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에 대해 논한 2010년 캐시모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현실은, 우리가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이 우리가 파리나 박테리아 수준으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설탕 한 줌이 자유 의지가 없는 수준으로 우리도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고 그 법칙은 자유 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말은 넌센스다.
자연의 법직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가 관찰 할 수 있는 현상을 관찰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학도 그의 관찰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찰하고 그의 역학을 완벽하게 설명하여서 대표적인 예시로 사용했던 역학현상에서 조차도
'항상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들이 있었다.
이는 후에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위기로 내몰고, 뉴튼 역학에 의해 해석되며,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뉴튼역학도 뉴튼이 관찰한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광속도에 근접한 계에서 자연의 법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설명한 자연의 법칙은 전 우주에서 동일하게 동작하지만
뉴튼이 관찰했던 조건과 환경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뉴튼 역학을 완벽하게 보여줘서 뉴튼이 대표적인 예시로서 사용한 계에서 조차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이 있었다.
이는 역학뿐 아니라 과학의 모든 패러다임이 마찬가지다.
패러다임은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형상을 만든다.
('세계는 신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뱀과 코끼리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는 섬이다.')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의 탐구활동은 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어서 전체 구조물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활동이다.
('세계를 떠받치는 코끼리는 몇마리인가?')
과학의 발전은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 이미 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전체 구조 자체를 합당한 구조로 파악하는 것이 발전이다.)
현재 따르고 있는 패러다임이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캐시모어 논문의 저 마지막 말은 설탕 한줌에 대한 자연의 법칙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상정한다.
이는 과학은 완성되었으며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고 자신하는 것과 같다.
오산이다.
진짜 현실은, 자유의지를 논하기엔 설탕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과학이 '인간은 오토마타이며 의식은 그 로그파일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놓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항상 관찰하는 자의식과 자유의지는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명백히 관찰되는 현상은 그 자체로 패러다임보다도 한 단계 위의 확실성을 갖는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장차 무엇이 현재의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몰고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이끌어 낼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다.
"현실은, 우리가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이 우리가 파리나 박테리아 수준으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설탕 한 줌이 자유 의지가 없는 수준으로 우리도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고 그 법칙은 자유 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말은 넌센스다.
자연의 법직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가 관찰 할 수 있는 현상을 관찰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학도 그의 관찰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찰하고 그의 역학을 완벽하게 설명하여서 대표적인 예시로 사용했던 역학현상에서 조차도
'항상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들이 있었다.
이는 후에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위기로 내몰고, 뉴튼 역학에 의해 해석되며,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뉴튼역학도 뉴튼이 관찰한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광속도에 근접한 계에서 자연의 법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설명한 자연의 법칙은 전 우주에서 동일하게 동작하지만
뉴튼이 관찰했던 조건과 환경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뉴튼 역학을 완벽하게 보여줘서 뉴튼이 대표적인 예시로서 사용한 계에서 조차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이 있었다.
이는 역학뿐 아니라 과학의 모든 패러다임이 마찬가지다.
패러다임은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형상을 만든다.
('세계는 신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뱀과 코끼리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는 섬이다.')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의 탐구활동은 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어서 전체 구조물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활동이다.
('세계를 떠받치는 코끼리는 몇마리인가?')
과학의 발전은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 이미 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전체 구조 자체를 합당한 구조로 파악하는 것이 발전이다.)
현재 따르고 있는 패러다임이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캐시모어 논문의 저 마지막 말은 설탕 한줌에 대한 자연의 법칙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상정한다.
이는 과학은 완성되었으며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고 자신하는 것과 같다.
오산이다.
진짜 현실은, 자유의지를 논하기엔 설탕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과학이 '인간은 오토마타이며 의식은 그 로그파일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놓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항상 관찰하는 자의식과 자유의지는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명백히 관찰되는 현상은 그 자체로 패러다임보다도 한 단계 위의 확실성을 갖는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장차 무엇이 현재의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몰고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이끌어 낼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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