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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교양 필수로 삼을만큼 중요하네 안하네, 영어로 교육해야 하네 안하네...
교양 교육에 대한 논란이 많다.
교양 교육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바람직한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모든 교육에는 가르치고자 목표하는 패러다임이 있다.
'이것이 어떤 형태를 갖는지'에 대해 교육자가 가지고 있는 전체 형상이 패러다임이다.
그 전체 형상을 가르치기 위해 교육자는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중요한 사실들을 가르치고,
학습자는 배운 사실들로부터 패러다임을 도출해낸다.
모든 학문 과목들은 저절로 이런 관점에서 교과서가 쓰여진다.
교과서는 그 학문이 현재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중요시 하는 것,
즉 현재의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핵심 사실을 기재하기 때문이다.
그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핵심 사실을 선별하여 교육받은 학습자는 점차 '이것이 어떤 형태를 갖는지' 감을 잡게 된다.
모든 학문이 교과서에 담아 교육하는 것은 패러다임 그 자체이다.
(*학문이 미처 성숙하지 못한 시점에서는 아직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등장하지 않아서 무엇이 중요한 사실인지 평가가 엇갈리게 되고
그로인해 체계없는 단편 지식들이 병렬로 존재하게 된다.)

이는 개별 학문의 교육뿐 아니라 전체 교양 교육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교양 교육이 전수하고자 하는 패러다임은 무엇일까?
교양 교육은 사람이 여태 쌓아온 지식의 체계를 이해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세상이란 어떤 것인지 전체의 형상을 개괄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한 교육이다.
이를 임의적으로 구분하건데 광의와 협의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광의의 교양 교육은 인간 세상 전체에 대한 개괄을 가르치려고 한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가? 세상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광의의 교양교육이 가르치고자 하는 패러다임이다.
협의의 교양 교육은 여태 쌓아온 지식의 체계, 즉 전반적인 지성을 가르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학문의 전반은 어떤 형상을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협의의 교양교육이 가르치고자 하는 패러다임이다.
교육자가 학습자에게 개괄적인 교양을 가르칠 때, 교육자는 학습자가 '세상이 어떤 형상을 가지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기를 원한다.
즉 광의의 교양 교육을 원한다.
그런데 실제로 가르치는 것은 협의의 교양 교육이다.
사람 세상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이 함께 어울려 돌아가지만 학교에서는 여전히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들'을 가르친다.
그래서 정규 교육과정이 가르치는 교양 교육은 협의의 교양 교육으로 기능한다.
광의의 교양 교육을 원하면서 협의의 교양 교육을 하는 것, 다시 말해 사실은 '세상이 어떤지'를 가르치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만 가르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본래 학문은 세상이 어떤 지를 담아내고 싶어한다. 단지 학문 전반이 아직 세상 전반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 교양으로 중요한 지식인가 하는 것은 교육자가 가지고 있는 (세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결정된다.
교양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우왕좌왕하는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즉 패러다임이 서로 갈리기 때문이다.
학문으로서 성숙한 개별 학문에 비해 교양 과목에 있어서는 전체를 포괄조망하는 학문이 덜 발달했기 때문에, 학문 미성숙 단계에서 패러다임이 통합되지 않아서, 무엇을 중요하게 가르쳐야 하는지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이 미쳐 담아내지 못한 것을 학교 안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일단 논외로 하고
'교양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영역'을 인간이 여태 쌓아온 지식인 '학문의 영역'으로 제한해보자.
나는 학문의 전 영역을 5단계로 나누어 생각한다.
(http://longlive.tistory.com/41 참조)
1층 :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확인한 지식. 물리학.
2층 : 연역할 수는 없었으나 실험으로 재연가능한 지식. 화학이나 생물학.
3층 : 가정위에 통계적 방법을 이용하여 확인한 지식. 사회과학.
4층 : 가정위에 사변적으로 탐구한 지식. 인문학.
5층 : 선지자가 하달하는 가르침. 종교.
저층지식이 발전함에 따라 고층지식을 따라잡으면 저층-고층간의 합치가 일어난다.
화학의 주춧돌은 물리학이 연역증명했다.
행복의 본질을 찾는 사회과학인 긍정 심리학은 인문학에 합치되는 것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뇌과학은 심리학과의 접점을 찾아 가고 있다.
저층쪽이 소위 이과이고 고층쪽이 소위 말하는 문과에 해당한다. 3층에서 경계는 모호해진다.

교양 교육 과목이란 이 탑의 전체 구조를 개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결과다.
(사실 학문 전반을 5층 탑에 비유한 것 자체가 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은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구축되고 변경된다.
교육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패러다임을 형성시킨 근거와 뼈대가 되는 사실들이며 이렇게 배운 사실로부터 교육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패러다임을 학습자가 도출해 낼때 그것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이 이해시키는 것이 교육의 목표다.
교육에 중요한 사실인지 여부는 그 교육이 패러다임 구축에 얼마나 중요한가 여부에 달렸다.
바람직한 교양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선
먼저 현재 가르치고자 하는 패러다임은 어떤 것이며,
그 패러다임을 구축하는데에 어떤 학문/어떤 사실들이 중요하게 기여했으므로
이 지식들을 가르치면 학습자가 그 사실들을 바탕으로 이해하여 현재의 패러다임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라는 관점에서 기획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그 학문이 교양 교육으로 가르쳐져야 할 중요성을 갖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다.
가령 역사는 왜 교양으로 중요한가?
역사 교육은 세상사가 인과와 우연에 의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기록이므로 세상사의 동작 구조를 파악하는 자료로서 가르칠 때에 교양으로 중요하다.
이 기준이 없이 어느 과목이 중요하냐 아니냐를 따지려고 하면
몇가지 극단적 사례를 들며 '따라서 어느 학문은 중요하다/안하다'를 단편적으로 따지는 결과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세상은 어떤 것이라는 패러다임은 변화하고 있다.
새로 확인된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세상의 모습은 재구축되고 있는 중이다.
이 변화에 따라 교양 교육도 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중요한 교양이던 학문들이 그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여한 학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살펴보면
먼저 종교에서 가르친대로 그려진 신화적 세계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때에는 교리해석이 가장 중요한 교양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철학에서 연역과 상상으로 그려낸 세계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이해하던 시대를 거쳐
점점 더 저층에서 확인된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의 모습을 그려나가고 있고,
학문이 패러다임 형성에 기여한 기여도에 따라 교양의 범위도 변하고 있다.
진화론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의 모습을 현재의 패러다임대로 그려내는 데에 기여도가 크기 때문이다.
상대론도 그 등장으로 인해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패러다임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설령 상세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론적 관점은 교양으로서 중요해졌다.
전자기학은 그 응용도는 상대론보다 높으나 세상의 구조에 대한 패러다임 재구축에 기여한 정도에 있어서는 상대론 만큼의 임펙트는 없었기에 교양으로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늘상 전자기학적 제품과 현상을 접하며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패러다임이 변함에 따라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도 변한다.
변화에는 판단이 필요하다.
그 판단은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교육자가 학습자에게 가르치고 싶어하는 세상의 구조는 무엇인가?
이것이 교양 교육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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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화학 대중서를 보는데, 가설의 연속이란 느낌이 들었다.
가설위에 가설을 쌓는 구조를 몇차례 보다보니 늘어놓은 실험결과들이 최종가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당연하게도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방식으로 실험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분히 일방적인 단편들이 기록된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신경화학이 미시적인 규모를 벗어나서 심리학 규모의 사실에 대해 결론을 내놓는 것(인간의 마음이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점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는)은 아직 성급하게 보인다. 일단 최소한 단편적으로 알려진 신경화학적 사실을 두고 대중이 결론을 추리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성급하다.

출산, 수유, 오르가즘등 강렬한 애착 감정을 느끼게 될 사건이 일어날때면 옥시토신 분비가 늘어난다. 이를 바탕으로 유명한 초원들쥐 실험이 있었다. 초원들쥐는 색정광인 다른 쥐들과 달리 일부일처제이다. 첫관계를 한 뒤 평생 정절을 지키고 자기 짝과 함께 새끼들을 양육하며 살아간다. 이 초원들쥐의 뇌에 옥시토신을 더 주사하면, 유대관계가 더욱 끈끈해졌다. 반대로 초원들쥐의 옥시토신 수용체를 무력화시키는 주사를 놓으면, 초원들쥐의 생활양식은 일대일 관계가 깨지고 다른 쥐들처럼 문란해졌다.
이 실험 결과를 두고 다양한 가설이 가능하다.
옥시토신이 상대방의 인상착의를 뇌에 기억시켜서 그 사람(그 쥐)만 사랑하게 한다는 가설도 있다. 모성은 옥시토신에 의해 발생한다는 가설도 있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2~3년(900일)이라는 말이 퍼진 것도 그 기간이 지나면 사람의 뇌에서 옥시토신을 포함한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다는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옥시토신은 사랑 호르몬이라고 소개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수십 수백번씩 기사화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진 유명한 실험 결과들이다. 그런데, 이 단편적 사실들을 두고 `길어야 3년이면 사랑은 끝이고 호르몬 분비가 끝나는 3년 후엔 옥시토신 잃은 초원들쥐처럼 바람은 숙명`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타당할까?

앞서의 실험 결과외에 다른 사실 몇개를 바탕으로 나는 이렇게도 해석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실험동물에게 아편성 물질을 주면 약물 내성이 올라가서 점점 더 많은 양의 아편성 물질을 찾는다. 그런데 실험동물에게 옥시토신을 주사하자 아편성 물질에 대한 내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옥시토신은 쾌감 내성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초원들쥐와 산악들쥐의 뇌를 비교했더니 초원들쥐는 뇌의 쾌락중추의 도파민 수용체들과 함께 옥시토신 수용체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산악들쥐의 옥시토신 수용체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는 초원숲쥐는 산악들쥐에 비해 옥시토신의 쾌감 내성을 줄이는 효과를 크게 본다는 뜻이 될 것이다. 옥시토신이 성관계시에 분비되므로 특히 오르가즘의 쾌감 내성을 낮추어 줄 것이다.
초원들쥐의 일부일처제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늘 처음같은 오르가즘`일지도 모른다. 쥐가 사람보다 본능에 더 강하게 지배받는다고 본다면 쥐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보다 오르가즘의 비중이 월등히 클 것이고, 오르가즘이 유지된다면 최초에 짝을 지은 이유, 한번 좋았던 이유가 바뀔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에 쥐의 일부일처제가 유지되는 것일 수 있다. (`~라면 ~일 경우 ~일 수 있다.` 가설위에 가설 쌓기.)
옥시토신이 무력화된 후에는 내성이 생기면서 성관계 쾌감이 약해지고, 쥐의 사랑은 오르가즘이 전부라고 할 경우 오르가즘 감퇴는 일부일처제가 해제되는 사유가 되기에 충분하여 문란한 관계로 변하는 것일 수 있다.
이 경우 옥시토신은 사랑 호르몬이 아니라 오르가즘 지속제다. 물론 오르가즘 지속제는 사랑에 큰 도움이 되지만.

모두 자작가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걸로도 가설이 된다. 게다가 이 가설에 의할 경우엔 앞서 `3년이면 사랑은 끝나고 바람은 숙명`이라는 판단은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경우 3년 후에 오르가즘은 내성이 생겨 처음같지 않은게 보통이더라도 그게 `사랑이 끝난다`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옥시토신이 아이의 인상착의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여 모성을 낳는다는 가설도 성급하게 보인다.
제왕절개후 몸상태 때문에 분유수유를 하는 산모는 모성이 생기지 않을까? 이 경우엔 출산후 모유수유를 하는 산모에 비해 옥시토신이 현저히 적어서 산후 회복은 눈에 띄게 더디게 이루어지는데, 자식에게 애착을 갖지 못하는게 눈에 띄게 드러난다거나 하는 조사결과가 있을까? (제왕절개로 출산한 산모가 아이에게 애착을 덜 갖는다는 결과는 없을껄?)

이 시대의 인간에 대한 인식을 선도하는 것은 진화심리학과 신경화학이다. 그런데 신경화학에 근거한 대중적 인식은 오히려 단편적 사실을 성급하게 해석해서 나온 잘못된 결론으로 점철되어 있다.
단편적 사실은, 여기를 보고 이런 결론을 내리면 저기를 보면 또 다른 내용이 나온다. 애초에 특정 심리상태와 옥시토신 농도는 딱 떨어지는 대응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남편과 유대가 약한 상태로 오랜 기간을 보낸 나이든 여성은 옥시토신 수치가 만성적으로 높다. 또한 스트레스가 심할때에도 옥시토신 분비는 늘어난다. 옥시토신은 분명 무의미하지 않은 의도가 숨어있는 암호문이지만 그 내용은 `문맥을 떠나서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을만큼 간단하지 않다. 만약 옥시토신이 사랑호르몬 이었다면 출산보조용 자궁수축제는 사랑의 묘약으로 팔렸을 것이다.

7년 전에 번역된 대중서를 읽고 신경화학의 현재를 논할 수는 없다.
뇌과학은 심리학보다 더 탄탄한 기초를 다지면서 심리학을 따라잡을 것이다. 하지만 두가지 의미에서 성급함이 느껴진다.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내용을 놓고 보면 앞서 말했듯 단편적 사실을 성급하게 해석한 잘못된 결론들을 던져주고 있다. 그 편이 자극적이어서 그런가?
학문 그 자체를 놓고 보면 신경화학을 포함한 뇌과학이 심리학을 추월하는 규모의 결론을 내놓으려 하는 것은 성급하게 보인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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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다원주의적 중용론을 참조해서 예전에 정리했던 것.

중용은 좌우의 중간에 있는 어느 회색분자의 주장만이 옳고, 좌도 우도 그르다고 하는게 아니다.
극좌부터 극우까지의 스펙트럼을 사회안에 포괄하여 누군가는 이런 말도 하고 누군가는 저런말도 하는 가운데 종합된 의견의 무게중심이 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용은 다원주의다.

레이저는 집중된 단색광이다. 레이저는 강력한 힘을 낸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고 그래서 이 단색광의 힘에 매료된 사람들은 사회의 집중을 방해하는 잡다한 뻘소리들을 제거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틀린 의견도 죽이지 말고 내버려 둬야 하는 이유가 있다. 틀린 의견을 다 죽여버리면 내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배경이 있어야 현위치를 알 수 있다. 좌와 우가 말살되어 사회가 단색광이 되어갈수록, 비교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가 중도임을 판단할 방법은 없어진다.
다원주의적 중용의 방식에서는 틀린 의견은 틀린 의견 만큼의 설득력을 가지고 소수의 지지자를 모으고 올바른 의견은 그만큼의 설득력으로 많은 지지자를 모아서 결국 사회의 무게중심은 올바른 의견이 차지하게 된다. 반면 단원주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틀어막아버리기 때문에 비교할 배경이 없어져서 결국엔 이게 중도적 의견인지 극우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어진다. 배경에 보이는게 아무 것도 없으니 현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뻘소리를 탄압하던 단원주의는 종국엔 항상 극단적인 주장으로 치우쳤다. 나치나 소련이나 북한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레이저는 중도적 색을 갖을 수 없다. 항상 어디론가 치우쳐 버린다.

문제는 또 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총체에서 발생하는 중용은 의견의 상향전달을 의미하나 단색광에 집중된 하나의 힘은 의견의 하향전달을 의미한다.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무엇이 중도이고 올바른지에 대한 판단이 발생하는데 대중이 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잃고 나면 통치자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시야에 배경이 없어져서 여기가 어딘지를 가늠하기 어려우니 통치자 몇몇이 이 방향이 옳다고 하면 사람들은 눈 감고 따를 수 밖에 없다. 통치자의 판단에 대한 피드백이 불가능해진 시스템은 통치자가 부도덕할 때 그걸 제지할 방법이 없는 시스템이고 이는 통치자 입장에서는 타락의 유혹이 너무 큰 시스템이다.
하향전달되는 하나의 의견이란 건 단지 지배자의 군중 세뇌가 될 뿐이다.

좌와 우가 병존해야 가운데에 '중'이 있다.
왼쪽이 죽으면 오른쪽은 오른쪽이란 가치도 잃고 독선이 되며
독선은 피드백을 받지 못하기에 결국엔 악이 된다.
그렇기에 중용은 다원주의다. 대중의 시야에 배경이 살아있어야 여기가 중도인지, 통치자가 올바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의견의 상향 전달과 통치자에 대한 피통치자의 감시를 필요로 하는 민주주의가 다원주의를 유독 중요시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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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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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관념의 토대 위에서 뇌과학 서적을 읽고 있다.
사람의 의식구조에 대해서는 종교, 철학, 심리학(사회과학), 뇌과학(과학)등 학문 전반에 걸쳐서 다양한 모델이 존재한다.
내가 잡고 있는 모델은 이렇다.

동물은 태어날 때부터 뇌신경망구조에 생물로서의 본능을 갖는 의식 구조를 형성하고 태어난다.
그리고 생각은 흔적을 남긴다.
생물 본능적 의식 구조 위로 외부 환경과 자유의지의 결과가 학습된다.
학습된 패턴은 루틴화 되면서 쌓이고 기존의 구조를 변화시킨다.
( longlive.tistory.com/279 에 적은 의식3단계설 참조.
1.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단계. 언어를 이용해 생각하고, 대상의 개별 요소를 의식에서 인식한다. 매우 느리다.
2.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단계. 언어를 이용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복잡한 논리적 사고과정 없이 직관적으로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결론이 나온다. 대상은 개별요소로 인식되지 않고 그 개별요소들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집합체, 즉 관념으로 뭉뚱그려서 인식된다. 처리속도가 1단계 보다는 두배 빠르나 여전히 느리다.
3. 몸에 배는 단계. 입력에 대한 출력이 완전히 루틴화되어서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 빠르다.)
즉 자유의지는 집적된다.
자유의지는 그것이 집적된 결과물인 하위자아를 바탕으로
집적된 결과물이 선택 가능한 폭 안에서 동작한다.
크게 비유하면 테니스를 배우지 않는 것은 자유지만 안 배웠으면 테니스를 못친다.
서울에 경부선을 타는 것은 자유지만 그 결과 나는 부산에 있어서 인천에 가기가 어려워진다.
가속도는 집적되어 속도를 만든다. 순간가속도는 가속도가 집적된 현재 속도에 비해 매우 작은 크기를 갖는다.
이와 같은 일이 의지에도 일어난다. `의`는 벡터다. 이것의 존재를 확인하려면 그 전에 먼저 이것이 얼마나 작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찰나의 매순간들에 자유의지로 한 생각과 선택들은 집적되고 미래의 선택과 생각은 집적되어 도달한 그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 결과가 일상에 나타나는 수준의 (과거로부터의 관성에 비하면 별로 크지도 않은) 자유의지이므로,
찰나의 순간에 순수한 자유의지는 매우 작은 가속도 벡터이다. 그러나 없는 것과 매우 작은 것은 크게 다르다. 그 작은 순간 가속도는 집적되어 큰 현재 속도를 만든다. 그 작은 자유의지는 상위자아로부터 온다.

날때부터 가지고 있던 본능에서부터 현재의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하위자아의 신경회로에 루틴화된 것은 모두 특정 입력에 대한 특정 출력이 매칭된 것이며 조건반사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하위자아로서의 의지는 뇌의 기억, 언어, 연상작용등 모든 루틴화된 입출력 패턴들과 팔다리등 몸의 자원을 이용하여 활동한다.

하위자아의 의식은 RPG게임의 아바타(문자 그대로 하위자아)에 몰입했을 때에 느끼는 아바타로서의 자아와 마찬가지라서
하위자아가 상위자아를 각성하면 하위자아의 의식은 해체된다.
내가 게임을 할 때 게임캐릭터의 의식은 내 의식임에도 내가 게임에서 빠져나온 다음엔 캐릭터로서의 자아는 온데도 없고 간데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 관념 위에서 뇌과학을 읽다보면 현재 뇌과학이 한창 연구하고 있는 것은 '해킹기술'로 이해된다.

상위자아의 영향으로 발생한 자유의지는 전기화학신호를 전달자로 하여 두뇌 각부 및 신체 전체와 통신한다.
뇌화학은 군대 사령관이 하달시킨 '진도개 셋' 명령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연구나 마찬가지다.
명령의 암호를 해석하고 명령체계에 난입할 수 있다면 동작에 혼선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통신 난입하여 진도개 셋을 끼워 넣어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중간에서 명령체계를 해킹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고
군대를 전진시킨 것은 엄밀히 말해서 '진도개 셋'이 아니라 그 명령을 내린 수뇌의 의도이며 '진도개 셋'은 그 의도의 전달자일 뿐이다.
호르몬은 전달자다. 사람의 감정과 행동이 호르몬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은 그 의지가 시작되는 지점이 호르몬을 생성하는 지점보다 이전 단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암호화된 명령인 '진도개 셋'이 나온 지점보다 앞선 곳에서 군대를 움직인 의지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와 같다.

신경 전달 물질인 세로토닌은 위험 회피에 대한 신호를 의미한다.
내 요구가 거절되었을 때 라든지, 뭔가 위험을 감지했을 때의 신호를 전달한다.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면 위험하다는 뜻이다.
어떤 일이 걱정할만한 일인가 아닌가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와 같은 의미로,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는 이유는 이성적 판단의 차이 때문(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일수도 있고, 조심성과 걱정이 많은 성격탓(똑같이 알고 있어도 누군가는 더 걱정한다)일 수도 있고, 혹은 분비회로가 고장나서일 수도 있다.
우울증 치료제인 프로작은 세로토닌을 인위적으로 증가시킨다.
우울증 환자는 그 결과 우울증이 치료된다.
분비회로가 고장난 경우라면 증상을 없애주는 효과이고, 걱정이 많은 성격탓이라면 성격을 바꿔주는 효과이다.

이런 반응은 위험회피 성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프로작은 섭취가 간편하고 부작용이 적어서 유명해졌지만 기술이 받쳐준다면 도파민(새로움 추구)이나 노르에피네프린(쾌락 보상 추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작업이 가능하다.
프로작이 하위자아의 통신망이 '위험도가 1~10단계중 한 7단계쯤 되'라는 통신을 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위험도 값을 낮춰서 전달하는 해킹기술이었다면, 다른 물질로 다른 통신에 개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세로토닌/도파민/노르에피네프린/아드레날린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경 전달 물질의 양을 조절함으로써
위험에 민감하고 쾌락 보상에 집착하면서 잘 흥분하지 않고 수구적인 성격을
위험에 둔감하고 쾌락 보상에 둔감하며 잘 흥분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성격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전기적인 신호 해킹도 뇌에 전극을 꽂으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가령 뇌 특정 부위에 전위차를 주면 '지금 슬픈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나 '지금 우스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또한 그 감정에 연계된 기억이 더 잘 떠오르기 때문에 전위차로 유도된 감정은 스스로의 기억에 의해 증폭된다.)
즉 기술이 받쳐준다면, 유머러스한 성격(입력된 정보의 우스운 부분을 민감하게 캐치하여 잘 웃는 성격)을 만들 수도 있다.

이건 모두 통신 해킹에 대한 얘기다. 상위자아로부터 아바타를 조종하는 사이에 개입하여 해킹하는 것을 뜻한다.
미미한 자유의지의 집적으로는 수정하기 힘들었던 강한 현재속도를 약으로 후려쳐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안그래도 작은 가속도 벡터를 더 하찮게 보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강하게 후려쳐서 현재 속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가속도 벡터의 존재 여부에 아무런 근거도 되지 못한다.

학습을 통해 자유의지를 집적하여 성격을 바꿀 때엔 새로운 입출력 피드백 패턴을 내재화하여 신경 전달 물질의 분비량을 조절하거나 수용하는 민감성을 줄인다. 즉 피드백 회로를 수정한다. 이는 자유의지가 하위자아에 집적되어 하위자아를 수정하는 의미를 갖는다. 상위자아의 자유의지로 하위자아에 가치있는 인격을 구현하는 것을 하위자아의 존재의의로 삼는다고 한다면
'치료'의 폭은 '피드백 회로가 고장나서 증상을 감추어야 하는 상황'에 국한된다.
나머지는 치료라기 보다는 강제 성격 개조이다.

본인이 강제 성격 개조를 원하고 있는 경우라면 (환자를 치료하는 의미가 아니라) 부작용을 감안한 후엔 도구적 의미로 허용될 수 있다.
가령 다른 가치있는 모험을 하기 위해 위험에 민감한 성격을 잠시 접어두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니까. (또다른 예로는, 호모섹슈얼이 `이상이 있는 환자`가 아닐지언정 성향개조가 가능하다고 하면 자발적으로 헤테로섹슈얼로 자기 개조를 감행할 사람이 95%이상 될 것이다. 살기 힘들어서 자괴감 갖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강제 성격 개조는, 글쎄 적어도 치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엔 논란 거리가 많다. 정신병 치료 목적으로 뇌를 파괴했던 일에 비교될 수 있지 않을까.
얼마전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는 허구라는 ADHD 창안자 아이젠버그의 임종전 고백이 있었다.
(http://www.worldpublicunion.org/2013-03-27-NEWS-inventor-of-adhd-says-adhd-is-a-fictitious-disease.html)
피드백 회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미성년자인 아이의 성격을 타인인 부모의 의지로 강제 개조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것인가.

내 관념을 고수하면 쾌락 그 자체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이 된다.
현재 흔히 퍼져있는 착각으로 보이는 '사람은 주관적인 행복의 감각을 목적으로 하여 행동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있다.
주관적인 행복이란 엔돌핀등 체내의 마약성 물질을 의미하므로
저 말은 어떤 행동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체내 마약성 물질을 생성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된다. (* 마약성 물질은 그 물질 자체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신호를 전달하자니 뭐가 됐든 전달자가 필요해서 어떤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 것 뿐이다. 수많은 식물중 양귀비 꽃이 그 물질을 생성하는데, 만약 신경이 전달자로서 다른 물질을 체택했다면 장미꽃이 환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외부에서 향정신성약물을 주입하는 것이 나쁠 게 없다. 목적에 직접 도달하는 방법을 찾은 셈이 될 뿐이다.
금단증상이나 점점 약의 양을 늘려야 하는 약물 내성 효과등은 사소한 부작용이다. 옥시토신은 역치 증가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언젠가 기술이 받쳐준다면 늙어죽을때까지 쇼크사 하지 않는 정도의 사용양으로 쾌감을 줄 수 있는 향정신성의약품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술 담배 케익도 그 예시가 된다. 죽을때까지 향유할 수 있는 쾌락 증대 물질 말이다.
그러나 '상위자아의 자유의지를 집적하여 하위자아를 만들어가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 이익이 아니라 가치생성을 목표로 한다면)
약물의 근본적인 부작용은 피드백 구조에 혼란을 준다는 것이다.
약물에 의한 자극은 '이 행동을 통해 이러한 보상이 온다'는 피드백 구조에 개입하여 뒤헝클어 놓는다.
가령 이타성을 예로 들면, 본래는 지나친 이기성과 맹목적 이타성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적정한 내적 보상 수준이 결정되어야 하며 이는 학습 내재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본래는 행동의 결과를 뿌듯해하면서 분비되어야 할 보상이 더 편한 방법으로 주입된다면, 보상 수준 결정에 혼란이 생긴다.
그래서 이상적으로는 술이든 담배든 당분이든 카페인이든 마약이든
그 뒤헝클어 놓는 영향성의 양만큼 해롭고, 멀리하는 것이 좋다.
다만 어차피 하위자아가 학습할 때엔 자유의지의 결과가 고스란히 집적되는 게 아니라 환경의 변칙성으로 인한 노이즈가 작용하므로 일정 수준 이하의 약물에 의한 영향성은 무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약물에 의한 쾌락이 보상 구조를 손상시킨다지만 환경의 우연성에 의한 불노소득 같은 보상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어떤 작가가 자기가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의 뇌를 MRI로 촬영했다는 책을 읽었다.(서명 `굿바이 프로이트`) 그는 뇌는 모듈화된 신경 회로의 집합이며, 각각의 신경회로는 회로구조의 독특함 때문이 아니라 뇌에서의 위치에 의해 특징을 갖으므로, 따라서 모든 모듈은 각각의 자아를 가지며 통합된 단일 자아는 모듈화된 복수의 자아들 간의 역학관계 끝에 나타나는 허구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자기가 언어적 창조적 영감을 얻는 순간 뇌의 언어영역(그의 모델대로라면 `말을 하는 나`가 될 것이다)에 대단한 활성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했다. 그는 실험과정에서 영감을 얻는 순간을 찍는데에는 성공했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의 언어영역은 일반적인 책을 읽을 때보다 약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정도였다. 창조적 활동을 할때 두드러지는 변화는 안쪽이마이랑(medial frontal gyrus)의 활성화였다. 우연히도 medial frontal gyrus의 위치는 머리 밖에서 보면 상단전이다.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그 책에서 대답하기를, 뇌에는 감각기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창조적 활동을 할 경우에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가 라는 것은 MRI가 아닌 한 설령 해부를 할지라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창조적 활동을 할 때엔 상단전이 빛난다는 말은, 석가모니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인도에 전해내려온 것이다. 어떤 경로로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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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자녀에게 본국은 어떤 의미일까?
어린시절 살던 동네와 친구들도 떠나오면 추억이 된다. 하물며 언어와 문화와 인종이 다른 나라에 갔을 때엔 고국의 의미는 가벼운 것이 아닐거다. 외국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 이민자 자녀가 본국의 대사관에서 일하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아무 생각없이 살다보니 문득 대사관이 나타났는지 어떤지 모를 일이지만 보통은 흘러가는대로 살다보면 나오는 직장은 대사관이 아닐거다.
한국인도 네이티브 미국인도 아닌 이민자 1.5세의 마음 복잡한 청춘이 자기의 꿈에 대해 생각하고 고국에 대해 생각하여 지원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고국에서 가장 높으신 분들이 오고, 대사관의 일 중에서 가장 중대한 일에 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는 건 꿈을 자극하는 일이다.
대학교 강연회 연사로서 성공하신 높으신 분이 온다 하면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알게 모르게 경건한 분위기가 감돈다.
하물며 <떠나온 고국>에서 <훌륭하신 분들>이 <고국에게 있어 중요한 일>을 하러 오신댄다. 꿈을 꾸는 입장에서는 꿈 같은 일이다.

그런데 꿈이 악몽이 됐다.
<훌륭하신 분>은 벌거벗은 늙은이가 되어 여자 엉덩이를 움켜쥐고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이게 성추행이라고 표현되는데 내가 보기엔 강간미수다. 옷 입은 남자가 다른 사람들 많은 공공장소에서 여자 엉덩이를 움켜쥐면 성추행이지. 옷벗은 남자가 호텔방에서 그러면 그건 강간시도 했는데 여자가 탈출한거다.
대사관 내부에 신고 했을 때는 무시하려 했다. 룸메이트가 외부 경찰에 신고는 했는데 그것도 내부 고발자라고 신고한 사람은 대사관 그만두고 나갔다.
<떠나온 고국>은 자기 신상명세를 돌려보며 히히덕거린댄다. 이 여자가 꽃뱀이냐 아니냐, 생긴건 괜찮은데 행실은 별로다, 각자 자기 정치적 지지 입장에 맞추어선 떠들어대고 혹은 일 크게 키웠다고 비난한다.
고국에서 오신 훌륭하신 분이 자기를 강간하려고 하거나 말거나 <중요한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댄다.
이러고 나면 그 여자의 입장에선 자기를 강간하려 한 것은 고국이다.
향수섞인 떠나온 고국도 무너지고 미래의 꿈도 무너진다.

윤창중 사건은 한발짝 떨어지면 우스개거리다. 국정원 선거 개입같은 치명적인 비리도 아니고 기껏해야 '밖에서 저러면 안에선 오죽하겠냐? 한국 경찰한테 신고했으면 윗선 전화 한통화로 묻혔을걸'라는 증거없는 추정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당한 입장에선 이민자로서 마음에 의지처로 두었던 고국이 자기를 강간하려고 한 후에 비웃고 있는 사건이다.
만약 과거에 국내에서 권력에 강간당하고 경찰에 신고하나마나 소용없이 조용히 묻힌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 사회가 자기를 강간한 걸로 느끼겠지.

이건 갑vs을의 관계에서 을의 당연한 권리조차 갑이 힘으로 무시해버리는 부조리의 결과다.
약자의 입장에서 그 결과는 사회전체가 자기를 핍박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현대의 강자는 사회로부터 힘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갑의 권리를 지켜줘서 힘을 부여하는 것도 사회고
을의 권리를 지켜줘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도 사회다.
그런데 강자에게 힘을 주기는 하고선 그 힘으로 약자의 권리를 해치는 것은 눈감는 사회가 있다고 한다면
약자의 입장에선 그 사회가 자기를 해치는 것으로 와닿는다.
'사회로부터 힘을 부여받은 자가 나를 해치는 것을 사회가 눈감아준다.' & '사회가 나를 해꼬지한다.' ...뭐가 다르겠는가.

사회는 강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정성을 들여 수호해준다.
소유권을 보호하는 것은 강자의 권리다.
업무 권한을 준수하는 것은 강자의 권리다.
강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에 대해서는 중죄로 다스린다.
약자에게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약자의 권리는 명확히 세부 규정되지 않고 뭉뚱그려진 개념의 상태에서 힘으로 무시되기 일쑤다.
단발적인 '너무했다, 저건 좀 심했다'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을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갑에게 힘을 부여한 사회는 을의 어떤 권리를 눈 부릅뜨고 지켜줘야 하는지,
이것이 분명해지지 않으면 그 사회는 약자의 성과 살을 상납하기 위한 시스템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얼마전 논란된 포스코에너지 상무가 항공 승무원한테 갑질한 사건에서
라면 갑은 승무원 을의 무슨 권리를 얼마만큼 침해하였는가를 분명하게 정하지 않고 두리뭉실 넘어가는 것도 단발성 처벌로 불만만 달래고 넘어가는 꼼수다.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회가 지켜줘야 하는 을의 권리는 무엇입니까? 상식이니 인권이니 예의니 하는 상위개념들은 구체적으로 을의 어떤 권리를 의미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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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장들에 대해서는 셀리그만 책의 입장을 요약하고 내 관점과 분리하여 비교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실생활 적용에 대한 이 장에 대해서는 그냥 내 관점에 기반을 두고 적을 것이다.

- 일에 적용할 경우.

인터넷에서 일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들의 푸념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형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하는 행위 자체가 보람있지 않으므로 모든 보람을 남보다 나은 보상에서 찾을 수 밖에 없으며,
보상에서조차 보람을 찾을 수 없을 때엔 `하기도 싫고 보람도 없는 일을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지`를 회의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보람 있으므로 많은 경우 아이 낳고 나서 회의에서 벗어나게 되나
삶의 의미를 아이에게 두는 것은 자기 삶의 욕구를 아이의 삶에서 해소하려 하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에 대한 해법은 원칙적으로 자기가 어떤 가치를 만들때 기쁨을 느끼는지(=대표강점)를 파악하고
그 활동을 자기 일에 접목하여
일하는 행위 자체에 보람있는 요소를 집어 넣는 것이다.
그 예시로서 책에는
병실에 달력과 그림을 가져와 벽에 배치하면서 환자가 눈을 뜨면 보게 될 풍경을 만드는 일을 하며 보람을 찾는 병원 청소부의 얘기가 나온다. 자기의 일을 쓰레기 치우는 일에서 환자의 정서를 관리해주는 가치를 실현시키는 일로 자발적으로 재창조한 예시다.
이러한 재창조는 내 대표강점을 발휘하는 것이 스스로도 즐거운 일인 동시에 그 발휘의 결과가 직업에 더 나은 성과를 주는 윈윈시스템으로 동작하기에 가능해진다.
대표강점은 내 자유의지 욕구가 표현된 것이기에 추구할수록 더 자유로움을 느끼고 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자유와 즐거움을 누렸는데 그 결과가 일을 한, 그것도 잘한 것이 된다는 게 행복의 법칙을 적용한 결과다.

먼저 나의 대표강점을 확인하고,
직업을 선택할 때에는 대표강점을 발휘하기 수월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기 선택한 직업을 운용할 때에는 대표강점을 발휘하여 업무를 향상시키는 길을 찾아서 재교육을 받고 실천한다.
이때 자유재량권은 중요하다. 재량권이 작으면 자유의지 욕구를 발휘할 여건을 협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건강과 근무조건의 상관관계에 대한 통계에 따르면 자유재량권이 낮으면 사기가 저하되고 우울해진다.
이는 일을 시키는 관리자의 입장에서 참작해야 할 점이다.
가치를 만드는 것은 이념적으로는 이해관계자 중심주의에 이른다.


- 육아에 적용할 경우.

아래 글 참조.
자유의지 욕구 계발법
http://longlive.tistory.com/269
아빠가 놀아주는 아이가 성공하는 이유
http://longlive.tistory.com/270

생후 6년 이후부터 아이는 자기가 칭찬이나 사랑이나 관심을 받으려면 어떤 강점을 살려야 하는지 정하기 시작한댄다.
이전단계 자유의지 욕구 충족까지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일거다.
강점을 계발하려면 강점을 발휘할때마다 보상을 주어야 하므로
강점을 발휘하는 모습을 본다면 꼭 칭찬해준다.

아이용 조사 문항을 통해 5개 정도의 강점을 찾는다.
조사 문항은 저작권이 있으므로 비공개. 저자의 사이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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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놀아주는 아이가 성공한다는 말이 있다.
조카딸 놀아주다보면 그 `놀아줌`이라는 게 뭔지 알 수 있는데,
"이거 해줘 저거 해줘 모모 하고 싶어"다.
`아빠가 놀아준다`고 하는 이면에는 엄마가 의식주 곧 아이의 생존을 책임지고 "안돼"는 것들을 가르치는 구조가 있을 것이고, 아빠는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데 역량이 되지 않는 것들을 수행해주는 자유의지욕구의 해소자 역할을 하게 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아빠가 놀아주는 아이는 성공한다. 자유의지욕구가 충족됨에 따라 자유의지가 발달하고 가치추구에 이를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욕구를 충족시켜줘서 그 욕구를 질리게 하고 다음단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해당욕구가 모든 순간에 완전 충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종일 아이스크림 밭에 살아야 아이스크림에의 욕구가 해소되는게 아니란거다. 아이스크림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시간이 하루 한두시간씩만 있어도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자유의지 욕구가 충족되기 위해서 원하는 모든 것이 항상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다 해주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거고 혼나야 할땐 혼나야 한다. 자유의지욕구 충족은 놀아주는 동안이면 족하다. 아이가 원하는 사소한 것들, 등뒤에 아빠가 없을 때엔 위험해서 금지되어 있던 것들, "이거 꺼내줘 저거 내려줘"를 가급적 일일이 들어주는 것이면 될 것이다.
조카딸은 나랑 결혼하고 싶어하고 우리집에서 살고 싶어 할 정도로 나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내 입장은 `애가 벌써 잘생긴걸 알아서`지만... 마누라 말로는 "해달라는 것 다 해주니까"라고 한다.
그걸로 된다. 그리고 아이는 아빠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아이의 금기를 해소시켜주는 피터팬 같은 사람을 아이는 좋아할 수 밖에 없으니까.

더불어, 아이의 의식주 생존을 엄마가 보살펴주는 구조에 있어서 엄마는 생물의 욕구를 해소시켜주는 존재이다. 생존 불안이 해소되어야 생존 눈치 안보고 하고 싶은 것에 눈을 돌릴 수 있다. 이는 엄마와의 애착관계가 아이에게 어떤 의미를 갖으며 왜 그렇게 되는지를 알려준다. 아울러 엄마가 일을 계속 할 경우에 아이에게 무엇이 충족되어야 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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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유의지 발달 가설(http://longlive.tistory.com/264)에 착안해서 아이의 자유의지욕구를 계발하는 원칙을 짜자 :
자유의지욕구는 이전 단계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켜주면 (다른 모든 욕구가 그러하듯, 이전 단계 욕구에 물리면서) 다음 단계로 발달하게 된다. 이것이 계발의 기본 방침이다.
먼저 생존의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어야 한다.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를 느끼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것'보다 생존을 위해 '타인의 욕구가 욕구하는 것'에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생존이 보장되면 자유의지 욕구의 첫단계인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
아이가 잘하든 잘 못하든 그건 전혀 중요치 않으니 직접 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채워주도록 한다. 만져보고 찢어보고 먹어보고 하는 것을 어지간하면 막지 않도록 한다. 흙 좀 먹어도 안 죽는다.
직접 하고 싶은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면 이제 직접 하기만 하는 걸로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고, 세상에 영향을 미쳐서 피드백을 얻는 행동을 욕구하게 되고, 그중에서도 다시 재미있는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행동을 욕구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긍정심리학 책에 소개된 동작 따라하기가 해당한다.
아이가 식탁을 쿵 친다거나, 소리를 낸다거나 하면 그에 반응해서 동작을 따라해준다. 아이가 자기 동작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물실험에서도 자기 행동이 결과를 통제할 때에는 적극적이고 쾌활해졌으나 행동과 무관하게 결과가 나올 때엔 무기력/수동성/우울/건강악화의 결과가 나왔다.
사람을 대상으로 수행된 업무환경과 건강의 상관관계 통계에 있어서도 자유재량권이 좁을수록 사기가 떨어지는 상관관계가 나왔다.
아이의 동작에 피드백을 주는 것으로서 아이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이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면 아이의 자유의지욕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서 피드백 중에서도 재미있는 피드백을 얻는 행동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재미있는 피드백을 추구할 때 이를 가치추구로 유도하는 것은 밀어주고 끌어주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이전 단계를 충분히 충족 시켜주는 것, 즉 재미있는 활동을 하도록 하다 보면 아이가 단지 재미만 있는 활동에 허무감을 느끼고 가치 있는 활동을 찾게 된다. 석가모니는 인생이 너무 재미만 있는 활동으로 점철되니까 오히려 재미가 없어져서 아예 출가를 해버렸다. 문제는 효율성이다. 수많은 현대인이 재미를 찾다가 공허감을 느끼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효과적인 견인이 없이는 20년쯤 걸려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효율성을 높여주는 견인의 방법은 아이에게 가치를 추구하는 맛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의 대표 강점을 파악한 후, 아이가 그 대표 강점을 발휘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면(자원봉사, 도서관에서 탐독, 등.) 좀 더 효율적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해당 강점을 발휘하는 데에 강한 재미를 느끼는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므로 앞서의 24가지 특성을 기준으로 하여 지속적인 관찰이 요구된다.
가치 추구의 단계까지만 와도, 마지막 단계인 초월적 가치추구로 가는 것은 나와 함께 가는 일이다. 세상의 방향성에 대한 내 가치관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세계관을 어려서부터 알려주고 그 방향성에 동참하는 가치추구를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도록 유도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잠자리 들기 전에 내 세계관과 가치관을 담은 동화를 지어서 들려줄 생각이다.

요약하면
생존 공포 배제 => 직접 해보고 싶어하는 욕구를 해소시켜 준다. => 피드백을 얻을 수 있도록 제어력을 준다. => 대표강점을 파악하여 그 가치를 추구하는 맛을 보여준다 => 세계관과 가치관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한다.

자유의지발달에 대한 내 가설이 옳다면(옳을 것이므로) 이를 적용한 교육방침 역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벌주기 : 제어력을 준다는 것은 상벌에 모두 적용한다. 무조건적인 칭찬 역시 제어력을 박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난 개인적으로 무조건적 지지니 구김살 없음이니 하는 버르장머리... 양육법을 매우 싫어한다. 반드시 틀릴 수 밖에 없는 것을 무식하게 우기는 꼴로 보고 있다.) 벌을 주는 것은 필요하다. 주의할 것은 한가지, 벌을 주어야지 겁을 주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벌이 공포를 부채질하면 아이가 생존욕구에 종속되어 자유의지자적 욕구를 충족할 여력이 없어지고 생존을 위한 타인의 욕구 눈치보기에 치중하게 된다. 벌이 공포를 자극하는 의미로 쓰일수록 해롭고, 벌이 아이가 자기 행동의 결과로 이 행동에는 이 피드백이 온다는 걸 알게 하는 것으로서 쓰일 수록 이롭다. 아이의 부족한 인지능력으로도 자기의 어떤 행동이 원인으로 벌의 결과가 왔음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면 할수록 벌의 이로운 효과는 커진다.
반대로 아이가 벌의 원인을 혼동하여 '아빠/엄마에게 붙들렸더니 벌이 왔다' '아빠 엄마 심기를 살펴야 벌을 안 받는다'는 식으로 인식하게 되면 아이에게 상황 제어력을 주는 효과가 없어진다.

아이에게 집안 일을 돕게 하기 : 분명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하도록 할 생각이다. 이는 제어권과 책임을 주어 `할 수 있다`는 성취를 경험함으로써 자유의지 욕구를 충족 및 다음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효과가 있다.
집안일 시키기의 교육적 효과는 통계적으로도 입증되었다고 한다.
1939-1944까지 하버드생과 소머빌 빈민을 대상으로 젊어서부터 죽을때까지의 삶을 추적한 베일런트 교수의 통계에 따르면 유아기에 집안일을 돕는 경험은 성인기의 성공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잣대가 되었다고 한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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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12월3일에 쓴 건데 여기에 백업해 두는 것은 깜빡했다.
가치를 만든다는 것을 생활의 기조로 삼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떠올랐다.

=====

나는 안철수에게서 행동의 대원칙을 배운다.
그는 행동에 있어 '(성공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가치창조를 목표로 한다'라는 원칙이 몸에 배어 있다.
큰결정부터 상당히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 행동 원칙이 체화되어 있음을 관찰할 때 그것이 가장 존경스럽다.

현실에서 선택은 객관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일상적인 당면 과제들은 '길에서 주운 돈을 가질 것인가 말것인가' 같은 객관식 문제가 아니다.
'돈벌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한다고 쳐도 '이게 최선인가'에 대해 객관식이나 단답식이 아닌 수많은 열린 가능성이 나타난다.
'돈벌기'보다 포괄적인 기준을 적용해서 '성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해보면 이건 더 열린 가능성 위에 적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치를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의 경우엔 그보다 더 열린 가능성 위에 적힌다.
그래서 미숙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가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된다.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할까?
행동의 선택은 아주 사소한 지점에서부터 이루어진다.
나태하거나 놀이를 탐하는 것보단 열심히 하는 게 가치를 만드는 행동이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고 아무거나 행동 과잉이 되어서도 안된다.
이순간 내 행동이 가치를 만들고 있는가,
이행동이 최선이 맞으며
내가 지금 정말 전력을 다하고 있는가.
현실을 등지지 않고 세속 안에서의 삶을 제대로 살고자 하면 거치게 되는 질문이다.
그대답 자체도 어려울 뿐더러
아는 것이 효과를 내려면 실행을 해야 하는데
실행을 위해선 체화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미숙한 시기를 거쳐 지금에 이른 그는 '3개월 정도의 단기 로드맵을 잡고 실천해 나가라'는 등의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
처음부터 완벽했다는 듯이 꾸며지지 않은, 미숙한 시기를 거쳐서 올라간 사람의 궤적을
동시대에 본다는 건 대단한 도움이 된다.

안철수에 대한 비하성 별명이 간본다고 간철수다.
그별명에 대해 안이 한 얘기는 '간 본다는 건 성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인데 자신은 결정을 할 때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였다. 이 말은 사실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고 안철수는 여전히 간철수로 찍힌 상태다.
그가 정말 말하고 싶어한 얘기는 자기의 신중함은 성공을 노리기 위한 신중함이 아니라 가치를 만들기 위한 신중함이라는 얘기였다.

어떤 사람은 안의 행동을 굉장히 전략적 전후관계를 가지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선 확실시되는 시장직을 양보하는 것도 전략적이며,
그간의 모든 행보나 심하게는 지금의 사퇴 역시 출마 시점부터 계획된 일이었다는 해석을 하기까지도 한다. (만화를 너무
본 것 같은데...)
이런 해석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단지 자기의 대원칙을 신뢰하고 오로지 그 기준에 집중하여 행동할 뿐이며
결과가 전략적 최선이었던 것처럼 나타나는 건 '사람의 할 일을 다한 후엔 하늘이 일을 올바르게 이끈다'는 말처럼 그저 '가치를 만든다'는 행동 원칙이 인간사 전반에 의미있는 행동 기준이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하면
그들은 전혀 믿지 않겠지.

나는 안철수를 존경한다.
만성적인 정치 불신은 위정자를 존경하는 것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아마 향후 5년간 안철수를 향해 대대적인 흑색선전이 있을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에서부터 교묘한 매도에 이르기까지 전문적인 비방꾼들이 움직일 것이다.
그효과가 나타난다면 여론은 출렁일 것이고,
정치가를 존경한다는 말은 어리석은 소리로 들릴 것이다.

승리의 약속은 언제나 허망하며 안의 끝이 어떠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정치9단의 술책보다 더 효과적인 정도(正道)를 믿는다.
그리고 그 정도를 어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라는 희망을 얻는다.
내게 안철수는 올바른 삶의 자세에 대한 선행자료다.
내가 안철수를 존경하는 이유다.

대원칙에 기반한 삶이 현시대에 통용되는 것을 보고 싶다.
일 다 지나간 후 살아남은 사람이 존경받는 기록을 통해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를 통해서 보고 싶다.
내가 안을 지지하는 이유다.

=====

가치추구를 경제이념에 적용하면 이해관계자중심주의가 나온다.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는 '주주 중심주의는 회사의 이윤을 목표로 하게 되지만
이해관계자 공통의 이익에 따라 회사를 경영하게 되면
기업이 이윤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그럼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것이 중요한데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배부른 여유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성공을 추구하는 것을 이기고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셀리그만 책의 표현을 따르자면 서로 힘을 모아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윈윈게임이고
경쟁자를 누르고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제로섬게임이므로 자연선택/문화적선택에 의해 윈윈게임이 제로섬게임을 누르고 결국 승리한다는 의미다.)
내게 안철수는 내가 지지하는 이념인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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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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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삶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제로섬게임을 하는 시스템과 윈윈게임을 하는 시스템이 자연 선택과 문화적 선택을 거칠 경우 윈윈게임을 하는 시스템이 제로섬게임을 하는 시스템을 이기게 되므로 결국 윈윈 시스템이 살아남아 퍼진다. 예를 들면 이질적인 세포를 포식하는 세포와 미토콘드리아와 협력하는 세포는 후자가 윈윈 게임 시스템이며 후자가 살아남는다.
공포는 도망가야한다는 신호이고, 분노는 공격해야한다는 신호라는 식으로 부정적 정서는 제로섬게임을 하고 있다는 신호이며
긍정적 정서는 윈윈게임을 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볼 수 있는데,
이때 자연선택과 문화적선택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윈윈시스템이 승리하게 되므로 세상은 갈수록 우리가 긍정적 정서로서 인식하고 있는 `지식, 능력, 선`등의 것들이 증가하는 방향성을 갖는다.
그리고 능력이 늘고 선함이 늘어나는 방향성의 끝에 존재하는 것은 전지전능과 지고선, 곧 신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세상의 방향성이라고 할 때 삶에는 행복한 삶 이상의 목표가 생긴다. 신의 방향성을 촉진하는 존재로서 동참하는 `의미가 있는 삶`이 그것이다. 행복한 삶이 자기의 강점을 발휘하는 삶인데 비해 여기에 더하여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라는 초월적 의지에 협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의미있는 삶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자유의지는 가치추구를 거쳐 초월적가치추구에 이르고 모든 자유의지는 성불로 향한다.`
긍정심리학은 인문학과의 합치를 추구하는 첫번째 사회과학이 될 모양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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