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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노트'에 해당되는 글 132건

  1. 2014.08.29 정치에 대하여 3
  2. 2014.08.14 가르치고 싶은 것 : 패턴 파악 능력 3
  3. 2014.08.01 웹툰 송곳 1
  4. 2014.07.31 관념과 법칙
  5. 2014.07.11 주인의식 II
  6. 2014.07.10 주인의식
  7. 2014.07.09 '요즘 애들 버릇없다'
  8. 2014.06.16 노병가를 보고 4
  9. 2014.05.14 주입식 교육은 왜 나쁠까?
  10. 2014.03.24 예제를 통해 개념을 배운다
정치학 서적을 읽기에 앞서 정치에 대해 내가 파악한 것을 일차적으로 정리해봤다.

정치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최근 들어 슈퍼히어로물이 인기다. 나같은 사람이나 좋아하던 마이너 컨텐츠가 이젠 가장 메이저한 컨텐츠로 팔리고 있다.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져서 구원해줄 영웅을 찾는건가 싶다.

슈퍼히어로는 본질적으로 정치의 반대편에 있다.
정치는 비슷비슷한 힘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인대 만인의 투쟁을 하면서
자기 혼자 힘으로는 이겨나가기 어려울 때에
자신이 공격의 타겟이 되는 것을 피하면서 주위의 힘을 이용해서 자기 적을 이기기 위해 발생한다.
적과 아군이 유동적일수록, 그리고 구성원들의 힘이 엇비슷할수록
정치는 위력적인 수단이 된다.
현실에서 정치가 중요해지는 이유는 개인의 힘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한명이 고만고만한 열명을 못당해낼때엔 정치의 능력이 싸움의 능력보다도 큰 위력을 내지만,
다수의 평범한 사람으로 초능력자 한명을 못당해내는 세계에선 정치력보다도 강력한 싸움 능력이 관건이 된다.
슈퍼히어로는 다들 비슷비슷한 힘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혼자 특별한 힘을 가지는 개인이다.
군경으로 잡을 수 없는 확실한 적인 슈퍼 빌런이 있고 그런 슈퍼 빌런을 슈퍼 히어로만이 잡을 수 있는 상황에서라면 정치는 쓰일 일이 없다. 그래서 과거의 슈퍼히어로물에서 정치가들은 '탁상공론을 늘어놓는 허수아비 같은 늙은이들'이었고,
히어로물은 히어로의 존재를 빌어 '말만 떠드는 걸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며 정치를 탁상공론으로 비하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의 히어로물은 좀 분위기가 다르다.
웹툰 덴마를 봐도 그렇고 캡틴 아메리카 포함 어벤저스의 세계를 봐도 그렇고,
요즘 슈퍼히어로물에선 '돈과 정치력을 쥔 늙은이'들이 슈퍼 히어로 급 내지는 그 이상의 위상을 가지고 등장한다.
또한 악당 최종 보스도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는 게 아니라 강력한 정치력을 쥐고 등장한다.
이건 독자와 작가를 포함해서 세상 사람들이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전면에서 싸우는 놈보다도 강력한 정치력을 가지고 뒤에서 싸우는 놈이 더 무섭다는 걸 느낀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전면에서 전투력을 발휘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는 이기기 위한 기술이다.
적도 될 수 있고 동지도 될 수 있는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공격의 타겟이 되는 것을 피하면서
적이 되었을 경우엔 주위와 힘을 합쳐서 계속해서 이기기 위한 기술이다.
정치 기술이란 전투 기술과 동급 선상에 있는 기술, 일종의 싸움 능력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치의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정치적으로 싸우는 것의 기본은 내가 적대할 사람을 줄이고 내 적이 적대할 사람을 늘리는 것이다.
전면에서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과 정치적으로 싸우는 것은 방식이 다르다.
전면에서 싸울 때엔 상대를 제압해서 이겨야 한다. 무력다툼이라면 때려눕혀야 하고 전면에서 이기기 위한 말싸움이라면 논리적으로 논파하거나 기세로 찍어 눌러야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싸울때는 지지만 않으면 된다.
정치적으로 이기기 위해서라면
앞에서 으르렁대며 싸우는 것보다도 중요한 게 '저 자가 무리한 짓을 하고 있다'라는 인식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공유시키는 것이다.
무리한 짓이란 여러가지 의미를 갖는다. 도리나 권한을 벗어난 억지, 나쁜 짓, 이론상으론 옳지만 현실에 통하지 않을 답답한 짓 등.
이는 내 적에게 적대시할 사람을 늘리기 위함이다.
정면에서 싸우고 져서 그가 강자라는 인식을 유포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동정심을 자극받아 움직이는 사람보단 강자의 편에 서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지더라도 잘 지는게 중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피치못하게 적의 주장을 수용해야할 상황이 되더라도 내가 온 힘을 다해 싸우다 내 적이 강력해서 진게 아니라 내 적이 대단히 무리한 생떼를 고집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의 무리한 생떼에 맞서 주위 다른 여러사람들의 협조를 구하며 공동 전선을 짠다.
지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대표적인 것이 싸우지 않는 것이다. 정면으로 맞부딛쳐 싸우지 않으면 지지 않는다. 가령 언쟁을 회피한다든지 하는 것은 앞에서 지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기기 위한 방법이다.
내가 지지는 않으나 그는 무리한 짓을 하는 생떼쟁이다 라는 인식을 유포하여 그의 적을 늘리면 그는 결국 힘의 차이를 느끼고 위협감을 느껴서 스스로 얌전해지거나, 혹은 내 쪽이 충분히 강해졌을때에 (내가 굳이 전면에서 싸우려하지 않아도.) 그 자를 상대로 일선에서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나와서 그를 지게 만든다.

싸움의 기술은 다양하다.
일단 기본기로는 근력을 기르는 방법이 있고, 내 근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맨손 권법이 있는가 하면 또한 각종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 있다. 언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술도 전면에서 이기기 위한 싸움의 기술에 해당한다.
정치적으로 이기기 위한 기술도 마찬가지로 다양하다.
예를들면,
-기억은 선명한 증거에 지배된다. 지금 갈등에서의 적이 나중에 다른 갈등에선 이용가능한 힘이 될 수 있으므로 다툼의 흔적을 선명하게 남기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다. 어차피 앞에서 싸우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기는 데에 꼭 필요한 건 아니니 전면에서 많이 싸울 필요 없다.
-나보다 높은 사람을 다룰 때엔 그의 경쟁자를 미는 걸로써 몰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나보다 아랫사람을 다룰 때엔 저 방법이 역으로 나보다 아랫사람도 나를 공격할 수 있는 방법임을 유념하자.
-어떤 사람과 소통하는 채널이 달라지면 그에게 전달할 수 있는 메세지도 달라진다. 내 입장을 전하는 채널을 통해 얘기하면 그를 내 편으로 포섭하기 유리하다는 점이 크다. 공적인 문서만을 채널로 갖는 것에 비하면 대면하여 사적인 말 반/공적인 말 반 섞을 수 있는 채널을 통해 말하는 것이 그를 포섭하는 데에 훨씬 유용하다.
-어지간해선 한편이 되도록 만드는 평소의 친분이나 혈연등을 심어놓는 것도 (부당하지만) 정치적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체급과 근력이 크게 차이나면 당해내기 어렵듯이 정치력에도 기본이 중요하다.
기본은 내 편을 늘리고 내 적을 줄이는 것이다.

요약하면 정치는 싸움의 기술이다.
평상시 : 내 편을 늘린다. 컨택할 수 있는 사람의 수와 컨택할 수 있는 채널을 늘려 놓는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후에 갈등이 있을 때 갈등 상대방을 뺀 채로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 내 입장을 설명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 관계로 만들고 유지한다.
다툼이 일어날 시 : 갈등의 대상을 정하고 그 대상과의 갈등에서 이기는 데에 힘이 되는 사람들을 파악하고 그가 내 편을 들도록 만들기 위해 정치 기술을 사용한다. 앞에서 이기려고 싸우기보다는 지지 않는 방식으로 싸우고, 저 자가 무리한 짓을 하는 자임을 부각시켜 주위에 보여준다. 주위를 포섭하는 데에는 특정 채널을 통해 내 입장을 설득하고 내 편이 될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에 정면에서 적의 입장을 논파할 필요는 없다.

정치는 정정당당한 1:1의 힘 겨루기 대신 다수를 모으면 이긴다는 것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만인지적은 이만명 모아서 치면 이긴다'는 방식이기에 정정당당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인간 사회내에서는 모르면 위험할 정도로 대단히 강력한 기술임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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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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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재능중 가장 유용한 것은 패턴 파악을 잘한다는 것이다.
전체 사건의 일부들을 관념화하여(=분석) 그 개별 관념들이 만드는 흐름에서 법칙을 찾는 것(=통찰)은 유용한 능력이고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이걸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관념화를 잘하려면 관념을 다루는 데에 능숙해져야 한다.
관념을 다루는 데에 있어 책을 읽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훈련법이다. 문자가 갖는 매체의 한계로 인해 책에서 내용을 추출하는 과정은 관념을 많이 아는 것과 관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 등으로 관념을 다루는 훈련이 된다.
오늘 뭐했는지 스토리를 리텔링하는 것도 유효하다. 내 경험상 언어는 `선`의 느낌이다. 사건을 이야기로 전할때에는 사건을 전체 뭉치로 놔둔 상태로는 전달 할 수 없다. 내가 겪은 것이 평면이라고 한다면 그걸 이야기로 전달하기 위해선 평면위를 지나는 (칠하는) 선으로 이야기해줘야 상대가 이해한다. 핵심을 취하면서 입체적인 사건을 체계적으로 칠하는 선을 이야기하는 능력은 스토리리텔링을 통해 훈련될 것이다.
분석에 사용하는 관념은 새로 만들거나 기존의 것을 배워서 사용한다. 관념을 새로 만들어서 이용하는 경우는 아무래도 드물고, 많은 경우에 기존의 관념들(언어로 이름 붙여져서 어휘가 된다)을 배워서 이용한다.
관념들이 엮여서 만드는 흐름중에서 법칙을 찾아낼 때에도 이 법칙은 논리와 인과 같은 기존에 알고 있던 법칙과 유사하기 일쑤다. 그래서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해 본 경험이 많을수록 흐름으로부터 법칙을 파악하는 능력인 통찰력을 갖기에 유리해진다. 하지만 현실은 복잡한 문제라서 단지 경험하는 것 만으로는 그 흐름의 법칙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가기 쉽다. 아이가 맞이한 상황을 통찰하여 풀이하는 예시를 보여주는 것은 풀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의 난이도를 낮춰서 훈련이 되는 수준으로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를 요약하면 책읽기/책과 생활에 대한 스토리리텔링 받기/아이가 해준 이야기를 통찰해주는 피드백의 세가지 훈련법이 나온다.

관찰력은 패턴파악 능력의 기초가 된다. 내가 예전에 개미집이나 돌아가는 세탁기를 질리지 않고 관찰하곤 했었던 게 훈련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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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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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네이버 웹툰 송곳을 봤다.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02922&no=14&weekday=tue

"어차피 몇년 지나면 입장 바뀔 거 지금은 그냥 져줘요. 가드 꽉 잠그고 대가리 팍 숙이고."
웹툰 송곳 1-13화에서 부장과 갈등을 빚는 주인공 이수인에게 조언자 김과장은 권투에 비유해서 '기다려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주인공 이수인은 그런 김과장의 조언에 대해
'지겹다. 강제된 선택지에 시시한 통찰을 덧칠해서 마치 새로운 답인양 떠들어대는 어른인 척 하는 어른들의 하나 마나한 조언들'이라고 평한다.
이 다음화인 1-14화에서 이수인은 자기 직계 보스인 점장에게 철저하게 당하고, 잘난척 조언하던 김과장을 향해 '이제 어떡할까요? 이제 뭘하면 됩니까?'라는 시선을 날린다.
김과장은 말 못하고 외면한다.

내가 웹툰 송곳을 본 것은 아래 글을 쓴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 글의 댓글로 달음] http://longlive.tistory.com/599#comment13308977
만화속 김과장이 해준 권투 얘기는 그 전날 내가 했던 조언과 완전히 같은 말이었다.
'괜히 빤한 밑천 내밀어봤자 소용없으면 그런게 쌓여서 점점 더 똥이 되고 점점 더 차별의 피해자가 됩니다. 모르겠으면 기다려요. 항상 쎈 사람 없습니다.'
'일단 내 직속 보스는 무조건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해요. 가령 대학원생이 교수님이 싫은데 까는 법 같은 건 전 모릅니다.'

나는 '조언자 김과장'의 눈을 통해 주인공 이수인을 봤다.
김과장은 부조리의 음지를 피해가는 법을 말하고 있었고
이수인은 부조리의 한복판에 스스로 들어가서 부조리를 없애는 법을 찾고 있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른 김과장의 조언은 이수인에겐 '지겹다. 하나마나한 조언들'이 되었다.
하지만 의문이다.
이수인이 옳을까?

부조리에 빠지나 물에 빠지나 위험에 빠진 사람의 행동은 유사하다.
부조리를 물웅덩이에 비유해보자.
물에 빠져 죽는 일을 피하기 위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웅덩이를 피해가는 방법
-물에 빠졌을 때 거기서 빠져죽지 않고 헤엄쳐 나오는 방법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방법
-웅덩이를 매꾸거나 주위에 철책을 쳐서 위험을 예방하는 방법
이 방법들은 각각 서로 다르다.
발밑에 웅덩이를 살피며 걷는 방법을 빠진 다음에 헤엄쳐 나올 때 쓸 수 없고,
철책을 쳐 위험을 예방하는 방법으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이수인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가 물에 뛰어든 후 그 안에서 사람도 구하고 물웅덩이도 없애버리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래서 그에겐 웅덩이를 피해가는 방법이 지겹고, 시시하다.
하지만 과연 그게 맞는 노력인가.
회의적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엔 '섣불리 들어가지 말고 줄을 던지거나, 뒤로 돌아가서 때려서 기절시키고 뒷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오라'는 규범이 있다.
구조자의 안전과 빠진 사람의 생명을 위해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안타깝다고 적절한 방법을 따르지 않고 뛰어들기만 하면 같이 빠져 죽는다.
규범은 '수영을 잘하는 사람 조차도 물에 빠진 사람이 본능적으로 휘두르는 손에 맞거나 혹은 붙잡고 놓지 않아서 구하려다 빠져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 "네 혈육이 빠졌다면 침착하게 밧줄이나 찾고 있겠느냐"고 지적한다면, 그 말이 사실일 것이다.
남이니까 침착하지 혈육이 빠지면 이성을 잃고 뛰어드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서 규범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냥 뛰어들면 둘 다 죽는다. 규범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더 나은 기술의 문제다.

물웅덩이 대신 부조리를 대입해도 같다.
당장 물에 빠진 사람 구하는 것과 위험한 웅덩이를 예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처럼
부조리를 없애는 방법으로 당장 부조리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없고
부조리에 빠져있는 사람을 구하는 방법으로 부조리 자체를 없앨 수도 없다.
이수인은 저 두가지중 무엇을 더 하고 싶었던 걸까?

이수인 같은 사람들이 있다.
평소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잘 친해지지도 못하면서 올바르지 않다는 것 앞에서 묻혀지내지 못하는 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작중 이수인은 '친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게 아니라, 반대로 '부조리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그들과 친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작중 이수인의 스승격인 노무사는 '당신이 구한 사람은 이상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냄새나는 그저 사람'이라는 것을 알라고 가르친다.
난 그런 이수인에게 '당신은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묻고 싶다.
"당신은 잘 친해지지도 못하는 눈 앞의 남을 불행으로부터 구하고 싶은 겁니까?
아니면 세상에 이런 부당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겁니까?"

이수인이 원한 것이 사람을 구하는 것인지 부조리를 없애는 것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만약 그가 원한 것이 부조리를 없애는 것이라면 그는 자기 의도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위험 예방을 위해 웅덩이를 없애거나 철책을 치거나 구명조끼를 비치하는 건 웅덩이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이지 빠져있는 피해자가 할 일이 아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할 일은 살아서 나가는 거고, 물에 빠졌는데 나오지 않으면 빠져 죽기나 할 뿐이다.
부조리에 빠진 채로 부조리를 예방한다는 건 무모한 생각이다.

웹툰 송곳은 이렇게 말한다.
'분명 하나쯤 뚫고 나온다.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롭다가
가장 먼저 부숴져 버리고 마는
그런 송곳같은 인간이.'
송곳의 세계에서 이것은 슬픔인 동시에 희망의 메세지다.
'참지 못한 의인이 일어설 것이다. 분노한 의인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그 의인들은 죽을테지만...'이므로. 그래서 그것은 희망인 동시에 비애의 메세지가 된다.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들어간 의인들의 시체로 강이 매꿔질지도 모른다는 꿈은 희망을 가장한 절망에 불과하다.
이렇게 송곳을 하나씩 부숴먹으면 희망은 없다.

송곳 1-7화에서 이수인은 자기를 다독여준 훈육관을 두고 '그는 어쩌면 가장 교활한 형태의 체제 수호자 였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한다.
폭발해야 할 압력을 살살 달래서 조금씩 빼줌으로써 체제가 유지되도록 해주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악을 계속되게 해주는 존재가 아니냐는 의미에서 '교활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주인공이 투사가 되기 위해 피해자가 되기를 자청하는 웹툰 송곳에서 체제란 부조리를 비호하는 원흉처럼 그려진다.
이 관점에선 투쟁으로 체제를 깨면 부조리가 없어지기라도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사람이 체제와 조직없이 살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조직 없는 개인은 다른 조직에 더 힘든 조건으로 흡수될 뿐 결코 '조직없는 개인'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조직이 깨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문제는 어지간한 부조리보다도 중요한 생존의 문제가 된다.
부조리한 체제를 비호하는 기득권이란 말은 잘못된 구도를 만들었다. 조직에서 생존을 조달하는 모든 개인은 자기 조직이 깨지면 잃을 게 많다.
부조리를 고치겠다며 체제를 위협하면 처음엔 잃을 게 없을 줄 알고 우호적이던 개인들이 투쟁이 구체적이 될수록 점점 더 잃을 게 있는 기득권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한다.
적의 적을 늘리고 내 편을 늘려야 할 싸움에서 그런 모든 개인을 적으로 돌린 채로는 그 어떤 좋은 의도라도 성공할 수 없다.

그래서 기다려야 한다.
약할때 앞에서 싸우다 지지 마라.
지금 뛰어들면 운이 좋아서 특별한 한 사람을 구할 수는 있어도
그걸로 불특정한 사람을 위해 부조리를 고치는 것을 기대하진 마라.
당장은 부조리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발밑을 조심하고
운이 나빠 한발 빠졌다면 더 빠지지 말고 헤어나올 길을 찾아라.
기다리면서 내 편을 늘리고 기다리면서 내 적의 적을 늘려라.
내가 상대하는 적은 이상적으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가 아니다. 성급히 자포자기해서 몸을 던지지 마라.
기다리면 힘이 길러지고 힘이 길러지면 내 힘과의 균형이동으로 인해 없던 기회조차도 만들어진다.

약하면 기다려라. 가드 꽉 잠그고. 되도 않는 잽 날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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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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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언어적 소산이라는 설명이 있다.
이때의 언어란 개념 및 관념을 의미한다.
난 언어라는 표현보다는 관념이라는 표현이 더 잘 이해가 간다.
정의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관념들을 들었을 때 얼핏 머리는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감정을 포함한 전체적인 반응은 그것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와 다르다. 개념의 포장지를 뜯고 내용물을 상상으로나마 복구시켰을 때에야 비로소 몸과 감정이 그것을 이해하고 반응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관념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그가 불의한 짓을 했다'라는 말을 보았을 때 실제 불의한 행동을 눈 앞에서 보는 것처럼 반응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관념에 이름을 붙인 단어를 보고 애틋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킬 것이며 섹시라는 단어를 보고 침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실제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성이 사랑이라는 관념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보는 사람의 감정과 그것을 가시적으로 만든 영상을 보는 사람의 감정은 다르다. 그 관념의 실제를 본다면 감정이 움직일 사람이 그 관념을 담은 단어만 보았을 때엔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다는 것은 이성이 관념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 관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관념은 현상으로부터 파악해 놓은 특정한 패턴이다.
패턴이란 표현은 일상적으로는 규칙적인 신호나 무늬를 뜻하지만 여기선 법칙을 의미한다.
비록 패턴이라는 표현이 좀 더 넓은 의미를 갖기는 하지만 난 패턴이라는 표현 보다는 법칙이라는 표현이 더 잘 이해가 간다.
(스마일 이모티콘은 그 자체로 '도형 패턴'이지만, 동시에 그 작은 이모티콘들이 물결무늬를 이루며 규칙적으로 찍혀 있는 것도 이모티콘이 이루는 패턴이라고 한다. 패턴은 객체와 규칙 이 두가지를 다 의미한다.)
현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무엇이 이 현상의 단위 패턴이 되는지(가령 스마일 마크가 반복되는 단위임을) 알 수 있으며 이렇게 요소를 파악하는 것을 분석이라한다. 현상을 전체적으로 보면 작은 요소들이 스마일마크인지 윙크마크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것들이 물결무늬를 이루고 있다는 큰 규칙성을 알 수 있고 이를 통찰이라 한다.
현상을 거시적으로 통찰하거나 미시적으로 분석하여 법칙을 읽어냈을때 그 법칙은 현상의 본질을 표현한다. 자연현상으로부터 패턴을 찾아내 수식을 만드는 것이 그 예다.
패턴이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법칙을 의미한다.

학습을 한다는 건 패턴을 습득하는 것이다.
사람이 학습을 할 때엔 관념을 그 자체로 습득하지 못한다.
예제가 되는 현상이 있어야 그로부터 법칙을 파악해서(패턴을 파악해서) 습득할 수 있다.

현상으로부터 패턴을 파악하는 것을 연구라고 한다.
연속되는 음파중에서 반복되는 특정한 음파 패턴을 '어휘'로 삼고 다시 그 단위 패턴이 반복되는 전체 패턴인 말을 연구하는 것처럼(어려서 말을 배울때 누구나 이렇게 한다), 패턴의 전체적인 규칙성을 연구하려면 단위가 되는 패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법칙(전체 패턴)을 연구할때에는 관념(단위 패턴)을 이용해야한다.
객체화 된 패턴, 즉 관념은 거기에 이름을 붙여서 어휘가 된다. 연구는 관념을 이용해야 하는데 관념은 언어로 이름 붙여진다. 그래서 연구가 관념을 이용하기 위해 호출하려면 그 관념에 이름을 붙인 언어를 통해야한다.
이것이 철학은 언어적 소산이라는 설명의 의미다.

'언어적 소산'이라는 표현을 두고 연구가 언어에 종속된다고 이해하는 것은 틀린 이해다.
이때 언어란 '기존에 알려진 관념들'을 의미한다.
특정 패턴을 뭉쳐서 관념으로 객체화 하지 않으면 전체 패턴으로부터 법칙을 추출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가령 쿤의 연구는 패러다임이라는 관념을 새로이 만들어 넣어야 가능하다.
내가 파악한 관념이 기존에 없던 개념이라면 거기 이름을 붙여 어휘를 새로 만들어서 언어의 지평을 넓이는 것은 자유이므로, 언어가 근본적으로 연구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현상을 분석하여 법칙을 찾을 때에 '기존에 알려진 관념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독자적으로 새로운 관념을 생성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어져서 능력의 한계을 만나기 때문에 어휘라는 기존에 파악된 관념들에 크게 의존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수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나 수학은 철학에 비해 국가별 언어에 따른 관념 차이가 없어서(수학의 관념, 수학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 점이 부각되지 않는다.
과학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는 수학과 같으나 수학은 관념의 체계인 패러다임이 교체되지 않았던 데에 비해 과학은 패러다임 교체를 통해 '과학의 관념, 과학의 언어'가 변경되는 일을 지역적 경계가 아닌 시간적 경계를 따라 맞이하곤 했다는 점이 다르다.


사고력 증진을 위해서 독서가 권장되곤 한다.
책을 읽어야 사고력이 증진되는 이유는 책이 문자 매체의 한계로 인하여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관념을 다루는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화나 그림이나 음악이나 게임등의 다른 매체들에 비해 책은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관념으로부터 현상을 풀어내는 상상력을 한층 더 요구한다. 그래서 독서의 과정이 독자에게 개념 이해력을 길러주고, 이렇게 길러진 개념 이해력(패턴을 이해하는 능력)은 다른 현상으로부터 법칙을 연구하는 데(패턴을 파악하는 데에)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아기가 언어를 배우는 것이 언어를 연구하는 것이듯, 현상으로부터 법칙을 찾아내어 이해하는 이러한 능력은 특정 직업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활 전반에 요구되는 사고 능력이 된다.
설령 내용 측면에서는 책이 담을 수 있는 모든 내용을 영화나 그림등의 매체에 더 잘 담을 수 있다 하더라도 독서가 권장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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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때 높으신 분들이 와서 강연하는 강좌가 있었다.
삼성전자 사장님이셨던가... 자본주의 사회의 고랩 찍으신 분께서 오셔서 이런 얘기를 하셨다.

사원은 회사에 있을때에만 회사생각을 한다.
사장은 잠들기 직전까지 회사생각을 한다.
오너는 자는 순간에도 회사생각을 한다.

당시 강연하실때의 말씀은 '그 정도 하니까 오너 자리를 유지한다'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사실은 사실이다. 내 것이 되어 주인의식이 발휘되면 일 앞에 밤낮이 없어지고
반대로 내것이 아니면 어떻게든 농땡이 칠 궁리부터 하게 된다.

사업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제일 힘든게 사람 쓰는 거다. 비싼 인건비 주고 일 시켜 놓으면, 내가 하면 금방 해치우고 다른 것 할 것 같은 일을 가지고 부지하세월을 끈다. 단지 시간만이 아니라 일하는 태도 전반에 걸쳐 말 그대로 남의 일 하듯 일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시켜서 일하는 사람의 생산성은 시키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답답하기 그지없다.

바꿔 말하면 이게 이 체제의 현주소다.
근무지에 발목잡혀 시간 때우며 빈둥대는 거래봤자 제대로 작정하고 놀러가는 것에 비하면 논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일텐데도
이 사회의 가히 대부분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최선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은 상태로
일하면서도 일하지 않고 놀지만 놀지 못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 과거 먼나라 이웃나라에 묘사된 공산주의 사회가 오버랩된다.
모두가 공동 주인인 사회에서 누구도 주인의식을 발휘하지 않아서 다함께 태만해졌다던 만화속 서술은
소수가 주인인 사회에서 다수가 주인의식을 발휘하지 않아서 대체로 태만해졌다는 지금의 묘사와 결과적으로 비슷하다.
주인의식을 개인의 미덕으로 강요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그게 누구나 갖고 싶을 만한 것이었다면 누구나 갖기 위해 욕심을 부렸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욕심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면 그건 사회구조의 문제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기 사업을 하기가 너무 난해해서 고용된 안정성을 달콤하게 여기게 된 사회.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기 가게를 일궈놨더니 높아진 부가가치를 건물주가 지대로서 거둬가는 사회.
그래서 결국 주인의식을 탐내지 않는 편이 기대소득이 높아져버린, 모두가 낮은 생산성으로 빈둥거리는 사회.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제대로 일하지도 못하는 채 허비되는 수 많은 사람들의 낮은 생산성만큼
우리는 모두 가난할 것이고 힘겨울 것이며 또 불행할 것이다.

지나친 분배가 동기부여를 막아서 생산성을 죽였던 사회가 있었다. 지금 그 반대편 끝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분배받지 못하고 주인의식을 발휘할 동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체제의 수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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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 동네가 있었어요.
길은 오르막에다 험하고, 쓰레기가 굴러서 냄새나며, 밤이면 쓰레기 더미를 파먹는 동물들이 울부짖어서 잠도 잘 수 없는 곳이었어요.
여느 날처럼 집 앞에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어머니에게 아이가 말했어요.
"우리 동네는 우리가 아껴줘야 하지 않아요?"
이 생각은 아이의 부모님을 통해 온 동네 주민들에게로 퍼져나갔어요.
"우리 동네는 우리가 가꿉시다"
거리를 청소하고, 쓰레기는 치우는 날짜를 정해서 버리고, 노상 방뇨를 하지 않고, 벽에는 예쁜 벽화를 그렸어요.
그렇게 모두가 매일 매일 열심히 노력하자 동네는 점점 살기 좋은 곳이 되었어요.
아이는 자기의 우리동네가 자랑스러웠어요.
아이의 우리동네는 더 이상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 동네가 아니었어요.
그 동네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집주인도 포기했던 집들이 가격이 올라갔고 몇몇은 비싸게 팔았대요.
그 집에 살기 위한 월세가 올라갔어요.
예전 동네 주민들은 더 이상 그곳에 살 수 없었어요.
아이도 그렇게 남의 집에서 쫓겨났답니다.

회사에 들어가 시키는 일만 하던 아저씨가 있었어요.
아저씨는 '내 일'을 하고 싶었어요.
고용되어 명령받은 남의 일 해주는 게 아닌 내 일, 내 사업을 하고 싶었어요.
아저씨는 가게를 차리고 열심히 일 했어요.
아저씨는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달려 나갔어요.
밤낮없이 일했지만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 힘이 났어요.
말로 다 하기 어려운 노력을 쏟아 키운 가게를 아저씨는 내 생명과도 같다고 말하곤 했어요.
가게는 점점 번창했어요. 멀리서도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늘어났어요.
가게세 재계약을 해야하는 시점이 왔어요.
건물주가 가게세를 다섯배로 올려달라고 했어요.
옆 건물주는 여덟배도 불렀다고 해요.
아저씨는 가게를 문닫고 나가야 하게 됐어요. 그래서 당연히 빚더미에 올랐지요.
아저씨는 자기가 그때까지 열심히 했던 일이 '내 일'이 아니라 남의 것을 대신 꾸며주는 남의 일을 한 것이었단 걸 알았답니다.

그 날도 학교에선 선생님이 병아리같은 아이들을 상대로 수업을 하고 있었어요.
"공산주의가 왜 망했는지 아니?"
"저 알아요. 공산주의는 일을 열심히 해도 모두가 똑같이 나눠갖으니까 모두가 게을러져서 망한거에요"
"참 잘했어요~ 내가 한 만큼 갖을 수 있으니까 더욱 열심히 노력하는 것, 이런 걸 주인의식이라고 한단다.
주인의식이 없으면 망하게 되는 거에요. 다들 알았죠?" "네-"
그렇지만 자기 가게를 차리고 일하는 사람의 주인의식 조차도 자기 꾀에 자기가 속은 게 되는 지금
주인의식을 갖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몇명 없었어요.
사람들에게 주인의식을 갖도록 만드는 자본주의의 장점은 이젠 온데간데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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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들 버릇없다'라는 말은 이집트 피라미드에도 나온댄다.
항상 있어온 증언이지만, 동시에 '수천년간 계속 버릇 없어졌으면 지금은 지옥이게?' '더 영악해졌다는 증거는?'등으로 얘기하면서 사실무근인 없는 현상일거라고들 얘기한다.
항상 관찰되어온 것이 과연 없는 현상일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한게 안 따르면 큰일나는 진짜 중요하고 타당한 것이면 훈육이라고 하지만
이래라 저래라 했는데 그게 안 따라도 큰일나는게 아니고 자유의지만 구속하는 불필요한 간섭이면 잔소리라고 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앎의 차이가 작을수록 지시는 잔소리가 되기 쉽다.

천년전에는 세상이 별로 빠르게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른은 한번 배운 것을 마르고 닳도록 써먹을 수 있었고
쌓은 지식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통찰력을 발휘해서 아이보다 훨씬 더 지혜로울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빠르게 변하게 되면 어차피 새로운 문물을 새로 배워야 하는 아이 입장에서는 배우는 난이도가 똑같지만
자꾸 바뀌는 걸 따라가야 하는 어른 입장에선 자꾸만 새로 배워야 해서 난이도가 대폭 올라간다.
현대의 어른은 바뀌는 세상의 신문물을 따라가는 데에 아이만도 못하기 일쑤다.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아이와 어른간 앎의 간격은 좁아질 것이다.
역사 전반에 걸쳐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발전해왔고 아이와 어른간 앎의 간격은 점점 더 좁아져 왔다.

앎의 격차가 클수록 하라는 대로 안하면 큰일 날 가능성이 크다.
앎의 격차가 작을수록 하라는 대로 안하고 자기 뜻대로 해도 큰일 날 가능성이 작아진다.
앎의 격차가 작은 사람 간 일수록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말이 쓸데없이 내 자유의지만 구속하는 잔소리가 되는 비율이 커진다.

과거 : 애와 어른의 앎 격차 큼.
현재 : 애와 어른의 앎 격차 작아짐.

잘못될 가능성의 크고 작음은 자기 경험이나 주위를 보다 보면 알게 된다.
먼 과거엔 어른 말(혹은 어른 말의 총체인 관습이나 터부) 좀 안듣더니 죽는 애가 나오는 일이 더 많았을 거다. 사람들은 그걸 보며 자랐을 거다.
좀 더 나중 시대엔 어른 말 안들었더니 장기적으로 인생 망치는 경우를 보며 자라난 사람 수가 지금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른과 애의 앎의 격차가 작아지면, 애 입장에서 어른의 지시가 안 따라도 큰일 안나는 쓸데없는 잔소리가 되어간다.
점점 더 어른이나 관습이 지시하는 대로 안해도 별 큰일이 안나는 걸 보며 자라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게 된다.
그럴수록 어른의 지시를 불신하게 된다. 터부나 통념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범하는 수가 늘어나게 된다.
즉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게 된다. 이것을 어른의 관점에서 보면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진다'.

'버릇없다'는 표현은 같은 태도 중에서도 부정적인 면만을 묘사하는 표현이라서 공정한 표현은 아니다.
'범하면 큰일 나는 걸로 알려져서 행동하는 사람이 알아서 조심하던 터부 같은 규범을 넘나드는 행동'들을 흔히 버릇없는 행동이라고 하는데
이건 양면성이 있다.
어긴 규범이 지켜져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는건데 불신하고 어겨버리면 '싸가지 없음'~'반인륜 악인' 사이 정도로 평가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똥권위 앞에 쓸데없이 전전긍긍하던 것이나 혹은 무지해서 막연히 두려워하던 것을 넘어버린 게 되면
이는 통쾌한 용기 내지는 패기 정도로 표현된다.
수천년간 계속 '버릇없어진' 이면에선 실제로 점점 더 '터부나 통념을 깨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강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천년에 걸쳐 반복된 '요즘 애들 버릇없다'라는 증언은 아예 사실무근인 말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현상을 어른 관점에서 진술한 것이 아닐까?
수천년 동안 점점 더 빨라져 온 변화 속도가 => 아이와 어른간의 앎의 격차를 점점 더 줄이고 => 지시가 필요없는 잔소리가 되는 비율이 늘어나면서 =>
점점 더 기존의 관습이나 어른의 지시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이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라면
세상은 실제로 점점 더 버릇없어져 왔다.

이 맥락안에서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무턱대고 방임하여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을 수는 없다. 적정한 수준의 지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속도가 빨라지는 것, 그로인해 애와 어른의 앎의 간격이 줄어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 상황에서 본인이 들었던 것과 동일한 수준으로 아이에게 지시와 간섭을 한다면
아이를 향한 내 지시는 나를 향했던 내 부모의 지시보다도 좀 더 필요없는 잔소리가 되는 비율이 높아질 것이다.
(아마도 전 세대에 걸쳐 항상 그래왔을 것이다. 부모는 자기가 자라며 들었던 만큼의 지시와 간섭을 하고, 그게 자식에겐 좀 더 지나친 간섭이 된다.)
이를 인식하는 것이 해법의 시작이다.
법적/사회적으로는, 과거에 비해 유년기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이 현상에 상충하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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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84의 노병가를 보고 있자니 생각이 많아진다.

조직이 없는 개인은 조직에 흡수된다.
때문에 생존의 단위는 조직이다.
그러나 조직도 무소불위의 개체가 아니다.
조직도 외압에 시달리고, 개체로서 생존하기 위해선 다른 조직과의 경쟁에 도태되지 않아야 하며,
조직의 상사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조직이 생존하기 위해선 안으로는 조직이 자생할 수 있는 생활의 룰이 돌아가야 하며 밖으로는 임무 수행이 효율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조직은 깨진다. 처음엔 압박을 받는 정도이다가 그걸로 안되면 조직의 통솔자를 더 잘 닥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꿀 것이고 그래도 안되면 조직을 와해시켜서 다른 조직에 흡수시킬 것이다. 와해된 조직의 구성원들은 타 조직에서 더 작은 지분과 권리를 가지고 더욱 괴로워진다. 조직이 깨지는 건 생존의 문제다.

조직의 행동을 결정하는 판단의 과정은 민주적인 브레인 스토밍이 되는 경우도 있고 독재자의 독단이 되는 경우도 있으나
어쨌건 조직은 단일 개체로서 중구난방이 아닌 판단을 내려야 한다.
판단 내려진 명령과 지시를 팔다리는 빠릿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하며
세대교체되는 신입들을 교육해서 조직의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
노병가에서 묘사하는 의경 부대 구조는 이런 식이더라.
팔다리를 쓰는 일을 하지 않는 열외. (판단자+판단자가 일 시켜먹기 부담스러운 급들)
실무를 챙기는 책임을 지는 '챙'.
그 밑으로 팔다리가 되어 일을 하는 배식이나... 막내들.
수직 구조의 조직에서 팔다리가 "빠지지 않게" 관리하는 것은 챙의 몫이다.
그리고 그 이하의 구성원들은 각자 자기 후임들을 교육시켜서 이 구조속에 넣는다.
이 수직구조에서 하극상이 중간관리자를 깨버리면, 조직의 유지와 보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조직은 깨진다.
조직이 깨지고 나면 개인은 살아남지 못하기에 이는 생존의 문제가 된다.
생존의 문제는 종종 선악보다도 중요한 것이 된다.

작중에 김명호라는 사람이 나온다. 위로 인정받고 아래로 관대한 엘리트다.
김명호가 실세가 되었을때 그는 후임들을 힘들게 하는 온갖 악습들을 파격적으로 해체한다.
짬 안돼서 잠 못자고 고생하는 후임들 재우기, 고참이라고 막내들에게 근무 전가하지 못하게 하기, 1-2분만에 씻고 나와야 했던 후임들 여유있게 씻고 나올 시간 주기... 다른 고참들의 불만도 자기 세력으로 "닥치게 하고" 조직내 부조리를 일소한다.
그런 김명호가 두번 심하게 화낸다.
하나는 하극상이다.
권투하다 군대온 이준희는 고참의 부당한 명령에 고참 둘을 때려눕힌다.
그 때 김명호는 이준희를 집중적으로 찍어누른다.
이준희가 사과를 하건 뉘우치건 받아주지 않으며 그가 완전히 조직에 굴복할 때까지 압박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이준희가 조직의 구조에 완전히 순응했을 때,
김명호는 이준희를 하극상과 정반대의 입장인 조직의 구조를 수호하는 역할로서 힘을 쓰게 한다.
김명호는 왜 이준희를 찍어눌렀을까. 난 그 이유가 이렇게 보였다.
이준희가 가한 힘의 방향은 조직을 와해시키는 방향이다.
이준희가 자기가 때려눕힌 중간급을 대신해서 조직을 유지하는 일과 교육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준희의 힘의 방향은 힘이 충분하다고 할 경우 조직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그 조직이 경직된 수직구조인 탓이다.
이런 구조의 조직에선 아래로부터 부조리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 조차도 곧바로 조직을 깨버리는 방향의 힘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소대 외부의 구조가 여전히 군대인 이상은, 안에서 하극상을 용납하면 그 내무반이 '빠져서' '나가리되고'(수족이 판단에 따라 움직이지 않아 성과가 떨어지고 조직 윗선으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아서) 외압에 시달리다가 와해되는 결과가 된다.
때문에 이준희의 하극상이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며 옳다고 할 지라도
그 힘의 방향이 조직을 깨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한은 저지시킬 수 밖에 없다.
한편 노병가에 장기 병가자가 자기에게 인사 안하는 후임을 갈군 건에 대해서 병가자를 까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경우에는 병가자를 깨는 것이 조직 운영에 아무 지장을 주지 않는다. 힘의 방향이 조직을 깨는 방향이 아닌 경우다.

김명호가 화를 내는 다른 한 번의 사건은 타 조직과의 경쟁에서 공개적으로 낙오되었을 때다.
중대가 자기 구역에서 타 중대와의 경쟁에서 공개적으로 낙오되었을 때 김명호는 절대 터치 않던, 그래서 자기가 갈구면 "미쳤나봨ㅋㅋ"라고 답하던 자기 바로 아래 기수를 때리며 온 조직을 빡시게 굴리기 시작한다.
경쟁 조직과의 경쟁에서 밀리면 그 조직은 외압을 받게 된다. 조직이 윗선에서 가해지는 외압의 초기에 대응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면 외압은 점점 더 구체적이 되고 조직은 점점 더 각박해진다. 통솔자를 압박하고-그래도 안되면 통솔자를 더 각박하게 운영할 사람으로 바꾸고-그래도 안되면 조직을 개편하는 식으로.
결국 김명호가 화를 낸 두가지 일은
선악의 맥락에서 보자면 일관성이 없으나
조직에 위협이 되는 방향의 힘에 대하여 조직을 보호하고자 하는 생존의 맥락으로 해석할 때엔 일관성이 있다.

노병가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나는 아주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다.
지금도 아주 개인주의적인 조직에 속해있다.
나는 조직을 위해 내 영역을 헌신하는 것에 익숙치 않다.
나랑 아주 친했던 내 이전 상사는 아주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더 큰 조직이 우리 조직에 헌신을 요구할 때 아래를 쪼는 게 아니라 외압에 맞서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그는 다소 눈밖에 났고, 그는 다른 종류의 자리를 제안받아 이동하였으며, 그의 자리는 우리 조직내의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다.
새로운 내 상사가 된 사람은 이전 상사보다는 덜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다.
정확히는 그 자신도 우리 조직의 일원이었기에 개인주의적인 속내를 가지고 있으나 그러다가 눈밖에 난 선례를 염두에 둬서라도 외부를 상대로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대단히 기피하고 있다.
만약 바뀐 사람인 그가 우리 조직으로부터 만족스런 성과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그 다음엔 조직 외부에서 낙하산인사를 붙이는 방법이 있다. 그렇게해서 분위기 쇄신 하라고(쪼라고) 외부인사를 불러오면 그는 개인주의적인 조직을 갈아엎으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겠지.
내가 개인주의적으로 살기 위해선 내가 몸담고 있는 개인주의적인 조직을 보호해야 한다. 내 조직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것을 염두에 둔 헌신이 필요하다면 근시안적으로 헌신을 아끼기 보다는 수행해야 한다.

과거에 내가 상명하복을 거스르고 위를 깐 게 두세명 정도 있다.
당시엔 내 성질 못이겨 거스른 것 뿐이었다.
'이 자를 완전히 묻어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궁리했지
그 하극상 비슷한 것이 내 미래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모르는 채였고
그래서 이래도 내가 장차 괜찮을 건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지금도 과정에 불과하지만 어떻게 내가 여태 무사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를 알 것 같다.
정치적인 교섭은 물론이고 하극상조차도
그것이 성공하려면 조직의 존속을 위협하지 않는 방향으로 힘의 방향을 잡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안의 선악도 중요한 명분이지만 조직 유지는 생존이라는 중요한 명분을 기본적으로 깔고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제 중간급인 나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번에 나이차가 좀 나는 사람들을 여럿 뽑았다.
이들에게 잡다한 것들을 알려주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꼭 내가 해야 할 일도 아니지만,
친절하게 알려주려고 하다 보니 내게 물어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게 단지 귀찮은 일이 늘어나는 것 뿐인가 생각했었으나 노병가를 보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조직의 생활과 상식을 나를 통해 교육하는 것은 나에게 이롭다.
이전과 똑같이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할 지라도
중간급인 나는 '개인주의적인 조직을 보호함으로써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할 터전을 보존한다'라는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나한테 뭐라 할 사람 없는 만큼 자유롭게 행동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나 혼자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고 조직에 대한 헌신을 비웃으면 나는 후배에게 나만 '빠진' 선배가 될 뿐이며 그 결과는 나를 조직의 중심에서 밀어낼 것이다.
개인주의적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에게 너무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나 스스로도 따르는(적어도 내가 가르친 룰을 내가 무시하지 않는)
지속이 가능한 룰을 가르쳐주는 관계를 유지할 때 그 관계는 내게 수평/수직적 정치 관계에 있어 큰 힘이 될 것이다.

흔히 사회의 부조리를 밑에서 고칠 것이냐 올라가서 고칠 것이냐, 라는 말을 한다.
동시에 '올라가서 고치면 된다는 생각은 일견 쉬워보이지만 올라가는 과정에서 조직에 동화되기 때문에 올라가서는 고치지 못한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부조리를 고치고자 하는 정의감에서 비롯된 하극상이건/내 한 몸 편하겠다는 사사로운 뺑끼에서 비롯된 하극상이건,
그 힘의 방향이 조직을 깨는 방향이면 그것은 결국 생존에 대한 위협을 하는 셈이 된다.
하극상조차도 그것이 성공하려면 조직의 존속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깨기 위해선 그 깨고 난 자리를 매울 수 있어야 성공한다는 것이며
이는 내가 내 자리에 매울 수 없는 관계를 만들어 놓을수록 유리한 입지를 접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노병가를 보면서
부조리를 고치는 데에 성공하기 위해서도, 내 일신에 이익을 위해서도 조직 규모에서 판단하는 관점을 갖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조직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에 대해
생존이라는 강력한 명분을 적대시 한 방향에서
조직의 입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부조리를 개선 하려 한다면
그 개선은 성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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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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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입식 교육은 창의력을 죽여서 나쁘다고들 말합니다.
한데 성과만 놓고 어느 쪽이 나으냐고들 비교하지만
요는 스트레스 아니겠습니까?
제가 졸업하고 취미로 공부하는 책 파다가 이게 어릴적 생각보다 재밌는 내용이었구나 하는 걸 알았습니다. 하나 이해하면 두개의 호기심이 생기고 그걸 따라가면 이해가 깊어져요. 왜 학문이 귀족의 유희였는지 알았지요. 근데 좀 더 기억을 되살려봤더니 다시 초중고 과정에서 그걸 같은 방식으로 공부하면 여전히 짜증나겠더군요.
공부도 운동에서 사점 넘어서 젖산 연소 세컨윈드 만나는 것처럼 이해를 해야 스트레스가 낮아지는 지점이 있습이다. 움직이기 귀찮을땐 일을 아무리 줄여줘도 물잔 들어올리는 것도 짜증나는 것처럼, 공부도 이해하는 지점보다 낮은 단계에서 깔짝대면 아무리 조금해도 그 조금이 짜증나요. 움직이지않고 살 수 없고 배우지않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의 운명인 이상은 공부의 강도를 낮추기만 하는 건 스트레스를 해결해주는 게 되지 못합니다. 적당한 지점 즉 이해는 하되 혹사가 되지는 않는 지점으로 교육 수준을 유지하는게 스트레스를 최저화 시킬 수 있는 방안이 됩니다.
게임이 왜 재미있을까, 어떻게 게임을 재밌게 만들까를 연구한 게임제작자의 책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학습할 수 있는 난이도가 재미를 만든다는 거라더군요. 너무 어려워서 학습이 불가능하면 해석되지 않는 신호는 노이즈인 것처럼 재미가 없고, 너무 쉬워서 학습할게 없으면 재밌던 게임이 졸린 노가다가 됩니다. 그 사이의 지점에서 학습할 여지가 있을때 게임은 그렇게나 재미있어 지고요. 학습이 가능한 지점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과 동일한 말입니다.
창의력이 길러지네 어쩌네 이런건 성과를 기준으로 하는 말입니다. 성과는 과정이 제대로 되었으면 따라오는 것이니 처음부터 성과를 목적으로 하지는 말고 생각해 봅시다.
살려면 움직이기는 해야하는 것처럼 학습을 하기는 해야하는 사람에게 최적의 지점은 이해하는 학습을 하는 겁니다. 주입식 교육(그리고 주입식교육을 평가하기 위한 질 나쁜 시험문제)이 문제가 되는건 학생이 이해하며 학습하는 것을 항상은 아니지만 종종 방해하기 때문이고, 주입식 교육이 이해하는 학습에 방해가 될때 공부는 지긋지긋한 스트레스가 됩니다.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는 교육을 받은 학생의 성과 역시 낮아지며 교육은 부조리해집니다.
전 '애들은 (행복하게) 놀아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들은 (행복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꿈쩍하기 싫어하는 천하의 게으름뱅이는 매일 운동하는 사람보다 성과(건강)면에서도 안좋지만 총체적인 행복면에서도 삶이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 게으름뱅이는 눈꼽만치 움직이는 것도 너무 괴롭거든요. 공부도 마찬가집니다.
주입식 교육은 왜 나쁠까요? 그건 왜 괴로울까요? 주입식이란게 뭘 주입한다는 건지 생각해봅시다. 주입식 교육이란 개념을 관념 그 자체로 주입한다는 의미입니다. 인지심리학에서 사람은 개념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능력이 대단히 제한적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복잡함 개념을 예제를 통해서 이해하고 학습합니다. 개념을 말로 설명하면 이해가 어렵던 것도 하는 걸 직접 보면 단번에 이해 되곤 하지요.
주입식 교육은 개념을 관념인 상태 그대로 주입하기에 이해하기 어렵고 괴로운 공부가 됩니다. 이런 체제하에서는 극소수의 매우 높은 개념이해력을 가진 사람만이 사점을 넘어 세컨윈드를 만날 수 있겠지요. 아니 사실 누구도 모든 개념을 그대로 이해할 정도는 될 수 없으니 주입식 교육은 누구에게라도 괴로워요.
요는 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교육입니다. 주입식 교육의 대안을 찾는 건 창의력을 길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념을 주입하면 학생이 이해를 못하기 때문이고, 대안 역시 이해시키려면 어떻게 할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모색해야 합니다. 이는 가장 본분에 충실한 교육을 모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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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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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쿤은 '이론'과 '그 이론을 담은 예제'라는 서로 다른 의미를 구분하지 않고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썼다.
이는 후에 사람은 복잡한 개념을 예제를 통해서 배운다는 인지심리학 연구로 뒷받침 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이 의미하는 바도 이거다.
사람은 관념을 그대로 소화시키지 못한다.
사람의 개념 이해력은 생각보다 별로 높지 않아서 복잡한 관념을 온전히 배우기 위해선 실제 적용되는 예제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내가 뭘 배울때에도 설명만으로는 아무리 해도 잘 이해되지 않던 것이 실제로 하는 걸 보면 단박에 이해가 되던 경험이 누차 있다.
아이에게 가르칠 때에도 마찬가지.
내가 한 생각들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다면 난 그 생각들을 내 행동으로 내재화해야 한다.
내가 실천하는 예시를 보여주지 못하는 관념은 아이가 배울 수가 없다.

내가 한 생각들 중엔 물려받은 생활 태도가 아닌 스스로 생각해서 짜넣은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단지 관념에서 시작했기에 처음엔 내재화 되어 있지 않다.
전체 생활의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해서만 의식적으로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는 관념도 아이가 보게 될 내 실제 생활은
그 관념과 동떨어진 90%의 무의식적인 생활과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짜넣은 10%의 행동이 될 뿐이다.
아이는 자기가 본 행동을 물려받고,
들은 개념에 대해선 외곡 전달의 위험을 가진 채로 개념적으로 이해를 마친 후 행동으로 소화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거친 다음에서야
실생활에 어렵게 조금 적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관념을 아무리 체계적으로 가르쳐도 아이가 그걸 소화해서 행동에 반영하는 것은 미미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인사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하라고 시키는 것 만으로는 아이가 쑥쓰러워하면서 어정쩡하게 몸을 비꼬기만 했다.
내가 인사하는 모습을 보일 때에야 아가는 따라할 예시를 볼 수 있었다.
정말 적시에 어색함 없이 인사를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 예제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 생각이 내가 한 생각이라 다른 곳에서 예시를 구할 수 없다면 스스로 예시가 되어야 한다.
내가 한 생각을 모두 체화하도록 해야 한다.

요즘들어 사람이 개념을 그 자체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예제가 아닌 관념을
즉 행동으로 체화하진 못한 채 말로 늘어놓을 수나 있을 뿐인 생각을
관념인 상태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보다 훨씬 더 높은 개념이해력이 필요하다.
개념이해력은 혼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보다 훨씬 더 높은 개념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내가 아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그런 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내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후 내 아이가 나를 딛고 그보다 더 멀리에 다녀오기를 꿈꿨다.
그러나 아이가 물려받아 디딤목으로 쓸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미 체화한 곳까지이며
체화하지 못한 관념은 허공중에 날아갈 뿐 물려줄 수 없다.
내 생각을 예제로 만들기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다.
내가 품은 관념을 아이가 구현하기 위해선 나보다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체화하지 않은 관념을 품고 '더 멀리'를 꿈꾸는 건 요행을 바라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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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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