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2025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이건 내가

잡담 2014. 9. 7. 14:17

이건 내가.

그림실력은 대충 세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1.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고 따라 그릴 수 있는 정도
2. 입체를 보고 그림으로 단순화 시킨 형태로 변환해가면서 보고 그릴 수 있는 정도
3. 그릴 것을 보지 않고 머리속 생각을 그려낼 수 있는 정도
(이미 관념화 되어 있는 것을 모방,
현실을 관념으로 변환해가면서 현실 모방,
창작관념생산.)

난 1.5 정도 되는 듯.
가르칠 때는 난이도 조절이 중요하다. 너무 어려운 단계를 요구하면 배우지 못하고 재미도 느낄 수 없다.
흔히들 아이에게 그림 놀이를 가르칠 때 보고 그릴 모델을 주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서 그림 그리기를 요구하는데 그러면 너무 어렵다. 모델도 입체부터 그리면 어려우므로 이미 그림으로 표현된 모델, 즉 따라그릴 그림을 주는 게 쉽다.
머리속 생각을 그리는 것부터 해보라고 하면 너무 막막하고 잘 안그려져서 재미없어질 수 있으므로
보고 그릴 그림을 주거나 아니면 함께 그리면서 "똑같네"해가며 '보고 모방해 그리는' 놀이를 먼저 하는게 좋겠다.
안보고 생각을 그리는 것은 형태만 나와도 칭찬을 잘 해줘서 높은 성과로 쳐주는 것이 좋겠다.

비록 난 가는 길 험난한 예체능 쪽 재능은 많아 키워줄 생각이 없지만..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Diary  (0) 2022.05.13
정선 카지노 방문  (0) 2014.10.21
요즘 세상에선 세기를 아우르는 명작이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0) 2014.08.29
으리  (0) 2014.06.27
세월호 사고 후에 쓰는 글  (0) 2014.04.25
Posted by 노크노크
|
며칠전 내가 썼던 댓글 :

요즘 세상에선 세기를 아우르는 명작이 나올 수 없을 것 같음.
명작들 보면 집필기간이 십년씩도 걸린 것들이 많음.
그렇게 쓰여진 명작은 아주 큰 이익을 아주 긴 시간에 걸쳐 회수함.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레미제라블은 작가 사후 긴 시간이 지나도록 멀티유즈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갖지만, 그 이익을 작가 본인이 다 회수하지 못하고 저작권이 소멸됨.

그런데 요즘은 투자비용의 효율적인 이익 회수가 칼같이 돌아감.
투자자가 다 회수하지 못할 정도의 작물을 심어서 그 이익을 타인들이 유산으로 향유하게 되는 것은 요즘의 이익 회수 관점에선 돈을 거리에 뿌리는 짓임. 그런 짓은 엄금됨.
결국 그 이익 당대에 다 먹지도 못할 세기의 명작은 필요 없음.

컨텐츠들에게 요구되는 바가 정시에 업데이트 되는 오늘의 유머라서 정시 업뎃만 늦어도 난리남.
예술한답시고 작품성 높이려고 갈아엎고 그러다간 작가생명 끊김.


...이건 사실 양영순의 덴마 휴재를 보면서 생각했던 거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선 카지노 방문  (0) 2014.10.21
이건 내가  (0) 2014.09.07
으리  (0) 2014.06.27
세월호 사고 후에 쓰는 글  (0) 2014.04.25
뉴스는 '보통'을 규정한다.  (0) 2014.04.16
Posted by 노크노크
|

으리

잡담 2014. 6. 27. 15:15
지난해까지 근 십년을 난 한 상사 밑에서 일했다.
내 사회생활의 전부를 함께해온 내 상사는 나를 참 위해줬었고
적어도 지난 세월을 이익보며 살았다고 할 만큼은 편하게 해줬다.

그러다 잡을 바꾼 그는
처음 맡은 프로젝트부터 재수도 참 더럽게 없게 딱 걸려서 난항중이다.
그것도 남 탓도 아니고 자기가 현역(?잡 바꾸기 전)시절에 실수한 똥을 지금 잡 바꾼 자기가 맞고 있다. 인과응보의 대상이 되기엔 훨씬 나쁜 놈들이 많은 세상인데. 안타깝다.

그 구조작업을 내가 하고 있다.
객관적으로는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만뒀을 일을 사람 봐서 다소 무리해서라도 의리로 도와주겠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고
주관적으로는 글쎄... 말은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하지만
속내는 내가 심하게 힘들지 않은 정도까지를 한계선으로 설정해놓았음을 자각하고 있다. 이게 완전히 내 일 내 사업이었다면 난 분명 이보다 더 절박하게 일했을 거다. 그런 절박함이 들지 않는다. 미안하게도.

내가 미적지근한 수준으로 도우려한다는 걸 도움 받는 사람은 더 잘 느끼고 서운하게 여기겠지?
그래서 결과로 말해야한다는 생각이 자꾸든다. 내가 노력하는 정도래봤자 도움 받는 사람 눈에는 미지근하게 보여서 감동되진 않으리라.
그도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볼 터이니 좋은 결과로 갚아줬을때나 고마워하지
결과가 별로면 그간 노력해준 정도는 오히려 서운하게 느끼기 쉬울것 같다.

결과가 반쯤 운에 달린 상황이다.
나는 은혜를 아는 사람일 수 있을까.
실망을 안겨주는 사람으로 남을까.

일이 잘 풀려 줬으면 좋겠다.
적당히 하다 발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슬그머니 들어서
나는 의리를 아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누르고 있다.

--------여기까지 지난 밤.

아침까지만 해도 바뀐 내 직속 상사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그거에 더 이상 노력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이쯤에서 포장하자고 하는 걸
그러자고 하고는 돌아와서 더 해서 결국 풀어냈다.
이게 못하면 내가 곤란해지는 내 일이라고 치면 나는 어느 정도까지 할 것인가,
그 정도가 최선이다 라는 기준으로 해보기로 했더니 풀렸다.

이전 상사에게 자리 물려받은 지금 상사는 겉으로 들리게는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태도로 말하더니
돌아서서 막상 일하는 나한테는 그렇게 확고한 태도가 아니었다. 모션만 보이면 된다는 거겠지.

문제 해결하고나서 이전 상사였던 분에게 희소식을 알려주러 갔다.
결과로 말하게 될거라는 내 짐작대로 처음엔 (아마도 실패소식을 알려주러 온 거라고 짐작해서) 시큼털털한 반응으로 맞이하더니
성공한 결과를 알려주자 악수를 청했다.
내가 이거 해드리려고 고생 많이 했다고 자화자찬했다.

이전 상사가 좋아할 방향으로 결정하는 회의를 좀 있다가 할거다.
내게 힘입어 내려질 이 결정이 종국에 잘못된 것이 되면 그 독은 지금보다 더 크며
도와주려다 더 크게 해 입히는 일이 될 것이란 점이 다소 조심스럽다.
내가 훗날에 독이 되는 결정으로 이끈 게 아니어야 할텐데.

-------

인과응보 당하기엔 나쁜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저런 상황에 처했을까 했지만
이번엔 나로 인해 인과응보가 지켜졌으니
세상의 인과응보가 잘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개개의 나 들이 태만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저 사람이 저런 일 당할 사람이 아닌데 세상이 참 부조리해 라고 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가 저런 일 당할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는 바로 내가 손놓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Posted by 노크노크
|
자식을 낳고나면 아이들 사고에 유난히 이입이 된다.
내가 진정 자신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자식이 잘못되는 본능적 공포가 내가 잘못되는 공포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아이가 사고를 당하는 순간에 대한 아찔함과 그 후를 살아야 하는 공포, 세상 사람의 태반이 부모로서 경험이 있고 이 감정을 공유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참사중에서도 아이들의 사고에 더 쉽게 감정을 이입한다.
아이들의 사고에 무덤덤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 뿐이다.

전원 구조했다는 학교측의 발표를 듣고 아이들 데리러 갔다가 생존자명단 앞에서 무너진 부모들의 이야기가 뉴스에서 나오던 때
그 마음에 이입하기가 괴로워 다른 생각을 했다.
어쩌면 아이들이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구조가 늦어지는 현장의 뉴스가 나올때 그 좌절감을 내게까지 끌고 오기가 싫어 TV를 껐다.
불운한 사고는 어디서나 날 수 있고, 간절한 입장에서 볼땐 구조는 언제나 미흡해보이는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불행한 사고에 나라탓을 하는게 과연 옳은가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근래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수련회, 신환회, 수학여행, 수백의 아이들이 연거퍼 안전사고속에 사망했다.
이를 바라보는 양쪽의 시각은 주간지 제목을 보면 드러난다.
한쪽 끝에는 주간조선이 있다. 제목은 '수학여행 꼭 보내야 하는가.'
다른 한쪽 끝에는 한겨레가 있다. 침몰하는 배를 배경으로 제목은 '이것이 국가인가'
그 사이에 경향같은 곳은 '도탄에 빠진 대한민국' 정도로 사실만으로 절충한다.

혹자는 조선과 한겨레를 비웃고 무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시각차가 문제의 핵심을 관통한다. 문제의 본질이 '이윤에 밀린 안전'에 있기 때문이다.
20년 연한이던 배의 수명을 30년으로 늘린 것도, 선장이하 승무원들을 책임감없는 1년 계약직으로 채운것도, 그들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물탱크를 가볍게 하고 짐을 더 실은 것도 모두 이윤 추구에 안전이 밀린 결과다. 등안시된 안전은 가장 값싼 곳에서부터 이용자를 위협해온다. 이윤 그릇의 밑바닥을 긁어 모으면 피가 묻어난다.
왜 하필 아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는가. 학생 단체손님은 가장 싼 시설을 이용하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어른은 몸이 뻐근해서라도 이용하지 못할 건물과 배를 아이들은 이용한다.

조선이든 한겨레든 여기까지는 같은 것을 보고있다. 그러나 해법이 다르다. 수학여행이 아니었다면 죽은 학생들의 대부분은 서울에서 제주도를 갈때 허름한 배가 아니라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또 학생단체로 움직인 게 아니었다면 눈에 깔려 무너질 창고같은 건물에 머무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새끼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문장을 읽어보자. '왜 그렇게 못살지 않는 우리 아이가 위험한 수학여행을 따라가지 않으면 결석처리를 당해야 하는가.' 수학여행 과연 꼭 가야 하나.
주간조선이 수학여행을 지목하는 건 이런 맥락이다. 심지어 부모들 중엔 이에 동의하는 사람도 제법 있을 것이다. 이 관점하에선 하층민은 위험에 노출되겠지만, 그들은 내 자식이 아니다. 학생단체, 이른바 공공의 이름으로 한데 묶이는 것이 내 아이를 위협한다면 한데 묶이길 강요 받도록 내버려 두면 안되는 거 아니겠는가.

반대편 끝의 '이것이 국가인가'를 보자.
사업자 개인은 이윤 경쟁속에서 생존해야 하고 이들에게 이윤보다 안전을 강요할 주체는 오로지 국가 뿐이다. 국가가 이윤친화적이 될 때 안전이 이윤에 밀리는 것은 개인의 양심으로 커버할 수 있는 레벨의 현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누구의 책임인가?
안전 대신 이윤을 택한 과실은 모두가 함께 누리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으리라. 하지만 이것도 생각해보자.
한국은 21세기에만 두배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삼성은 휴대폰시장에서 무려 애플을 재꼈고 현대차의 도약도 엄청나다. 21세기 한국 기업의 위상은 20세기 한국 기업의 위상에 겨우 두배 정도가 아니다.
이 배경엔 국가의 역량을 대표기업 몇개에 몰아준 시스템이 있다. 그리고 혜택이 공유되었다고 하기엔 '낙수효과란 없었고', '가계부채는 크게 증가'하기만 했다.
국가는 무엇인가.
나라를 대표할 기업 몇몇이 승승장구 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시스템으로서는 기능하면서
안전을 감독하고 사고에서 구조할 책임마저 이토록 소홀히 한다면
도대체 이것이 국가인가.
그게 또 하나의 관점이다.

공공으로 묶인채 당하는 사고를 피하기 위해
공공을 더 낫게 만들것인가
공공을 탈출할것인가.
이 두 시각차는 이 시대의 뜨거운 쟁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차이의 틈새에서
난 아이들의 연이은 안전사고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고교단체수학여행 못가게하고 나면
대학 신입생 오티도 못가게 해야 하고
그지같이 싼곳들로 다니는 대학생 엠티도 못가게 해야한다.
그러다보면 이 방향의 끝에선 결국 자기 계층에 맞는 그룹과 다니는 게 정답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아까 뉴스엔 '값싼 단체 수학여행 위험하니 소수 조별 수학여행을 가라는 지침서가 나왔는데 학교측에서 비용이 너무 들어서 불가하다고 하자 감독기관이 방치했다. 그게 사고 원인이다.' 라는 보도가 나오더라.
Posted by 노크노크
|
내게 신문 혹은 TV의 뉴스는 '보통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상식'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말하자면 '일반인 코스프레의 정석' 정도 되겠다.

꼭 '선풍기 틀어놓고 자면 죽는다'는 허구 담론이 아니더라도 기사는 본래 한번 걸러진 것이고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모든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 자기 분야 기사화 되면 실상과는 엄청 다르게 써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믿는다고. 그럴때면 자기도 자기가 모르는 얘기는 저렇게 믿었던 게 생각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를 믿는 것은 보통사람의 상식적인 행동에 포함된다. 심지어 법적으로도 유효하다.
똑같은 생각을 기사화되기 전에 말할땐 사람들이 좀 이상한 생각으로 듣던 것도 "뉴스에서 봤는데~"로 시작하면 소통이 된다.
매스미디어(라고 하지만 사실은 정보전달을 위한 프로그램에 국한되는 얘기가 되는데)는 사회 일반의 상식을 규정한다.
상식을 규정하는 것은 보통/정상을 규정하는 힘이기에 대단히 강력하다.
가령 '게임중독은 아들도 죽인다'가 지상파 뉴스에 나오는 이상은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두고 망상벽 있다고 할 수 없다.
예전에 몇차례 선풍기 틀어놓고 자서 죽었다는 뉴스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면 사실이야 어쨌든 '선풍기 틀어놓고 자면 죽는다'고 믿는 사람은 보통 사람안에 들어오는 거다.

내가 알기론 '뉴스보다 더 나은 일코의 정석'은 없다.
공신력 있는 매스미디어의 정보전달은 소통을 위한 상식표준으로 동작하며
동시에 선풍기 괴담까지 안가도 '업계의 진실' 같은 기사들만 봐도 종종 드러나듯, 완전한 사실이 아닌 경우가 태반이다.
이건 비전문가로서 중계자 역할을 하는 기자의 한계이고 또한 기사라는 구조의 한계다.
'대중이' 허구를 믿는다는 원인 분석은 사실 책임 떠밀기다.
대중에게 책임을 지우면 편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뿐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
http://ppss.kr/archives/14555
이런 인터뷰 글을 봤습니다.

일본 내적으로 일본 애니에 대한 반성이 불거지는 중인가 봅니다.
얼마 전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라는 건 인간을 관찰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 하는 건데
지금 일본 만화는 인간을 싫어하고 애니만 좋아하는 자들이 그리고 있다.
덕분에 인체 비례도 엉망이고 스토리 마저도 인간을 싫어하는 놈들이 만들다보니 그런 이야기만 나와서
결국 독자도 그런 자들만 남아서 애니계 전체가 방구석 오타쿠 소굴이 되어버렸다"
라는 요지로 혹평하던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저 인터뷰 중에도 그 얘기가 나오네요.
일본 애니가 제작 환경부터 너무 애니만 바라보는 자들이 만드는 것이 되어서 그런지
현실에 착안해서 그리는 게 아니라 이미 한번 정리된 애니를 다시 모방해서 그리는 뻔한 짜집기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는 평이 나오네요.
남의 나라 이야기이고, 또 그래봐야 한국보다는 형편이 훨-씬 나은 상황이긴 하지만 고민되겠어요.
현실로부터의 새로운 착상 없이 기존 데이터 베이스 안에서 짜집기만 하다가 퇴화되어 도태되는 현상이라. 흥미롭습니다.

저도 부인도 일본 애니를 꽤 보던 사람들인데 언젠가부터 볼만한 걸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젠 거의 안보게 되네요.
상당히 긴 시간동안 일본 애니계의 최고봉은 원피스/헌터헌터/나루토가 꼽히는 상태라고 하던데...
다 엇비슷하게 보이고 새로운 감동없이 그게 그거란 느낌만 들어요.
대작이란 현실에 대한 통찰, 말하자면 현실을 관찰해서 새롭게 찾아낸 시그널 패턴을 담아내는 데에서 비롯되는데
이미 한번 정제된 패턴만 리유즈 하다 보니 새로운 시그널 패턴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기존 구현된 애니의 세계가 그것만 들여다 봐도 충분할 정도로 광대해지면서
오히려 그 부작용으로 현실을 보지 않게 되면서
현실에 대한 통찰을 잃어버리고 새로움을 잃어버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월호 사고 후에 쓰는 글  (0) 2014.04.25
뉴스는 '보통'을 규정한다.  (0) 2014.04.16
닥터후를 보면 우리 딸내미랑 노는 내가 떠오른다.  (0) 2014.02.21
심리테스트  (0) 2014.01.10
아버지의 딜레마  (0) 2013.11.27
Posted by 노크노크
|
닥터와 컴패니언의 관계는 부녀간의 데이트를 연상시킨다.
나이들고 현명하며 뭐든지 알고 척척 해결하는 힘을 가진 닥터는
어린아이같은 컴패니언에게 신기하고 경이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낙으로 별 다른 목적이 없는 여행을 한다.
지구 최후의 날에 가볼래? 베수비오 화산이 터지는 날은 어때? 꼭 거기에 가야 할 이유가 있어서 가는 건 아니지만
우리 딸에게 신기한 구경을 시켜주고 싶어서 그러지.
밤에 무서운 귀신울음소리는 알고 보면 무서울 것 하나 없는 바람소리라고 설명해주는 아빠와 함께하듯
닥터와 함께하는 여행은 흥미진진하지만 무서운 길이 아니다.
인사 잘하고 율동만 해도 기특한 어린 딸내미를 둔 아버지로서 보기에 닥터후는
우리 딸이랑 저렇게 놀아야지 하는 로망을 잔뜩 만들어주는
아빠 어디가의 판타지 버전이다.
아빠가 환상적인 이야기를 해줄께. 알고보면 무서울 건 아무 것도 없고, 우리는 신나는 모험을 하게 될거야.

http://blog.naver.com/tadis12
http://blog.naver.com/csr100/110046714402
Posted by 노크노크
|

심리테스트

잡담 2014. 1. 10. 09:55

인터넷에서 이런 심리테스트를 봤다.


한 사람을 만나는데 열번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할 때 몇번을 만나면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다.




그 다음엔 반대로 상대방은 나를 몇번 만나면 파악할 것인지 질문을 한다.




두 답이 서로 다르다면, 왜 그런지 설명해달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내가 남을 파악하는데 걸리는 시간(예를 들면 3회)이 남이 나를 파악하는데 걸리는 시간(가령 5회)보다 짧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물으면 "내가 남을 잘 파악해서" "내가 좀 복잡해서" "내가 잘 드러내지 않아서" 등의 이유를 댄다.

이는 그가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는 상대방을 잘 파악하는데 상대방은 자기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답답함의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한다는 뜻이다. 


마누라에게 이 질문을 해봤다.

상대를 파악하는 회수는? : "열번 만나도 모를 것 같은데"

상대가 파악하는 회수는? : "두번? 난 단순하니까."

내가 "마누라 성격 좋네"하고 의미를 설명해줬더니 마누라가 "우리 남편이랑 살아주잖아"라고 말했다.

난 대답하기 전에 의미까지 읽는 바람에 시험해보지 못했다.

그래도 아마 꽤 자기중심적일거다.



Posted by 노크노크
|

아버지의 딜레마

잡담 2013. 11. 27. 14:06
가족이 길거리 나앉지 않도록 밖에서 돈벌어와서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아버지의 기본 과제다.
부귀영화를 보자는 것도 아니고 남들 다 먹는 밥먹는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생색내냐 하겠지만
막상 해보면 다들 노후준비 막막해하며 답이 없다고 푸념하게 될 정도로 각자에겐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공기의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버지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지켜내서 식구들이 돈 걱정 안하고 자라면
식구들은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먹고 살려고 뿔뿔이 흩어져서 눈치밥 먹으며 살 일 없었고
길거리 나앉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걸 감사하는 대신
아버지의 말투가 짜증난다는 것을 불평한다.

오히려 아버지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을 지키는 데에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을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 빈자리를 느낀다거나
아버지의 불행이 아버지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내 불행으로 이어지는 두려움에 떨어봤다거나
물려받은 것 없이 살겠다고 바둥대자니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거나,
철든 자식들은 하나같이 그런 곳에서 생겨난다.
미션을 성공하면 비난을 받는다. 아버지의 딜레마.

나는 아버지를 싫어한다.
안 친해서 대화하기도 갑갑하고 꼬장꼬장한 성미도 짜증난다.
어쨌거나 싫은 건 싫은거다.

하지만 아버지가 싫을 때면 욕하기 전에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철든 자식이었는가.
아버지가 과중한 짐을 져서 다른데 신경쓰기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다면
나는 그런 아버지의 짐을 줄여드리는데에 최선을 다 했는가.

IMF때 직격 맞아서 아버지 사업이 한번 망했다.
IMF의 직격을 맞은 집 자식이란 사실이 무색하게도 내 생활은 그 전후로 아무 차이가 없었다.
망해도 3년 간다는 기간 동안에 아버지는 다른 살 길을 찾아내셨고
어머니도 마음은 고생했어도 몸은 고생하지 않았으며
나는 아예 그 사실을 몰랐다.
나이가 어릴 때도 아니고 당시 이미 대학생이었는데
대학 학비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채로 졸업했으며
약속도 많은데 과외가기 귀찮다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정도로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살았다.

'다른 살길을 찾는다'라는 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 노느라 바빴던 내 기억엔 '아버지가 사업 잘 안된다고 일을 바꾸시고 나서 한동안 피곤해 했다'라는 기억은 있어도 그런 아버지의 힘듬이 사실은 내 일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 외환위기가 당시 아버지의 사업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사업이 잘 안돼서'가 무슨 의미였는지 알 수 있었고
내가 직업을 갖고 일을 해본 다음에서야 '다른 살 길을 찾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왜 몰랐을까.
어떻게 그걸 모를래야 모를 수가 있었을까.

아버지가 편치 않다는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불편함을 비난으로 배출하기 전에
나는 철든 자식이었는가, 정말 할만큼 했는가를 돌아본다면
누구의 아버지도 그리 쉬운 인생을 살지는 않았음이 보이리라 생각한다.
짐이 무거워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사람의 표정을 나무라기 전에
혹시 그 짐더미에서 내가 꺼내 들어야 마땅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
만약 아버지가 힘드셨을 그때 내가 아버지가 짊어진 짐 중에서 내 짐만이라도 꺼내들며 감사를 표현했더라면
아버지는 아마 많이 기뻐하셨을거다.
...
나도 그때 그러질 않았으니 꼬와도 좀 참아야지 시밤바... 하기를 한두해 지나니까
아버지가 나는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나더러 다른 가족들에게 잘 좀 얘기해 달라며 내 뜻을 얻기 위해 애를 많이 쓰시더라.
이해받지 못한 채로 평생을 시달리다 보면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법이니까.
과거에 나는 할만큼 했는가 하는 생각에 더하여
과연 지금 나는 할 만큼 하고 있는가도 생각해 볼만하다. (*)
...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부장제에 찌든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비난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만약 그 불화가 정말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아버지의 엇나감이 가부장제가 가장에게 짐지운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과 과중한 부담감 때문이라면
자신의 짐을 나눠지며 이제까지만도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아버지는 무너진다.
가부장제가 가장에게 부여하는 가족 부양의 책임감은 사람구실 그 자체나 마찬가지이며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의 자괴감이 큰 만큼 도움을 받았을 때의 고마움도 크기 때문이다.
평생 이해받지 못한 자신을 이해해주는 철든 자식 앞에서
자식이 그렇게 미워하는 그 어떤 아버지는 사실은 자식의 손을 붙들고 울고 싶으신 걸지도 모른다.
가부장제의 폐해는 가장의 권위를 공격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부조리는 싸워서 해소되지 않는다.
...

그런데 내가 우리 아버지랑 불편한 건 가부장제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나랑 똑같기 때문이라서 저걸로 다 되진 않는다.
(확고한 주관+다혈질)*2= #$%^
이대로 가면 우리 딸과의 미래가 보여서 바꾸느라고 바꾸긴 했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바뀐 나를 좋아하지 바뀐 내가 아버지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지.
...
(*) 요즘 우리 아가를 보면 한살바기 아이조차도 사람을 바꾸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닥터후를 보면 우리 딸내미랑 노는 내가 떠오른다.  (0) 2014.02.21
심리테스트  (0) 2014.01.10
미래 식량 자원으로서의 곤충  (1) 2013.10.14
의도된 편협함  (0) 2013.09.23
전업주부의 사교성  (0) 2013.08.28
Posted by 노크노크
|
징그러운 것을 먹으면 야만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람이나 원숭이등 고등한 생물을 먹는 것은 야만적인 일이다.
개나 고양이를 먹는 것이 야만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개와의 의사소통 경험을 통해 개의 지능을 체감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지성은 IQ수치만으로 와닿는 게 아니라 의사소통을 해봐야 체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나 돼지도 알고보면 상당히 지능이 높다.
따라서 관점을 달리해보면 하등 생물인 벌레를 먹는 것은 소나 돼지를 먹는 것보다 덜 야만적인 행위다.
징그러운 것을 먹는다는 점은 전 처리 단계에서 충분히 다듬으면 해결되는 문제다.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제거하는 것이 관건이다.
곤충은 가축에 비해 먹이 대비 효율이 10배이며 영양 구성이 좋은 고단백 식품이고,
또한 고등 동물을 잡아먹는 행위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곤충 식량화의 최대 걸림돌은 혐오감이다.
현재 곤충 요리라고 나오는 것들은 곤충의 원형을 유지한 튀김 같은 형태인데,
일상적으로 잡아먹는 소 돼지도 이빨이나 눈알이나 발톱같은 원형 부분이 나오면 혐오감이 엄청나므로
곤충의 원형을 유지한 튀김을 요리라고 내놓는 건 이색 체험을 겨냥한 엽기쇼라고 보는 편이 좋다.
미래식량으로서라면 곤충의 원형을 없애고 가공하여 참치캔(참치를 톱질할때 나오는 가루를 뭉쳐서 압착해서 만든다고 한다. 가루를 뭉쳐서 만든다는 점에서 응용할 수 있다.) 같은 형태를 만든다면 대중화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공임이 많이 드는 문제도 굼뱅이처럼 굵직한 애벌레 류는 외골격이 없으니까 유리할거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기와 의사소통을 하자 한살도 안된 아이가 얼마나 사람다운 행동을 하는지 놀라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 육식은 마음에 부담이 된다.
고등동물인 가축이 얼마나 영리할지 체감을 모르니까 먹는거지 알면 먹기 힘들거다.
육식에 대한 부담을 더는 차원에서도 곤충을 미래 식량자원으로 삼는다는 건 의미있는 일이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리테스트  (0) 2014.01.10
아버지의 딜레마  (0) 2013.11.27
의도된 편협함  (0) 2013.09.23
전업주부의 사교성  (0) 2013.08.28
의사소통  (0) 2013.08.12
Posted by 노크노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