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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과학혁명의 구조 요약이다. 사례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예시로 소개된 사례들을 가급적 빼놓지 않고 정리했다.

~~~~~~~~~~ 과학혁명의 구조 요약 ~~~~~~~~~~~

패러다임을 기준으로 본 학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초기 - 무작위적 사실 수집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다수의 패러다임들이 등장하여 서로 경쟁하고 수정하다가 통합 공유되는 패러다임이 출현한다.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나는 시기 까지가 학문 발생의 초기다. 이러한 학문의 발생 과정은 수학처럼 최초의 패러다임이 계속 지속되거나, 생화학처럼 이미 성숙기인 학문들끼리 결합하여 발생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전형적인 방식이라고 쿤이 수집한 사례들은 말한다.
예시 : 운동연구는 아르키메데스에서 패러다임 통합. 광학은 뉴턴, 전기는 프랭클린, 열은 블랙, 화학은 보일과 부르하베에서 패러다임 통합. 유전학은 최초의 패러다임 장악이 근래에 나타났으며 사회과학은 어느 부분이 패러다임을 얼마나 장악했는지가 아직 미결과제로 남아있다. (쿤의 시대까지는 그랬다. 사회과학이 패러다임 통합이 일어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비록 알려진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경쟁 패러다임들을 압도할 설득력을 갖추기만 하면 초기 패러다임 장악은 일어난다.

중기- 패러다임 장악이 된 상태의 학문 활동을 normal science 라고 부르며 정상과학이라고 번역한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난 후의 학문 활동이 우리가 인식하는 과학 활동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한 분야를 명백히 과학이라고 선언할 만한 기준은 패러다임의 통일이었다.'라는 게 쿤의 주장.
패러다임 장악 후의 단계인 normal science 활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공유된 패러다임에 맞춰서 사실 수집 활동이 이루어지고, 이론 명료화 작업이 방향성이 뚜렷한 형태로 진행된다.
패러다임 장악 이후 사실 수집 활동은 크게 세 가지에 국한된다.
첫째, 패러다임의 토대가 된 사례를 최대한 정밀하게 재확인하기이다. 즉 '뭐뭐는 어떤 것이다'라는 패러다임을 탄생시킨 사례를 정밀하게 재확인해서  '뭐뭐가 정말 어떤 것이 맞나?' 확인하는 것이다. 이로서 패러다임은 무엇을 의미 있는 현상으로 치고 무엇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현상으로 칠 것 인지를 결정한다.
둘째, 그때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패러다임을 통해 예측되는 사례를 찾아서 확인.
'뭐뭐가 어떤 것이라면, 저거는 이렇게 되겠네?'하는 추정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실재로는 이론이 그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의 예측 가능성을 제시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셋째, 이론의 명료화 작업이다. 패러다임을 더욱 더 명료화 하는 사례를 수집한다. 즉 중력 가속도나 줄의 계수등의 측정작업이 이에 해당한다. 이 작업은 정성적인 패러다임을 정량적인 것으로 만드는 실험의 고안등을 포함한다. '뭐뭐가 어떤 것이라는 건 분명하고 그 안의 계수 등이 정확히 어떤 값인지?'하는 작업이다.
이것들은 모두 퍼즐 풀이 작업의 형태를 갖는다. 퍼즐이란 '답이 있는 것으로 가정 되는 문제'를 뜻한다. 때문에 과학자의 학문 활동은 패러다임이 옳다는 가정 하에 답이 있을 것으로 추정 되는 문제들을 푸는 작업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normal science 단계에서는 '답은 있으나 여태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퍼즐을 풀어낸 뛰어난 퍼즐 풀이자'가 뛰어한 학자로 평가 받는다.
원래는 인간이 과학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들은 퍼즐 풀이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가령 유용성에의 욕구나/새로운 영역을 탐사하는 경이감/질서를 찾아내려는 희망/이미 정립된 지식을 시험하려는 충동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정규 연구 활동에 종사하는 과학자의 경우 거의 모든 경우에 오로지 퍼즐 풀이 만이 가치를 갖는다. 과학 활동의 가치는 얼마나 어려운 퍼즐을 풀어낸 것이냐에 따라 학계의 평가를 받지 유용성 여부에 의해 평가받지 않는다. (라고 쿤은 주장.)
퍼즐 풀이의 성격을 갖는 normal science는 과학 지식의 범위와 정확성의 '꾸준한 확장'이라는 목표에 성공적인 활동이다. '검증된 앎을 치밀하게 쌓아 올라가는 것'이라는 학문 연구의 보편적인 이미지는 정확히 normal science 활동에 맞추어져 있다. (학문의 이미지가 normal science에 맞춰져 있을 때, 과학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학문 중의 학문으로서 자리매김 된다.)
normal science 단계의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의 창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또 패러다임에 안 맞는 종류의 새로운 현상에 주의를 환기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현상은 보이지 않는 셈치고 새로운 이론도 외면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단지 패러다임의 명료화를 지향한다.
정상 과학의 정확한 측정 작업이 패러다임을 명료화하는 작업으로서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되는 패러다임의 기반 위에서 수행된 것이 아닌 측정은 수치 측정조차도 사실과 다른 값으로 기록되기 일쑤다. 이는 여러 패러다임의 경우에서 발견되는데 가령 돌턴의 배수비례법칙의 예시를 들면 이렇다.
배수비례법칙은 탄소무게1과 결합할 수 있는 산소무게는 1.3 또는 2.6 뿐이라는 것, 즉 탄소 한개와 산소 한개가 결합하거나 또는 탄소 한개와 산소 두개가 결합하는 것만이 가능하지 탄소 한개와 산소 1.5개가 결합하는 건 불가능 하다는 법칙이다.
돌턴이 처음 그의 이론을 확인할 데이터를 찾아 화학 문건들을 뒤질 때 그는 이론에 맞는 몇 가지와 이론에 맞지 않는 여러 기록들도 발견해야 했다.
심한 경우 구리의 산화물 두 가지에 대한 프루스트의 측정은 이론치인 2:1과 달리 1.47:1 이라는 값을 얻고 있었다. 프루스트는 당대의 충분히 훌륭한 실험학자 였으나, 어느 실험에나 상존하는 오차를 패러다임의 도움 없이 조절한다는 건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 돌턴의 배수비례법칙은 그 후 거의 한 세대에 걸쳐 재 실험을 통해 데이터 변경 작업을 거쳐야 했으며 이런 수치 데이터의 변화는 패러다임 전환 시에 전형적이다.

혁명기 - 패러다임에 들어맞지 않는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서 혁명기가 시작된다. 이때 발견이란 개념 자체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발견은 보는 것과 다르다. 발견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보는 것이다. 현상이 기록된다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해야 현상이 발견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때가 이상 현상이 발견되는 때이다. 이상 현상은 기존 패러다임이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한 현상이다.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현상이 확실한지는, 패러다임이 예측하는 결과를 정확히 알 때에야 비로소 확실해진다.
정상과학이 심화되고 정밀해질수록 이상 현상을 발견하는 지표도 민감해진다.
이로써, 비록 정상과학이 새로운 현상 발견을 지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패러다임 수정을 유도해낸다.
패러다임의 위기는 퍼즐 풀이 활동의 붕괴가 핵심이다. 패러다임이 옳다면 답이 있기 마련인 퍼즐들이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시작이다. 이러면 답이 안 나오는 이유를 해석하고 답을 내기 위해서 이론을 조금씩 수정하는데,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 여러가지 문제에서 나타나면 이상 현상을 여기서 막은 수정안이 저기서 막은 수정안과 상충하는 상황이 생긴다.
정상 과학의 위기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코페르니쿠스는 '각기 서로 다른 화가가 모델의 각 부위를 제각각 그려서 손 발등은 뛰어나게 잘 그렸으나 합치면 도저히 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괴물'이라고 묘사했다.
실례로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오기 전 천동설의 상황/라부아지에의 산소 발견 이전의 프로지스톤 이론/ 맥스웰 전자기 이론이 나오기까지 뉴턴의 에테르 이론 등을 들 수 있다.
이제 위기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면, 비록 구 패러다임이 반증되는 현상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구 패러다임은 폐기 되지 않는다.
(학문의 초기 패러다임 장악 시에 패러다임이 알려진 자연의 모든 문제를 설명하지 못해도 경쟁 패러다임을 압도하는 설득력만 가지면 채택된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패러다임의 선택은 패러다임 간의 싸움으로 이루어지지 자연 현상과의 싸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 패러다임이 자연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새 패러다임과의 비교를 통해 대신 선택할 이론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역사적으로 한번도 구 패러다임은 폐기된 적이 없다.
이유는 대안 없는 패러다임 포기는 과학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설령 몇몇 학자 개인이 '이 학문의 패러다임은 완전 엉망진창이다'라고 생각해서 대안 없이 패러다임을 폐기해버린다 해도, 그건 그가 그 학문에서 손을 뗀다는 의미가 되지 (포기하지 않는 학자가 남아 있는 한) 학문이 소멸한다는 의미가 되진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상 현상이 발견되어도 모든 학자가 그 학문을 다 포기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상 현상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1, 기다리면 해결되는 경우.
2, 보다 진보된 도구를 지닌 다음 세대로 미뤄지는 경우.
3, 패러다임을 위기 상황으로 내모는 이상 현상.
1번 경우에 대해 예시하면 : 오차는 항상 있기 마련이고 때로는 확연한 오차조차도 기다리면 해결되기도 한다. 뉴턴의 원래 계산 이후 60년동안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까워지는 근지점의 예측치가 관찰값의 절반뿐이었으나, 뉴턴의 역제곱 법칙의 수정에 대한 제안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실제로 기다림 끝에 1750년 클레로에 의해서 그간의 수학적 적용이 잘못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이런 상황은 '사소한 실수도 있을 법하지 않은' 경우에 조차도 나타난다. 그래서 관측이 어긋나는 것이 학계에서 심각한 반증 사례로 항상 인정되지는 않는다.
그럼 언제 이상 현상이 패러다임을 위협하는 3번의 것이 되는가?
이에 대해 쿤은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정상 과학의 이상 현상은 긴 시간에 걸쳐 관찰되고, 이상 현상은 계속 누적된다.
게다가 후에 대안이 되는 패러다임들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이론들의 수정 증보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시 : -상대성이론의 공간과 운동의 상대성은 라이프니츠등의 자연과학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알려져 있는 개념이었고 그들은 뉴턴주의를 상대론적으로 비판했었다.
-지동설은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타코스에 의해서 이미 제안 되었었다. 그러나 학설 중의 하나였을 뿐 천동설이 틀리고 지동설이 옳다는 실험적 근거를 마련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리스타코스의 이론은 훗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밀려야 했다.
-17세기 레,훅,메이오에 의해 진전된 '대기로부터의 흡수를 통한 연소 이론'도 당시 관심을 끌지 못했다. 훗날 플로지스톤 이론에 위기 상황이 오고 라부아지에에 의한 산소 흡수 설이 나온 후에야 과거에 저런 이론이 있었다는 걸 상기하게 된다.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에서만 일어난다는 얘기다. 위기 이전에 구상되는 이론은 설령 옳다고 해도 무시된다. 구 패러다임으로 모두 설명이 되는 현상들을 분석하여 만든 새 패러다임은 설령 옳은 이론이더라도 선택되지 않는다.

어느 개인이 데이터에 질서를 부여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어떻게 고안하는 가의 문제는 불가해하다고 쿤은 말한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자는 아주 젊거나 그 분야를 새롭게 접하여 기존 패러다임에 사고방식이 고정되지 않은 사람이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사고 실험이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분석적 사고 실험은 위기 시기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마침내 양립 불가능한 신 패러다임에 의해 구 패러다임은 부정된다. 이를 과학 혁명이라고 한다. 이전의 패러다임이 부정된다는 사실은 '학문은 검증된 지식을 착실히 쌓아 올라온 것'이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다르다. 왜 패러다임 혁명은 과거의 지식을 부정했다는 자취를 남기지 않을까?
뉴턴역학은 상대성이론의 특수한 경우로서 여전히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뉴턴역학이 부정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런데 만약 뉴턴 역학이 부정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때의 뉴턴역학은 강체의 속도가 빛보다 느린 경우에 대해서만 한정되어 정립된 이론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패러다임은 아직 관측되지 않은 전방위의 현상에 대해 적용된다는 전제 하에 기능한다. 뉴턴 역학이 상대성 이론에 의해 부정 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상대성 이론 이전에 모든 과학자들이 뉴턴 역학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에 대해서도 옳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종류의 구 패러다임에 적용된다. 관측되지 않은 현상은 예외라고 한다면 패러다임은 관측된 적 없는 사실에 대해 새로운 퍼즐을 제공할 수 없고 과학은 더 이상 연구를 할 수 없다.
심지어 패러다임은 전혀 다른 분야에 까지 보편 적용 되는 것으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때 패러다임의 영향성은 해당 과학 뿐 아니라 세계를 보는 관점 자체를 바꾼다.
뉴턴 역학이 상대성 이론에 의해 부정된 이후에도 마치 부정된 적 없이 처음부터 '상대성 이론의 특수한 경우'로서의 가치를 갖고 탐구된 것처럼 보이듯이, 과학 혁명은 많은 경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패러다임 전환이 한번 이루어지고 나면 모든 교과서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쓰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의 '검증된 새로운 지식의 축적적 발전'이라는 이미지는 대다수의 학자가 normal science의 퍼즐 풀이 과정에 종사하고 패러다임 전환에 참여하는 인원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과학 혁명이 지나가면 과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또다시 normal science로서 기능한다.
과학은 여타 학문에 비해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과학의 방법론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가?
'패러다임 장악으로서 normal science가 되고 나면 normal science 중에는 퍼즐 풀이를 통해 축적적인 발전을 한다. 그러다가 패러다임 전환이 오면 과거의 패러다임이 부정 되는데, 이때 패러다임 간의 경쟁을 통해 구 패러다임을 이기고 새로운 것이 오는 것이므로 평가자들에게는 '발전'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된다'고 쿤은 말한다. 그래서 '특정한 지고의 생물에 접근하는 것이 아닌 단지 환경에 더 잘 적용했을 뿐인 진화가 발전으로 보이듯, 학문도 절대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발전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발전이다>'라고 말한다.
쿤의 이 해석은 탐탁치 않게 보인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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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있는 사람들 간에 교육에 대한 문제는 특히 민감하다.

바야흐로 2차전인가.


부모가 공부를 잘 했으면 자녀가 공부를 잘할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저학력자 부모를 둔 천재 자녀'의 사례가 적지 않고

'고소득 전문직인데 자기 주위 전문직들 자녀들중 인서울 대학도 드물다'라는 증언도 종종 들린다.

하지만 논지를 분명히 해보면 정답은 상식으로 잘 알려진 문제다.

논지는, '지능이 유전되는가'/'성공이 선천팩터로 좌우되는가'이다.

정답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 지능은 유전된다. 그 구속력은 양친이 다 클 때 자녀가 클 확률 정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수의 격세유전이 있을뿐이다.

- 성과는 선천 팩터만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후천 팩터(교육, 노력, 운)에 크게 좌우된다. 

여기서 성과란 공부 성적~사회적 성공까지 모든 성과를 의미한다.


위 두 참인 명제하에서 '성공한 양친 아래 무능한 자식 많더라'는 말도 참이 되고 (양친의 성공이 후천 요인으로 인한 것일 경우와 자식의 무능이 역시 후천 요인으로 인한 것일 경우 발생)

'양친 머리 좋으면 자녀 머리 좋더라'라는 말도 참이 된다.

그러나 이건 이쪽도 저쪽도 다 옳다는 어중간한 말은 아니다. 

가령 '공부는 타고나는 건데(후천 팩터 무시) 머리는 부모 안 닮는다(유전 부정)' 라고 하면 전혀 틀리다.


후천 팩터는 크게 세가지다. 

-당사자의 몫인 노력

-타인의 몫인 교육

-하늘의 몫인 운

이중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교육이다. 

자식이 공부를 잘 하게 하려면 어떤 교육을 해야 할까?

그래서 내 자녀를 위한 학습력 강화 훈련 커리큘럼을 짜봤다.


학습력의 본질은 '배운 것을/이해해서/내면화하고/써먹는 능력'이다.

각각 집중/이해/사고/응용력으로 불린다.

최초의 훈련은 어린아이때 자체적으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어린아이의 '왜?' 연발은 학습 능력의 기초 훈련이며 

성심껏 답해주는 것은 강력한 훈련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는 집중해서 관찰하고-현상을 이해하고-생각해서-응용하는 과정이 모두 담겨 있다.


더 정형화된 훈련으로는 아이와 같은 책을 읽고 책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걔는 왜 그랬는데?','아이 잘했다'

아이가 어릴 경우 이런 대화를 나누는데 필요한건 부모의 특별히 뛰어난 지성이나 금력이 아니라 단지 관심인게 보통이다. 독서 토론의 훈련법은 아이가 부모의 지성을 추월하는 때까지 범용적으로 사용 가능하다.


다음으로는 도서관에 같이 가서 '주제선정-자료수집-학습-결과도출-다음 주제선정'의 연쇄과정을 가르쳐줄 수 있다면 최선의 교육일 것이다. 이건 학문의 방법과 배우는 즐거움을 가르쳐주는 것이며, 이때 이미 인생관 전수 규모의 훈련이 된다. 

(이건 내겐 인생관 전수의 로망 같은 거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야. 

공자가 제시한 최선의 인간상은 '완성된 상태'라기 보다는 '호학자=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공자의 '배움'이 초월적 가치에 이르는 길을 의미하기 때문에 

'호학자'는 '초월적 가치 추구에서 인간으로서의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이는 자연히 불교적 가르침에 합치된다.)

이상이 학습력 강화훈련에서 인생관 전수까지의 로드맵 개괄이다. 

'배운 것을/이해해서/내면화하고/써먹는 능력'의 강화를 모토로 해서 다른 훈련법들은 좀 더 생각해볼 수는 있겠다.


현재 한국의 대세는 사교육투자 보습학원 뺑뺑이다.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학원 경험은 일천하지만 십수년전에 학원 수업에 들어갔던 경험은 이랬다.

강사가 안 졸릴 말을 하며 진도를 대충 훌훌 넘어가다가 

"자 여기서, 밑줄 쫙, 따봉~공식!" 외치면서 외워야 할 것들을 알려주더라.

쇼킹했다. 맥락을 무시한 단편 지식화 교육이라...

그때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강의법이 크게 바뀌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학습력의 본질을 훈련하는 것은 그 효과가 장기적인 관점에서야 드러나는 것이고,

그래서 오늘의 성적이 다음달 재계약을 결정하는 사교육(그 본질은 장기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남'이 하는 교육)은 학습력보다는 단기 성과에 촛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학원은 최소 암기로 최대 효과를 내는 암기포인트를 찍어주는 곳이 될 터이다. 

이런 곳에 익숙한 아이일수록 자력으로 학습력을 키우지 못하므로 미래는 없고 

그래서 이들에겐 학습력을 키운 학생들의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했다'는 당연한 말이 신화가 된다. 교과서는 결코 맥락을 무시한 단편 지식의 암기로 구성될 수 없으니까. 

(교과서를 학원 수업처럼 못 쓰는 이유는 애초에 맥락을 무시한 단편 암기로 교육한다는게 얼토당토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게 '올바른 교육법은 돈으로 결코 살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설령 올바른 교육법을 따르는 사교육이 있다 한들 그 비용이 월 일이백 하는 정도는 아닐거다. 단편 암기 방식처럼 다수명을 상대로 가르치긴 어려운 방식이니까.


'부모가 공부를 잘 했으면 자녀가 공부를 잘할까?'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다.

요는 이렇다. 

선천팩터는 랜덤이 아니다. 양친의 유전되는 형질은 높은 구속력을 가지고 유전된다.

후천팩터는 랜덤이 아니다. 학습력을 높이는 교육법은 존재한다.

랜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운 정도다. (그런데 운칠기삼)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여도가 높은가 낮은가, 확률이 높은가 낮은가' 정도이고 

관심 있는 것은 '내 자식은 공부를 잘할까? 사회적으로 성공할까?'이니 

정작 관심 있는 것의 답은 확신할 수 없다. 

이는 단지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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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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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humanities)은 '신학이 아닌 학문'으로서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때 학문 그 자체였던 인문학의 정체성은 자연과학의 융성과 더불어 '자연과학이 아닌 학문'의 의미를 갖으며 분명해지다가, 근래에는 사회과학과도 구분되어 가는 중이다.
인문학의 범위에 대한 정의는 이견이 있으나 크게 문사철(문학 역사학 철학)을 주로 인문학으로 분류한다.
이상을 바탕으로 한 내 견해는 이렇다.
- 신학과 구분되는 인문학 : 신학, 즉 종교와 인문학은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접근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치관의 문제에 대해 신학은 하달된 진리를 이해하려 하는 형식을 취하고 인문학은 쌓아 올라가 도달하려는 형식을 취한다.
-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구분되는 인문학 : 인문학은 자연과학/사회과학이 분화되어 나간 후 '남은 학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인문학에 대한 비하가 아니다. 인문학의 가치는 그 분화되지 않았음에 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분화될때 '지식 탐구에 대한 질문'만을 테마로 분화되었기 때문에, '가치 탐구에 대한 질문'은 아직 인문학으로부터 분화되지 않은 인문학의 과목들 속에 섞여 남아있게 되었다. 인문학의 가치는 인문학이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 '생은 어떤 의미를 갖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즉 물리학부터 사회과학까지를 지식에 대한 질문만을 판단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인문학은 가치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 내 견해다.
가치는 사실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도출된다. 지식의 총체로부터 올바른 가치 판단이 가능하며, 일부분만 알면 가치 판단이 틀려진다. 즉 가치판단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면 사실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끌어모아야 한다. 인문학이 가치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 하는 학문이라고 할 때, 인문학을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과거엔 신에 대응하는 개념이었지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올바른 가치 판단을 위해선 인간 외적인 사실에 대한 지식만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가치 판단의 주체인 인간에 대해서 또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타 학문들은 왜 지식 추구의 주제만을 가지고 분화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선 학문의 분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러 방면에서 지식을 끌어 모으다 보면 통찰에 의해 '이건 이런 것일 거다'라는 감이 온다. 이 '감'은 인생이든 뭐든 '하다보면 감이 오는' 그 감과 완벽하게 똑같은 구조다. 그게 패러다임이다. (세상은 쪼개지지 않는 작은 요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다. 빛은 물질이 날라가는 것 같다. 전기는 유체같다.)
그 감이 제법 들어맞는 것 같다는 설득력을 얻게 되면, 패러다임이 한 분야를 장악하게 된다.
그때부터 학자들은 패러다임에 기반해서
1. 패러다임을 낳게 한 배경이 된 사실을 확인하고 (빛이 횡파라는 주장을 한 사람의 실험을 재연해보고)
2. 패러다임이 현실에 예측해주는 추정들을 확인하고 (빛이 물질이 날아가는 거라면 빛을 가했을 때 압력이 있겠지?)
3. 대략적인 감인 패러다임을 정밀화한다. (물질간 인력이 있는 듯하다. 그럼 인력의 비례상수는 얼마?)
이는 답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문제들, 즉 퍼즐이다.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나면 그 분야는 이 퍼즐 풀이에 전력하게 되는데, 이를 normal science 라고 하며, 정상과학이라고 번역한다.
퍼즐 풀이의 단계가 노말 사이언스 라고 불리는 이유는 과학 탐구의 본질이 퍼즐 풀이이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시간적으로 대부분의 학자는 퍼즐 풀이 단계에 일생을 바치며, 패러다임 변경의 단계, 즉 '새로운 감'을 내놓는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단계를 과학 혁명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성이 논리적 필연 보다는 지식 경험을 종합하는 통찰에 의한다는 것을 주의하라. 통찰에 의한 지식은 틀릴 수 있고, 그래서 매 패러다임은 완벽하게 옳지 못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될 여지를 남긴다.)
학문 분야는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날 때 범주가 확정된다.
별의 움직임이 수학 법칙을 따른다는 패러다임이 장악하자 천문학과 점성학은 별개의 분야가 되었다. 금이 합성 불가능한 원소라는 패러다임이 장악할 때 화학과 연금술은 별개의 분야가 되었다. 생명활동이 화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패러다임이 장악할 때 생물학과 화학은 생화학이라는 독립 분야를 낳았다.
즉 지식을 쌓는 활동을 하다가 '이거는 이런거 같다'라는 감이 올 때 그 감을 확인하고 심화하는 퍼즐 풀이 활동이 학문의 분화를 이뤘다.

가치 판단의 측면에서 볼 때 의미가 있는 것은 '이것은 이런거다' 라는 통찰, 즉 패러다임이다.
과학활동, 즉 퍼즐풀이과정에서 얻어지는 지식은 패러다임을 확인하고 정밀하게 할 뿐이지 그 패러다임을 기초로 하는 가치판단을 뒤집지는 못한다.
학문 분화를 이끌어 낸 패러다임들은 대상에 대한 통찰의 산물이다. 가치판단에는 대상에 대한 통찰과, 동시에 가치판단 주체에 대한 통찰이 모두 필요하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통찰인 패러다임을 주제로 하여 분화된 학문들은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은 인문학에서 분화되지 않고 남아있는 학문들 속에 뒤엉켜 남아 있다.

연역만으로 이루어진 수학, 연역과 현실확인으로 이루어지는 물리학, 연역되지 못하나 실험적으로 항상 재연되는 사실에 대한 화학, 가정 위에 출발하여 통계적으로 탐구하는 사회과학, 가정 위에 출발하여 사유만으로 탐구하는 인문학, 하달 진리인 종교.
향후 학문이 발전하면 학문 분야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인문학에 속해 있던 학문이 사회과학으로, 혹은 사회과학에 있던 학문이 자연과학으로 위치를 변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후까지 인문학이라 불릴 영역에는 가치 판단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은 '가치관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추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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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NL

노크 노트/사회관2 2012. 5. 16. 16:54

통진당 파동으로 NL 문제가 전면에 떠올랐다. 


80년대 운동권 두 주축은 NL과 PD다.

빈익빈 부익부를 비롯한 경제 사회 문제가 보여서 사회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때

'자본주의가 문제다' 라고 하면 PD(노동 운동 계열)

'자본주의를 하는 미국이 문제다' 라고 하면 NL(반미제국주의 계열)


한국에서 PD를 하려면 '자본주의'를 부정해야 하므로 더 고생길.-> 소수파

NL의 적은 바다 건너에 있으므로 그냥 저냥 온건할 여지가 있음.-> 다수파


자본주의의 대안이 사회주의국가라고 하던 PD는 사회주의 국가가 현실에서 몰락을 하는 걸 보면서 타격 받았다. 반증될 가능성이 있는 이론이었기 때문에 반증의 충격이 먹혀들었고, PD는 거의 해체되었다. 자본주의의 대안이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면 새로운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모드에 들어갔다. 진중권은 유학가고 김문수는 보수파로 돌아서고. 

NL은 미국이 세계를 착취하는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라 반미제국주의를 실현한 북한의 현실이 엉망이라는 반증사례가 작용하지 않았다. (NL은 학술상 신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나...)


한편 저 반대편에는 

공산주의가 문제인지 

공산주의 하는 북한이 문제인지

가려내는 걸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동의하고 공감을 하면서도, 그 문제의식이 사회주의를 낳았다는 걸 거론하면 그 순간 악마가 된다. 수정자본주의 따위는 빨갱이의 속임수라고 인식하는 듯하다.

NL이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그들 신앙의 대상인 '북한 싫어요' 하면 폭발하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거부감을 갖는 데에는 NL의 역할이 매우 컸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NL의 활동을 본 사람은 '문제의식에 동의했더니 대안이 북한이라고?'라는 거부감을 갖게 된 거다. 
구 민주노동당에서 이어진 통합진보당의 당권파가 NL의 본체이며 
경선 부정과 폭력 사태를 통해 이들이 반민주 세력이란 것이 폭넓게 알려졌다. 
단기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차라리 잘됐다. 

NL의 이론도 PD의 이론도 이미 그들의 이론이 미흡하다는 게 증명된 시대이니 한물 간 이론이지만, 대안을 내더라도 PD 계열이 낼 수 있지 NL은 존재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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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에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때(즉 꼬실때)크게 강조되는 것 하나가 '말'이다. 

왜 그럴까?

그건 '대화'가 남녀가 함께 경험 할 수 있는 행위중 소개팅에서 가용한 몇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 입장에서 남자랑 함께 뭘 하는 경험이 어떤게 있을까?

클럽이라면 춤을 함께 추겠고

여자가 운동을 좋아하면 스포츠를 함께 하거나 

PC게임을 좋아하는 여자라면 게임을 할 수도 있을거다.

그리고 섹스도 할거다.

이것들은 모두 '함께 하는 경험'이고 대화-즉 말빨-의 효과는 이런 행위들과 카테고리가 같다. 

유독 대화가 강조되는 이유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스포츠나 게임을 하는게 어렵기 때문이고, 

또 여자들끼리 모여서 놀때에도 수다 떠는게 주요 놀이거리일 정도로 말이 여자에게 가장 일반적인 채널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채널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 영향력은 말을 아주 잘 하는 것 만큼이나 효과적이다.


다른 채널로는 뭐가 있을까? 

가령 노래가 있다.

남자가 노래 불러주는 것이 흔한 로망이라면 

노래를 불러주는 것 대신 노래를 함께 하는 것은 더 효과적이다.

함께 부를 수 있는 쉬운 듀엣곡(보조 맞춰 주는 정도여도 된다)을 알려주고 함께 연습해서 화음 맞추면 그 효과는 남자 혼자서 매우 잘 불러준 노래보다도 크다. 

효과가 큰 것은 듀엣 또한 '함께 한' 것이기 때문이며, 

여자 입장에선 대화보다 낯선 경험이기 때문에 체감 효과는 더 크다. 

생소하면서도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은 굉장하게 보이기 마련이므로.


이는 단지 이성을 꼬시는 데에만 응용되진 않는다.

아이와 함께 놀 때에도 응용가능하다.

성별이 다른 두 사람이 겹치는 지점이 적은 만큼이나 세대가 다른 두 사람도 겹치는 지점이 적으므로 그 타개책으로 간단한 노래 함께 부르기는 효과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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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사회는 여자에게도 피곤하다. 끊임없이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하고 음모와 암투가 무기화된다. 

그럼 남자사회는 괜찮냐하면, 암컷사회도 수컷사회도 인간이 덜되면 정글이긴 마찬가지인데 양상이 다르다.


남자의 사회가 정글이 되는 요인은 아주 단순하다. 

힘의 논리.

강함/약함만 아는 수컷들이 옳음/그름을 따지는 인간의 탈을 쓰고 살려니까 피곤한거다. 

누가 쎈지 한번 가르면 긴 시간 갈등 끝나는 걸 왜 건건이 왈가왈부 입씨름을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세계다.

여자의 사회는 좋고/싫은 것만 아는 암컷들이 옳고/그름을 따지는 인간으로 살려니까 복잡하고 피곤한거고.


여자의 사회는 다 함께 피곤하다. 여자가 인간이 덜되면 자기 감정상의 호오랑 선악을 구분 못하는 게 두드러진다.

남자의 사회는 피착취자가 집중적으로 죽어난다. 남자가 인간이 덜되면 나보다 강하다 약하다랑 선악을 구분 못하는 게 두드러진다. 

남자 사회에 섞인 여자는 각종 폭력만 근절되면 편안하다. (아니면 피곤한 정도가 아니라 죽어난다.)

여자 사회에 섞인 남자는 폭력은 법으로 거의 근절되고 암투는 근절 안되기 때문에 손발 묶인채로 시달려서 미친듯이 피곤하다. 

수컷 사회에서는 약자(수컷 사회의 표현을 차용하면, '좆밥') 주제에 자기가 옳고 내가 틀리다고 따지는 상황이 존재하는 걸 이해못한다. (좆밥이 왜 개기지? 내가 만만해서 그러나? 라고 생각한다.) 이게 현실 사회에서도 발견되는데, 사회적 강자와 약자가 법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건 수컷 사회에선 이해 못할 논리다. 

가령 김승연 한화 회장이 일반인이랑 같은 죄 지으면 같은 처벌 받는 세상을 원한다는 건 수컷 사회와는 동떨어진 얘기다. 좆밥 주제에 강한 수컷과 같은 처우를 원할 수 없는 세상, 그게 수컷 사회의 키포인트다.

수컷 사회의 또 다른 부작용은 이기기 위한 경쟁과열로 쌍방 손실이 생긴다는 거다.

이겨야 한다->이기기 위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이긴 쪽은 이겨서 좋은데 이기기 위한 비용 지불 때문에 망하고 진 쪽은 져서 망한다는 딜레마.

싸워서 이기자니 혼자선 무슨 짓을 해도 무리짓는 깡패 앞에 답 없고 

이기기 위해 무리를 짓고 쌈질 포메이션으로 살자니 인생이 말린다. 

이기려고 가방에 흉기 넣고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

맨손으로 싸우자니 칼한테 못당하고 흉기들고 다니자니 인생이 말린다.

이는 법 없는 국제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국제관계에선 지면 뼈도 안남기고 발리고 

안 지자니 밥값보다 무기값이 더 들면서 군비확장 경쟁이 과열된다. 

내가 보기엔 이 딜레마 속에서 이리 갔다가 망하고 저리 갔다가 망하면서 시행착오를 반복해온게 인류의 역사다.


남자의 흔한 오류 : 강/약으로 판단하자(특징)->피착취자의 고통 극심, 폭력 경쟁 과열로 쌍방손실(부작용)->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자가 해법.(대안)

여자의 흔한 오류 : 호/오로 판단하자 ->맨날 서로 남의 시선 눈치보고, 음해와 암투가 무기화->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자가 해법.

'좆밥이 개기네? -> 내가 만만한가?(내가 틀렸나?가 아니라)' 라고 생각하는게 수컷의 사고 오류 양상.

'쟤 뭐야?->쟤 이상해.(내가 싫어하면->저 사람이 틀린거다)' 라고 생각하는게 암컷의 사고 오류 양상.

수컷사회의 맹점을 암컷사회로 포용하자는 주장은 틀리다.

양측 오류는 동일 방안으로 개선 가능하다.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위의 성향들은 아직도 현실에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지향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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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존재의의는 효율성에 있다.
인문학과 종교는 같은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인데, 인문학은 아래로부터 쌓아올라가는 방식이고 종교는 위에서부터 하달되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가르침(교육)이 존재하는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다. 가르침 없이 연구해서 도달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에 가르침을 행한다.
종교는 가르침이고, 따라서 그 존재의의는 효율성을 위함이다.
쌓아올라온 앎은 탐구자가 이미 알려진 지식을 이해할 때 올바른 이해를 할 역량이 보장되지만, 하달되는 가르침은 배우는 사람의 역량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올바른 가르침 조차도 하달과정에서의 오해는 발생하곤 하며 이는 정밀성을 갉아먹는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효율성을 위해 정밀성을 희생하는 구조다.

이를 배경으로 하는 가치판단은 상반될 수 있다.
효율성이 존재의의이므로 효율성을 강화해야한다는 기독교식 가치 판단도 가능할 것이며
'(어차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배우는 자들끼리) 불교의 법을 다투지 말라'는 불교식 가치판단도 가능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종교가 정밀성에 한계를 가지며 효율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내용은 전제해 둠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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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가치추구란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다. 
더 지혜로워지기 위해 연구 공부하거나 도덕적 무지나 나약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거나 예술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추구하거나 참선등을 통해 성스러운 초월지를 추구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인생에 무엇이 진정 가치있는가를 찾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가 제시하는 초월적 가치는 무엇인가?

4성제 12연기 6바라밀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사성제 - 생은 본래 고통이라 그 내부적인 가치만으로는 해법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이므로 이는 초월적 가치 추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십이연기 - 십이연기는 결국 무명을 타파하는 것, 즉 무언가 모르고 있는데 이를 알게 되는게 해법이라는 문제의식에 이른다. 앎을 얻는 것이 해법이라는 인식이다.
육바라밀 - 앞부분 다섯 바라밀들은 마지막의 반야바라밀을 위한 과정이고 반야바라밀은 나의 인식을 상위자아로 확장하는 것이다. 이는 만유재신론적 상위자아의 관점에서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을 간략화하면 불교가 가르치는 초월적 가치는 제한된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상위자아로의 인식 확장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삼법인 -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에 기초해 파악해보면
제행무상 : 세상만물이 영속적이지 않다.
제법무아 : 당장 체감하여 가지고 있는 '나'라는 감각에 집착치 말라.
일체개고 열반적정 : 생은 근본적으로 고통이며 그 안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은 허무할 뿐이니 수행을 통해 발전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이 해법이라는 인식을 갖을 것. 이는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라는 의미가 됨.
불교가 가르치는 초월적 가치를 제한된 나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의미로 파악할 경우 삼법인의 가르침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라는 관념자체가 착각에 불과하다는 해석등도 가능한데, 어느 쪽이 옳건간에 현재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아인식을 극복하는 것을 불교의 문제의식으로 봄에는 다르지 않다.)
'최종적으로는 우주전체도 나와 다르지 않음으로 포괄하게 될 상위자아로의 인식확장'이 불교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게 내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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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 되어라. 

아니면 초인의 전조가 되어라.

초인은 벼락같은 것이다. 벼락이 치기 전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바람은 벼락의 전조다. 초인을 부르는 비바람이 되어라. 

초월적 가치를 잃은 인간은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의 여신을 세운다. 삶과 건강을 통해 이룰 초월적인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건강을 목적으로서 추앙한다.

그리고 건강을 위한 건강에 매달려 먹고 싸는 인생을 살며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고 말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일어났다.


난 모태무교다. 종교는 없지만 천주교랑 불교는 뭔가 경건해보이고 개신교 신도가 세뇌스러울 경우에 한해서는 맞장구쳐주기 짜증나고 누가(주로 개신교) 종교 얘기 꺼내면 왠만함 그런 얘긴 하지 말지 싶은, 딱 그 정도의 배경에서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아직도 그러고 산다. 

그래도 난 스스로 종교적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초월적인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면 그 사람은 종교적인 인간이 될 소질이 있다. 

그것은 예술과도 맞닿아 있고 도덕과도, 혹은 학문적 진리추구와도 맞닿아 있다. 초월적가치는 진선미성중에 성스러움에만 국한되는게 아니며 그중 성스러움 조차도 꼭 인격신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종교적 가치의 긍정적인 면에 있어 중요한 건 어떤 신을 섬기느냐가 아니다. 

종교의 '어떤 신을 섬기느냐'로 구분되는 측면은 긍정적인 영향을 낳은 적이 거의 없다.

종교의 긍정적인 면모를 낳는 것은 초월적 가치를 긍정하느냐 여부다.

종교는 가르침을 이야기에 담아 내놓는다.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의 이야기를 내면화 하면 가상의 기록이 독자의 인지 내적으로는 살아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종교의 이야기는 신자에게 살아있는 이야기가 됨으로써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살아있는 상태로 전달한다. 종교의 이야기는 가르침을 소화흡수 가능한 형태로 조리해 놓은 포장이다.

어떤 신을 믿느냐는 것은 종교의 '이야기'이다.

초월적인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는 방향성은 종교의 '가르침'이다. 

종교의 본질이 가르침에 있기에, 가르침을 습득했다면 이야기는 중요한게 아니다.

(이 주장은 기독교도는 동의 안할듯하고 불교도는 동의할 듯 하다. 교리상 기독교는 '이야기'도 믿음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고 불교는 이야기는 다 가르치려고 사용한 방편이라고 하므로.)


과학이 신이 된 시대다. 

사람들에겐 이기는 편에 붙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 이기는 편 우리편, 지지정당은 집권여당. 

근래 영역을 확장해온 과학은 분명 이기는 편 이었다. 

그런데 이기는 편에 붙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과학이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과학은 대중에게 새로운 신앙이 되었다. 

이 과학숭배신앙은 묘한 병폐를 낳고 있다. 

과학을 신으로 숭배하면 그 신이 사실이라고 알려주는 이야기는 신화에 해당하는데

종교였다면 그 이야기 안에 가르침이 담겨져 있을 것이나 

과학은 종교가 아닌지라 이야기를 까보면 안에 가르침이 담겨있지 않다. 

그래서 과학을 숭배한 사람들은 '없다'를 가르침으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즉 삶에 있어 초월적 가치의 상실이다. 

그들은 그렇게 니체가 얘기했던 '신이 죽은 자리에 건강을 여신으로 세우고 행복을 발명했다 주장하는 경멸적 인간들'이 되어간다. 

이런 징후는 지식의 끝자락에서 더 높이 올라가려고 애쓰는 과학자들에게서 발견되진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데 정신이 팔려있다는 면에서 초월적 가치를 추구한다. 

혼란은 단편적 지식으로 세계관의 전체를 조망하려 하는 추종자들에게 일어난다.

건강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야 더 나은 가치를 갖는 삶이 되는가?

그들에겐 이에 대한 답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월적 가치란 없는 것이 답'이라는 가르침을 과학 신화가 담고 있다는 믿음이 그 신앙의 교리다. 그들의 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걸 추종자들은 믿지 않는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문제일 수가 없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는 이과의 교과목중 하나인 학문이지만, 사실은 과학은 '어떻게 하면 틀리지 않은 지식을 효율적으로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의 이름이다. 지식을 축적함에 있어 틀린 지식이 섞여들 가능성을 너무 배척하면 탄탄하되 쌓아 올라가는 효율성에 한계가 오고, 쌓는 속도에 집착하면 잘못된 지식이 섞여든다. 그 정확성과 효율성 사이에서 합당한 지점을 합의한 방법론의 이름이 과학이다. 

연역된 지식은 논리적으로 참이다. 귀납적 지식은 언제라도 반례가 등장해 뒤집힐 수 있기 때문에 연역된 지식만이 참이라는 합리주의자의 주장에 대응하여 '인간의 논리 이성 체계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미친자는 자기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모른다) 경험된 것이 참이다'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가 등장했다.

(합리주의자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선 경험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사상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말로 문맥에 맞춰 번역하면 사변지상주의자라고 하는게 더 맞지 않나 싶다.

경험주의에서 '경험도 귀납적이므로 뒤집힐 수 있다' 쪽으로 가면 회의주의 불가지론자가 된다.)

경험된 모든 것이 참은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참인 명제를 집적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하여 합의점을 찾은 '경험주의의 일부'가 우리가 아는 과학이다. 이 방법론은 성공적으로 모태인 철학의 위상을 넘어섰다.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검증된 명제에 대해 참이라고 하는 것이 물리학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지식을 쌓는 속도 효율성의 한계에 마주친다.

화학원소 주기율표는 원자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하는지 해명되기 전부터 관측되었다. 물리학의 방법론 만으로는 연역되지 않았으므로 화학은 과학으로 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과학은 비록 연역적으로 도출되지는 않았더라도 독립적인 실험으로 재연이 가능한 명제까지는 참으로 치기로 한다. 이제까지 재연되던 경험이 갑자기 다음 실험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틀어지면서 틀린 지식을 쌓게 될 위험은 무시할만큼 작은 것이라는 까닭이다. '연역적으로 도출되고 경험적으로 확인되거나, 실험으로 재연가능한 지식을 참으로 여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과학의 방법론이다. 

사회과학은 독립적인 실험이 어렵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 방법론을 따르기는 어렵다. 지식 축적의 효율성을 위해 다소 널럴하게나마 가능한 한계내에서 과학 방법론을 참조하여 쌓아올라가겠다는 것이 사회과학의 방법이다.

지식축적을 탑에 비유하면 물리학은 지상에서 시작한 1층, 화학이나 생물학등은 허공중에서 시작한 2층, 가정위에 통계적 방법을 이용하는 사회과학 역시 허공중에서 시작한 3층, 가정위에 사변적으로 탐구하는 인문학은 더 널럴한 4층, 종교는 5층에 해당할 것이다. 현재 화학의 주춧돌은 물리학으로부터 연역증명되었고 서로 미시-거시의 관계로 합치되었다. 이제 화학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온 셈이다.

다른 학문간의 합치는 아직이다.


다른 모든 지식이 종국에는 1층에서 시작한 과학으로 환원될 것이라는 주장이 통일과학운동이며 환원주의라고도 한다. 과학의 방법론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이었는지(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론이었다)가 검증된 지금, 모든 앎을 과학 방법론에 의지하여 풀어나가자는 주장은 지지를 받을만 하다. 3층의 사회과학까지는 제한적이나마 과학 방법론에 의존코자 하고 있으므로, 4~5층의 종교나 철학이 과학 방법론을 이용하지 않고자 한다면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그것이다.

세계관의 세부를 사변적으로 밝혀내고자 접근한 시도는 고대부터 여럿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실패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세상이 원소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원소가 공기라는 둥 땅물불바람이라는둥 하고 있을때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뭘 모르는 지를 알라.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며 그러한 사변적 시도가 성공할 수 없는 것임을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는 저녁 노을은 왜 붉고 저녁해는 왜 크게 보이는데도 추운지 하는 질문에 '네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여라. 그것이 아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석가모니는 다른 종교가가 세계관의 지식에 대해 불교는 어떻게 가르치냐는 열가지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는 (십무기) 대답을 했다.

이 대답들의 맥락은 모두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관의 지식에 대해 사변적으로 접근하지 말라.'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그것은 과학의 할 일이다.'

석가모니/공자/소크라테스등 종교/철학가들이 객관적 지식 축적은 과학의 할일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은 그 외적인 일을 한다는 말인 셈이다. 객관적 지식 축적 이외의 일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가치관 이라고 생각한다. 가치관은 삶의 방향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가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 앞서 종교가 '이야기' 속에 담아 내놓은 '가르침'이란 이것이라는 게 내 해석이다.

가치관은 전체적으로 조망된 세계관으로부터 도출된다. 과학은 세계관의 세부지식을 오류 없이 쌓아나가지만 그 지식이 편중되거나 미완성일 경우 가치판단에는 오류가 생긴다.

(어느 음식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대요! 라는 지식은 그 음식을 멀리 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그런데 다음날 같은 음식에서 항암물질이 발견된다면? 앞의 지식은 틀리지 않으나 판단은 틀리게 된다. 전체적인 이해를 하지 못한 지식은 틀린 가치판단을 유도한다.)[a]

그럼 과학의 지식은 편중되거나 미완성이어서 세계관을 조망하기에 합당하지 않을까? 합당치 않다는 증명이 되거나, 아니면 심증 삼을 징조라도 있는가? 

나는 다음의 것들을 그러한 징조로 여긴다.

기존의 가치관은 연역된 게 아니며 논리적으로 허공중에 떠있는 것이다. 이에 만약 기존 가치관념들을 모두 부정하고 과학지식에 근거한 가치관념만으로 가치체계를 정립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캐릭터가 있다. 빅뱅이론의 쉘든이다. 과학방법론으로 검증된 지식만으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나면 그로부터 도출된 가치관은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많은 형태가 되는데 쉘든은 그 치밀함과 허술함이 병존하는 철골구조 건물같은 모습으로 웃음을 준다. 쉘든을 보며 웃음이 나는 만큼이 과학 지식으로 정립된 세계관의 빈틈이다.

또한 과학에는 가치중립성이라는 말이 따라붙곤 한다. 지식을 근거로 가치판단이 바꾸는데 가치중립적인 지식이란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굳이 가치중립성이라는 주장을 해야 했다면, 그 배경에는 과학지식을 가치 판단의 총체적 구조물인 현실 생활에 적용했을 때 뭔가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 것(적용한 주체가 과학자든 정치가든 일반 대중이든간에)을 누차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가치중립성이라는 주장 자체가 과학으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조망하기엔 이르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사회 현상이다. 앞서의 두가지 징조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신앙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그게 문제가 있다면 틀린 가치관이 야기하는 부작용도 관찰될 것이다.

난 '피로사회'가 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생의 서사적 의미를 잃어버리고 지켜야 할 것은 오로지 몸뚱이 만이 남아 건강을 여신에 자리에 올리고 그 건강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는' 피로사회의 구성원들, 그들은 항상 지쳐있다. 무의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빨리 지치기 때문이다. 

생에 초월적 가치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때 지쳐버리는 현상을 상시 체험하게 된다. 피로사회가 지적하는 우울증 등의 현대의 질병. 이것이 세번째 징조다.

세계관의 세부지식을 사변적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그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와 동시에 세계관을 정립하기에 부족한 지식 체계로 세계관을 정립하고 조망하면 틀린 가치관에 이른다. 

잘못된 가치관이 개인에게 미치는 타격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잘못된 지식보다도 직접적이다.

여기까지는 과학으로 가치관을 정립하면 틀린 결과를 얻는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올바른 가치관을 얻을 수 있을까?


무엇이 올바른 가치관인가를 탐구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록 증명되지 않은 허공중에 토대를 두고 시작하지만 위로 쌓아 올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달진리다.[b]

쌓아 올라가는 방법이란 '4층의 인문학'이고 하달되는 진리를 이해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5층의 종교'이다. 여기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서두에서 얘기한 초월적 가치 무엇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한다면 그게 곧 인문학이고 종교적 고민이 되기 때문이다.

먼저 종교부터 얘기하겠다.

만약, 하층의 지식이 5층의 종교에 이르러 저층 고층간 합치를 완전히 이룬다면 그때 증명해야 할 것은 종교의 '이야기'(신화)가 아니라 가르침, 가치관일 것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방향성과 생의 초월적 가치가 그 하층의 지식과 일치해야 종교는 사기가 아닐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종교적 진리에 대해 최소한의 검증방안으로 다음을 모색할 수 있다.

1. 종교 내적 모순 없을 것.

2. 현실에 대한 설명이 검증된 지식과 모순 없을 것. 또한 '4층의 인문학'과 모순 없을 것. (저층 고층 합치)

1번. 내적 모순 없음. 

이것은 판타지 문학에 조차도 요구되는 사항이다. 

앞서 종교가 '가르침을 이야기에 싸서 내놓은 것'이라고 해석한 것은 종교에게 '현실에서 지속 가능한 판타지'라는 지위를 준다. 의외로 이것은 종교의 위상에 대한 비하가 아니다. 문학은 그 작품내에 현실에서 지속 가능한 삶의 진리(가치관)를 담을 때 명작으로 추앙받는다. 판타지/SF 소설은 '마법이 없는 세상에서는 지속하기 어려운 진리(가치관)'를 담아내곤 하기 때문에 하위문학으로 치부되곤 하는데, 그 와중에서도 현실 지속 가능한 가치관을 담아내는 판타지소설은 다시 걸작 대우를 받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는 현실에 지속 가능한 판타지이며, 이는 '종교가 단순히 판타지 서술이라면 굳이 여타 판타지물과 구별되어 특별한 위상을 가질 이유가 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된다.

2번. 검증된 지식과의 모순없음. 

저층지식과의 합치. 즉 종교는 그 가치관의 올바름을 인문학 앞에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말을 현재 맥락에서 (초월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을 향해) 다시 말하면 이렇게 된다.

'종교가 제시하는 삶의 방향성이 합당한지 증명해야 하는 대상은 일차적으론 바로 아래에 있는 인문학이 먼저다.

과학이 3층의 통계적 사회과학과도 합치(혹은 반증)하지 못한 채로 5층의 종교 가치관이 옳은지 틀린지 환원 증명하는 시도는 세계관 조망이 불가하여 반드시 틀린 결론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 남는 것은 인문학이다. 인문학적 가정위에 출발하여 실험없이 사유로 진척시켜온 인문학은 어떻게 그 참됨을 증명하느냐가 남는다. 그리고 그 대답도 앞과 유사하다. '인문학이 스스로 조직적인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대상은 일단 통계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는 사회과학 지식과 합치이지 그보다 아래에 있는 생물학으로 환원하는 시도는 이르다.'


이상의 배경에서 내가 결국 도달한 곳은 불교가 제시하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 종교인이 따르는 총체적 가치관이 인문학적 잣대 앞에 제단되기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리학이라는 저층 지식과 합치된 화학(물리학보다 더 널럴한 기준으로 토대를 쌓은 지식체계)이 물리학과 거시-미시적 관계를 이루며 저층 지식에 합류하듯, 종교가 저층지식과 합치되는 그 날에는 종교의 가르침도 과학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과학'은 지금의 '이과 교과목의 한가지'가 아닐 것이다.


[a] '세계관의 조망'이란 이런 의미를 갖는다. 지식을 더 알면 더 알수록 더 정확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게 되고, 지식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더 부정확한 가치 판단을 하게 된다. 환원주의적으로 과학이 종국에는 모든 학문을 합치or반증할 것이라는 주장은, 역설적으로 과학은 아직 그 학문의 지식들을 내포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가치관을 도출하기에 부족한 상태라는 의미가 된다. 현재 과학 지식에서 도출된 가치관 체계를 적용한 개인은 허술하고 우스꽝스런 캐릭터가 되며, 적용한 사례들은 엉뚱한 결과가 나와서 '가치중립성'이란 개념을 고안해야 했고, 적용한 사회는 '피로사회'의 부작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론적이로도 사례적으로도 같은 의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b]지식의 상향 추구에서는 세계관에서 가치관이 도출되나, 하달 진리인 종교의 경우에는 이 순서가 역전된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종교적 가치관은 하달된 진리이고, 종교적 세계관은 그 가치관을 담아서 설명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가령 불교는 '종교는 세계관 지식에 대해 함구하는 편이 옳다.(십무기) 가르침은 비유와 방편을 통해 설명하고 있으나 이 비유와 방편은 단지 가르치기 위한 것이니 있는 그대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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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이익에 의존하다가 명분을 잃고

부당한 이익으로 버티며 정당한 이익을 지키지 못하여 

결국 정의의 명분 앞에 그 부당한 이익마저 잃어버리는 형태의 몰락을 종종 본다.


가령 의사는 부당수입인 리베이트에 의존하다가 정당한 수입인 의료 수가를 현실화하는데 집중하지 못하면 리베이트 챙기는 리스크가 상승하면서 어려움에 처한다.

자영업은 탈세의 이익에 의존하다가 정당한 이익을 지키지 못하면 마지막은 정의의 이름으로 날아온 칼 앞에 몰락당한다.

부당 이익을 챙기면 처음에는 편하다. 그런데 점차 그 상태를 기준으로 이익 균형이 맞춰진다. 

정당치 못한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니 명분은 잃은 채이고, 처음에 폭리이던 수입은 점점 일상수준으로 완화된다. 그런 후에 마지막 몰락의 칼은 합법적으로. 

높은 수준의 이익을 취하는 것에 대한 압박이 들어올 때 스스로 부당이익을 잘라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이렇게 된다.


이런 구조의 느낌을 마트에 가서 느낀다.

대형마트는 노동 착취의 현장이 아닐까?

주말 실습사원이라면서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 저 젊은 노동력은 얼마나 헐값으로 부려먹히고 있는 걸까?

결코 녹록치 않은 마트 캐셔일을 하는 중장년의 여성들은 얼마를 받고 몇교대로 일하며 휴일에 쉬기는 잘 쉴까?

마트 앞에 서서 교통정리를 하는 일도 상당한 중노동인데 얼마나 받고 일하는 걸까?


내가 사는 마트의 물품은 이런 착취위에서 원가를 산출하고 있는 물품이니 나도 저 부당 착취의 위에 발을 얹고 있는 셈이다. 

임금상승이 물가상승률도 감당 못하여 나날이 가난해지고 있는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가 받는 지나치게 싼 봉급의 어려움을 또 다른 노동착취로 전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식의 부당이익 위에서 버틸만하다고 살면서 정당한 권리와 명분을 함께 잃어 나가면 

마지막엔 정의의 이름으로 몰락당하는 결과를 맞이할 것 같다.


마트가 아니더라도 세상엔 노동 착취다 싶은 힘든 일들이 많다. 

가령 택배업도 그렇게 힘들다고 들었다. 내가 누리는 싼 택배비용은 그 노동착취위에서 산출된 것일터.

택배에 그치겠는가? 물류업 전반이 착취란 얘기일텐데 그 영향만해도 산업 전반에 녹아있기 마련이다.

당장 버틸만하다고 해서 착취가 남의 일이란 생각이 안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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