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길거리 나앉지 않도록 밖에서 돈벌어와서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아버지의 기본 과제다.
부귀영화를 보자는 것도 아니고 남들 다 먹는 밥먹는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생색내냐 하겠지만
막상 해보면 다들 노후준비 막막해하며 답이 없다고 푸념하게 될 정도로 각자에겐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공기의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버지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지켜내서 식구들이 돈 걱정 안하고 자라면
식구들은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먹고 살려고 뿔뿔이 흩어져서 눈치밥 먹으며 살 일 없었고
길거리 나앉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걸 감사하는 대신
아버지의 말투가 짜증난다는 것을 불평한다.
오히려 아버지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을 지키는 데에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을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 빈자리를 느낀다거나
아버지의 불행이 아버지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내 불행으로 이어지는 두려움에 떨어봤다거나
물려받은 것 없이 살겠다고 바둥대자니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거나,
철든 자식들은 하나같이 그런 곳에서 생겨난다.
미션을 성공하면 비난을 받는다. 아버지의 딜레마.
나는 아버지를 싫어한다.
안 친해서 대화하기도 갑갑하고 꼬장꼬장한 성미도 짜증난다.
어쨌거나 싫은 건 싫은거다.
하지만 아버지가 싫을 때면 욕하기 전에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철든 자식이었는가.
아버지가 과중한 짐을 져서 다른데 신경쓰기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다면
나는 그런 아버지의 짐을 줄여드리는데에 최선을 다 했는가.
IMF때 직격 맞아서 아버지 사업이 한번 망했다.
IMF의 직격을 맞은 집 자식이란 사실이 무색하게도 내 생활은 그 전후로 아무 차이가 없었다.
망해도 3년 간다는 기간 동안에 아버지는 다른 살 길을 찾아내셨고
어머니도 마음은 고생했어도 몸은 고생하지 않았으며
나는 아예 그 사실을 몰랐다.
나이가 어릴 때도 아니고 당시 이미 대학생이었는데
대학 학비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채로 졸업했으며
약속도 많은데 과외가기 귀찮다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정도로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살았다.
'다른 살길을 찾는다'라는 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 노느라 바빴던 내 기억엔 '아버지가 사업 잘 안된다고 일을 바꾸시고 나서 한동안 피곤해 했다'라는 기억은 있어도 그런 아버지의 힘듬이 사실은 내 일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 외환위기가 당시 아버지의 사업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사업이 잘 안돼서'가 무슨 의미였는지 알 수 있었고
내가 직업을 갖고 일을 해본 다음에서야 '다른 살 길을 찾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왜 몰랐을까.
어떻게 그걸 모를래야 모를 수가 있었을까.
아버지가 편치 않다는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불편함을 비난으로 배출하기 전에
나는 철든 자식이었는가, 정말 할만큼 했는가를 돌아본다면
누구의 아버지도 그리 쉬운 인생을 살지는 않았음이 보이리라 생각한다.
짐이 무거워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사람의 표정을 나무라기 전에
혹시 그 짐더미에서 내가 꺼내 들어야 마땅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
만약 아버지가 힘드셨을 그때 내가 아버지가 짊어진 짐 중에서 내 짐만이라도 꺼내들며 감사를 표현했더라면
아버지는 아마 많이 기뻐하셨을거다.
...
나도 그때 그러질 않았으니 꼬와도 좀 참아야지 시밤바... 하기를 한두해 지나니까
아버지가 나는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나더러 다른 가족들에게 잘 좀 얘기해 달라며 내 뜻을 얻기 위해 애를 많이 쓰시더라.
이해받지 못한 채로 평생을 시달리다 보면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법이니까.
과거에 나는 할만큼 했는가 하는 생각에 더하여
과연 지금 나는 할 만큼 하고 있는가도 생각해 볼만하다. (*)
...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부장제에 찌든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비난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만약 그 불화가 정말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아버지의 엇나감이 가부장제가 가장에게 짐지운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과 과중한 부담감 때문이라면
자신의 짐을 나눠지며 이제까지만도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아버지는 무너진다.
가부장제가 가장에게 부여하는 가족 부양의 책임감은 사람구실 그 자체나 마찬가지이며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의 자괴감이 큰 만큼 도움을 받았을 때의 고마움도 크기 때문이다.
평생 이해받지 못한 자신을 이해해주는 철든 자식 앞에서
자식이 그렇게 미워하는 그 어떤 아버지는 사실은 자식의 손을 붙들고 울고 싶으신 걸지도 모른다.
가부장제의 폐해는 가장의 권위를 공격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부조리는 싸워서 해소되지 않는다.
...
그런데 내가 우리 아버지랑 불편한 건 가부장제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나랑 똑같기 때문이라서 저걸로 다 되진 않는다.
(확고한 주관+다혈질)*2= #$%^
이대로 가면 우리 딸과의 미래가 보여서 바꾸느라고 바꾸긴 했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바뀐 나를 좋아하지 바뀐 내가 아버지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지.
...
(*) 요즘 우리 아가를 보면 한살바기 아이조차도 사람을 바꾸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부귀영화를 보자는 것도 아니고 남들 다 먹는 밥먹는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생색내냐 하겠지만
막상 해보면 다들 노후준비 막막해하며 답이 없다고 푸념하게 될 정도로 각자에겐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공기의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버지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지켜내서 식구들이 돈 걱정 안하고 자라면
식구들은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먹고 살려고 뿔뿔이 흩어져서 눈치밥 먹으며 살 일 없었고
길거리 나앉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걸 감사하는 대신
아버지의 말투가 짜증난다는 것을 불평한다.
오히려 아버지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을 지키는 데에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을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 빈자리를 느낀다거나
아버지의 불행이 아버지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내 불행으로 이어지는 두려움에 떨어봤다거나
물려받은 것 없이 살겠다고 바둥대자니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거나,
철든 자식들은 하나같이 그런 곳에서 생겨난다.
미션을 성공하면 비난을 받는다. 아버지의 딜레마.
나는 아버지를 싫어한다.
안 친해서 대화하기도 갑갑하고 꼬장꼬장한 성미도 짜증난다.
어쨌거나 싫은 건 싫은거다.
하지만 아버지가 싫을 때면 욕하기 전에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철든 자식이었는가.
아버지가 과중한 짐을 져서 다른데 신경쓰기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다면
나는 그런 아버지의 짐을 줄여드리는데에 최선을 다 했는가.
IMF때 직격 맞아서 아버지 사업이 한번 망했다.
IMF의 직격을 맞은 집 자식이란 사실이 무색하게도 내 생활은 그 전후로 아무 차이가 없었다.
망해도 3년 간다는 기간 동안에 아버지는 다른 살 길을 찾아내셨고
어머니도 마음은 고생했어도 몸은 고생하지 않았으며
나는 아예 그 사실을 몰랐다.
나이가 어릴 때도 아니고 당시 이미 대학생이었는데
대학 학비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채로 졸업했으며
약속도 많은데 과외가기 귀찮다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정도로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살았다.
'다른 살길을 찾는다'라는 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 노느라 바빴던 내 기억엔 '아버지가 사업 잘 안된다고 일을 바꾸시고 나서 한동안 피곤해 했다'라는 기억은 있어도 그런 아버지의 힘듬이 사실은 내 일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 외환위기가 당시 아버지의 사업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사업이 잘 안돼서'가 무슨 의미였는지 알 수 있었고
내가 직업을 갖고 일을 해본 다음에서야 '다른 살 길을 찾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왜 몰랐을까.
어떻게 그걸 모를래야 모를 수가 있었을까.
아버지가 편치 않다는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불편함을 비난으로 배출하기 전에
나는 철든 자식이었는가, 정말 할만큼 했는가를 돌아본다면
누구의 아버지도 그리 쉬운 인생을 살지는 않았음이 보이리라 생각한다.
짐이 무거워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사람의 표정을 나무라기 전에
혹시 그 짐더미에서 내가 꺼내 들어야 마땅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
만약 아버지가 힘드셨을 그때 내가 아버지가 짊어진 짐 중에서 내 짐만이라도 꺼내들며 감사를 표현했더라면
아버지는 아마 많이 기뻐하셨을거다.
...
나도 그때 그러질 않았으니 꼬와도 좀 참아야지 시밤바... 하기를 한두해 지나니까
아버지가 나는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나더러 다른 가족들에게 잘 좀 얘기해 달라며 내 뜻을 얻기 위해 애를 많이 쓰시더라.
이해받지 못한 채로 평생을 시달리다 보면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법이니까.
과거에 나는 할만큼 했는가 하는 생각에 더하여
과연 지금 나는 할 만큼 하고 있는가도 생각해 볼만하다. (*)
...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부장제에 찌든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비난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만약 그 불화가 정말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아버지의 엇나감이 가부장제가 가장에게 짐지운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과 과중한 부담감 때문이라면
자신의 짐을 나눠지며 이제까지만도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아버지는 무너진다.
가부장제가 가장에게 부여하는 가족 부양의 책임감은 사람구실 그 자체나 마찬가지이며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의 자괴감이 큰 만큼 도움을 받았을 때의 고마움도 크기 때문이다.
평생 이해받지 못한 자신을 이해해주는 철든 자식 앞에서
자식이 그렇게 미워하는 그 어떤 아버지는 사실은 자식의 손을 붙들고 울고 싶으신 걸지도 모른다.
가부장제의 폐해는 가장의 권위를 공격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부조리는 싸워서 해소되지 않는다.
...
그런데 내가 우리 아버지랑 불편한 건 가부장제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나랑 똑같기 때문이라서 저걸로 다 되진 않는다.
(확고한 주관+다혈질)*2= #$%^
이대로 가면 우리 딸과의 미래가 보여서 바꾸느라고 바꾸긴 했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바뀐 나를 좋아하지 바뀐 내가 아버지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지.
...
(*) 요즘 우리 아가를 보면 한살바기 아이조차도 사람을 바꾸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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