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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 만화에 패러디 된걸 보고 `중2병이지만 사랑이 하고 싶어` 봤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찾아봤더니 같은 회사에서 만든 거였다.
하루히 시리즈가 현실을 거부하는 여자아이에게 온 세상이 휘둘리는 설정이라면 중2사랑은 불면 날아갈까 여리여리하게 약화된 버전의 하루히 이야기다.
화자격인 남자 주인공은 여기나 저기나 느낌이 비슷하다. 양쪽을 다 이해하며 괴짜 여자아이와 현실 사이의 통역이 되어준다. 괴짜 주인공을 이해하기에 너무 나갈때 커트를 해줄 수도 있고, 그러면서도 괴짜스러운 행동을 이해하여 받아줄 수도 있다. 외부세계와 소통단절을 겪기 마련인 괴짜의 입장에서 이상화된 백마탄 왕자님인 셈이다.

`닝겐주제에.`(`인간주제에.`) 인간보다 높은 체하는 중2병스러움을 대표하는 대사다. 동시에 이는 인간 이해의 열쇠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도 외부 환경의 흐름에 떠밀려 수동적으로 살아가곤한다. 인간의 부조리는, 그 와중에서도 완벽하게 유물적이 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인간은 완벽한 속물이 되면 자아가 죽는 것을 느낀다. 외부 입력에 대한 당연한 출력으로 반응하기를 완벽하게 한다면 그 사이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 주어지는 감각적 쾌락을 쫓고 타인의 가치관(`수입이 좋은 직업`처럼 좋다고 하니까 좋은거겠지 하는 것)에 몸을 맡겨 자아에 대해 생각하기를 아무리 멈추고자 해도 공허감은 남는다.
거부하기 힘든 외부 환경의 격류속에서 자기는 떠밀려가는 나무조각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으나 어찌 해야할지 방법을 모를때, 그것이 어설픈 중2병이 된다. 미약한 닝겐주제에 자유의지를 증명하고자 하는 첫 시도다.

마지막화에서 `남들은 할 수 없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자!`라는 열정적인 연극부 부장을 보며 서브-히로인은 `우에에- 중이병`을 느낀다. 외부 현실 환경의 격류속을 단지 떠내려 가지만은 않겠다는 태도에서 중이병과 공통점을 느끼는 거다.
히어로는 히로인에게 `시시한 현실에 매몰될 것인가? 나와 함께 현실을 바꿔보지 않겠는가!`라고 외친다. 환경의 거센 흐름 속이지만 떠내려가지만 말고 자유의지로 헤엄쳐나가 보고 싶다는 것이 중이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성장중의 첫 시도라서 헤엄치는 바른 방법을 모른다는게 중이병을 그렇게나 꼴사납게 만드는 문제지만 말이다.

중이병이 `닝겐 주제에` 환경의 격류에 저항하려한 서툰 연습이라면
종교의 발생 역시 이와 원인을 함께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세계관은 가치관을 만든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가치관에는 뒷받침할 근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왜 옳은지. 그것이 왜 이익인지. 그것이 왜 가치있는지. 뒷받침할 세계관이 없는 가치관은 허무하게 침식되고, 그 뒤에 남는 것은 세속의 속물적 자아와 자기의 속물성조차 감당못해 느끼는 공허감, 곧 자유의지의 절망과 자아의 죽음뿐이다.
종교는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는 현실과의 접점에서 가치관을 낳는다.
사왕진안과 관리국과 불가시경계선의 설정도 고유한 가치관을 내포한다. 교리학자들에 의해 다듬어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종교도 본질은 같다. 중이병 설정에 비견한다고 해도 종교의 존재를 모독하는 발언인건 아니다. 박태환이 하는 것도 맥주병 몸부림도 현실의 흐름에 익사하지 않기 위한 헤엄이긴 헤엄이라는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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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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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라서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
화창한 어떤 날 귀여운 야구소년들이 뛰노는 공원을 가로질러 PC방 놀러갔던 길이 그랬다.
하루 종일을 예상하며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도서관 가던 길이 그랬다.
일찌감치 밥 먹은 어느 저녁
라떼 마시고 싶다는 마누라 청을 들어주러 집 앞 빵집에 커피와 빵 사러 가던 길이며,
(마누라가 이걸 보면 "어이구 마누라 심부름 가는 게 그렇게 행복했어요? 앞으로 종종 시켜줄께~"라고 할까봐 말 안한다.)
아가 목욕시킨 욕실을 청소하고 문을 열었는데
환한 주말 이른 오후이고 이런 저런 잡일들을 모두 마쳤으며
아기는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가 그랬다.
마음에 드는 시간이 일상일 때
그 시간은 내가 원한 인생이 된다.
그래 나는 이런 생을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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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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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들수록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 라는 생각이 든댄다.
내가 보기엔 이게 유형가치를 상쇄시킬 무형가치의 보유량이 떨어질수록 유형가치의 비중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젊음이 보유한 가능성이라는 무형가치는 나이가 들수록 소실되는데
이 가능성을 실현된 가치로 환전하는 데에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다.
실현된 유형 가치는 돈 지위 권력이고, 실현된 무형 가치라 함은 가족, 사랑, 인격, 현명함, 생의 진리, 그렇게 만들어 낸 인생.

젊어서는 공짜로 보유하고 있었던 가능성이라는 무형가치를 무형으로도 유형으로도 가치 실현하지 못하고 소실한 사람은 '젊어서는 몰랐는데 나이드니 역시 돈이 좋긴 좋다'.
가능성을 유형가치로만 실현한 사람은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돈이 다 뭔지'.
가능성을 무형가치로 실현한 사람은? 글쎄. 어떨까.
유형가치로 밥 굶지 않더라도 불행한 게 인간이라면 무형가치도 적어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을 거란 정도는 분명하지 않을까.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이 순간 내가 소모하는 가능성의 얼마만큼을 실현하고 있는가.
나는 나날이 가난해지고 있는가
나날이 부유해지고 있는가.

아예 남겨먹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려면 20대가 그립지 않을 정도는 되야 하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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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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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되면 자주 안만나던 사람들을 특별히 만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근황을 주고 받는다.

근황을 주고 받는다는게
누군가의 생활이 누군가에겐 부러움이 되는 거라서 자칫하면 자랑 주고받기가 된다.
특히 남들보다 잘나가는 것을 과시하는 데에서 기쁨을 찾는 타입의 사람이 섞여들면 더욱 그렇다.
누군가의 비교우위의 기쁨거리로 소비된 사람이거나
스스로 비교열등감에 자학하는 사람은 타인의 약점을 찾아서 만회하려고 한다.
그게 걱정질이다.

누구는 이런게 걱정, 누구는 저런게 걱정. 말이 걱정이고 사실은 약점찾기.
여기에 시달린 사람들은 생각한다.
"친척들 평소 자주 만나는 사람도 아닌데 꼭 만나야 해?"
"내 약점이라고 걱정질하는 그거 약점 아니라고. 난 결혼안해도 행복하고 딩크여도 행복하다"
"내 취직문제, 내 이혼문제 도와주지도 않을거면서 왜 물어보고 그러냐? 오지랖 떨지마라"

하지만 이런 불만들이 해법을 주지는 않는다.
평소 자주 보는 사람만 만나고 근황 주고 받을 사이의 사람은 다 끊어버리겠다고 하면
자기 과거 다 끊는 사람, 친하다가도 조금만 멀어지면 관계 완전 끊어버리는 매정한 사람이 된다.
(걱정질은 명절 친척의 특징이 아니라 근황 교환하는 정도의 사이 사람들간의 특징이라서 친척만 끊어버리면 된다고 할 게 아니다. 어르신들 동창회 하면 자랑거리 없으면 입을 못 연다.)
남이야 어찌 살든 '오지랖 떨지 말고' 근황 물어보지 않으면 해결된다. 그런데 근황 안 물어보면 만나서 신나게 떠들고 헤어졌는데도 이 친구가 요즘 직업이 뭔지를 모르는 상황이 생긴다. 만난 장소의 숙연한 분위기상 근황을 안 물어본 적이 있는데 만나고 헤어졌는데 근황 모르면 이것도 되게 어색하다.
근황만 물어보고 더 안캐물으면 되지 않느냐고?
근황에 대해 입 떼는 순간 자랑할 사람은 다 자랑하고
"아...'"하는 반응 한 오라기만 봐도 기분 나쁜 사람은 다 기분 나쁘다.

요는 비교우위에서 기쁨을 찾는 부류의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다.
열등감에서 비롯된 자학이나 남 약점찾기도 비교우위의 기쁨에 익숙한 사람이 품은 그림자다.
'내가 더 잘났다'는 맛이 인생의 낙인 사람들이 낙이 없으니 억지로라도 찾는 셈.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먼저 자기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 돌아보는 거다.

'나는 남들 다 자랑질 하고 있을때 혼자 잠자코 있어도 움추러들지 않을 사람인가.'
내가 당하면 악한거고 내가 기분 좋은 건 좋은거라고 하는 건 되게 인간적인 실수이지만
상황 좋을 때 자존심 세우는 맛에 살던 사람이 상황 안 좋으면 역으로 당하는 것도 필연적인 결과다.
나는 내 행복을 비교 우위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자랑거리가 있는 사람이 나를 자랑하고 높여서 비교우위의 즐거움을 챙기면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은 남의 약점을 파내고 깎아내려서 비교우위의 즐거움을 챙긴다.
누구나 약점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 약점을 끌어안고도 살만한 삶인가 괴로운 삶인가가 있을 뿐
누구도 약점없이 완전한 비교우위 위에 살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 약점 찾기를 하고 나면 불행한 사람들만 남는다.
느껴봤을 거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일에도 '걱정'하면서 내 약점을 찾는 대화로 번지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칭찬하되 부러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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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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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은 컴퓨터로 인한 단절감을 극복하는 장점이 있다. 아이들 교육분야별 보드게임 몇 가지

공간감각

젠가(Jenga)
자신의 차례가 되면 차곡차곡 쌓아올린 나무탑에서 블록 한 조각씩을 빼는 게임. 먼저 탑을 무너뜨린 쪽이 패자가 된다. 나무탑이 넘어지지 않도록 조각을 빼면서 공간을 이해하고, 도형에 대한 학습을 할 수 있다.
참여인원- 2명 이상
추천연령- 6세 이상

보물찾기(Labyrinth)
타일을 조합해 가며 즐기는 게임. 타일에는 미로와 갖가지 보물이 그려져 있다. 미로 타일들을 하나씩 연결시키다 같은 보물이 한 미로로 연결되면 원래 놓여 있던 타일을 가져올 수 있다. 단 자신이 타일을 가져와도 미로가 끊어지지 않도록 공간 구성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미로 타일을 가장 많이 가져간 사람이 게임에서 이긴다.
참여인원- 2∼6명
추천연령- 7세 이상


까르까손(Carcassonne)
성, 길, 농장, 수도원이 그려진 다양한 타일을 놓아가며 지형을 만들고 그 위에 추종자를 놓으면 점수를 얻는 게임. 타일을 놓는 방법은 자신의 순서가 되었을 때 뒤집혀 있는 모든 타일 중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놓으면 된다. 타일로 자신이 직접 하나의 마을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공간분배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참여인원- 2∼5명
추천연령- 8세 이상


사고력

셋(Set)
12장의 카드를 테이블에 늘어놓고 정해진 조건에 따른 카드 3장을 먼저 가져간다. 카드는 도형의 모양, 개수, 음영, 색깔에 따라 구분되는데 각각의 특성이 모두 같거나 모두 다르면 SET이 된다. SET을 먼저 외치면 카드 3장은 자신의 것이 된다. 게임이 끝났을 때 가장 많은 카드를 가져간 사람이 승리. 카드의 도형을 관찰하면서 도형감각과 집중력, 관찰력도 발달한다.
참여인원- 2∼6명
추천연령- 8세 이상

클루(Clue)
보디 아저씨가 자신의 저택에서 누군가에게 살인을 당해 범인을 추적해 가는 것이 게임의 줄거리. 미리 사건조합을 해놓아 범인을 정한 뒤 각자 인물 한 명씩을 맡아서 누가 어디서 어떻게 그를 죽였는지 추리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단서 카드를 바탕으로 범인, 범행 장소, 무기를 추측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게임은 진행되며, 가장 먼저 정확하게 맞히는 사람이 게임에서 승리한다.
참여인원- 3∼6명
추천연령- 8세 이상


고슴도치 경주(Igel Argern)
각자 고슴도치 네 마리씩을 가지고 경주를 벌인다. 고슴도치가 경주하는 트랙은 총 6개,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의 트랙에 있는 고슴도치들은 앞으로 한 칸 이동할 수 있다. 자신의 순서에서 옆으로 옮기는 것은 선택사항. 상대방의 고슴도치에 의해 깔리면 자신의 차례가 되도 움직일 수 없다. 자신의 고슴도치 중에서 세 마리가 가장 먼저 결승점을 통과하면 이긴다. 단순할 것 같지만 상대방의 고슴도치를 피해 트랙을 선정하고, 좌우로 움직이는 등 잠시도 한눈팔 수 없는 게임.
참여인원- 2∼6명
추천연령- 8세 이상

피트(Pit)
카드에는 곡물들이 그려져 있고 게임이 시작되면 9장의 카드를 들고 있다가 서로 정신없이 같은 종류, 같은 개수만큼의 카드를 교환해 가면서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곡물을 한 종류로 먼저 만든다. 먼저 완성한 사람이 종을 치면 게임은 끝이 난다.
피트게임을 하게 되면 계속 종소리가 울리고 서로 카드를 빨리 교환하기 위해 분주해지는 재미있고 신나는 게임이다.
참여인원- 3∼6명
추천연령- 7세 이상


창의력

옛날 옛적에(Once upon a time)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섞여 있는 이야기 카드를 배분한다. 이야기 카드를 들고 각자의 순서가 되면 카드 그림에 맞는 멋진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야기를 만드는 도중 자신이 받았던 엔딩 카드로 이야기를 끝내야 이기는 게임.
참여인원- 2명 이상
추천연령- 6세 이상

맘마미아(Mamma Mia)
파인애플, 올리브, 페퍼(고추), 버섯, 살라미(동그란 소시지) 등 다섯 가지 피자 토핑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피자를 만들어내는 게임. 피자 주문서를 내고 이를 만들기 위해 각자 자기 순서에서 현재 밑에 쌓은 재료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가며 피자를 만들어간다. 피자 재료가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을 해야 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피자를 만들면 된다. 피자 재료 5가지와 주문서를 가지고 게임을 하다보면 수학의 조합, 경우의 수에 대한 학습 능력이 길러진다.
참여인원- 2∼5명
추천연령- 10세 이상


수리력

락코(Racko)
60장의 카드에 숫자가 써 있고 게임을 시작할 때 플레이어의 카드꽂이에 10장의 카드를 뒤죽박죽 놓는다. 카드꽂이의 카드들을 새로운 카드로 바꾸면서 10장의 카드를 가장 먼저 순서대로 맞추면 되는 게임. 테이블에는 펼쳐진 카드 한 장과 펼쳐지지 않은 카드더미가 있고 자신의 순서에서 펼쳐진 카드 혹은 펼쳐지지 않은 카드 제일 윗장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자신의 꽂이에 있는 카드 한 장과 바꿀 수 있다.
참여인원- 2∼4명
추천연령- 8세 이상

잊혀진 도시(Lost cities)
게임의 내용은 잊혀진 도시들을 발굴하기 위한 탐사를 떠나는 과정. 투자 카드와 탐사 카드를 잘 사용해 탐사가 성공했을 때는 점수를 얻고 반대로 탐사가 실패하면 점수를 잃는다.
탐사의 성공여부는 숫자카드의 합으로 판명되는데 20점 이상이 되면 20점을 뺀 나머지 점수가 플러스 점수가 되지만 20점 미만일 경우는 마이너스. 예를 들어 어떤 어떤 지역에서 카드 숫자 합이 16이면 탐사 실패로 -4점, 다른 지역에서 카드 숫자 합이 23점이면 탐사 성공으로 +3점을 얻는 것. 게임 종료 후 점수의 합산으로 승자를 정한다.
상황을 잘 판단해서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사용해야 하므로 수리력뿐만 아니라 판단력도 요구된다.
참여인원- 2명
추천연령- 10세 이상


순발력

할리 갈리(Halli Galli)
플레이어가 카드를 똑같이 나눠든 다음 카드를 한 장씩 펼쳐서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과일 카드를 맞추는 게임. 내려놓은 과일 카드들 중에서 한 가지 과일이 5개가 되었을 때 종을 치고 바닥에 내려놓은 카드를 모두 가져갈 수 있다. 게임이 끝나고 카드가 가장 많은 사람이 승자.
참여인원- 2∼6명
추천연령- 6세 이상

팁킥(Tipp-Kick)
작은 축구장이 그려진 보드 위에서 작은 선수와 공 모형을 사용해서 축구 경기를 한다. 선수의 머리 위에는 버튼이 있어서 버튼을 누르면 공을 다리로 찰 수 있게 되어 있다. 공에는 흰색과 검은색 면이 있어서 공이 정지한 상태에 따라 누가 공격할지 정하게 된다.
참여인원- 2명 또는 4명
추천연령- 4세 이상


전략

탤리호(Tally Ho)
두 명이 할 수 있는 게임. 한 사람은 사냥꾼과 나무꾼을, 또 한 사람은 여우와 곰을 맡고 타일을 이용해 게임을 즐긴다. 타일을 뒤집거나 펼쳐진 타일을 이동시키면서 서로를 사냥해서 더 많은 포획물을 얻으면 이기는 게임.
타일을 이동 중 자신의 타일이 먹이사슬 관계에 있는 상대의 타일과 겹쳐지게 되면 잡히거나 잡는 것. 게임에는 정해진 먹이사슬 관계가 있어 여우는 사냥꾼에게 잡히고, 사냥꾼은 곰에게 잡히는 식이다.
참여인원- 2명
추천연령- 8세 이상

달무티(The great dalmuti)
플레이어들이 카드를 나눠 들고 있다 순서에 따라 들고 있는 카드를 내려놓는 게임이다. 카드를 내려놓는 방법은 같은 숫자카드를 한꺼번에 모아 내려놓는 것, 그러나 항상 처음 낸 사람의 카드숫자보다 작은 숫자의 카드를 내려놓아야 한다. 남들보다 먼저 손의 카드를 다 사용하면 다음 게임에서 왕이 되어 제일 먼저 플레이할 자격이 주어지고 세금을 징수받게 된다. 세금이란 계급이 가장 낮은 사람이 카드 중 숫자가 작은 카드 2장을 왕에게 바치는 것으로 왕은 그 카드를 바탕으로 유리한 플레이를 펼쳐나갈 수 있다.
참여인원- 4∼8명
추천연령- 8세 이상

프랭크의 동물원(Frank's zoo)
귀여운 동물들이 그려져 있는 카드게임. 여러 동물들은 다양한 천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낸 카드의 천적이 되는 카드를 내면 그 카드를 손에서 내려놓는다. 가장 먼저 손에 있는 카드를 없애면 이긴다.
참여인원- 4∼7명
추천연령- 10세 이상


프리챌 폐쇄로 인해 옛날에 퍼왔던 글 옮김.
아가야 아빠가 네가 7살 되면 같이 놀려고 10년전에 육아 자료를 모아놨더라. 원 세상에.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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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독재국가 북한과의 대치상태라는 환경으로 인하여
오히려 한국은 사회주의를 비판하기 어려운 나라다.
반공반북의 무조건적인 비난에 비판이 묻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사람은 사회주의를 절대악으로 다루어 무조건 비난한다.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은 무조건적인 비난을 적들의 음해로 듣기 때문에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의 사회주의는 비판받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싫어하건 좋아하건
모두가 자신이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회주의란 좋은 것or나쁜 것에 판단을 이미 내려놓은 상태에서 회의 없이 공격이나 추종의 행동만을 한다.

내가 파악하는 현재 한국의 사회주의의 위상은 이렇다.
자본주의하에서 절실히 필요한 '분배정의'라는 가치를 찾고자 한 시도, 그래서 사회주의는 분배정의를 중시하는 진보의 마음의 고향같은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나는 팽팽했던 이번 대선을 판가름한 변수를 사회주의에서 찾는다.

이번 대선에서 시대적 과제가 신자유주의 탈출이라는 데에는 세 후보 캠프 모두에서 합의가 된 사항이다.
세 후보는 표면적으로 대동소이한 대안을 들고 나왔고 그건 모두 복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차이는 분명했다.

박근혜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다.
'잘살아보세의 신화를 다시 한번 이루어낸다' : 잘살아보세는 박정희의 권한&책임 집중형 리더십을 통한 경제 개발로 난관을 극복하는 거다.
'줄푸세를 잘 하면 경제 민주화' : 대선토론에서 한 말이다. 줄푸세는 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운다의 약어로서 신자유주의의 영혼같은 말이다. (개인적으로 굉장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을 이보다 쉽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말을 하는 박근혜는 '신자유주의를 똑바로 해보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경제 민주화가 신자유주의를 탈출하기 위한 노력 임을 생각할 때 저 말은 표면적으로는 말이 안된다.
하지만 박근혜가 '신자유주의를 똑바로 수행하면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의미가 통한다.
국민이 박근혜에게 기대하는 것은 '박정희 리더십'이다. 박근혜 본인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제가 전문가들과 의견을 모아서 알아서 잘 하겠다'이다. 즉 요약하면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어떻게 탈출하시겠습니까 라는 시대적 질문에 박근혜는 '모든 권한과 책임을 위정자가 짊어지고 신자유주의를 똑바로 운용함으로써 해결하겠다'라고 대답한 것과 같다. 그녀는 무한책임 타입의 리더로서 소환되었다.
비록 복지 공약이 있긴 하지만, 박근혜의 지지자들은 박근혜가 공약을 산술적으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들은 '상황 편치 않으면 공약이야 안지킬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할지언정 '결과만 잘살게 되면 되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은 민주당을 장악한 친노세력의 대표로서 출마했다.
친노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패배한 현재로선 전반적으로 상당히 불공정한) 다양한 평가들이 병존하지만, 나는 친노는 이념에 충실한 중도 좌익이라고 판단한다.
민주당 비노 세력이 호남 지역주의 세력으로서 이념에 충실하지 못하여 중도 좌익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위치였는데 비해
친노는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이념에 충실한 중도 좌익 세력으로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안철수의 단일화 토론을 보면서 나는 문재인이 완급조절하는 사회주의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사회주의자인 이정희와 이상향은 같은데 완급에서만 차이가 나는 '중도' 좌익.
이는 한국의 좌익이 전통적으로 사회주의에 이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념에 충실한 중도 좌익인 친노는 결과적으로 '완급 조정했지만 역시 사회주의자'들이 되는 것이다.
수정자본주의자 안철수와, 완급조정해도 이상향은 사회주의자 친노의 차이는 문-안 둘 다 보편적 복지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난다.
안철수의 복지는 '자본주의하에서 선의롭게 행동하던 플레이어들이 리스크로 인해 한순간에 몰락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망'을 의미했다. 안전망이란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게 위험하면 아래 안전망을 깔아줄테니 두려움 없이 자본주의로 가라'라고 말하는 셈이다.
창업 실패로 재기 불능이 되지 않도록 하는 복지라거나,
혹은 자본주의에 충실한 구성원인 중산층이 중병 등으로 한순간에 몰락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 등이다.
이에 비해 문재인의 복지는 취지가 달랐다.
가령 의료비 최대 100만원 상한선 제도를 포함하여 공약이 모두 사회주의적 이상을 점진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으로서 '자본주의의 길은 어쩔 수 없이 가고 있긴 하지만 점진적으로 안가야 하는 길이다'라고 말하는 셈이었다.
안철수가 추구한 것이 현실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였다면
문재인이 추구한 것은 현실 구현 가능한 사회주의로 보였다.

친노 민주당이 이념에 충실한 집단임은 안철수와 문재인의 말을 봐도 드러난다.
안철수는 처음에는 자신의 정치적 주장은 '거대한 이념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었지만 문재인과 만났다가 멀어지면서는 '이념적으로 차이가 있어서 함께 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건 내겐 안철수가 자기의 주장이 (사회가 이미 공유하고 있는 자본주의 이념을 전제로 한 주장이라서) 이념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전제가 다른 이념에 충실한) 친노를 만나서 '이념적으로 다르다'고 느끼게 된 것으로 들린다.
또한 문재인 자신도 '우리 친노가 아직 이념적인 공중전을 하고 있고 생활 밀착적인 지상전을 하고 있지 않다'는 요지의 반성을 했다.
그럼 그들의 이념이 무엇인가 하면, 역시 중도 좌익이다. 중도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요구되는 수준의 자본주의를 수행하지만(노통 시절엔 신자유주의가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세계적 조류였다), 이상향을 좌익에 두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옳은 것으로서 추종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탈출을 신자유주의(를 똑바로 하는 것)에서 찾는 박근혜.
신자유주의 탈출을 사회주의에서 찾는 문재인.
그리고 대선 결과는 민주당의 패배였다.
나는 이 결과를 민주주의에 의한 사회주의 거부라고 판단한다.
중도 좌익의 사회주의적 이상에 대해 민주주의의 반응은
고연령층에선 투표율 상승으로,
저연령층에선 막판 접전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낮은 호응으로 나타났다.
나는 이것이 대단히 민주주의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정확히는 민주주의가 차용하고 있는 다원주의적 중용론은) 사회의 선택을 논리적 생각이 아니라 다수 구성원 개개인의 경험에 맡기는 제도다.
비록 사회주의가 한번 크게 실패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 사회주의는 이론적으로 완전히 반박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거대한 자원이 투입된 사회주의 실험이 모두 실패했다는 결과를 경험했으나,
아직까지도 사회주의가 잘못된 이론이라는 게 증명된 것은 아니다.
이론에 의존한다면 사회주의는 아직도 선택 받을 여지가 있는 이념이다.
그러나 경험에 의존한다면 사회주의는 선택받지 못한다.
온갖 부정적 이슈와 이전 정권의 과오등 도저히 야권이 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은 이론적으로는 옳을 수도 있는 사회주의를 구성원의 경험에 의존해 거부하는 결과를 냈다. (중도좌익 이념에 충실하는 친노 필패론이라는 결과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 점이 대단히 민주주의적이다.
(안철수 지지자의 1/3이 새누리당을 찍겠다고 한 여론조사를 보건데
나는 안철수를 거쳐 새누리당으로 넘어간 표심이 1.5% 보다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만약 야권이 신자유주의 탈출의 대안을 안철수의 수정자본주의로 내놓았다면
박근혜를 찍은 50만명 이상의 마음이 2번을 찍도록 돌아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다.
이건 질만하게 행동해서 진 안티 박근혜 연합이
이길만하게 행동했다면 이길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표차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땅의 표밭은 민주주의를 계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국민들로 매워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는 어떻게 될까?
박근혜는 성공적일 수 있을까?
개발과 줄푸세를 정치철학으로 삼는 그녀가 신자유주의 탈출을 요구받는 시대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탈출해야만 하는 난국에서
재벌에게 천국같았던 신자유주의를 철폐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다고들 말하는 탈출로를 향해
재벌을 한 편에 두고 가야하는 박근혜는
과연 어떤 정치를 보여줄 것인가.
대통령 박근혜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잘살아보세의 무한 책임을 지는 타입의 리더로서 소환된 그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선 어느 순간 재벌에게 시선을 돌려야 함을 가능한 빨리 알아차리길 희망한다. 그녀가 그러지 못한다면 못하는대로 미래는 희망적일 것이다.

야권은 친노가 연이은 패배로 욕먹어도 민주당에서 친노빼면 호남 지역결탁세력이 당권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손학규를 위시한 비호남 비노 세력은 민주당내 당권을 잡기엔 당장은 약해보이기 때문이다.
손학규를 중심으로 하는 비호남 비노 비사회주의 세력이
신자유주의 탈출을 (안철수식의) 수정자본주의에서 찾는 안철수와 손잡고 길을 찾고자 하길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리를 해보겠다.

사회주의(socialism)는 본래 자본주의의 병폐를 '생산수단의 공유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특징을 갖는 19세기 2백여개의 이념에 대한 통칭이다. 이들은 개인주의의 반대말로서 '사회주의 socialism'라는 말을 사용했다. 즉 분배정의의 가치를 소망한 주장인 건 맞는데, 그 해법이 '자본 국유'라는게 특징인 주장들이다.
맑시즘은 그 200여개의 사회주의중 하나였고, 맑시즘이 뜨면서 여타 사회주의들과 차별성을 갖기 위해 스스로를 공산주의라고 부르며 '세상은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의 이상향에 이른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여타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하고 자기들의 사회주의는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함으로써 차별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이후 맑시즘에 의한 의미재정리를 거쳐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는 맑시즘 안에서의 의미와 맑시즘 밖에서의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 구체적 의미가 무엇이 되었든, 맑시즘 안의 '사회주의'는 결국 공산주의에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면에서 자본의 공유화를 필수과제로 여기고, 맑시즘 밖의 '사회주의'는 본래 의미 자체가 자본을 개인주의에 맡기면 안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자본의 공유화를 필수과제로 여긴다.
즉 '사회주의자'는 그가 맑시즘 안의 해석으로 사회주의자이건/맑시즘 밖의 해석으로 사회주의자이건
자본의 공유화를 궁극적 이상으로 하는 사람이다.

이후 맑시즘은 개인 자본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실험에 참여한 모든 국가가 실패하는 사태를 맞이한다.
이론적으로는 아직까지도 그 실패가 필연인지 완벽히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실제로 수행된 실험이 모두 실패했을 뿐이다.
이후 자본주의 치하에서 분배정의는 날로 간절해져갔으나
사회주의를 능가하는 대안은 아직 확보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실패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애매한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거둘 수 없었다.
'자본을 완벽하게 국유하는 것이 한번에 이루기 어려운 이상향이라면
자본의 움직임을 사회가 적극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과도기로서 적합하지 않을까?
공산주의에 이르기 전 단계인 이것은 사회주의라고 부를만하지 않은가?'
이런 방식의 단어 의미 변용을 거쳐
본래 자본의 공유화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수정자본주의의 영역에까지 발을 확장한다.
이제 사회주의자의 눈에는 수정자본주의의 성과는 모두 사회주의의 성과로 해석 가능해진다.
사회주의에 다가간 덕분에 (사실은 수정자본주의지만)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아지더라라는 인식이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는 절실히 필요한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 진보의 마음의 고향같은 지위를 얻는다.

사회주의가 분배정의의 확보를 꿈꾸며 등장한 이념들인 건 분명하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항상 '자본의 국유화가 궁극적 해법'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사유자본철폐를 주장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지지해야 하는 이념이며, 진보가 보수의 대안이 되기 위해선 사회주의를 털어내야 한다.
내 개인의 관점에서 사회주의는 이론을 떠나 현실의 실험에서 반증된 이론이기 때문이고,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사회주의는 야권이 질 수 없는 그 모든 상황 요소에도 불구하고 지게 만든 필패의 요인이기 때문이다.
진보가 추구하는 것은 분배정의이지 반드시 사회주의 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분배정의를 위한 대안은 사회주의를 버리고도 안철수가 주장한 바 있는 수정자본주의가 제시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사실, 그때가 되면 편가르기 용 '진보'라는 이름 자체가 의미를 잃을 것이다.

- 이전에 단편 단편 썼던 것들을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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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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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2차토론에서 문재인이 '시대정신이 바뀌었다'라는 말을 할 때
이정희가 '노동자들이 죽어서 바뀐 겁니다'라고 말했다.
사회주의자다운 말이다.
설령 사회주의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혹은 아예 사회주의적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중에서도,
'음지에서 고생하는 노동자들이 투쟁하다 죽어갔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어 나가는 것이다'라는 말에는 그럭저럭 동의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 관점은 이런 것이다.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총대매고 강력하게 항의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고, 앞장서서 싸우지 않고 있는 여타 노동자(월급받는 모든 근로자)들은 그 수혜를 앉아서 보고 있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내 관점은 이렇다.
경제활동은 자본과 노동이 함께 일하는 것이고,
(짧은 사이클에서) 이윤 성과도 (긴 사이클에서) 시스템적인 진화도 그 경제활동이 낳는 결과이다.
이윤 성과가 자본만의 공이 아닌 것처럼
시스템적 진화도 노동만의 공일 수 없다.
노동자건 자본가건 우리는 모두 온 세상에 뿌려진 빛 알갱이들이고
흩뿌려진 개인들이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건드리는 것으로서
어떤 이념이 적용된 실제 세상의 전체 형상이 밝혀진다.
수렁에 떨어진 빛 알갱이는 수렁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지에 떨어진 빛 알갱이는 양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체 형상이 밝혀진 세상엔 장점이 있고 트러블이 있다.
-제국주의가 적용된 세상은 그 끝에 전쟁으로 인한 파국이라는 트러블이 나면서 변경되었다.
-사회주의가 적용된 세상은 그 끝에 자본주의 대비 효율성 완패라는 트러블이 나면서 변경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적용된 세상은 그 끝에 세계 금융 위기라는 트러블이 나면서 변경되었다.
세상의 변화는 이렇게 밝혀진 전체 형상에 대한 조망으로부터 도출된다.

항의하며 죽어간 노동자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라는 관점과 다른 점은,
첫째로 '앉아서 수혜를 본 사람들'이라는 부채의식의 여부 차이이고
둘째로 해야할 과제가 투쟁이냐 입증이냐의 차이다.
그리고 사실 여부를 따져보자.
과연 신자유주의의 철회라는 시대정신의 변화는
노동자의 죽음 앞에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는 반성으로인해 야기 되었는가,
아니면 신자유주의는 투자 이익에 편중된 배분을 낳고 그로 인해 금융 가치만 고평가된 끝에 리만브라더스 파산 사태가 일어나면서 신자유주의의 전체 형상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인지로 인해 야기 되었는가.

세상은 갑을로 나뉘지만, 동시에 영원한 갑은 없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시스템 버그가 작은 더 합리적인 사회를 희망하는 이유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시스템 버그가 커질수록 전체적으로 피로해지는 사회대비 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을이 되는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 변화 의지를 갖는데
어디서 갑이던 사람이 누군가에겐 을이고 어떤 때엔 병이 된다. 언제나 갑인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갑을 관계의 유동적인 면은 시스템 버그를 개선할 의지에 동조할 사람을 늘린다.
그런데 투쟁은 갑을을 구분하여 고정한다.
투쟁으로 인해 갑을의 구분이 명료해질수록 을은 한정되고 개선의지는 동조를 잃는다. 자기 일로 인식되지 않으니까.
철탑위 칼바람을 맞으며 죽어가는 노동자의 투쟁이 얼마만큼의 사회 개선의지의 동조를 얻어냈는지
아니면 잃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 해석은 실제와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대기업 월급쟁이 노동자는 어느모로 보나 진짜 노동자지만 노동 운동을 자신을 위한 사회개선운동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사회 변화 동력은 투쟁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조망에서 나오고, 해야할 일은 투쟁이 아니라 입증이다.
이건 모든 사회 이념, 기업, 팀, 모든 시스템에 해당한다.

* 덧 > 나꼼수의 흥망도 이 관점에서 파악된다. '입증'의 스탠스를 가지고 정치력화 할 정도로 흥했다가, '투쟁'의 스탠스를 가짐과 동시에 열혈신도 모임이 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흥했던 시절의 강력한 위력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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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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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50일 기념촬영 일정을 앞두고 뭔가 바빴던 금요일
안철수가 대선후보를 사퇴했다.

난 안철수에게서 두가지 의의와 하나의 가치관을 본다.
정치적 의의 : 기존 양당의 대안. 정당의 내부 지배 구조 개편을 골자로 한다.
경제적 의의 : 신자유주의 탈출의 대안. 기업의 내부 지배 구조 개편을 골자로 한다.
그리고 이 두가지 대안은 공통적으로 다음의 가치관을 기초로 지어졌다.
'성공을 목적으로 추구하지 말고 가치창조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

정치적 의의 :
정당이 무슨 짓을 하든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고정 지지층이 늘어나면
국회의원에겐 국민의 눈치보다 공천권을 쥔 정당 수뇌의 눈치가 더 무섭게 된다.
그럼 정치는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 정치가가 민의를 따르지 않더라도 정당 내부 권력에 충실하여
공천을 따내면 / 경선에 승리하면
그가 권력을 쥐게 되는 구조다.
양당의 조직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에 '이쪽이 싫어도 저쪽은 더 싫은' 구도가 형성되고,
그럼 거대정당 두개가 국민을 상대로 '네가 가봐야 어딜 가겠느냐'는 배짱을 부릴 수 있기까지 한다.
이때부턴 무늬만 민주주의지 거대 정당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들이 국가를 사유화하는 형국이 펼쳐진다.
이때의 정당은 마치 (주주중심주의의) 주식회사가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 이윤을 추구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직원과 고객등의 여타 이해관계자를 소외시키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정당이 당내 '대주주' 입지를 갖는 자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조직이 되어 국민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국민의 체감은 이렇게 된다.
'내가 좋아서 찍을 사람이 없다. 그런데 저 쪽 당은 더 밉다'
이 현상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제3세력에게 호감을 갖는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

안정적인 상황이라면 제3세력이 등장해봤자 듣보잡으로 자연히 도태될 것이다.
하지만 거대정당이, 거대정당의 수뇌가 민심을 거스르고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면 거대정당에서 떨어져나온 지지가 신규 제3세력에 모일 것이다.
그런데 거대정당이 장악한 권력으로 신규세력의 싹을 미연에 자른다면
그 정치는 민주주의로 향하는 자정의 힘을 잃는다.
거대정당은 국민의 눈치를 별로 보지 않아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분리됨으로써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부수는 정치 구조가 된다.

민의를 거스르는 거대정당의 지배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국민이 거대정당의 지배를 뚫고 정치하려고 들면 세가지 결과가 나온다.
1. 또라이로 분류해서 정치참여의 자유가 있는 나라인 척 전시하려고 노터치하거나
2. 문국현처럼 조지거나 (*1)
3. 안철수처럼 조지려고 하다가 실패해서 거대정당이 위협받거나.
거대정당을 이기는 지지율을 갖는 개인이라는 건 솔직히 말도 안되는 먼치킨 갖다 꽂은 격이고 그 자체로 기적이다.
일반적으로는 1,2번이다. 대한민국은 반상이 지엄한 나라다.

이 문제상황을 만드는 '구태'는 두가지다. (익숙한 모습은 아무거나 구태라고 하면 안된다.)
하나. 정치가가 국민의 눈치보다 당 수뇌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정당의 지배구조. 정치가의 당 내부에서의 입지가 국가 권력에 반영되는것을 돕는 장치들. 안철수에 의해 크게 문제시 되었던 정당의 여론조사에 조직력 동원은 당내 입지가 국가 권력에 반영되는 도구이므로 철폐 대상이다.
둘. 제3세력으로 참정하면 네가티브하고 어떻게든 조지는 것.

안철수가 모색했던 새 정치도 이 두가지를 타겟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경제적 의의 :
나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힘겨루기' 구도로 설명하는 기존의 정치관에 반대한다.
그건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입지를 굳혀주는 텃밭 가르기일 뿐이다.
이런 해석이 현실을 곡해하는 것은 경제 이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보의 경제 이념은 무엇인가? 극좌 진보 정당이 주장하듯 사회주의인가?
그 말은 이 시대가 수십년전에 반증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건가? 그게 진보라고?
이 시대는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사회주의를 향하는 건 퇴보다.
사회주의의 대척점에는 신자유주의가 있다. 그럼 신자유주의는 보수의 이념인가?
한국에 신자유주의가 도입된 시기는 '좌파 정부'라는 김대중 정권때였다.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권때도 신자유주의이긴 마찬가지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인식으로 노무현은 좌우로 두들겨 맞았다.
끼워맞추기로 만들어진 보수VS진보라는 관념은 오해를 양산한다.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하자.
사회주의라고 하면 흔히는 노동을 우대하는 걸 생각하는데 잘못된 이해고,
사회주의의 핵심포인트는 투자의 향방을 정하고 지대 받아먹을 존재가 되는 자본가의 위치를 개인에게 허락하지 않는 거다.
그런데 그 포인트를 고수한 모든 사회주의는 궤멸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수많은 국가들이 이 이념을 도입했지만 현재 단 한 국가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게 완전히 밀려서 멸종당했다.
사회주의는 끝난 실험이다. 현실에 존속 불가능한 이상향 판정을 받았다. (*3)
'자본가의 위치를 개인에게 맡기되 노동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는 자'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개인 자본가의 존재를 타협하면 그건 엄연히 수정자본주의다.
보통 좌파라고 하면 '자본가의 위치는 개인에게 허락하는게 현실적이지만 노동의 위상은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분배정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좌파로 분류한다. 그중에서도 '좌파의 이념'을 공부할만큼 열성적인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공부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개인자본가의 존재를 타협하는 세상에서 사회주의 이론은 아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 현실적인 배경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연구하는 건 수정자본주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 사회주의 공부하면 수정자본주의를 절로 알게 될까? 그건 완전 판단미스다.
수정자본주의는 사회주의보다 심오하다. 더 이상 현실실험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주장만 하는 이념적 경제학하고 현실에서 사이드이펙트들을 경험해가며 엮는 경제학하고는 심도가 천지차이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를 아무리 연구해도 현실 적용할 수 있는 쓸만한 수정자본주의 안나온다.
사회주의적 단편 요소와 수정자본주의적 분배정의 유기체는 널빤지와 대저택의 차이만큼이나 멀다.

김대중 노무현은 신자유주의정부였다.
신자유주의가 시장을 방임하면 시장이 효율을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그 과정에서 노동을 자본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흘러서 투자할 수 있도록 돈 꿔주는 금융의 가치만 올라가면서 세상이 좌파의 이상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 왜 좌파정부라는 김대중시절부터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었을까 넌센스인데, 그건 사실 좌파 우파 문제로 해석할 일은 아니다. 그 시대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관이 주도하던 경제에서 IMF 터지고 효율을 극대화하는게 무조건 급했다. 국제적으로도 소련의 계획경제 몰락 이후 신자유주의가 첨단을 걷던 시기였다. 그땐 누가 대권잡았어도 신자유주의 했을 거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노무현도 그랬던 거고.
당시를 좌우 진영대결의 관점에서 해석한 사람들은 (김대중은 너무 화해하느라 우파적으로 행동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노무현은 좌파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 되었으면서 우파처럼 행동한다고 배신자 보듯 욕했다.
사회주의의 대안은 현실에 운용 불가능한데 불가능한 대안만 쥔채로 주장을 하니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알력다툼 형태가 되었다. 양 '진영' 모두에게 외면받은 노무현은 역대 최고의 표차로 이명박에게 대권을 넘겨주게 되었고, 비지니스 프렌들리 이명박월드에 비하면 노무현 정권이 그나마 신자유주의 조류를 막아왔던 거라는 걸 알게 된 건 모든 게 다 지난 후의 일이었다.

지금 문재인이 아무리 노무현의 후예라고 해도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당선된다 해도 노무현처럼 신자유주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리만브라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경제공황은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전 세계에 보여줬고 이젠 신자유주의 탈출이 전 세계적 과제인 시기다. 덕분에 그 박근혜 조차 복지국가론을 들먹이는 시대가 되었다. 즉 신자유주의 해야하는 시대배경적 강제성이 없어졌고 수정자본주의 해야한다는 강제성은 생기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누가 해도 신자유주의 탈출하고 수정자본주의 하긴 할 시대다.
그런데 하긴 하는데 똑바로 못할 것 같다.

내가 안철수를 지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신자유주의를 탈출할 대안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점 말이다.
좌익의 사회주의는 현실 존속 가능한 대안이 되지 못하고, 우익의 신자유주의는 탈출해야할 대상이다.
즉 좌도 우도 근본적 해결책을 모르고 있다.
근본적 대안이 될 안철수의 수정자본주의는 이해관계자 중심주의이다.
'성공을 목적으로 추구하지 말고 가치창조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대원칙을 기업에 적용하여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다'라는 절대명제를 '기업은 가치창조를 하는 조직이다'로 갈아치우도록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을 요체로 한다. (이해관계자 중심주의의 상세와 현실성에 대해서는 길어지므로 http://longlive.tistory.com/m/post/view/id/117)

하긴 하는데 똑바로 못할 공산이 큰 이 시점에서 깊이있는 수정자본주의자는 더욱 많이 필요해진다. 그래야 올바른 지지와 비판을 할 수 있으니까. 이 시점에서 여전히 좌우 진영 논리를 사수하고 신자유주의vs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지지나 비판을 한다면 그 결과는 선의에서 비롯된 배드엔딩이 될 것이다.

안철수는 왜 사퇴했을까?
내가 보수vs진보의 대결구도를 엉터리로 끼워맞춰진 텃밭 다툼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안철수도 그러했다면
사퇴의 이유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정권 심판은 사유화된 거대정당권력vs국민의 구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수직적 구도가 새누리당vs민주당 ('보수vs진보')의 수평구도로 이루어지면 그건 심판이 아니다.
합의할 수 없는 것(정당의 조직력 동원(*4))을 철폐시키는 데에 실패하고 합의후 승복하게 되면
'민주당에 의한 새누리당의 심판'을 도와주게 된다.
심판 아닌 심판을 도와줄 수 없다는 판단으로 사퇴했다고 이해한다.

(*1)
과거 문국현도 이런 제3세력에 해당했다.
제3세력을 차근차근 키워나가려고 시도했던 문국현의 경우를 보자.
문국현이 대선에 나왔을 때 그가 대통령이 될 걸 기대한 사람은 없다.
문국현 자신도 그 대선에서 대통령 될 생각으로 나온 건 아니다. 단지 정치 행보를 한걸음 뗀 것 뿐이다.
난 그때 문국현을 지지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당시는 가카께서 요정화하시기 전이라서 정치에 관심이 없던 때라 아직 지지했다고 말하기도 뭐하다. 그저 마음에 들었다는 것 뿐이다. (그땐 투표도 안하고 놀러갔다)
그래도 이후 행보에 대해 기대가 컸다. 사내 탁아소를 강조하는 공약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시대의 요구를 앞질러가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대 정당의 거수기가 아닌 정치행보를 시작한 대가로 그는 미리 미리 싹을 자르는 취지에서 감옥으로 끌려갔고, 범죄자가 되어 이후 출마할 자격을 박탈당했다.
국민이 정치에 손을 댔다는 이유 외에 문국현이 감옥갈 이유가 뭘까?
아래 내용 참조하자.
-------------
서울지방법원 중앙지법의 창조한국당 문국현대표의 선거법위반 관련 재판의 판결내용 정리.

1.몇차례의 심리과정을 통해 애초에 검찰이 문국현대표를 기소했던 '댓가성 공천헌금'이 아니라는 점을 재판부가 인정하여 관련혐의는 무죄로 판결함.

2.정치자금법 위반과 관련하여 문국현대표가 정치자금 수수사실이 없었으므로 무죄로 판결함.

3.이한정이 입금했던 6억원의 돈은 창조한국당이 발행한 '당사랑채권'이라는 갚아야할 당의 부채이지 공천의 댓가로 상납한 돈이 아니라는 점도 재판부는 인정함.

4.다만 당채 6억원에 대한 (!!!선관위의 자문을 통과한!!!) 연이자 1%가 기존 상거래상의 통상이자보다 낮은 금리이므로 금리차에 따른 '재산상 이득'이 창조한국당에 생겼던 점이 유죄이다.

5.창조한국당은 처벌대상인 '자연인'이 아닌 바 해당 이득을 취득케 한 책임자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당대표로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던 문국현대표에게 포괄적인 책임이 있으므로 유죄이다. 누가 봐도 올바른 판결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네이버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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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걸 권력이 싹을 자른거라고 본다. 정주영을 조진 그 전통을 이어받아서 정주영보다 쉬운 문국현을 가볍게 밟아준거다. 양당 담합의 구조에 변화를 주는 제3세력의 존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정치를 바꾸기 위해 정당 외부에서 제3세력을 구축할 게 아니라 거대 정당에 들어가서 내부에서부터 개혁을 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 있을 수 있다.
거대 정당에서 당의 의견에 무조건 충성하여 머리수를 채워주는 국회의원을 비꼬아서 '손드는 기계', 거수기라고 부른다.
'초선 의원에게 2선의원은 부모님입니다. 3선의원은 하나님입니다.' 이 와중에 끼어서 말 잘 들으면서 수십년 기다리면 될까? 현재의 정당 지배구조에선 이럴 가능성이 없다.
당에게 충성을 바칠테니 자리를 달라는 공천 경쟁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뭐 좀 바꿔 보겠다고 당 말 안들으면 바로 공천안주면 팽이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는 팔에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 올랐다가
감히 인간주제에 하늘을 날아오른데에 대한 신의 벌을 받아
태양열에 날개가 녹아내려 바다로 추락해 죽는다.
국민의 참정은 이카루스의 날개여선 안된다.
거대 정당을 넘는 지지율을 갖는 한 개인이란 기적은 이런 시대의 산물이다.
이런 시대 아니었으면 안철수가 잘났다고 해서 이런 지지를 받지 못한다.
문국현으로 안되니까 안철수가 나왔다.
안철수로 안되면 또 다른 사람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미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지지가 개인에게 쏠렸던 이 시점에서
이보다 더 강력한 개인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인가는 의문이다.

(*2)
난 안철수가 정치개혁에 있어서도 경제와 마찬가지 방식을 취하려고 한 것으로 해석한다.
'성공을 목표로 하지 말고 가치창조를 목표로 하라, 성공은 가치 창조의 부산물로 따라오는 것이다' 라는 대원칙을 기업에 적용하여 기업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이 경제 개혁이고, 같은 대원칙을 정당에 적용하여 정당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이 정치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안철수의 정치혁신안은
- 중앙당 권한 축소.
- 국회의원 수 줄이기
- 의원 권한 확대
- 국고 보조금 축소
중앙당(당 수뇌부) 권한 축소하고,
중앙당이 들고 있는 돈줄인 국고 보조금 축소하고,
의원 권한 확대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굳이 설명 안해도 들어맞는다.
그럼 의원 수 줄이기는 뭔가 하면, 100명 줄여놓으면 현직 국회의원들이 당수 눈치만 봐서는 다음 기용 받을 자리가 불안해지는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당 조직없이 대통령이 된 상황을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국회의원 수가 적으면 정치가 잘 된다는게 아니라, 수가 '줄어든다'는 '변화의 상황'이 핵심이다.
국회의원들에게 당지도부 보다 국민 눈치 많이 볼 건수를 만들어 주고나서 이후의 일은 차차 발맞춰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즉 후속조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포석을 목적으로 한 안이다.
이게 최선이냐,라고 하면 안철수 자신도 자기가 정치 초보라는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가에 정치 무경험자, 단지 똑똑한 안철수가 정치로 고점 저점 다 찍고 다닌 '경험 많고 똑똑한' 유시민보다 더 나은 정치개혁안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걸 자신도 알고 있기에, 단지 무소속 대통령으로서 후속조치를 할 때에 용이하게 한다는 효과를 목적한 것이다.
이걸 유시민은 정치 혐오라고 해석 하지만 부적절해 보인다.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양당정치에 대한 혐오겠지. 기업으로 치면 주주중심주의 기업에 대한 탈출의지이지 경영 자체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는 것처럼.)
(국회의원이 정당 '대주주들'의 눈치보다 국민 눈치를 보게 하려는) 원칙에 부합하는 방향하에서 기존 정치 정당 지배 구조를 재정립하려면 먼저 기존 정당 지배구조를 흔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비록 이것만 가지고는, 즉 후속조치가 없이는, 유시민 말마따나 '나중에 다 되살아납니다'가 될지언정 말이다.

(*3)
좌파의 관점은 사회주의는 독재자 개인에 의해 우연히 실패한 것이라서 사회주의 이념 자체는 효용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내 입장은
수많은 나라들이 시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단 한 케이스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전멸한 실험결과를 앞에 두고
'난 이 실험이 실패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연이 작용한 것 같다. 다시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4)
조직력 동원 문제는 이미 통진당 패권주의 사태에서도 문제가 되었지만, 막으려면 두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일단 조직력 동원이라는 게 어디까지가 괜찮은 것인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 어디까지가 건전한 참여 독려일까?
또한 그 방식에 있어선 어떤 형태인가 하면 '여론 조사의 샘플 안으로 민주당 지지자를 대거 밀어넣는' 방식이다. 이 해석을 기초로 대안을 찾아보면 민주당 지지자 민주당 비지지자 나눠서 하자는 안이 나온다.
결과 합칠때는 민주당 지지율 대로 비례 적용해서 합치면 되고, 그러면 민주당이 당원 모아서 여론 조사결과에 민주당 지지자 대거 밀어 넣어서 여론 조사 결과 바꾸는 효과를 낮출 수 있으며, 만약에 민주당 당원에게 민주당 비지지자로 대답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그건 부정한 거라는 기준이 명확해진다. 요즘은 비밀로 지령 내리긴 어려우니까 부정한 지령의 기준만 명확해도 지령내리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 안은 민주당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어쩌면 당연히 예상되는 민주당의 이같은 저항을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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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가치있게 살고자 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일까?
가치있는 인생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하거나 세상의 활동에서 한발짝 물러난 삶을 살곤 한다.
그런데 세상을 벗어난 삶은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없지 않은가.
앞서 이념론에서 얘기했듯,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론을 찾아서 열심히 생각하기도 하고 좌충우돌해서 이론의 모순을 몸으로 찾아내기도 해왔다.
세상은 그렇게 요동치면서도 우상향으로 길을 찾아왔다.
이 흐름에서 벗어난 사람의 활동은 더 나은 세상의 방법론을 찾아내는 데에는 아무 기여를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살려서 세상을 등지지 않고 살아가고자 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있는 삶일까?
난 이 문제의식의 한 예시답안을 안철수에게서 찾았다.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더 가치있는 활동을 찾아 계속해서 새롭게 도전했다는 점,
그 도전의 기대값을 생각할 때 경제적 이익이나 감각적 쾌락으로 보기엔 나올 수 없는 선택들이었다는 점.
그가 본 현실의 문제를 나도 보았고
그가 제시한 더 나은 현실을 위한 해답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나았다는 점.
성공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가치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모토와 그에 부합하는 활동들로 말미암아
'흔적을 남기는 삶'을 추구한다는 안철수의 말은
이러한 '더 나은 방법론을 찾아가는 세상의 흐름에 기여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나는 이해한다.

이상은 반도에 26%를 차지하는 흔한 안빠의 팬심 간증이다.
까기에 익숙한 지지자들이 박빠인지 달빠인지 모르겠으나 까는 정성으로 찬양을 해보자.
지지자들이 너무 네거티브에 익숙한 것 같다.
'왜 누구를 싫어하는지'가 아닌 지지하는지를 주제로 해서
박빠든 달빠든 팬심간증을 교환하는 상생하는 빠돌이가 되자.
싫어하는 이유는 기권할 이유는 되도 투표할 이유는 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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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비친 세상은 이런 모양새다.

인간의 세계관은 가치관을 형성한다.
그리고 형성된 가치관은 인간 사회의 구조가 '현재 어떠하다'는 인식과 '미래는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를 낳는다.
이렇게 가치관은 현재 인식과 미래 지향 사이에서 이념, 곧 '~주의(~ism)'를 형성한다.
인간이 만드는 사회 시스템도 세계관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에
이념은 세계관에 대한 인간의 피드백이 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류 역사에 걸쳐 뜯어고쳐온 방법론이 이념이다.

달리 말하면 ~주의(~ism)는 세상을 이해하는 이론이다.
세상이란 본래 어떤 것이며(세계관)
따라서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더 가치를 갖는지(가치관)
현재 인간 사회는 어느 부분이 가치관에 위배되는 틀린 상태이므로
더 나은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사회 구조의 현상태 해석과 가치관에 부합하는 이상향, 이를 합쳐서 시스템 지향)가 이념에 녹아있다.

세상에 대한 완벽한 이론은 아직 없었다.
완벽하지 못한 이론을 따르는 인간 사회는 언제나 오류를 누적했고
누적된 오류가 이론을 지속 불가능하게 하는 파국에 이르면
그 이론(이념)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그 시행착오를 밑거름으로 새로운 이론이 발전해왔다.
왕이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던가, 규율로 다스려야 한다던가 하는
세부적으로 다양한 주의들을 내포하던 각종 왕정이 틀린 이론이 되어 무너졌다.
그리고 제국주의나 맑시즘, 수정맑시즘등도 역시 무너지며 틀린 이론으로 판명되었다.
현재 세계가 따르는 이론은 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카테고리하에 있는 이념들이다.

현재의 인간 사회에도 문제는 있다.
그럼 현재 세상이 따르고 있는 이론은 어떤 한계를 마주하고 있을까?
현재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세부적으로 다양한 자본주의 중에서도 신자유주의에 해당한다.
세계적으로는 : 소련의 계획 경제가 망한 사건을 기점으로,
한국에서는 : IMF를 기점으로,
'정부는 시장에 관여하지 말고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자'는 이론이 '옳은 이론'의 위치를 지켜왔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그 이론의 오류는 크게 누적된 상태다.
그 결과 내가 보는 현재 세상의 최대 이슈는 투자소득과 근로소득간의 형평성 문제다.
한마디로 재산이냐, 재주냐.

성공의 성과는 재산투자와 재주투입의 협동작품이고
이 성과에 누가 얼마만큼의 권리를 가져야 하느냐는 이념적 문제다.
어떤 분배가 정의로운지에 대하여 그동안 다양한 이론이 있어왔다.
아무 중재없이 내버려두자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투자자의 힘은 비대해지고
재주와 노동을 파는 사람들의 위상은 세월이 갈수록 더 추락하는 결과가 나오는 게 관찰되었다.
투자자, 즉 자본가의 역할을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에게 맡겨선 안된다는 이론이 나왔다.
개인은 재주와 노동을 투입하는 역할만을 맡고 자본을 투자하는 역할은 공공이 맡겠다는 이론이었다. 즉 공산주의다.
이론은 대단히 그럴듯했기 때문에 세계의 절반이 이 실험에 참여했으나
현실에 적용해봤더니 공산주의 계획경제는 효율이 낮아서 자생력이 없었다.

공공이 시장을 내버려둬도 안되고
시장을 장악해도 안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새로운 방안이 필요해진다.
현재는 이에 대한 방안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는 변화의 시기다.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한국에 국한해도 그렇다.
세계적으로는 2008년 이후로 이전까지의 이론대로 지속 불가능하다는 판정이 내려졌고
한국에서는 이명박 정권까지가 그 이론을 따라왔다.
한국에도 정부가 국가 경제를 주도하여 재계에 명령을 하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벗어나자 정부가 시장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옳다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정부가 기업을 방임하면 안된다는 시기가 왔다.
이게 과거로 회귀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정부가 시장을 방임하지 않되 전과 달리 어떻게 관여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다.

현재 내가 지지하는 것은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다. (관련 키워드는 stockholder, stakeholder.)
내가 이해한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는 다음과 같다.
기업은 투자자뿐 아니라 근로자, 고객, 공급자, 유관단체, 경영자가 상호 작용을 하면서 성과를 내는 자본주의의 중요한 경제 주체다.
그런데 현재 기업은 투자자의 눈치만을 살피는 주주중심주의로 운영되고 있다.
그 결과 기업은 투자자의 이익만 추구하게 되며
이는 성과 배분에 있어 투자소득이 근로소득에 우선시되는 현상을 가속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기업의 지배구조가 경영자로 하여금 주주의 눈치만을 살피게 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경영자의 자리가 주주 입김에 걸린 지배구조하에서 경영자는 이해관계자가 아니라 주주의 이익만을 대변할 수 밖에 없다.
경영자가 주주의 눈치뿐만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의 눈치도 보게 되도록 기업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문제는 자생력이다.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로 경영되는 기업이 주주중심주의로 경영되는 기업에 비하여 효율성을 갖고 자생력을 가져야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는 현실에 지속가능해진다.
이에 대해 기업의 성공은 이윤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라 가치를 창조한 결과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강조된다.
기업이란 가치를 창조하는 일을 혼자하려니 힘이 부족해서 여럿이 모여서 하는 것이며,
기업의 여러 활동을 이해관계자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공통적으로 이익이 되는 부분은 가치를 창조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통 분모는 가치 창조이므로
이해관계자 전반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경영자는 그에 맞추어 활동을 하게 된다.
가치창조를 목적으로 경영되는 기업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경영되는 기업의 틈에서 자생력을 갖을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이해관계자중심주의가 현실에 지속 가능한 것인지 여부에 대한 대답이 된다.

과연 이윤추구가 가치창조에 비해 더 유리할까?
목적은 그에 맞추어 수단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익을 목적으로 한 빵집은 빵을 만드는 것보다는 이익을 위하여 원가 절감하고 이상한 재료를 써서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게 되지만
가치를 목적으로 한 빵집은 맛있는 빵을 만들어 팔았을 뿐인데 그 결과로서 이익을 가져온다. *(1)
또, 전문 경영인의 경영은 오너 경영에 비해 더 전문적이고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가치 창조가 아닌 단기적 이윤 추구를 운영의 최고 목표로 삼게 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여왔다.
오너의 경영이 덜 전문적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이익에 덜 연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에 장점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단, 기업의 활동에 대해선 오너 경영이 전문경영 보다 장점을 갖는다지만 성과 배분에 있어서는 주주 눈치를 살피는 경영자 보다도 더 강력하게 오너가 자기 이익을 챙기게 되어서 자본주의 모순 해결에는 대안이 안된다.)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는 '거대한 기업을 구축하고 이끄는 것은 항상 이해관계자를 위해 경영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기업이 동작하는데에 관여하는 이해관계자 그룹중에서 오로지 한 그룹(투자자)만을 위해 경영해야 한다는 관념이 틀린 이론이라는 주의다.
이게 내가 이해한, 내가 지지하는 이념이다.
'기업은 이해관계자 중심주의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수정자본주의의 한 갈래이다.

현재 한국에서 이해관계자중심주의를 말하는 사람으로는 안철수가 있다.
이 이념은 안철수의 생각에 중요한 관념으로서 설명되었으며,
정책은 과정이기 때문에 공약집인 안철수의 약속에서는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나
재벌 대응 정책들이 특히 이 이념의 점진적인 접근을 위한 정책으로 보인다.
(재벌 지배구조에 대한 통제 강화
- 집중투표제 의무화 : 소액주주들의 지지로 뽑힌 대표자가 기업 이사로 활동하여 기업 경영이 대주주의 눈치만을 보며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자체 견제 방안.
- 다중 대표소송제 도입 : 역시 대주주에 대해 소액주주에 의한 기업내 자체 견제 방안.
즉 투자자 중에서도 오로지 대주주에 의해서 기업이 지배되는 구조에 대한 제동이며
주주중심주의에서 이해관계자중심주의로 이동하는 점진적 접근으로 읽힘.
- 연기금 주주권 행사 강화 : 국가가 기업에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미. 그런데 그 국가의 수장이 이해관계자 중심주의에 입각한 기업 지배구조 개혁을 말하는 형태.)
그래서 나는 안철수를 지지한다.


*(1) 이 비유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다음처럼 된다.
기업은 '이윤추구를 해야한다'는 구조적 강제력을 받아서 만약 이를 거스른다면 경영자가 쫓겨나지만
'바람직한 이윤추구'나 '정당한 이윤추구', '장기적 이윤추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상이 나서 경영자가 내쫓기는 구조적 압력을 받지는 않는다.
기업이 구조적으로 이윤추구의 압력을 받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치창조'에 대해서 압력을 받게 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이해관계자 중심주의의 목적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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