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감정과 연계되어있다.
경험한 일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경험한 모든 일이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어떤 일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오감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반면
어떤 일은 방금 전에 내가 겪은 일인데도 전해들은 일처럼 막연하게만 떠오른다.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과 남의 일처럼 막연하게 기억나는 일의 차이가 뭘까?
당시의 감정 상태를 지금도 느낀다면 그 감정을 매개로 해서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자아동일성과 관계있는 문제다.
보통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일한 존재임을 전제하고 차이를 찾는 쪽으로 생각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생각해보는 편이 설명이 쉽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와 기억과 인과를 공유하지만 엄밀히 다른 존재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반드시 차이를 갖으므로 기본적으로 다른 존재인데
감정의 연속성은 이 다른 존재들간의 동일성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내가 과거 어느 사건을 싫어했고 현재도 그 사건을 싫어하고 있다면
싫어하는 나라는 측면에서 자아동일성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 이론적인 설명은 실재로 기억의 선명함으로 나타난다.
아픔을 극복한 사람이란
자기 아픔을 상대로 투쟁해서 이기고 올라선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아픈 경험에 맺힌 감정이 없는 사람이다.
맺힌 감정이 없을 때 자아동일성은 깨진다.
그리고 그 효과는 기억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맺힌 감정이 없어지고 나면 내 일이었던 그 생생한 경험이
마치 남의 일을 전해들은 것처럼 흐려진다.
아픔 없는 사람은 없다.
그 아픔은 신체적 약점일수도 있고 불우한 성장 배경일수도 있다.
그때의 충격과 감정을 그대로 안고 그 충격에 대항해 싸워서 '극복'하려는 자세를 갖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나에게 다정하지않고 폭력적이었던 쓰레기같은 부모의 영향을 벗어나 보이기 위해 공부할거야.'
'나는 키가 작지만, 그래도 돈을 많이 버니까 키 큰 사람을 이겨'가 아니라
'내 키 : 평균보다 작은 편.' -> 그리고 아무 생각 안난다.
객관적 사실만 남고 엮인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그와 연계된 기억도 남의 일을 전해들은 것처럼 흐려진다.
기독교에서 '원수를 용서함으로써 치유를 얻는' 형태는 이것과 매우 닮아 있다. (불교식으론 12연기의 애-취를 끊어서 업으로 이어지는 인과를 단절하는 것일듯)
현재의 내가 원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면 자아동일성이 깨진다.
그리고나면 원수가 내게 입힌 과거의 상처가 잊혀진다.
원수같은 부모에게 받은 가정교육의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아무리 재교육해도
그 부모의 영향을 이겨내려 하는 한은
싫어하는 모습에 민감해져서
결국 아무 타인에게서나 자기가 원수로 여기는 부모의 모습, 가령 위선을 느끼게 되고, 혹은 폭력성을 보게 되며, 인생 유전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자아동일성이 유지되는 한 기억은 수십년이 지나도 오감 한자락까지 생생하게 떠오르고 고통은 지속되며 결과적으로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가장 중요한 극복은 과거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안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과거를 바꾸고 싶다'라는 마음을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로 인정하고
당시의 감정을 놓아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치유다.
감정이 바뀌면 자아동일성이 깨져서 문자 그대로 남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