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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에서 지적하는 또다른 현대의 질병 증상이 행동과잉이다.
행동 과잉 상태라는 게 뭐냐면 일명 바보병이다.
자기가 뭔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으면 지루해하고 못견뎌 하는 증상을 보인다. 집중력도 현저히 떨어지고, 심해지면 독서는 커녕 TV를 '그냥 보는 것' 조차도 리모컨을 이리저리 조작하지 않으면 못배긴다.
피로사회의 설명으로는 `입력을 부정하는 기능이 저하되면` 발생한다.
행동과잉을 내 관점에서 풀어보기 위해 자유의지자적 욕구의 발생부터 발달과정을 생각해보자.

행동의 시작은 배고픔 등에 대한 직접 생존 욕구 충족을 위한 행동이다.
이는 의식적인 행동이라기 보다는 조건반사에 가깝다.
다음으로 하는 행동이 타인의 욕구를 욕구하는 행동으로서 (아기가 웃었더니 엄마가 웃으니까 아기가 더 웃는 등) 이는 간접적인 생존 욕구 충족을 위한 행동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물로서의 욕구와는 좀 다른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가 나타난다.
자유가 억압되어 있던 사람이 해방되면 주머니에 손만 넣고 걸어도 기쁘다. 자유로운 세상에 나오면 심호흡만 해도 기쁘다. 즉 금지되어있던 것 내지는 명령 받지 않은 것을 주체적으로 행동 하기만 해도 즐겁다. (아이들 언어로 `놔봐 놔봐 내가 할거야`)
그러나 이 기쁨은 곧 가신다. 금새 자유에 익숙해지고 나면 주머니에 손 넣고 걷는 것은 하나도 즐겁지 않다.
하다보면 아무 행동이나 한다고 욕구가 충족되질 않는다.
그럼 더 향상된 충족이 요구된다.

아마도 판타지 소설 드래곤라자에서 나온 말 같은데 이런 분석이 있다.
아버지의 원수가 늙어죽는 걸 기다리는 걸로는 원수가 죽어도 복수가 안된다. 설령 늙어죽기 직전이라고 해도 자기 손으로 죽여야 복수가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이 영향을 미쳤느냐 아니냐이다.
즉 내 행동이 대상에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아무 행동이나 하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는 자유의지자적 욕구는 향상된 충족으로서 대상에 변화를 만들어 내야 충족이 되는 단계에 이른다.

그런데 또 이 욕구도 충족을 경험하다보면 점점 부족해진다.
아무 변화나 다 충족이 되진 않는다.
길가의 돌맹이를 슬쩍 굴리는 것도 변화를 미치는 거지만 그걸로는 충족이 안되는 것이다.
변화에도 의미가 있는 변화가 있다. 그것이 가치의 초기 형태다.
호기심을 충족하는 등으로 의미가 있는 행동들이 있다. 생물로서 생존과 번식의 이익은 없지만 충족하면 기쁜 것들이다. 긍정심리학에서 얘기한 `충족하면 기쁜 24가지 강점`이 그 예시가 되며, 그 외에 가학성 피학성등도 포함된다.
이것들을 추구하는 이익 추구(혹은 재미추구? 호칭이 애매하다.)의 단계.
그 다음이 이익중에서도 강점에 해당하는 것들을 추구하는 가치추구 단계,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강점의 상위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6가지 덕목들을 추구하는 초월적 가치추구의 단계.

가치추구에 이른 자유의지자적 욕구는 이후 내 행동이 가치를 만드는 게 맞는지 오히려 망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을 거쳐 초월적 가치추구에까지 이른다.
다른 욕구와 마찬가지로 자유의지자적 욕구도 충족될수록 점진적으로 변한다. `내가 행동하고 싶은 욕구`->`변화를 주는 행동을 하고 피드백을 받고 싶은 욕구`->`변화의 의미가 있는(이익이 있는) 변화를 주는 행동을 하고 싶음(이익추구)`->`가치추구`->`영속적,초월적 가치추구`라는 충족의 형태를 갖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무엇이 정말로 가치있는 것인지`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면 행동을 해도 가치추구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
행동을 해도 가치변화가 충족되지 않으면 숨을 쉬어도 산소가 보충되지 않을때 호흡이 가빠지듯이 행동이 과해진다. 행동과잉이 온다.
이는 의미와 가치관을 찾지 못하는 현대인이라는 원인으로부터 도출된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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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정서를 바꾸어 현재의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방법이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정서는 신념, 신뢰, 자신감, 희망, 낙관주의.
이중 낙관주의와 희망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낙관주의는 영속성과 파급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쁜 사건 때문에 느낀 무기력을 (시간적) 영속적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일시적 불행으로 여기는지. 또 절망감의 대상을 (공간적) 한정하는지, 다른 대상으로 파급하여 파악하는지.
이는 좋은 일에 대해서는 반대로 적용가능하다. 좋은 일이 영속적 특징 탓이라고 여기면 낙관주의, 일시적 요인 탓이라고 여기면 비관주의다.
사람 성격에 따라 영속성에 대한 긍정 점수가 높아도 파급성에 대해서는 낮을 수 있다.
낙관주의의 효과는 마음만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을 일으킨 경우를 국한적으로 취급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만하다고 미래를 희망적으로 인식하는 낙관주의자는 현재 맞이한 실패의 피해를 인생 전체에 확산되지 않도록 축소하여 실질적인 행복을 만들어낸다.
낙관주의를 학습하면, 미래에 대한 인식 개선 및 행동이 바뀌어 행복이 증진된다. 낙관주의 학습 방법은 다음과 같다.
ABCDE.
Adversity 역경을 맞이하면
Belief 내가 가진 실제보다 과장되고 왜곡된 믿음을 파악한다.
Consequence 내가 내린 잘못된 결론을 파악한다.
Disputation 비관하는 자아의 주장을 반박한다.
Energization 활력을 느낀다.

비관하는 자아를 반박하는 기법 네가지 :
-명백한 증거 제시 : 낙관적 생각이 명백한 증거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막연히 희망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것임에 비해, 이 반박은 실제보다 더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 만을 거두어내는 의미이다.
-다른 이유 찾기 : 현실의 많은 일들은 여러가지 원인의 가능성을 갖는다. 시험을 망친 것은 시험이 유난히 어려웠기 때문 일수도, 이번에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일수도, 교수가 평가를 공정하지 않게 했을 수도, 내 적성이 맞지 않아서 일수도 있다. 비관주의자는 그 여러가지 원인 중에서도 가장 영속적이고 파급력이 큰 최악의 원인에 매달린다. 이를 반박하려면 모든 가능성들을 샅샅이 조사하여 바꿀 수 있는 원인, 이번에 국한된 특수한 경우, 자기 외적인 원인들의 요인에 초점 맞추어 검토해야 한다.
-숨은 진실 찾기 : 설령 진실이 부정적인 원인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비관주의자의 생각속에서는 그로 인한 결과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한번의 실패가 의미하는 것은 생각처럼 치명적인 것이 아니기 쉽다.
-실질적 접근 : 현실적 삶은 본래 완전무결하지 않아서 어쨌거나 흠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은 과장된 절망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이제 현재에 대한 긍정적 정서 키우기에 대한 장이다.
현재에 대한 긍정적 정서에는 쾌감과 만족감이 있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쾌감은 지속성이 낮고 쉽게 익숙해지는 특징이 있다.
다음은 생활 중에 쾌락을 증가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이다.
-쾌감 사이의 간격을 넓히기.
쾌감은 이전의 열망을 식힘과 동시에 또다시 다음번의 열망을 자아낸다.
신경세포의 불응기(또는 뇌가 익숙한 자극을 무시하는 동안)의 동일한 쾌감 입력은 열망의 악순환을 통해 열망을 더욱 키우기만 할 뿐 쾌락을 주지는 않는다. 이른바 중독이다.
따라서 쾌감을 누리되 간격을 넓히는 방식이 유용하다.
-음미하기.
현재의 즐거움을 대충 흘려보내지 말고 최대한 만끽하는 것을 뜻한다.
음미를 돕는 다섯가지 방법을 소개하는데
타인과 공유하기,
추억만들기(사진이나 기념품),
자축하기,
다른 것을 차단하고 오로지 그 대상에만 집중하기,
생각하기를 멈추고 느끼기만 하는 심취하기 이다.
이 방법들을 이용하여 네가지 음미하기를 수행하면 쾌감이 증폭된다.
칭찬 축하 주고 받기,
감사하기,
감탄하기,
만끽하기이다.
-관심 기울이기.
불교적 가르침이라며 설명하는데, 결국 위빠사나를 뜻한다. (`위빠싸나 명상` 참조)

현재의 행복감이 쾌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쾌감과는 다른 행복감이 있다.
이를 충족감이라고 하자. (책에서는 만족감이라고 번역하는데, 내가 느끼는 어감상으로는 만족은 `욕망이 없는` 상태로 느껴진다.)
충족감과 쾌락의 차이는 행복한 삶과 쾌락적인 삶의 차이와 같은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와 같은 의미라고도 설명한다. 이 책의 원제가 Authentic Happiness 진정한 행복이며 책의 나머지 절반이 이 충족감에 대한 내용임을 감안하면 충족감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주장이다.
책은 사람이 어떤 일에 완전히 심취할 때 느끼는 것을 몰입(flow)라고 명명한다. 감각적 쾌감이 아닌 충족감의 핵심은 감정이 아니라 몰입이며, 몰입이 극에 달하면 무아도취, 정서가 없는 상태가 된다. (즉 삼매경이다.) 이는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서 오는 쾌락과는 다르다.
([*] 몰입과 삼매경을 행복의 본질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는 앞서 행복한 사람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사회성을 높인다는 분석과는 상반된다. 잠시 후 거론할 몰입도 높은 10대와 낮은 10대의 비교를 봐도 몰입도 낮은 10대가 더 높은 사회성을 보이고 있다.)
몰입도가 높은 10대와 낮은 10대의 비교.
몰입도가 낮은 10대들은 쇼핑을 주로하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텔레비전을 많이 본다.
몰입도가 높은 이들은 취미활동, 스포츠, 숙제를 한다.
몰입도가 높은 이들은 몰입도가 낮은 이들을 즐겁게 생활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들처럼 해보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의 행위는 당장보다 미래에 보상받는다. 이를 심리적 자본형성이론으로 설명한다. 쾌락은 소비이며 몰입은 투자라고 말한다. 소비는 미래에 아무것도 축적하지 않으나 투자는 심리적 자산을 형성한다는 것이다...만, 현상에 대한 해석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맨 처음 행복의 특징을 조사하면서 행복도가 높은 응답을 한 22명의 현저한 특징이 사회성이 높으며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사회성이 높게 나오고, 몰입도가 높은 아이들은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즐거워보인다고 답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저 집단을 상대로 행복도를 조사하면 몰입도와 행복도의 관계가 어떻게 나올지 의문이다.
이 괴리는 행복의 본질에 대해 더 생각할 단서를 준다.

내 관점에 따라 해석하면 이 괴리는 축소된다.
이 책은 몰입의 즐거움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어조지만 그 표현에는 무리가 있다.
사람이 물을 마셔야 하는 이유는 빵이 진정한 음식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물을 안마시면 죽기 때문이다. 생물로서의 욕구만 충족해서는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는 생물적 욕구 충족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로는 몰입이 높여주는 것은 행복도의 고저 그 자체가 아니라 행복도의 항상성이다.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게 내 관점에서 보면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에서 발생한 가치 실현의 욕구)이다.
산사람을 상대로 조사하는 이상 일반적으로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도가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도보다는 높을 것이고, 그럼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에 치중하고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을 등안시 하면 결핍이 느껴지는 지점에서 행복도가 추락한다. 기분 좋은 것 같다가도 한켠의 공허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몰입도가 높아지면 이런 결핍을 채워주는 양이 늘어나서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행복도도 높아지지만 그건 결과에 불과하다. 기본적으로는 몰입은 편중된 결핍으로 인한 행복도의 추락을 매꾸어주어 항상성을 높여주는 영향을 미친다.
이런 내 관점을 바탕으로 조사된 데이터를 보면 이렇게 된다.
몰입도가 높은 아이들은 혼자서도 자기 취미활동 하며 잘 노는 반면
몰입도가 낮은 아이들이 오히려 더 무리지어 몰려다니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혼자 두면 심심하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함께 다닐 누군가를 꼭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자기가 자유의지로 무엇을 바라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비교우위감으로 행복을 충족하려 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곧 친구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베프를 이기는 것을 삶의 행복으로 삼는 아이러니한 감정에 처하게 된다.
이 현상은 내가 관찰하기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성별에 따른 몰입도의 차이가 있는지는 책에 데이터가 없지만,
예상컨데 남성이 여성보다 몰입도와 집중력이 전반적으로 높게 나올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그 결과 남자가 여자보다 행복도의 (고저가 아닌) 항상성이 더 높을 것이다. 이는 앞서 책에 언급된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 두배에 정서 요동폭 두배'라는 조사 결과에 부합한다.
이 경향은 마누라에게도 부합하는데, 마누라는 몰입도가 상당히 높고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무리짓기를 덜 즐기는 편이며 기분의 항상성이 굉장히 높다. 이벤트를 해도 감격하는 게 아니라 그냥 평온하고, 이벤트 안 한다고 별로 뭐라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연애할 때 내가 힘들었다.

몰입의 즐거움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역시 무리가 있다.
사흘 굶은 사람이 빵 한조각을 발견하고 한입 물면 너무 행복해한다.
우리 아가가 맘마 먹으며 헤헤 웃을때도 보면 너무 행복해 한다.
몰입과 가치실현이 행복의 길이 되는 이유는 빵조각의 행복이 가짜 행복이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맛있는 요리여도 물 안마시면 목마르듯이 그 행복에도 불구하고 가치실현 활동을 하지 않으면 사람은 조만간 공허를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물로서의 욕구가 아무리 충족되어도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는 남는다. 그러나 빵만 먹었더니 목마르다고 해서 그 빵이 가짜 먹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렇게는 말이 된다.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이 완료된 상태에서 여분의 자원을 이용한 쾌감으로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면 한계 효용 체감을 거친 이 행복 추구는 효율이 매우 낮을 수 밖에 없다. 결핍되어 있던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를 충족 하는 것은 이것에 비하면 '진정한 행복'이다. 목 마르고 배부른데 과자 줏어 먹는 것보단 물 마시는 것이 진정한 행복감을 주듯이.

현실적으로 함께 몰입할 사람을 찾는 것에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몰입하는 사람이 몰입을 혼자서 해야만 하는 이유 같은 것은 없다.
몰입을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노래를 하건 그림을 그리건 함께 몰입하는 경험은 강렬한 유대를 제공한다.
이건 내가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의 기본 바탕이기도 하다. ('노래' 참조)

이 책의 주장을 공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로는 이 괴리는 오히려 지엽말단적인 것이다. 이 책의 진가는 좀 더 뒤에 나온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쾌락은 우울증을 불러온다.
60년대에 비해 미국 우울증 환자는 40년간 10배 증가했다.
원인은 쾌락에 이르는 손쉬운 방법에 의존한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적 우울에 대한 내 해석은 좀 다르다. '행복론, 피로사회와의 비교' 참조.)
우울증의 주요 증상은 자아도취이다. 자기의 느낌을 과장한다. 자기 슬픔을 곰곰히 생각하고 미래의 삶과 모든 활동에 투사하여 결국 자기 슬픔을 증폭시킨다.
무아도취하는 몰입은 감정에 충실한 자아도취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덜 우울하게 한다.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쾌락을 목적으로 하면 할수록 쾌락 이면에 우울도 함께 온다는 결과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쾌락과 우울이 함께 온다면 그만큼 행복의 항상성은 떨어진다.

여기까지 책의 절반이다.
쾌락 추구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르고 나자
행복의 길은 몰입하여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내 결론과 일치한다.
그리고 나서 책은 '그렇다면 무엇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를 찾고자 한다. 인문학과의 합치를 시도하는 셈이다.

문화 상대주의에도 불구하고 세계 도처에서 미덕으로 추구되는 것을 조사하여 여섯가지를 꼽았다.
지혜와 지식,
용기,
사랑과 인간애,
정의감,
절제력,
영성과 초월성.
사무라이가 추구하는 용기와 플라톤이 말한 용기는 다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인 공자의 인과 신의 사랑을 말하는 아퀴나스의 카리타스는 다르지만
상기 여섯가지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항목 임에는 틀림없다.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가치들을 추구하다보면 상기의 가치들로 수렴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무엇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가를 찾다가 초월적 가치 추구에 도달한 것이다.

다음으로 각각의 가치를 습득하고 계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저러하다고 하면, 나는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내가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 무엇을 추구하고 싶은 지를 찾을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공한다.
먼저 6개의 가치를 24개의 특성으로 세분화했다. (지혜 안에 호기심, 학구열, 판단력, 사회적지능, ... 등으로)
가치는 추상적이라서 측량할 수 없지만 이를 실천하는 특성은 측량할 수 있다.
책에 제시된(저자의 웹사이트에는 더욱 자세히 나와 있다고 한다. http://www.authentichappiness.org) 테스트를 통해 자신의 대표 강점을 찾는다.
내가 잘하는 강점은 내가 그간의 삶에서 추구해 온 것이기 쉽다.
그리고 내 강점 중에도 내가 정말 내 모습으로 삼고 싶어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가령 저자의 경우 24개중 여섯 개 정도의 강점을 갖는 중에 한가지로 지도력이 높기는 하나, 이는 필요상 어쩔 수 없이 계발한 것이고 지도력을 발휘하면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진댄다.
내가 잘할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강점을 대표 강점으로 삼는다.
이것은 내가 그간 추구해 왔고 앞으로 추구할 가치를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저자는 '내가 창안한 행복한 삶의 공식은 자신의 대표 강점들을 주요 일상의 활동 속에서 날마다 발휘하여 큰 만족감과 참된 행복을 자아내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곧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유효한 답안이다.

방식과 적용에 대한 디테일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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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론 요약`에서 이어진다.

긍정심리학이란 무엇인가?
종래의 심리학은 정신적 장애를 치료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종래의 심리학은 생활이 힘든 환자의 심각한 장애를 치료하여 정상인의 범주에 돌려 놓는 것은 할 수 있었으나 정상인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사람을 덜 불행한 사람으로 돌려놓는 방법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연구가 긍정심리학이다.

내 관점에서 긍정심리학이란 통계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사회과학이 인문학과의 합치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과학이 신이 된 시대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 참조)

책은 행복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행복이 보여주는 외면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정상인에게서도 찾아보면 정신병리학적인 징후를 몇가지는 찾아낼 수 있다.
한데 우울증의 9가지 증상중 5가지 이상이 해당되어야 우울증 환자로 진단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둘 정도로 (스스로 자기가 우울증환자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  어떤 사람에게서 몇몇 징후들이 옅보인다는게 별 의미를 갖지는 않았으며, 그에게서 이런 징후들을 치료한다고 그의 인생이 행복해지지도 않았다.
행복은 심리적 약점 보완이 아니라 심리적 강점의 강화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다.

행복하면 바보가 된다는 인식이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부정적인 기분일때는 잘못된 것을 찾는데에 능률이 높아지고
행복할때에는 올바른 길을 발견하고 강화하는 능률이 높아진다.
부정적 감정인 공포 분노 등은 도망이나 공격등의 필요한 행동을 유발시킨다.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긍정적 정서는 사회성을 높여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222명의 대학생 중 상위 10퍼의 행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나머지 90퍼와 비교한 결과 관찰되는 현저한 특징은 폭넓은 대인관계와 보람있는 사회생활이었다.
다만 행복해서 사회성이 높은지 사회성이 높아서 행복한지 인과는 불명확하다.
다른 하나의 특징은 행복한 22명중 21명은 애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외의 요소들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 행복과 사회성의 상관관계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주장하는 바와 상충하는 면이 있다.)

부정적 감정이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제로섬 제임의 존재를 알리며 여기 적이 있다는 경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면, 긍정적 감정은 윈윈 게임이 시작된다는 신호를 보내며 여기 발전할 기회가 있다는 안내 신호를 보내는 감각계로 보인다. 긍정적 감정은 발전적이고 너그러우며 창조적인 사고작용을 활성화하고 사회성을 높여 발전을 극대화시켜준다. 한편 우울하거나 무기력증을 앓는 불행한 환자의 경우 소극적이고 학습능력이 저하되는 증상을 보인다.

현재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생각하기 위해선 먼저 행복을 영속적인 행복 수준과 순간적인 행복 수준으로 구분지어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순간적 행복수준은 단것을 먹기만 해도 순간적으로 올라가고 안좋은 일을 당하면 순간적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순간적 행복수준은 마치 사람에게 자동 행복 온도 조절기라도 달린 것처럼 빠른 시간 안에 영속적 행복수준으로 돌아가는 성질을 보였다. 우울한 사람은 복권에 맞아도 우울이 고쳐지지 않았다. 이는 고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큰 고난을 맞이한 경우에도 금새 고난과 쾌락에 대한 내성이 생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 배우자의 죽음이나 가족의 알츠하이머병 발병등의 몇몇 고난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긴 시간이 지나도 행복도가 별로 복구되지 않았다.)

개인의 행복한 정도를 표현하는 데에 다음과 같은 수식을 이용하였다.
영속적 행복수준=유전적 행복도+삶의 외부 환경 상황+개인의 자율적 내적 환경

행복과 유전의 상관관계를 조사해보면(각자 자란 쌍둥이간의 조사, 입양아의 친부모와의 비교 조사),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정도의 초기값이 유전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처럼 관찰된다.
부모의 행복을 느끼는 정도가 자식에게 유전되는 정도는 50%정도이다.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내가 느끼는 현재의 행복도를 기준으로 할 때에
행복도를 증진시키는 가능한 방법은 삶의 외부 환경을 바꾸거나 개인의 내적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외부 환경 상황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조사하면 다음과 같다.
-돈
경제적 구매력과 행복의 상관 관계는 전반적으로 비례하나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무관해진다.
행복과 돈의 상관관계는 돈 그자체보다도 돈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는 편이 옳다.
사상적인 이유로 돈의 비중이 낮아지지 않는 경우, 즉 물질만능주의자는 도리어 행복이 저해되었다.
(내 관점에서 보면 돈은 생물로서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자원을 대표한다. 돈의 최대 효과는 돈돈거리지 않게 해주는 것, 즉 돈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면에서 행복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일단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 다음에는 그 이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재화를 보유하는 것 만으로는 생물로서의 욕구를 충족할 뿐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 사회생활
원인과 결과중 어느쪽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상관관계는 높다. 그러나 불행한 사람에게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하라고 권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결혼전에 우울한 사람은 결혼후 배우자와의 충돌로 더 우울해지는 경우도 종종 발견되었다.

-부정적 감정빈도
강한 역의 상관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부정적 감정빈도와 긍정적 감정빈도는 완만한 반비례를 보인다. (즉, 절망속에서도 웃음은 난다. 사람에게 수없이 많은 약점 요소들을 일일이 보완하는 것보다 강점을 강화하는 것이 행복을 얻기에 유리한 것은 행복의 이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나이
나이가 들수록 생활 만족도는 완만 증가하는데, 유쾌감정은 감소하고, 불쾌감정은 불변한다.
상하 극단 감정은 점차 사라지며 정서의 강도는 약해지는 쪽으로 젊을때에 비해 크게 변한다.

-건강
주관적 건강은 부정적 정서를 강화하여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건강하다고 해서 행복해지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객관적 건강은 행복과 무관했으며 심지어 말기암환자의 생활만족도와 객관적 건강인의 생활만족도 간에도 큰 차이는 없었다. (스스로 건강을 비관하지 않는 한은 건강과 행복도는 별 상관 없다는 의미다.)

-학력, 지능, 사는 곳의 기후, 인종, 성별
무관하다.
단, 여성이 남성보다 기분 편차가 크다. 여자가 남자보다 우울증 경험이 두배이며 부정적 감정빈도도 두배이고 긍정적 감정빈도도 두배이다.

-종교
종교인이 더 행복하다는 연구결과는 꾸준히 나오고 있으나 근본 요인은 불명료하다.
종교의 사회 활동 때문인지, 종교가 가르치는 근면절제 생활태도 때문인지, 종교가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사는 곳의 기후나 경제력, 건강등을 포함한 외적환경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바꾼다 하더라도  행복도의 차이는 8%에서 15% 정도에 불과하다.
외적 환경은 행복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 영향도는 크지 않았다.

다음으로 내적 환경과 행복의 관계로 넘어가자.
내적 환경을 조성하는 긍정적 정서들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대한 것 : 만족, 안도, 성취감, 자부심, 평정등
미래에 대한 것 : 낙관주의, 희망, 신념, 신뢰등
현재에 대한 것 : 기쁨, 황홀경, 평온함, 열의, 정열, 즐거움, 가장 중요한 몰입.

과거에 대한 생각은 현재의 행복도에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어떤 사람이 과거에 받은 영향이 현재의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해 다음의 주장들을 살펴본다.
프로이트학파는 정서에 따라 사고가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무의식에 쌓인 감정이 사고의 과정을 유도하여 생각을 지배한다는 주의다.
반대로 인지과학은 사고에 의해 정서가 도출된다고 주장한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불안을 낳는다는 주의다.
양측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상당하다.
정서(감정)에 따라 사고가 지배되는 예시도,
생각을 바꿈으로써 정서를 지배하는 예시도 흔하다.
사고가 감정을 만드는지, 감정이 사고를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견해가 좁혀지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설명은 현대 심리학의 숙제라고 한다.
저자의 입장은 현재의 정서는 감각 입력으로부터 사고과정 없이 도출되지만
과거에 대한 모든 정서는 생각과 해석에 의해서만 도출된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대한 해석과 생각을 바꾸면 과거에 얽매이는 현재의 감정(분노, 회한등)과 현재의 만족도를 바꿀 수 있다는 예상을 내놓는 데에 의의를 둔다.

반면 이에 대한 내 입장은 `기억은 감정과 연계되어 있다`에 기술한 바를 따른다.
사고과정은 과거의 기억에 의해 영향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감정은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간의 자아동일성을 확보하여 기억을 생생하게 강화한다. 기억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과거의 감정은 사고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 대한 현재의 감정이 바뀌면, 가령 과거 미워했던 대상을 이제는 미워하지 않으면, `그것을 미워하는 과거의 나`와 `그것을 미워하지 않는 현재의 나` 사이에 자아동일성이 깨져서 생생하던 기억이 흐려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무의식에 축적된 감정이 갇힌 채로 나를 지배한다는 프로이트 이론과는 현상해석 및 예상이 다른데, 프로이트 이론에서는 현재의 감정이 바뀐다 하더라도 과거의 감정의 잔재가 무의식에 남아서 내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반면
내 이론상으로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현재의 감정이 바뀌면 자아동일성이 깨져서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적 해석에서 도출한 것이므로 현대 심리학의 숙제를 불교적 해석으로 풀이한 것이 된다.

다윈, 맑스, 프로이트는 인간을 과거에 의해 결정된 미래를 사는 존재라는 이데올로기에 가두었다.
다윈은 현재의 인간은 과거의 생존과 번식의 결과라는 사상을,
맑스는 역사적 필연론을,
프로이트는 모든 심리적 사건은 과거(유년기)에 의해 결정된 것의 반영이라는 사상을 퍼트렸다.
이 책의 입장은 저들에 대한 부정이다. 과거의 사건의 영향성은 이후의 자유의지에 의해 흐려진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헤겔의 결정론에 반발하여 자유의지를 강조한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에 대입할 수 있다.)

책은 유년기의 입력이 현재의 자아를 구속한다는 이론들에 대한 검증을 통해 허구성을 보여준다.
'내면의 아이를 달래주는' inner child 기법은 1990년대 대대적인인기를 얻은 자활치료운동의 요법이나, 어린시절의 사건들이 훗날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대한 증거는 전무하다. 50년에 걸쳐 막대한 연구비가 투자된 증거 수집 작업 -부모사망, 부모이혼, 질병, 체벌, 무시, 성적학대의 사례들- 에도 불구하고 신빙성있는 증거수집은 실패한 상태다. 또한 현재는 당시의 기간에는 감안되지 못했던 유전자적 요소 -자녀학대경향이 유전자적으로 자녀에게 유전가능하다는-를 감안한 연구가 진행중인데(각자 입양된 일란성쌍둥이의 성격비교, 입양아와 친부모간의 성격비교), 유전자의 영향성은 입증되었다.
유전자 영향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거 경험의 영향성은 미미했을 뿐만 아니라
사례 조사에서 이 둘이 서로 중첩된 현상으로 관찰되기 쉬움을 감안하면 내면아이 기법은 허구다.
결국 어린시절의 상처에 대한 연구는 정신분열증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화 david and lisa 참조.) 저자는 이를 '눈가리고 아웅' 이라고 평한다.

과거의 입력이 현재를 구속한다는 이론의 또다른 하나는 정서역학이다.
표출되지 못한 정서는 또다른 출구를 찾아 배출되며 이것이 심리적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정서역학(hydraulics of emotion)이라고 한다. 이는 프로이트파가 정신역학(psychodynamics)을 자기 학파의 주장을 기술하는데에 사용한 이후 아무런 학문적 검증없이 파급되었다. 그런데 정서역학에 기반한 우울증 치료중에 환자가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표출하자, 환자가 과거의 표출을 통해 정서 배출을 할 것이라는 이론과 달리 환자가 과거의 고통을 현재의 고통으로 혼란을 일으켜 자살기도하는 일이 생겼다. 이와 같은 현상을 배경으로 50년대말 아론 벡의 인지치료가 시작된다.
또한 분노의 연구에서도 이 정서역학은 허구임이 드러난다. 미국의 문화는 동양 문화와 달리 분노를 참지 않고 표출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론과 달리 통계는 노골적인 분노 표출이 더 큰 분노 및 건강에의 해악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255명의 의과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된 연구는 가장 분노를 잘 표출한 사람은 가장 적게 화를 내는 사람에 비해 25년후 심장질환 확률이 5배였다. 고함치기, 참지 않음 등의 분노 표출은 정서역학이론과 달리 더 화를 잘 내는 사람을 만들고 분노의 해악에 더 쉽게 노출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는 정서역학이 적응의 요인을 배제한 탓이라는게 저자의견이다.
억압된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억압된 정서는 적응을 거쳐 이내 내적으로 안정된다. 적응의 효과로 표출하지 않더라도 해소되며 오히려 표출시에 `길이 닦이는` 효과로 인해 자아가 그 정서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정서역학은 허구다.
(이는 극복에 대한 내 생각인 `기억은 감정과 연계되어 있다`와 비교 가능하다. 과거의 사실을 `그런일이 일어났다. 다 지나간 일이다. 그뿐이다.`라고 하고 연계된 감정을 놓아버리면 자아동일성이 깨져서 상처가 극복된다. 극복은 정서역학적으로 과거의 상처를 상기하고 현재로 끌고 와서 이기는게 아니라, 감정을 바꿔서 자아동일성을 깨고 사건의 생생하던 기억을 흐리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과거의 입력에 현재의 자아가 구속된다는 이론들을 허구라고 반박하였다.
이는 과거에 대한 정서들을 긍정적으로 만듬으로써 더 행복해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과거에 대한 정서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감사, 용서, 망각이 있다.
감사를 활용하는 법은 감사 편지를 써서 상대방에게 찾아가 읽어주거나, 감사 일기를 쓰는 것인데, 결국 감사할 일을 상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사편지는 저자의 경험담이고 감사일기의 행복 증진 효과는 실험을 통해 통계적으로 입증되었다.

감사 일기를 내 관점에서 해석하면 :
(`불편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방법` 참조)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감사의 기록은 감사의 기억을 증폭함으로써 내 주관적 역사에 감사할 일만을 골라 남긴다.
모든 것이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 와중에 기록을 통해 강조된 기억은 잊혀진 다른 사건들에 비해 현격하게 강한 힘으로 내 사고과정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인과를 지배한다.
사람이 생각을 할 때 모든 기억이 그 순간에 의상 표층에 떠올라있는 채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일어났던 일은 기억을 통해 자아에 영향을 미치며, 기억은 사고의 구조와 뇌 회로를 구성하는데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자아에 영향을 준다고 가정할 수 있다. 검증되지 않은 물질적 일원론적인 요소를 배제하더라도 경험은 기억을 통해서 자아의 사고 구조를 형성하고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 기억은 기록 및 상기에 의해 편집 가능하므로, 이는 자아의 주관적 역사를 편집하여 경험이 자아에 미치는 인과를 의도적으로 편집 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부정적 기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부정적 사건들이 잊고 넘어간 후 항상성에 의해 복구되면 흔적이 남지 않을 수준이기 일쑤지만, 복수심을 되새기면 자아가 받는 영향성은 한번이 아니라 열번 백번의 부정적 경험이 된다.
경험이 기억으로 되새겨지면서 자아에 미치는 영향성이 증폭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기억으로 되새김하지 않으면 그 영향성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작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감사는 긍정적 기억을 증폭시키는 방법이다.
다른 한편으로 부정적 기억을 축소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용서와 망각이 그것이다.
책에는 용서에 이르는 길이 소개된다.
REACH
Recall 피해사건을 돌이켜 생각하기
Empathize 가해자에 감정이입
Altruistic gift 용서를 이타적 선물로 인식하기
commit 용서하기로 공개적으로 약속하기
hold 약속한 것 지키기

책에서 제시된 용서는, 그 행위자의 입장을 생각하고-과거 내가 타자들로부터 선물 받았던 용서를 생각하고-이를 타자들에게 돌려준다는 마음으로-공개적으로 용서를 발표한 후-이 마음을 지킨다는 것인데, 별로 와닿지 않는다.
이는 행위를 용서하는 것을 뜻한다.
내 식으로 해석하자면 필요한 것은 증오하는 나와의 자아동일성을 깨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증오를 되새기지 않고 흘려버리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증오하지 않기 위해서 `행위에 대한 용서`가 꼭 필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게 바람직한지도 의문이다. 용서한다고 해결되는게 아니라는 것에 대한 송혜교 주연 영화도 있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극복은 과거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안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과거를 바꾸고 싶다'라는 마음을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는 객관적 사실로서 인정하고
당시의 감정을 놓아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치유다.
감정이 바뀌면 자아동일성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런일이 일어났었다.`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안타깝다 등의 가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이나 누구 때문에 라는 책망의 감정을 이어붙이지 말고, 그저 과거에 일어났다는 객관적 사건으로 인정하는 것.
행위에 대한 용서로써 이 결과를 도출하려 하는 것은
오바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현위치는 자유 의지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인식을 개선하여 행복을 증진하는 방법이고, 여기까지 해서 과거에 대한 인식 개선편이 끝난다.
과거에 의해서 미래가 구속되어 `자유의지로 어쩔 수 없는 미래`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후
감사로 좋은 경험을 증폭하고 용서로 나쁜 경험을 축소하는 방법이었다.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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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복론과 과거에 읽었던 피로사회와의 비교를 해보자.
피로사회는 현대사회의 불행이 어떤 양상을 띄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과거에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는 투쟁이 주요 문제거리였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상화된 자아를 따라잡기 위해 자기 스스로 착취를 하는 과잉면역, 알레르기적인 투쟁의 형태를 띈다는 것이다.
높은 기준을 잡고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이며 게으름을 부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자아를 몰아붙인 결과 피로가 온다. 그 피로로부터 나타나는 병리적 증상이 우울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피로사회라는 분석이다.

그런데 피로사회가 묘사하는 현대의 증상을 내 관점에서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우울이란 자유의지욕구가 무엇을 해야 가치있는지를 모르겠어서 가치를 찾는 과정중에 존재한다.
추구할 가치와 의미를 찾지 못하면 오로지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에만 목표를 둔 채 살아야 한다. 이 때의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할때 현대의 우울이 온다.
생존 번식의 생물적 욕구가 해소되자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지자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방황을 시작했고, 자유의지욕구의 특성대로 추구할 가치를 찾는 쪽으로 욕구가 변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추구할 가치를 찾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추구할 가치를 찾는데에 성공하지 못한 채로 기존의 목표인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을 유일한 목표로 삼으면, 목표가 일원화된 인간개미행렬상에서 추구할만한 가치있는 행위는 오로지 효율의 문제가 된다. 그런데 생물로서의 욕구 충족에 아무리 효율적으로 매진해도 행복은 오지 않는다.
그것이 피로의 원인이다.

일하는 행위 자체가 보람있지 않으므로 모든 보람을 남보다 나은 보상에서 찾을 수 밖에 없으며, 보상에서조차 보람을 찾을 수 없을 때엔  `하기도 싫고 보람도 없는 일을 단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지`를 회의하게 된다. 많은 경우 아이를 키우는 일이 보람 있으므로 아이 낳고 나서 회의에서 벗어나게 되나 삶의 의미를 아이에게 두는 것은 자기 삶의 욕구를 아이의 삶에서 해소하려 하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피로사회는 우울의 해법으로 긍정적인 피로를 찾으라고 말한다. 내 식으로는 이것은 이렇게 해석된다.
우울을 벗어나 행복에 이르려면 자유의지자적 욕구를 충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가치를 찾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긍정적인 피로란 그 부산물이다.

내 관점은 마치 사회가 한 개인처럼 성장하는 와중에 `추구할 가치관의 정립에 애를 먹느라 우울이니 피로니 하는 병리적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건데, 사회는 개인의 집합이고, 생물로서의 목표가 해소되는 환경이 조성되면 자유의지자로서의 가치관을 찾는 개인들의 방황이 다수가 되어 사회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생존의 꿈이 해소되면 다음으로 자유의지자적 욕구와 꿈이 대두된다.
배부른 소리지만 당사자에겐 이 또한 생존의 문제다. 사람은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자아가 죽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지금 그런 환경이 조성되었고, 그래서 그런 개인들이 다수 나타나 방황을 시작했으며, 그 결과 사회 현상으로 드러나는 중이다.

자유의지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마치 결정론적인 사회해석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개인은 자유의지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면 저 피로 현상의 일부가 된다. 개인은 자유의지를 계발함으로써 저 피로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으로 놓고 보면, 자유의지의 계발 정도와 비율 자체가 펙터가 되어 사회를 결정론적으로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자유의지를 일순간 대폭 계발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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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파악한 행복의 본질이 긍정심리학에서 조사한 행복론에 부합하는지 검증해본다는 관점에서 긍정심리학 책을 읽고 있다.
긍정심리학 개론서인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이 목적에 맞았다.
긍정심리학과의 비교에 앞서 먼저 내 행복론을 요약하고자 한다.
내 행복론은 다음과 같다.

나는 사람의 인격은 본능과 자유의지의 합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본능과 자유의지가 이루는 인격' 참조)
이를 바탕으로 나는 사람의 욕구를 생물로서의 욕구와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로 구성된다고 인식한다. 이 구성은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도 관찰된다. ('예술이란' 참조) [1]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반항심으로부터 시작한 후 시행착오와 불안등을 거치면서 지혜와 경험치를 누적하고 나면 가치 추구, 나아가 초월적 가치 추구를 하고 싶은 욕구에 이르는 특징을 보인다. ('자유의지와 초월적가치' 참조)
생물로서의 욕구만 충족되어서는 사람은 공허감을 느낄 뿐 행복에 이르지는 못한다.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까지도 충족 될 때에야 비로소 행복해한다.
그런데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는 충족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초월적 가치 추구 욕구로 점진적 지속적으로 변모해간다.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초월적 가치를 추구할 때에 행복에 이른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참조)
자유의지를 통해 '무엇이 가치 있는 지를 찾고 그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 내 행복론이다. [2] [3] [4]

[1] 실제 욕구가 '이 욕구는 생물로서의 욕구고 이 욕구는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라고 이분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욕구는 벡터합처럼 나타난다. 하나의 욕구에 생존과 번식을 목표로 하는 생물로서의 면모와 자유의지자로서의 면모가 함께 나타난다.
사랑의 욕구를 예로 들면 이성에 대한 사랑이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엄연히 생물로서의 욕구가 강하게 반영되는 욕구인데
수많은 경우에 있어 이성에 대한 사랑은 쓸데없이 '굳이 이 사람이어야만' 하며
자식에 대한 사랑도 모성 부성이 벼락처럼 꽂히는 게 아니라 키워가며 정이 드는 형태로 나타난다.

[2] 무엇이 가치 있는 지를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비록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가 결국에는 초월적 가치추구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아직 이르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면 가치추구를 욕구하지 못한다.
즉 학습자의 자유의지적 욕구가 스스로 변모하는 것을 가속하는 방향으로 유도해야지
'이것이 가치있다'고 가치를 주어주는 것으로는 학습자의 욕구가 따라오지 못한다.

[3] 내 행복론에 대한 부연 :
'생물적 욕구뿐 아니라 자유의지자적 욕구도 충족되어야 행복'이라는 것은 결핍을 충족하는 모형이다. 더 다양한 요소들을 충족하면 더 많이 행복해지는 형태의 모형이다.
행복의 특징을 관찰하건데 행복은 약점을 보완하는 것에서 오는 게 아니라 강점을 추구하는 데에서 왔다. 이는 결핍된 요소가 남아있다 하더라도 더 잘 추구하면 더 크게 행복해지는 형태의 모형이다.
배만 부르다고 행복한가, 몸도 따듯해야지 행복하지 라는 식의 결핍 충족 모형으로는 관찰된 행복의 특징이 잘 표현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자유의지자적 욕구가 경험치를 쌓음에 따라 변모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해소된다. 자유의지자적 욕구가 더욱 계발되면 그에 따라 더욱 행복해진다는 강점 추구 모형이 되기 때문이다.

[4] 가치를 실현하는 느낌, 곧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감각적 쾌락과는 다르다. 이 느낌은 흔히 무아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몰입을 동반하며 감각적으로는 때론 괴롭기까지 하나 '설령 괴로울지라도 뿌듯한' 이 감각은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에서 비롯된 '가치를 추구하는 욕구'에 대한 충족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보다 더욱 깊은 몰입에 해당하는 삼매경은 자유의지자로서의 욕구 충족에 속하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비록 삼매경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보람이 있어서 즐겁다`거나 하는 느낌조차 없기 때문에 욕구 충족의 기쁨으로 놓고 보기 애매하나, 그보다 낮은 수준의 몰입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한다면 가치 추구 욕구의 충족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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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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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미있게 얘기해주는 딸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전혀 그런 아들이 아니라서 염치 없지만.

이는 이른바 스토리 리텔링 교육이 잘된 아이라는 뜻이다.
들은 이야기나 있었던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요점을 파악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무엇이 역사에 남을만한 의미있는 일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내가 들은 이야기의 핵심과 재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전달하는 것은 종합적인 이해력을 필요로 한다.
진짜 핵심이 무엇이라서 정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자기에게 스토리-텔링된 이야기를 다시 옮기는 능력인 스토리-리텔링 능력의 핵심 요소다.
이 능력이 부족한 아이는 들은 이야기를 옮기기 위해선 들은 이야기를 외워야만 한다.

스토리 리텔링도 하면 할수록 는다.
무슨 재미난 얘기를 들었어?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어?
물어보고 들어주는 것,
즉 스스로 정리하여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은
스토리 리텔링 훈련인 동시에 그 배경이 되는 능력들의 종합적인 훈련이 된다.
아동물은 교육적이다.
그러나 아동물에 주입된 교훈을 아이에게 재차 강조하여 주입하는 것은 재미에 초치는 잔소리에 불과하다.
진짜 필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어떻게 재미있었는지 아이가 얘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아이에게 모험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고 싶다.
아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모험을 마치고 돌아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는 일을 하는 모험가가 되는 거다.

이 아빠의 개성이 반영되면 드림 워커와 함께 여행하고 돌아와서
범천의 아바타 내지는 아카식 레코드의 인터페이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가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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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인가?


1.
"사람의 행동의 목적은 크게 두가지로 귀결된다.
생존과 번식."

쉘든이나 할 것 같은 말이지만 꼭 쉘든만 하는 말은 아니고 이 주제로 소설도 나와서 뜨고 그랬다.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이란 책. (내가 알기론 오리지널은 만화의 미래라는 책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면서 나온 말이다. 1990년대작.)

사람의 행동이 생물로서의 필요성으로 귀결된다면 이건 일렬종대 개미행렬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가끔 생물로서 아무 쓸데없는 짓을 하는 생물학적 광인들이 출현한다.
이들은 일렬종대에서 빠져나와 쓸데없는 걸음을 하고 행렬 안에서 보이지 않는 바깥 세상을 보며 행렬안의 개미들을 관찰하고 때론 답답하게 여긴다.
우리는 이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들의 행위가 예술이며
그 걸음의 궤적이 예술작품이다.
예술은 그 쓸모없음으로 인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증거한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무엇인가?
구분 짓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어떤 개미는 먹이를 향한 일렬종대에서 빠져나와 제자리에서 두바퀴 돌고 가던 길을 갔다. 알고보면 대부분의 인간 개미들이 완벽하게 목적지로 향하지만은 않는다. 생물의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조금씩 쓸데없이 취향을 반영하고, 쓸데없음의 예술을 하면서도 조금씩' 팔릴 예술'을 추구한다. 생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순수예술가란 몇몇 특별히 미친 자들을 제외하고는 없다. 비예술속에 예술이 있고 예술속에 비예술이 섞인다. 그 경계는 개미의 걸음이 옆걸음 몇발짝부터 예술이냐고 하는 것만큼이나 흐리다.

2.
굶고 싶지 않다면 밥을 향한 일렬종대에 끼어 걸어야 한다.
밥에는 낚시바늘이 들어있다는 말처럼,
생물이기에 갖는 생존과 권력과 쾌락에의 욕망은 사람의 자유의지를 제약한다.
그런데 사람의 자유의지를 제약하는 것은 내적 제약만이 아니다.

사람은 환경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변수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관점에 서 있다.
성공으로 가는 직통 코스를 밟고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당장 내일 덜컥 병에 걸려 쓰러질 수 있다.
소상히 알고보면 병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니 우연히 걸리는 것이 아니지만 모르는 관점에선 우연한 사건일 뿐이다.
아무리 성공할 수 밖에 없는 행동을 하며 살아도 우연히 실패할 수 있고
아무리 성공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행동을 하며 살아도 우연히 성공할 수도 있다.
사람은 인과의 모든 변수를 알 수 없고, 그렇기에 환경은 우연처럼 예측불가하게 몰아친다.
환경에 떠밀려 살인자가 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자유의지가 있다 한들 예상할 수 없는 환경의 흐름 앞에서 사람은 그저 떠밀려 가기 일쑤다.
내적으로 생존과 권력과 쾌락에의 욕망, 외적으로는 우연한 사건의 압박은 환경의 격류가 되어 사람을 몰아간다.
환경의 격류속에서 사람은 한줌밖에 되지 않는 자유의지로 버둥거리지만
대부분 환경을 거스르지 못하고 격류속의 나무가지처럼 흘러가곤 한다.

인간의 부조리는
그 한줌짜리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고 완전한 유물론자로서 살아가려 하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공허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환경의 압박에 떠밀려만 가는 한,
사람은
생존을 쫓지만 생존해도 공허하고
권력을 쫓지만 권력위에서도 공허하고
쾌락을 쫓지만 쾌락에도 불구하고 공허하다.

3.
자유의지는 외부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자유의지를 갖는 단독자는 매뉴얼화된 인생에 복종하지 않으며 미지의 길을 찾아 스스로의 인생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남들이 다 이 길이 좋다고 하는데 나는 내 머리로 생각하며 다른 길을 가겠다는 태도를 갖는 사람은
자기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항상 불안감을 갖을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남들이 정해놓은대로 살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잘 할 수 있어`라고 하더라도,
자신은 신이 아니라서 모르는 것 투성이요 미래는 예측불허이며 항상 잘할 수는 없다.
결국 자유의지를 발휘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이 되지 못한채 자기의 행동에 불안해하는 자아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자유의지를 발휘하고자 하는 한 그는 아무리 잘하고자 해도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한계를 만나고
나약함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죄악을 만난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이다.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발휘하면 자아의 한계를 느낀다.
이 진퇴양난이 부조리한 인간의 절망이다.
이 절망 앞에 굴복하여 환경의 격류에 몸을 맡겨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헤엄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음을 포기하게 되면
그것이 자유의지를 가진 자아의 죽음이고,
그때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1]

무지할수록 환경은 예상할 수 없는 우연 투성이가 되어 자유의지를 제약한다.
또한 욕망과 고난 앞에 나약할수록 환경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되어 자유의지를 제약한다.
자유의지를 제약하는 벽 앞에서 절망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이런 무지와 나약함의 제약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확장하기 위한' 이것은 당장 생존에 직결되지 않는 노력이기에 생존과 번식을 추구하는 생물의 관점에선 쓸데없다.
나는 이것을 초월적 가치추구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자유의지의 발휘는 불안을 거쳐 완전한 존재를 지향하는 초월적 가치추구에 이른다.

4. 초월적 가치란.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발휘하면 자아의 한계를 느끼는
부조리한 인간으로서 갖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은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이른다.

증명할 수 없는 문제인 `진정한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를 일단 접어두어도 이 과정은 성립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단지 주어진 입력의 당위적인 결과를 일부 부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시도하지 않으면 공허감에 빠져 견디지 못하는 속성, 즉 일종의 랜덤함수가 포함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바는 그 여파다. 과거에 배운 것에 완전히 순응하는 것을 못견디는 속성(자아가 죽어버리는 공허한 느낌)으로 인해 사람은 미지의 행보를 가고, 미지의 행보를 가기에 내가 맞게 가고 있는지 불안에 빠진다. 이 불안은 완전한 존재가 되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으며,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신에 다가서고자 초월적 가치를 추구한다.
하여 모든 자유의지는 성불에 이른다.

자유의지를 성불로 이끄는 초월적가치의 방향성은
생존이나 쾌락이나 권력등의 세속적 가치로 인해 발생한다.
완전한 자유를 갖는 의지란 방향성을 갖지 않을 것이나
생존과 쾌락과 권력등의 세속적 가치로 인해 잘못된 선택에 대한 불안이 생기기 때문이다.
영혼의 자유의지는 육신의 본능과 합쳐져 비로소 인격이 되고 성불을 향하는 방향성, 즉 불성이 생긴다.

5.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캉의 말이다.
엄마가 칭찬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아이가 그렇듯 사람은 타인의 욕망을 배우면서 사회를 배운다.
아이가 말소리를 흉내냈더니 엄마가 좋아하면
아이는 엄마가 좋아하는게 좋아서 열심히 연습한다.
성장발달기간 동안 아이는 엄마 나 잘했지? 하고 싶은 마음을 동력으로 해서 세상을 열심히 배운다.
또한 여기서 좀 더 자라면 남들이 부러워하고 좋은 것으로 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애쓴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보편적인 시작이고
그렇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이 행동방침이 갖는 한계에 노출된다.
뭔가를 하고 싶고 갖고 싶은데 이게 내가 원하는 건지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느라 원하는 건지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거나,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사실은 내가 원한 게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느낀다거나.

내가 이해하는 욕구의 체계는 두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생존과 번식을 목표로 하는 생물로서의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에서 발생한 욕구로서
생물로서의 욕구 기준으로는 쓸모없는 행동을 하게 하고, 불안감을 거쳐 초월적 가치추구에 이르게 한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생존의 안위를 추구하는 생물로서의 욕구에 기원한다.
무력한 갓난아이는 외부 환경이 자기를 해치지 않도록 외부의 눈치를 살필 필요를 갖는다.
보호자가 칭찬하는 행동을 하는 한 자기는 보호받을 것이고 이는 위협으로부터 생존을 지키는 안위가 충족되는 안도감을 갖게 한다.[2]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생물로서의 욕구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는 그 카테고리의 욕구가 갖는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것이 충족되어도 가슴에 남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그것이다.

6.
행복이란 무엇인가?
신경계에 입력되는 쾌감 신호가 행복인가?
인간이 어떤 때 쾌감을 느끼는가는 잘 알려져 있다.
욕망을 극대화시켜 충족시키는 방법은 돈이 되기에 많은 연구가 행해져 있고,
이젠 쾌감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화학적 주사제로 직접적 쾌락 입력이 가능하다.
중요한 건 쾌락이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경계를 통해 주어지는 쾌락의 감각은 행복이 아니다.

또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취하여 비교우위를 얻은 사람은 행복한가?
비교우위감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일뿐 행복이 아니다.
외부로부터 입력되는 감각적 쾌락도,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비교우위감도 자유의지의 장애 앞에 절망한 사람들의 연명수단일뿐 행복은 아니다.

돈, 비교우위감, 쾌감입력은 (두가지 욕구중 하나인) 생물로서의 욕구를 충족하여 안위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즉 부정적 요소의 완화제 역할이다.
긍정적 요소를 창출하는 것은 자유의지적 욕구이다.
자유의지적 욕구는 불가항력과 불안에 의해 제약받지만 사람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 가치 추구를 한다.
그래서 초월적 가치 추구는 자유의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위가 되며,
이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가치관-곧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고,
스스로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쾌감 자극을 입력받아서 좋구나 반응한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남보다는 낫구나 하고 비교우위를 확인하는 것도 행복이 아니라고 할 때
이상의 것을 빼고 나서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자유의지에 따르는 초월적 가치추구가 행복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의지로 선택 혹은 검증한 가치를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한 느낌이 행복이다.
이 말을 좀 더 일반적으로 만들면
무엇이 가치있는지를 찾고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행복이다.

7.
내가 설명한 가치관을 발휘하는 방법은 구체적으로는
`가치를 쌓는다`라는 관점을 견지하면서
할일&하고싶은일,인생계획(만들고 싶은 인생)의 목록을 만들고 그것을 실천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거나 유일무이한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본래부터 내가 해온 방식인데 도움이 되더라는 의미다.
내가 아는 구체적인 한가지 방법이다.

또한 돌아보건데 이루어질만한 계획이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이루어진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나는 이 `할일/하고싶은일/살고자하는 삶을 목록으로 만들어 업데이트하면서 지워나가는` 방법에 소망하는 바를 이루게 하는 어떤 힘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방법은 `지금의 행복은 돌아오지 않는다`며 욕망을 참지 않는 방법에 비해 계획적인 절제를 도우면서도 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지 않도록 해준다. 가령 `담에 어디에 가보고 싶다`라는 충동을 즉시 이행하는 것과 미루다가 잊어버리는 것의 사이쯤에서 실행하게 되며, 하고 싶은 일을 적어놨다가 실행한다고 해서 그 감흥이 시시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3]

8.
행복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을 긍정심리학이라고 한다.
내가 파악한 행복의 본질이 긍정심리학에서 조사한 역학관계에 부합하는지 검증해본다는 관점에서 공부해보려고 책을 세권 골라뒀는데 아직 읽지는 못한 상태다.
어떤 책이 좋은지 모르겠어서 대학 교과서 같이 생긴 것으로 골랐는데 좋은 책이었으면 좋겠다.
틈 나는대로 읽어봐야겠다.


[1] 키에르케고르는 이 절망을 좀 더 자세히 세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헤엄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생물적 욕망/ 쾌락/ 타인의 욕망을 차지하는 비교우위/등을 추구하는 데에 자아를 내맡기는 것.
두번째는 어차피 내가 너무 못나서 물살을 거슬러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없다는 도피적 자기 혐오.
세번째는 나는 헤엄칠 수 있지만 세상이 너무 악랄하게 거세서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없다는 피해의식적이고 공격적인 분노.

[2] 이런 가정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어려서 세상에 공포감을 갖게 되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고
자유의지자로서 갖는 자기의 욕구를 깨닳는데 어려움을 갖는 경향을 갖으리라는 예상.
갓난 아이에게 세상은 두렵고도 신기한 대상이지만 특히나 두려움의 측면이 강조되는 환경에서 살아 왔을수록 아이는 자유의지를 제약받을 것이다.
이를 내가 당면한 육아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중요한 건 아기가 잘못된 행동을 해도 `무조건 지지`하는게 아니라,
생존의 안위감을 깨는 공포를 막아주는 것이다.
우리아기는 좀 겁쟁이인데... 겁먹지 않게 신경써줘야겠다.

[3] 아이 기르기는 내가 할 일중에 큰 부분을 갖는다.
하늘이 중생을 키우메 자기보다 현명한 부처조차 키워낼 수 있는 세상을 꾸려나가듯이
사람이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나 자신보다 현명하고 나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나가는 것이다.
흔히 자식의 행복을 위한다고들 말하나, 무엇이 행복인가를 생각하면
행복이란 자유의지로 무엇이 가치있는지를 찾아내고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자식의 행복을 위한다는 것은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지혜를 주고
자유의지로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나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내가 미처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는 모습을 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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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포함하는 초월적 가치를 규정함에 있어 결국 키워드는 자유의지다.

사람은 환경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변수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관점에 서 있다. (당장 떠오른 예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이상적 군주로 설명한 체자레는 그 숱한 `성공할 수 밖에 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우연한 질병으로 몰락한다.) 철저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당장 내일 덜컥 병에 걸려 쓰러질 수 있다. 소상히 알고보면 병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라 우연히 걸리는 것이 아니지만 사람의 관점에선 우연한 사건일 뿐이다.
이렇듯 권선징악이니 인과응보니 하는 가치의 인과는 우연 앞에 끊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일쑤고 생존과 권력과 쾌락의 압박은 환경의 격류가 되어 사람을 몰아친다.
환경의 격류하에서 사람은 한줌밖에 되지 않는 자유의지로 버둥거리지만 대부분 환경을 거스르지 못하고 떠밀려 가기 일쑤다.
인간의 부조리는 그 한줌의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고 완전한 유물론자로서 살아가려 하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공허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환경의 압박에 떠밀려만 가는 한 사람은
생존을 쫓지만 생존해도 공허하고
권력을 쫓지만 권력위에서도 공허하고
쾌락을 쫓지만 쾌락에도 불구하고 공허하다.
자유의지는 외부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자유의지를 갖는 단독자는 매뉴얼화된 인생에 복종하지 않으며 미지의 길을 찾아 스스로의 인생을 살기에 자기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항상 불안감을 갖을 수 밖에 없다.
자유의지를 발휘하고자 하는 한 그는 아무리 잘하고자 해도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한계를 만나고 나약함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죄악을 만난다.. 여기까지는 키에르케고르.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자아의 죽음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발휘하면 자아의 한계를 느끼는
부조리한 인간으로서 갖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은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이른다.

자유의지가 완전한 자유로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주어진 입력의 당위적인 결과를 일부 부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시도하지 않으면 공허감에 빠져 견디지 못하는 속성, 즉 일종의 랜덤함수가 포함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내가 주목하는 바는 그 여파다. 과거에 배운 것에 완전히 순응하는 것을 못견디는 속성(자아가 죽어버리는 느낌)으로 인해 사람은 미지의 행보를 가고, 미지의 행보를 가기에 내가 맞게 가고 있는지 불안에 빠진다. 이 불안은 신이 되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으며,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신에 다가서고자 초월적 가치를 추구한다. 하여 모든 자유의지는 성불에 이른다.

자유의지를 성불로 이끄는 초월적가치의 방향성은
생존이나 쾌락이나 권력등의 세속적 가치로 인해 발생한다.
완전한 자유를 갖는 의지는 방향성을 갖지 않을 것이나
생존과 쾌락과 권력등의 세속적 가치로 인해 잘못된 선택에 대한 불안이 생기기 때문이다.
영혼의 자유의지는 육신의 본능과 합쳐져 비로소 인격이 되고 성불을 향하는 방향성, 즉 불성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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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은 컴퓨터로 인한 단절감을 극복하는 장점이 있다. 아이들 교육분야별 보드게임 몇 가지

공간감각

젠가(Jenga)
자신의 차례가 되면 차곡차곡 쌓아올린 나무탑에서 블록 한 조각씩을 빼는 게임. 먼저 탑을 무너뜨린 쪽이 패자가 된다. 나무탑이 넘어지지 않도록 조각을 빼면서 공간을 이해하고, 도형에 대한 학습을 할 수 있다.
참여인원- 2명 이상
추천연령- 6세 이상

보물찾기(Labyrinth)
타일을 조합해 가며 즐기는 게임. 타일에는 미로와 갖가지 보물이 그려져 있다. 미로 타일들을 하나씩 연결시키다 같은 보물이 한 미로로 연결되면 원래 놓여 있던 타일을 가져올 수 있다. 단 자신이 타일을 가져와도 미로가 끊어지지 않도록 공간 구성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미로 타일을 가장 많이 가져간 사람이 게임에서 이긴다.
참여인원- 2∼6명
추천연령- 7세 이상


까르까손(Carcassonne)
성, 길, 농장, 수도원이 그려진 다양한 타일을 놓아가며 지형을 만들고 그 위에 추종자를 놓으면 점수를 얻는 게임. 타일을 놓는 방법은 자신의 순서가 되었을 때 뒤집혀 있는 모든 타일 중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놓으면 된다. 타일로 자신이 직접 하나의 마을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공간분배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참여인원- 2∼5명
추천연령- 8세 이상


사고력

셋(Set)
12장의 카드를 테이블에 늘어놓고 정해진 조건에 따른 카드 3장을 먼저 가져간다. 카드는 도형의 모양, 개수, 음영, 색깔에 따라 구분되는데 각각의 특성이 모두 같거나 모두 다르면 SET이 된다. SET을 먼저 외치면 카드 3장은 자신의 것이 된다. 게임이 끝났을 때 가장 많은 카드를 가져간 사람이 승리. 카드의 도형을 관찰하면서 도형감각과 집중력, 관찰력도 발달한다.
참여인원- 2∼6명
추천연령- 8세 이상

클루(Clue)
보디 아저씨가 자신의 저택에서 누군가에게 살인을 당해 범인을 추적해 가는 것이 게임의 줄거리. 미리 사건조합을 해놓아 범인을 정한 뒤 각자 인물 한 명씩을 맡아서 누가 어디서 어떻게 그를 죽였는지 추리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단서 카드를 바탕으로 범인, 범행 장소, 무기를 추측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게임은 진행되며, 가장 먼저 정확하게 맞히는 사람이 게임에서 승리한다.
참여인원- 3∼6명
추천연령- 8세 이상


고슴도치 경주(Igel Argern)
각자 고슴도치 네 마리씩을 가지고 경주를 벌인다. 고슴도치가 경주하는 트랙은 총 6개,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의 트랙에 있는 고슴도치들은 앞으로 한 칸 이동할 수 있다. 자신의 순서에서 옆으로 옮기는 것은 선택사항. 상대방의 고슴도치에 의해 깔리면 자신의 차례가 되도 움직일 수 없다. 자신의 고슴도치 중에서 세 마리가 가장 먼저 결승점을 통과하면 이긴다. 단순할 것 같지만 상대방의 고슴도치를 피해 트랙을 선정하고, 좌우로 움직이는 등 잠시도 한눈팔 수 없는 게임.
참여인원- 2∼6명
추천연령- 8세 이상

피트(Pit)
카드에는 곡물들이 그려져 있고 게임이 시작되면 9장의 카드를 들고 있다가 서로 정신없이 같은 종류, 같은 개수만큼의 카드를 교환해 가면서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곡물을 한 종류로 먼저 만든다. 먼저 완성한 사람이 종을 치면 게임은 끝이 난다.
피트게임을 하게 되면 계속 종소리가 울리고 서로 카드를 빨리 교환하기 위해 분주해지는 재미있고 신나는 게임이다.
참여인원- 3∼6명
추천연령- 7세 이상


창의력

옛날 옛적에(Once upon a time)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섞여 있는 이야기 카드를 배분한다. 이야기 카드를 들고 각자의 순서가 되면 카드 그림에 맞는 멋진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야기를 만드는 도중 자신이 받았던 엔딩 카드로 이야기를 끝내야 이기는 게임.
참여인원- 2명 이상
추천연령- 6세 이상

맘마미아(Mamma Mia)
파인애플, 올리브, 페퍼(고추), 버섯, 살라미(동그란 소시지) 등 다섯 가지 피자 토핑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피자를 만들어내는 게임. 피자 주문서를 내고 이를 만들기 위해 각자 자기 순서에서 현재 밑에 쌓은 재료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가며 피자를 만들어간다. 피자 재료가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을 해야 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피자를 만들면 된다. 피자 재료 5가지와 주문서를 가지고 게임을 하다보면 수학의 조합, 경우의 수에 대한 학습 능력이 길러진다.
참여인원- 2∼5명
추천연령- 10세 이상


수리력

락코(Racko)
60장의 카드에 숫자가 써 있고 게임을 시작할 때 플레이어의 카드꽂이에 10장의 카드를 뒤죽박죽 놓는다. 카드꽂이의 카드들을 새로운 카드로 바꾸면서 10장의 카드를 가장 먼저 순서대로 맞추면 되는 게임. 테이블에는 펼쳐진 카드 한 장과 펼쳐지지 않은 카드더미가 있고 자신의 순서에서 펼쳐진 카드 혹은 펼쳐지지 않은 카드 제일 윗장 중 하나를 선택하여 자신의 꽂이에 있는 카드 한 장과 바꿀 수 있다.
참여인원- 2∼4명
추천연령- 8세 이상

잊혀진 도시(Lost cities)
게임의 내용은 잊혀진 도시들을 발굴하기 위한 탐사를 떠나는 과정. 투자 카드와 탐사 카드를 잘 사용해 탐사가 성공했을 때는 점수를 얻고 반대로 탐사가 실패하면 점수를 잃는다.
탐사의 성공여부는 숫자카드의 합으로 판명되는데 20점 이상이 되면 20점을 뺀 나머지 점수가 플러스 점수가 되지만 20점 미만일 경우는 마이너스. 예를 들어 어떤 어떤 지역에서 카드 숫자 합이 16이면 탐사 실패로 -4점, 다른 지역에서 카드 숫자 합이 23점이면 탐사 성공으로 +3점을 얻는 것. 게임 종료 후 점수의 합산으로 승자를 정한다.
상황을 잘 판단해서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사용해야 하므로 수리력뿐만 아니라 판단력도 요구된다.
참여인원- 2명
추천연령- 10세 이상


순발력

할리 갈리(Halli Galli)
플레이어가 카드를 똑같이 나눠든 다음 카드를 한 장씩 펼쳐서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과일 카드를 맞추는 게임. 내려놓은 과일 카드들 중에서 한 가지 과일이 5개가 되었을 때 종을 치고 바닥에 내려놓은 카드를 모두 가져갈 수 있다. 게임이 끝나고 카드가 가장 많은 사람이 승자.
참여인원- 2∼6명
추천연령- 6세 이상

팁킥(Tipp-Kick)
작은 축구장이 그려진 보드 위에서 작은 선수와 공 모형을 사용해서 축구 경기를 한다. 선수의 머리 위에는 버튼이 있어서 버튼을 누르면 공을 다리로 찰 수 있게 되어 있다. 공에는 흰색과 검은색 면이 있어서 공이 정지한 상태에 따라 누가 공격할지 정하게 된다.
참여인원- 2명 또는 4명
추천연령- 4세 이상


전략

탤리호(Tally Ho)
두 명이 할 수 있는 게임. 한 사람은 사냥꾼과 나무꾼을, 또 한 사람은 여우와 곰을 맡고 타일을 이용해 게임을 즐긴다. 타일을 뒤집거나 펼쳐진 타일을 이동시키면서 서로를 사냥해서 더 많은 포획물을 얻으면 이기는 게임.
타일을 이동 중 자신의 타일이 먹이사슬 관계에 있는 상대의 타일과 겹쳐지게 되면 잡히거나 잡는 것. 게임에는 정해진 먹이사슬 관계가 있어 여우는 사냥꾼에게 잡히고, 사냥꾼은 곰에게 잡히는 식이다.
참여인원- 2명
추천연령- 8세 이상

달무티(The great dalmuti)
플레이어들이 카드를 나눠 들고 있다 순서에 따라 들고 있는 카드를 내려놓는 게임이다. 카드를 내려놓는 방법은 같은 숫자카드를 한꺼번에 모아 내려놓는 것, 그러나 항상 처음 낸 사람의 카드숫자보다 작은 숫자의 카드를 내려놓아야 한다. 남들보다 먼저 손의 카드를 다 사용하면 다음 게임에서 왕이 되어 제일 먼저 플레이할 자격이 주어지고 세금을 징수받게 된다. 세금이란 계급이 가장 낮은 사람이 카드 중 숫자가 작은 카드 2장을 왕에게 바치는 것으로 왕은 그 카드를 바탕으로 유리한 플레이를 펼쳐나갈 수 있다.
참여인원- 4∼8명
추천연령- 8세 이상

프랭크의 동물원(Frank's zoo)
귀여운 동물들이 그려져 있는 카드게임. 여러 동물들은 다양한 천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낸 카드의 천적이 되는 카드를 내면 그 카드를 손에서 내려놓는다. 가장 먼저 손에 있는 카드를 없애면 이긴다.
참여인원- 4∼7명
추천연령- 10세 이상


프리챌 폐쇄로 인해 옛날에 퍼왔던 글 옮김.
아가야 아빠가 네가 7살 되면 같이 놀려고 10년전에 육아 자료를 모아놨더라. 원 세상에.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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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독재국가 북한과의 대치상태라는 환경으로 인하여
오히려 한국은 사회주의를 비판하기 어려운 나라다.
반공반북의 무조건적인 비난에 비판이 묻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사람은 사회주의를 절대악으로 다루어 무조건 비난한다.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은 무조건적인 비난을 적들의 음해로 듣기 때문에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의 사회주의는 비판받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싫어하건 좋아하건
모두가 자신이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회주의란 좋은 것or나쁜 것에 판단을 이미 내려놓은 상태에서 회의 없이 공격이나 추종의 행동만을 한다.

내가 파악하는 현재 한국의 사회주의의 위상은 이렇다.
자본주의하에서 절실히 필요한 '분배정의'라는 가치를 찾고자 한 시도, 그래서 사회주의는 분배정의를 중시하는 진보의 마음의 고향같은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나는 팽팽했던 이번 대선을 판가름한 변수를 사회주의에서 찾는다.

이번 대선에서 시대적 과제가 신자유주의 탈출이라는 데에는 세 후보 캠프 모두에서 합의가 된 사항이다.
세 후보는 표면적으로 대동소이한 대안을 들고 나왔고 그건 모두 복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차이는 분명했다.

박근혜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다.
'잘살아보세의 신화를 다시 한번 이루어낸다' : 잘살아보세는 박정희의 권한&책임 집중형 리더십을 통한 경제 개발로 난관을 극복하는 거다.
'줄푸세를 잘 하면 경제 민주화' : 대선토론에서 한 말이다. 줄푸세는 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운다의 약어로서 신자유주의의 영혼같은 말이다. (개인적으로 굉장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을 이보다 쉽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말을 하는 박근혜는 '신자유주의를 똑바로 해보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경제 민주화가 신자유주의를 탈출하기 위한 노력 임을 생각할 때 저 말은 표면적으로는 말이 안된다.
하지만 박근혜가 '신자유주의를 똑바로 수행하면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의미가 통한다.
국민이 박근혜에게 기대하는 것은 '박정희 리더십'이다. 박근혜 본인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제가 전문가들과 의견을 모아서 알아서 잘 하겠다'이다. 즉 요약하면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어떻게 탈출하시겠습니까 라는 시대적 질문에 박근혜는 '모든 권한과 책임을 위정자가 짊어지고 신자유주의를 똑바로 운용함으로써 해결하겠다'라고 대답한 것과 같다. 그녀는 무한책임 타입의 리더로서 소환되었다.
비록 복지 공약이 있긴 하지만, 박근혜의 지지자들은 박근혜가 공약을 산술적으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들은 '상황 편치 않으면 공약이야 안지킬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할지언정 '결과만 잘살게 되면 되지요'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은 민주당을 장악한 친노세력의 대표로서 출마했다.
친노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패배한 현재로선 전반적으로 상당히 불공정한) 다양한 평가들이 병존하지만, 나는 친노는 이념에 충실한 중도 좌익이라고 판단한다.
민주당 비노 세력이 호남 지역주의 세력으로서 이념에 충실하지 못하여 중도 좌익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위치였는데 비해
친노는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이념에 충실한 중도 좌익 세력으로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안철수의 단일화 토론을 보면서 나는 문재인이 완급조절하는 사회주의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사회주의자인 이정희와 이상향은 같은데 완급에서만 차이가 나는 '중도' 좌익.
이는 한국의 좌익이 전통적으로 사회주의에 이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념에 충실한 중도 좌익인 친노는 결과적으로 '완급 조정했지만 역시 사회주의자'들이 되는 것이다.
수정자본주의자 안철수와, 완급조정해도 이상향은 사회주의자 친노의 차이는 문-안 둘 다 보편적 복지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난다.
안철수의 복지는 '자본주의하에서 선의롭게 행동하던 플레이어들이 리스크로 인해 한순간에 몰락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망'을 의미했다. 안전망이란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게 위험하면 아래 안전망을 깔아줄테니 두려움 없이 자본주의로 가라'라고 말하는 셈이다.
창업 실패로 재기 불능이 되지 않도록 하는 복지라거나,
혹은 자본주의에 충실한 구성원인 중산층이 중병 등으로 한순간에 몰락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 등이다.
이에 비해 문재인의 복지는 취지가 달랐다.
가령 의료비 최대 100만원 상한선 제도를 포함하여 공약이 모두 사회주의적 이상을 점진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으로서 '자본주의의 길은 어쩔 수 없이 가고 있긴 하지만 점진적으로 안가야 하는 길이다'라고 말하는 셈이었다.
안철수가 추구한 것이 현실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였다면
문재인이 추구한 것은 현실 구현 가능한 사회주의로 보였다.

친노 민주당이 이념에 충실한 집단임은 안철수와 문재인의 말을 봐도 드러난다.
안철수는 처음에는 자신의 정치적 주장은 '거대한 이념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었지만 문재인과 만났다가 멀어지면서는 '이념적으로 차이가 있어서 함께 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건 내겐 안철수가 자기의 주장이 (사회가 이미 공유하고 있는 자본주의 이념을 전제로 한 주장이라서) 이념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전제가 다른 이념에 충실한) 친노를 만나서 '이념적으로 다르다'고 느끼게 된 것으로 들린다.
또한 문재인 자신도 '우리 친노가 아직 이념적인 공중전을 하고 있고 생활 밀착적인 지상전을 하고 있지 않다'는 요지의 반성을 했다.
그럼 그들의 이념이 무엇인가 하면, 역시 중도 좌익이다. 중도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요구되는 수준의 자본주의를 수행하지만(노통 시절엔 신자유주의가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세계적 조류였다), 이상향을 좌익에 두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옳은 것으로서 추종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탈출을 신자유주의(를 똑바로 하는 것)에서 찾는 박근혜.
신자유주의 탈출을 사회주의에서 찾는 문재인.
그리고 대선 결과는 민주당의 패배였다.
나는 이 결과를 민주주의에 의한 사회주의 거부라고 판단한다.
중도 좌익의 사회주의적 이상에 대해 민주주의의 반응은
고연령층에선 투표율 상승으로,
저연령층에선 막판 접전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낮은 호응으로 나타났다.
나는 이것이 대단히 민주주의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정확히는 민주주의가 차용하고 있는 다원주의적 중용론은) 사회의 선택을 논리적 생각이 아니라 다수 구성원 개개인의 경험에 맡기는 제도다.
비록 사회주의가 한번 크게 실패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 사회주의는 이론적으로 완전히 반박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거대한 자원이 투입된 사회주의 실험이 모두 실패했다는 결과를 경험했으나,
아직까지도 사회주의가 잘못된 이론이라는 게 증명된 것은 아니다.
이론에 의존한다면 사회주의는 아직도 선택 받을 여지가 있는 이념이다.
그러나 경험에 의존한다면 사회주의는 선택받지 못한다.
온갖 부정적 이슈와 이전 정권의 과오등 도저히 야권이 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은 이론적으로는 옳을 수도 있는 사회주의를 구성원의 경험에 의존해 거부하는 결과를 냈다. (중도좌익 이념에 충실하는 친노 필패론이라는 결과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 점이 대단히 민주주의적이다.
(안철수 지지자의 1/3이 새누리당을 찍겠다고 한 여론조사를 보건데
나는 안철수를 거쳐 새누리당으로 넘어간 표심이 1.5% 보다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만약 야권이 신자유주의 탈출의 대안을 안철수의 수정자본주의로 내놓았다면
박근혜를 찍은 50만명 이상의 마음이 2번을 찍도록 돌아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다.
이건 질만하게 행동해서 진 안티 박근혜 연합이
이길만하게 행동했다면 이길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표차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땅의 표밭은 민주주의를 계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국민들로 매워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후는 어떻게 될까?
박근혜는 성공적일 수 있을까?
개발과 줄푸세를 정치철학으로 삼는 그녀가 신자유주의 탈출을 요구받는 시대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탈출해야만 하는 난국에서
재벌에게 천국같았던 신자유주의를 철폐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다고들 말하는 탈출로를 향해
재벌을 한 편에 두고 가야하는 박근혜는
과연 어떤 정치를 보여줄 것인가.
대통령 박근혜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잘살아보세의 무한 책임을 지는 타입의 리더로서 소환된 그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선 어느 순간 재벌에게 시선을 돌려야 함을 가능한 빨리 알아차리길 희망한다. 그녀가 그러지 못한다면 못하는대로 미래는 희망적일 것이다.

야권은 친노가 연이은 패배로 욕먹어도 민주당에서 친노빼면 호남 지역결탁세력이 당권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손학규를 위시한 비호남 비노 세력은 민주당내 당권을 잡기엔 당장은 약해보이기 때문이다.
손학규를 중심으로 하는 비호남 비노 비사회주의 세력이
신자유주의 탈출을 (안철수식의) 수정자본주의에서 찾는 안철수와 손잡고 길을 찾고자 하길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리를 해보겠다.

사회주의(socialism)는 본래 자본주의의 병폐를 '생산수단의 공유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특징을 갖는 19세기 2백여개의 이념에 대한 통칭이다. 이들은 개인주의의 반대말로서 '사회주의 socialism'라는 말을 사용했다. 즉 분배정의의 가치를 소망한 주장인 건 맞는데, 그 해법이 '자본 국유'라는게 특징인 주장들이다.
맑시즘은 그 200여개의 사회주의중 하나였고, 맑시즘이 뜨면서 여타 사회주의들과 차별성을 갖기 위해 스스로를 공산주의라고 부르며 '세상은 사회주의를 거쳐 공산주의의 이상향에 이른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여타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하고 자기들의 사회주의는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함으로써 차별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이후 맑시즘에 의한 의미재정리를 거쳐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는 맑시즘 안에서의 의미와 맑시즘 밖에서의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 구체적 의미가 무엇이 되었든, 맑시즘 안의 '사회주의'는 결국 공산주의에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면에서 자본의 공유화를 필수과제로 여기고, 맑시즘 밖의 '사회주의'는 본래 의미 자체가 자본을 개인주의에 맡기면 안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자본의 공유화를 필수과제로 여긴다.
즉 '사회주의자'는 그가 맑시즘 안의 해석으로 사회주의자이건/맑시즘 밖의 해석으로 사회주의자이건
자본의 공유화를 궁극적 이상으로 하는 사람이다.

이후 맑시즘은 개인 자본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실험에 참여한 모든 국가가 실패하는 사태를 맞이한다.
이론적으로는 아직까지도 그 실패가 필연인지 완벽히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실제로 수행된 실험이 모두 실패했을 뿐이다.
이후 자본주의 치하에서 분배정의는 날로 간절해져갔으나
사회주의를 능가하는 대안은 아직 확보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실패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애매한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거둘 수 없었다.
'자본을 완벽하게 국유하는 것이 한번에 이루기 어려운 이상향이라면
자본의 움직임을 사회가 적극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과도기로서 적합하지 않을까?
공산주의에 이르기 전 단계인 이것은 사회주의라고 부를만하지 않은가?'
이런 방식의 단어 의미 변용을 거쳐
본래 자본의 공유화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수정자본주의의 영역에까지 발을 확장한다.
이제 사회주의자의 눈에는 수정자본주의의 성과는 모두 사회주의의 성과로 해석 가능해진다.
사회주의에 다가간 덕분에 (사실은 수정자본주의지만)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아지더라라는 인식이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는 절실히 필요한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 진보의 마음의 고향같은 지위를 얻는다.

사회주의가 분배정의의 확보를 꿈꾸며 등장한 이념들인 건 분명하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항상 '자본의 국유화가 궁극적 해법'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사유자본철폐를 주장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지지해야 하는 이념이며, 진보가 보수의 대안이 되기 위해선 사회주의를 털어내야 한다.
내 개인의 관점에서 사회주의는 이론을 떠나 현실의 실험에서 반증된 이론이기 때문이고,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사회주의는 야권이 질 수 없는 그 모든 상황 요소에도 불구하고 지게 만든 필패의 요인이기 때문이다.
진보가 추구하는 것은 분배정의이지 반드시 사회주의 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분배정의를 위한 대안은 사회주의를 버리고도 안철수가 주장한 바 있는 수정자본주의가 제시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사실, 그때가 되면 편가르기 용 '진보'라는 이름 자체가 의미를 잃을 것이다.

- 이전에 단편 단편 썼던 것들을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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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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