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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피엔스에서는 현 시대를 자본주의+유럽 낭만주의라고 설명한다.
현시대 관념에서 행복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돈을 써서 뭔가 사서 경험을 주입한다. 구매품이 보석이든 여행이든 행복을 위한 사치품 구매다.
그러나 사치품은 곧 필수품이 되고 필수품을 위해 돈벌이에 더 붙들려야 하는 사치의 덫에 걸리게 된다.
행복을 위해 뭐 하나를 더 사면 그로 인한 행복감은 얼마후 무뎌지고 행복감을 재주입하기 위한 다음 지출이 필요해져서 모든 사치재는 필수재가 된다. 필수재가 많아질수록 놓은 생활비가 되어 그것을 위해 벌이에 매이는 강제성이 올라간다.
이는 무거운 생활비를 족쇄로 찬 노예와 같다.
'행복하고 싶으니 나에게 선물' 같은 것은 결국 생활비를 높이는 사치의 족쇄를 하나 더 차는 격이라 역효과이고
행복을 위해서는 오히려 사치의 족쇄를 줄여야 한다.
돈과 행복의 관계를 통계적으로 비교할 때
사치비 포함 생활비를 기준으로 몇 년치의 생활비 여유가 있는가를 본다면 돈과 행복의 비례는 강해질 것이다.
가령 어떤 디오게네스가 자기는 행복해지는데 돈이 전혀 필요지 않다고 한다면 그건 그의 생활비가 0이기 때문이다.
생활비가 높을수록 돈 때문에 일하는 강제 노역의 측면이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기반으로 할 때 "행복이 부족할때 사치품을 소비한다"와 같은 판단의 방향이 바뀐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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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간사회는 자본주의라는 공법위에 지어져서 인류 공조가 동작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성장율 위에 존재한다. 성장율이 없으면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신용이 축소되어 자본주의는 붕괴한다.
그런데 성장율은 지수 상승이다. 지수상승을 감당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계속해서 성장 속도가 가속되는 지수 상승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인구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거나 노예해방 여성해방 등 숨어 있던 경제 인구를 끌어내서 지수적으로 늘리거나 하지 아니면 노동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경제의 지수적 상승을 감당하는 주축은 지속적으로 발전 속도가 빨라지는 과학 기술이다. 자본주의의 생존은 기술 발전에 달렸다.
지수 상승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 기술은 결국 특이점을 만나게 된다. SF에나 나오던 키워드들이 최근 수시로 뉴스에 거론되고 있다. 이는 지수 증가 속도로 가속된 기술의 발전이 그간 내가 살아온 속도 감각을 추월하는 속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초전도체
핵융합
양자컴퓨터
인공자아
노화역전
이모탈이 머지 않았다.
지수 속도로 가속되는 성장과 빈부격차가 지금 이대로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레이트 리셋'을 말한다. 지속 불가능하니 기존의 질서가 무너졌다가 새로 시작해서 지금 같은 과정을 다시 밟지 않겠느냐는 거다. 난 그 반대쪽에서 기술에 의한 생산성의 가속 끝에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는 특이점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특이점을 통과하면 관찰 대기하던 외계인이 나타날 것이다.
지구에 지성체 등장후 10만년 이내,
문명의 시작 후 만년 이내,
우주 탐사 시작 후 백년 이내인 우주 역사상 찰나의 시간 만에 인공지능 혹은 노화역전으로 지성체가 더 이상 그냥 인간이 아니게 되는 특이점의 징조가 조금씩 보인다. 천년쯤 더 걸린다 해도 대세엔 차이가 없으므로 138억년 우주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만날 수 있는 지성체는 확률상 반드시 특이점 이후의 존재다.
또한 지성체 특이점 vs 유인 성간 여행의 난이도를 비교해 보면 백년쯤 사는 생물이 수십~수만 광년 거리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웜홀이나 아광속 이동이 필요한데 이게 인공지능이나 노화역전 보다도 멀다. 항성/은하간 여행은 지성체가 이모탈이 되는 것보다 테크 레벨이 높은 것 같다.
따라서 만날 수 있는 외계인은 이모탈이라고 볼 때 그들 기준 더 큰 규모의 협력 확장을 위해선 지구 문명이 특이점을 통과할 때까지 대기하며 관찰하는 것이 개연성 있다. 여전히 '생존과 번식'을 최대동기로 하는 특이점 이전의 인간은 '인간은 고래보다 가볍다'만큼이나 명확하게 종의 한계를 넘지 못하기에 특이점 너머 지성체의 협력 대상으로는 부족하다.
지구 식물의 역사는 30억년은 되므로 지성체가 생명탐사를 했다면 이미 옛날에 와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기네 기준으로 판단하여 특이점에 도달할 가망이 없는 2억년 묵은 공룡을 멸종시켰다는 SF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특이점을 지났을 때에 외계인이 등장할 것이다.
세포에서 우주사회까지 통합의 연쇄가 이어질 것이다.

어쩌면 허황된 이 이야기는 세상을 더 재밌는 곳으로 만든다. 살아봤자 그저 그뿐인 곳일수도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꿈꾸고 싶은 것도 별로 없는 곳이 될 수도 있는 이 세상이 한없이 꿈꾸기에 충분할 만큼 넓은 곳이 된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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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의 힘은 지능과 도구보다도 협력하는 머리 수에 달려 있다. 일당백의 개체에게 이백명이 붙어서 이기는 다구리 전략이 인간의 방식이다. 다른 동물 대비 초월적 숫자의 협업이 가능해지는 포인트는 패러다임의 공유에 있다.
지성체의 시작은 상상력이다.
상상으로 실제에서 속성을 분리 변화시킬 수 있게 되면서
추상화가 가능해지고
추상화를 통해 개념을 만들고
개념들로 기술공법을 만들고
거대 협력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기술공법을 발전시켜 더 크게 협력하는 것이 사피엔스 종의 힘이 폭발한 기점이었다.
개념들이 연결된 설계를 통해서 인간 군체는 기능들이 협력하는 구조가 되었고 그 결과 다수 협력이 가능해졌다. 사실 협력보단 부속물로 기능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어떤 부속물들은 착취를 당하는데 그들에게 협력이란 표현은 맞지 않을 테니까.
이는 인간성이 좋고 인맥이 좋다는 수준에서 개인들이 저 사람 마음에 드니 돕고 싶다는 친분과 개인적 신뢰로 이루어지는 협력이 아니라, 개념들로 만들어진 아키텍처 상에서 각 사람들이 배분 받은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협력이다.
(크리스탈 진동 시에 1씩 올라가는 카운터 숫자를 시간 개념으로 약속하고 그에 맞춰 각자 맡은 동작을 해서 인터페이스에 약속된 값을 주고 받는 프로그램들을 생각해보자. 역할을 기반으로 한 이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카운터의 값을 시간으로 다루기로 약속하는 개념으로 이루어진 아키텍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고나 가치 생성시에 카운터가 올라가는 돈이라는 개념도 클럭과 마찬가지로 약속에 의해서 사회 아키텍처 상의 개념으로서 협력에 사용된다.)

사피엔스가 픽션을 신봉할 수 있게 되어서 문명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상상력이 실제들의 위에 abstraction layer를 까는 효과를 내서 추상화된 개념을 다룰수 있게 된 것이 인지혁명이고
개념들을 가지고 현실에서 동작하는 구조를 만드는 기술공법을 만들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기술공법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강력해졌다는 뜻이다. 개미나 벌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구조의 사회를 따르는 대신 추상적 개념으로 이루어진 공법을 따르며 그 공법을 발달시켜 갔다는 점이 차이의 핵심이다.
사회 구성의 패러다임에 대해 기술공법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기술공법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체계를 세우는 방법인 건축 공법, 논리적 체계를 만드는 SW 공학의 공법, 반도체를 만드는 공법. 기능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공학기술적 방법처럼 인간 무리를 기능들이 협력하는 사회로 만드는 방법도 공법이다. '공법'은 '현재의 결과물을 만드는 가장 발전한 기술이나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며 기술은 계속 변화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하라리가 말하는 '픽션'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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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세포군은 작은 자아를 형성하고
그 소자아들이 통합되어 한명의 인격을 형성한다.
의식에 특화된 뇌세포와 시각에 특화된 뇌세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균질한 일반 뇌세포가 위치에 따라 분업한 업무를 처리하면서 그들이 모여 인격으로 통합된다.
통합된 표층 의식에 대비하여 각 기능을 하는 세포군의 작은 의식들은 무의식이지만, 무의식이 의식으로 통합되는 과정은 이분법적이지 않고 점층적이다. 반구 정도의 규모가 되면 그것만으로도 (반구가 소실된 사람이 정상인 생활가능할 정도로) 거의 한사람분의 의식을 갖으며 이를 두개 통합해서 한명의 의식이 완성된다. 뇌량이 끊어진 사람이 왼손이 집는 물건을 오른손이 쳐내는 행동을 하는 것을 바탕으로 볼 때 반구 규모에서의 의식 통합은 좌반구와 우반구 각각의 의식중 서로 동의되는 일부는 표층 의식으로, 동의되지 못하는 일부는 억제되어 무의식으로 남는 형태다. 더 작은 기능군 단위에서의 통합도 이와 같을 것이다.
(사회의 표면적 지향점과 내부 구성원 개개인이 얼마나 진심인가는 다를 수 있듯이 의식이 지향하는 바와 그 구성원인 자아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설득되어 집중하는가는 다르다. 구성원인 소자아들이 진심으로 설득되지 않으면 소위 억압된 무의식이 되어 스스로를 방해한다. 소자아들의 의식인 무의식은 의식 없이 자동화된 행동인 습관으로 표출된다. 무의식적 습관을 진압하여 통합된 의식을 따르게 하려면 의지가 쓰이는데 의지는 빠르게 소모된다. 의지 소모 없이 소자아를 전부 통합시키기 위해선 습관을 들여야 한다. 습관이 들어서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무의식의 소자아들에게 뿌리내릴때 집중된 역량이 나온다. https://longlive.tistory.com/m/858
분석심리의 무의식과 페르소나가 설명하는 현상들을 이 관점에서 재해석할시 어지간히 들어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간은 한명의 인격으로 통합이 완성되는 생명체가 아니다. 시선, 눈빛, 표정, 태도와 해석기관등 인간은 속내를 겉으로 까발리는 데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했고, 고독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문명 이후 부터는 뇌용량 축소를 일으키며 인간의 지능은 사회의 일부로서 진화했다. 뇌세포가 인격으로 통합되는 것처럼 개인도 기능을 수행하면서 무리의 인격을 이룬다. 나는 나의 군체고 나는 군체의 일부다. https://longlive.tistory.com/m/859

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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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읽어줄 책을 궁리하며 내가 좋아하는 책 목록을 살피다가 앵무새 죽이기를 봤다. 어릴때 좋아하던 책 세 권 안에 드는 책이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이걸 읽어줄까 하니 망설여졌다. 그것이 좋은 사상인지 이젠 회의적이다.

아들이 매미 사냥이 한창이다. 매미도 해충이니 모기를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매미를 채집통에 잡아둬서 때론 죽고 죽은 걸 해부까지도 해봤다고 한다. 아이가 잔인함에 익숙해지지 않길 바라며 가학성이 생기지 않게 막는 데에만 신경쓰고 있다.
작은 날파리와 큰 매미, 두 날벌레를 죽이는 것 간의 차이는 객관적으론 단지 크기 차이일 뿐이나 잘 보이고 보이지 않는 크기 차이로 인해 주관적으로 느끼는 잔인함과 느낄 수 있는 가학성에 차이가 생긴다. 가학성을 말리긴 하나 딱히 매미를 날파리보다 중히 여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날파리의 생명조차 소중히 여길 정도의 섬세한 도덕감수성이 진정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벌레 한마리의 생명조차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벌레 생명 같은 건 신경쓰지 않는 사람'보다 만나서 상대할 때 선한 사람일까? 내가 보아온 바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실생활에서의 선함이란 내 뜻이 막힐 때 참아내는 인내력 같은 것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은 종종 내 뜻을 가로 막는 것을 참는 인내가 부족하여 대상을 불의로 규정하는 자이기 쉽다.
실제 선함은 꼬치꼬치 도덕을 따지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신경 거슬리는 감정을 소화해 버릴 수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
벌레 한마리의 생명은 소중히 하나 타인의 행동에 쉽게 신경 거슬려 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꼬장꼬장해 보이지 선해 보이지 않는다.
도덕적 꼬투리로 잔소리 잘하는 불편한 네티즌은 선함과 거리가 멀다.
난 이제는 올바름에 대한 집착을 좋아하지 않는다. 올바름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사람중에 착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해치지 않는 이를 괴롭히지 말라는 앵무새 죽이기의 교훈이 나무 피를 빠는 매미에게 적용되는지는 애매하다.
하지만 아들이 나무 사랑으로 매미 사냥을 하는 것도 아니겠지. 곤충 채집 관찰일 뿐. 매미 사냥은 앵무새 죽이기 책이 불러 일으키는 섬세한 올바름을 찬미하는 감정의 반대편에 있는 '도덕의 작은 구석을 개의치 않는 무감각함'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채집 관찰을 위해선 벌레의 생명까지는 보살피지 않는 둔감함.
그 둔감함에 주의를 주고 섬세한 도덕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아이를 선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올바름에 대한 집착은 실리적 업적은 고사하고 도덕적 업적 조차도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명분을 논쟁하여 무엇이 올바른지를 아는 것이 의미있는 일인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덕 명분 따지는 사람은 그저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일 뿐이다. 실제 선함이란 그와 전혀 다른 인내력의 영역이다. 올바름에 대한 수많은 논의는 사회를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
아동 인권을 꼬치꼬치 따진 결과 교사는 허수아비가 되어 죽고 공교육은 무너졌다.
범죄자 인권을 꼬치꼬치 따진 결과 경찰이 허수아비가 되더니 어제 오늘은 묻지마 칼부림이 폭증했다.
올바름에 대한 집착은 공공을 망가트렸고 빈부격차의 경계를 공공의 위쪽에, 사적으로 치안과 교육을 감당할 수 있는 계급과의 사이에 그어 버렸다. 공공이 잘 되어 있던 나라에서 공공이 낮은 곳 귀퉁이의 불평등 경계까지 품어줘야 한다고 공공의 커버리지를 풍선처럼 잡아늘린 결과 찢어졌고 공공이 파손되니 자력구제 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경계가 높은 곳에서 그어지는 상황을 보고 있다.
올바름을 명분으로 하는 PC니 인권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내겐 이젠 도덕적 성과조차 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흑인 민권 운동 시대의 대표작 앵무새 죽이기에 대한 감상도 달라질 수 밖에.

길러내야할 선함의 본질은 꼬치꼬치 따지는 도덕 논쟁이나 섬세한 도덕 감수성이 아니라 신경 거슬리는 감정을 소화해 버리는 인내력이다. 그런 인내력은 선할 수 있는 힘일 뿐만 아니라 때론 독기가 될수도 그릿이 될수도 있는 힘이 된다.

그 능력의 여부가 올바르니 그르니의 잣대보다도 실제로 좋고 나쁜 것을 가른다. 데미안은 악마의 표상이지만 저열한 악과 달리 싱클레어에게 긍정적인 존재일 수 있었다. 반항이 혁신이 될 수 있고 규범 준수가 구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실제로 훌륭하고 좋은 것과 저열하고 나쁜 것은 선악이니 올바름이니 하는 차원과는 다른 펙터에 의해 나뉘기 때문이다. 그 다른 펙터에 의거한 관점에서 볼 때, 데미안 식으로 말해서 선악은 통합된다.
실제로 좋은 것. 즉 실리적 성과와 도덕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자 실제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올바름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역량을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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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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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언지교, 무위자연.
도덕경이 말하는 도의 핵심이다.
개념으로 편집하여 인식하지 말고
작위적으로 짜맞춰서 의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배우라.

이 가르침이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 이유는 학습의 효율성 때문이다. 효율적인 학습은 익숙한 프레임의 구조를 차용한 상태에서 빈 공간을 새로운 개념으로 채워넣을 때에 가장 효율적이다. 초기 입력받는 지식들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이것이 어떤 형태와 구조를 갖는다는 패러다임을 형성하고(즉 '감을 잡고') 이후 입력받는 지식들은 그 골격에 맞춰 빈곳을 채워넣을 때에 이해력이 올라가고 개별 지식의 중요도를 구분하게 되고 기존지식과 연결점이 많아지면서 기억력도 올라간다. 그렇지 않으면 단편적 지식의 나열인 것처럼 아예 기억 자체가 잘 되질 않아서 학습효율이 떨어진다. (체계화해서 감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지, 감 못잡은 상태로는 기억도 잘 안된다.)
프레임을 따라 배우는 방식이 편견과 오해를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그 해악보다 효율의 강점이 컸기 때문에 도덕경의 방식은 세상을 지배하지 못했다.
오히려 프로파간다와 세뇌가 이 프레이밍의 기술을 이용해 별 쓸데 없는 것들을 효율적으로 입력시키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불언하고 무위하는 것은 고의로 외곡해서 짜넣는 프로파간다 입력에 대해 오류를 검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의의를 갖는다.
입력의 진위를 의심할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필요한 능력, 가령 직업적 기술과 지식을 학습함에 있어 효과적인 학습이 필요하다면 전체 구조의 프레임을 먼저 세워야 한다. 세상의 많은 구조가 대체로 유사하다. 기존에 익혀둔 다른 구조중에 유사한 것을 찾아 대입하고 빈틈을 채워 넣는 학습을 한다.
프레임 잘 짜서 입력해 주는 지식이 과연 진실인가 의심할 때에는 불언 무위하여 있는 그대로를 본다.
간단히는 '이게 내가 돈을 벌기 위한 지식인가'로 구분된다.
나를 가르치는 게 저쪽의 이익이 되는 프로파간다 광고인지 내 이익을 위한 지식인지는 돈의 흐름에 나타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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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처우'나 '교사의 권리' 따위엔 아무 관심 없다.
교사의 권리라서 바꿔야 하는 게 아니라
시궁창에 빠진 공교육을 건져올리는 데에 교사의 권한 확립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바꿔야 하는 거다.
경찰은 총 쏠 수 있어야 하지만 경찰의 권리나 처우 개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치안 확립을 위해서다.
권한이 있어야 책임을 질 수 있으니까.
반골기질 가득한 무정부주의자들이 공공이 개인을 억압하는 체제인줄만 아나본데 교권이 무너지고 나면 학생 인권은 다른 양아치 애새끼들에게 넘어갈 뿐이다.
무정부의 정글에 낙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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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자라는 걸 보면 '바람직하나, 과연 내가 키운 성과인가?' 의문이 든다. 내가 의도한 게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키우는 것 같다.
가령 건강이나 공부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정보를 묻길래 알려준 것 뿐인데
애가 그걸 고려해서 하고 싶은 것을 절제하는 판단을 내릴때 그렇다.
첫째애는 노는 게 즐거운 자기가 판단의 주체인데 둘째는 자기를 키우는 자기가 판단의 주체인 것처럼 행동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자기를 키우는 것 아닌가?'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일은 아이가 스스로를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관점에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부모가 너무 열심히 키우면 양육자로서의 역할이 아이 안에 남지 않기 때문에 아이의 판단 주체가 경험하고 느끼는 자아에 치우치는 것 아닐까? 노는 자아가 놀고 싶은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거지.

난해한 딸도 '자기를 키우는 자기'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보려고 한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아직 세세히 모르겠다. 다만 이 관점을 견지한 상태로 상황들을 대해 보려고 한다.
'내가 키운다'라는 생각을 품지 않고 '내가 돕기는 하는데 근본적으로 너는 니가 키워야지'라는 생각으로 한발짝 물러나, 부모 스트레스도 덜 받고 좀 방만하게.
첫애라서 적극적으로 키운 결과가 역효과이지 않은가 의심된다.

첫째가 내가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는 각종 예체능 쪽으로 공부 빼고 다 잘하는 걸 보면 이 '경험하는 자아의 관점에 충실한' 것도 나름 장점이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이런 애는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으니 내가 대응 가능한 폭 안에서 최선은 아이를 자기 자신의 양육자로 만들도록 몰아보는 것이 될 것 같다.
사실, 지 인생 지가 책임지는 것 아닌가.


'정답을 알려주고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스스로 들도록
칭찬과 인정을 주는 것'을 지침으로 유지한다.
잘한다는 것은 여러 갈래이니 당장 즐겁기보다 장기적으로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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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학습과정과 그 결과물로 나눠서 생각해보자.
산수 숙제를 하는 것은 과정이고 그걸로 얻는 연산력은  결과물이다.
태권도 품세를 연습하는 것은 과정이고 그걸로 얻은 품세 숙련도는 결과물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하던 것을 연습해 몸에 익히는 것은 결과물의 효용성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어릴적 나 자신은 결과물만 중시했던 것 같다. '그거 익혀봤자, 굳이'라고 생각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여 숙련도를 높이는 것이 낫지 팔방미인이어봤자 막상 주력으로 쓸 재주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아이에게는 아무거나 배워라, 배우는 과정 자체가 학습력에 대한 학습이다 라는 입장으로 대하고 있다.
종이접기를 열심히 하는 것이나
틈만나면 태권도 품세 연습을 하는 것이나
별 쓸모없을 것 같은 한자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나
악기 연주 하는 것
그 결과물의 효용성은 별거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 자체를 어렵게 여기지 않게 된다. 작은 틈새 시간까지 이용해서 익히는 습관이 붙게 된다. 학습능력 자체를 학습한다.
누군가는 배우고 익히기를 어렵고 지겹게 여겨 킬링타임을 하는 습관이 붙을 때 아무거나 배우기를 거듭해온 아이는 학습이라는 것의 템플릿을 숙달한다.
인공지능의 발전을 고려했을 때에도 학습능력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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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크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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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미래지만 언젠가 인생 2막을 연다면 무엇을 할 지 생각했던 적이 있다. 막막했다. 너무 막막해서 다른 각도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람은 생산적인 일을 해야 인생을 견딜 수 있다.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건 성취가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거다.
기술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고, 운을 대하는 세가지 방법으로 나는 성공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이다.
어떤 기술을 익히며 살아갈 것인지는 이미 하고 있는 일을 기반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접근하면 해나갈 일이 있다. 그러나 인생 2막에 무슨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막연해진다. 지금 하는 일을 내려놓고 제로베이스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걸로 보이게 된다.
성공을 향하는 세가지 능력을 연마하다보면 길은 열릴것이다.
그것이 조직내에서의 승진이건,
어디에서라도 팔릴 기술을 지녀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이직의 경쟁력이건,
아이템을 발굴하거나 기술 협력으로 공동 창업하여 사업을 하는 길이건. 어느 길이라도 열릴 것이다.
성공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 전력을 다해보자.

사춘기 아이에게 진로를 고르라고 말한들 막막할 것이다. 어른조차 막막하니까. 아이에게도 이렇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공의 열쇠는 기술 사람 운 이 세가지를 다루는 방법에 있다고. 운을 다룸에 있어 미래를 그리고 기쁨을 느낄 때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진로에 반영되는 효과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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