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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본질은 뭘까?

불교는 등산 권장을 위한 산행기 같은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내가 이 위에 올라서 이것을 봤다. 올라오는 산길은 이렇고, 올라오는 요령은 이렇다. 네가 직접 와서 봐라.'

(소승불교=상좌불교, 대승불교 공통의) 무상 무아 만족불가능의 삼법인과 (대승불교의) 법신불등의 불교적 세계관은 '이 위에서 본 것들'이다. 

산행기에서 산위의 풍경 묘사는 산을 올라갈 동기부여, 곧 발심 촉진의 의미를 갖는다.

4성제, 12연기, 6바라밀은 올라오며 보게 될 길목에 대한 묘사다.

참선법은 등산기술이다.

그리고 '네가 와서 보라'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를 아우르는 불교의 본질이 있다.

산위에서 본 풍경이나 길목의 이정표들을 공부했으니 등산을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산행기를 읽고 등산할 마음이 생겼으면 이제부터 필요한 건 오르는 방법이다.

 

위빠사나 명상(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지음. 아름드리미디어 출판)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참선법에 대한 책을 찾다가 읽고 있는데 참선의 방법에 대해 대단히 잘 설명되어 있다.

이하는 그 내용을 담았다.

불교에서 언급하는 명상기법에는 크게 두가지 유형이 있다. 위빠사나와 사마타가 그것이다.

통찰이라 번역할 수 있는 위빠사나는 일어나는 일을 명료하게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집중 혹은 삼매라고 번역될 수 있는 사마타는 마음을 집중하여 여타 생각과 인식을 마음에서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종교나 문화권에는 명상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방법론들이 있다. 그 기법들은 대단히 다양하다.

유대 기독교식 전통에는 기도와 묵상이라는 두가지 수행법이 중첩되어 있다. 기도는 신에 대한 직접 청원이고 묵상은 종교적 특정 주제에 대한 숙고이다. 두 행위 모두 정신 집중 즉 사마타 기법이다.

힌두교에는 요가가 있다. 돌, 불꽃, 혹은 옴 이라는 음절이나 몸의 특정 지점(차크라)등에 촛점을 맞추어 집중하는 기법이다. 이 역시 사마타 기법이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명상법은 사마타 기법에 해당한다. 이는 기도나 찬송이나 종교적 상징물에 마음을 집중하여 명상이 지속되는 동안의 황홀경이나 신비체험을 하는 것을 요체로 한다.


불교명상법에서도 정신집중, 즉 삼매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불교명상법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는 요소가 있다. 불교명상법에서는 정신집중을 수단으로 하여 이루고자 하는 지점으로 자각을 제시한다. 일어나는 일에 대한 자각을 통해,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세가지 진리인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를 명상자 스스로가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며 수행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이 자각에 이르기 위한 수행법으로 제시되는 불교 전통도 대단히 광범위하다.

임제종, 탄트라불교 등 서로 다른 특징적인 수행법을 제시하는 다양한 전통이 존재한다.

그중 위빠사나는 자각을 연마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수행법이자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그 기원은 석가모니의 강설인 염처경(중아함경60권중 26권에 나와있는 경전. 사념처경 혹은 대념처경이라고도 한다.)에서 유래한다.

 

사마타가 집중으로 감각을 정지시키는 지감 수행법인 것과 비교하면 위빠사나는 집중을 도구로 하여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생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고, 감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감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운다. 이는 자아를 객관화시켜 관찰하는 것이므로, 나는 위빠사나에 대해 '상위자아의 관점을 익히는 것' 이라고 이해한다. 자아를 객관화시켜서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하고 느끼고 있는지 관찰하는 위빠사나의 기법은 상위자아의 관점에서 관찰하는 것과 동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의는 다 배운 사람이 이제까지 지나온 길의 가치를 평가할 때에 나오는 것이다. 배우는 입장에서 의의를 논한다는 건 말이 안되고, 전혀 중요하지도 않으므로 접어두자.

중요한 건 명상을 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정보 과잉 속에서 대부분의 사건을 알아채지 못하고 흘려버리고 있다.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상태다. 위빠사나는 알아채는 훈련이며, 그 훈련의 시작은 단순화한 사건을 주시하여 알아챔을 유지하는 것이다. 호흡을 세는 것은 위빠사나의 초심자를 위한 매우 좋은 시작이다.

호흡을 크게 하여 호흡이 잘 느껴지는 코끝의 한 지점을 정한다.

톱질을 할 때 오르내리는 톱날을 주시하지 않고 톱이 지나가는 나무의 한 점을 주시하듯, 숨이 지나가는 코의 한 점을 주시한다.

관찰의 시작으로 먼저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는 지점을 알아챈다. 호흡이 교차하는 멈추는 지점을 관찰하기 위해 숨을 끊지 말고 들숨과 날숨이 부드럽게 이어지게 한다. 관찰은 항상 현재 순간을 관찰한다. '곧 멈출 것이다'가 아니라 '내쉬고 있다, 멈춘다, 들이쉬고 있다, 느려진다, 멈춘다.' 단, 속으로 중얼거리지 말고 단지 알아채도록 한다.

호흡을 세는 것은 이 알아챔을 시작하기 위함이다. 들숨과 날숨을 한 호흡으로 해서 호흡을 열까지 세고 호흡에 주시하게 되었으면 세는 행위는 그만둔다. 단지 감지한다. 이제 호흡을 조정하지 않고 알아서 숨쉬어지도록 하며 관찰만 한다. 초심자가 하기 쉬운 실수 중 하나가 관찰을 정교하게 하려고 하는 것인데, 처음엔 단지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교차하는 것을 놓치지 말고 알아채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호흡을 주시하는 것이 위빠사나 명상의 시작이다.


위빠사나를 꼭 호흡에 주시하는 것으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호흡을 대신하여 다른 대상을 관찰하는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가능하며 흔하게 사용하는 것으로만 40여개 정도의 관찰 주제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다양한 배리에이션들은 일일이 검증 및 심화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고, 검증되지 않은 잡다한 방법들은 없으니만 못하다. 참선 자체가 수없이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가능하며 실재로도 다양한 참선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가능하다고만 하면 초심자로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호흡 주시를 따르는 것은 유일한 방법은 아니나 효율면에서 큰 도움이 된다.

사견을 보태자면, 명상을 배울 생각이라면 여타의 개량형 명상기법을 찾아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이해에 기반한 독자적인 참선방법을 정리해 볼 요량을 가지고 개량형 명상기법들을 살펴본 소감은, 어째 고전 기법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신뢰할 수 없는 신비주의적 망상이 더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들 모두 더 높은 효율성을 위해 열의있는 사람들이 개량한 결과일 것임을 생각하면 독자적인 체계를 잡아보겠다는 의지가 대폭 흐려질 정도였다.

다양한 방법이 가능하다는게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나 초심자에게는 그렇다.


다시 위빠사나의 방법으로 돌아가서 명상에 임하는 태도에 대한 주의사항이다.

수행자는 호흡을 주시하면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다루는 훈련을 한다. 주시란 '운전중 전방주시'에서 말하는 주시처럼 대상을 관찰하고 피드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갖추어야 할 태도는 다음과 같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마라. 단지 어떤 결과가 관찰되는지 지켜보는 실험으로 여겨라. 내가 원하는 실험 결과를 내놓으라고 닥달하지 말라. 이는 긴장하거나, 서두르거나, 관찰되는 현상을 거부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내놓지 않는 자신을 자책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을 의문시하라. 당연하게 여기지 마라. 그럴듯하게 들린다거나 성인이 말했다는 이유로 믿지 말고 이 실험을 통해 직접 확인하라. 불신하고 냉소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관찰 경험에 근거하라는 얘기다.


호흡에 주시하노라면 다양한 현상들을 만나게 된다. 이하는 그에 대한 대응책이다.

집중이 잘 되지 않을 때엔 숫자세기가 도움이 된다.

호흡을 세는 것은 호흡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가령 날숨이 들숨과 교차하는 때에 하나씩 열까지 센다. 마음이 숨이 지나는 코의 한 지점에 집중되면 숫자세기를 그만둔다.

공기가 지나가는 게 가장 뚜렷하게 느껴지는 코의 한 지점에 집중하는 것은 호흡을 감지하는 지점을 명료하게 하여 집중을 돕기 위함이다.

들숨 날숨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호흡을 멈춰서지 말고 부드럽게 연결시킨다. 그리고 교차하는 순간을 감지하라. 이는 호흡을 감지하는 순간을 명료하게 하여 집중을 돕는다.

체험의 세부사항까지 일일이 고려하기 보다는 숨이 들어오고 있다, 나가고 있다는 현상만을 관찰한다. 관찰 지점,순간,현상에 대한 이런 단순화는 집중을 돕는 구실을 한다. 


'왜 꼭 어딘가에 집중해야 하는가? 그냥 마음속의 일들을 자각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사실 그런 명상법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어렵다. 생각을 객관화하여 생각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과 생각을 하는 것은 다르다. 집중을 하면, 호흡에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늦추어주는 반면에 호흡에 집중하느라 '호흡이 아닌 생각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자각'은 키워주는 효과를 갖는다. 집중은 현미경처럼 혹은 물결에 떠밀려가지 않는 고정점처럼 관찰의 도구가 되며 호흡은 그 집중의 촛점으로 삼은 대상이다. 앞서도 얘기했듯 꼭 호흡을 촛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나, 호흡은 가장 유용한 촛점자리 중의 하나이다.

이 명상기법의 의의를 코끼리 길들이기에 비유할 수 있다. 코끼리를 말뚝에 밧줄로 매어 놓으면 코끼리는 요동을 친다. 밧줄을 꼭 붙들어 매고 있으면 코끼리는 길들여지고, 길들여진 다음에는 밧줄을 풀어내고 말뚝에서 멀리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명상에서 말뚝은 호흡이고 밧줄은 집중이다. 말뚝이 꼭 호흡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나 호흡은 말뚝으로서 기능하기에 충분할만큼 지속적이고 확고한 대상이다. 길들인 다음에도 말뚝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나 길들일때까지는 고정점이 필요하다.

매어놨다면 다음은 코끼리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 남았을 뿐이다. 길들지 않았다면 얌전히 있지는 않을 것이고 수시로 밧줄을 당겨 끊어버릴 것이다. 그때마다 다시 당겨 놓는 것이 수행자가 할 일이다. 단지 호흡을 주시하라는 게 너무 온건한 기법이라서 할 일이 없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집중에 도움이 되는 것에 이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공기가 지나는 감각을 강하게 해서 집중을 돕겠다고 숨을 강하게 쉬지 말라. 위빠사나는 요가에서 하는 호흡수련과는 다르다. 숨을 조절하지말고 자연스럽게 쉬면서 관찰하라.

자연스럽게 하라는 데에서 오히려 어려움을 느낄수도 있는데, 숨을 조절하려는 충동과 조절하지 않으려는 충동등을 관찰하라.


관찰할때 피해야할 두가지 상태는 생각하는 것과 멍해지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잡념에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멍해지는 것은 숨을 관찰하지도 않으면서 의식이 가라앉은 상태를 의미한다. 시간낭비다. 생각에 빠진걸 자각하면 다시 관찰로 돌아오듯이 의식이 가라앉은 걸 자각하면 다시 관찰로 돌아오라.


꾸준히 쉬지 않고 호흡을 자각하는 것은 일견 만만해 보인다. 그래서 초심자들은 꼼꼼하고 철저해지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다. 무리한 욕심이다. 그보단 끊이지 않는 지속적 자각이 중요하다. 지속적 자각을 얻기 위한 훈련으로 숨을 들이쉬기 시작할때 그 한번의 들숨만이라도 주의집중을 유지하여 따라가보기로 결심하라. 다음으로 날숨을 시작할때 다시 그 한번의 날숨동안만이라도 정신을 놓치지 않고 그 숨에 주시를 유지하겠다고 결심하라. 실패할때마다 한번에 한 호흡씩만 잡아서 반복하라. 한 호흡마다 결심을 새로 하라. 이렇게 해서 끊이지 않는 지속적 자각을 얻도록 한다.


더 빠른 효과를 원할 때엔 온건한 방법은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혼탁한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데에 좋은 방법은 흔들리지 않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명상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흙을 분리하려 애쓰는 건 역효과다. 흔들리지 않게 유지하면, 시간과 함께 가라앉는다.


상좌불교 국가들에서는 명상 수행을 시작할 때 특정 구절을 음송하며 시작하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이는 그 구절의 발음 소리가 마법의 주술적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아가 그 구절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 참선 목적에 효과적인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명상을 시작하기 전 '나에게 축복을, 나의 가족에게 축복을, 나의 친구에게 축복을, 세상 보편의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의 원수에게 축복을 기원'하는 구절을 진심을 다해 암송하는 것이다.

참선 명상의 의의를 어떤 식으로 설명하건 간에, 가령 상위자아의 관점을 익히는 것이라고 해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참선은 자아의 관점 초월하는 관점에 이르기 위한 수행이다. 그런데 자아의 족쇄가 너무 강하면 그걸 풀어내기가 너무 어렵다. 비록 당장 풀어내지는 못하더라도 헐겁게라도 해두면 풀기 위해 몸을 뒤척이기가 수월해진다.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 대자대비심의 관념으로 표층의식을 덮어두는 것은 이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다. 즉 대자대비심의 암송으로 자아의 가장 이기적인 측면을 약화시키고 시작하는 것이다. 의식의 표층을 이러한 관념으로 감싸는 것은 표면적인 덮음에 불과하여 스트레스를 받으면 쉽게 깨져버리지만, 자아의 족쇄를 느슨하게 하여 풀기까지의 수행을 수월하게 해준다는 의의가 있다. 

한편 '내 목적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이 설명은 나의 적의 행복을 기원하기는 차마 하지 못하는 자아를, 적의 행복이지만 단순히 기원하는 정도 만큼은 할 수 있을만큼 느슨하게 하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진심을 다해 기원할수록 효과가 높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명상 실습 중에 마주하게 될 각종 문제의 대응법이다. 

어떤 단일 서적도 명상중 만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대응법을 다 담지는 못할 것이기에 

불편함, 이상한 감각들, 졸음, 지루함, 두려움, 집중력부족, 불안 동요 초조, 지나친 열혈, 반대로 낙심, 혼침 둔감 등의

가장 흔하고 기본적인 대응법에 대한 설명들이다.


지금까지의 방법을 적용하면 명상의 진행은 이렇게 된다.

호흡관찰 - 잡념 - 잡념 자각 - (자책) - 호흡으로 돌아옴.

자책은 필요 없는 감정이지만, 일어난다면 단지 관찰하고 흘려보내도록 한다.

현재로선 호흡에 주시하는 이외의 모든 생각과 느낌과 감정이 잡념이다.

잡념이 들면 그 잡념을 관찰한다.


잡념 해결의 기본 전략은 다음과 같다.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고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본다. 거기에 말려들지 마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살펴라. 나의 마음에 어떤 느낌을 주는지,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라.

기억이나 느낌이나 상상을 억누르려고 싸우지 마라. 길을 막아서지 말고 길에서 비켜서서 끓어올랐다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도록 한다. 

마음을 비우는 건 마음이 하고 있는 일을 깨닫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마음의 쉼없는 재잘거림을 멈출 수 없다면, 좌절하지 말고 그 재잘거림도 알아차림으로 볼 또 하나의 대상으로 여겨라.

숨이 뭔지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숨을 개념화하지 말라.

항상 처음처럼, 세상 처음 보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듯이, 기대되는 결과를 정해놓지 말고 관찰하라.


졸음, 혼침, 둔감 : 위빠사나의 관찰에 몰두하면 잠은 사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잠이 오면 일어나서 아예 깨거나 그냥 꿈나라로 간다. 그렇지 않으면 깜빡깜빡 졸기만 하다가 시간만 엄청 낭비하기 일쑤다. 명상하다 졸때 잠 깨워주는 물건인 죽비가 따로 만들어질 정도로 명상 중 졸음은 흔한 문제고, 혼자서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졸음에 알아차림을 적용해 보라고 하는데, 잠이 들면서도 자각을 유지하는 것은 깨어있던 상태에서 자각몽으로 진입하는 것과 동치가 되는 훈련인 동시에 소수의 사람만이 성공하는 난이도 높은 훈련이다. 그냥 잠시 조용히 일어서 있다가 다시 앉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졸음에 이어 부연하자면, 명상을 하면서 심신이 이완되면 다양한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가려움, 따끔거림에서부터 이완이 깊어지는 느낌, 몸이 떠오르는 느낌, 몸이 자라거나 오그라드는 느낌, 때론 어떤 감정이나 이명을 넘어서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 초심자들은 종종 흥분하곤 한다. 흥분할 필요는 없다. 그건 잠들어가는 신경의 반향일 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대응도 평소의 기법과 같다.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고, 그것이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며, 거기에 말려들지 말라.

통증, 몸이 붕 뜨는 이상한 감각, 뚜렷한 이유 없는 공포감 등 매우 다양한 감각이 느껴질 수 있다. (자각몽 진입 훈련에 있어 이완기 후에 이어지는 과도기에 겪는 현상과 일치한다.) 특별한 신비 체험 같은 것은 아니니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단지 지켜볼 것.


동요가 느껴지면 : 동요하는 마음을 직시 관찰한다.

열혈 : 자기가 원하는 실험 결과를 독촉하는 마음이다. 열혈로 실험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낙심 : 열혈로 독촉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때의 마음이다.

명상에 대한 거부감 : 명상은 일이 아니라 휴식이고 놀이라고 느끼도록 한다. 

집중력부족, 지루함 : 기대하는 결과를 정해놓지 않은 관찰은 지루하지 않다. 참된 알아차림을 회복하고, 지루해하는 심리를 관찰한다. 


개념화를 멈추고 개념화 이전의 대상을 관찰한다.

2학년때 선생님을 떠올리고 있다면 그것은 기억이다.

자신이 2학년때 선생님을 회상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이건 알아차림이다.

이 과정을 개념화하고 '내가 옛날 생각을 하고 있군'이라고 중얼거린다면 그건 생각이다.

 

산만함과 잡념을 다루는 요령 : 집중이 되지 않고 산만할 때엔 다음 방법들이 유용하다.

몇 번 심호흡하여 세게 호흡하면서 코끝의 호흡을 관찰할 지점을 찾아 집중을 시작한다.

호흡을 세는 것, 혹은 세는 것과 유사하게 '들이쉰다... 내쉰다'를 속으로 되뇌이는 것은 집중을 위한 좋은 방법이다. 

의식이 관찰지점에 모이면 세거나 중얼거리는 것을 그만둔다.


상념을 깨끗히 치우는 법 : 명상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문득 자신이 호흡 관찰에서 떠나 상념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때 아래와 같이 상념의 움직임을 점검하는 것으로 상념을 깨끗이 없애고 호흡 관찰로 돌아갈 수 있다.

어림잡아 어느 정도 동안 상념에 빠져있었는지 자신에게 말한다.

'대충 2분 정도 잡념에 빠져있었어' (정확한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다) 혹은 '개가 짖는 소리를 들으면서부터 였어', '돈 생각을 하면서부터였어' 라는 식으로.

처음엔 언어로 생각하게 되지만, 오래지 않아 습관이 들고 나면 중얼거림은 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잡념을 점검할 수 있다.

그 잡념이 어떤 것이고, 얼마나 강력하며,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무언으로 알아차리도록 한다. 

이는 그 생각에서 한발 물러서 그 잡념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객관적 관점에서 보게 한다. 즉 관점을 자각의 관점으로 돌려 놓는다.

잡념을 몰아내려고 다투지 마라. 그냥 말없이 검토하다보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잡념은 머무르도록 조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 뿐이지 나타날때마다 몰아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것은 와서 있을만큼 있다가 간다. 그 오고 가는 것을 관찰한다. 잡념이 가고 나면 호흡으로 돌아온다.


어떤 생각들이 정말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 때엔 일단 그 생각의 반대되는 생각을 해본다.

즉 앞서 대자대비심을 표층의식에 둘렀던 것과 마찬가지인데, 욕심의 생각이 잡념이 될 땐 관용을 생각하여 탐욕을 상쇄시키고

증오가 잡념이 될 땐 인자와 자비를 생각하여 증오를 상쇄시킨다. 탐,진,치를 완화시키는 것이다.

이건 비록 표면 덮기에 불과하나 굴레를 벗기 위해 몸을 뒤척이는 틈은 마련해준다. 

나는 이것을 관용과 자비등의 미덕을 관념적으로 생각해서 그 관념에 대한 호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에 반대되는 개인 감정을 누그러트리는 임시방편이라고 이해한다.

또한, 증오나 탐욕이 너무 강한 경우에는 먼저 그 미움과 탐욕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 그 기세를 약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그 감정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내 삶과 행복과 건강과 내가 하고자 하는 진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것을 품은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를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큰 감정을 줄여놓고 나면 앞서 얘기한 표면 덮기로 남은 감정을 상쇄한다. 그런 후엔 호흡관찰로 돌아간다. 이건 앞서와 반대로 증오나 탐욕의 감정 그 자체를 대상화하여 생각함으로써 추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을 이용해 그 악한 감정을 멀리하고 싶게 만드는 방법으로 이해한다. 


다섯가지 덮개 : 다섯가지 덮개는 불경에 명시된 다섯가지 전형적인 장애다. 감각적 욕망,악의,혼침과 졸음,들뜸,회의적인 의심을 뜻한다.

욕망 : 명상중 일어나는 어떤 경험때문에 산만해졌다고 치자. 소유욕이나, 혹은 마음에 드는 경험을 연장시키려는 욕망은 다음 방식으로 처리한다. 욕망의 대상이 어떤 선한 것이든 간에 대상과 별개로 '욕망'을 알아챈다. 이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어느 정도 범위까지 인지, 욕망이 얼마나 센지, 얼마나 지속되는지, 언제 사라지는지 알아챈다.

악의 : 악의의 범위, 세기, 지속, 소멸을 관찰한다.

심리적 무기력 : 혼침, 졸음과 몸의 피로와는 다르다. 몸의 피로는 신체 느낌으로서 관찰한다. 심리적 무기력은 감각과 인지가 무디어지는 것으로서 마음이라는 장치가 꺼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는 대상을 멀리하려고 하는 거부의 일종으로 수면 상태를 가장하며 억지로 멍청해지는 형태다. 

나른한 상태가 되면 그것을 알아채고 범위와 정도와 언제 생기고 얼마나 지속되고 언제 사라지는지 알아챈다. 이 무기력은 알아차림의 정반대 상태이므로, 형성 초기에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오는 것은 멍한 마음, 내지는 잠들기다.

들뜸, 동요 : 마음이 어느 하나에 정착하기를 거부하고 계속 주변을 맴도는 것이다. 불안과 걱정은 동요의 표시다. 불안정은 특정한 '느낌', 내지는 '맛'을 갖는 어떤 것을 의식에 부여한다. 그것을 찾아보라. 찾아내면 그것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고 언제 생기며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언제 사라지는지 알아채라.

의심 : 의심도 의식속에 존재할 때 갖는 분명한 감각이 있다. 명상에서 의심이 취하는 흔한 모습중 하나가 '이렇게 죽치고 앉아서 내가 뭘하고 있는거지? 여기서 뭔가를 얻기는 하는건가?'이다. 근거없는 맹신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지만 끊임없는 회의로 인해 진척을 못하게 되는 것은 명상뿐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해서든 나타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애다. 가령 시험공부를 하다 지치면 회의가 든다. 회의감을 처리하지 못하면 어떤 공부나 훈련도 성과를 낼 수 없다.

기본적으로는 회의감을 처리하는 방법도 같다. 어떤 강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것들에 마음이 이리저리 휩쓸려서 집중이 안될 때가 있다. 그럴때엔 목표를 상기한다. '망상은 나를 구제해주지 않는다. 나는 이런 망상이나 하려고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명상의 목표를 위해 여기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 성과가 겉보기로 드러나지 않는 명상에 있어서는 이런 목표구체화가 중요한 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하건데 잡념이란 명상을 방해하는 모든 심리상태를 총칭한다.

부정적인 상태들은 눈치채기가 쉬우나, 갈망이나 욕망은 때론 숭고한 미덕에의 갈망이나 자기 발전에의 욕망, 심지어 명상체험의 희열 자체에 대한 집착으로도 나타난다. 이타적 느낌에서 초연하기란 그리 쉽지 않으나, 결국 이것도 현재 시점의 현실을 무시하고 만족을 얻으려는 욕망일 뿐이다.

명상중에 매우 긍정적인 정신상태가 찾아오기도 한다. 행복과 평화와 내면의 만족, 만물에 대한 자비심. 이런 마음상태를 거부하라거나 무정한 로봇이 되라는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그냥 지켜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심리 상태이며 왔다가 가고 생겼다가 사라진다. 명상을 계속함에 따라 이런 상태들은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요는 그것들에 집착하여 붙들고 있지 말고 그냥 그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지속되는지 그리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의식 못한 상태에서 끓어올라 의식으로 떠오른 후 얼마간 머물고 난 다음이곤 한다. 사실 우리는 잡념에 빠져 있을 때에는 그것을 모르다가 잡념이 지배를 풀고 쇠퇴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알아차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상이나 망상에 빠져있었음을 별안간 깨닫는 시점이 여기다. 자각하기를 반복함에 따라 그런 심리상태들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의식영역의 깊이가 점점 더 깊어지게 된다. 즉 실제로는 더 빠르게 알아차리게 된다.


관찰의 규칙들은 모든 심리상태에 적용된다. 두려움이나 우울이 자각아래 증발하는 것을 보고 나면 이 과정을 되풀이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와 똑같은 과정이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애국심이나 모성애 부성애 영원의 사랑등의 심리상태에도 적용되는 것을 보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그것도 똑같이 필요하다. 나는 이를 긍정적인 애착도 부정적인 집착과 똑같이 하위자아의 감각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명상에는 집중과 자각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집중은 렌즈처럼 마음 깊은 곳을 보는데 필요한 불타는 강렬함을 낳는다. 그리고 렌즈를 통해 거기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자각이다.

명상 초기 날뛰는 마음을 상좌불교에서는 원숭이 마음이라고 한다. 초기에 자각에 역점을 두면 자각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집중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처음에는 집중에 노력한다. 

대략 두어달쯤 수행하고 나면 집중이 향상되면서 알아차림에 역점을 두기 시작할 수 있다. 알아차림은 뒤에 이어 얻을 더 깊은 집중의 기반을 제공한다. 

집중과 알아차림 간의 불균형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바로잡히므로 우려할 필요는 없다.

알아차림 발달 -> 이탈의 빠른 자각 -> 집중 대상으로 회귀 = 집중력 강화로 이어진다.

따라서 초기에는 집중에 역점을 두도록 한다.

팁을 하나 더하자면, 명상시 드는 느낌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말고 호흡에 집중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흡에서 주의가 저절로 돌려질 때에 잡념에 주의를 기울여 관찰한 후, 잡념이 사라지면 호흡으로 돌아오도록 한다. 

들떠있는 상태라면 집중에 역점을 두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해진 상태에 빠진다면 알아차림에 역점을 두되 전반적으로는 알아차림에 역점을 두라. 알아차림은 치우침을 스스로 바로잡을 시야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은 생활 속에서 명상하기이다.

모든 분야에는 기초가 있다.

음악가는 음계연주가 기초다. 시작부터 배우는 것이고,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어도 계속한다.

야구선수는 타격연습을 한다. 어린이 야구단의 기본기이자 월드시리즈의 기본기이다.

명상가에게는 좌선이 기본기다. 하지만 타격연습이 시합 그 자체는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좌선은 기본기 연습이다. 그 기본기를 사용하는 시합은 전반적인 일상이다.

완벽하게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에서 명상하고 있는 자신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순간은 수행자들에게 명상체험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사건들 중 하나가 되곤 한다고 한다. 이러한 의식 전환을 실제로 영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조용한 곳에서 좌선을 하는 이유는 이것이 가장 쉬운 조건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며 하는 명상은 좀 더 어렵다. 시끄러운 곳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중에 하는 명상은 더욱 더 어렵다. 가장 어려운 것은 연애나 논쟁등 고도로 자기 중심적인 활동 중에 하는 명상이다. 명상을 일상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결코 간단치 않으나 불교에는 순탄한 전환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훈련법들이 있다. 다음의 것들이 그것이다.


-걷기 명상 (행선)

불안할 때에 좌선의 대안으로 활용해도 좋다. 한시간쯤 행선후엔 불안감이 다소 해소된다. 그 다음에 좌선을 하면 크게 도움이 된다.

행선을 위해서는 최소 5보에서 10보를 일직선으로 걸을 수 있는 방해받지 않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아주 천천히 걷는 것이므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 쉽다. 남의 눈이 없는 장소를 택하라.

숨을 들이쉬며 한쪽 발꿈치만 든다. 내쉬며 그 발의 발가락 끝만 바닥을 딛고 있게 한다. 다시 들이쉬며 그 발을 들어 앞으로 보내고 내쉬며 그 발을 내려 바닥에 댄다. 다른 발도 똑같이 한다. 5보나 10보를 가서 1분쯤 서 있는다. 아주 천천히 돌아서서 잠시 그 자리에 서있는다. 다시 걷는다.

고개는 꼿꼿이 세우고 목에 힘을 뺀다. 눈은 뜨되 특별히 뭘 보고 있지는 말라. 템포는 위와 같되 걸음은 자연스럽게 한다. 최대한 느림을 유지하며 주위 광경에 주목하지 말라. 몸에 긴장이 생기는지 유의하고 긴장을 알아채면 곧 풀어주라. 우아하게 걸으려고 시도하지 마라. 이건 자각수행이지 육상이나 무용이 아니다. 행선의 목표는 '걷기 동작'에 대한 절대적 깨침이다. 

발과 다리에 느껴지는 감각에 온 주의를 집중하라. 움직이는 쪽 발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새겨두어라. 움직이는 근육 하나하나, 발이 디디는/드는 때의 촉각의 변화. 이는 자잘한 반사동작들의 복합적 연속임을 알아차리게 한다.

들고, 내밀고, 내디고, 바닥에 대고, 누르고, 라는 식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은 일련의 동작을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더 많이 자각할수록 이런 중얼거림은 필요도 없을 뿐더러 중얼거릴 틈도 없어질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걷기 시작하는 처음에는 균형잡기가 좀 어려울 것이다. 이 행선법은 다른 모든 것을 밀어내고 의식이 철저히 감각들로만 가득하도록 고안된 기법이다. 촉각과 근운동감각의 홍수같은 흐름만이 있다. 이를 통해 실재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실재속으로의 도피를 경험하게 된다.


-자세 자각

우리 자세는 모르는 새 거북이 목을 하고 있는다든지 하고 뒤틀려 버리곤 한다. 그 모르는 새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루를 보내면서 몇분에 한번씩 자기 자세를 검사하는데 몇초를 쓰도록 한다. 교정을 위한 훈련이 아니라 감지를 위한 훈련이다. '걷고' '앉고' '눕고' '서고' 있다는 걸 알아챈다. 역시 처음엔 집중을 위해 마음속으로 주석을 달고, 익숙해지면 '감지'만을 한다. 어처구니없이 쉬워보이지만 강력하다.


-단순한 동작을 느리게 하기

구두끈을 매는 것은 단순작업이지만 일련의 미세한 동작들이 복합되어 일어난다. 이 세부동작이 대부분은 관찰되지 않는다.

이를 관찰하기 위해 단순한 동작을 느리게 하는 것이다. 

로봇을 제어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명령과 제어가 필요할 것인가. 자아를 객관화하여 그것들을 모두 알아채서 로봇마저 훌륭하게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관찰하는 것이다.

숨과의 협응을 해서 움직이는 와중에도 호흡과 협응시킨다. 이는 동작에 리듬을 부여한다. 촛점맞추기가 쉬워지고 알아차림이 강화된다.


-모든 자투리 순간

불안한때엔 자기의 불안감에 대해

지루할때엔 자기의 지루함에 대해 관찰한다.

주로 단순반복활동을 활용하라. 모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다.


-모든 활동을 자각

이것은 굉장히 높은 목표다.

일상 수행은 수행자의 수행에서 기만과 오류를 제거하여 내가 언제 성공하고 언제 자신을 속이는지를 보여준다.


- 명상전의 대자대비심 기원.

적들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것은 그들의 비도덕적 행위의 성공을 기원하는게 아니다. 그건 오히려 실패이니까. 

그가 탐욕 분노 혐오 증오 질투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다.

이를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하면,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행복과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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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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