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22025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PD/NL

노크 노트/사회관2 2012. 5. 16. 16:54

통진당 파동으로 NL 문제가 전면에 떠올랐다. 


80년대 운동권 두 주축은 NL과 PD다.

빈익빈 부익부를 비롯한 경제 사회 문제가 보여서 사회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때

'자본주의가 문제다' 라고 하면 PD(노동 운동 계열)

'자본주의를 하는 미국이 문제다' 라고 하면 NL(반미제국주의 계열)


한국에서 PD를 하려면 '자본주의'를 부정해야 하므로 더 고생길.-> 소수파

NL의 적은 바다 건너에 있으므로 그냥 저냥 온건할 여지가 있음.-> 다수파


자본주의의 대안이 사회주의국가라고 하던 PD는 사회주의 국가가 현실에서 몰락을 하는 걸 보면서 타격 받았다. 반증될 가능성이 있는 이론이었기 때문에 반증의 충격이 먹혀들었고, PD는 거의 해체되었다. 자본주의의 대안이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면 새로운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모드에 들어갔다. 진중권은 유학가고 김문수는 보수파로 돌아서고. 

NL은 미국이 세계를 착취하는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라 반미제국주의를 실현한 북한의 현실이 엉망이라는 반증사례가 작용하지 않았다. (NL은 학술상 신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나...)


한편 저 반대편에는 

공산주의가 문제인지 

공산주의 하는 북한이 문제인지

가려내는 걸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동의하고 공감을 하면서도, 그 문제의식이 사회주의를 낳았다는 걸 거론하면 그 순간 악마가 된다. 수정자본주의 따위는 빨갱이의 속임수라고 인식하는 듯하다.

NL이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그들 신앙의 대상인 '북한 싫어요' 하면 폭발하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거부감을 갖는 데에는 NL의 역할이 매우 컸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NL의 활동을 본 사람은 '문제의식에 동의했더니 대안이 북한이라고?'라는 거부감을 갖게 된 거다. 
구 민주노동당에서 이어진 통합진보당의 당권파가 NL의 본체이며 
경선 부정과 폭력 사태를 통해 이들이 반민주 세력이란 것이 폭넓게 알려졌다. 
단기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차라리 잘됐다. 

NL의 이론도 PD의 이론도 이미 그들의 이론이 미흡하다는 게 증명된 시대이니 한물 간 이론이지만, 대안을 내더라도 PD 계열이 낼 수 있지 NL은 존재의미가 없다. 

Posted by 노크노크
|

소개팅에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때(즉 꼬실때)크게 강조되는 것 하나가 '말'이다. 

왜 그럴까?

그건 '대화'가 남녀가 함께 경험 할 수 있는 행위중 소개팅에서 가용한 몇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 입장에서 남자랑 함께 뭘 하는 경험이 어떤게 있을까?

클럽이라면 춤을 함께 추겠고

여자가 운동을 좋아하면 스포츠를 함께 하거나 

PC게임을 좋아하는 여자라면 게임을 할 수도 있을거다.

그리고 섹스도 할거다.

이것들은 모두 '함께 하는 경험'이고 대화-즉 말빨-의 효과는 이런 행위들과 카테고리가 같다. 

유독 대화가 강조되는 이유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스포츠나 게임을 하는게 어렵기 때문이고, 

또 여자들끼리 모여서 놀때에도 수다 떠는게 주요 놀이거리일 정도로 말이 여자에게 가장 일반적인 채널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채널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 영향력은 말을 아주 잘 하는 것 만큼이나 효과적이다.


다른 채널로는 뭐가 있을까? 

가령 노래가 있다.

남자가 노래 불러주는 것이 흔한 로망이라면 

노래를 불러주는 것 대신 노래를 함께 하는 것은 더 효과적이다.

함께 부를 수 있는 쉬운 듀엣곡(보조 맞춰 주는 정도여도 된다)을 알려주고 함께 연습해서 화음 맞추면 그 효과는 남자 혼자서 매우 잘 불러준 노래보다도 크다. 

효과가 큰 것은 듀엣 또한 '함께 한' 것이기 때문이며, 

여자 입장에선 대화보다 낯선 경험이기 때문에 체감 효과는 더 크다. 

생소하면서도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은 굉장하게 보이기 마련이므로.


이는 단지 이성을 꼬시는 데에만 응용되진 않는다.

아이와 함께 놀 때에도 응용가능하다.

성별이 다른 두 사람이 겹치는 지점이 적은 만큼이나 세대가 다른 두 사람도 겹치는 지점이 적으므로 그 타개책으로 간단한 노래 함께 부르기는 효과적일 것이다. 


'노크 노트 > 학습/교육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읽어주기  (1) 2012.10.17
딸이 좋아할듯한 같이 놀아줄 거리들  (2) 2012.09.25
자식이란 오묘하다  (0) 2012.09.24
자녀교육법  (0) 2012.05.30
영어공부법  (3) 2012.04.15
Posted by 노크노크
|

여자사회는 여자에게도 피곤하다. 끊임없이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하고 음모와 암투가 무기화된다. 

그럼 남자사회는 괜찮냐하면, 암컷사회도 수컷사회도 인간이 덜되면 정글이긴 마찬가지인데 양상이 다르다.


남자의 사회가 정글이 되는 요인은 아주 단순하다. 

힘의 논리.

강함/약함만 아는 수컷들이 옳음/그름을 따지는 인간의 탈을 쓰고 살려니까 피곤한거다. 

누가 쎈지 한번 가르면 긴 시간 갈등 끝나는 걸 왜 건건이 왈가왈부 입씨름을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세계다.

여자의 사회는 좋고/싫은 것만 아는 암컷들이 옳고/그름을 따지는 인간으로 살려니까 복잡하고 피곤한거고.


여자의 사회는 다 함께 피곤하다. 여자가 인간이 덜되면 자기 감정상의 호오랑 선악을 구분 못하는 게 두드러진다.

남자의 사회는 피착취자가 집중적으로 죽어난다. 남자가 인간이 덜되면 나보다 강하다 약하다랑 선악을 구분 못하는 게 두드러진다. 

남자 사회에 섞인 여자는 각종 폭력만 근절되면 편안하다. (아니면 피곤한 정도가 아니라 죽어난다.)

여자 사회에 섞인 남자는 폭력은 법으로 거의 근절되고 암투는 근절 안되기 때문에 손발 묶인채로 시달려서 미친듯이 피곤하다. 

수컷 사회에서는 약자(수컷 사회의 표현을 차용하면, '좆밥') 주제에 자기가 옳고 내가 틀리다고 따지는 상황이 존재하는 걸 이해못한다. (좆밥이 왜 개기지? 내가 만만해서 그러나? 라고 생각한다.) 이게 현실 사회에서도 발견되는데, 사회적 강자와 약자가 법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건 수컷 사회에선 이해 못할 논리다. 

가령 김승연 한화 회장이 일반인이랑 같은 죄 지으면 같은 처벌 받는 세상을 원한다는 건 수컷 사회와는 동떨어진 얘기다. 좆밥 주제에 강한 수컷과 같은 처우를 원할 수 없는 세상, 그게 수컷 사회의 키포인트다.

수컷 사회의 또 다른 부작용은 이기기 위한 경쟁과열로 쌍방 손실이 생긴다는 거다.

이겨야 한다->이기기 위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이긴 쪽은 이겨서 좋은데 이기기 위한 비용 지불 때문에 망하고 진 쪽은 져서 망한다는 딜레마.

싸워서 이기자니 혼자선 무슨 짓을 해도 무리짓는 깡패 앞에 답 없고 

이기기 위해 무리를 짓고 쌈질 포메이션으로 살자니 인생이 말린다. 

이기려고 가방에 흉기 넣고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

맨손으로 싸우자니 칼한테 못당하고 흉기들고 다니자니 인생이 말린다.

이는 법 없는 국제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국제관계에선 지면 뼈도 안남기고 발리고 

안 지자니 밥값보다 무기값이 더 들면서 군비확장 경쟁이 과열된다. 

내가 보기엔 이 딜레마 속에서 이리 갔다가 망하고 저리 갔다가 망하면서 시행착오를 반복해온게 인류의 역사다.


남자의 흔한 오류 : 강/약으로 판단하자(특징)->피착취자의 고통 극심, 폭력 경쟁 과열로 쌍방손실(부작용)->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자가 해법.(대안)

여자의 흔한 오류 : 호/오로 판단하자 ->맨날 서로 남의 시선 눈치보고, 음해와 암투가 무기화->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자가 해법.

'좆밥이 개기네? -> 내가 만만한가?(내가 틀렸나?가 아니라)' 라고 생각하는게 수컷의 사고 오류 양상.

'쟤 뭐야?->쟤 이상해.(내가 싫어하면->저 사람이 틀린거다)' 라고 생각하는게 암컷의 사고 오류 양상.

수컷사회의 맹점을 암컷사회로 포용하자는 주장은 틀리다.

양측 오류는 동일 방안으로 개선 가능하다.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위의 성향들은 아직도 현실에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지향점은 분명하다.  

'노크 노트 > 연애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의 결정  (0) 2012.08.16
결혼 잘한 자랑  (0) 2012.08.14
What women want  (2) 2012.04.13
남의 연애담 -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연대생이 되어 있었다  (0) 2012.04.08
인품  (1) 2011.09.28
Posted by 노크노크
|
종교의 존재의의는 효율성에 있다.
인문학과 종교는 같은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인데, 인문학은 아래로부터 쌓아올라가는 방식이고 종교는 위에서부터 하달되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가르침(교육)이 존재하는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다. 가르침 없이 연구해서 도달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가르침을 행한다.
종교는 가르침이고, 따라서 그 존재의의는 효율성을 위함이다.
쌓아올라온 앎은 탐구자가 이미 알려진 지식을 이해할 때 올바른 이해를 할 역량이 보장되지만, 하달되는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의 역량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올바른 가르침 조차도 하달과정에서의 오해는 발생하곤 하며 이는 정밀성을 갉아먹는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효율성을 위해 정밀성을 희생하는 구조다.

이를 배경으로 하는 가치판단은 상반될 수 있다.
효율성이 존재의의이므로 효율성을 강화해야한다는 기독교식 가치 판단도 가능할 것이며
'(어차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배우는 자들끼리) 불교의 법을 다투지 말라'는 불교식 가치판단도 가능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종교가 정밀성에 한계를 가지며 효율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내용은 전제해 둠이 옳다.
Posted by 노크노크
|
초월적가치추구란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다. 
더 지혜로워지기 위해 연구 공부하거나 도덕적 무지나 나약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거나 예술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추구하거나 참선등을 통해 성스러운 초월지를 추구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인생에 무엇이 진정 가치있는가를 찾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가 제시하는 초월적 가치는 무엇인가?

4성제 12연기 6바라밀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사성제 - 생은 본래 고통이라 그 내부적인 가치만으로는 해법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이므로 이는 초월적 가치 추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십이연기 - 십이연기는 결국 무명을 타파하는 것, 즉 무언가 모르고 있는데 이를 알게 되는게 해법이라는 문제의식에 이른다. 앎을 얻는 것이 해법이라는 인식이다.
육바라밀 - 앞부분 다섯 바라밀들은 마지막의 반야바라밀을 위한 과정이고 반야바라밀은 나의 인식을 상위자아로 확장하는 것이다. 이는 만유재신론적 상위자아의 관점에서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을 간략화하면 불교가 가르치는 초월적 가치는 제한된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상위자아로의 인식 확장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삼법인 -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에 기초해 파악해보면
제행무상 : 세상만물이 영속적이지 않다.
제법무아 : 당장 체감하여 가지고 있는 '나'라는 감각에 집착치 말라.
일체개고 열반적정 : 생은 근본적으로 고통이며 그 안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은 허무할 뿐이니 수행을 통해 발전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이 해법이라는 인식을 갖을 것. 이는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라는 의미가 됨.
불교가 가르치는 초월적 가치를 제한된 나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의미로 파악할 경우 삼법인의 가르침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라는 관념자체가 착각에 불과하다는 해석등도 가능한데, 어느 쪽이 옳건간에 현재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아인식을 극복하는 것을 불교의 문제의식으로 봄에는 다르지 않다.)
'최종적으로는 우주전체도 나와 다르지 않음으로 포괄하게 될 상위자아로의 인식확장'이 불교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게 내 해석이다.


'노크 노트 > 불교 해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략하게 쓴 mindfulness 의의  (0) 2023.02.09
명상 2. mindfulness의 의의  (0) 2023.02.07
위빠사나 명상 : 재정리  (0) 2014.03.03
불교 해석 노트 전체  (0) 2012.03.23
Posted by 노크노크
|

초인이 되어라. 

아니면 초인의 전조가 되어라.

초인은 벼락같은 것이다. 벼락이 치기 전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바람은 벼락의 전조다. 초인을 부르는 비바람이 되어라. 

초월적 가치를 잃은 인간은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의 여신을 세운다. 삶과 건강을 통해 이룰 초월적인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건강을 목적으로서 추앙한다.

그리고 건강을 위한 건강에 매달려 먹고 싸는 인생을 살며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일어났다.


난 모태무교다. 종교는 없지만 천주교랑 불교는 뭔가 경건해보이고 개신교 신도가 세뇌스러울 경우에 한해서는 맞장구쳐주기 짜증나고 누가(주로 개신교) 종교 얘기 꺼내면 왠만함 그런 얘긴 하지 말지 싶은, 딱 그 정도의 배경에서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아직도 그러고 산다. 

그래도 난 스스로 종교적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초월적인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면 그 사람은 종교적인 인간이 될 소질이 있다. 

그것은 예술과도 맞닿아 있고 도덕과도, 혹은 학문적 진리추구와도 맞닿아 있다. 초월적가치는 진선미성중에 성스러움에만 국한되는게 아니며 그중 성스러움 조차도 꼭 인격신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종교적 가치의 긍정적인 면에 있어 중요한 건 어떤 신을 섬기느냐가 아니다. 

종교의 '어떤 신을 섬기느냐'로 구분되는 측면은 긍정적인 영향을 낳은 적이 거의 없다.

종교의 긍정적인 면모를 낳는 것은 초월적 가치를 긍정하느냐 여부다.

종교는 가르침을 이야기에 담아 내놓는다.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의 이야기를 내면화 하면 가상의 기록이 독자의 인지 내적으로는 살아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종교의 이야기는 신자에게 살아있는 이야기가 됨으로써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살아있는 상태로 전달한다. 종교의 이야기는 가르침을 소화흡수 가능한 형태로 조리해 놓은 포장이다.

어떤 신을 믿느냐는 것은 종교의 '이야기'이다.

초월적인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는 방향성은 종교의 '가르침'이다. 

종교의 본질이 가르침에 있기에, 가르침을 습득했다면 이야기는 중요한게 아니다.

(이 주장은 기독교도는 동의 안할듯하고 불교도는 동의할 듯 하다. 교리상 기독교는 '이야기'도 믿음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고 불교는 이야기는 다 가르치려고 사용한 방편이라고 하므로.)


과학이 신이 된 시대다. 

사람들에겐 이기는 편에 붙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 이기는 편 우리편, 지지정당은 집권여당. 

근래 영역을 확장해온 과학은 분명 이기는 편 이었다. 

그런데 이기는 편에 붙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과학이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과학은 대중에게 새로운 신앙이 되었다. 

이 과학숭배신앙은 묘한 병폐를 낳고 있다. 

과학을 신으로 숭배하면 그 신이 사실이라고 알려주는 이야기는 신화에 해당하는데

종교였다면 그 이야기 안에 가르침이 담겨져 있을 것이나 

과학은 종교가 아닌지라 이야기를 까보면 안에 가르침이 담겨있지 않다. 

그래서 과학을 숭배한 사람들은 '없다'를 가르침으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즉 삶에 있어 초월적 가치의 상실이다. 

그들은 그렇게 니체가 얘기했던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을 여신으로 세우고 행복을 발명했다 주장하는 경멸적 인간들'이 되어간다. 

이런 징후는 지식의 끝자락에서 더 높이 올라가려고 애쓰는 과학자들에게서 발견되진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데 정신이 팔려있다는 면에서 초월적 가치를 추구한다. 

혼란은 단편적 지식으로 세계관의 전체를 조망하려 하는 추종자들에게 일어난다.

건강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더 나은 가치를 갖는 삶이 되는가?

그들에겐 이에 대한 답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월적 가치란 없는 것이 답'이라는 가르침을 과학 신화가 담고 있다는 믿음이 그 신앙의 교리다. 그들의 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걸 추종자들은 믿지 않는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문제일 수가 없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는 이과의 교과목중 하나인 학문이지만, 사실은 과학은 '어떻게 하면 틀리지 않은 지식을 효율적으로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의 이름이다. 지식을 축적함에 있어 틀린 지식이 섞여들 가능성을 너무 배척하면 탄탄하되 쌓아 올라가는 효율성에 한계가 오고, 쌓는 속도에 집착하면 잘못된 지식이 섞여든다. 그 정확성과 효율성 사이에서 합당한 지점을 합의한 방법론의 이름이 과학이다. 

연역된 지식은 논리적으로 참이다. 귀납적 지식은 언제라도 반례가 등장해 뒤집힐 수 있기 때문에 연역된 지식만이 참이라는 합리주의자의 주장에 대응하여 '인간의 논리 이성 체계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미친자는 자기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모른다) 경험된 것이 참이다'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가 등장했다.

(합리주의자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선 경험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사상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말로 문맥에 맞춰 번역하면 사변지상주의자라고 하는게 더 맞지 않나 싶다.

경험주의에서 '경험도 귀납적이므로 뒤집힐 수 있다' 쪽으로 가면 회의주의 불가지론자가 된다.)

경험된 모든 것이 참은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참인 명제를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합의점을 찾은 '경험주의의 일부'가 우리가 아는 과학이다. 이 방법론은 성공적으로 모태인 철학의 위상을 넘어섰다.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검증된 명제에 대해 참이라고 하는 것이 물리학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지식을 쌓는 속도 효율성의 한계에 마주친다.

화학원소 주기율표는 원자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하는지 해명되기 전부터 관측되었다.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연역되지 않았으므로 화학은 과학으로 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과학은 비록 연역적으로 도출되지는 않았더라도 독립적인 실험으로 재연이 가능한 명제까지는 참으로 치기로 한다. 이제까지 재연되던 경험이 갑자기 다음 실험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틀어지면서 틀린 지식을 쌓게 될 위험은 무시할만큼 작은 것이라는 까닭이다.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확인되거나, 실험으로 재연가능한 지식을 참으로 여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과학의 방법론이다. 

사회과학은 독립적인 실험이 어렵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 방법론을 따르기는 어렵다. 지식 축적의 효율성을 위해 다소 널럴하게나마 가능한 한계내에서 과학 방법론을 참조하여 쌓아올라가겠다는 것이 사회과학의 방법이다.

지식축적을 탑에 비유하면 물리학은 지상에서 시작한 1층, 화학이나 생물학등은 허공중에서 시작한 2층, 가정위에 통계적 방법을 이용하는 사회과학 역시 허공중에서 시작한 3층, 가정위에 사변적으로 탐구하는 인문학은 더 널럴한 4층, 종교는 5층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 화학의 주춧돌은 물리학으로부터 연역증명되었고 서로 미시-거시의 관계로 합치되었다. 이제 화학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온 셈이다.

다른 학문간의 합치는 아직이다.


다른 모든 지식이 종국에는 1층에서 시작한 과학으로 환원될 것이라는 주장이 통일과학운동이며 환원주의라고도 한다. 과학의 방법론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이었는지(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론이었다)가 검증된 지금, 모든 앎을 과학 방법론에 의지하여 풀어나가자는 주장은 지지를 받을만 하다. 3층의 사회과학까지는 제한적이나마 과학 방법론에 의존코자 하고 있으므로, 4~5층의 종교나 철학이 과학 방법론을 이용하지 않고자 한다면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그것이다.

세계관의 세부를 사변적으로 밝혀내고자 접근한 시도는 고대부터 여럿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실패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세상이 원소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원소가 공기라는 둥 땅물불바람이라는둥 하고 있을때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뭘 모르는 지를 알라.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며 그러한 사변적 시도가 성공할 수 없는 것임을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는 저녁 노을은 왜 붉고 저녁해는 왜 크게 보이는데도 추운지 하는 질문에 '네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여라. 그것이 아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석가모니는 다른 종교가가 세계관의 지식에 대해 불교는 어떻게 가르치냐는 열가지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는 (십무기) 대답을 했다.

이 대답들의 맥락은 모두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관의 지식에 대해 사변적으로 접근하지 말라.'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그것은 과학의 할 일이다.'

석가모니/공자/소크라테스등 종교/철학가들이 객관적 지식 축적은 과학의 할일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은 그 외적인 일을 한다는 말인 셈이다. 객관적 지식 축적 이외의 일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가치관 이라고 생각한다. 가치관은 삶의 방향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가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 앞서 종교가 '이야기' 속에 담아 내놓은 '가르침'이란 이것이라는 게 내 해석이다.

가치관은 전체적으로 조망된 세계관으로부터 도출된다. 과학은 세계관의 세부지식을 오류 없이 쌓아나가지만 그 지식이 편중되거나 미완성일 경우 가치판단에는 오류가 생긴다.

(어느 음식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대요! 라는 지식은 그 음식을 멀리 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그런데 다음날 같은 음식에서 항암물질이 발견된다면? 앞의 지식은 틀리지 않으나 판단은 틀리게 된다. 전체적인 이해를 하지 못한 지식은 틀린 가치판단을 유도한다.)[a]

그럼 과학의 지식은 편중되거나 미완성이어서 세계관을 조망하기에 합당하지 않을까? 합당치 않다는 증명이 되거나, 아니면 심증 삼을 징조라도 있는가? 

나는 다음의 것들을 그러한 징조로 여긴다.

기존의 가치관은 연역된 게 아니며 논리적으로 허공중에 떠있는 것이다. 이에 만약 기존 가치관념들을 모두 부정하고 과학지식에 근거한 가치관념만으로 가치체계를 정립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캐릭터가 있다. 빅뱅이론의 쉘든이다. 과학방법론으로 검증된 지식만으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나면 그로부터 도출된 가치관은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많은 형태가 되는데 쉘든은 그 치밀함과 허술함이 병존하는 철골구조 건물같은 모습으로 웃음을 준다. 쉘든을 보며 웃음이 나는 만큼이 과학 지식으로 정립된 세계관의 빈틈이다.

또한 과학에는 가치중립성이라는 말이 따라붙곤 한다. 지식을 근거로 가치판단이 바꾸는데 가치중립적인 지식이란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굳이 가치중립성이라는 주장을 해야 했다면, 그 배경에는 과학지식을 가치 판단의 총체적 구조물인 현실 생활에 적용했을 때 뭔가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 것(적용한 주체가 과학자든 정치가든 일반 대중이든간에)을 누차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가치중립성이라는 주장 자체가 과학으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조망하기엔 이르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사회 현상이다. 앞서의 두가지 징조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신앙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그게 문제가 있다면 틀린 가치관이 야기하는 부작용도 관찰될 것이다.

난 '피로사회'가 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생의 서사적 의미를 잃어버리고 지켜야 할 것은 오로지 몸뚱이 만이 남아 건강을 여신에 자리에 올리고 그 건강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는' 피로사회의 구성원들, 그들은 항상 지쳐있다. 무의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빨리 지치기 때문이다. 

생에 초월적 가치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때 지쳐버리는 현상을 상시 체험하게 된다. 피로사회가 지적하는 우울증 등의 현대의 질병. 이것이 세번째 징조다.

세계관의 세부지식을 사변적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그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와 동시에 세계관을 정립하기에 부족한 지식 체계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조망하면 틀린 가치관에 이른다. 

잘못된 가치관이 개인에게 미치는 타격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잘못된 지식보다도 직접적이다.

여기까지는 과학으로 가치관을 정립하면 틀린 결과를 얻는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올바른 가치관을 얻을 수 있을까?


무엇이 올바른 가치관인가를 탐구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록 증명되지 않은 허공중에 토대를 두고 시작하지만 위로 쌓아 올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달진리다.[b]

쌓아 올라가는 방법이란 '4층의 인문학'이고 하달되는 진리를 이해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5층의 종교'이다. 여기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서두에서 얘기한 초월적 가치 무엇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한다면 그게 곧 인문학이고 종교적 고민이 되기 때문이다.

먼저 종교부터 얘기하겠다.

만약, 하층의 지식이 5층의 종교에 이르러 저층 고층간 합치를 완전히 이룬다면 그때 증명해야 할 것은 종교의 '이야기'(신화)가 아니라 가르침, 가치관일 것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방향성과 생의 초월적 가치가 그 하층의 지식과 일치해야 종교는 사기가 아닐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종교적 진리에 대해 최소한의 검증방안으로 다음을 모색할 수 있다.

1. 종교 내적 모순 없을 것.

2. 현실에 대한 설명이 검증된 지식과 모순 없을 것. 또한 '4층의 인문학'과 모순 없을 것. (저층 고층 합치)

1번. 내적 모순 없음. 

이것은 판타지 문학에 조차도 요구되는 사항이다. 

앞서 종교가 '가르침을 이야기에 싸서 내놓은 것'이라고 해석한 것은 종교에게 '현실에서 지속 가능한 판타지'라는 지위를 준다. 의외로 이것은 종교의 위상에 대한 비하가 아니다. 문학은 그 작품내에 현실에서 지속 가능한 삶의 진리(가치관)를 담을 때 명작으로 추앙받는다. 판타지/SF 소설은 '마법이 없는 세상에서는 지속하기 어려운 진리(가치관)'를 담아내곤 하기 때문에 하위문학으로 치부되곤 하는데, 그 와중에서도 현실 지속 가능한 가치관을 담아내는 판타지소설은 다시 걸작 대우를 받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는 현실에 지속 가능한 판타지이며, 이는 '종교가 단순히 판타지 서술이라면 굳이 여타 판타지물과 구별되어 특별한 위상을 가질 이유가 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된다.

2번. 검증된 지식과의 모순없음. 

저층지식과의 합치. 즉 종교는 그 가치관의 올바름을 인문학 앞에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말을 현재 맥락에서 (초월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을 향해) 다시 말하면 이렇게 된다.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방향성이 합당한지 증명해야 하는 대상은 일차적으론 바로 아래에 있는 인문학이 먼저다.

과학이 3층의 통계적 사회과학과도 합치(혹은 반증)하지 못한 채로 5층의 종교 가치관이 옳은지 틀린지 환원 증명하는 시도는 세계관 조망이 불가하여 반드시 틀린 결론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 남는 것은 인문학이다. 인문학적 가정위에 출발하여 실험없이 사유로 진척시켜온 인문학은 어떻게 그 참됨을 증명하느냐가 남는다. 그리고 그 대답도 앞과 유사하다. '인문학이 스스로 조직적인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대상은 일단 통계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는 사회과학 지식과 합치이지 그보다 아래에 있는 생물학으로 환원하는 시도는 이르다.'


이상의 배경에서 내가 결국 도달한 곳은 불교가 제시하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 종교인이 따르는 총체적 가치관이 인문학적 잣대 앞에 제단되기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리학이라는 저층 지식과 합치된 화학(물리학보다 더 널럴한 기준으로 토대를 쌓은 지식체계)이 물리학과 거시-미시적 관계를 이루며 저층 지식에 합류하듯, 종교가 저층지식과 합치되는 그 날에는 종교의 가르침도 과학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과학'은 지금의 '이과 교과목의 한가지'가 아닐 것이다.


[a] '세계관의 조망'이란 이런 의미를 갖는다. 지식을 더 알면 더 알수록 더 정확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게 되고, 지식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더 부정확한 가치 판단을 하게 된다. 환원주의적으로 과학이 종국에는 모든 학문을 합치or반증할 것이라는 주장은, 역설적으로 과학은 아직 그 학문의 지식들을 내포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가치관을 도출하기에 부족한 상태라는 의미가 된다. 현재 과학 지식에서 도출된 가치관 체계를 적용한 개인은 허술하고 우스꽝스런 캐릭터가 되며, 적용한 사례들은 엉뚱한 결과가 나와서 '가치중립성'이란 개념을 고안해야 했고, 적용한 사회는 '피로사회'의 부작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론적이로도 사례적으로도 같은 의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b]지식의 상향 추구에서는 세계관에서 가치관이 도출되나, 하달 진리인 종교의 경우에는 이 순서가 역전된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종교적 가치관은 하달된 진리이고, 종교적 세계관은 그 가치관을 담아서 설명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가령 불교는 '종교는 세계관 지식에 대해 함구하는 편이 옳다.(십무기) 가르침은 비유와 방편을 통해 설명하고 있으나 이 비유와 방편은 단지 가르치기 위한 것이니 있는 그대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노크 노트 > 세계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연에 작용하는 의지  (0) 2012.09.03
과학 혁명의 구조 - 내가 이해한 내용.  (0) 2012.06.01
과학 혁명의 구조 - 책 요약  (2) 2012.06.01
인문학은 무엇인가?  (1) 2012.05.22
종교와 효율성  (0) 2012.05.05
Posted by 노크노크
|

부당한 이익에 의존하다가 명분을 잃고

부당한 이익으로 버티며 정당한 이익을 지키지 못하여 

결국 정의의 명분 앞에 그 부당한 이익마저 잃어버리는 형태의 몰락을 종종 본다.


가령 의사는 부당수입인 리베이트에 의존하다가 정당한 수입인 의료 수가를 현실화하는데 집중하지 못하면 리베이트 챙기는 리스크가 상승하면서 어려움에 처한다.

자영업은 탈세의 이익에 의존하다가 정당한 이익을 지키지 못하면 마지막은 정의의 이름으로 날아온 칼 앞에 몰락당한다.

부당 이익을 챙기면 처음에는 편하다. 그런데 점차 그 상태를 기준으로 이익 균형이 맞춰진다. 

정당치 못한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니 명분은 잃은 채이고, 처음에 폭리이던 수입은 점점 일상수준으로 완화된다. 그런 후에 마지막 몰락의 칼은 합법적으로. 

높은 수준의 이익을 취하는 것에 대한 압박이 들어올 때 스스로 부당이익을 잘라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이렇게 된다.


이런 구조의 느낌을 마트에 가서 느낀다.

대형마트는 노동 착취의 현장이 아닐까?

주말 실습사원이라면서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 저 젊은 노동력은 얼마나 헐값으로 부려먹히고 있는 걸까?

결코 녹록치 않은 마트 캐셔일을 하는 중장년의 여성들은 얼마를 받고 몇교대로 일하며 휴일에 쉬기는 잘 쉴까?

마트 앞에 서서 교통정리를 하는 일도 상당한 중노동인데 얼마나 받고 일하는 걸까?


내가 사는 마트의 물품은 이런 착취위에서 원가를 산출하고 있는 물품이니 나도 저 부당 착취의 위에 발을 얹고 있는 셈이다. 

임금상승이 물가상승률도 감당 못하여 나날이 가난해지고 있는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가 받는 지나치게 싼 봉급의 어려움을 또 다른 노동착취로 전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식의 부당이익 위에서 버틸만하다고 살면서 정당한 권리와 명분을 함께 잃어 나가면 

마지막엔 정의의 이름으로 몰락당하는 결과를 맞이할 것 같다.


마트가 아니더라도 세상엔 노동 착취다 싶은 힘든 일들이 많다. 

가령 택배업도 그렇게 힘들다고 들었다. 내가 누리는 싼 택배비용은 그 노동착취위에서 산출된 것일터.

택배에 그치겠는가? 물류업 전반이 착취란 얘기일텐데 그 영향만해도 산업 전반에 녹아있기 마련이다.

당장 버틸만하다고 해서 착취가 남의 일이란 생각이 안든다.

'노크 노트 > 사회관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을의 권리는 무엇입니까?  (1) 2013.05.15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2) 2012.07.27
PD/NL  (1) 2012.05.16
재산이냐 재주냐  (10) 2011.11.08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은?  (3) 2011.10.27
Posted by 노크노크
|
고수민 저 뉴욕의사의 백신 영어 요약

영어 책을 정확한 발음기호에 맞추어 반복해서 읽는다.
소리를 낼 수 있어야 소리를 구분할 수도 있다. 정확한 발음기호를 따라 소리를 낼 때 해당 발음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완벽한 네이티브의 악센트는 발음기호+알파의 요소이나 완벽한 악센트를 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는 것 보다는 발음기호를 정확히 지키는 정도가 의사 소통에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다.
소리내서 읽을 때 굳이 외울 필요는 없다.
너무 열심히 하다가 지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고,
외우지 않아도 문장의 구조가 체득되고 나면 그 자리에 어휘만 갈아 넣음으로써 말을 할 수 있는 감각이 생기기 때문이다.

읽을 영어 교재 선정기준
-한페이지에 모르는 어휘가 평균 5개 미만
-단어를 찾은 상태에서 두세번 읽는 안에 대부분의 문장이 해석가능. 한두문장 정도 해석 안되는 건 무방.
-책이 너무 두꺼워서 한권 독파에 3개월 이상 걸리면 나쁨. 성취감이 줄며 한가지 스타일의 문체에만 익숙해짐. 두달이내.
-반드시 흥미로운 내용일 것.
-반드시 음원 시청각 교재가 딸려나온 것을 고를 것. 읽기 시작전에 해당 분량을 10회 들어서 자기가 읽을때에 그 발음을 흉내낼 것. 한페이지당 최하 2,30번은 읽는다.
이 정도면 90페이지면 석달을 공부할 분량이 된다.
-가급적 도움말과 해석이 있는 교재

보통 교육방송, 영화, 드라마 대본, 영한 대역소설 등이 충족한다.
영화는 생각보다 어렵다. 한번 듣고 6,70%는 받아쓸수 있어야 그 영화가 내 교재 수준. 뉴스가 알아듣기는 더 쉽다.

하루 세쪽 50번씩 읽는 예시
1.책없이 세번 듣기
2.읽을 반페이지 세번 다시 듣기
3.책을 보고 모르는 단어 찾아 문장 해석.
4.뜻을 아는 상태에서 세번 듣기
5.공부한 반페이지를 25번 소리내서 읽기
6.테이프를 한두번 들으며 발음과 강세 확인
7.교정된 발음과 강세로 25회 소리내 읽기
8.다음 반페이지 2번부터 반복
녹음한 자기 발음 듣기.
그외 영어 일기 쓰기에 15분 사용하기.

문법: 먼저 문법책 한권을 어디에 뭐가 나오는지 가볍게 읽은 후
위의 읽기 공부를 하면서 수시로 찾아본다.

어린이 영어조기교육도 영어유치원이니뭐니 많지만
사실 필요한 건 쉬운 동화책이면 충분할 듯하다.

'노크 노트 > 학습/교육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읽어주기  (1) 2012.10.17
딸이 좋아할듯한 같이 놀아줄 거리들  (2) 2012.09.25
자식이란 오묘하다  (0) 2012.09.24
자녀교육법  (0) 2012.05.30
노래  (1) 2012.05.16
Posted by 노크노크
|

일반적으로 여자는 대우의 상중하를 다음처럼 나눈다.

(사실은 장인장모, 시아버지시어머니 등 예의격식을 따지는 어른들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선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일단 여자로 국한해서 말하겠음)

여자가 받고 싶어하는 최고의 대접은 

1. '의사소통 이전의 응대'. 즉 '말하기 전에 알아서 해준다.' 

이 대접을 원하는 여자는, 자기가 바라는 걸 굳이 말하게 만들면 삐친다.

그 다음가는 대접으로 치는 게

2. '말하면 다 해준다.' 

이 대접을 원하는 여자는, 어렵게 말하기까지 했는데도 안 들어주면 삐친다.

그 다음가는 대접으로 치는 것이 

3. '요구하면 해줄지 말지 협상해서 조율한다.' 


여자가 나누는 대접의 상중하가  '대접의 양'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단계'임에 유의해야 한다. 흔히 "여자는 사소한 것에 감동한다, 여자들이 큰 걸 바라는게 아니다." 라고 하는데, 이건 1번의 '의사소통 이전의 응대'를 돌려 의미하는 거다. 


2번의 대우를 원하는 여자의 특징은 요구했는데 거부당하면 상처 받는다는 거다.

말하기 전에 스스로 판단하여 '이만하면 해줄만하다 생각해서 부담감을 참고 어렵게 요구한건데 거부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해줄만 하다고 나도 생각 끝에 어렵게 말한건데 그런 것도 못해줘? 넌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는 정도의 느낌이다.

상황이란게 있기 때문에 본래는 그게 해줄만한 건지 아닌지는 요청자가 혼자 생각할게 아니라 듣는 사람과 대화를 통해서 파악하는 게 명확한데, 그건 이미 3번 대우가 돼서 나쁘게 여긴다. 

이건 크게 대접 받길 바라는 문제라기 보단 의사소통 기술의 문제다. 

여자들이 의사소통을 굉장히 부담스럽게 여기는 탓에 의사소통을 건너뛰어 주는 걸 갈구하는 거다.


많은 여자들이 '의사소통 이전의 응대'를 최고의 대우로 여길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이걸 사랑과 혼동한다. 

항상 애정어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은 그녀가 뭘 원하는지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약간은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화 가능하냐고 하면, 아니다. 

여자가 뭘 원하는지 알아채는 역량은 사랑의 감정이나 그녀에 대한 관심이 좌우하는 비중보다도 눈치와 경험이 좌우하는 비중이 훨씬 크다. 

대부분의 인간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것을 원한다. 데이트나 평범한 일상 같은 상당히 한정적인 패턴 내에서라면 원하는 것은 제한적이고 경험의 반복을 통해 거의 독심술에 가까운 눈치도 습득 가능하다. 즉 마음을 읽는 것은 진심의 영역이 아니라 기술과 경험의 영역이다. 

하지만 보통은 '의사소통 이전 단계의 보살핌'을 사랑의 증거 내지는 운명의 증거로 받아들이는 게 일반적이다.

어느 순간의 문 잡아줌, 어느 순간의 티슈 한장, 어느 어색한 순간의 말 한마디. 팔 아픈 걸 눈치채고 우산을 들어주거나, 사주지 않더라도 좋으니 같이 악세사리를 골라주거나 하는 것 등도. 


여자가 '의사소통 이전의 응대'에 감동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많은 여자들이 자기가 마음에 담아둔 의견을 얘기해서->거절 당하기도 해가며->조율하는 것을 자존심 상해하고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즉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것'이 감동인 이유는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단계를 건너뛰게 해주니까 감동 받는다. 의사소통의 부담감을 탈피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쉬운 일'이 되면, 건너뛴 부분(의사소통하는 일)이 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도한 감동을 받게 되지도 않는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

아이러니 하게 들릴수도 있는데, 설령 의사소통 이전에 응대하기를 할 수 있는 남자일지라도 의사소통 잘 할줄 아는 여자와 함께 하는 걸 편하게 여긴다. 아가 울음소리만 들어도 뭘 원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엄마조차도 아가가 말할 수 있게 될 때 편안해 하는 것처럼.

해결법을 찾아보면 : 

의사소통의 부담감을 탈피하는 방법은 소심증 극복방법이나 외국인 공포증 극복하는 방법 등과 유사하다. 

소심증 극복에 비교해서 방법을 찾으면 

-소극적인 사람이라도 의사소통하기 편안한 사람이 한둘은 있다. 

-그나마 편한 한두 사람을 기반으로 입을 트고 다른 사람들과 의사 소통 대상을 확장해 가면서 의사소통이 막막하고 어려운 게 아님을 익혀나갈 수 있다.

필요한 건 <말하지 않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내 짝>을 찾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말하기에 편한 짝>을 찾는 거다. 대화는 쌍방의 일이라서 속내를 열기 편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협상하기에 편안한 상대로 인식되기 시작하면, 소심증 극복 첫발짝 성공. 

외국인 공포증 극복 방법에 비교해도 마찬가지인데, 외국인 공포증 있는 사람은 수치&두려움이 중첩되서 외국어 회화할 상황을 무작정 피하고 싶어한다. 처음부터 꼭 잘할 필요 없는데도. 

회화는 일단 실전에 부딛치고 보는게 가장 효과가 좋다. 몇 번 하다보면 자신감이 생기고, 회화 능력을 공부하는 것도 병행해서 훈련하다보면 공포증이 극복된다. 마음에 담아둔 소망들을 의사소통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많은 여자들이 필요한 것을 착각하여 <말하지 않은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운명적 상대인줄 착각하고) 찾고 있으므로, 여기서 실수하지 말 것이 요점이다. 

'노크 노트 > 연애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의 결정  (0) 2012.08.16
결혼 잘한 자랑  (0) 2012.08.14
남자의 사회 여자의 사회  (0) 2012.05.16
남의 연애담 -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연대생이 되어 있었다  (0) 2012.04.08
인품  (1) 2011.09.28
Posted by 노크노크
|



'노크 노트 > 연애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의 결정  (0) 2012.08.16
결혼 잘한 자랑  (0) 2012.08.14
남자의 사회 여자의 사회  (0) 2012.05.16
What women want  (2) 2012.04.13
인품  (1) 2011.09.28
Posted by 노크노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