또 절망감의 대상을 (공간적) 한정하는지, 다른 대상으로 파급하여 파악하는지.
이는 좋은 일에 대해서는 반대로 적용가능하다. 좋은 일이 영속적 특징 탓이라고 여기면 낙관주의, 일시적 요인 탓이라고 여기면 비관주의다.
사람 성격에 따라 영속성에 대한 긍정 점수가 높아도 파급성에 대해서는 낮을 수 있다.
낙관주의의 효과는 마음만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을 일으킨 경우를 국한적으로 취급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만하다고 미래를 희망적으로 인식하는 낙관주의자는 현재 맞이한 실패의 피해를 인생 전체에 확산되지 않도록 축소하여 실질적인 행복을 만들어낸다.
낙관주의를 학습하면, 미래에 대한 인식 개선 및 행동이 바뀌어 행복이 증진된다. 낙관주의 학습 방법은 다음과 같다.
ABCDE.
Adversity 역경을 맞이하면
Belief 내가 가진 실제보다 과장되고 왜곡된 믿음을 파악한다.
Consequence 내가 내린 잘못된 결론을 파악한다.
Disputation 비관하는 자아의 주장을 반박한다.
Energization 활력을 느낀다.
비관하는 자아를 반박하는 기법 네가지 :
-명백한 증거 제시 : 낙관적 생각이 명백한 증거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막연히 희망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것임에 비해, 이 반박은 실제보다 더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 만을 거두어내는 의미이다.
-다른 이유 찾기 : 현실의 많은 일들은 여러가지 원인의 가능성을 갖는다. 시험을 망친 것은 시험이 유난히 어려웠기 때문 일수도, 이번에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일수도, 교수가 평가를 공정하지 않게 했을 수도, 내 적성이 맞지 않아서 일수도 있다. 비관주의자는 그 여러가지 원인 중에서도 가장 영속적이고 파급력이 큰 최악의 원인에 매달린다. 이를 반박하려면 모든 가능성들을 샅샅이 조사하여 바꿀 수 있는 원인, 이번에 국한된 특수한 경우, 자기 외적인 원인들의 요인에 초점 맞추어 검토해야 한다.
-숨은 진실 찾기 : 설령 진실이 부정적인 원인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비관주의자의 생각속에서는 그로 인한 결과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한번의 실패가 의미하는 것은 생각처럼 치명적인 것이 아니기 쉽다.
-실질적 접근 : 현실적 삶은 본래 완전무결하지 않아서 어쨌거나 흠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은 과장된 절망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이제 현재에 대한 긍정적 정서 키우기에 대한 장이다.
현재에 대한 긍정적 정서에는 쾌감과 만족감이 있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쾌감은 지속성이 낮고 쉽게 익숙해지는 특징이 있다.
다음은 생활 중에 쾌락을 증가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이다.
-쾌감 사이의 간격을 넓히기.
쾌감은 이전의 열망을 식힘과 동시에 또다시 다음번의 열망을 자아낸다.
신경세포의 불응기(또는 뇌가 익숙한 자극을 무시하는 동안)의 동일한 쾌감 입력은 열망의 악순환을 통해 열망을 더욱 키우기만 할 뿐 쾌락을 주지는 않는다. 이른바 중독이다.
따라서 쾌감을 누리되 간격을 넓히는 방식이 유용하다.
-음미하기.
현재의 즐거움을 대충 흘려보내지 말고 최대한 만끽하는 것을 뜻한다.
음미를 돕는 다섯가지 방법을 소개하는데
타인과 공유하기,
추억만들기(사진이나 기념품),
자축하기,
다른 것을 차단하고 오로지 그 대상에만 집중하기,
생각하기를 멈추고 느끼기만 하는 심취하기 이다.
이 방법들을 이용하여 네가지 음미하기를 수행하면 쾌감이 증폭된다.
칭찬 축하 주고 받기,
감사하기,
감탄하기,
만끽하기이다.
-관심 기울이기.
불교적 가르침이라며 설명하는데, 결국 위빠사나를 뜻한다. (`위빠싸나 명상` 참조)
현재의 행복감이 쾌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쾌감과는 다른 행복감이 있다.
이를 충족감이라고 하자. (책에서는 만족감이라고 번역하는데, 내가 느끼는 어감상으로는 만족은 `욕망이 없는` 상태로 느껴진다.)
충족감과 쾌락의 차이는 행복한 삶과 쾌락적인 삶의 차이와 같은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와 같은 의미라고도 설명한다. 이 책의 원제가 Authentic Happiness 진정한 행복이며 책의 나머지 절반이 이 충족감에 대한 내용임을 감안하면 충족감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주장이다.
책은 사람이 어떤 일에 완전히 심취할 때 느끼는 것을 몰입(flow)라고 명명한다. 감각적 쾌감이 아닌 충족감의 핵심은 감정이 아니라 몰입이며, 몰입이 극에 달하면 무아도취, 정서가 없는 상태가 된다. (즉 삼매경이다.) 이는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서 오는 쾌락과는 다르다.
([*] 몰입과 삼매경을 행복의 본질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는 앞서 행복한 사람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사회성을 높인다는 분석과는 상반된다. 잠시 후 거론할 몰입도 높은 10대와 낮은 10대의 비교를 봐도 몰입도 낮은 10대가 더 높은 사회성을 보이고 있다.)
몰입도가 높은 10대와 낮은 10대의 비교.
몰입도가 낮은 10대들은 쇼핑을 주로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텔레비전을 많이 본다.
몰입도가 높은 이들은 취미활동, 스포츠, 숙제를 한다.
몰입도가 높은 이들은 몰입도가 낮은 이들을 즐겁게 생활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들처럼 해보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의 행위는 당장보다 미래에 보상받는다. 이를 심리적 자본형성이론으로 설명한다. 쾌락은 소비이며 몰입은 투자라고 말한다. 소비는 미래에 아무것도 축적하지 않으나 투자는 심리적 자산을 형성한다는 것이다...만, 현상에 대한 해석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맨 처음 행복의 특징을 조사하면서 행복도가 높은 응답을 한 22명의 현저한 특징이 사회성이 높으며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사회성이 높게 나오고, 몰입도가 높은 아이들은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즐거워보인다고 답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저 집단을 상대로 행복도를 조사하면 몰입도와 행복도의 관계가 어떻게 나올지 의문이다.
이 괴리는 행복의 본질에 대해 더 생각할 단서를 준다.
내 관점에 따라 해석하면 이 괴리는 축소된다.
이 책은 몰입의 즐거움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어조지만 그 표현에는 무리가 있다.
사람이 물을 마셔야 하는 이유는 빵이 진정한 음식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물을 안마시면 죽기 때문이다. 생물로서의 욕구만 충족해서는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는 생물적 욕구 충족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로는 몰입이 높여주는 것은 행복도의 고저 그 자체가 아니라 행복도의 항상성이다.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게 내 관점에서 보면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에서 발생한 가치 실현의 욕구)이다.
산사람을 상대로 조사하는 이상 일반적으로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도가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도보다는 높을 것이고, 그럼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에 치중하고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을 등안시 하면 결핍이 느껴지는 지점에서 행복도가 추락한다. 기분 좋은 것 같다가도 한켠의 공허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몰입도가 높아지면 이런 결핍을 채워주는 양이 늘어나서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행복도도 높아지지만 그건 결과에 불과하다. 기본적으로는 몰입은 편중된 결핍으로 인한 행복도의 추락을 매꾸어주어 항상성을 높여주는 영향을 미친다.
이런 내 관점을 바탕으로 조사된 데이터를 보면 이렇게 된다.
몰입도가 높은 아이들은 혼자서도 자기 취미활동 하며 잘 노는 반면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오히려 더 무리지어 몰려다니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혼자 두면 심심하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함께 다닐 누군가를 꼭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자기가 자유의지로 무엇을 바라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비교우위감으로 행복을 충족하려 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곧 친구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베프를 이기는 것을 삶의 행복으로 삼는 아이러니한 감정에 처하게 된다.
이 현상은 내가 관찰하기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성별에 따른 몰입도의 차이가 있는지는 책에 데이터가 없지만,
예상컨데 남성이 여성보다 몰입도와 집중력이 전반적으로 높게 나올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그 결과 남자가 여자보다 행복도의 (고저가 아닌) 항상성이 더 높을 것이다. 이는 앞서 책에 언급된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 두배에 정서 요동폭 두배'라는 조사 결과에 부합한다.
이 경향은 마누라에게도 부합하는데, 마누라는 몰입도가 상당히 높고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무리짓기를 덜 즐기는 편이며 기분의 항상성이 굉장히 높다. 이벤트를 해도 감격하는 게 아니라 그냥 평온하고, 이벤트 안 한다고 별로 뭐라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연애할 때 내가 힘들었다.
몰입의 즐거움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역시 무리가 있다.
사흘 굶은 사람이 빵 한조각을 발견하고 한입 물면 너무 행복해한다.
우리 아가가 맘마 먹으며 헤헤 웃을때도 보면 너무 행복해 한다.
몰입과 가치실현이 행복의 길이 되는 이유는 빵조각의 행복이 가짜 행복이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맛있는 요리여도 물 안마시면 목마르듯이 그 행복에도 불구하고 가치실현 활동을 하지 않으면 사람은 조만간 공허를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물로서의 욕구가 아무리 충족되어도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는 남는다. 그러나 빵만 먹었더니 목마르다고 해서 그 빵이 가짜 먹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렇게는 말이 된다.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이 완료된 상태에서 여분의 자원을 이용한 쾌감으로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면 한계 효용 체감을 거친 이 행복 추구는 효율이 매우 낮을 수 밖에 없다. 결핍되어 있던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를 충족 하는 것은 이것에 비하면 '진정한 행복'이다. 목 마르고 배부른데 과자 줏어 먹는 것보단 물 마시는 것이 진정한 행복감을 주듯이.
현실적으로 함께 몰입할 사람을 찾는 것에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몰입하는 사람이 몰입을 혼자서 해야만 하는 이유 같은 것은 없다.
몰입을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노래를 하건 그림을 그리건 함께 몰입하는 경험은 강렬한 유대를 제공한다.
이건 내가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의 기본 바탕이기도 하다. ('노래' 참조)
이 책의 주장을 공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로는 이 괴리는 오히려 지엽말단적인 것이다. 이 책의 진가는 좀 더 뒤에 나온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쾌락은 우울증을 불러온다.
60년대에 비해 미국 우울증 환자는 40년간 10배 증가했다.
원인은 쾌락에 이르는 손쉬운 방법에 의존한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적 우울에 대한 내 해석은 좀 다르다. '행복론, 피로사회와의 비교' 참조.)
우울증의 주요 증상은 자아도취이다. 자기의 느낌을 과장한다. 자기 슬픔을 곰곰히 생각하고 미래의 삶과 모든 활동에 투사하여 결국 자기 슬픔을 증폭시킨다.
무아도취하는 몰입은 감정에 충실한 자아도취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덜 우울하게 한다.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쾌락을 목적으로 하면 할수록 쾌락 이면에 우울도 함께 온다는 결과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쾌락과 우울이 함께 온다면 그만큼 행복의 항상성은 떨어진다.
여기까지 책의 절반이다.
쾌락 추구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르고 나자
행복의 길은 몰입하여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내 결론과 일치한다.
그리고 나서 책은 '그렇다면 무엇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를 찾고자 한다. 인문학과의 합치를 시도하는 셈이다.
문화 상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세계 도처에서 미덕으로 추구되는 것을 조사하여 여섯가지를 꼽았다.
지혜와 지식,
용기,
사랑과 인간애,
정의감,
절제력,
영성과 초월성.
사무라이가 추구하는 용기와 플라톤이 말한 용기는 다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인 공자의 인과 신의 사랑을 말하는 아퀴나스의 카리타스는 다르지만
상기 여섯가지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항목 임에는 틀림없다.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가치들을 추구하다보면 상기의 가치들로 수렴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무엇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가를 찾다가 초월적 가치 추구에 도달한 것이다.
다음으로 각각의 가치를 습득하고 계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저러하다고 하면, 나는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내가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 무엇을 추구하고 싶은 지를 찾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공한다.
먼저 6개의 가치를 24개의 특성으로 세분화했다. (지혜 안에 호기심, 학구열, 판단력, 사회적지능, ... 등으로)
가치는 추상적이라서 측량할 수 없지만 이를 실천하는 특성은 측량할 수 있다.
책에 제시된(저자의 웹사이트에는 더욱 자세히 나와 있다고 한다. http://www.authentichappiness.org)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대표 강점을 찾는다.
내가 잘하는 강점은 내가 그간의 삶에서 추구해 온 것이기 쉽다.
그리고 내 강점 중에도 내가 정말 내 모습으로 삼고 싶어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가령 저자의 경우 24개중 여섯 개 정도의 강점을 갖는 중에 한가지로 지도력이 높기는 하나, 이는 필요상 어쩔 수 없이 계발한 것이고 지도력을 발휘하면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진댄다.
내가 잘할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강점을 대표 강점으로 삼는다.
이것은 내가 그간 추구해 왔고 앞으로 추구할 가치를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저자는 '내가 창안한 행복한 삶의 공식은 자신의 대표 강점들을 주요 일상의 활동 속에서 날마다 발휘하여 큰 만족감과 참된 행복을 자아내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곧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유효한 답안이다.
방식과 적용에 대한 디테일은 다음에.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정서는 신념, 신뢰, 자신감, 희망, 낙관주의.
이중 낙관주의와 희망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낙관주의는 영속성과 파급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쁜 사건 때문에 느낀 무기력을 (시간적) 영속적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일시적 불행으로 여기는지. 또 절망감의 대상을 (공간적) 한정하는지, 다른 대상으로 파급하여 파악하는지.
이는 좋은 일에 대해서는 반대로 적용가능하다. 좋은 일이 영속적 특징 탓이라고 여기면 낙관주의, 일시적 요인 탓이라고 여기면 비관주의다.
사람 성격에 따라 영속성에 대한 긍정 점수가 높아도 파급성에 대해서는 낮을 수 있다.
낙관주의의 효과는 마음만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을 일으킨 경우를 국한적으로 취급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만하다고 미래를 희망적으로 인식하는 낙관주의자는 현재 맞이한 실패의 피해를 인생 전체에 확산되지 않도록 축소하여 실질적인 행복을 만들어낸다.
낙관주의를 학습하면, 미래에 대한 인식 개선 및 행동이 바뀌어 행복이 증진된다. 낙관주의 학습 방법은 다음과 같다.
ABCDE.
Adversity 역경을 맞이하면
Belief 내가 가진 실제보다 과장되고 왜곡된 믿음을 파악한다.
Consequence 내가 내린 잘못된 결론을 파악한다.
Disputation 비관하는 자아의 주장을 반박한다.
Energization 활력을 느낀다.
비관하는 자아를 반박하는 기법 네가지 :
-명백한 증거 제시 : 낙관적 생각이 명백한 증거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막연히 희망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것임에 비해, 이 반박은 실제보다 더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 만을 거두어내는 의미이다.
-다른 이유 찾기 : 현실의 많은 일들은 여러가지 원인의 가능성을 갖는다. 시험을 망친 것은 시험이 유난히 어려웠기 때문 일수도, 이번에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일수도, 교수가 평가를 공정하지 않게 했을 수도, 내 적성이 맞지 않아서 일수도 있다. 비관주의자는 그 여러가지 원인 중에서도 가장 영속적이고 파급력이 큰 최악의 원인에 매달린다. 이를 반박하려면 모든 가능성들을 샅샅이 조사하여 바꿀 수 있는 원인, 이번에 국한된 특수한 경우, 자기 외적인 원인들의 요인에 초점 맞추어 검토해야 한다.
-숨은 진실 찾기 : 설령 진실이 부정적인 원인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비관주의자의 생각속에서는 그로 인한 결과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한번의 실패가 의미하는 것은 생각처럼 치명적인 것이 아니기 쉽다.
-실질적 접근 : 현실적 삶은 본래 완전무결하지 않아서 어쨌거나 흠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은 과장된 절망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이제 현재에 대한 긍정적 정서 키우기에 대한 장이다.
현재에 대한 긍정적 정서에는 쾌감과 만족감이 있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쾌감은 지속성이 낮고 쉽게 익숙해지는 특징이 있다.
다음은 생활 중에 쾌락을 증가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이다.
-쾌감 사이의 간격을 넓히기.
쾌감은 이전의 열망을 식힘과 동시에 또다시 다음번의 열망을 자아낸다.
신경세포의 불응기(또는 뇌가 익숙한 자극을 무시하는 동안)의 동일한 쾌감 입력은 열망의 악순환을 통해 열망을 더욱 키우기만 할 뿐 쾌락을 주지는 않는다. 이른바 중독이다.
따라서 쾌감을 누리되 간격을 넓히는 방식이 유용하다.
-음미하기.
현재의 즐거움을 대충 흘려보내지 말고 최대한 만끽하는 것을 뜻한다.
음미를 돕는 다섯가지 방법을 소개하는데
타인과 공유하기,
추억만들기(사진이나 기념품),
자축하기,
다른 것을 차단하고 오로지 그 대상에만 집중하기,
생각하기를 멈추고 느끼기만 하는 심취하기 이다.
이 방법들을 이용하여 네가지 음미하기를 수행하면 쾌감이 증폭된다.
칭찬 축하 주고 받기,
감사하기,
감탄하기,
만끽하기이다.
-관심 기울이기.
불교적 가르침이라며 설명하는데, 결국 위빠사나를 뜻한다. (`위빠싸나 명상` 참조)
현재의 행복감이 쾌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쾌감과는 다른 행복감이 있다.
이를 충족감이라고 하자. (책에서는 만족감이라고 번역하는데, 내가 느끼는 어감상으로는 만족은 `욕망이 없는` 상태로 느껴진다.)
충족감과 쾌락의 차이는 행복한 삶과 쾌락적인 삶의 차이와 같은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와 같은 의미라고도 설명한다. 이 책의 원제가 Authentic Happiness 진정한 행복이며 책의 나머지 절반이 이 충족감에 대한 내용임을 감안하면 충족감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주장이다.
책은 사람이 어떤 일에 완전히 심취할 때 느끼는 것을 몰입(flow)라고 명명한다. 감각적 쾌감이 아닌 충족감의 핵심은 감정이 아니라 몰입이며, 몰입이 극에 달하면 무아도취, 정서가 없는 상태가 된다. (즉 삼매경이다.) 이는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서 오는 쾌락과는 다르다.
([*] 몰입과 삼매경을 행복의 본질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는 앞서 행복한 사람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사회성을 높인다는 분석과는 상반된다. 잠시 후 거론할 몰입도 높은 10대와 낮은 10대의 비교를 봐도 몰입도 낮은 10대가 더 높은 사회성을 보이고 있다.)
몰입도가 높은 10대와 낮은 10대의 비교.
몰입도가 낮은 10대들은 쇼핑을 주로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텔레비전을 많이 본다.
몰입도가 높은 이들은 취미활동, 스포츠, 숙제를 한다.
몰입도가 높은 이들은 몰입도가 낮은 이들을 즐겁게 생활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들처럼 해보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의 행위는 당장보다 미래에 보상받는다. 이를 심리적 자본형성이론으로 설명한다. 쾌락은 소비이며 몰입은 투자라고 말한다. 소비는 미래에 아무것도 축적하지 않으나 투자는 심리적 자산을 형성한다는 것이다...만, 현상에 대한 해석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맨 처음 행복의 특징을 조사하면서 행복도가 높은 응답을 한 22명의 현저한 특징이 사회성이 높으며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사회성이 높게 나오고, 몰입도가 높은 아이들은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즐거워보인다고 답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저 집단을 상대로 행복도를 조사하면 몰입도와 행복도의 관계가 어떻게 나올지 의문이다.
이 괴리는 행복의 본질에 대해 더 생각할 단서를 준다.
내 관점에 따라 해석하면 이 괴리는 축소된다.
이 책은 몰입의 즐거움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어조지만 그 표현에는 무리가 있다.
사람이 물을 마셔야 하는 이유는 빵이 진정한 음식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물을 안마시면 죽기 때문이다. 생물로서의 욕구만 충족해서는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는 생물적 욕구 충족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로는 몰입이 높여주는 것은 행복도의 고저 그 자체가 아니라 행복도의 항상성이다.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게 내 관점에서 보면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에서 발생한 가치 실현의 욕구)이다.
산사람을 상대로 조사하는 이상 일반적으로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도가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도보다는 높을 것이고, 그럼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에 치중하고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을 등안시 하면 결핍이 느껴지는 지점에서 행복도가 추락한다. 기분 좋은 것 같다가도 한켠의 공허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몰입도가 높아지면 이런 결핍을 채워주는 양이 늘어나서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행복도도 높아지지만 그건 결과에 불과하다. 기본적으로는 몰입은 편중된 결핍으로 인한 행복도의 추락을 매꾸어주어 항상성을 높여주는 영향을 미친다.
이런 내 관점을 바탕으로 조사된 데이터를 보면 이렇게 된다.
몰입도가 높은 아이들은 혼자서도 자기 취미활동 하며 잘 노는 반면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오히려 더 무리지어 몰려다니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혼자 두면 심심하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함께 다닐 누군가를 꼭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자기가 자유의지로 무엇을 바라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비교우위감으로 행복을 충족하려 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곧 친구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베프를 이기는 것을 삶의 행복으로 삼는 아이러니한 감정에 처하게 된다.
이 현상은 내가 관찰하기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성별에 따른 몰입도의 차이가 있는지는 책에 데이터가 없지만,
예상컨데 남성이 여성보다 몰입도와 집중력이 전반적으로 높게 나올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그 결과 남자가 여자보다 행복도의 (고저가 아닌) 항상성이 더 높을 것이다. 이는 앞서 책에 언급된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 두배에 정서 요동폭 두배'라는 조사 결과에 부합한다.
이 경향은 마누라에게도 부합하는데, 마누라는 몰입도가 상당히 높고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무리짓기를 덜 즐기는 편이며 기분의 항상성이 굉장히 높다. 이벤트를 해도 감격하는 게 아니라 그냥 평온하고, 이벤트 안 한다고 별로 뭐라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연애할 때 내가 힘들었다.
몰입의 즐거움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역시 무리가 있다.
사흘 굶은 사람이 빵 한조각을 발견하고 한입 물면 너무 행복해한다.
우리 아가가 맘마 먹으며 헤헤 웃을때도 보면 너무 행복해 한다.
몰입과 가치실현이 행복의 길이 되는 이유는 빵조각의 행복이 가짜 행복이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맛있는 요리여도 물 안마시면 목마르듯이 그 행복에도 불구하고 가치실현 활동을 하지 않으면 사람은 조만간 공허를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물로서의 욕구가 아무리 충족되어도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는 남는다. 그러나 빵만 먹었더니 목마르다고 해서 그 빵이 가짜 먹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렇게는 말이 된다.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이 완료된 상태에서 여분의 자원을 이용한 쾌감으로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면 한계 효용 체감을 거친 이 행복 추구는 효율이 매우 낮을 수 밖에 없다. 결핍되어 있던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를 충족 하는 것은 이것에 비하면 '진정한 행복'이다. 목 마르고 배부른데 과자 줏어 먹는 것보단 물 마시는 것이 진정한 행복감을 주듯이.
현실적으로 함께 몰입할 사람을 찾는 것에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몰입하는 사람이 몰입을 혼자서 해야만 하는 이유 같은 것은 없다.
몰입을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노래를 하건 그림을 그리건 함께 몰입하는 경험은 강렬한 유대를 제공한다.
이건 내가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의 기본 바탕이기도 하다. ('노래' 참조)
이 책의 주장을 공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로는 이 괴리는 오히려 지엽말단적인 것이다. 이 책의 진가는 좀 더 뒤에 나온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쾌락은 우울증을 불러온다.
60년대에 비해 미국 우울증 환자는 40년간 10배 증가했다.
원인은 쾌락에 이르는 손쉬운 방법에 의존한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적 우울에 대한 내 해석은 좀 다르다. '행복론, 피로사회와의 비교' 참조.)
우울증의 주요 증상은 자아도취이다. 자기의 느낌을 과장한다. 자기 슬픔을 곰곰히 생각하고 미래의 삶과 모든 활동에 투사하여 결국 자기 슬픔을 증폭시킨다.
무아도취하는 몰입은 감정에 충실한 자아도취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덜 우울하게 한다.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쾌락을 목적으로 하면 할수록 쾌락 이면에 우울도 함께 온다는 결과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쾌락과 우울이 함께 온다면 그만큼 행복의 항상성은 떨어진다.
여기까지 책의 절반이다.
쾌락 추구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르고 나자
행복의 길은 몰입하여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내 결론과 일치한다.
그리고 나서 책은 '그렇다면 무엇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를 찾고자 한다. 인문학과의 합치를 시도하는 셈이다.
문화 상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세계 도처에서 미덕으로 추구되는 것을 조사하여 여섯가지를 꼽았다.
지혜와 지식,
용기,
사랑과 인간애,
정의감,
절제력,
영성과 초월성.
사무라이가 추구하는 용기와 플라톤이 말한 용기는 다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인 공자의 인과 신의 사랑을 말하는 아퀴나스의 카리타스는 다르지만
상기 여섯가지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항목 임에는 틀림없다.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가치들을 추구하다보면 상기의 가치들로 수렴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무엇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가를 찾다가 초월적 가치 추구에 도달한 것이다.
다음으로 각각의 가치를 습득하고 계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저러하다고 하면, 나는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내가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 무엇을 추구하고 싶은 지를 찾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공한다.
먼저 6개의 가치를 24개의 특성으로 세분화했다. (지혜 안에 호기심, 학구열, 판단력, 사회적지능, ... 등으로)
가치는 추상적이라서 측량할 수 없지만 이를 실천하는 특성은 측량할 수 있다.
책에 제시된(저자의 웹사이트에는 더욱 자세히 나와 있다고 한다. http://www.authentichappiness.org)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대표 강점을 찾는다.
내가 잘하는 강점은 내가 그간의 삶에서 추구해 온 것이기 쉽다.
그리고 내 강점 중에도 내가 정말 내 모습으로 삼고 싶어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가령 저자의 경우 24개중 여섯 개 정도의 강점을 갖는 중에 한가지로 지도력이 높기는 하나, 이는 필요상 어쩔 수 없이 계발한 것이고 지도력을 발휘하면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진댄다.
내가 잘할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강점을 대표 강점으로 삼는다.
이것은 내가 그간 추구해 왔고 앞으로 추구할 가치를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저자는 '내가 창안한 행복한 삶의 공식은 자신의 대표 강점들을 주요 일상의 활동 속에서 날마다 발휘하여 큰 만족감과 참된 행복을 자아내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곧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유효한 답안이다.
방식과 적용에 대한 디테일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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