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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감정과 연계되어있다.
경험한 일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경험한 모든 일이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어떤 일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오감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반면 
어떤 일은 방금 전에 내가 겪은 일인데도 전해들은 일처럼 막연하게만 떠오른다.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과 남의 일처럼 막연하게 기억나는 일의 차이가 뭘까?
당시의 감정 상태를 지금도 느낀다면 그 감정을 매개로 해서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자아동일성과 관계있는 문제다. 
보통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일한 존재임을 전제하고 차이를 찾는 쪽으로 생각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생각해보는 편이 설명이 쉽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와 기억과 인과를 공유하지만 엄밀히 다른 존재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반드시 차이를 갖으므로 기본적으로 다른 존재인데
감정의 연속성은 이 다른 존재들간의 동일성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내가 과거 어느 사건을 싫어했고 현재도 그 사건을 싫어하고 있다면 
싫어하는 나라는 측면에서 자아동일성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 이론적인 설명은 실재로 기억의 선명함으로 나타난다.

아픔을 극복한 사람이란 
자기 아픔을 상대로 투쟁해서 이기고 올라선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아픈 경험에 맺힌 감정이 없는 사람이다.
맺힌 감정이 없을 때 자아동일성은 깨진다. 
그리고 그 효과는 기억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맺힌 감정이 없어지고 나면 내 일이었던 그 생생한 경험이 
마치 남의 일을 전해들은 것처럼 흐려진다.

아픔 없는 사람은 없다.
그 아픔은 신체적 약점일수도 있고 불우한 성장 배경일수도 있다. 

그런데 고난이 지나간 후에 그 충격을 흉터로 남기고 묻어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때의 충격과 감정을 그대로 안고 그 충격에 대항해 싸워서 '극복'하려는 자세를 갖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나는 키가 작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키를 커버해보이겠어'
'나에게 다정하지않고 폭력적이었던 쓰레기같은 부모의 영향을 벗어나 보이기 위해 공부할거야.' 
(이상의 예시들은 이 글을 작성한 당시에 인터넷 게시판에서 본 이야기들이다. 우리 부모님이 이 글을 보실 일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부모님의 자식이 한순간이라도 저런 생각을 했다고 오해하시는 일이 있으면 안되므로 밝혀둔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극복이 아니다. 자아 동일성이 유지되는 한 나이가 들고 비싼 옷을 걸쳐도 겉을 꾸미는 것이 될 뿐 본질은 양지를 부러워하던 그 시절의 어린 아이 그대로 바뀌지 않는다. 
진짜 극복은 현상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온다.
'나는 키가 작지만, 그래도 돈을 많이 버니까 키 큰 사람을 이겨'가 아니라
'내 키 : 평균보다 작은 편.' -> 그리고 아무 생각 안난다.
객관적 사실만 남고 엮인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그와 연계된 기억도 남의 일을 전해들은 것처럼 흐려진다. 
기독교에서 '원수를 용서함으로써 치유를 얻는' 형태는 이것과 매우 닮아 있다. (불교식으론 12연기의 애-취를 끊어서 업으로 이어지는 인과를 단절하는 것일듯)
현재의 내가 원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면 자아동일성이 깨진다.
그리고나면 원수가 내게 입힌 과거의 상처가 잊혀진다.
원수같은 부모에게 받은 가정교육의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아무리 재교육해도 
그 부모의 영향을 이겨내려 하는 한은 
싫어하는 모습에 민감해져서
결국 아무 타인에게서나 자기가 원수로 여기는 부모의 모습, 가령 위선을 느끼게 되고, 혹은 폭력성을 보게 되며, 인생 유전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자아동일성이 유지되는 한 기억은 수십년이 지나도 오감 한자락까지 생생하게 떠오르고 고통은 지속되며 결과적으로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가장 중요한 극복은 과거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안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과거를 바꾸고 싶다'라는 마음을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로 인정하고
당시의 감정을 놓아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치유다.
감정이 바뀌면 자아동일성이 깨져서 문자 그대로 남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 여기서 중요한 건 감정이 바뀌면 자아동일성이 깨지면서 생생하던 기억이 흐려진다는 현상임에 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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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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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부모를 기준으로 성장한다.

나를 베낀 아이를 키우게 된다는 건 오묘하다.

내가 윽박지르기 잘하고 우기는 스타일이면 자식이 윽박지르기 잘하고 우기는 스타일로 자란다.
나이든 나는 윽박지르기 잘하는 자라나는 자식을 상대로 억지 우김을 당하는 꼴을 당하거나
혹은 더 세게 윽박질러 자식조차도 이기거나 하게 된다.
더 세게 윽박질러 자식을 찍어눌러 버리면 내 분신인 내 자식이 찍어눌린 상처받은 아이로 자라게 된다.
이겨도 지고 져도 진다. 

내 비틀린 구석을 내가 인정 안하면 내 자식이 비틀린 구석을 베껴서 자란다.
자식이 내 비틀림을 극복해 버리면 자식이 나를 등진다.
자식 조차도 내 비틀린 구석이 옳은 거라고 승복시켜 버리면 (가령 속물성을 완전히 전수시켜 버리면)
자식이 비틀린 사람이 되어 나랑 똑같이 비틀린 작자를 결혼하겠다고 데려온다. 
이겨도 지고 져도 진다.

자식은 말로 속일 수 없는 거울, 혹은 고집으로 눈가릴 수 없는 부메랑 같다.
내가 틀렸다면, 말로 속여도, 고집으로 우겨도, 어리석어서 자기가 잘못임을 모르는 경우까지도,
내 가치관의 비틀림을 그대로 승계한 자식을 낳아 
타인이면서도 자신과 같은 '자식'이라는 입장에 그 비틀림을 둔 채로 평생을 겪음으로서 업보를 치뤄야 하는 관계가 된다.

내가 옳다면 백만명이 우겨도 내 옳음이 자식에게 나타난다.
내가 틀리다면 백만명을 속여도 그 틀림을 물려받은 자식과 부대껴야 한다.
사람이 자식을 낳아 키운다는 건 오묘하다.
업보라는 의미에서.

+ 이것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회의감이며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안도를 얻었다.
자식은 나의 업보이고 거울이지만
배우자는 자식에 앞서 만나게 되는 나의 업보이자 거울이다.
또한 자식에게 있어서는 나 이외에 참조하게 될 또 한명의 1차 레퍼런스다.
나의 거울이라는 면에서나 
자식이 보고 배울 사람이라는 면에서나 
우리 아이는 우리 부인을 닮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심이다. 

내가 안도를 얻은 방식은 개인적이지만 보편적으로도 참조할 여지가 있다. 
누구나 아이를 얻기 전에 배우자를 얻고
그 배우자는 자기의 성품,행동,선택,지혜와 무지를 반영하는 업보이자 거울이니까.
다만 이 개인적 안도를 다른 사람의 경우에 적용하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불우한 성장 배경은 악조건이긴 하지만 악조건을 극복하고 훌륭한 자식이 자라나는 일도 왕왕 있다.
자식이 부모의 거울이라는건 부모입장에서 반성할 때에나 의미있는 말이며 
부모가 훌륭치 못하니 거울인 그 자식도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명백히 틀리다.
마찬가지로 배우자가 그의 거울이라는 것 역시 자기 반성할 때 의미있는 말임을 오인해서는 안된다. 
각자 괜찮은 사람 둘이 만나서도 이별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며
요즘 이혼부부 드물지 않은 판에, 이혼을 낙인으로 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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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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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내가 안철수에게 바라는 가장 큰 것은 '기업의 주주 중심주의를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로 바꾸도록 기업 지배구조를 개편하는데에 정부가 관여할 것이다'라는 부분이고
그 다음으로 바라는 것은 '강소기업 지원 정책'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활동의 주체인 기업의 주주 중심주의를 이해관계자 중심주의로 바꾸도록 할 것이라는 말은 
투자vs근로, 재산vs재주의 협력 구조에서 재산 쪽으로 치우친 균형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다.
강소기업 육성으로 작은 기업에 고급여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것은 대기업이 고용 독점으로 피고용인을 스펙 경쟁시키는 구조를 바꿔서 역시 투자vs근로, 재산vs재주의 협력 구조에서 재산 쪽으로 치우친 균형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다.
나는 이것이 현재의 시스템 버그를 해결하는 근본 해법이라고 생각하며
오직 안철수만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론이 안철수를 대선에 이를 정도로 강하게 호출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죽도록 노력해도 물려받은 거 없으면 새경 몇 푼 못받는 하인이 되는구나. 세상 정말 좆같지 않냐?'라고 한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안철수는 그에 대한 가장 분명한 해법을 얘기해왔다.)

정당이 국민의 눈치보다 계파 리더의 눈치를 살피는 공고한 권력 담합 기구가 된 현시점에서 
오로지 국민의 지지로 대선 출마에 도달한 안철수의 지지율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안철수는 존재 자체로 정당들에 대한 경고가 된다. 

안철수의 대선 출마를 적극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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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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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인 것을 풀고 상상을 펼쳐보자.


예전에 양자역학 확률함수를 처음 접했을 때 이런 상상을 했다.
운동의 결과가 확률로 기술된다면, 우연은 의지가 작용할 수 있는 틈새가 되지 않을까?
의지라 함은 신의 의지, 혹은 상위자아의 의지일 수도 있고 또한 그 하위자아인 개체의 자유의지 까지도 의미하기로 한다.

사실 '검출되지 않으나 확률 함수를 통해 영향을 미치는 의지'의 존재는 운동을 기술하기 위해 필요가 없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틈새가 없이는 자유의지도 존재할 틈이 없다.
인간이 '유기물로 만든 컴퓨터'가 아니라 정말로 '생각'을 하는 존재이려면 어떤 식으로 작용하든 간에 이런 틈새가 필요하다.

random event generator(REG)를 이용하여 생각이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지를 살펴본 두 가지 실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는 이 링크의 실험이다.
http://www.princeton.edu/~pear/experiments.html
실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or -1을 내놓는 일종의 동전 던지기를 구현한 후, 다수 번 반복 구동하면 결과의 총합은 0 근처에 머무른다.
이 상태에서 사람이 입회하여 '+1 나와라'고 의념하는 경우를 다수명 다수회 실험하고
반대로 '-1 나와라'고 의념하는 경우를 다수명 다수회 실험했더니
이 그래프와 같은 결과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http://www.princeton.edu/~pear/images/single-operator-graph.jpg

다른 하나는 웹에서 찾지 못했는데 다음 내용이었다.
난수발생기로 무작위 방향으로 돌아다니게 하는 로봇을 만들어서 갓 태어난 병아리들에게 엄마로 인식하게 한 후
실험군으로 병아리들을 실험장 한쪽 바깥에 위치 시키고 사각 실험장에 로봇을 돌아다니게 한다.
대조군으로는 병아리가 없는 상태에서 로봇을 돌아다니게 한다.
병아리는 엄마로 인식한 로봇이 병아리 쪽에 가깝게 있기를 원할 것이다.
의지의 차이를 비교해본 결과, 병아리가 없을 때에는 로봇이 실험장 전영역을 돌아다녔지만 병아리가 있을 때에는 병아리 쪽에 치우치는 결과를 보였다는 이야기. 이 실험의 후속으로, 병아리는 어두운 것을 극도로 싫어하므로 암실에서 로봇에만 광원을 달아서 실험해도 병아리가 로봇이 가까이 오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에 유사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실험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 더 간단하게는 그냥 농담 같은 사기일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정말 저런 결과가 나와도 그 관찰은 무시된다.
기존 패러다임이 안정적인 정상과학의 시기에 머무르는 동안에, 기존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발견되면 그 현상은 무시된다. 또한 그 현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설명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구 패러다임은 모순이 있다 해도 폐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만약 의지가 우연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발견된다 해도 그 관찰 결과는 농담 수준을 벗어나는 취급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상상을 자유롭게 해서 저 실험이 사실이라고 치고 생각해보자.
두번째 실험에서 병아리는 로봇의 구동 원리를 모른다. 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부 구조를 알 수 없다. 단지 '결과로서 로봇이 가까이 있는 상태'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앞의 실험에서도 마찬가지. 실험에 참가한 사람은 저 '동전던지기'의 원리를 알지 못한다. '+1 나와라'고 의념했다는 건 그저 그런 결과를 바랬다는 것 뿐이다.
바램이 우연에 작용하여 의지한 결과에 가까운 값이 나오도록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두번째 실험을 감안하면, 그것도 사람이 아닌 어린 병아리 정도로서도 뭔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유효하게.

우연에 의지가 작용할까?
그런 것은 없고 사람은 생각을 하는 척 하고 있을 뿐인 유기질 컴퓨터일까?



저 실험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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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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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내가 인식한 정치세계의 구조다. 물론 나는 정치인이 아니고, 현실정치에 대한 내 인식이래봐야 겉핥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전제로 깔고 시작하겠다. 

정당 혹은 계파는 선출직 수를 가지고 임명직 교섭을 한다.
'우리 계파에 임명직의 권한 있는 자리를 주면 우리 의원이 국회에서 네 편이 되어 주겠다. 안주면 우리는 힘을 모아 반대할 것이다'라고.
그래서 정당 혹은 계파는 국회의원 수 만큼의 협상력을 가지고 협상해서 받아낸 권한 있는 자리의 힘으로 권력을 누린다.

이건 정당 정치가 갖고 있는 권력 카르텔의 면모다. 
국민은 길게 기억하지 못할 일을 정당/계파의 리더는 길게 기억한다. 
국민의 지지는 다음 투표 때에나 발휘되는 미래 권력이며 그 기억력은 길지 않다.
계파 리더는 협상으로 얻어낸 자리를 조직 구성원들에게 돌아가며 제공하는 인사권자가 된다. 
조직 구성원은 정당 계파의 지지와 자기 역량을 합쳐 국민의 표를 끌어모아 선출직을 창출하고, 계파 리더는 선출직을 모아서 협상을 통해 임명직을 얻어낸다.

문제는 권력 조직이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때 나타난다.
권력 조직 자체가 창출해내는 표로도 임명직을 얻어낼 협상력이 충분하여
국민의 눈치보다 조직 리더의 눈치가 무서운 막강한 권력 조직은 
조직 구성원들이 권력 카르텔의 논리에 충실하게 되고 
그 결과는 그들이 눈치보지 않는 국민을 국가에서 소외 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소외된 국민이란 노예나 다를 바 없다.

진보라고 절대선이 아니고, 보수라고 절대악이 아니다. 
'보수진영'이라는 권력 조직이 악이 아니고, '진보진영'이라는 권력 조직이 선이 아니다. 
권력 조직이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을 때 그 권력 카르텔이 악이다.     

그럼 유권자가 할 일은 뭔가?
조직을 보지 말고 사람을 보고 뽑아야 한다. 그가 제시하는 미래 비전을 보고 뽑아야 한다. 
총선에 있어서도 유권자가 정당을 보고 뽑을 때 정당은 국민 눈치를 안 보게 되고 
권력 카르텔의 지위는 더욱 굳건해진다.
권력 조직을 보고 투표 하는 건 권력 카르텔에 투표하는 거다. 그럼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진다.
각 사람을 보고 뽑을 때 권력 카르텔은 약화된다.
정당이 안하무인이라 느껴지면, 마치 당이란 게 없는 것처럼 사람을 보고 투표하라. 
(무슨 의미냐 싶으면 
지난 총선때 민주당 후보 이력이 한나라당 후보 이력 같고 
한나라당 후보 이력이 민주당 후보 이력 같다고 느꼈던 사람 손들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이건 국민이 정당에게 원하는 건 권력 카르텔을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정당이 국민 눈치를 보게 되면 안 풀릴 일이 별로 없다.

박근혜는 권력 카르텔 구조를 잘 다루는 것을 장점으로 하는 인물이다. 
조직내 상벌이 확실하고, 밖으로 드러나는 경영 방향성이 없다고 비판받을 정도로 '조직의 최대 이윤 그 자체'를 추구하는 리더다. 
물려받은 입지도 이렇고 철학도 이렇고 능력도 이걸 잘한다.
그에 대응하여 안철수의 운영은 정반대다. 
안정적인 권력 조직의 최대 이윤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게 아니라 
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목적으로 가지고 운영한 끝에 그 대가로 국민의 최대 지지를 얻어내겠다는 주의다. 역시 입지면에서나 철학면에서나 능력면에서나 여기에 맞춰져있다. 
박근혜와 안철수가 정반대가 되는 지점은 여기다.

권력 카르텔 구조는 안철수의 최대 과제이기도 하다. 이미 의회는 기존 권력 구조 하의 의원들로 채워져 있다. 300석중 새누리당 148석, 민주당 128석. 특히나 새누리당은 박근혜의 지휘를 업고 달성한 의원수이니 충성도도 높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계파에 그에 상응하는 임명직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의원들은 단결하여 반대할 것이다. 
안철수에게 있어선 새누리당 의원이라고 적이 아니고 민주당 의원이라고 아군이 아니다. 

정당과 계파가 국민 눈치를 안보는 권력 카르텔이 되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면 이게 안철수에 투표할 이유가 된다.
설령 당선이 안되는 한이 있어도 안철수에게 가는 표의 수 만큼 정당은 국민의 눈치를 보게 되고 권력 카르텔은 약화된다. 
안철수가 당선이 되는 날에는, 안철수의 현실 정치 키워드는 '화해'에 있다. 
'진보 보수를 나눌게 아니라 양측이 모두 협력을 해 주어야 올바른 정책 실행이 가능하다'라고 말하는 안철수의 화해는 자기 정책을 중심에 놓고 양측 모두와 협상하겠다는 의미다. 

권력 카르텔을 깨는 것은 쉽지 않다. 인재는 세상에 많지만 국회의원은 300명밖에 없다. 이들과의 협력은 현실정치의 핵심이다. 이미 국회의원이 되어 계파에 공을 세운, 그래서 대우를 약속 받은 의원들이 자기 계파를 등지고 갈아타려면 상응하는 미래 보장이 있어야 하는데, 무리한 일이다. 갈아태울게 아니라 하면 계파 리더와의 협상을 해야 한다. 결국 박근혜 지휘 아래 당선된 새누리당 의원들이 의회의 반인 이상 박근혜는 어떤 경우에도 주연이다. 단지 단독 주연이냐 공동 주연이냐가 차이일 뿐이다. (추정을 보태자면 안철수가 화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상극은 재벌 정몽준이지 박근혜가 아닐 듯 하다.)
물론, 이 모든 사실은 안철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권력 카르텔을 통째로 깨부수려 했다가 자기가 깨진 노무현의 선례를 모두가 알고 있듯이. 

화해의 구체적인 디테일은 안철수 본인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 경우엔 '목숨걸고 고민한다'는 표현이 과장만도 아닐거다.
안철수가 박근혜와 화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게 내 추측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안철수의 생각 150p를 인용하겠다.
'정치적 대타협, 즉 타협을 통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 ... 그동안 정권을 잡은 편의 사람들만 기용하다보니 ... 부적합한 인물들에게 중요한 역할이 주어져 많은 문제가 생겼다.'

안철수의 정책 방향성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권력이 너무 국민 눈치를 안보는 권력 카르텔이 되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면
그게 안철수에게 투표해야하는 이유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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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고르고-관계를 만들고-결혼의 결정을 내리는 

'결혼할 상대방 고르기'는 이미 해결한 과제지만 자라날 우리 딸을 위해 이 해결한 과제를 재정리해둔다.

이전에 쓴 글 세개를 엮어서 대상 선정-관계 형성-결혼 결정에의 지침을 만들것이다.


http://longlive.tistory.com/entry/인품

http://longlive.tistory.com/entry/What-women-want

http://longlive.tistory.com/entry/결혼-잘한-자랑


1. 대상 선정의 지침(원문으로 충분하므로 요약만)

- 애증이 다 진정되고 난 후의 모습이 좋음으로 귀결될 때 배우자 감으로 적합하다. 

- 흔히들 예찬하는 사랑의 농도는 무의미하다. 


2. 관계 형성의 지침(원문과 논점이 다르나 내용은 충분하므로 요약만)

- 의사소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 

필요한 건 '말하지 않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내 짝'을 찾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말하기에 편한 짝'을 찾는거다. 

의견을 얘기해서->거절 당하기도 해가며->조율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관계를 상대방과 만들어야 한다. 


3. 결혼 결단의 지침(원문이 간략하므로 부연 포함)

- 이 고민은 이런 구조다. 

평가자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 -> '이 선수가 평생 잘 뛸까?'를 고민 -> 찾아볼수록 이런 사례도 있고 저런 사례도 있어서 확신이 안 듬. 

사람은 자기 자신의 단일 행동의 결과도 확신하지 못한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일생에 걸친 모든 행동의 미래를 종합해서 확신할 방법은 전혀 없다. 그래서 확신을 찾으려고 하면 불안감만 더해진다. 

이건 평가자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결과다. 

상대방에 대한 평가로부터 확신을 찾으려고 하면 답은 나오지 않는다. 

결혼에 있어 나는 한 시점의 평가자가 아니라 지속적인 행동자임을 자각하라. 

행동자는 상대방으로부터 확신을 찾는게 아니라 '대상 선정과 관계 형성을 충분히 하였는지'를 검토한다.


결혼 상대를 결정하기까지의 일에는 수많은 편견이 존재한다. 

이는 결혼이 중요한 일이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편견과 미신은 근본이 비슷하다.

중요한 일인데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를때 편견과 미신이 생긴다.

본질을 볼 수 있게 되면 편견과 미신은 남아나지 않는다.


우리 딸이 이 얘길 참조할 때 쯤엔 부모의 삶이라는 결과물을 충분히 접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걸 기반으로 이게 효과적인 얘기인지 시원찮은 얘기인지를 판단할거다. 즉 지침의 올바름 여부는 말이 아니라 결과로 증명할 것이다. 

내 소망은 딸이 자라는 과정에서 위에 써놓은 관점과 기술을 습득하여 이미 다 체화한 상태에서 이 말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대상을 고르고-관계를 만들고-결혼의 결정을 내리는'의 앞에 '(유혹하고-넘어왔음을 감지하고-)'가 생략되어 있다.

아빠는 남자를 유혹해본 경험이 없어서 남자 꼬시는 방법은 아직 검토중이지만 넷카마가 남자는 더 잘 꼬신다. 

천하에 못 얻을 남자가 없도록 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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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위를 하기엔 지금 만삭의 몸으로 출근한 마누라에게 미안할 뿐이다.

내 행복은 마누라의 노고 위에 서 있고 자랑하려면 한번 할때마다 마누라한테 더 잘해야 한다. 

더 잘할 자신 음스므로 자랑도 음슴.


결혼하자고 한 오년 징징대니까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의 확신은 찾는게 아니라 심어주는 거다. 

결혼해서 살아갈 나는 행동자지 평가자가 아니니까.


'이 결혼 할만한가요' '나는 잘 골랐다네' 채점관 마인드 ㄴㄴ. 

나는 선수다. 채점관이 아니라. 


부인 

어제 설거지 안하고 쌓아놔서 미안하오.

일 충분히 쉬게 못해서 미안하오. 

무겁고 고된데 대신 낳아주지 못해 미안하오. 

내일은 휴일이니 하루종일 재미나게 놉시다. 

비오면 보려고 스쿨오브락이랑 어나더어스 빌려 놓았소. 

저녁 뭐먹나 궁리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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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생각을 읽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용에 임펙트가 없다'라고들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동의하긴 동의한다. 책을 읽고 있으면 뭔가 무지 스무스하다. 

느낌상으로는 어째 원론적이고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왜 그런 느낌인가 좀 더 들여다봤다. 

내용상으로 임펙트 있는 지점이 없는게 아니라 임펙트 있는 지점에 할애하는 시간이 짧고 원론적인 이야기에 할애하는 시간이 길다.

시행할 제도에 대해 구체적이고 명료하고 짧게 말하고 있고

그 배경과 이유가 되는 원론적인 이야기에 대해 길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가령 '제도적으로 징벌적 징세 제도를 시행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 징벌적 징세 제도에 대해서는 그리 길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 다음장에 '형성 되어야 하는 사회 분위기는...'에 대해서 더 긴 시간을 들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짧게 언급했다고 해서 추진 의지가 약한 것이냐 하면 그게 아니다.

징벌적 징세 제도에 대해 안철수가 이전 강연에서 말했던 동영상을 보면

"사회가 발달할수록 플래이어가 변칙을 개발하는 속도를 단속자가 따라가지 못한다.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단속 비용도 문제가 된다. 

그런데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를 때 보면 

잡힐 확률과 처벌시 불이익을 곱한 후 얻는 이익과 비교해서 이익이 불이익보다 클 경우에 범죄를 저지른다. 

따라서 잡힐 확률을 높이는 데에 한계가 있다면 처벌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게 징벌적 징세 제도다. 

다 잡지는 못할지언정 한번 걸리면 열배 백배 징수해서 반 죽여놔야 한다. 

사형 시키면 왜 안되요?"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 말 부드럽게 하는 안철수가 반 죽여놔야 한다, 사형은 왜 안되냐 라고까지 했다.

이 동영상에 소감으로 달린 '가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형이래 ㅋㅋㅋㅋㅋ' 라는 리플이 생각난다.)

강한 추진의지를 가진 건 확실한데도 의미가 명료하면 부연을 별로 하지 않고 있다.


징벌적 징세 뒤에 이어서는 법인세 변경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구체적이고 명료하나, 길지 않게. 

한편 '형성되어야 하는 사회분위기'등의 의미가 명료하지 않은 방향에 대해서는 긴 시간을 들여서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책 전체적으로 이런식이다. 

 

징벌적 징세제도랑 법인세 변경 딱 두개만 안철수가 말한대로 때려도 그 파급 효과가 상상 이상이다.

이게 결코 하나마나한 물에 물탄 이야기가 아니다. 졸라 빡신 얘기를 웃으며 하고 있는 격이다.

아직 얼마 읽지 않았는데, 구체적으로 명시된 아이템들이 무엇 무엇이 있는지 리스트업을 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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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출이 천차만별이라고 하지만 자녀있는 가정의 수도권 보통 생활비라는 건 존재한다. 

이만하면 보통, 더 쓰면 사치, 덜 쓰면 알뜰. 

이건 거의 하한선에 가까운 개념이라서, 이거보다 적게 쓰고 살아야 한다고 하면 '공부 안하면 장래 거지된다'는 말을 들은 공부하기 싫은 학생처럼 발끈하기 일쑤다. 

가령 자취 월100, 2인 부부 월200, 3인 가족 월300, 4인 가족 월400 이라는 말을 보고 얘기를 꺼냈더니 대세는 '애 하나 월 100으로 못 키운다. 더 든다' 였다. 

3인가족 생활비로 월 320 든다고 치자. 


자식 하나 있는 가족은 평생 얼마를 생활비로 지출하게 될까?

<부모는 자식의 생활비를 30살까지 대신 내준다. 부모는 90살까지만 산다.>라고 모델화하면 

부모 나이 30~60 = 3인가족 = 월 320 * 12 * 30 = 11억5200

부모 나이 60~90 = 자녀 출가시키고 2인가족 = 월 200 * 12 * 30 = 7억2천

합 18억7200

부모는 평생동안 19억은 벌어야 한다.

이건 외벌이 기준이다. 맞벌이면 수입이 느는 대신 생활비가 더 드니까 값이 다르다.


특정 개인 기준이 아니라 '보통'의 생활비라는 걸 생각해보자.

외벌이집 보통 가장이 일생동안 19억 못번다. (보통 얼마 벌지? 한 10억 버나?)

그래서 이 말은 우리 세대 현시점 기준 보통 사람들은 모조리 '생활비>>소득' 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생활비>>소득'인 사람은 거지or노예 둘 중 하나 밖에는 길이 없다.


이미 최악인데 아직 악조건이 상당히 배제된 상태다.

그 보통 사람이 자녀를 둘 낳을 수도 있다.

그 보통 사람이 100살까지 살수도 있다.

저 생활비에는 노후 병원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저 생활비에는 자녀의 비싼 대학 등록금이나 결혼 비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조건을 포함하면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까짓거 늙어서 아프지 말고 자식은 니가 벌어서 대학가고 시집 장가가라고 하면 19억만 벌면 된다.


일생동안 적자나는게 보통인 시대라는게 유지가 되나? 

대체 지금 우리는 단체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CF 카피로 끝날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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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탐구의 협업과정이다.
따라서 학문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탐구방식과 동일한 구조를 갖을 것이다.
개인이 갖는 인간 지성의 한계는 개인의 집합인 학계에게도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탐구는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 보면, 일반적인 학문의 이미지와는 다른 형태다.
학문-특히 과학-은 '가치중립적으로 검증된 지식을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쌓아 올리는 것'이라는 게 일반적 이미지인 반면 개인이 뭔가를 탐구할 때엔(그게 학문이든, 업무든, 인생이든간에) 그와 다른 형태를 취한다.
개인이 뭘 배울 때엔 처음에는 단편적 정보를 모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처음에는 이 다음에 뭐가 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단편들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이 일은 이런 건가?' 하는 감이 온다.
'감 잡았다'고 한 다음부턴 그 감에 맞추어 현상을 확인하고 나서 '이제야 뭘 좀 알겠다' 라고 한다.

여기서 '감을 잡는 작업'이란 '경험을 바탕으로 통찰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잡아내는 작업'이며 이때 경험은 불완전한 지식이고 통찰은 논리적으로 허술한 결론 도출 방식이다.


이런 개인의 방식이 학문의 방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건
학문 탐구의 과정이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개인이 감을 잡는 형태를 보면 감이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형성 되는 게 아니다.
일단 논리적 치밀함은 등안시하고 통찰에 의지하여 개인적이고 귀납적인 접근으로 '이것은 이런 거다'라는 관점을 잡은 후,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감 잡은 내용이 옳은지 확인하기 위해 표적수사를 한다.
개인의 경우에 '감 잡는 것'으로 불리는 것이 과학에서는 '패러다임'으로 불리는 것 일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었다. (책 요약은 별도 글 참조.)

쿤이 말하는 학문에 있어서의 '패러다임'이 개인이 탐구하다가 '감을 잡는' 것과 똑같을 것이라는 처음 생각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학문 탐구의 구조도 개인의 탐구 작업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먼저 전체 골격을 세우는 감을 잡은 후 그 내부를 밝혀 나가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쿤이 미결 과제로 남겨놓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과정'은 개인의 탐구 작업에서의 '감 잡는 과정'(통찰의 과정)과 동일하다.
개인이 낱낱의 경험을 통찰, 즉 전체로써 다루어 감 잡는 과정을 살펴 보면, 사람들은 세상이 유사성의 반복일 거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자의 학문을 보면 무관한 사물 간의 유사성을 찾아서 그 발견한 유사성을 기준으로 탐구하려는 대상의 원리를 찾는 작업이 두드러진다. 이때 서로 무관한 대상들 간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증명은 없다. 가령 식물인 나무랑 인간의 집합인 사회 간에 유사 관계가 있다는 근거는 없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하여 논리적으로 치밀하지 않은 통찰로 먼저 대상의 본질에 대한 감을 잡고 그에 맞추어 다른 대상을 탐구하는 작업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이미지와 멀다. 그러나 학문은 개인의 탐구 과정을 나눠하는 협업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므로 개인이 갖는 인간 지성의 한계는 개인의 집합인 학계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탐구자가 감을 잡는 작업을 대체할 수 있는 논리적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결국 패러다임이란 통찰을 통해 파악한 대상의 본질에 대한 관점이다.
그게 일부 대상, 가령 빛에 적용되는 거면 빛은 물질이다/빛은 횡파다 라는 빛에 대한 패러다임이 되고 세계 전체에 적용되는 거면 세계관이 된다.

이렇게 파악한 학문 탐구 과정을 학문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난다. 일반적 이미지에서 학문은  '학문은 지식의 점증적 축적과정이며 가치중립적으로 검증된 지식을 축적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대상의 본질을 도출한다.'
그러나 실제 학문은 그렇지 않다. 통찰에 의해 파악한 대상의 본질, 즉 패러다임을 먼저 형성한 후, 그 통찰에 끼워 맞추는 표적 수사의 방식으로 탐구한다.

'학문'과 '개인의 일반적인 탐구'(=일상 생활 속에서 수행하게 되는 탐구를 의미한다)와의 공통점이 이렇다면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개인 탐구/비과학학문/과학학문으로 구분하여 서로간의 차이를 분석해보면
개인의 탐구 : 불완전 경험과 통찰에 의존하여 본질을 도출한다.
비과학 학문 : 개인 탐구의 직렬 병렬적 산술합이다. 과학과의 경계는 패러다임 장악이 일어났는가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통찰들 중 서로 간의 우열을 가릴 분명한 기준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패러다임 장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학 학문 : 과학의 방법론이 갖는 경험 명제에 대한 엄밀함은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패러다임 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 결과로서 패러다임 장악이 이루어진다. 그 분야의 사람들 절대 다수를 동의시키는 패러다임 장악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이유는 경험 명제 검증의 엄밀함 때문이다. 이는 통찰이 내포할 수 밖에 없는 오류를 경험 명제에 대한 엄밀함으로 보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과학 경험 명제의 엄밀함은 올바른 통찰 결론을 도출하게 만들지는 못하나, 두 개의 통찰 결과가 병존할 때에 우열을 가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과학의 방법론으로도 새로운 통찰을 완전히 올바르게 도출해내지는 못한다. 패러다임 전환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두 개의 패러다임이 경쟁할 시에 어느 쪽이 우월한 지를 가리는 것 뿐이다. 이 우열 가름이 패러다임 장악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장악 이후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과학 학문이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개 이상의 통찰 결과가 병존 할 경우에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에 핵심이 있다는 게 내가 한 파악이다.
이는 쿤의 마지막 질문인
'과학의 방법론은 어떻게 지속적 발전으로 이끄는가?'에 대한 내 대답이 된다.
'진화가 목적한 생물체를 향해 변해가는 발전이 아니라
살아 남았기 때문에 발전으로 인식되는 것이듯
과학 발전은 목적한 절대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쿤의 해석은 옳지 않다.
여타 학문과 달리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과학의 특징은 '연역된 것 중에 현실 확인 되거나 독립적 실험으로 재연되는 것 까지를 참으로 인정'하는 참 명제 검정 과정에 핵심이 있는 게 분명하며 패러다임 장악이 가능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패러다임이 장악되면서 정상 과학이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나, 패러다임 장악은 과학 특유의 참 명제 검정 방식의 결과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시기나 성리학적 이기론의 시대에 패러다임들이 끝나지 않는 쟁론을 계속했던 이유는 어느 것이 더 옳은지 우열을 가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경우에는 종교 전쟁등 상대파의 말살을 통해서 우열을 가리려 들곤 했는데 이는 그 이외의 방법으로 도저히 우열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얼마 씩은 옳은 면이 있는 두 개 이상의 통찰이 맞부딪칠 때 어느 쪽이 옳은지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가 과학이 보여주는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남은 것은 패러다임 론의 기본적인 질문이다.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인데 패러다임 이론의 시초인 과학혁명의 구조 책에서는 아직 확실한 답을 보지 못했다.
- 우열을 가려내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는 최초로 우열이 가려지는 패러다임 통합의 시기에 열쇠가 있을 것이다.
운동연구는 아르키메데스에서 패러다임 통합. 광학은 뉴턴, 전기는 프랭클린, 열은 블랙, 화학은 보일과 부르하베에서 패러다임 통합.
아르키메데스는 지레와 물에 뜨는 물건의 실험으로써 역학 패러다임 통합을,
프랭클린은 전기에 대한 실험을 통해서 전기가 유체라는 패러다임 통합을 이룬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기 패러다임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실험의 존재다.
통찰을 현실에 응용하는 실험은 비록 그 실험이 해당 이론에 대한 완전한 검증은 되지 못하더라도 경쟁 이론과의 우열을 가리는 잣대가 되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꿔 말하면 근거를 실험으로써 댈 수 없는 통찰들끼리 논쟁을 하는 것은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 어렵다는 뜻이 된다.
- 장기간에 걸쳐 발견되는 이상 현상은 언제 패러다임을 위기 상황으로 내모는 현상으로 기능하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쿤은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이는 이상현상이 위기상황을 만드는 것은 기존 패러다임 내부만을 관찰해선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렇다면 경쟁 패러다임과의 설득력 문제로 연계해서 봐야 할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기의 특징은 모순에 빠지는 기존 패러다임이다. 즉 구 패러다임의 설득력 약화다. 이 상황에서 신 패러다임을 들고 나오는 것은 언제나 그 분야의 신참이다.
아직 구 패러다임을 습득하지 못한 '감 못잡은' 신참들에 의해 잠재적 경쟁 패러다임은 산발적으로 생성될 것이다. 패러다임의 안정기에는 이 신참들의 통찰을 잘못된 이해라고 하여 무마하고 올바른 이해로의 흡입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위기 현상들이 누적되는 가운데에서는 신참이 들고 나온 새로운 이해를 잘못된 이해로 치부하는 것이 점점 흡입력을 잃어가므로, 산발되는 신참의 '잘못된 이해'들을 동력으로 위기 상황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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