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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이란 예제의 이면에 숨겨진 패턴(의미, 본질)을 이해하고 반복하여 습득하는 것이다.
패턴을 이해했을 때 '이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라는 '감'이 온다.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선 반복이 필요하고 또한 이해한 패턴을 습득하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반복이 필요하지만
패턴 이해없이 무조건 반복만 한다고 습득 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가 불가능할때의 반복과 이해가 가능할때의 반복은 지루함의 차원이 다르다.
관건은 예제를 분석 및 통찰하여 패턴을 파악하거나 기존에 알고 있던 유사 패턴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는 '연습하면서' '연구하여' '더 잘하게 되는' 맛을 가르치기 위해
아가가 연습을 하고 있으면 "오또케하는고야?"하며 관심을 보여주고
아가가 어떻게 하는 건지 보여달라고 하면 시범을 보여주고
아가가 성공하면 "그렇게 하는거야~" 하고 이쁘다 잘한다 칭찬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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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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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될수록 생각이 정형화 된다.
우리 아버지는 '중국집의 요리 솜씨는 우동 국물맛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짜장이나 짬뽕등의 다른 요리는 양념 맛으로 덮이지만 우동은 맑은 국물이라서 솜씨가 드러난다, 뭐 그런 류의 생각일거다.
완전히 의미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굉장한 비결도 아닌,
한번쯤 들어 넘기기엔 참신하지만 계속 사용할 정도의 관점도 아닌 그럭저럭 옳은 말 정도의 생각.
그런데 이 생각이 점점 더 정형화되어 아버지 내적으로 마치 금언이나 격언 비슷한 것이 된 모양이다.
아버지를 오랜 시간을 두고 본 나는 아버지가 '중국집의 요리솜씨'를 들으면 '우동'을 떠올린다는 걸 안다.
그 순간에 아버지가 말을 꺼내면, 말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무슨 말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는 사고방식이 루틴화 되어 있다는 의미다.
입력에 대한 출력이 정형화되었기에 예측이 가능하다. 또한 이것이 반복되면 '뻔한 말'로 들리게 된다.

'아이들은 머리가 굳지 않아서 창의성이 좋다'고들 얘기하는데 같은 맥락이다.
아이들일수록 어떤 입력에 대한 생각이 어느 방향으로 나올지 덜 루틴화 되어 있기에 종종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답을 내놓는다.
예상의 범주를 크게 벗어날 때의 느낌이 앞서의 '아이들은 머리가 굳지 않았다'는 평을 만든다.

생각이 굳었다는 평가나 뻔한 말로 들린다는 평가는 그것이 최선의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습은 본래 루틴을 구축하는 것이다. 정형화 되더라도 최적화된 형태로 정형화 되었을 때엔 '학습이 잘 된' 것으로 평가된다.
'머리가 굳었다', '뻔한 말' 이런 부정적 평가는 최적이 아닌 상태로 정형화 되었음이 드러날 때에 나타나는 반응이다.

꽉막힌 어른이 되지 않겠다며 아이다움을 유지하려 하는 시도가 여럿 있었다.
이들의 방식은 '사고방식이 정형화되는 것을 최소화'하려는 형태로 이루어지곤 했다.
생각이 정형화 되는 것을 단순히 최소화 하려는 시도는
어차피 학습을 완전히 거부하고서는 살 수가 없기에 어떻게든 학습을 하기는 하는데
이때 별 구분없이 오로지 최소화만 하려고 하면 학습한 부분중에 오답의 비율은 똑같이 유지되는 결과를 만난다.
100을 학습하고 40을 오답으로 채워서 '꽉막힌 어른'이 되는 것을 개선하겠다고
10을 학습하는데 그중 4는 오답으로 채워지며 90은 학습하지 않는 형태다.
이러면 '어른의 정형화된 사고방식'의 단점만 줄어드는 게 아니라 장점까지 같이 줄어들게 된다.
이러면 결과적으로 철없는 어른이 된다. 젊은 척 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꽉 막힌 부분이 드러나고, 어른 치고도 뭔가 부족하니 이도 저도 아니라서 딱히 더 낫다고 보기도 어려운 결과가 된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자'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를 구분하여
분명치 않은 것을 '알고 있다'여기면서 루틴화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다.
분명치 않은 것을 루틴화하면 할수록 생각이 굳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분명치 않은 것에 대해서는 모름을 인정할 것.
내가 모르는 것임을 알고 있을 때에 오답을 따라 루틴화된 사고를 하지 않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 입장에서 이 정도의 편파성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관대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는 부유하니까 내 입장에서 부유한 쪽에 치우치게 말하더라도...'
'나는 감정적으로 화가 났으니까, ...'
모든 입장은 변하고 학습된 오답은 쌓인다.
내가 정말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지만 임기응변을 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하여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 경우를 적게 가져가는 것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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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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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하게 하기.
울고 떼쓰고 화내기 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의사소통 하기를 잘해서
협상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http://longlive.tistory.com/37 'What women want'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 "어떻게 하고 싶어?"라고 자꾸 물어보기.
가능한 것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도와서 스스로 피드백을 얻을 수 있도록 하고,
힘든 것은 원한다고 다 들어줄 수 없으므로
"대신 이렇게 할까?" "그럼 아빠가 이렇게 해도 되나?"라고 내가 재차 협상하기.
자기가 뭘 원하는지 생각하고 의사표현 및 절충하여 협상하는 연습이 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게 하기.
욕망과 가치관을 절충하여 그중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 즉 아이가 추구하기 좋아하는 가치를 파악하기.
그러기 위해서 할일 하고싶은일 목록 쓰게 하기.
더 나은 방법을 찾고 숙달하는 것의 가치있음과 재미를 가르치기.
계속 숙달하고 연구해서 능숙해지는 것을 지향하므로, 이러한 자세를 칭찬해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준다.
'연습을 많이 해서 능숙해지는 것을 잘하는 아이'라고 칭찬한다.
(http://longlive.tistory.com/467 '인생관 :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 "어떻게 하고 싶어?"
글 쓸 수 있게 되면 할일 하고싶은일 목록 쓰게 하기.
"연습하는거야? 잘하네~ 우리 아가는 연구파야"라고 칭찬하기.

주관 뚜렷하면서도 울지 않고 의사표현 잘하던 아가가 어린이집 다녀와서 떼쓰는 걸 보니 내가 뭘 가르치고 싶었던 건지가 생각났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고 표현하고 절충할 수 있다는 게 먼저 교육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유의지를 계발하기 위한 다음의 로드맵도 만족한다.
생존 공포 배제 => 직접 해보고 싶어하는 욕구를 해소시켜 준다. => 하고 싶어하는 대로 도와서 제어력을 준다. 스스로 피드백을 얻을 수 있도록 한다. => 아이의 대표강점을 파악한다. 자기가 그 가치를 추구하는 맛을 보여준다. => 숙달하는 재미를 알게 한다.
자기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그중 가치있는 일을 하는 재미를 알고, 그 가치 실현을 항상 할 수 있도록 숙달하는 데에서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한다.

요약하면 다음의 말을 습관적으로 한다.
"어떻게 하고 싶어?"
"대신 이렇게 할까?" "그럼 아빠가 이렇게 해도 되나?"
"연습하는거야? 잘하네~ 우리 아가는 연구파야"
& 할일 하고싶은일 목록 쓰게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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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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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의 가장 어려운 점은 직관적이지 않다는 거다.

아인슈타인은 슈레딩거의 고양이를 이해할때 "무수히 많은 상자가 있다면 그중 반은 고양이가 죽었고 반은 살아있다"라는 걸로 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파동식으로 정의되는 전자의 위치는 전자가 양자 주변을 광속으로 움직여서 어느 순간에 그 지점에 있을 확률이 얼마로 정의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양자 주위에 전하구름상에 삼각형의 세 꼭지점을 찍는다. 전자는 점 A,B,C 각각의 지점에 순차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꼭지점 A,B,C를 어떤 순서로 지나든 전자가 그곳들을 모두 지나려면 운동 방향을 바꿔야 하므로 가속도가 필요하고 

양자 주위의 전기장에서 가속도를 가지면 전자는 전자기파를 발산하며 에너지를 잃는다. 따라서 결국 전자는 에너지를 잃고 양자에 추락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건 전자 자체가 입자로서 한 시점에 한 지점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파동으로서 넓게 퍼져서 존재한다는 의미여야 한다. 


파동식은 그저 수식으로 존재 확률을 기술할 뿐이지, 그게 뭐냐, 왜 어떻게 그렇게 된다는 거냐가 없다. 

게다가 양자물리학자가 수식으로 작업을 하는 이상은 식의 창안자도 그 뜻을 알기는 어렵겠는 걸로 보인다.

파인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더라.

"상대성 이론을 이해한 사람은 이 세상에 12명 정도 있지만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젠 상대성 이론은 어지간하면 이해하니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아서 그런지 상대성 이론처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경우가 없다.

그나마 직관적으로 설명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위치를 정확히 관측하려면 주파수가 짧은 빛으로 관측해야 하고, 주파수가 짧은 빛일수록 높은 에너지를 갖기 때문에 그 빛이 입자의 속도를 바꾸므로 위치를 정확히 관측할수록 속도는 부정확해진다"라고 설명하는데 이것도 결국 고전적인 존재론과 토대가 다른 양자역학을 고전적인 입자간 충돌 모델로서 설명하기 위한 썰에 불과해 보인다. 


파동의 에너지는 진폭의 제곱에 비례한다. 

(에너지=일=힘*거리=(질량*가속도)*거리=질량*(거리/시간^2)*거리=질량*거리^2*시간^2)

그리고 파동으로 표현된 물질의 존재확률도 진폭의 제곱에 비례한다. 

파동식으로서 존재하는 물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니 이런 형태로 보인다.

이해를 위해 평행차원을 가정하자.

나란히 늘어선 두개의 면의 형태다. 

윗장에 해당하는 면 A는 우리가 존재하는 차원이고, 아랫장에 해당하는 면 B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차원이다.

이건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간 교환처럼 에너지와 질량간의 교환에 대한 비유가 될 수도 있는데,

여하간 A면에 있는 두 입자간에 위치가 곂치면 충돌이 일어나고 양 입자가 모두 영향을 받는다.

B면에 있을때에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파동으로 존재하는 물질인 피관측체는 A면과 B면 사이를 오가며 진동하고 있다. 

A 차원면 위로 한 점(관측점)을 움직인다.

회전하는 선풍기 날개 사이로 물체가 지나갈 수도 있고 충돌할 수도 있듯이,

또는 상하로 빠르게 흔드는 손 사이로 공이 지나갈수도 있고 충돌할 수도 있듯이

A차원에서 관측점은 피관측체와 충돌할 수도 있고, 그냥 지나갈수도 있다. 

관측점이 A차원면에서 피관측체와 만나게 되면, 즉 관측점과 피관측체가 충돌하면, 그게 그 지점에 피관측체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때의 충돌확률이 '존재확률'이다.

따라서 관측점과 피관측체간의 충돌이 없이는 피관측체는 A면상의 어디에 있다고 특정할 수 없다. 

그리고 관측은 관측점과 피관측체간의 충돌이므로, 피관측체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은 채로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측되기 전에는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라는 양자역학의 관점은 직관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우나,

이상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피관측체는 A차원과 B차원을 오가는 진동의 형태로 객관적으로 존재하기는 한다.

다만 A차원에서 특정되어야 만이 A차원 즉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뿐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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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인 사람은 권위만 포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수평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인내가 필요하다.

수평관계에서 사람들끼리 부데끼다보면 마찰로 인한 일종의 가해를 주고 받기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부주의한 가해는 수평관계에서는 피치 못할 일이고, 

따라서 자기가 피해를 당하는 것을 인내할 수 없으면 수평적인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할 수 없다.

자기가 받은 상처를 화내는 쪽으로 되갚으면 성격이 더러운 사람이 되고 

자기가 받은 상처로 인해 관계를 멀리하는 쪽을 택하면 꽁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수평적인 관계를 위해선 상처를 받더라도 마음에 두지 않아야 한다. 일종의 인내가 필요하다.


권위주의에 반발하여 싸우던 사람들은 이런 점을 놓치기 쉽다. 

수직관계에서의 위엄을 포기하는 것이 수평적인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것만 생각한 나머지 

자기가 받은 피해를 소화시켜버리는 것이 수평관계의 핵심이라는 점을 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관계가 수직이냐 수평이냐 보다도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안정적으로 원만할 수 있느냐다.

너무 수직적이어서 불만이 쌓이는 관계도 수평적이지만 수시로 버럭하거나 꽁하는 관계도 파탄이 나기는 매한가지다.

안정적이고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위엄과 인내 사이에서의 균형이 필요하다.

위엄은 타인으로 하여금 그 사람에게 만큼은 부데끼는 것을 주의하게 만든다. 

차가 비상등을 켜서 충돌 위험을 줄이는 것처럼 위엄은 자기의 인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수평관계가 어느 정도 선인지 지표를 제시하는 것이 되어준다.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로 자기 인내의 한계보다 우선하여 위엄을 포기해 버리면 경보 없이 충돌하는 일만 늘어나서 관계가 원만할 수 없다.


위엄을 갖추기 위해선 말을 너무 많이 해서는 안된다.

내가 하는 말이 옳을 확률이 높아야 타인이 내 의견에 반대하기가 어려워지고 그만큼 위엄을 지킬 수 있다.

열마디 해서 여섯번 맞는 것보다 두마디 해서 두마디 다 완전히 옳을 때가 위엄이 살고,

확실하고 중요한 것만 말할수록 위엄이 산다.

아랫사람과 정말 수평적으로 부데끼고도 불쾌해하지 않을 만큼의 인내가 없이 권위적인 사람이 되지 않겠다면서 말만 많아지면 관계가 불안해져서 결과적으로 성질 더럽고 주책맞은 사람이 될 뿐이다. 


나는 천성적으로 화를 내기 쉽고, 그렇다면 내가 수평적인 관계를 갖겠다고 위엄을 포기하는 것은 관계를 파탄으로 이끄는 길이 된다. 

(난 이걸 느끼면서부터 성질 더러움이 밖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이젠 착하다.)

따라서 나는 아랫사람, 특히 우리 아이에게 위엄을 지키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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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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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이 발표되고 온 세계가 과학의 발전에 흥분하던 20세기 초,
과학의 성과에 매료되어 '과학의 방법론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특별한지'를 연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식은 경험적으로 증명되어야 의미있는 것'이라고 주장한 논리실증주의자(=논리경험주의자)들이 그 시작이다.
이들은 현실에서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지식이라 할 수 있지 뜬구름 잡는 말장난이나 그럴듯한 이야기는 의미있는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신은 사랑이다'라는 명제는 확인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이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재료로 쌓아 올려서 더 높은 지식을 얻는 용도로 사용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과학처럼 성공적으로 앎을 확장하기 위해선 애초에 증명이 될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모호한 말을 해오던 과거 철학에 대한 강한 공격이 되었다.)

하지만 경험으로 확인하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앎을 얻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앎을 경험으로 올바르게 확인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했고 그 결과 귀납주의, 가설 연역주의, 반증주의를 제안했다.

- 귀납주의는 '많은 동일 현상을 경험하다보면 가설을 만들게 되고 그 가설을 확인해서 참에 도달하면 된다'는 모델이다.
스완은 하얗다는 것을 계속 경험하다보니 모든 스완은 하얗다는 지식을 얻었으며 이를 현실에서 재차 확인하여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모델이다. 이는 경험으로부터 앎을 얻는 일반적인 방법론이긴 하다. 그러나 아무리 반복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게 미래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블랙 스완의 역설이다.
과거에 항상 그래왔던 것이 새삼 달라질리가 있겠느냐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란 법도 없다. 태어나서부터 매일 병아리에게 밥을 주던 주인은 어느 날 치킨으로 쓰겠다고 밥 대신 칼을 들이밀 수도 있다.
그래서 귀납주의는 '과학처럼 올바른 앎을 쌓는 방법'에서 부정되었다.

- 가설 연역주의는 '과학자는 가설을 만들고 가설이 연역적으로 예상하는 바를 실험으로 확인하여 앎을 증명한다'라는 모델이다.
하지만 내 말이 맞는 이유 백개를 모아도 그게 내 말이 맞다는 증명은 되지 않는다. 이론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오는 경험을 반복 수집한다고 해서 그게 이론의 증명이 되는 게 아니라서 가설의 증명은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다.

- 때론 가설연역주의의 일부로 쳐주기도 하는 반증주의는 '반증가능해야 과학이다'라는 (아주 유명한) 말로 요약된다.
귀납적인 경험을 통해서 증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설이 예상하는 바가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여 반증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때 과학지식은 '수많은 검증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반증되지 않은 지식'이라는 지위를 얻는다.
이 주장으로 카를 포퍼는 과학을 연구하는 철학자들 중에 토마스 쿤과 더불어 양대 산맥이 되었다.

하지만 논리 실증주의의 시작은 '말이 논리적으로 그럴 듯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가 어떤 지가 중요하다'는 것임에 주목하자.
반증주의는 과학자들을 아주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람들로 표현하기 때문에 과학자들 자신은 반증주의를 좋아한다.
문제는, 실제로는 과학자는 반증주의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증주의와는 다른 과학의 실제를 지적한 게 쿤의 패러다임 론이다.
실제 과학자들은 현실 반증된 이론을 즉시 버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때론 그게 옳기까지도 한다.
가령 뉴턴이 계산한 달의 공전주기가 실제 달의 주기와 달랐을 때에도,
또 이론적으로 계산된 공기 중 음파의 속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론적으로 계산된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달랐을 때에도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이유로 뉴턴 역학을 부정한 사람은 없었다.
현상과 다른 결과를 말하는 이론을 지지하며 무려 한 세기를 보낸 후에야
달의 공전 주기 계산에 어떤 실수가 있었는 지가 밝혀졌고,
라플라스에 의해 음파의 속도가 어떤 이유로 틀려지는 지가 밝혀졌으며,
천왕성의 궤도는 관측되지 않은 자리에 해왕성이 있어서 틀어졌던 것임도 밝혀졌다.
그러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이론은 버려지지 않았다.
이론과 다른 현상은 아예 안보이는 것처럼 무시되거나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 정도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이런 경향은 심지어 반증된 이론이 끝내 틀린 것으로 밝혀지고 새 이론으로 교체되는 때에 조차도 나타난다. 직감은 공정한 기준이 아니라서 기존 과학자들이 자기가 기반을 두어 왔던 이론 앞에서 '직감적으로 옳다'고 느끼는 것은 그 이론이 옳건 틀리건 다를 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틀린 이론이 전환되는 시기에도 기존 과학자들이 구 이론의 지지를 철회하기 보다는 그들이 늙어 죽은 자리가 새 이론의 지지자들로 교체되어서 이론 교체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과학자들이 (고집스럽게) 반증된 이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이유는, 앞서 뉴턴의 경우에 그랬 듯 그게 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던 숙제가 한 세기 이상 지난 후에 풀려서 이론이 옳은 것으로 밝혀지는 일도 실제로 꽤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반증이 갖는 한계 때문이다.
달의 공전 주기나 천왕성의 궤도가 실제와 다른 것은 이론이 틀려서인가? 아니면 계산에 모든 요소가 포함되지 않아서인가? 보이지 않는 행성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보고 있는가? 반증되는 결과 앞에 서는 것은 이론의 집합체이고 그래서 한 이론을 반증하는 결정적 반증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반증된 이론 조차도 때로는 긴 시간이 지난 후 더 나은 환경에서 재확인 했을 때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는 것이고, 반증된 이론이라고 해서 바로 버리는 것이 합리적인 과학자의 태도가 되지도 않는 것이다.
반증주의의 기준에 따르면 뉴턴을 포함한 유명 과학자들 대부분이 사이비로 내몰리는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과학의 이상론 같은 주장이며, 과학이 굴러가는 방식의 실상은 그와 달랐다.

패러다임론은 과학의 방법론을 근본에서부터 파악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외면으로부터 관찰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파악한다.
즉 '과학의 방법론은 어떠해야 올바른가'라는 측면에서 이상적인 방법론을 찾아 나가는 게 아니라,
현재 굴러가고 있는 과학의 방법론은 어떤 특징을 갖는지 관찰한 후 그 특징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분석하는 방식이다.
먼저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젠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너무 범용적으로 쓰이는 감이 있으나 본래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가진 용어였다.
하나는 전체를 통찰하여 얻은 이론의 '감'이고, 다른 하나는 그 감이 전형적으로 적용된 예제를 뜻한다.
왜 예제와 이론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우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은 복잡한 개념을 예제를 통해서 학습한다'는 인지론적 발견이 훗날 뒷받침된다.
패러다임론이 과학의 방법론을 외부 형태로부터 관찰하다보니 '이론을 공유하기 위해 담아놓은 그릇인 예제나, 그 예제 안에 담긴 이론이나' 한데 묶여있는 것으로 파악했던 셈이다.

이것이 어떻게 돌아가는구나 하는 감은 어떤 전형적인 예제(범례)를 통해 공유된다.
f=ma 가 뉴턴역학을 잘 표현해주고 감을 공유 시켜주는 범례라면
그것이 아인슈타인 역학에서는 e=mc^2인 셈이다.
혹은 모든 운동은 입자간 충돌에 의해 전달된다는 패러다임의 범례는 당구공 충돌 모형이 될 것이다.
즉 패러다임이란 전형적인 예제와 그 예제를 통해 파악하는 전체 형상이라는 두가지를 의미한다.
(내 경우엔 예제는 그냥 예제라는 말을 쓰고 이론을 지칭할 때에만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쓴다.)

'반증 가능해야 과학이다'라는 반증주의의 과학/비과학의 구분 기준은 유명하고, 인기 있다.
그러나 실제의 측면에선 반증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해결되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일이 빈번하기에
'반증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과학이다'가 되어서 저 구분이 유명 무실해진다.
패러다임 론에서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은 반증주의에서 구분하는 기준과는 다르다.
쿤이 제시한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 기준은 패러다임의 통일이다.
역사적으로 한 분야를 명백히 과학이라고 선언할 만한 기준은 패러다임의 통일이었다.

단, 이는 결과적인 이야기이다.
원인의 측면에서는 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어떻게 압도하고 통일할 수 있었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학파간 전쟁이 나서 한 패러다임의 지지자들이 다른 패러다임 지지자들을 모두 살해했다고 치자. 이후 승리한 학파가 학계를 장악한다고 해서 그 학문이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론이 결과를 관찰하는 방식이다 보니 나온 결론인 셈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학적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패러다임 통일이 일어나는 원인은, 특정 패러다임이 여타 패러다임에 비해 퀴즈 재생산을 통한 가치 추구의 미래 수익을 명확히 보여줄 수 있을때 일어난다. 사실상 이는 그 패러다임이 진실에 부합하는 면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는 과학 활동 자체와 직결된다.
패러다임 전환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기, 곧 지배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의 과학활동을 정상과학(normal science) 이라고 한다.
정상과학시기의 과학 활동은 '정답이 반드시 존재하는 퍼즐 풀이'에 국한된다.
즉 이 시기의 활동은, 전제가 되는 이론인 지배 패러다임을 관찰한 현상에 부합하는 옳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소가설들을 찾아 부가하는 과정이다.
지배 패러다임은 연쇄적으로 '이 패러다임이 맞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다'라는 정답이 정해진 문제(=퍼즐)를 내놓는다. 퍼즐 풀이를 통해 지배 패러다임의 세부가 규정될수록 제시되는 문제도 더욱 정교해지고, 이는 연쇄적인 퀴즈의 재생산이 된다.
정상과학 하에서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지배 패러다임이 부정되는 게 아니라 그 문제를 풀지 못한 개인의 역량이 부정된다. 이론이 틀려서 막히는 게 아니라, 연구자가 충분히 똑똑하지 못해서 막히는 것이라는 식이다. 즉 이 퍼즐 재생산의 흐름이 유지되는 한 지배 이론에 대한 반증은 구조적으로 생뚱맞은 것이 된다. (그래서 실제 과학에서 반증주의가 잘 먹히지 않는다.)

따라서 '정상과학 활동이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정답이 있는 퍼즐을 생산해 낼 수 있어야 과학'이라는 기준이 나온다.
이 기준하에선 점성술, 맑시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과학이 아닌 이유는 정답이 정해진 퍼즐을 계속적으로 재생산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근래들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 진화심리학이 과학일까? 초기에 진화심리학이 과학으로 인식되었던 이유는 정답이 있는 문제풀이를 대거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정교한 답이 있는 후속 퀴즈를 내놓는 일에 실패한다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문제풀이 밖에는 내놓지 못하게 되고, 이 때엔 정신분석학과 마찬가지로 더이상 과학이 아니게 된다. 지금에 이르러선 그저 대안 패러다임이 없어서 유지되고 있을 뿐 과학이라고는 할 수 없다.)

퍼즐 풀이가 막히는 시점에 이르러 패러다임은 위기를 맞이하고 혁명기를 거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된다.
패러다임 전환은 언제 일어나는가? (http://longlive.tistory.com/468)
쿤은 구 패러다임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 언제 패러다임을 위협하는 것이 되어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모는지에 대해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 생각에 이는 경제학적인 문제가 아닌가 한다.

normal science의 구간에서 패러다임이 하는 일은 퀴즈 재생산이며, 과학 활동은 그 퀴즈를 기존 패러다임에 부합하게 풀어서 답을 내는 것이고, 퀴즈를 해결했다는 것이 연구자의 가치 추구의 성과가 된다.
현 지배 패러다임이 퀴즈 재생산을 제공하는 능력이 약해지면
연구자의 가치 추구의 수익성이 나빠지고
이에 연구자들이 새로운 수익원에 눈을 돌리게 될 때 구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이 도래한다.
미래에 새로운 수익원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신규 패러다임을 발견하면
설령 그것이 현재의 모든 문제를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단지 구 패러다임 대비 더 나은 지속적 미래 수익이 기대되기만 하면 흡인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거 사례와 비교해보면,
뉴턴의 역학은 (달의 공전주기 계산, 공기 중 음파의 속도 계산, 천왕성의 궤도 계산등에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한세기 동안 끌고 갔지만
이때에도 패러다임은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
이유는 그 기간에도 뉴턴 패러다임은 퀴즈 재생산을 할 수 있었고
학자들은 성과를 발표할 수 있었으며 학계는 정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존재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이상 현상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실처럼 무시되거나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취급받는지,
아니면 패러다임을 위기에 빠트리는 반증 사례가 되는지는
그 이상 현상이 퀴즈 재생산을 막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퀴즈 재생산을 할 수 없고 연구자들이 성과를 낼 수 없을 때에 패러다임은 위기에 빠진다.
지배 패러다임이 안정기일때엔 옳은 이론이라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경제학적 선택이 될 것이다.
(현실 모델로는 현직장이 안정적이면 굳이 이직을 고려하지 않는 직장인들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의 세부 심리도 이들의 심리와 동일 선상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에서만 일어나며 위기 이전에 구상되는 이론은 설령 옳다고 해도 무시된다.
그리고 후에 대안이 되는 패러다임들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이론들의 수정 증보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예시는 지동성-천동설, 플로지스톤이론-산소흡수설, 라이프니쯔의 상대론을 통한 뉴턴비판 등의 전환 사례에서 나타난다.
-상대성이론의 공간과 운동의 상대성은 라이프니츠등의 자연과학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알려져 있는 개념이었고 그들은 뉴턴주의를 상대론적으로 비판했었다.
-지동설은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타코스에 의해서 이미 제안 되었었다. 그러나 학설 중의 하나였을 뿐 천동설이 틀리고 지동설이 옳다는 실험적 근거를 마련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리스타코스의 이론은 훗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밀려야 했다.
-17세기 레,훅,메이오에 의해 진전된 '대기로부터의 흡수를 통한 연소 이론'도 당시 관심을 끌지 못했다. 훗날 플로지스톤 이론에 위기 상황이 오고 라부아지에에 의한 산소 흡수 설이 나온 후에야 과거에 저런 이론이 있었다는 걸 상기하게 된다.
패러다임 전환은 기존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에서만 일어난다는 얘기다. 위기 이전에 구상되는 이론은 설령 옳다고 해도 무시된다.)
가치는 과거 성과가 아니라 미래 수익에 의해 영향력을 발휘한다.
패러다임 전환에 있어서도 구 패러다임이 퀴즈 재생산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서
연구자들이 가치 추구의 미래 수익성이 나빠지는 것 느낄 때 위기에 빠지고,
신 패러다임의 미래 수익성이 흡인력이 되어 연구자들의 선택을 유도한다.

정상과학 활동이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정답이 있는 퍼즐을 생산해 낼 수 있어야 과학이라는 기준은
언제 왜 기존 패러다임이 과학이 아닌 것으로 무너지고 전환되는지도 설명한다.
연구에는 학계가 공동으로 관심을 갖는 흐름이 있다.
여기서 동떨어진 데에 관심을 갖는 연구생은 엉뚱한 짓 한다고 교수에게 혼이 날 것이고,
설령 교수조차도 학계의 이 흐름은 거스르지 못한다.
만약 거스른다면 주류에서 벗어난 기인이 될 뿐이다.
학계의 관심이란 패러다임이 재생산해내는 퀴즈의 흐름을 의미한다.
이 흐름이 이상현상으로 가로막혀서 퀴즈 재생산이 위축될때 이상현상은 못본척 무시할 수 없는 패러다임의 반증이 되며 과학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반대로 성과를 계속해서 낼 수 있다면, 설령 오류가 눈앞에 뻔히 보인다고 해도 그 패러다임은 여전히 과학으로 기능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합치되지 않았고 모순된 면이 있으나 퀴즈 재생산을 계속 낼 수 있는 한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패러다임은 '이것은 전체적으로 이런 원리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통찰의 결과다.
그리고 그 통찰의 결과물이 옳다는 직감을 주는 것은, 그 이론으로부터 파생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맞아들어가는 동안이다.
이때의 직감이란, 가치의 미래수익이 기대된다는 판단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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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전환은 언제 일어나는가?

쿤은 구 패러다임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 언제 패러다임을 위협하는 것이 되어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모는지에 대해 일반적인 법칙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 생각에 이는 경제학적인 문제가 아닌가 한다.

normal science의 구간에서 패러다임이 하는 일은 퀴즈 재생산이며, 과학 활동은 그 퀴즈를 기존 패러다임에 부합하게 풀어서 답을 내는 것이고, 퀴즈를 해결했다는 것이 연구자의 가치 추구의 성과가 된다.
현 지배 패러다임이 퀴즈 재생산을 제공하는 능력이 약해지면
연구자의 가치 추구의 수익성이 나빠지고
이에 연구자들이 새로운 수익원에 눈을 돌리게 될 때 구 패러다임의 위기 상황이 도래한다.
미래에 새로운 수익원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신규 패러다임을 발견하면
설령 그것이 현재의 모든 문제를 다 설명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단지 구 패러다임 대비 더 나은 지속적 미래 수익이 기대되기만 하면 흡인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과거 사례와 비교해보면,
뉴턴의 역학은 (달의 공전주기 계산, 공기 중 음파의 속도 계산, 천왕성의 궤도 계산등에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한세기 동안 끌고 갔지만
이때에도 패러다임은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
이유는 그 기간에도 뉴턴 패러다임은 퀴즈 재생산을 할 수 있었고
학자들은 성과를 발표할 수 있었으며 학계는 정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존재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이상 현상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실처럼 무시되거나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취급받는지,
아니면 패러다임을 위기에 빠트리는 반증 사례가 되는지는
그 이상 현상이 퀴즈 재생산을 막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퀴즈 재생산을 할 수 없고 연구자들이 성과를 낼 수 없을 때에 패러다임은 위기에 빠진다.
지배 패러다임이 안정기일때엔 옳은 이론이라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이는 마찬가지로 경제학적 선택이 될 것이다.
(현실 모델로는 현직장이 안정적이면 굳이 이직을 고려하지 않는 직장인들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들의 세부 심리도 이들의 심리와 동일 선상에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는 과거 성과가 아니라 미래 수익에 의해 영향력을 발휘한다.
패러다임 전환에 있어서도 구 패러다임이 퀴즈 재생산을 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서
연구자들이 가치 추구의 미래 수익성이 나빠지는 것 느낄 때 위기에 빠지고,
신 패러다임의 미래 수익성이 흡인력이 되어 연구자들의 선택을 유도한다.



* 가치 추구의 미래 수익성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이러한 관점은,
사춘기 방황끝에 선택하게 되는 인생관의 경우나
부조리는 어떻게 고쳐지는가에 대한 고찰에도 응용할 수 있다.

학문 패러다임에 있어서는 연구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진리 탐구이고 이 가치 추구의 성과는 패러다임이 제시하는 퀴즈 해결을 통해 얻어진다.
그리고 이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 더 나은 미래 수익성이 기대되는 패러다임이 선택의 흡입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방황기의 인생관 선택은 추구하는 가치가 단일하지 않다.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까지도 방황의 요소가 된다.
그리고 자기가 추구할 가치를 정하고 나면 그것을 기준으로하여 그 가치를 추구하는데에 더 나은 미래 수익이 기대되는 인생관이 흡입력을 발휘하게 된다.

부조리는 어떻게 고쳐지는가? 어떻게 부조리는 개선된 방법론으로 전환되는가? 이 또한 구성원들이 지향하는 추구 가치의 미래 수익성이 새로운 방법론을 선택하게 하는 흡입력이 된다.
현재의 역학관계가 자연히 부조리함을 개선하고 방향을 전환시킬 상태라면 문제는 없다.
문제는 현재의 역학관계가 부조리함에 머무르게 만드는 경우다.
이 경우란 도덕적으로는 옳고, 더 효율적이기는 한데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다른 가치의 측면에서 흡입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될 것이다.
구성원들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이는 이전 세대가 늙어죽어야 교체되는 정도로 잘 바뀌지 않는다.
부조리한 방법론을 위기 상황으로 내몰기 위해선 무엇이 '옳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역학관계를 바꿀 수 없다.
옳음을 강조하는 것으로써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바꾸게 만들 수 없으므로 이 경우엔 구성원들간의 투쟁이 필요해진다.
투쟁으로 부조리를 해결하는 시도는 실패하기 마련이라고 할 때,
해당 부조리로 인해 구성원들이 원하는 가치추구를 수행하는 것이 가로막히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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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맞이 인생관 점검 시간.

내가 인생관으로 삼고 있는 것은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이다.
이때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내가 추구하기를 선호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긍정심리학의 방법을 참조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으면서 가치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뜻은 비교적 명확하다.
그런데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문제다.

흔한 말로 1등을 하기 보다 1등을 유지하는 게 어렵다.
요동치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 운을 타고 반짝하는 퍼포먼스를 내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한번씩은 찾아올 정도로 쉽기에
한번 1등을 하는 것은 운이 좋으면 얻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그 퍼포먼스를 운이야 어찌되든 내 의지대로 언제라도 발휘할 수 있는 진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여태 이룬 적이 없는 더 높은 퍼포먼스를 내도록 하는 것 보다도 중요한 건
내가 과거에 이룬 적이 있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지구력이다.
기본 옾셋을 높이면 최고치도 올라가기 마련이라서 전자는 후자를 연마하다 보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기도 하다.
(발동 확률 값을 높이는 이러한 지구력을 기르려 하기 보다
여러 번의 시도로 낮은 발동 확률을 극복하려고 함으로써 최고의 퍼포먼스 즉 대박이 얻어 걸리길 바라는 것을 두고
요행수를 추구한다고 한다.)

가치가 현실에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지구력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것은 미래에 기대되는 가치, 즉 기대 수익이며 기대 수익은 안정성과 성과의 곱이기 때문이다.
항상 안정적인 성과를 내는 지구력은 단발성 성과에 비해 기대 수익을 엄청나게 높여주기 때문에 현실에 발휘하는 영향력도 굉장히 커진다.
해리포터를 쓴 조앤롤링은 어떻게 큰 돈을 벌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녀의 엄청난 원고료는 시리즈물에서 안정적인 수익성이 반복 예상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령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 처럼 인생 단 한번의 걸작을 쓴 사람은 설령 그 한권의 작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조앤롤링처럼 높은 고료를 받을 수는 없다.
과학이 왜 그토록 높은 대우를 받는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예다. 과학은 현재 다른 어떤 학문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공헌한 정도의 총합을 두고 따진다면 짧은 과학의 역사보다 종교나 인문학이 훨씬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과거에 이룬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래에 기대되는 가치 수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 번 해낸 것이 한 번에 그칠 때와 그것을 숙달하여 언제라도 내 뜻대로 해낼 수 있을 때의 효과 차이는 상상 이상이다.
한번도 해낸 적이 없는 것을 한번 해내면 뭔가 엄청난게 바뀔 줄 알았는데 막상 이루고 보니 별거 없더라며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겨우 한번 이뤘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번 이룬 성과에 매달리거나 실망하지 말고 그것이 어쩌다 얻어 걸린 것이 아닌 내가 내 뜻대로 언제라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되도록 숙달하고, 또한 망각과 노화 요인조차 극복하도록 시스템을 구성하여 성과를 유지한다면 그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된다.
지금까지 내가 해낸 적이 있는 것 중에 최선의 성과를 목표로 잡고,
그것을 운에 좌우되지 않고 언제라도 해낼 수 있도록 허술한 지점을 보완하고 반복하여 숙달하고 시스템화 할 때 그것이 가치를 만들고 성공을 만든다.

'가치를 찾고 가치를 만든다'는 것은
내가 추구하기로 선택한 가치를 생산하기를 반복 지속하여 숙달 및 시스템 구축함으로써 미래에 언제라도 내 의지대로 이 가치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환경적 우연에 휘둘리지 않고 내 자유의지를 확장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내는 성과는 외부 환경적 우연 요소의 영향과 내 자유의지의 영향이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과 환경 요소에 휘둘리는 것을 줄이고 내 의지로 언제라도 성과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내 자유의지의 효과를 확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숙달은 가치의 미래 기대 수익을 안정적으로 높여주며 그로써 현실에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흔히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 '성과를 추구한다,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에 대비되어 쓰이는 뉘앙스를 갖곤 하는 이유도 이러한 이해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나는 내 아이가 자기가 추구하기를 선호하는 가치를 파악하도록 할 것이며, 그러한 가치를 운이 아닌 자기 의지대로 항상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지구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고자 하는 방식이며 물려주고자 하는 방식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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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해 논한 2010년 캐시모어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현실은, 우리가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이 우리가 파리나 박테리아 수준으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설탕 한 줌이 자유 의지가 없는 수준으로 우리도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고 그 법칙은 자유 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말은 넌센스다.
자연의 법직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가 관찰 할 수 있는 현상을 관찰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학도 그의 관찰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찰하고 그의 역학을 완벽하게 설명하여서 대표적인 예시로 사용했던 역학현상에서 조차도
'항상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들이 있었다.
이는 후에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위기로 내몰고, 뉴튼 역학에 의해 해석되며,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뉴튼역학도 뉴튼이 관찰한 범위 안에서는 올바른 동작을 했다.
광속도에 근접한 계에서 자연의 법칙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 설명한 자연의 법칙은 전 우주에서 동일하게 동작하지만
뉴튼이 관찰했던 조건과 환경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뉴튼 역학을 완벽하게 보여줘서 뉴튼이 대표적인 예시로서 사용한 계에서 조차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법칙이 있었다.
이는 역학뿐 아니라 과학의 모든 패러다임이 마찬가지다.

패러다임은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형상을 만든다.
('세계는 신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뱀과 코끼리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는 섬이다.')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의 탐구활동은 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어서 전체 구조물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활동이다.
('세계를 떠받치는 코끼리는 몇마리인가?')
과학의 발전은 특정 패러다임 하에서 이미 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전체 구조 자체를 합당한 구조로 파악하는 것이 발전이다.)
현재 따르고 있는 패러다임이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캐시모어 논문의 저 마지막 말은 설탕 한줌에 대한 자연의 법칙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상정한다.
이는 과학은 완성되었으며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고 자신하는 것과 같다.
오산이다.
진짜 현실은, 자유의지를 논하기엔 설탕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과학이 '인간은 오토마타이며 의식은 그 로그파일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놓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항상 관찰하는 자의식과 자유의지는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명백히 관찰되는 현상은 그 자체로 패러다임보다도 한 단계 위의 확실성을 갖는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장차 무엇이 현재의 패러다임을 위기로 내몰고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이끌어 낼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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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상대로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1. 놀이방 안에 풀어놓고 뭘 하고 놀라고 지정함.
한두시간 후 이제 다른 거 해도 된다고 함.
2. 놀이방 안에 풀어놓고 하고 싶은 거 하고 놀라고 함.
한두시간 후 이제 다른 거 해도 된다고 함.
다른 거 해도 된다고 했을 때, 1번 집단 아이들은 하던 놀이를 바꿨다.
그러나 2번 집단 아이들은 다른 거 해도 된다고 하는 말에 아예 신경 자체를 쓰지 않고 하던 것을 계속 했다.
일이나 공부가 아닌 놀이라고해서 다 같은 놀이가 아니라
'뭘하고 놀아라'고 시키면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아닌 것을 하게 된다는 얘기다.

지시받은 것에 회의를 갖게 되는 반항기는 자유의지 발달 과정에서 반드시 온다.
그래서 자식은 뜻대로 가르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개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어서
역으로 아이 입장에서 보면 미숙한 자유의지로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자유롭고자 한들 배운 것의 한계를 넘기란 힘들어서
배운 것보다 더 나은 것은 하지도 못하고
기껏 할 수 있는 게 약간의 반항인 정도가 된다.
자유롭고자 하더라도 모방 하고 싶은 욕구로 인해 보이는 행동이 유도된다.
선택도 환경에 제한을 받아서 책이 많이 보이는 환경에서는 책을 읽게 되는 것처럼 환경 조성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한번 선택한 것을 계속 고수하려고 하는 성향은 아이에게도 유효하여 영향력은 지속된다.

내가 아이에게 가르친 것들은 아이가 기존의 방침을 회의하는 시기에 검증을 받게 될 것이다.
'시킨 것'은 회의하는 시기에 다른 가능성들에 의해 선택에서 밀려나기 십상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것은 회의하는 시기에도 계속되거나 다른 것들을 검토한 후 결국 회귀하게 되는 우선권을 갖는다.
그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모방과 환경조성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내가 이런 얘기를 했더니 마누라가 그걸 아는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게임하느냐고 했다.
이제 다시 책을 잡아 봐야겠다. 예전에 '아이를 키운다는게 영혼을 살찌우는 일 같은 걸줄 알았는데 생명활동을 유지시켜주는 일이더라'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그 시기를 지나온 느낌이다.
내가 가르친 것이 여타의 정보들과 경합하여 회의하는 시점을 거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흡입력 있는 것으로 만들어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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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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