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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읽어줄 책을 궁리하며 내가 좋아하는 책 목록을 살피다가 앵무새 죽이기를 봤다. 어릴때 좋아하던 책 세 권 안에 드는 책이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이걸 읽어줄까 하니 망설여졌다. 그것이 좋은 사상인지 이젠 회의적이다.

아들이 매미 사냥이 한창이다. 매미도 해충이니 모기를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매미를 채집통에 잡아둬서 때론 죽고 죽은 걸 해부까지도 해봤다고 한다. 아이가 잔인함에 익숙해지지 않길 바라며 가학성이 생기지 않게 막는 데에만 신경쓰고 있다.
작은 날파리와 큰 매미, 두 날벌레를 죽이는 것 간의 차이는 객관적으론 단지 크기 차이일 뿐이나 잘 보이고 보이지 않는 크기 차이로 인해 주관적으로 느끼는 잔인함과 느낄 수 있는 가학성에 차이가 생긴다. 가학성을 말리긴 하나 딱히 매미를 날파리보다 중히 여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날파리의 생명조차 소중히 여길 정도의 섬세한 도덕감수성이 진정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벌레 한마리의 생명조차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벌레 생명 같은 건 신경쓰지 않는 사람'보다 만나서 상대할 때 선한 사람일까? 내가 보아온 바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실생활에서의 선함이란 내 뜻이 막힐 때 참아내는 인내력 같은 것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은 종종 내 뜻을 가로 막는 것을 참는 인내가 부족하여 대상을 불의로 규정하는 자이기 쉽다.
실제 선함은 꼬치꼬치 도덕을 따지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신경 거슬리는 감정을 소화해 버릴 수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
벌레 한마리의 생명은 소중히 하나 타인의 행동에 쉽게 신경 거슬려 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꼬장꼬장해 보이지 선해 보이지 않는다.
도덕적 꼬투리로 잔소리 잘하는 불편한 네티즌은 선함과 거리가 멀다.
난 이제는 올바름에 대한 집착을 좋아하지 않는다. 올바름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사람중에 착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해치지 않는 이를 괴롭히지 말라는 앵무새 죽이기의 교훈이 나무 피를 빠는 매미에게 적용되는지는 애매하다.
하지만 아들이 나무 사랑으로 매미 사냥을 하는 것도 아니겠지. 곤충 채집 관찰일 뿐. 매미 사냥은 앵무새 죽이기 책이 불러 일으키는 섬세한 올바름을 찬미하는 감정의 반대편에 있는 '도덕의 작은 구석을 개의치 않는 무감각함'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채집 관찰을 위해선 벌레의 생명까지는 보살피지 않는 둔감함.
그 둔감함에 주의를 주고 섬세한 도덕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아이를 선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올바름에 대한 집착은 실리적 업적은 고사하고 도덕적 업적 조차도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명분을 논쟁하여 무엇이 올바른지를 아는 것이 의미있는 일인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덕 명분 따지는 사람은 그저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일 뿐이다. 실제 선함이란 그와 전혀 다른 인내력의 영역이다. 올바름에 대한 수많은 논의는 사회를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
아동 인권을 꼬치꼬치 따진 결과 교사는 허수아비가 되어 죽고 공교육은 무너졌다.
범죄자 인권을 꼬치꼬치 따진 결과 경찰이 허수아비가 되더니 어제 오늘은 묻지마 칼부림이 폭증했다.
올바름에 대한 집착은 공공을 망가트렸고 빈부격차의 경계를 공공의 위쪽에, 사적으로 치안과 교육을 감당할 수 있는 계급과의 사이에 그어 버렸다. 공공이 잘 되어 있던 나라에서 공공이 낮은 곳 귀퉁이의 불평등 경계까지 품어줘야 한다고 공공의 커버리지를 풍선처럼 잡아늘린 결과 찢어졌고 공공이 파손되니 자력구제 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경계가 높은 곳에서 그어지는 상황을 보고 있다.
올바름을 명분으로 하는 PC니 인권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내겐 이젠 도덕적 성과조차 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흑인 민권 운동 시대의 대표작 앵무새 죽이기에 대한 감상도 달라질 수 밖에.

길러내야할 선함의 본질은 꼬치꼬치 따지는 도덕 논쟁이나 섬세한 도덕 감수성이 아니라 신경 거슬리는 감정을 소화해 버리는 인내력이다. 그런 인내력은 선할 수 있는 힘일 뿐만 아니라 때론 독기가 될수도 그릿이 될수도 있는 힘이 된다.

그 능력의 여부가 올바르니 그르니의 잣대보다도 실제로 좋고 나쁜 것을 가른다. 데미안은 악마의 표상이지만 저열한 악과 달리 싱클레어에게 긍정적인 존재일 수 있었다. 반항이 혁신이 될 수 있고 규범 준수가 구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실제로 훌륭하고 좋은 것과 저열하고 나쁜 것은 선악이니 올바름이니 하는 차원과는 다른 펙터에 의해 나뉘기 때문이다. 그 다른 펙터에 의거한 관점에서 볼 때, 데미안 식으로 말해서 선악은 통합된다.
실제로 좋은 것. 즉 실리적 성과와 도덕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자 실제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올바름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역량을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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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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