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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을 때 감사 대신에 소중함이라는 표현으로 바꿔서 이해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쉬웠다.
감사라고 표현하면 감사할 대상이 존재해야 성립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종교인은 모든 것을 신께 감사하겠지만 나는 시간처럼 주어진 것이나 내가 이룬 것일 경우에 이걸 누구에게 감사하나 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소중함이라고 하면 내가 이룬 것이라 해도 소중함이 약해지지 않는다.
감사하며 살기란 소중함을 알아채는 것이다. 책에서 말하는 지금 내가 감사할 일을 찾는 것은, 상실감 즉 없을 때의 감각을 기준으로 지금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아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아무리 높은 산도 고원지대에 사는 사람 눈에는 낮아 보일 수 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금새 익숙해지고 당연해져서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코로나 없는 건강, 전쟁 없는 평화,
삶의 터전인 가정과 일터,
물과 공기나 삶 그 자체인 시간까지도
무엇이든 당연시 될 수 있다.
없음을 기준점으로 잡지 않고 있음을 당연시 하면 아무리 소중한 것도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낭비하게 된다.

사고로 전신마비에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 기적과 재활훈련 끝에 어느날 모든 건강을 회복하고 지금 나와 같은 상황이 되었다고 치자. 그는 햇살과 바람을 누리고 뛰어다니며 엄청나게 행복해 할 것이다.
내가 누리고 있는 삶의 해발고도는 그렇게 높다. 행복감으로 전력을 다해 누려야 마땅하다. 내 현재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 내 가치를 알아보는 눈에 뭔가 문제가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 책을 빌렸던 2020년의 일이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둥글고 큰 기둥이 있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그 기둥을 봤는데,
걸음마를 시작한 딸과 도서관 기둥 주위로 술래잡기를 하던 기억이 가슴 시리게 그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 날 내가 그 기둥을 고른 이유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딸과 놀아주기 위해서 였다는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기둥을 이용하면 조금만 움직여도 보이지 않게 되니까 귀찮은 마음으로 기둥을 돌았고 그조차 그리 길게 놀아주지 못한 채 지루해 했었다.
왜 이제와서 그리운 느낌이 드나 생각했는데,
2020년에 장인 어른이 사고로 생사를 오가다 돌아가시고 코로나도 확산되고 어려운 시간이던 중에 그간의 평화로운 삶이 계속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아이의 어린 날이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이 되었다는 상실감으로 인해서 소중하게 느껴질 기준점을 가진 상태로 회상했기 때문이었다.
상실감과 불안감은 불행감의 근본이지만
그런 상실감각이 소중함을 알게 하는 기준점이 되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아이의 어린 시절과 유투브 예능 보기 중에 무엇이 더 가치있을까. 다들 많은 경우에 판단을 잘못한다. 판단이 흐려지면 세월 지난 후에 후회해도 늦다.

소중한 것의 가치를 바로 알기 위해선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감사 일기를 쓰는 대신에 매일 가만히 이런 생각을 한다.
먼저 '당연히 있는' 것을 생각하고
상실했을 때와 비교하여 소중함을 알아차리고
안도와 행복감을 느낀다.
이 정도는 내게는 당연하다 여기는 자존심의 느낌을 지운다.
다행이다 라고 느낀다.
가족이 있어줘서 다행이다.
여기 우리의 공통점인 일터가,
건강이,
평화가.

이적의 노래중에 다행이다 라는 곡이 있다.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다 라는 것은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내게 있는 모든 것에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당연시 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에 다행이다 라고 느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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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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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물 혹은 멋진신세계 같은 쾌락충족형 디스토피아물이 그리는 세상은 서로 유사하다. 이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유토피아가 실제로는 이상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존이 공짜이던 시절 뭘하면 '재미'있을까를 답없이 고민했었다. 답은 없었다. 생존이 공짜가 되면 생존의 노력이 의미를 잃어 가치와 감각이 뒤틀린다.
간절한 꿈도 희망도 성공도 행복도 생존을 위한 노력에서 온다. 살아남기 위해서 기존에 안하던 짓까지 해가며 움직이는 것이 성취를 만들고 이는 곧 단순 생존 이상의 큰 성공으로 직결되기에 이른다.

매슬로우 욕구론을 생각하면서 아이에게 생존의 공포를 배제해 주고 풍요롭게 하면 고차원적인 열정을 갖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실상은 아니다.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 것은 결핍이다.

생존 공포의 완전한 배제는 생존을 위한 노력의 의미를 거세하는 것과 같다. 유토피아라고 그린 사회가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행복감은 효율을 높이고 마인드 셋을 바로잡아 행운을 부른다. 그러나 생존을 공짜로 만드는 풍족이 행복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치트키를 켜서 난이도를 0으로 만들어 버린 게임은 지루한 노가다에 불과해지는 것처럼.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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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만나서 나이 드니까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얘기를 했다.
수용체가 말라붙은 것처럼 뭘해도 그다지 재밌지 않다.
재밌는 것은 단지 아이나 아내가 재밌어하면 그걸 보는 게 재밌다.
유전자에 새겨진 특성 같다.
나이들어서도 홀로 재밌을 수 있는 현자는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어서 대가 끊겨 멸종했고 나이들면 아이 키우기에 홀려있는 바보들의 유전자만 살아남아 우리 조상이 된게다.
그러고 나니 이젠 애키울 때라서 맛있는 걸 내가 먹는 것보다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게 더 맛있다. 여행을 가도 혼자서 구경하는 건 재미없고 가족들 데리고 힘만 들게 다니면서 가족들이 좋아하는 걸 보는 게 좋다.
즐거움을 느끼는 수용체가 아이들에게 이동해 버린 듯한 이 상황에서 두가지 해법을 생각하고 있다.

아이에게 좋은 것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내 눈앞에서 멀어지는 것은 지양한다. 나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멀리 어딘가로 떨어지게 되면 즐거움 느낄 수용체 없이 남은 내 삶은 인고의 시간이 될테니까.
기러기건 기숙사건 유학이건 혹은 아이가 친구들과 놀게 아빠는 돈만 내주길 원하는 류의 소원이건 이런 판단을 할 상황은 많이 발생한다.
나이들면 홀로 재미를 느끼기 어려워진다는 건 중요한데 꽤 무시된다.
미혼의 돈 잘버는 후배와 얘기할 땐 결혼을 고려할 이유가 된다.
아이 교육을 위해 장거리 주말부부 하는 고위 공무원인 친구는 객관적으로 그만둘 이유가 없는 직장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낙이 없었다. 주말에만 몇시간씩 운전해가서 힘들게 아이를 만나는 건 즐거울 구석 없는 인고의 삶이 될 것이다. 아이가 아빠에게 알아서 기쁜 모습 보이며 낙을 주면 괜찮겠지만 그럴리가 없으니 지친 아빠가 아이에게 인풋을 넣어야 하는데 주중 근로와 주말 운전으로 지친 상태로는 그것도 잘 안될테니까.

수용체가 나이의 영향으로 무뎌지는 것은 내 내적인 변화이므로 더 즐거운 새 취미를 찾아내기 보다는 운동과 집중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단련하면 왠만큼 효과 있을 것이다. 어릴때도 못하던 턱걸이를 나이든 후 운동하면서 할 수 있게 된 경험에서 내가 살아온 과거가 내 최대치가 아니었음을 안다. 과거에 특별히 훈련해서 최대치로 발휘했던 분야가 아닌 이상 지금이라도 단련하면 꽤 큰 효과가 나고 과거를 능가할 수도 있다. 한동안 안듣던 음악 등 문화 컨텐츠에 좀 더 집중해서 감정을 움직여보고 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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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게임 제작자가 쓴 '라프 코스터의 재미이론'이라는 책이 있다. 그가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재미가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경험으로부터 특정한 패턴을 파악하고 그것을 학습한다. 물로 만들어진 파도무늬와 모래로 만들어진 사구의 파도무늬는 소재가 달라도 파도무늬라는 패턴을 공통적으로 추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험한 현상으로부터 패턴을 추출할 수 있는데, 사랑이니 정의니 자연법칙이니 하는 모든 관념은 이런 추출된 패턴에 해당한다.
사람은 경험으로부터 패턴을 해독해내서 발견하고 습득한다. 현상으로부터 패턴을 파악하는 것을 연구라고 한다. 전체 패턴을 해독하기에 유리하도록 사건의 일부를 관념화하는 것은 분석이고, 그 개별 관념들이 만드는 흐름에서 법칙을 찾는 것은 통찰이다. 분석에 사용하는 관념은 새로 만들거나 기존의 것을 배워서 사용한다. 관념을 새로 만들어서 이용하는 경우는 아무래도 드물고, 많은 경우에 기존의 관념들(언어로 이름 붙여져서 어휘가 된다)을 배워서 이용한다.
관념들이 엮여서 만드는 흐름중에서 법칙을 찾아낼 때에도 이 법칙은 논리와 인과 같은 기존에 알고 있던 법칙과 유사하기 일쑤다. 그래서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해 본 경험이 많을수록 흐름으로부터 법칙을 파악하는 능력인 통찰력을 갖기에 유리해진다.

라프 코스터는 패턴 학습의 과정이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숨겨진 패턴이 너무 어려워서 해독이 안되면 무의미한 노이즈와 마찬가지가 되고 패턴 습득이 일어나지 않아 재미가 없다. 패턴이 너무 쉬워서 이미 학습이 완료된 것이면 패턴 습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재미는 적당한 난이도에서 패턴을 파악하고 습득하는 과정이 일어날 때에 느낄 수 있다. 이는 게임의 재미 뿐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을 '읽는' 재미에도 적용된다.
자기가 신봉하는 신념(권선징악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이 스토리에서 재확인될때의 쾌감, 이미 깔려있던 복선으로부터 개연성있는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는 쾌감... 이런 것들로는 스토리의 재미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움이 없으면 재미가 없는 것도 재미가 패턴학습의 과정에서 생겨난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관련글
http://longlive.tistory.com/m/post/598
http://longlive.tistory.com/m/post/600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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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과 자유의지가 이루는 인격

사람은 생물적 본능과 자유의지로 인격을 형성한다.


예술이란

사람은 생물적 본능과 자유의지 어느 한쪽에 완전히 치우칠 수 없다. 누구나 비효율적인 취향을 갖고 예술가조차 팔릴 예술을 추구한다.


자유의지와 초월적 가치

생물적 욕구와 자유의지 욕구가 만날 때, 미지를 향하되 생존은 충족되어야 하기에 불안을 거쳐 초월적 가치 추구에 이른다. 자유의지욕구는 충족하면 할수록 점점 더 초월적가치 추구를 향하게 되며 이것이 그 어떤 악한이라 해도 가지고 있는 불성이다. 모든 자유의지는 성불에 이른다. 여기서 초월적가치추구란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다. 더 지혜로워지기 위해 연구 공부하거나 도덕적 무지나 나약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거나 예술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추구하거나 참선등을 통해 성스러운 초월지를 추구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인생에 무엇이 진정 가치있는가를 찾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뇌과학 서적 읽는 중에.

순간의 선택의 결과들은 신경망 구조위에 집적된다. 즉 자유의지는 집적된다.

자아, 자유의지 그리고 패러다임.

자유의지의 존재여부는 현재 패러다임 하에서 알 수 없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자유를 박탈당한채 쾌락에 취한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행복의 본질은 자유의지를 통해 가치를 추구 하는 데에 있다. 곧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가치 추구는 하면 할수록 종국에는 초월적 가치추구에 이르게 된다. 이를 위해선 자유의지 개발이 필요하다.

행복론 요약

행복론, 피로사회와의 비교 : 피로사회의 해석을 떠나서 내 식으로 같은 문제를 해석함.

행복론, 자유의지욕구 발달과정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1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2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3 : 24덕목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4 : 실생활 적용 예시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5 : 삶의 의미

긍정심리학의 방법은 가치를 찾는 데에 도움이 된다.


결혼, 육아, 인생의 의미.

리스크 프리

인생관 :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숙달하여 항상 구현가능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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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맞이 인생관 점검 시간.

내가 인생관으로 삼고 있는 것은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이다.
이때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내가 추구하기를 선호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긍정심리학의 방법을 참조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으면서 가치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뜻은 비교적 명확하다.
그런데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문제다.

흔한 말로 1등을 하기 보다 1등을 유지하는 게 어렵다.
요동치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 운을 타고 반짝하는 퍼포먼스를 내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한번씩은 찾아올 정도로 쉽기에
한번 1등을 하는 것은 운이 좋으면 얻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그 퍼포먼스를 운이야 어찌되든 내 의지대로 언제라도 발휘할 수 있는 진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여태 이룬 적이 없는 더 높은 퍼포먼스를 내도록 하는 것 보다도 중요한 건
내가 과거에 이룬 적이 있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지구력이다.
기본 옾셋을 높이면 최고치도 올라가기 마련이라서 전자는 후자를 연마하다 보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기도 하다.
(발동 확률 값을 높이는 이러한 지구력을 기르려 하기 보다
여러 번의 시도로 낮은 발동 확률을 극복하려고 함으로써 최고의 퍼포먼스 즉 대박이 얻어 걸리길 바라는 것을 두고
요행수를 추구한다고 한다.)

가치가 현실에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지구력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기대되는 가치, 즉 기대 수익이며 기대 수익은 안정성과 성과의 곱이기 때문이다.
항상 안정적인 성과를 내는 지구력은 단발성 성과에 비해 기대 수익을 엄청나게 높여주기 때문에 현실에 발휘하는 영향력도 굉장히 커진다.
해리포터를 쓴 조앤롤링은 어떻게 큰 돈을 벌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녀의 엄청난 원고료는 시리즈물에서 안정적인 수익성이 반복 예상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령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 처럼 인생 단 한번의 걸작을 쓴 사람은 설령 그 한권의 작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조앤롤링처럼 높은 고료를 받을 수는 없다.
과학이 왜 그토록 높은 대우를 받는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예다. 과학은 현재 다른 어떤 학문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공헌한 정도의 총합을 두고 따진다면 짧은 과학의 역사보다 종교나 인문학이 훨씬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과거에 이룬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래에 기대되는 가치 수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 번 해낸 것이 한 번에 그칠 때와 그것을 숙달하여 언제라도 내 뜻대로 해낼 수 있을 때의 효과 차이는 상상 이상이다.
한번도 해낸 적이 없는 것을 한번 해내면 뭔가 엄청난게 바뀔 줄 알았는데 막상 이루고 보니 별거 없더라며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겨우 한번 이뤘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번 이룬 성과에 매달리거나 실망하지 말고 그것이 어쩌다 얻어 걸린 것이 아닌 내가 내 뜻대로 언제라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되도록 숙달하고, 또한 망각과 노화 요인조차 극복하도록 시스템을 구성하여 성과를 유지한다면 그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된다.
지금까지 내가 해낸 적이 있는 것 중에 최선의 성과를 목표로 잡고,
그것을 운에 좌우되지 않고 언제라도 해낼 수 있도록 허술한 지점을 보완하고 반복하여 숙달하고 시스템화 할 때 그것이 가치를 만들고 성공을 만든다.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내가 추구하기로 선택한 가치를 생산하기를 반복 지속하여 숙달 및 시스템 구축함으로써 미래에 언제라도 내 의지대로 이 가치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환경적 우연에 휘둘리지 않고 내 자유의지를 확장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내는 성과는 외부 환경적 우연 요소의 영향과 내 자유의지의 영향이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과 환경 요소에 휘둘리는 것을 줄이고 내 의지로 언제라도 성과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내 자유의지의 효과를 확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숙달은 가치의 미래 기대 수익을 안정적으로 높여주며 그로써 현실에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흔히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 '성과를 추구한다,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에 대비되어 쓰이는 뉘앙스를 갖곤 하는 이유도 이러한 이해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나는 내 아이가 자기가 추구하기를 선호하는 가치를 파악하도록 할 것이며, 그러한 가치를 운이 아닌 자기 의지대로 항상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지구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고자 하는 방식이며 물려주고자 하는 방식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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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해 논한 2010년 캐시모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현실은, 우리가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이 우리가 파리나 박테리아 수준으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설탕 한 줌이 자유 의지가 없는 수준으로 우리도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고 그 법칙은 자유 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말은 넌센스다.
자연의 법직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가 관찰 할 수 있는 현상을 관찰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학도 그의 관찰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찰하고 그의 역학을 완벽하게 설명하여서 대표적인 예시로 사용했던 역학현상에서 조차도
'항상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들이 있었다.
이는 후에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위기로 내몰고, 뉴튼 역학에 의해 해석되며,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뉴튼역학도 뉴튼이 관찰한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광속도에 근접한 계에서 자연의 법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설명한 자연의 법칙은 전 우주에서 동일하게 동작하지만
뉴튼이 관찰했던 조건과 환경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뉴튼 역학을 완벽하게 보여줘서 뉴튼이 대표적인 예시로서 사용한 계에서 조차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이 있었다.
이는 역학뿐 아니라 과학의 모든 패러다임이 마찬가지다.

패러다임은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형상을 만든다.
('세계는 신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뱀과 코끼리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는 섬이다.')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의 탐구활동은 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어서 전체 구조물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활동이다.
('세계를 떠받치는 코끼리는 몇마리인가?')
과학의 발전은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 이미 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전체 구조 자체를 합당한 구조로 파악하는 것이 발전이다.)
현재 따르고 있는 패러다임이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캐시모어 논문의 저 마지막 말은 설탕 한줌에 대한 자연의 법칙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상정한다.
이는 과학은 완성되었으며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고 자신하는 것과 같다.
오산이다.
진짜 현실은, 자유의지를 논하기엔 설탕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과학이 '인간은 오토마타이며 의식은 그 로그파일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놓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항상 관찰하는 자의식과 자유의지는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명백히 관찰되는 현상은 그 자체로 패러다임보다도 한 단계 위의 확실성을 갖는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장차 무엇이 현재의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몰고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이끌어 낼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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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육아(+딸린 작업)의 인생 프로젝트는 되는대로 대충하고선 리턴되는 쾌감을 수동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즐거운 작업이 아니다.
잘 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하는 최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수행함에 있어서 즐거운 작업이 된다.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최선을 찾고 그것에 이르기까지 노력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대충 아무랑 결혼하여 겉보기에 흠 없는 표지를 만들 수 있는가' 여부가 아니라
내 인생을 걸 최선의 상대방이 누군지 알 수 있는 안목을 만드는 작업도 하고
고른 상대방과 조율 맞추는 법을 익히는 작업도 하며
최선을 지향하는 생각과 결정과 노력의 과정을 수행함에 있다.
과정 다 건너뛰고 결과물로 '대충 흔한 결혼의 리턴되는 쾌감의 양'을 보는 식으로는 결혼의/육아의/인생의 진가를 평가할 수 없다.

결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서
종교에 귀의하거나 예술이나 정의구현에 투신하거나 학문에 몸바치거나
자기가 추구하는 최선을 위해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같은 이유로 이미 있는 가정을 버리고 출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버림에도 그들이 폄하받지 않는 이유, 혹은 추앙되기까지 하는 이유는 단지 이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선의 인생을 추구하였으므로.'
부연컨데 이때 말하는 최선의 인생은 최선을 만드는 작업에서 진가를 볼 수 있지, 리턴되는 쾌락의 양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는게 심심했었다.
뭐가 재미있을까 찾으며 이것 저것 해봤더니 결국 공부가 남더라.
왜 학문이 역사적으로 귀족의 여흥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키는 공부를 찾아서 하는 건 다른 모든 활동에 비해 인생의 의미를 주는 행위 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생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려는 작업에 비하면 단순한 것이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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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화학 대중서를 보는데, 가설의 연속이란 느낌이 들었다.
가설위에 가설을 쌓는 구조를 몇차례 보다보니 늘어놓은 실험결과들이 최종가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당연하게도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방식으로 실험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분히 일방적인 단편들이 기록된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신경화학이 미시적인 규모를 벗어나서 심리학 규모의 사실에 대해 결론을 내놓는 것(인간의 마음이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점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는)은 아직 성급하게 보인다. 일단 최소한 단편적으로 알려진 신경화학적 사실을 두고 대중이 결론을 추리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성급하다.

출산, 수유, 오르가즘등 강렬한 애착 감정을 느끼게 될 사건이 일어날때면 옥시토신 분비가 늘어난다. 이를 바탕으로 유명한 초원들쥐 실험이 있었다. 초원들쥐는 색정광인 다른 쥐들과 달리 일부일처제이다. 첫관계를 한 뒤 평생 정절을 지키고 자기 짝과 함께 새끼들을 양육하며 살아간다. 이 초원들쥐의 뇌에 옥시토신을 더 주사하면, 유대관계가 더욱 끈끈해졌다. 반대로 초원들쥐의 옥시토신 수용체를 무력화시키는 주사를 놓으면, 초원들쥐의 생활양식은 일대일 관계가 깨지고 다른 쥐들처럼 문란해졌다.
이 실험 결과를 두고 다양한 가설이 가능하다.
옥시토신이 상대방의 인상착의를 뇌에 기억시켜서 그 사람(그 쥐)만 사랑하게 한다는 가설도 있다. 모성은 옥시토신에 의해 발생한다는 가설도 있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2~3년(900일)이라는 말이 퍼진 것도 그 기간이 지나면 사람의 뇌에서 옥시토신을 포함한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다는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옥시토신은 사랑 호르몬이라고 소개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수십 수백번씩 기사화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진 유명한 실험 결과들이다. 그런데, 이 단편적 사실들을 두고 `길어야 3년이면 사랑은 끝이고 호르몬 분비가 끝나는 3년 후엔 옥시토신 잃은 초원들쥐처럼 바람은 숙명`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타당할까?

앞서의 실험 결과외에 다른 사실 몇개를 바탕으로 나는 이렇게도 해석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실험동물에게 아편성 물질을 주면 약물 내성이 올라가서 점점 더 많은 양의 아편성 물질을 찾는다. 그런데 실험동물에게 옥시토신을 주사하자 아편성 물질에 대한 내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옥시토신은 쾌감 내성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초원들쥐와 산악들쥐의 뇌를 비교했더니 초원들쥐는 뇌의 쾌락중추의 도파민 수용체들과 함께 옥시토신 수용체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산악들쥐의 옥시토신 수용체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는 초원숲쥐는 산악들쥐에 비해 옥시토신의 쾌감 내성을 줄이는 효과를 크게 본다는 뜻이 될 것이다. 옥시토신이 성관계시에 분비되므로 특히 오르가즘의 쾌감 내성을 낮추어 줄 것이다.
초원들쥐의 일부일처제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늘 처음같은 오르가즘`일지도 모른다. 쥐가 사람보다 본능에 더 강하게 지배받는다고 본다면 쥐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보다 오르가즘의 비중이 월등히 클 것이고, 오르가즘이 유지된다면 최초에 짝을 지은 이유, 한번 좋았던 이유가 바뀔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에 쥐의 일부일처제가 유지되는 것일 수 있다. (`~라면 ~일 경우 ~일 수 있다.` 가설위에 가설 쌓기.)
옥시토신이 무력화된 후에는 내성이 생기면서 성관계 쾌감이 약해지고, 쥐의 사랑은 오르가즘이 전부라고 할 경우 오르가즘 감퇴는 일부일처제가 해제되는 사유가 되기에 충분하여 문란한 관계로 변하는 것일 수 있다.
이 경우 옥시토신은 사랑 호르몬이 아니라 오르가즘 지속제다. 물론 오르가즘 지속제는 사랑에 큰 도움이 되지만.

모두 자작가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걸로도 가설이 된다. 게다가 이 가설에 의할 경우엔 앞서 `3년이면 사랑은 끝나고 바람은 숙명`이라는 판단은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경우 3년 후에 오르가즘은 내성이 생겨 처음같지 않은게 보통이더라도 그게 `사랑이 끝난다`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옥시토신이 아이의 인상착의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여 모성을 낳는다는 가설도 성급하게 보인다.
제왕절개후 몸상태 때문에 분유수유를 하는 산모는 모성이 생기지 않을까? 이 경우엔 출산후 모유수유를 하는 산모에 비해 옥시토신이 현저히 적어서 산후 회복은 눈에 띄게 더디게 이루어지는데, 자식에게 애착을 갖지 못하는게 눈에 띄게 드러난다거나 하는 조사결과가 있을까? (제왕절개로 출산한 산모가 아이에게 애착을 덜 갖는다는 결과는 없을껄?)

이 시대의 인간에 대한 인식을 선도하는 것은 진화심리학과 신경화학이다. 그런데 신경화학에 근거한 대중적 인식은 오히려 단편적 사실을 성급하게 해석해서 나온 잘못된 결론으로 점철되어 있다.
단편적 사실은, 여기를 보고 이런 결론을 내리면 저기를 보면 또 다른 내용이 나온다. 애초에 특정 심리상태와 옥시토신 농도는 딱 떨어지는 대응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남편과 유대가 약한 상태로 오랜 기간을 보낸 나이든 여성은 옥시토신 수치가 만성적으로 높다. 또한 스트레스가 심할때에도 옥시토신 분비는 늘어난다. 옥시토신은 분명 무의미하지 않은 의도가 숨어있는 암호문이지만 그 내용은 `문맥을 떠나서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을만큼 간단하지 않다. 만약 옥시토신이 사랑호르몬 이었다면 출산보조용 자궁수축제는 사랑의 묘약으로 팔렸을 것이다.

7년 전에 번역된 대중서를 읽고 신경화학의 현재를 논할 수는 없다.
뇌과학은 심리학보다 더 탄탄한 기초를 다지면서 심리학을 따라잡을 것이다. 하지만 두가지 의미에서 성급함이 느껴진다.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내용을 놓고 보면 앞서 말했듯 단편적 사실을 성급하게 해석한 잘못된 결론들을 던져주고 있다. 그 편이 자극적이어서 그런가?
학문 그 자체를 놓고 보면 신경화학을 포함한 뇌과학이 심리학을 추월하는 규모의 결론을 내놓으려 하는 것은 성급하게 보인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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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관념의 토대 위에서 뇌과학 서적을 읽고 있다.
사람의 의식구조에 대해서는 종교, 철학, 심리학(사회과학), 뇌과학(과학)등 학문 전반에 걸쳐서 다양한 모델이 존재한다.
내가 잡고 있는 모델은 이렇다.

동물은 태어날 때부터 뇌신경망구조에 생물로서의 본능을 갖는 의식 구조를 형성하고 태어난다.
그리고 생각은 흔적을 남긴다.
생물 본능적 의식 구조 위로 외부 환경과 자유의지의 결과가 학습된다.
학습된 패턴은 루틴화 되면서 쌓이고 기존의 구조를 변화시킨다.
( longlive.tistory.com/279 에 적은 의식3단계설 참조.
1.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단계. 언어를 이용해 생각하고, 대상의 개별 요소를 의식에서 인식한다. 매우 느리다.
2.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단계. 언어를 이용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복잡한 논리적 사고과정 없이 직관적으로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결론이 나온다. 대상은 개별요소로 인식되지 않고 그 개별요소들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집합체, 즉 관념으로 뭉뚱그려서 인식된다. 처리속도가 1단계 보다는 두배 빠르나 여전히 느리다.
3. 몸에 배는 단계. 입력에 대한 출력이 완전히 루틴화되어서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 빠르다.)
즉 자유의지는 집적된다.
자유의지는 그것이 집적된 결과물인 하위자아를 바탕으로
집적된 결과물이 선택 가능한 폭 안에서 동작한다.
크게 비유하면 테니스를 배우지 않는 것은 자유지만 안 배웠으면 테니스를 못친다.
서울에 경부선을 타는 것은 자유지만 그 결과 나는 부산에 있어서 인천에 가기가 어려워진다.
가속도는 집적되어 속도를 만든다. 순간가속도는 가속도가 집적된 현재 속도에 비해 매우 작은 크기를 갖는다.
이와 같은 일이 의지에도 일어난다. `의`는 벡터다. 이것의 존재를 확인하려면 그 전에 먼저 이것이 얼마나 작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찰나의 매순간들에 자유의지로 한 생각과 선택들은 집적되고 미래의 선택과 생각은 집적되어 도달한 그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 결과가 일상에 나타나는 수준의 (과거로부터의 관성에 비하면 별로 크지도 않은) 자유의지이므로,
찰나의 순간에 순수한 자유의지는 매우 작은 가속도 벡터이다. 그러나 없는 것과 매우 작은 것은 크게 다르다. 그 작은 순간 가속도는 집적되어 큰 현재 속도를 만든다. 그 작은 자유의지는 상위자아로부터 온다.

날때부터 가지고 있던 본능에서부터 현재의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하위자아의 신경회로에 루틴화된 것은 모두 특정 입력에 대한 특정 출력이 매칭된 것이며 조건반사와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하위자아로서의 의지는 뇌의 기억, 언어, 연상작용등 모든 루틴화된 입출력 패턴들과 팔다리등 몸의 자원을 이용하여 활동한다.

하위자아의 의식은 RPG게임의 아바타(문자 그대로 하위자아)에 몰입했을 때에 느끼는 아바타로서의 자아와 마찬가지라서
하위자아가 상위자아를 각성하면 하위자아의 의식은 해체된다.
내가 게임을 할 때 게임캐릭터의 의식은 내 의식임에도 내가 게임에서 빠져나온 다음엔 캐릭터로서의 자아는 온데도 없고 간데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 관념 위에서 뇌과학을 읽다보면 현재 뇌과학이 한창 연구하고 있는 것은 '해킹기술'로 이해된다.

상위자아의 영향으로 발생한 자유의지는 전기화학신호를 전달자로 하여 두뇌 각부 및 신체 전체와 통신한다.
뇌화학은 군대 사령관이 하달시킨 '진도개 셋' 명령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연구나 마찬가지다.
명령의 암호를 해석하고 명령체계에 난입할 수 있다면 동작에 혼선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통신 난입하여 진도개 셋을 끼워 넣어 군대를 움직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중간에서 명령체계를 해킹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고
군대를 전진시킨 것은 엄밀히 말해서 '진도개 셋'이 아니라 그 명령을 내린 수뇌의 의도이며 '진도개 셋'은 그 의도의 전달자일 뿐이다.
호르몬은 전달자다. 사람의 감정과 행동이 호르몬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은 그 의지가 시작되는 지점이 호르몬을 생성하는 지점보다 이전 단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암호화된 명령인 '진도개 셋'이 나온 지점보다 앞선 곳에서 군대를 움직인 의지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와 같다.

신경 전달 물질인 세로토닌은 위험 회피에 대한 신호를 의미한다.
내 요구가 거절되었을 때 라든지, 뭔가 위험을 감지했을 때의 신호를 전달한다.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면 위험하다는 뜻이다.
어떤 일이 걱정할만한 일인가 아닌가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와 같은 의미로,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세로토닌이 적게 분비되는 이유는 이성적 판단의 차이 때문(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일수도 있고, 조심성과 걱정이 많은 성격탓(똑같이 알고 있어도 누군가는 더 걱정한다)일 수도 있고, 혹은 분비회로가 고장나서일 수도 있다.
우울증 치료제인 프로작은 세로토닌을 인위적으로 증가시킨다.
우울증 환자는 그 결과 우울증이 치료된다.
분비회로가 고장난 경우라면 증상을 없애주는 효과이고, 걱정이 많은 성격탓이라면 성격을 바꿔주는 효과이다.

이런 반응은 위험회피 성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프로작은 섭취가 간편하고 부작용이 적어서 유명해졌지만 기술이 받쳐준다면 도파민(새로움 추구)이나 노르에피네프린(쾌락 보상 추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작업이 가능하다.
프로작이 하위자아의 통신망이 '위험도가 1~10단계중 한 7단계쯤 되'라는 통신을 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위험도 값을 낮춰서 전달하는 해킹기술이었다면, 다른 물질로 다른 통신에 개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세로토닌/도파민/노르에피네프린/아드레날린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경 전달 물질의 양을 조절함으로써
위험에 민감하고 쾌락 보상에 집착하면서 잘 흥분하지 않고 수구적인 성격을
위험에 둔감하고 쾌락 보상에 둔감하며 잘 흥분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성격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전기적인 신호 해킹도 뇌에 전극을 꽂으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가령 뇌 특정 부위에 전위차를 주면 '지금 슬픈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나 '지금 우스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또한 그 감정에 연계된 기억이 더 잘 떠오르기 때문에 전위차로 유도된 감정은 스스로의 기억에 의해 증폭된다.)
즉 기술이 받쳐준다면, 유머러스한 성격(입력된 정보의 우스운 부분을 민감하게 캐치하여 잘 웃는 성격)을 만들 수도 있다.

이건 모두 통신 해킹에 대한 얘기다. 상위자아로부터 아바타를 조종하는 사이에 개입하여 해킹하는 것을 뜻한다.
미미한 자유의지의 집적으로는 수정하기 힘들었던 강한 현재속도를 약으로 후려쳐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안그래도 작은 가속도 벡터를 더 하찮게 보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강하게 후려쳐서 현재 속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가속도 벡터의 존재 여부에 아무런 근거도 되지 못한다.

학습을 통해 자유의지를 집적하여 성격을 바꿀 때엔 새로운 입출력 피드백 패턴을 내재화하여 신경 전달 물질의 분비량을 조절하거나 수용하는 민감성을 줄인다. 즉 피드백 회로를 수정한다. 이는 자유의지가 하위자아에 집적되어 하위자아를 수정하는 의미를 갖는다. 상위자아의 자유의지로 하위자아에 가치있는 인격을 구현하는 것을 하위자아의 존재의의로 삼는다고 한다면
'치료'의 폭은 '피드백 회로가 고장나서 증상을 감추어야 하는 상황'에 국한된다.
나머지는 치료라기 보다는 강제 성격 개조이다.

본인이 강제 성격 개조를 원하고 있는 경우라면 (환자를 치료하는 의미가 아니라) 부작용을 감안한 후엔 도구적 의미로 허용될 수 있다.
가령 다른 가치있는 모험을 하기 위해 위험에 민감한 성격을 잠시 접어두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니까. (또다른 예로는, 호모섹슈얼이 `이상이 있는 환자`가 아닐지언정 성향개조가 가능하다고 하면 자발적으로 헤테로섹슈얼로 자기 개조를 감행할 사람이 95%이상 될 것이다. 살기 힘들어서 자괴감 갖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강제 성격 개조는, 글쎄 적어도 치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엔 논란 거리가 많다. 정신병 치료 목적으로 뇌를 파괴했던 일에 비교될 수 있지 않을까.
얼마전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는 허구라는 ADHD 창안자 아이젠버그의 임종전 고백이 있었다.
(http://www.worldpublicunion.org/2013-03-27-NEWS-inventor-of-adhd-says-adhd-is-a-fictitious-disease.html)
피드백 회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미성년자인 아이의 성격을 타인인 부모의 의지로 강제 개조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것인가.

내 관념을 고수하면 쾌락 그 자체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이 된다.
현재 흔히 퍼져있는 착각으로 보이는 '사람은 주관적인 행복의 감각을 목적으로 하여 행동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있다.
주관적인 행복이란 엔돌핀등 체내의 마약성 물질을 의미하므로
저 말은 어떤 행동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체내 마약성 물질을 생성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된다. (* 마약성 물질은 그 물질 자체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신호를 전달하자니 뭐가 됐든 전달자가 필요해서 어떤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 것 뿐이다. 수많은 식물중 양귀비 꽃이 그 물질을 생성하는데, 만약 신경이 전달자로서 다른 물질을 체택했다면 장미꽃이 환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외부에서 향정신성약물을 주입하는 것이 나쁠 게 없다. 목적에 직접 도달하는 방법을 찾은 셈이 될 뿐이다.
금단증상이나 점점 약의 양을 늘려야 하는 약물 내성 효과등은 사소한 부작용이다. 옥시토신은 역치 증가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언젠가 기술이 받쳐준다면 늙어죽을때까지 쇼크사 하지 않는 정도의 사용양으로 쾌감을 줄 수 있는 향정신성의약품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술 담배 케익도 그 예시가 된다. 죽을때까지 향유할 수 있는 쾌락 증대 물질 말이다.
그러나 '상위자아의 자유의지를 집적하여 하위자아를 만들어가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 이익이 아니라 가치생성을 목표로 한다면)
약물의 근본적인 부작용은 피드백 구조에 혼란을 준다는 것이다.
약물에 의한 자극은 '이 행동을 통해 이러한 보상이 온다'는 피드백 구조에 개입하여 뒤헝클어 놓는다.
가령 이타성을 예로 들면, 본래는 지나친 이기성과 맹목적 이타성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적정한 내적 보상 수준이 결정되어야 하며 이는 학습 내재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본래는 행동의 결과를 뿌듯해하면서 분비되어야 할 보상이 더 편한 방법으로 주입된다면, 보상 수준 결정에 혼란이 생긴다.
그래서 이상적으로는 술이든 담배든 당분이든 카페인이든 마약이든
그 뒤헝클어 놓는 영향성의 양만큼 해롭고, 멀리하는 것이 좋다.
다만 어차피 하위자아가 학습할 때엔 자유의지의 결과가 고스란히 집적되는 게 아니라 환경의 변칙성으로 인한 노이즈가 작용하므로 일정 수준 이하의 약물에 의한 영향성은 무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약물에 의한 쾌락이 보상 구조를 손상시킨다지만 환경의 우연성에 의한 불노소득 같은 보상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어떤 작가가 자기가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의 뇌를 MRI로 촬영했다는 책을 읽었다.(서명 `굿바이 프로이트`) 그는 뇌는 모듈화된 신경 회로의 집합이며, 각각의 신경회로는 회로구조의 독특함 때문이 아니라 뇌에서의 위치에 의해 특징을 갖으므로, 따라서 모든 모듈은 각각의 자아를 가지며 통합된 단일 자아는 모듈화된 복수의 자아들 간의 역학관계 끝에 나타나는 허구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자기가 언어적 창조적 영감을 얻는 순간 뇌의 언어영역(그의 모델대로라면 `말을 하는 나`가 될 것이다)에 대단한 활성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했다. 그는 실험과정에서 영감을 얻는 순간을 찍는데에는 성공했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의 언어영역은 일반적인 책을 읽을 때보다 약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정도였다. 창조적 활동을 할때 두드러지는 변화는 안쪽이마이랑(medial frontal gyrus)의 활성화였다. 우연히도 medial frontal gyrus의 위치는 머리 밖에서 보면 상단전이다.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대해 그 책에서 대답하기를, 뇌에는 감각기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창조적 활동을 할 경우에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가 라는 것은 MRI가 아닌 한 설령 해부를 할지라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창조적 활동을 할 때엔 상단전이 빛난다는 말은, 석가모니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인도에 전해내려온 것이다. 어떤 경로로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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