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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맞이 인생관 점검 시간.

내가 인생관으로 삼고 있는 것은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이다.
이때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내가 추구하기를 선호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긍정심리학의 방법을 참조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으면서 가치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뜻은 비교적 명확하다.
그런데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문제다.

흔한 말로 1등을 하기 보다 1등을 유지하는 게 어렵다.
요동치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 운을 타고 반짝하는 퍼포먼스를 내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한번씩은 찾아올 정도로 쉽기에
한번 1등을 하는 것은 운이 좋으면 얻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그 퍼포먼스를 운이야 어찌되든 내 의지대로 언제라도 발휘할 수 있는 진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여태 이룬 적이 없는 더 높은 퍼포먼스를 내도록 하는 것 보다도 중요한 건
내가 과거에 이룬 적이 있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지구력이다.
기본 옾셋을 높이면 최고치도 올라가기 마련이라서 전자는 후자를 연마하다 보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기도 하다.
(발동 확률 값을 높이는 이러한 지구력을 기르려 하기 보다
여러 번의 시도로 낮은 발동 확률을 극복하려고 함으로써 최고의 퍼포먼스 즉 대박이 얻어 걸리길 바라는 것을 두고
요행수를 추구한다고 한다.)

가치가 현실에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지구력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기대되는 가치, 즉 기대 수익이며 기대 수익은 안정성과 성과의 곱이기 때문이다.
항상 안정적인 성과를 내는 지구력은 단발성 성과에 비해 기대 수익을 엄청나게 높여주기 때문에 현실에 발휘하는 영향력도 굉장히 커진다.
해리포터를 쓴 조앤롤링은 어떻게 큰 돈을 벌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녀의 엄청난 원고료는 시리즈물에서 안정적인 수익성이 반복 예상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령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 처럼 인생 단 한번의 걸작을 쓴 사람은 설령 그 한권의 작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조앤롤링처럼 높은 고료를 받을 수는 없다.
과학이 왜 그토록 높은 대우를 받는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예다. 과학은 현재 다른 어떤 학문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공헌한 정도의 총합을 두고 따진다면 짧은 과학의 역사보다 종교나 인문학이 훨씬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과거에 이룬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래에 기대되는 가치 수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 번 해낸 것이 한 번에 그칠 때와 그것을 숙달하여 언제라도 내 뜻대로 해낼 수 있을 때의 효과 차이는 상상 이상이다.
한번도 해낸 적이 없는 것을 한번 해내면 뭔가 엄청난게 바뀔 줄 알았는데 막상 이루고 보니 별거 없더라며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겨우 한번 이뤘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번 이룬 성과에 매달리거나 실망하지 말고 그것이 어쩌다 얻어 걸린 것이 아닌 내가 내 뜻대로 언제라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되도록 숙달하고, 또한 망각과 노화 요인조차 극복하도록 시스템을 구성하여 성과를 유지한다면 그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된다.
지금까지 내가 해낸 적이 있는 것 중에 최선의 성과를 목표로 잡고,
그것을 운에 좌우되지 않고 언제라도 해낼 수 있도록 허술한 지점을 보완하고 반복하여 숙달하고 시스템화 할 때 그것이 가치를 만들고 성공을 만든다.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내가 추구하기로 선택한 가치를 생산하기를 반복 지속하여 숙달 및 시스템 구축함으로써 미래에 언제라도 내 의지대로 이 가치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환경적 우연에 휘둘리지 않고 내 자유의지를 확장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내는 성과는 외부 환경적 우연 요소의 영향과 내 자유의지의 영향이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과 환경 요소에 휘둘리는 것을 줄이고 내 의지로 언제라도 성과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내 자유의지의 효과를 확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숙달은 가치의 미래 기대 수익을 안정적으로 높여주며 그로써 현실에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흔히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 '성과를 추구한다,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에 대비되어 쓰이는 뉘앙스를 갖곤 하는 이유도 이러한 이해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나는 내 아이가 자기가 추구하기를 선호하는 가치를 파악하도록 할 것이며, 그러한 가치를 운이 아닌 자기 의지대로 항상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지구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고자 하는 방식이며 물려주고자 하는 방식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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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해 논한 2010년 캐시모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현실은, 우리가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이 우리가 파리나 박테리아 수준으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설탕 한 줌이 자유 의지가 없는 수준으로 우리도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고 그 법칙은 자유 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말은 넌센스다.
자연의 법직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가 관찰 할 수 있는 현상을 관찰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학도 그의 관찰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찰하고 그의 역학을 완벽하게 설명하여서 대표적인 예시로 사용했던 역학현상에서 조차도
'항상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들이 있었다.
이는 후에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위기로 내몰고, 뉴튼 역학에 의해 해석되며,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뉴튼역학도 뉴튼이 관찰한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광속도에 근접한 계에서 자연의 법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설명한 자연의 법칙은 전 우주에서 동일하게 동작하지만
뉴튼이 관찰했던 조건과 환경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뉴튼 역학을 완벽하게 보여줘서 뉴튼이 대표적인 예시로서 사용한 계에서 조차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이 있었다.
이는 역학뿐 아니라 과학의 모든 패러다임이 마찬가지다.

패러다임은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형상을 만든다.
('세계는 신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뱀과 코끼리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는 섬이다.')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의 탐구활동은 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어서 전체 구조물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활동이다.
('세계를 떠받치는 코끼리는 몇마리인가?')
과학의 발전은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 이미 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전체 구조 자체를 합당한 구조로 파악하는 것이 발전이다.)
현재 따르고 있는 패러다임이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캐시모어 논문의 저 마지막 말은 설탕 한줌에 대한 자연의 법칙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상정한다.
이는 과학은 완성되었으며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고 자신하는 것과 같다.
오산이다.
진짜 현실은, 자유의지를 논하기엔 설탕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과학이 '인간은 오토마타이며 의식은 그 로그파일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놓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항상 관찰하는 자의식과 자유의지는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명백히 관찰되는 현상은 그 자체로 패러다임보다도 한 단계 위의 확실성을 갖는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장차 무엇이 현재의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몰고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이끌어 낼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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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상대로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1. 놀이방 안에 풀어놓고 뭘 하고 놀라고 지정함.
한두시간 후 이제 다른 거 해도 된다고 함.
2. 놀이방 안에 풀어놓고 하고 싶은 거 하고 놀라고 함.
한두시간 후 이제 다른 거 해도 된다고 함.
다른 거 해도 된다고 했을 때, 1번 집단 아이들은 하던 놀이를 바꿨다.
그러나 2번 집단 아이들은 다른 거 해도 된다고 하는 말에 아예 신경 자체를 쓰지 않고 하던 것을 계속 했다.
일이나 공부가 아닌 놀이라고해서 다 같은 놀이가 아니라
'뭘하고 놀아라'고 시키면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아닌 것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지시받은 것에 회의를 갖게 되는 반항기는 자유의지 발달 과정에서 반드시 온다.
그래서 자식은 뜻대로 가르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개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어서
역으로 아이 입장에서 보면 미숙한 자유의지로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자유롭고자 한들 배운 것의 한계를 넘기란 힘들어서
배운 것보다 더 나은 것은 하지도 못하고
기껏 할 수 있는 게 약간의 반항인 정도가 된다.
자유롭고자 하더라도 모방 하고 싶은 욕구로 인해 보이는 행동이 유도된다.
선택도 환경에 제한을 받아서 책이 많이 보이는 환경에서는 책을 읽게 되는 것처럼 환경 조성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한번 선택한 것을 계속 고수하려고 하는 성향은 아이에게도 유효하여 영향력은 지속된다.

내가 아이에게 가르친 것들은 아이가 기존의 방침을 회의하는 시기에 검증을 받게 될 것이다.
'시킨 것'은 회의하는 시기에 다른 가능성들에 의해 선택에서 밀려나기 십상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것은 회의하는 시기에도 계속되거나 다른 것들을 검토한 후 결국 회귀하게 되는 우선권을 갖는다.
그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모방과 환경조성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내가 이런 얘기를 했더니 마누라가 그걸 아는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게임하느냐고 했다.
이제 다시 책을 잡아 봐야겠다. 예전에 '아이를 키운다는게 영혼을 살찌우는 일 같은 걸줄 알았는데 생명활동을 유지시켜주는 일이더라'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그 시기를 지나온 느낌이다.
내가 가르친 것이 여타의 정보들과 경합하여 회의하는 시점을 거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흡입력 있는 것으로 만들어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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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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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금새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는 어려움이 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되는 대로 서술해보고자 한다.

...

부조리는 어떻게 고쳐지는가.
이에 대한 헤겔의 대답이 변증법이다.
(달리 해석할 여지를 아무리 많이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변증법은 대립과 투쟁이 발전의 동력이라는 생각으로 유통되고 있고
그렇기에 변증법에서 유래한 맑시즘과 페미니즘은
투쟁을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으며,
실패했다.
맑시즘과 페미니즘의 실패는 투쟁론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하기에
내 생각은 변증법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다.

투쟁은 발전을 왜곡 및 저해한다.
발전은 이원적인 정과 반의 투쟁을 동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투쟁은 다원적인 가능성들을 검토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발전을 왜곡한다.
투쟁의 당사자들은 이겨야만 하고, 승리를 위해서는 다양한 가능성보다 집중된 큰 힘이 유리하여 다양성은 축소되며, 또한 승패는 반드시 정의롭게 이루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투쟁상황이 발전을 만드는게 아니라 투쟁상황은 발전을 왜곡한다.
단지 기존 체제 위기의 시기에 투쟁의 함정에 빠지기 쉬울 뿐이다.

투쟁은 부조리를 해소 하는 게 아니라, 부조리 돌려막기로 다른 부조리를 양산하여 결국 전체적으로 부조리 해소에 실패한다.
이게 추구하는 가치 자체는 실현하는데 다른 데에서 부조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와 비교해보면
사회주의가 분배정의를 실현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불러왔다는 것,
페미니즘이 여성혐오의 시대를 불러오고 있다는 것 등에서
추구하는 가치 그 자체도 성공시키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변증법과 달리 실제 부조리 해소는
위기 상황 인지, 기존 틀 변화의 필요 인지
=> 다양한 가능성들의 열거
=> 투쟁 당사자인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닌 제3자들의 검토
=> 하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사춘기를 변증법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착실하게 살아온 청소년 A는 사춘기를 맞아 반항을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 합에 이르러 어른이 된다.
그럴듯하다. 하지만 진짜로 그런가?
사춘기를 다음처럼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발전은 기존 행동 체계에 변화를 요구하는 '기존 체계의 위기' 상황에서 시작한다.
대안이 될 체계를 찾아 다양한 가능성을 병렬로 열거하고 이렇게 열거된 다양한 가능성들을 맞이하여 '기존 체계의 위기 상황을 초래한 요소들'을 포함한 검토를 걸쳐
대안 체계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즉 사춘기의 A는 반항이라는 한가지 가능성으로서의 '반'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변화를 위해 다양한 행동의 가능성을 흩뿌리고 미숙한 상태의 다양한 시도를 해본 후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변화에 대처하는 이러한 방법론은 학문에 있어 패러다임 전환에서도 나타나고 진화론이 설명하는 생명의 진화에서도 나타난다.
가령 패러다임은 이런 형태로 전환된다. (부조리 개선이란 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참을 쌓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학문의 올바른 방법론과도 이어진다.)
기존의 체계가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들이 대두되어 기존 체계가 위기를 인식하면
대안이 될 수 있는 가능한 청사진들을 주욱 늘어놓고 새로운 현상을 포함한 이전의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지 검토하여 하나를 선택하는 식이다.
또 이는 진화론의 방법론과도 부합한다. (그나마 학문을 예로 들땐 내재된 모순이 드러난다는 표현으로 설명이 되는데
진화를 예로 들땐 환경이 변하는 거지 내재된 모순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즉 굳이 내재된 모순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은 변화도 있다.)
환경에 변화가 생겨서 생물군의 생존곡선에 변화를 주는 환경의 압력이 걸리면, 다양한 가능성들 중에서 그 환경 압력을 수용할 수 있는 형태가 남는다.
정과 반의 투쟁 후 화해가 아닌, 위기상황에서 다수의 가능성에 대한 검토 후 부정되지 않은 안에 대한 선택이 세상이 발전하는 프로세스다.
그래서 나는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헤겔의 통찰인 변증법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변증법 대신 뭔가 다른 이름을 필요로 하는 대안 선택의 방법론을
자본주의에 적용하면 맑시즘의 대안이 되고
가부장주의에 적용하면 페미니즘의 대안이 된다.
이때 자본주의나 가부장주의는 타파 대상이 아니라 변화를 요구받은 기존 체계이며
부조리의 피해자들은 기존 틀에 허점이 있다는 증거로서 어필해야 하고
가해자를 공격하는 것은 투쟁이 되어 왜곡할 뿐 무의미하다.
다양한 가능성들이 제시되어, 입증된 허점 및 기존에 밝혀진 사실들을 포용하는지를
투쟁에 참여하는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아닌 제3자들에 의해 검토후 선택 받아야 한다.

부조리는 누구의 손으로 고쳐지는가.
부조리의 음지에 빠진 자,
부조리의 음지를 피해간 자,
부조리의 덕을 보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때 부조리를 피해간 자가 꼭 부조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운이 좋아서 피해간 것일 수도 있고
위험을 내다 봐서 피해간 것일 수도 있으나
부조리를 피해갔다고 덕보는 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미래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한번 피해갔다고 부조리를 남겨두고 싶어하지만도 않는다.
또한 부조리를 피해간 자는 무력한 사회적 약자로 남지도 않는다.
한데 그렇다고 이들이 체제를 부정하는 투쟁에 호응하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체제를 긍정하지만 부조리를 고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체제를 부정하는 피해자의 투쟁은 체제를 긍정하는 제3자들의 조력을 받지 못하여
결국 부조리를 제거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시스템 부조리는 그 시스템에 수렁이 존재하면 미래에 자기가 거기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수렁으로 인해 시스템 자체가 전복되는 것을 불안해하는
제3자의 손으로 고쳐진다.
그 제3자들의 개선의지를 이끌어 내는 것은 투쟁이 아니라 입증이다.
그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제3자들의 폭을 넓힐수록 부조리는 해소된다.
반대로 전쟁처럼 투쟁에 참여하는 자의 존재가 클수록 부조리는 커진다.

여전히 투쟁 대립 구조가 발전의 동력이 된다는 생각이 정치, 법률, 사회 도처에 깔려있다.
틀린 생각이다.
투쟁을 전략으로 삼으면 추구하는 가치를 발전시키는데 실패한다.
부조리 입증,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변화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환기, 대안의 수집 및 검토.
이것이 성공을 만든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조리를 수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 아직 미흡하다.
부조리 입증 후 대안 가능성 검토의 과정에 투쟁이 발생하지 않으면 가장 좋을 것이나,
투쟁이 발생했다면 부조리를 돌려막기 하던 투쟁이 와해되는 시기에 발전의 동력이 재확보된다.
투쟁상황을 어떻게 비투쟁상황으로 바꿀수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정과 반의 투쟁이 합으로 넘어가는 화해의 순간이 어떻게 오는지 변증법에선 생략되어 있다.
변화를 시작시키는 것이 위기상황이라고 했다. 그럼 위기상황은 어떻게 오는가.
위기, 즉 수렁의 존재에 대한 입증. 이건 패러다임론에서도 아직 분명하게 찾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실질적인 과제다.

부조리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하는 것은 옛날에 생각했던 '시스템버그' 글과 같은 문제의식이다.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하지만 어차피 관심없을 것이라고 제3자의 도움받기를 포기하면
부조리를 타인에게 입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입증은 경시되고
피해자가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투쟁의 당위가 생긴다.
그리고 시스템 전체의 발전을 투쟁론에 의존하면 그 시스템은 실패한다.
제3자에게 부조리를 입증하는 것이 무시되어선 안된다는 건 분명하다.

투쟁은 부조리를 개선하는 동력이 아니라
빠지기 쉬운 함정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투쟁 상황이라는 함정에서 빠져나오는가?
어떻게 하면 부조리를 개선하는 동력인 제 3자들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부조리, 곧 시스템 버그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아직은 질문으로 끝난다.

...

부조리를 어떻게 고치는가에 대한 생각은 이념의 종점이 될 수 있다.
이념이 유토피아를 대하는 태도를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현실의 현재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목적지로서의 유토피아만을 그리는 것이다.
두번째는 유토피아를 상정해 놓고 현실로부터 목적지까지 '끌고 가기 위한' 길을 그어놓는 것이다.
세번째는 먼 목적지에 대해서는 여백을 남겨두고 현재 상태로부터 디버깅을 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이상에 대한 여백 때문에 세번째안은 이념이라기 보다는 방법론의 모습을 띌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어떤 유토피아도 기존시스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으므로 기존 시스템의 부조리를 고치는 건 결국 유일한 길이 된다.
결국 이 방법론은 이념의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을 것이고 그때 이념은 종점에 이를 것이다.

.....

- 투쟁상황을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 변화를 시작시키는 기존 체계의 위기상황은 어떻게 불러올 수 있는지
- 관심없는 제3자들의 동력은 어떻게 끌어 올 수 있는지
내가 현실에서 응용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해져야 확인도 할 수 있고
그래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대충 갖다 붙이기 나름인 뜬구름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
한데 싸움난거 해소시키고 사람들 설득해서 부조리 해결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하지...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도 성공하겠다.
일단은 투쟁이 해결에 나쁜 전략이라는 사실부터 인지하는 중이다.
난 호전적인데다가 그게 나쁜 전략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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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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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지나 타성이 생겼으니 초안으로 돌아가서 점검해보자.

>초안
생존 공포 배제 => 직접 해보고 싶어하는 욕구를 해소시켜 준다. => 하고 싶어하는 대로 도와서 제어력을 준다. 스스로 피드백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 아이의 대표강점을 파악한다. 자기가 그 가치를 추구하는 맛을 보여준다. => 내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르친다. 이를 바탕으로 추구할만한 가치를 발견하여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한다.

>하려고 하는 일
자기 전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 나누기. 스토리 리텔링.
내 세계관과 가치관을 담은 이야기 만들어 들려주기.
할일, 하고 싶은 일, 살고 싶은 인생계획의 목록 관리하게 하기.
집안일 돕게 하기

>여타 두뇌발달훈련들

반사훈련 : 예비 구령을 들려주며 반사동작을 시킨다. 반복을 통해 아이가 구령을 들으면 해당 동작을 수행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해당 동작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이다.
스스로 동작을 제어하는 때가 오면 모방 훈련을 한다.
3개월(목가누기)까지는 반사동작으로 반응함.
반사동작으로 기본 동작을 익히기 전까진 무리한 훈련 금지.
기저귀 체조
목소리 들려주기, 생활음 들려주기등 환경 적응, 안심시키기

모방훈련 : 아이가 어른의 동작을 따라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이다. 아직 아이는 몸을 어떻게 가눠야 하는지 제어방법을 모르며 근력도 부족한 상태다. 머리들기, 뒤집기 등 아이에게 필요한 동작을 가르치는 것은 반사훈련과 모방훈련의 경계에 있다.
입 보여주며 말소리 들려주기, 손뼉치고 아이손 잡고 짝짜꿍 시키기 등 모방훈련을 시킨다.
모방한 행동에 대한 적합한 반응은 아이가 말을 배우게 하고 행동을 익히게 한다.

칭찬 많이 해서 칭찬 보상감 활성화 시키기.

규칙 훈련 : 안돼, 하고 멈추면 칭찬하기. 인내력을 길러준다.

단기기억 훈련 : 숨었다 까꿍.

관찰력 훈련

고르게 하기 : 2살이후. 빨간카드는 뭐지? 삼각형은 뭐지?

시기는 생후 기간보다 발달단계가 중요.
수없이 반복하기
빨리보다 탄탄하게
손,운동,감각,사회성,지능 발달 전체를 골고루
싫어하면 강요 말것
잘하면 칭찬과 포옹, 보상
안돼! 다음에는 어리광 받아주며 안심시켜서 신뢰형성

=====

전반적으로 현재 양호.
(*)표가 현재지점.

'내가 할거야' 하는 욕구를 해소시켜주고, 더 나아가 스스로 피드백을 얻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 :
신경 쓰고 있으나 몸이 힘들어서 한계가 있다.
유모차를 타는 것보다 자기가 미는 것을 좋아하고 밥을 떠먹여주는 것보다 자기가 떠먹기를 좋아하지만,
아가가 유모차 밀기 시작하면 유모차가 짐더미가 되서 힘들고
아가가 밥 떠먹으면 먹는 것보다 뿌리는 게 더 많아서 힘들다.
그래도 여력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자기가 하기를 계속 강조할 예정.
버튼 누르는 걸 좋아해서 버튼 피드백 장난감을 주고 있음.

- 모방훈련을 강조할 시기.
- 칭찬은 충분히 하고 있음.
- 규칙 훈련은 '안돼'는 잘 안해봐서 말 들을지 모르겠고(고집이 세서...) 대신 '주세요, 아이 잘했다'를 가르쳤는데 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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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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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육아(+딸린 작업)의 인생 프로젝트는 되는대로 대충하고선 리턴되는 쾌감을 수동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즐거운 작업이 아니다.
잘 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하는 최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수행함에 있어서 즐거운 작업이 된다.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최선을 찾고 그것에 이르기까지 노력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대충 아무랑 결혼하여 겉보기에 흠 없는 표지를 만들 수 있는가' 여부가 아니라
내 인생을 걸 최선의 상대방이 누군지 알 수 있는 안목을 만드는 작업도 하고
고른 상대방과 조율 맞추는 법을 익히는 작업도 하며
최선을 지향하는 생각과 결정과 노력의 과정을 수행함에 있다.
과정 다 건너뛰고 결과물로 '대충 흔한 결혼의 리턴되는 쾌감의 양'을 보는 식으로는 결혼의/육아의/인생의 진가를 평가할 수 없다.

결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서
종교에 귀의하거나 예술이나 정의구현에 투신하거나 학문에 몸바치거나
자기가 추구하는 최선을 위해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같은 이유로 이미 있는 가정을 버리고 출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버림에도 그들이 폄하받지 않는 이유, 혹은 추앙되기까지 하는 이유는 단지 이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선의 인생을 추구하였으므로.'
부연컨데 이때 말하는 최선의 인생은 최선을 만드는 작업에서 진가를 볼 수 있지, 리턴되는 쾌락의 양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는게 심심했었다.
뭐가 재미있을까 찾으며 이것 저것 해봤더니 결국 공부가 남더라.
왜 학문이 역사적으로 귀족의 여흥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키는 공부를 찾아서 하는 건 다른 모든 활동에 비해 인생의 의미를 주는 행위 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생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려는 작업에 비하면 단순한 것이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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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우연히, 혹은 어른을 모방해서 뭔가 칭찬할만한 일을 할 때가 있다.
먹을 거 양보를 한다거나
집안 일 -걸레질이나 설거지- 하는 흉내를 낸다거나.
칭찬할 기회를 찾으면 분명하게 칭찬하고 있다.
추상적인 대화는 아직 안되므로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 행동에 대한 보상임을 알게 하려면 쭉 지켜보다가 칭찬할만한 행동을 한 타이밍에 착하다 예쁘다 칭찬해야 한다.
칭찬할 타이밍을 잡는 것은 관찰을 요하나 칭찬이 행동을 부추기는 효과는 눈에 보일 정도로 확실하다.
칭찬할 타이밍을 놓친다면 아마 그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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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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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염치 없는 여자가 싫다.
자기의 웃음이 타인에게 기쁨을 줄 수 있으므로
자기는 웃음으로 노고를 대신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싫고,
무엇보다도 자기 유리할 때에만 아전인수하며 공정함을 모르는 여자가 싫다.
하지만 그게 내가 여성을 혐오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저 구체적으로 저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 여자가 싫을 뿐이다.

요즘 인터넷을 볼 때 가장 싫은 건 인터넷 논쟁을 보면 볼수록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프레임에서는 싫어하는 속성, 이를테면 염치없다는 속성을 여성 전체의 속성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일부 예외적인 '개념녀'라는 구멍을 만들어 둔다.
이 프레임에서 개별 여성에겐 두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개념없는 보통 여자가 되느냐, 개념있는 예외자가 되느냐.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선 여자를 강하게 공격하면 할수록 개념녀는 결벽증적인 것이 되어간다.
여자가 크게 잘못된 존재라고 공격하는 수위를 높이려면 대부분의 여자가 잘못된 존재이고 개념녀는 소수 예외가 되어야 하므로, 개념녀로 구분되는 문턱은 점점 더 높아진다.

죄를 물어 값을 치르게 하는 것의 기본은 고립시키는 것이다.
고립시키려면 가장 염치없는 태도를 갖는 사람들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해서 지정해야 한다.
대상이 두리뭉실해질수록 고립에서 멀어진다.
그런데 이 남자VS여자의 구도에선 '대부분의 여자'가 죄인이기 때문에 개념녀가 소수자로 고립된다.
혹시 누구라도 세상의 절반을 상대로 '고립시켜서 죄를 물어서 값을 치르게 하겠다'라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남자VS여자의 프레임은 염치없는 여자에게 여성의 대표자 지위를 주고, 세상의 절반을 고립시킨다는 건 불가능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 염치없는 여자에게 면죄부를 준다.

곰순이와 함께 하다보면 이런 걸 느낀다.
염치없는 사람은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그리고 보통 주위 사람중에는 이성보다 동성이 많다.
염치없는 여자는 살아오면서 기껏해야 몇명의 남자에게 피해를 주지만 그 수십배는 되는 여자들에게 피해를 준다.
염치없는 여자는 남자보다도 주로 곰순이와 여자들의 인생에 스트레스를 준다.
곰순이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안다. '저런 여우 타입은 나랑 안맞는 스타일'임을 알고, 얽히지 않도록 조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곰순이가 자기를 '예외적인 개념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엔 유난히 염치없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는 그들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가 아는 곰순이는 인터넷을 안하기 때문에 저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 프레임에 갇혀서 '여자'를 욕하는 사람을 자꾸 접한다면 기분나빠질 것이고 그 프레임 안에서 싸움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이게 아니면 스스로를 '난 여자답지 않은 여자니까 여자 공격하는 것에 기분나쁠 필요 없지'라고 소외시켜야 한다.)
그러면 염치없는 여자의 죄를 곰순이가 막아줘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난 특히 이게 싫다.
'여자들'에 대한 공격의 주장을 곰순이가 '그 주장은 틀렸다'라고 막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염치없는 여자와 싸잡아 묶인 자신을 위해서.

난 개인적으로 남자VS여자의 프레임의 기원은 페미니즘 투쟁의 프레임이었고
여기에 반발하여 그 프레임 안에서 싸움이 붙은 결과
현재 만연한 여성혐오증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여성혐오증의 선두에 소위 꼴페미로 비하되는 페미니즘이 있다는 게 그 근거다.
하지만 기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져서 여자를 공격하는 자도,
남자VS여자의 프레임에 빠져서 여자라는 집단에 자기를 이입하여 행동하는 자도 싫다.
그들의 행동은 내가 싫어하는 염치없는 자를 보호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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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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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에 몰입하면서 다른 것에 몰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런 일은 게임에 몰입하면 공부에 흥미가 떨어진다는 식으로 많은 경우에 종종 일어난다.
몰입하지 못하면 내 행위가 영향을 미치는 피드백을 감지하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 주도하에 행위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주도하에 노동력만 헌납하는 것으로 느끼게 되어 흥미가 떨어진다. (학습지 광고등에서 자기주도학습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거다.)
이때 해법으로 다른 몰입할 것을 차단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나
몰입해 버릇하지 않은 사람은 정작 필요한 것에도 몰입하지 못하고
모든 중독요인을 차단한다는 건 어려워서 예기치 못한 유혹으로 흔들린 집중력을 바로 잡는데에 취약해지므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문제는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몰입 대상을 전환할때 몰입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부분이다. 따라서 몰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이전 몰입을 끊고 나온 후 새로운 대상에 재몰입하기까지의 몰입 전환 과정을 훈련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는 편이 좋다.
몰입은 대상의 변화에 집중하여 관찰을 정밀하게 하는 것에 비견할 수 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극의 변화량을 아예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고 주의를 집중하면 미묘한 변화량도 감지할 수 있으므로
득실 변화가 즐거움으로 이어지는 관계는 객관적인 득실의 양보다 주관적으로 수용될 때에 의미가 있고,
주관적으로 수용되는 득실의 양은 집중하여 변화를 민감하게 관찰하는 관찰 배율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비유다.
스나이핑을 생각해보자. 이 비유가 정확하게 부합하는 지는 접어두고라도 다음의 설명을 위해서는 유용하다.
몰입의 과정은 대상의 변화 득실을 정밀하게 인지하도록 집중하여 점점 배율을 높여가는 과정이라서
몰입이 높아질수록 작은 변화도 크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고, 그에 상응하여 관찰 배율이 작을 때에 비해 느끼는 즐거움도 커진다.
대상에 촛점을 맞추고 배율을 높이는 과정을 빠르게 하는 것도 능숙해지면 빨리된다.
그리고 몰입의 과정이 숙달되면 끊고 나온 몰입감에 대한 미련은 자연히 감소한다.
게임중독은 끊고 나온 몰입감에 대한 미련인 셈이며 이는 몰입 전환을 훈련함으로써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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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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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시어머니중에 나는 시어머니 노릇을 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시어머니가 있을까?
난 고부갈등은 생활형 갈등이라고 생각한다.
막장드라마 바깥 세상의 흔한 고부갈등은 양쪽이 무슨 거한 욕심을 부려서 서로 충돌하는 게 아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최소한의 바램끼리 부데껴서 갈등이 일어난다.
그래서 욕심을 줄인다고 해도 아예 사람답게 살 생각까지 포기하지 않는 한 갈등의 소지가 없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일년에 스무번 보는 게 큰 욕심 아닌데도 충분히 고부갈등의 소지가 된다.
며느리 입장에선 시어머니가 왠지 이유없이 나를 미워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관계가 되는 경우엔 몇달에 한번을 봐도 그 날을 견디기 힘든게 사람 마음이다.

자식은 대체로 받아먹으며 사는 습관이 들어있고 대부분 무심하다.
자식이 '난 귀찮은 거 싫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부모가 '이 정도로 욕심을 줄이면 되겠지' 하는 기대를 가볍게 뛰어넘기 일쑤다.
욕심을 줄이는 것 만으로 갈등의 소지를 없앤다는 건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욕심을 줄인들 '난 숨은 쉬지만 죽은 사람이려니 살거다'할 수 없지 않은가.
불행은 자연스래 원망을 낳는다. 그런데 원망이 쌓이면 그 미움이 자기 자식을 향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는 내 새끼가 잘못인줄 아는데 차마 미움은 내 자식에게 꽂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럼 원망의 화살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향을 뒤틀어서 다른 쪽을 향한다.
미운 내 자식 대신 욕먹어 줄 수 있는 대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다 보면 할 도리 다 하고 있는 며느리를 미워할 꼬투리를 찾는다.
세상의 시어머니들은 처음엔 '나는 나중에 시어머니 노릇 안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심한 자식에게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라고 느끼며 원망을 쌓은 다음
원망의 화살을 차마 자기 자식에게는 못 쏘겠다면서 남의 자식을 겨눈다.

그런데 원망의 대상인 며느리가 잘한다고 내 자식이 무심한 불행이 해소되질 않는다.
며느리가 아무리 잘해도 불행이 해소되지 않으니 원망은 그대로고 그래서 미움의 화살도 그대로다.
고부 갈등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의 갈등이지만 둘 사이의 조율로 해결되는 갈등이 아니다.
고부 갈등 해결의 요점은 부모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친자식이 부모에게 신경을 써야 부모가 행복해지고
부모가 행복해져야 내심에 원망이 안 쌓이며
그래야 원망의 화살을 겨눌 일도, 그 끝을 억지로 며느리에게 돌릴 일도 없어진다.

난 '효도는 셀프'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 내심에 '난 귀찮은 거 싫고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고, 그 귀찮은 거 싫은 마음이 자식을 무심하게 만드는 제 1 원인이 되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찮다는 뉘앙스를 제외하면 '친자식이 신경을 써야 부모 마음이 행복하다'라는 것은 맞다.
부모 마음에 서운함이 쌓이는지 아닌지 자식이 시시때때로 살피는 게 고부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이다.

며느리 입장에서는, 고부 갈등 난다고 무조건 멀리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남편하고 시어머니 얼굴 보는 회수 제한을 협상하는 건 좋은 방법이 못된다.
시댁 불편해서 싫다고 한달에 한번, 두달에 한번, 이러면서 보는 횟수를 줄이고 멀리 하면 서운함과 미움이 압축되서 농도는 더 높아진다.
정말 불편한 사람은 한달에 한번 보는 것도 한달 내내 소름끼치는 반면 크게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매일 봐도 그냥 그렇다. 결국 고부갈등으로 대표되는 불편한 시댁 스트레스를 횟수로 타협봐서 줄여보려는 건 그리 도움이 안된다.
내가 시어머니랑 친해지고 잘하면 되지, 하고 굉장히 살갑게 대하는 며느리들도 있다. 난 이쪽도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사근사근거리면 어른들이 좋아하기는 하는데, 아무리 사근사근 친하게 잘해봐야 막상 친자식이 무심하게 굴어서 부모 불행하게 하면 원망은 어쩔수 없이 생기고 그럼 그게 잘하는 며느리를 억울하게 한다. 핵심과 부수적인 것을 혼동해선 안된다.
핵심은 남편이 자기 부모 서운하지 않도록 하는 거다.
며느리가 직접 행동하는 게 아니지만 효과는 가장 좋다.
남자들이 결혼하면 효자가 된다고들 하는데
평소 효도 할 줄 모르던 사람이 마음만 효자되서는 아내 통해 효도하려고 귀찮게 군다고 보통 아내들이 남편 효자 되는 것 싫어한다고 한다.
아내 통해 효도하려고 드는 건 소용 없기 때문에 잘못이다.
그런데 효자되는 것 싫어하는 것도 잘 하는 게 아니다.
시부모 마음에 서운함이 쌓이는지 아닌지 남편이 시시때때로 살피도록 종종 트리거시키고
아내 통해 효도하는 것 소용 없으니 남편이 직접 자기 부모한테 얼굴 자주 비추도록 돕는게 가장 좋다.

부모가 서운함이 없으면 며느리가 좀 못해도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서운함이 쌓이고 나면 그 원망이 자식한테 향할까봐 대신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며느리가 잘하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친자식이 신경쓰는게 중요하다. 만약 친자식이 못하고 있고 그 반발의 피해를 해결하고 싶다면 남편을 효자로 만드는 게 정답이다.

남자 입장에선, 자기 어머니가 난 시어머니 노릇 안할거라고 하시는 말씀에 의존할 생각 하지 않는게 좋다. 그건 욕심을 줄이겠다는 뜻인데 말했다시피 산 사람이 죽은 사람처럼 살 것도 아니고 욕심 줄이는 걸로 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저런 말씀을 하는 어머니는 당신께서 과거에 시달렸던 경험을 가지고 하는 말씀이기 쉬운데, 갈등의 조율은 갈등 해결 잘하는 환경을 접하면서 배우는 것이라서 갈등 조율이 안되던 환경에서 살아오신 분들께는 오히려 갈등 조율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 시달리던 며느리가 좋은 시어머니 되는 일은 오히려 드물다.
결국 자기 어머니가 난 시어머니 노릇 안하겠다고 하시는 걸 들었다면
어머니 마음에 한점 서운함 남기지 않을 효자가 되도록 본인이 환골탈태할 각오를 해야 하리라.

내 경우 마누라가 사근 사근 잘한다는 건 애초에 선택지에 없으므로
내가 어떻게 하면 마누라가 좋은 대우를 받을 것인가 자구책으로 찾은 방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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